79:1-3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 여기서 선지자는 성도의 입장에 서서 성전이 더럽혀지고 예루살렘성이 훼파된 것을 탄식한다. 2절, 3절에서는 성도들이 무참하게 살육을 당하고 그 시체가 땅에 딩굴어서 매장될 수 없음을 탄식한다. 거의 모든 단어들이 이런 교회의 원수들의 잔인함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유대땅을 자기 백성의 소유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 땅이 이방 백성들에게 빼앗겨 여지없이 짓밟힘을 당하고 그들 마음대로 황폐케 되어 버렸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라는 말 속에서 자연의 질서가 사실상 뒤엎어져 버렸음을 탄식한다. 그가 2절에서 말하는 성전의 멸망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됨으로써 땅 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사라지고 종교가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었던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이 말은 무시무시한 멸망을 의미한다. 성전을 더럽힌 것과 거룩한 성을 멸망시킨 행위 속에는 마땅히 원수들을 향해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킬 만한, 감히 하늘을 향한 불신앙이 포함되어 있다. 선지자는 그들에 대한 말로 서두를 시작하여 성도들의 살율을 당한 사실을 곧이어 진술한다. 이런 핍박과 극심한 잔혹성은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시체를 묻지 않고 짐승과 새들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이 지적해 주고 있다. 죽은 사람의 매장을 거룩하게 여기고 원수라고 할지라도 무덤에 장사되는 영광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아름다운 전통이었다. 그러므로 죽은 시체가 짐승들에게 찢기고 삼켜지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야만적인 자들을 잔인스러운 짐승들로 취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사람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라는 말씀은 이 핍박자들이 보통 원수들보다 훨씬 더 잔인하여 그 이상 가는 자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이 귀절에서 살육하는 그들이 피흘리기에 만족하지 못할 만큼 갈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는 말씀은
죽음 당한 자의 형제나 친척을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 그 성에 살던 자들은 자기들 앞에 나서는 모든 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분별없는 적들의 침입에 놀라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매장을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의 증거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에게서 죽은 이후에 매장되는 권리를 빼앗아 버리는 것은 이중으로 모욕을가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주 이런 형벌로 버림받은 자들을 대하셨는데 왜 자기의 백성들이 짐승의 밥이 되도록 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버림받은 자뿐만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까지도 육신에만 국한되는 일시적인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유일한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진노의 수단이 되는 그 형벌을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꾸신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해석이 죽은 이후에도 매장되지 못했다는 말씀에도 해당된다. 하나님의 가장 뛰어난 종도 잔인하고 무참한 죽음,
즉 우리가 흔히 살인자나 기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형벌로 아는 죽음을 당할 수 있다. 성도들일지라도 반드시 훌륭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또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노를 일으켜 성도들로 육신적인 부당한 핍박을 당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기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살펴보신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에게 분노의 표적을 내리시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그들을 묻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한 왕을 위협하여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밖에 던지우고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렘 22:19, 36:30참조)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그처럼 모욕저긍로 대하신 것이 그 당시에는 마치 그들을 버린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은 구원을 베풀기 위한 수단으로 바꾸실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의 믿음은 이런 시험을 이기고 새로운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옛날에 죽은 자들의 몸에 기름을 바른 것은 이 예식을 통해 후대 사람들의 생활을 위한 교훈을 주고자 하는 것이며, 시체를 조심스럽게 보관한 것은 그들에게 보다 나은 생활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해주려는 의도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매장을 당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손실을 보지 않으며, 이런 하찮은 도움을 훨씬 능가하는 믿음으로 부활할 때에 빠른 걸음으로 축복된 영원 불멸의 세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79:4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 여기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자극시키기 위한 또하나의 탄식이 언급되고 있다. 악한 자들이 점점 더 교만해져서 우리를 조롱하고 넘어뜨릴수록 우리는 구원이 더 가까이 임박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심히 교만하고 오만한 행위를 하는 것을 그냥 보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비방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사야 선지자도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니라"(사 37:22,23)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웃'은 분명히 배신자의 무리 또는 아브라함의 타락한 자녀들과 원수들의 종교에 절했던 자들로서 이 불쌍한 백성을 괴롭히고 비방할 때 하나님도 모독하기를 쉬지 않았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성도가 탄식하는 것은 혼자 개인적으로 조소를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간접적으로 반항하는 것을 보니 탄식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는 이와 비슷한 탄식을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5-9).
79: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나는 이미 "어느 때까지"라는 말과 "영원히"라는 이 두 표현이 함께 연결될 경우에는 오래 되고 중단되는 일이 없는 환난을 가리킨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앞을 내다보았을 때에 자기들이 당하는 일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귀절에 나오는 탄식이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시작된 후 1,2개월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계속되는 환난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지루함으로 성도들의 마음이 거의 파탄되어 버릴 때까지 계속될 것을 말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큰 환난의 축적이 하나님의 분노를 연상하도록 했다고 고백한다. 악한 자들이 무엇을 꾀하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한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음으로써 그들은 이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원리로 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이방 원수들에게 자기를 핍박하도록 그 범위를 허락하셨을 때에는 하나님의 분노가 크게 자극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생각이 없었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손을 뻗치사 자기들을 원하시리라는 소망을 갖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고삐에 묶인 사슬을 풀어 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찍을 갖고 찾아오실 때마다, 우리의 양심이 자신을 책망할 때마다 우리가 특별히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게 된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옛 백성들은 하나님을 부당하게 멸시하시는 분으로 비난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마땅한 형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항상 자기 종들에게서 그들을 연단시키기 위한 정당한 근거를 찾으려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자신의 긍휼을 베푸심으로 그들의 죄는 용서하시되 십자가를 지게 함으로써 용서하시는데, 이는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함을 나타내시는 것과는 다른 목적에서이다. 욥과 같은 인내로 단련시키고 그 순교자들은 영예로운 복지로 초대하기를 허락하심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이 귀절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올라서서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이 자신의 죄 때문인 것으로 그 이유를 찾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볼 때 이 시가 기록된 것은 바벧론 포로로 잡혀갔을 동안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분명해진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학정 아래서는 우리들이 이미 살펴본 대로 다른 형태의 기도를 드렸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시 44:17,18)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반항하여 불만을 터뜨린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이 말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자기들의 죄악에 형벌을 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 다른 목적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런 극심한 환난을 수단으로 해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고귀한 부르심에 대한 상을 예비해 주신다.
79:6-7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주의 노를 쏟으소서 - 분명히 이 기도는 사랑의 법치과 모순이 된다. 우리는 환난에 대해서 괴로움을 느끼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할 때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건짐받기를 바라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여기에서처럼 행여나 불신자들이 구원을 받을까 우려하고 그들의 멸망을 원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앞서 언급했던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곧 누구든지 이와 같은 기도를 올바르게 드리려는 사람은 반드시 공공 복리를 위한 열심으로 불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과오를 저지르면서 자기의 육체적인 호나난을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원하며 자기 원수들의 격렬함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심을 제쳐놓고 오직 교회의 공통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시인은 하나님께 분별력과 판단력을 주사 지각없는 열심을 가억지로 기도를 드리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이것은 우리들이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또 한 가지 주제이다. 덧붙여 관찰되어야 할 사실은 이 귀절에서 이 경건한 유대인은 모든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특별한 이점을 나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로 눈을 돌려, 주로 자기 원수들이 돌이킬 수 없도록 멸망시켜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 귀절에서 하나님이 이 원수들과 또다른 원수들을 멸망시켜 주시도록 경솔한 기도를 드리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버림받은 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정죄 속에 포함될 것과 하늘의 심판이 임하여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를 갈라놓을 때까지 인내로써 기다릴 것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랑이 요구하고 있는 애정을 내쫓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할 지라도 그리스도의 원수들 중 일부는 도저히
구원되지 못한 채 절대적으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 확실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7절에서 자기 원수들의 잔인함을 규탄할 때에 그들은 보복이 임하기를 자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는 다만 공적으로 옷입은 자와 개인적인 생각을 던져 버리고 모든 교회의 축복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자, 교회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게 눈을 돌리고 있는자, 마지막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심판을 고대하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손해를 입혔던 모든 원수들을 무분별하게 죽기를 구하지 않고, 쉽게 용서해 주며 오직 버림받은 자들에게만 그런 판단을 내리는 자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회개의 모든 소망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하나님의 보복을 구하는 사람들은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도 모르는구나'라고 지각이 없고 잘못된 열심을 갖고 비난하는 자들을 정죄하셨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잊어버린 자들이다. 더우기 여기서 신실한 자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단순히 교회를 심히 악하게 핍박했던 자들의 멸망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들과의 관계에서 보여주신 그 친밀감을 통하여 자기들을 핍박했던 자들이 형벌을 받지 않음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를 말하고 있다. 이 말의 근거는 이에다. '주여, 어찌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들에게는 그토록 극심한 환난을 주시고 주를 멸시하는 이방 민족들은 보호해 주시니이까?' 요컨대 신자들의 의도는 자기들만 이 세상에서 죄를 범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를 쏟으실 곳이 아른 데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말함이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에게 그의 행동 규칙을 정해 드려서는 안되고 오히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라는 말씀에 끈기 있게 복종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성도들이 불신자들이나 자기를 경멸하는 자들보다 더 나쁘게 취급되지 않도록 자기에게 호소하는 자유를 성도들에게 허락하신다. "주를 알지 아니하는"이라는 말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이라는 말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각기 다른 표현 양식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그런 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라고 가르친 것같이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백성이라"(호 2:23)고 말씀해 주실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호 2:23)라는 대답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부르실 때에만 우리의 입을 열어 이런 말씀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종종 기도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귀절에서는 꼭 그런 용도로 씌여진 것만은 아니다.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안내를 받지 않고서는 참된 종교를 진지하게 고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방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랑하고 다니지만 그 말은 부패한 자들의 생각에서 만들어 낸 그들만의 신이요, 그들의 모든 종교적인 예배행위도 싫증나는 것이므로 그 말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심지어는 오늘날에도 자기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고, 또 자기가 시인하는 것을 자기 입으로 요구하지 못하는 죄악의 사람(Man of Sin)의 추종자들은 맹목적이고도 잘못된 종교적인 인습들을 고안해 내고 있는데, 이들은 분명히 하나님께 버림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들을 올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79:8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귀절에서 자기드리 앞에서 간략하고 애매하게 말했던 것, 다시 말하자면 자기들이 받은 형벌은 마땅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한 이후에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야만 자기들이 당하는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온갖 역경을 치료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신다면 아무리 큰 번영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유익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열조의 죄악"(이전 시대의 죄악-칼빈 사역)이란 말씀이 어떤 사람들은 조상들이 범했던 죄악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여 거기에다 자기들이 어렸을 때나 젊었을 떼에 범했던 죄악을 추가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보다 넓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들이 최근에 범했던 한두 가지 죄악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조상들과 함께 오래 전부터 범했던 오래 되고 허다한 죄악까지 포함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랫동안 계속된 완악함 속에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굳게 한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지식은 선지자들이 그들을 향해 꾸짖던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거룩한 역사는 포로로 잡혀가게 했던 형벌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죄악이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할 때 계속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조상들의 죄가 자녀들의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죄에 대한 보응을 삼사 대까지 내리시겠다고 율법을 선포하신 것을 생각하고, 자녀들이 자기 조상들의 죄악을 자기들에게 전가시키지 말아 달라고(출 20:5)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볼 때 놀랄 필요가 없다. "속히.....하소서"와 "열조의 죄악"이란 표현이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주의해 볼 가치가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사백 년 전부터 범해 오던 모든 죄악들을 엄격하게 계산하였더라면 그들의 구원의 날은 훨씬 더 지연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이 예전에 범했던 죄악을 기억치 마시고 속히 구원을 베풀어 주시라고 간구한다. 자
기들의 죄가 큰 장애물이 되어 지연된 원인이 되었으므로 그들이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라고 간구하는 그 타당성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79: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 그들은 이 귀절에서 다시 반복하기를 자기들이 당했던 고난은 어떤 것이든지 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비롯된 것이요,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화목을 이루어 주시지 않는 한, 그런 상태에서 도저히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자기들이 많은 죄악을 범함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을 소망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던 그들은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첫째로 자기들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나타내 보여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 구원희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둘째로 자기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자기들에게 나타내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로 말미암은 공로 또는 만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주시는 공로없는 사죄로 말미암는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제 6편에서 보다 자세하게 설명한 것은 여기서도 마음에 필히 간직해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 단순히 외부적인 형벌에서 건짐받기만을 바라지 말고, 채찍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해주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리석은 병자가 자기의 병이 낫기만을 바라고 그 질병의 원인과 근원에서 구원받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주석가들이 '긍휼' 또는 '호의를 베푸소서'라고 번역한* (카페르)란 단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말한적이 있다. 이 말은 정확히 '깨끗하다' 또는 '속죄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제사에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기 바랄 때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도록 하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
르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
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10-13).
79:10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알리소서 -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은혜의 보좌 앞에 간구하면서 전에 사용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값없이 용서해 주시는 자비하신 분으로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하시고 자신만이 의로우신 분으로 여김을 받으신다. 그러나 성도들은 여기서 하나님께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악한 자들의 음모와 욕설의 대상이 되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한다. 이 귀절에서 우리가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의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기도를 우리의 경험에다 결부시키려고 하는 옳지 못한 기도 방법 때문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반절에 나오는 동일한 질문도 바로 이런 답변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들에게 보응하기로 선포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은 그 복수에 대한 집념을 불태울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귀절에 나오는 기도 형식이 우리가 요구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과 교훈하심에 따라 악한 자들에 대해서 모든 교회가 일반적으로 당하고 있는 처지를 변호하는 기도라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가 이런 형식의 기도를 올바르게 하나님께 구하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지혜로 조명을 받아야 하고, 다음으로 육체의 몽롱한 감정으로 말미암아 잘못되기 쉬운 우리의 열심이 순전하며 바른 입장에 서야 한다. 그 다음에야 하나님께 자기 종들의 생명의 피를 흘리는 자들에게 어떻게 진노하고 계시는지를 분명한 증거로 보여주시라고 합법적으로 간구할 수 있다. 성도들이 마치 오래도록 그렇게 되기를 욕심내어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피를 흘리는 모습에 만족하는 어떤 갈망이 표현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과오를 저질렀던 자들에게 그의 분노를 벌하실 때 나타나는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를 보이셔서 자기들의 믿음을 확증시켜 주시기만을 바란다. 마땅히 자기들의 죄로 인해 형벌을 받았던 자들에게 "주의 종들"이라는 칭호를 쓴 것은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
하실지라도 완전히 우리들을 내쫓아 버리시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그와 반대로 이런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관심의 대상이 우리의 구원임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아는 대로 선인과 악인이 교회 안에 함께 섞여 있으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전 교회에 임하게 되는데, 이때 선인은 악인과 함께 형벌을 받는다. 이는 마치 에스겔, 예레미야, 다니엘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이다. 사실상 그들에게는 전혀 과오가 없었다. 유대인들에게 그토록 극심한 환난이 임한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그들은 보다 더 심한 괴로움을 당하는 것으로 악한 자들에게 보여졌을지도 모른다.
79;11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 나는 성령께서 이 기도를 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있을 때였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갇힌 자"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모든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앗수르와 갈대아 사람에 묶여 한 발자욱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의 형벌을 받은 자들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망의 자녀'(칼빈사역;죽이기로 정한 자-한글개역)라고 부른 것은, 자기들의 포로로 잡혀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죽이기로 정해진 또는 정죄받은 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귀절은 구속을 받고 감옥에 갇혀 있던 소수의 사람들에 국한시키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자랑하던 교만한 영혼들이 지금은 완전히 겸손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팔의 위대하심", 다시 말해서 그 크신 능력을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신호나 특별한 간섭이 없이는 교회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79:12-13
주여 우리 이웃이.....저희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 - 우리는 보응에 대한 문제를 이미 충분하게 살펴보았다. 즉 성도들이 여기서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자신들에게 손해를 입혔던 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비방거리가 되는 것을 볼때 분개하여 악한 자들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렸으면 하고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감정으로 마음이 가득차고 성령의 지혜로 이런 말을 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공정하신 하나님의 심판과 정확한 일치를 보게 될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이 경건한 유대인은 자기들의 구원이 가져오는 열매는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른 어떤 목적으로 우리들의 유익이나 축복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베푸시는 뜻은 자신의 인자하심이 알려지고, 높임을 받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환난을 당하던 자들은 자기들의 구원에 대한 감사를 깨닫고 이 사실을 단지 잠시만 아니라 세상이 끝날 때까지 후손들에게 대대로 기억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라는 독특한 표현도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도록 선택을 받았고 그 찬송이 시온에서 다시 울려퍼질 것이라 한 것을 볼 때, 백성들을 멸망시켰다 한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기억마저도 없애 버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귀절은 분명히 이사야의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라는 예언과 일치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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