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1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 만일 이 하소연이 백성들이 바벧론에서 포로로 있을 시대에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면, 예레미야가 비록 70 년의 포로 생활 이후에 구원의 때가 오리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매우 쓰라린 환난을 그토록 오랫동안 견디며 매일 신음하는 날들이 오래 계속되어 마치 영원한 것처럼 보여졌으리라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안티오쿠스의 잔악함 때문에 핍박당하던 사람들은 핍박이 끝나게 될 시기를 알려 주지 않음에 대해서, 특히 원수들의 잔인함이 매일매일 더 가중하여 해방될 소망이 없어지는 것과, 점점 자기들의처지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으로 불평할 이유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이전에도 그들은 이웃들이 하나씩 차례로 자기들에게는 수많은 비참한 전쟁을 하므로 말미암아 크게 저하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거의 완전한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신실한 자들이 이방 민족들에게 핍박을 당할 때 자기들이 당한 모든 재난들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임한 것이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자기들의 눈을 든 사실은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확신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에게 분노를 발하시지 않으셨고, 이방 민족들은 자기들을 해칠 권한을 허락받은 바가 없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단지 혈과 육으로만 핍박당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공정하신 심판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자기들의 생각을 모든 재난의 진정한 원인이 되는 것에 집중시킨다. 이전에 그들이 즐겼던 번성하고 행복된 생활 여건하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쫓고 더 이상 자기의 양무리로 여기지 않으심을 그들은 깨달았다. * (자나흐)라는 동사는 '미워하다', '싫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때로는 '자신을 멀리 집어던지다'는 뜻을 나타낼 때도 있다. 여기서는 어떠한 의미를 취하든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언급되는 내용을 간략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재난을 당할 때마다 이 재난은 우리의 나아갈 길에 내던져진 우연이라고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하고도 신비스러운 섭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채찍이나 회초리로 우리의 죄악을 벌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요, 또한 사용하시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버리시나이까"와 "진노"라는 말은 육신적인 이해력, 혹은 판단력을 따라서 사용된 말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기가 택하신 자들에게 진노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고질병이 의사에 의해 치료를 받는 것처럼 환난으로 치유 될 수 있도록 해주신다. 그렇지만 성령께서는 "진노"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경험하도록 하여 신실한 자는 영원한 순결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깨닫게 되도록 권고해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진노를 우리 위에 내리신다고 할 때에는 우리가 마땅히 그 진노를 받아야 할 자임을 진지하게 깨달아야 한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감정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의 진노가 우리에게 불붙지 않는 것은 죄로 심히 하나님께 대항했던 우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긍휼을 베푸시지 않음에 대한 탄원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택해 주신 언약에 대한 회상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자기들을 "주의 치시는 양"이라고 부름으로써 이방인들과 구별되어 값없이 택함받은 자들임을 찬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귀절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74:2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을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 여기에서 주의 백성들은 자기들이 자신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양자로 택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되었음을 자랑한다. 그들의 자랑은 조상들이 한 방법과 비슷하다. 즉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지 않던 자였지만, 그들에게 유업의 권리를 주셨던 방법과 비슷하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들의 믿음은 점점 더 확고해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포하기를 자기들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어길 수 없는 언약 이래로 계속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 귀절 속에는 또 구속이 택함으로 인증(認證)된다는 말이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들의 임금이요, 보호자가 되심을 말씀뿐만 아니라, 이 구속이 이루어지는 때의 행위로도 보여주신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러한 은혜들은 하나님을 의지함에 있어서 용기를 갖도록 해준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버리지 말라는 하나의 논증으로 저버리시지 않을 은혜를 열거한다. 동일한 은혜로 인하여 확신을 갖게 된 그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주의 기업의 막대기'(칼빈 사역 ; 지파 - 한글 개역)라고 부른다. 이 말은 이 기업이 하나님께서 직접 허락해 주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줄이나 혹은 선(線)으로 하는 것처럼 막대기로 땅의 경계를 측량하거나 가려내는 습관이 유행하였음을 암시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막대기'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 (셰벱)을 '지파'로 번역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막대기'라는 번역을 취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측량하는 막대기로 하시는 것처럼 자신의 기쁜 뜻에서 나오는 은밀한신 예정으로 이스라엘을 자기의 고유한 땅으로 다른 백성들과 구별하셨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하반절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성소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성소는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대로 그 안에 하나님의 본체가 나타나신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가까이 계셨고 자신의 능력과 은혜로 그들에게 나타나셨음을 그의 백성들이 경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백성들이 이 기도에서 얻어 내는 확신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들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택과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요, 그들 가운데 세우셨던 거룩한 예배에서 나온 것이다.
74:3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 (주의 타격을 가하사 - 칼빈 사역) 한 편 여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원수들이 주의 성소에 행한 잔악함에 부합하도록 치명적인 상처를 그들에게 입혀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들은 그런 악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맹렬한 행위에 온건한 형벌로는 충분치 않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소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격렬한 원수가 되는 자들은 그들의 악함이 완전히 사라지도록 철저히 부서져야 한다고 한다. 성령께서 이러한 형태의 기도를 기록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귀절에서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을 매우 엄하게 벌하시기를 즐겨 하신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고 계시는 무한하신 사랑이요,
둘째는 성소를 거스르는 자들을 그토록 엄하게 몰아 내실 때에 하나님은 자기를 섬기는 자들이 자기의 신적 엄위에 복종하는 예배를 유지하신다는 차원 높은 생각이다. 우리가 '타격'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 (프아밈)을 어떤 사람들은 "발" 혹은 '발걸음'으로 번역하면서 교회는 주님께서 그의 발을 드시사 교회의 원수들을 신속하게 내리치실 것을 기도한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망치'라고 번역하는데, 잘 어울리는 번역이다. 그러나 나는 이 귀절은 때리는 행위, 즉 자기들을 때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사람들의 견해를 따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의 마지막 부분을 원수가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더럽혀 버렸다는 의미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므로 그것은 받아들일 만큼 타당한 것 같지 않다.
74:4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 이 귀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대적들을 사자에 비유하여(암 3:8) 심지어는 이 귀절이 유대인들의 회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고 알고 있다. 또 여기에서 성전을 가리켜 종종 다른 귀절의 경우처럼 복수로 말하는 것은 성전이 세 부분으로 구분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당을 가리킨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에 대해서 반론을 펴고 싶지 않다. 진실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성별하신 모든 지역에 적용될 수 있다고 해도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는 성전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때에 가장 강조된다. 이와 같이 대적의 맹렬함은 억제되지 않았고 또 자제시킬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성소의 영역까지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라는 말은 그들의 무례하고도 오만한 행위, 즉 자기들의 기(旗)를 세워 하나님까지도 이겼다고 하는 교만한 행위를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느브갓네살이 새가 날아가는 것과 그 소리를 듣고 점괘를 얻어 내려던 것을 말하는 에스겔서의 증거와도 같은(21:21, 22) 주술적인 점이었다고 해석하지만, 이 해석은 그 의미가 너무 한정되어 있어 내 해석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거룩한 땅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특별한 성격을 불러일으켰고 세상의 어떤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표시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통하여 마치 깃발을 흔드는 것처럼 자기의 권위와 통치 아래 백성들을 붙잡고 계심을 보여주셨다. 이러한 표시들로 택함을 받은 지파들이 이방 민족과 구별되었는데, 선지자는 여기서 이것들을 그들이 대적이 성소 안에 가지고 들어온 모독적인 깃발들과 대조시킨다. 이 시편의 저자는 "기"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대적들의 행위의 지독한 성질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의 표시와 깃발들을 내던져 버린 후 그 대신 이상한 표시들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74:5-6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같으니이다. - 시편 기자는 또다시 자기와 같은 부류에 속한 사람들의 원수들이 야만적이고도 금수와 같은 잔악함을 한층 더 실례를 들어 말한다. 즉 그들은 그토록 막대한 아름답고도 거대한 경비를 들이고 갖은 수고와 기술을 다 동원하여 건축한 건물을 잔인하게 무너뜨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약간 애매한 점이 있긴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의미는 성전이 건축되던 즈음에는 성전을 짓기 위해 나무를 잘라 준비하는 사람들이 높은 평판과 명성을 얻었던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동사 * (메비)를 능동적인 의미로 보고, 이 말은 마치 하나님께 희생을 바친 사람들처럼 인기가 있고 잘 알려진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삼림은 품위 있는 대들보와 상반되는 것으로 거칠고 다듬지 않은 재목을 정교한 기술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형태로 만드는 것을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만약 저자가 이것을 의미하지 않았다면, 그 의미는 삼림에는 매우 많은 나무들이 있어 각별히 유의해서 나무를 선정해야 하고, 질이 좋지 않은 나무는 아무도 자르지 않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나는 이 해석이 더 옳다고 생각된다. 또 도끼로 잘라 낸 이 삼림의 나무들은 사람들에게 이미 우수한 나무로 잘 알려져있었음을 의미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이 귀절을 어떻게 보든지 간에 이 시의 저자는 이 귀절에서 성전을 위해 선택된 재목의 우수함과 또 그 정교함으로 인해서보는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과 찬사를 발한다고 말하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없다. 곧이어 6 절에 나오는 "조각품"이라는 말을 보더라도 이 귀절은 탁월한 기술로 다듬어진 건물의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귀절이 말하는 것은 갈대아 사람들이 그토록 우아한 건물을 무너뜨림으로 마치 하나님의 영광을 발로 짓밟기라도 한 것처럼 무모하게 이 찬란한 건물을 그들의 도끼로 부서뜨렸다는 것이다.
74:7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 시편 기자는 이제 전쟁의 도구들로 말미암아 절반 정도만 무너졌던 성소가 불에 탔기 때문에 이제는 완전히 파괴되고 무너져 버렸음을 하소연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귀절의 히브리어 단어 순서가 뒤바뀌어 어떻게 정확한 의미를 찾아야 될는지 알 수 없다고 하여 '저희가 주의 회중에게 불을 던졌다'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취한 의미가 확실하다고 본다. 비록 악센트에 대한 문제가 있지만 정확하고도 자연적인 의미는 성소가 '회중'이라는 복수로 불리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해석해 준다. 성전은 가장 깊은 지성소, 성소, 바깥뜰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이라는 표현이 따라 나온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실체는 성전 안에 제한되거나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과 사역으로 성전 안에 거하심으로써 백성들이 성전에서 더욱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도록 해주심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74:8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 교회의 대적들의 극도록 잔악함을 보다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선지자는 그들이 피차 말하면서 제한이나 그침없이 진멸하기를 서로 자극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 속에는 그들이 마치 피해를 입히는데 충분한 용기를 갖지 못했던 것처럼 자기 이웃을 충동하여서 그들 중에 하나도남김없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시키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귀절 끝 부분에서 저자는 모든 회당들이 다 불살라졌다고 말한다. 나는 히브리어 * (모아딤)을 '회당들'이라는 의미로 선뜻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저자가 모든 회중, 그리고 모든 땅에 있는 이라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해석하기를 이 원수들이 자기들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를 해치거나 거스릴 수 없음을 발견하고 자기들의 분노를 유형적인 성소 혹은 회당으로 돌이키고 있다고 하는데, 이 해석은 빠려로 의미없는 해석이다. 저자는 단순하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워버리려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격렬한 손의 흔적이 없는 곳이 어느 한 구석도 남겨 있지 않고 있음을 불평한다. 히브리어 * (모아딤)은 일반적으로 볼 때 '성소'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그 어원을 고찰해 보면 이 말은 선지자들의 말씀을 읽거나 설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회집(會集)한 거룩한 모임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써 적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악한 자들은 유대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섬멸시키기 위해서 자기들의 온갖 힘을 다 기울인다.
74:9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 경건한 유대이들은 이 귀절에서 자기들의 괴로움을 보다 가볍게 해줄 만한 위로를 받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그 괴로움이 더욱 가중됨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진노하실 때에도 자신의 인자하심과 기억하시라고 약속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그들과 화목하리라는 소망을 품게 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 자녀들을 격려하는 능력의 수단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에 나오는 "표적"이란 말을 제한적인 의미로 보고 옛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심으로 증명하신 바가 있는 이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거룩한 자들은 오히려 자기들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들이 없어지고 마치 하나님의 얼굴이 자기들에게 가리워진 것과 같다고 탄식한다. 우리는 선지자가 '주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주의 낯을 우리에게로 비추시지 않으시고 마치 주께서 늘 그와 같은 것처럼 하시나이까!'라고 말한 바와 같이 흑암으로 압도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는 흔히 자기의 사람이나 또는 미움의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요컨대 이 귀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당시가 그름이 덮인 흑암의 시대였던 것을 탄식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심히 두꺼운 흑암으로 봉쇄되어 단 한 줄기의 빛으로도 나타나지 않음을 탄식한다. 그들은 선지자들에 의해서 앞날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표적 중에 하나였음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를 재난의 끝날을 예언해 주는 선지자가 더 이상 없음을 슬퍼한다. 우리는 이귀절을 통해서 위로를 나누어 주는 직분이 선지자들에게 위임되었다는 사실과 선지자들은 슬픔으로 닫혀진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용기를 얻게 해준다는 사실을 배울 수가 있다. 사실 선지자들은 완악하고 배반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고 떠 그것에 대한 증인이 되어서 위협과 공포를 일으켜 회개하도록 이끌어 주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다만 하나님의 저주만을 아무런 제한도 없이 선포하는 자라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의도하고 세운 교훈은 한낱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아직 미래 속에 감추어진 재난의 문제를 미리 예언해 주는 것은 선지자들에게 맡겨진 임무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형벌은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채찍이며 이것을 조금만 생각하면 곧 슬픔을 가볍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계속적인 고난은 가련하고 비참한 죄인들을 완전히 절망 속에 주저앉아 버리게 하는 요인이 된다.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의 연단하시는 손길 아래 있을 경우에 인내에 대한 문제나 위로에 관한 점을 찾아 내려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운신 면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서 용기를 얻고 선한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이라는 점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 귀절에서 비록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신 중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기를 중단하시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안식을 누리도록 하자. 구원을 주기 위한 징계는 완벽한 슬픔을 주지 않는다. 즉 슬픔을 낳는 것은 기쁨과 뒤섞여 있는 것이다. 모든 선지자들은 이러한 의도를 자기들이 전한 교훈 속에 내포시키기 위해 힘썼다.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서 공포심을 불러 일으켜 자기들의 반역을 깨뜨리고 겸손해지도록 하기 위해 매우 가혹하고 엄한 말로 백성을 다루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겸손해질 때에는 언제든지 그 즉시 위로의 말을 전파했는데, 그 위로는 백성들이 미래의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용기를 가지지 않느다면 전혀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길지 모른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하신 징벌 때문에 생기는 슬픔을 완화시키려고 자기 백성들에게 그 징벌이 지속될 햇수와 날수를 항상 정하셨는가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선지자들은 항상 정한 때를 밝히고, 또 규정해 주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종종 구원이 임박했음을 백성들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미래의 교회의 회복에 대해서 말했다. 또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모든 세대의 공통적인 일반적인 분명한 약속들을 자기들에게 적용시키지 않음으로 이 생각은 잘못이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보통 사용하시는 방법은 모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자들을 보내시기 때문에 특별히 그런 목적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에라도 자기들이 지금까지 누려오던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을 빼앗겼다고 이유없는 불평을 늘어놓지 못하도록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매시대마다 약속된 구원에 대한 기억을 다시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기들이 어떠한 고난 속에 빠졌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보살펴 주시며 장차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74:10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 이 귀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악한 자들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형태를 빌어 영감받은 저자가 목적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하고자 하는 열심으로 불붙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괴로움을 견디는 데 심히 연약하고 힘이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모든 고난보다도 하나님께서 오만한 자들에게 멸시당하는 것을 더욱 슬퍼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순전한 경건심의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가련한 유대인들이 가장 잔인한 폭군 밑에 있는 것과 야만 족속들 가운데 있는 것보다 더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없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저자는 전체 교회의 몸 안에서 말을 함으로써 사람으로 말미암은 비난은 하나님을 향한 저주스러운 모독과 거의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시편 69 편 9 절에 나오는 말씀의 내용을 따른 것이다.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또 "영원히"라는 말이 첨가된 것은 악한 자들이 계속해서 오래도록 형벌을 받지 않으면 이것이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더욱 파렴치하게 해주는 것이 되고, 특별히 하나님을 향해서 욕설을 퍼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못본 체하시고 지나가시는 것은 더욱 그렇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곧이어 11 절에 이것이 언급되었다.
74;11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 저자가 이 귀절에서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주석가들은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앞에 나오는 "손"이라는 말씀이 '왼손'을 가리킨다고 보고 뒤에 나오는 "오른손"과 구별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한낱 경박한 해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저자가 "오른손"이라는 말을 했을 때는 단순히 자기가 흔히 사용하던 방법대로 동일한 사실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거두시나이까"라는 동사 * (칼라)를 '가리다' 혹은 '제한하다'라고 번역하고, 제자는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오래도록 그의 품속에 품어 주셨던 하나님의 손을 마침내 펴시게 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이유없이 하나님께 배상을 요구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또 이 말을 '진멸하다'라고 번역하는 사람들은 "주의 품에서"를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성소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는데, 나는 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귀절 끝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계속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주여 어느 때까지 주의 손을 거두시려나이까? 진실로 주께서는 주의 품에서 주의 손을 거두시려나이까? 심히 교만하게 주를 멸시하는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소서'이다. 또 이 말씀을 기도로 보고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나님은 노력하지도 않으시며 공개적으로 자기 손을 드시는 분도 아니기 때문에 느릿느릿하신 분이요, 게으른 분이시라고 확신하므로 하나님은 많은 손가락을 움직이시지 않고 막대기 하나만으로도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이심을 그들에게 알게 해 달라는 것이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다.
74:12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 우리가 다른 곳에서도 이런 경우를 가끔 보았듯이 이 귀절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기도로 바꾸어 믿음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힘을 추구하며 자기들이 기도해야 할 의무 안에서 보다 더 진실해지는 것을 본다. 우리는 모든 의심을 초월하여 자유롭고 제한없는 기도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안다.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은 이 귀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그의 사역에 대한 증거들을 기억함으로써 계속되는 세대의 연속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택하신 백성의 왕이요, 또한 보호자이셨음을 증명한다. 이 예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입술로 기도할 수 없고 또 믿음으로 기도할 수 없을 경우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증으로 말미암은 축복을 기억해야 하며, 또 이것들을 수많은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의 증거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왕이라는 칭호가 하나님께 적용된 것을 단지 주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매우 명백하다. 하나님이 이 명칭으로 불려진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존하시고 유지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정부를 자신이 맡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로부터"라는 말씀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땅 가운데서'(칼빈 사역 ; 인간에게 - 한글 개역)는 유대를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곳이 거주가 가능한 지역 가운데에 위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틀림없는 것은 이 장소가 뚜렷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되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말 속에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고하라고 모세에게 주신 다음과 같은 의미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니라"(출 8:22) 그러므로 이 말의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의미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위해서 행하신 많은 구원들은 마치 선명한 주장에서 상영된 것과 같이 드러나 계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74:13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 저자는 이제 오래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련의 구원을 한 곳에 모으고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구원들은 처음 구원,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의 학정(虐政) 밑에서 풀어 주신 것에 속해 있다. 그러고는 저자가 온 세상에 펼쳐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일반적인 찬송을 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의 보증인이 되어 주시는 특별한 은혜에서 모든 인류들을 향해 나타내시는 선하신 뜻을 말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앞부분에서 저자는 말하기를 '주께서 바다를 나누셨다' 혹은 '쪼개셨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뒷부분은 앞부분에서 말한 결과에 결부된 것으로 생각한다. 즉 하나님께서 바다를 마르게 하사 고래와 다른 큰 물고기들을 죽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말씀은 바로와 그의 군대를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선지자들에게 매우 흔한 것이었는데, 특별히 많은 물고기로 풍성한 바다를 이루고 있으며 나일강으로 갈려진 애굽을 말할 때에 그러했다. 따라서 바로가 '리워야단'이라고 불리는 것은 일리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바다의 이점을 가진 나라를 가졌고, 또 매우 비옥한 땅을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능력 있는 대양(大洋)의 물속에서 안이하게 오르내리는 고래에다 비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던 당시에 자신의 권세를 행사하셨던 것처럼 언제든지 교회의 보호자와 교회의 축복을 지켜 주는 자가 되실 것을 교회에 확신시켜 주고, 또 그러한 구원이 한 시대에만 국한되어 행사된 것이 아님을 확신시킴으로써 용기를 북돋워 주신다. 그러므로 바로 그 옛날 사람의 후손들에게는 이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자기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고 돈독히 하는 수단으로써 좋은 근거가 된다. 저자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에 하나님이 행하셨던 모든 이적들을 셈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일부만을 말함으로써 모세가 길게 말했던 모든 것들을 비유적 제유법으로 이해한다. 저자는 '리워야단'을 이스라엘 백성과 광야에 있는 자에게까지 '먹이로' 주었다고 하는데, 이 말 속에는 바로와 그의 무리의 멸망을 암시하는 아름다운 비유가 들어 있다. 이는 마치 다윗이 말하기를 그때에 풍성한 음식물이 그 백성들의 양육을 위해 쌓여 있었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의 원수가 멸망당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결과로 기쁨을 누리면서 평안하고 안전해지는 것은 말하자면 자기들의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서 예비된 음식과도 같다. "사막"이라는 말은 비록 건조하고 메마른 땅을 가진 나라라고 할지라도 해안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사막에 있는 나라들을 가리킨다. 다음 귀절에도 똑같은 문제가 취급되고 있는데, '샘들이 쪼개졌다' 혹은 '갈라졌다'(칼빈 사역 ;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 한글 개역)고 하는 말은 백성들의 갈함을 채워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바위에서부터 물줄기를 흘러나오게 하셨을 때를 가리킨다. 끝으로 '힘센 강들 ; 길이 흐르는 강 - 한글 개역)을 말리우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요단강의 물들을 흐르지 못하게 하사 자기 백성들이 건너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 사건을 가리킨다. 어떠 사람들은 '강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 (에탄)을 고유 명사로 보고 '에단의 강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하지만 이 해석을 전혀 근거가 없는 해석이다.
74;16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 저자는 이제 온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확대되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데 이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직접 나타내시는 특별한 축복을 찬양한 후에 저자는 이제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나타내신 은총을 재빨리 말하고 있다. 저자는 낮과 밤이 서로 규칙적으로 계속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라고 가르친다. 뒷부분에서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태양에게 땅을 비치는 권세와 직분을 부여하셨다고 한다. 그 빛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태양을 덧붙이고 있는데, 말하자면 그 태양은 자신을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 나타나는 수레와도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를 향한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이 아름다운 도구 가운데서 분명하게 비춰지고 있으므로 저자는 마땅히 이것으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확고하게 해주고 견실하게 만들어 주는 논리를 이끌어 내고 있다.
74:17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 여기서 말하는 땅에 정한 경계 또는 한계나 해마다 여름과 겨울이 규칙적으로 연속되는 것은 앞절에서 말한것과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저자가 세상의 맨 끝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각 나라를 구별짓는 특별한 경계를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라간의 경계가 비록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경계선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항상 만족하지 못하는 탐심과 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격렬함에 의해서 자주 무너지고 깨뜨려지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각 민족들에게 경계를 정하여 주사 자기네 영토 안에서 살도록 해주시는 단순한 인자하심도 나타내 보여주신다. 그러나 내 견해로는 이 귀절을 사람의 의지로 혼란시킬 수 없는 경계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즉 이 귀절이 말하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땅의 공간을 살기에 충분할 만큼 허락해 주셨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우기 규칙적으로 아름답게 계속되는 여름과 겨울은 인류의 필요한 것을 위해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의 보살피심과 은총을 명백하게 설명해 준다. 이 귀절에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 무리나 가족들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소홀히 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이는 정당하다.
74;18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 저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자하심을 찬송함으로써 거룩한 자들에게 용기를 갖도록 한 후, 이제는 본래의 기도로 돌아간다. 그는 먼저 자기 백성의 원수들이 하나님을 비방함에도 지금까지 형벌을 받지 않은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탄원한다. "이것을 기억하소서"라는 어법은 강조형이다. 그의 처지로는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오만하게 취급하는 것은 결코 작은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대조하기 위해서 그는 오만하게 하나님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무익한' 또는 "우매한 백성"이라고 말했다. 히브리어 * (나발)은 '어리석을 사람'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악하고 악명 높은 사람'이란 뜻도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을 가리켜 악하고 무가치한 사람들이라고 올바로 표시한다.
74:19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 우리가 "들짐승"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 (하야트)는 때때로 '영혼' 또는 "생명"을 의미할 때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뒷부분에서도 다시 나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귀절에서는 분명히 "들짐승" 또는 '무리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로 보든지 이 말의 뜻은 나약하고 겹이 많은 새의 생명과 사람의 힘센 군대, 혹은 잔인한 맹수를 매우 적절하게 비교한다. 교회가 "멧비둘기"로 비유된 것은 교회가 신자들로 구성된 훌륭한 지체들을 가지고 있지만 원수들과 싸우는 점에서 볼 때에는 그들의 먹이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뒷부분에서는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라고 씌여 있다. 히브리어 * (하야트)가 또 사용되었는데, 이 말이 가진 애매함 때문에 한 귀절 안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두 차례 쓰여진 운치가 있다. 나는 이 말을 "목숨"이라기 보다 '회중'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적은 양무리들을 그들의 강력한 원수들의 무리로부터 보살펴 주시고, 또 보호해 주시기를 기뻐하실 것이라는 기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74:20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 하나님께서 더욱 긍휼을 베풀어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저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한다. 신자들은 자신이 가장 극심한 위험에 빠져 있음을 발견했을 때에조 항상 피난처로 자기들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언약을 맺으시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들의 기도가 상달되리라고 확증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값없는 선택으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택해 주신 점에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이 귀절을 볼 때, 우리가 기도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그 약속을 드리는 것인데, 이것을 어리석고 조롱거리가 되는 것으로 여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추잡한 개와 같은 세르베투스의 망령됨이 얼마나 죄악된 것인가 하는 점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유대인들은 또 자기들이 겪는 압제와 포악함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주위는 모두가 마치 살인자들의 소굴이나 강도의 굴혈과도 같았다. "땅 흑암한 곳"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얼굴을 감추시는 것처럼 보이는 곳은 어느 곳이든 악한 자들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할 수 만 있는대로 자기들의 악행을 모두 가리울 수 있는 곳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74;21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 하나님께서 더욱 긍휼을 베풀어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저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한다. 신자들은 자신이 가장 극심한 위험에 빠져 있음을 발견했을 때에조 항상 피난처로 자기들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언약을 맺으시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들의 기도가 상달되리라고 확증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값없는 선택으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택해 주신 점에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이 귀절을 볼 때, 우리가 기도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그 약속을 드리는 것인데, 이것을 어리석고 조롱거리가 되는 것으로 여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추잡한 개와 같은 세르베투스의 망령됨이 얼마나 죄악된 것인가 하는 점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유대인들은 또 자기들이 겪는 압제와 포악함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주위는 모두가 마치 살인자들의 소굴이나 강도의 굴혈과도 같았다. "땅 흑암한 곳"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얼굴을 감추시는 것처럼 보이는 곳은 어느 곳이든 악한 자들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할 수 만 있는대로 자기들의 악행을 모두 가리울 수 있는 곳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74:22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또 하나님께서 자기 심판대로 오르실 것을 간구한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관용을 베푸신 후에는 "일어나사" 심판주로서의 직분을 결코 잊어버리시지 않았음을 행위로써 직접 보여주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보다 쉽게 이 원통함을 푸시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권리를 주장하시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것은 마치, 지금 당면한 문제는 특별히 주님 자신에 관한 것이므로 주께서는 소극적으로 가만히 계실 때가 아니라고 하는 말과 같다. 동시에 그들은 이것이 어떻게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원통함이 되었는가를 말한다. 그것은 우매한 자들이 매일 주님을 비방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우매한 자"라는 히브리어 *(나발)을 '무익한 자'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사악한 자라고 불리는 자들은 형편이 점점 더 악화되어 한번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고 계속 거침없이 비웃음과 비방을 터뜨린다. 이로 인해서 성도는 결론짓기를 단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비방하는 파렴치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맹렬하고도 포악하게 하나님을 향해 자기들의 비방을 퍼붓는 사람들에게도 하늘의 형벌을 내리시는 일을 잊지 마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한다. 왜냐하면 사실 그들은 그러한 작태를 간접적으로 행한 것 같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함으로 고대의 거인들처럼 뻔뻔스럽게도 무모하게 "주를 항거"했으며 그들의 오만함은 극에 다달았다는 사실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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