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시편 07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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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1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 앞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인간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제든지 기억하고 있어야 할 여호와의 도우심이었다는 것을 배웠다.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펼치사 특별하신 방법으로 택한 백성과 그들의 성을 자기의 보호 아래 두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알려지심과 그 이름의 위대함'이라는 말이 어떻게 나왔겠는가?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그러한 이적적인 간섭에 의해서 패주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현저하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76:2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 이 귀절은 왜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를 도망시킴으로써 예루살렘성을 구원하사 자기의 보호 아래 두셨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그곳을 정하사 그곳에서 자기의 이름이 불려지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요컨대 이 귀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로 성의 구원에 대한 묘사에 의해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자기 권능을 행사하사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심으로써 모든 영광이 자신에게 속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시는 동시에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권리를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신 것은 어떤 다른 생각에서가 아니고 다만 유대 민족을 값없이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실례를 통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보호하는 자기의 권세를 아무도 대적할 자가 없음을 증명함으로써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의 그늘 밑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부르시고 용기를 갖도록 해주신다. 만일 하나님의 이름이 자신에게 값진 것이라고 확증하실 때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에 부여하시는 특별한 보증이며 담보물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상영되는 특징을 가진 극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가장 큰 주의를 기울여 교회에 베풀어진 은총들, 즉 모든 세대들이 마땅히 기억해야 할 특별한 은총을 우리들의 배은망덕함으로 망각 속에 싸이게 하거나 묻어 버려서는 안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하나님께서 보이는 장막에서 예배를 받으시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 가운데, 아니 우리들 안에 계속해서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위험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완전한 안전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땅에 예루살렘 성전이 서 있을 동안 하나님의 옛날 백성들에게 구원의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성전으로 택하사 자신이 성령으로 거하실 수 있도록 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오늘날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더할 나위 없는 관심을 가져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여기서 저자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말을 단순히 "살렘"이라고만 하여 이 도시의 복합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단순 명사를 사용한 것은 창세기 14장 18절에서 볼 수 있는 매우 고대 형태의 이름을 적용시킨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말이 복합 명사로 변하여 살렘 앞에 여부스(Jebus)가 덧붙여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부스라는 이름은 사사기 19장 10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후대 중간기 시대에 붙여진 이름으로써, 그곳이 여부스 족속의 거주지였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어원을 보다 정확하게 살펴보면, 이 말은 '볼 것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 (예레)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고 말한 것이다.

76:3,4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셀라). -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유다에게 알려지신 독특한 방법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 성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그의 권세의 놀라운 증거에 의해서 알려졌다. 이 비유 속에는 택한 백성에 대한 원수들의 멸망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갑옷이나 전쟁 무기를 빼앗기기 전에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제어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화살과 방패와 칼" 즉 모든 전쟁 무기들이 '깨어졌다'고 하는 말씀은, 교회의 이러한 원수들이 교회를 해칠 수 있는 세력을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그들은 해침을 당하지 않은 상태에 있을 때도 상처를 입었고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그들의 전쟁무기에 일어난 것으로 표현하는 환유법(換喩法)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 (레샤핌)이란 말을 '신호하는 무기'라고 번역한다. 말하자면 이 말은 '불'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화살'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떤 때는 새까지도 이런 말로 불렸는데, 그것은 새들의 신속성을 가리킨 것이었다. 시편 91편 5절에서는 날아가는 것을 화살에다 비유했다.
  여기에 덧붙여 4 절에서는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주는 약탈한 산보다 더 영화로우시며 더 무서우시도다 - 칼빈 사역)라고 했다. "약탈한 산"이란 포악하고 약탈을 일삼는 나라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노략질과 약탈로 가장 극심했던 자가 땅을 넓히고자 하는 자요,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고자 했던 자였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여기에서 격렬함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자 하는 위대한 임금들을 오직 먹을 것만을 위해서 살며 수풀에 뒤덮인 산에서 왕궁을 지어 놓고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고 사는 데 익숙해 있는 맹수들에다 비유하고 있다.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들은 예루살렘을 격렬하고도 맹렬하게 공격하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권세로 완전히 압도하심으로써 신실한 자들이 공포에 짓눌려 있지 않도록 해주셨다.

76:5,6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 여기서는 원수를 멸망시킨 하나님의 능력이 또 다른 표현 형식을 통해서 찬양되고 있다. 우리가 "탈취를 당하여"라고 번역한 동사는 * (에쉬톨렐루)인데, 이 말은 * (샬랄)에서 온 것으로서 * (헤) 대신 * (알렙)이 붙여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어리석은 자가 되어'라고 번역한 것은 이것은 너무 강조된 해석이다. 그들이 지혜와 용기를 빼앗겼다는 점을 말하는 데 있어서는 그 의미가 똑같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의 적합한 의미를 고수해야만 한다. 하반절에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라고 한 말씀도 같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써, 말하자면 그들이 손이 잘린 사람이나 불구가 된 사람들처럼 싸울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요컨대 자랑하던 그들의 힘이 완전히 압도당했다는 것이다. "자기 잠을 자고"란 말씀도 같은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들이 전에는 활동적이고 단호한 자들이었으나 지금은 그들의 마음이 뒤집혀 나태함과 노곤함으로 잠속에 빠져들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택한 백성의 원수들이 전에 자랑하던 영웅적인 용기와 그들이 사로잡혀 있던 오만함을 빼앗겨 버려 그들의 생각, 마음, 손, 즉 그들의 정신적 또는 육체적 기능 중 어떠한 것도 모두 자기들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든 은사와 능력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을 알며, 하나님께서는 경우에 따라 자기가 주었던 지혜를 그들에게서 빼앗아 버림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들고 전쟁을 향해 부당하게 사용하던 손을 돌이키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힘을 멸절시켜 버리실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 원수들에게 용기와 능력을 일으켜 주신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그 속에 내포한 의도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능력과 사역을 높이도록 하려는 것이다.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라는 귀절도 똑같은 내용을 더욱 확증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 원수들이 가진 성격이 어떤 것이었든지 하나님께서 고개만 한 번 끄덕이심으로 무력하게 되고 말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도움의 수단을 빼앗긴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큰 군대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입김만으로도 모든 공격들을 굴복시키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만족을 누리도록 하자.

76:7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 대명사 "주"를 반복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말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자 하는 의미이다. 이 말씀을 의역하면 이렇다. 즉 세상에 있는 권세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즉시로 사라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두려워하실 분이시다. 이 말씀은 악인이 비록 교만으로 가득차 거의 폭발할 정도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모습과 임재 앞에 설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한 바로 다음 귀절에 의해서 입증되어진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시기 때문에 단지 게으른 방관자로 보여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분노를 발하기 시작하신다면 그 즉시로 모든 악한 자들이 멸망하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얼마 동안 화를 입지 않고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포악함으로 구름을 꿰뚫고 올라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조금도 개의치 말고 진노의 때가 임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이 말씀에서 깨달을 수가 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은 모든 진실한 신자들을 핍박하기 좋아하는 악인들이 바로 그러한 행위로 말미암아 이러한 두려운 일을 자초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76:8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고하시매 - 시인은 "하늘"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나서 사람의 행운이나 노력에 의한 것으로 묘사할 수 없음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심판을 보이지 않게 행사하시기 때문에 그 심판들이 땅에서부터 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경건하고 용맹한 임금을 일으키사 이러한 임금들의 통치를 통해서 거룩하고 합법적인 행사들이 나타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기는 하지만 이 심판이 하늘에서부터 온 것이라고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심판은 특별한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함으로 구별된다. 시인이 '하나님의 판결을 선고하시매'라고 한 말씀도 같은 의미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단지 눈으로 보는 것보다도 마치 천둥소리와 같이 크게 울리게 하여 그 소리로 모든 사람들의 귀가 멍하도록 해준다. 나는 이 말씀 속에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움츠러들게 하는 강력한 천둥을 암시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확신한다. "땅이 잠잠하였나이다"란 말씀은 감히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노를 발하던 악인들이 하나님께 승리를 빼앗기고 공포에 싸여 있는 것을 적절하게 가리킨 것이다. 그들을 복종시킨 것은 오직 두려움뿐이었다. 따라서 두려움이 이와 같은 잠잠함의 원인으로 묘사되는 것은 마땅하다. 이 말씀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즈를 억제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하나님께서 억지로 복종시키셨음을 의미한다. 이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천둥을 발하실 때마다 만물이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고, 바로 그때 악인들의 격동해 있던 오만함이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반기를 들 때에 얻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경고를 받는다. 큰 소리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같으신 음성을 멸시하는자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번개로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76:9
 곧 하나님이......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 - 하나님께서 이 판단을 행하심에 있어서 보이고자 하시는 큰 목적이 여기에 선포되고 있다. 그 목적이란 자기의 모든 백성들을 향한 아버지같은 사랑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입으로가 아니라 손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모든 자들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시 위함이다. "일어나신"이라는 말은 악인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들에게 이처럼 많은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분'이라고 한 것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심판석에 오르사 자기 교회를 특별히 돌보아 주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고 말했다. 이 귀절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버리실 수가 없음이 마치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함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심판주로 부른 것은 불의하게 압제를 당하는 불쌍한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땅의 모든 온유한 자" 또는 '겸손한 자'란 말씀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높은 것을 구하지
않고 겸손하게 인내함으로써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고난이 가져다 주는 최상의 열매는 그 고난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교만을 추방하고 온유와 절제로 돌이키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켜 주심 아래 있음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도움과 은총을 베풀어 주실 준비를 갖추고 계심을 분명하게 결론지을 수 있다.

76:10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은, 원수들이 장차 하나님께 굴복한 후 하나님께 승리의 찬송을 돌리게 될 것, 즉 자기들이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 정복당했음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보다 세련된 의미를 이끌어 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마치 바로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으셨다고 하신 말씀처럼(출 14:4; 롬 9:17) 악인들을 격동케 하여 그들의 분노를 일이키실 때에 자신의 영광을 가장 현저하게 행사하심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해석은 문맥상 매우 교리에 적합한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는 있지만, 지나치게 의역함으로써 그 본래의 단순한 의미를 잃기 쉽다. 즉 처음에는 하나님과 교회의 원수 등의 격렬함이 만물을 다 혼란 속에 몰아 넣어 마치 하나님과 교회를 어둠속에 봉해 버린 것 같다 할지라도 마침내는 자기들이 애쓰고 시도하려 했던 모든 것들이 결코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케 되리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보다 단순히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하반절에 나오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라는 말씀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  (하가르)란 단어는 '허리에 두르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대명사 "주"를 덧붙여 다음과 같은 의미로 본다. 즉 '모든 교회의 원수들이 아직 근절되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중 남은 자들을 멸하도록 태세를 갖추시리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해석은 보다 단순하다. 즉 비록 이 원수들이 자기들의 잔인함을 드러내기를 그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효과적으로 억제하사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막으실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동사를 '주께서 다발로 묶을 것이다'라고 해석해도 역시 잘 어울린다. 프랑스어로 하면 'Tu trousseras' 즉 '주께서 다발 지을 것이다' 또는 '보따리로 쌀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사 만물을 보다 복된 상태에 임하게 해주실 때까지, 그리고 악인들의 미친 생각을 발로 짓밟으사 그들을 부끄럽고 혼란하게 만드실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그러나 계속해서 새로운 문제들이 일어난다고 하면 악인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들의 분노에 대한 생각을 억제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동시에 우리는 매순간마다 새로운 분노가 일어난다 해도 놀라지 않도록 하자. 세상 끝날에 이르도록 사단은 그의 동료들과 하수인을 거느리고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려하기 때문이다.

76:11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 성도들은 이제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한다는 권면을 받고 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풀어 주신 한 가지 축복을 위해 서원 제사를 드리는 일이 있어 자기들의 안전함이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음과, 자기들은 그 안전함에 대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음을 이 의식을 통해선 분명하게 깨달음으로써 이것을 다시금 새롭게 신앙 생활에서 실천하라고 깨우침을 받은 것이다. "갚으라"는 말씀은 변치 말아야 할 것, 즉 단순히 갑작스럽게 그리고 생각없이 깨닫지 말고 자기들의 구원에 대한 기억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음을 항상 증명하여야 할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본명히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구원의 주인이 되심을 자신에 진지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의 엄숙미를 고수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바를 행하도록 모든 사람을 자극하여 주는 것도 무익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반절에서 사방에 이웃하고 있는 모든 자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그토록 특별하신 계시는 이방의 할례받지 않는 민족들에게서도 찬송을 받으실 만한 것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문맥과 일치하는 해석은, 이 말씀이 레위인들 또는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사방에 있다'고 말한 것은 일리에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하고 있었을 동안에는 회막이 진(陣) 가운데 설치되며, 또 언약궤를 놓아 두었던 시온산도 온 나라 어느 곳에서든지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 레위인들은 성전의 일을 맡도록 교육을 받았고 성전을 지키고 관할하도록 위임을 받았었다. * (라모라)란 말을 다수의 주석가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보고 '두려운'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경외"라는 말은 때때로 수동적 의미를 취해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만일 이 말을 이방인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면 그 의미는 그들이 하나님께 공물로 바쳐질 것이라는 뜻이 된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위축되어 더 이상 감히 하나님께 어떠한 반항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저자는 하나님의 현저한 권능의 증거를 제시한 후에 그것을 경외할 만한 것이라고 올바로 선포하는 것이다.

76:12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 히브리어 * (바차르)라는 말이 경우에 따라서는 '강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그런 의미로 번역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귀절 안의 두 문장에서 같은 의미가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나는 상반절에서는 방백들에게서 이해력과 지혜가 빼앗기는 것을 의미하고, 하반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오만함을 거꾸로 낮추시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고 확신한다. 일이 잘 되어 가기를 바라고 행하는 일 중에서 가장 없어서는 안될 것이 바로 통찰력을 갖는 것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이 고통 중에 빠져 있는 크나큰 난국을 헤쳐 나아가지만, 악한 자들은 그와 반대로 자기들의 교활한 꾐에 지나치도록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 귀절은 지식을 빼앗아가는 것과 명석하고도 기발한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려고 하는 자를 눈이 어두워지도록 만드시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방백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땅의 열왕들을 굴복시키기에 충분하도록 두려운 분임을 분명하게 확증하고 있다.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또는 그들이 심령이 탈취를 당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정신이 멀게 하신 폭군이나 강탈자들에게 국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들의 모든 창의력과 연구를 집중하여 해로운 일만 저지르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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