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시편 07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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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 다윗은 임종시에 자기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아들에게 이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주시라고 아들을 아끼는 마음에 간구하고 있으며, 동시에 교회의 신실한 자는 한 분 되시는 머리 위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순조롭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경의와 모든 순종을 이러한 합법적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모형이 되는 나라를 통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께 인도되리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컨대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왕에게 정의와 지혜의  영으로  부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시인은 "의"와 "판단력"이라는 말로써 바르고 정당하게 다스려지는 나라의 통치를 노래한다. 시인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포악한 왕들이 자기들의 소원을 따라 반역적이고 난폭한 방종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사 직분을 맡겨 주신 이스라엘의 거룩한 왕은 세상의 다른 왕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어떻든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지시하심이나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세상의 통치는 올바르게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만약 왕들이 스스로가 온전하게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다윗은 그들안에 이미 갖추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기도로 간구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의와 심판이 왕들에게 임하기를 간구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손으로  말미암아 빚어지지 않고서는 존귀하게 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왕들에게 깨우쳐  주고 있다. 따라서 솔로몬의 잠언에서 지혜가 말하기를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잠 8:15)라고 말한다. 세상의 정부가 뛰어난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신 분임을 알게 하려 함이요,  정부에  대한 모든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하심임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 말씀은 결코 이상한 말씀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 의미보다는 좀더 특별한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곧 세상에 합법적인 정부를 세우시고 유지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역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가 다른 모든 나라보다 우선 택하신 거룩한 나라를  유지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특별하신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일은 더욱 더  필요한  것이다. "왕의 아들"이라는 말은 다윗이 자기 후계자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동시에  다윗은 "네 몸의 소생을 네 위에 둘지라"(시 132:11) 하신 약속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 귀절은 다윗의 후계자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솔로몬이  죽은  후에 왕국의 위엄이 땅에 떨어지고,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 나라의 재물은 손상을 입었으며, 굴욕적인 죽음이 그들의 왕을 괴롭혔고 나라가 완전히 파멸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바벧론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그들의 회복은 먼 훗날 이새의 마른 가지에서 그리스도가 일어날 때까지는 그들이 큰 소망을 가지고 바라던 것과 같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들 중에  첫번 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72;2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오,  저가  판단하소서......'라고 기원 형식으로 번역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미래 시제를 반대하고 이것이 예언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중간 입장을 취함으로써 함축된 의미의 보다 정확한 해석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왕에 관한 모든 말씀들은 1  절에서 간구했던 축복들이 그에게 베풀어졌다는 가정에서 나온 말씀들이다. 즉 그가 의와  판단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한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오  하나님이여! 우리들의 왕으로 하여금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다스려  주시옵소서'라고 해석하든지, 아니면 '주께서 왕에게 주의 의를 베푸시면 그가 바르게 판단하게 될  것이니이다'라고 해석되어져야 한다. 백성을 잘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고귀한 재능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적인  통치에  의하여 모든 것들이 완전한 질서를 회복하게 되는 것은 하늘의 은사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윗은 1 절에서 일반적인 모든 백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2  절에서는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빈곤과 나약함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므로, 왕들은 이들을 위해서 무장하고 이들이 부당하게 압제당하게 되면 감싸 주어야 할 자들이다. 그리고 3 절에는 "평강"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히브리사람들은 "평강"이라는 말을 '휴식'이나 '편안함'을 가리킬 때만 사용하지 않고 '부유함'을 가리켜 사용하기도 했다. 다윗은 이 말씀을 통해서 나라의 행사가 의의  원리에 의해서 행해질 때에 백성들이 부유함과 행복함을 즐기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평강을 주며"라는 말씀은 땅의 비옥함에서 취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 나라의 어떤 구석도, 심지어는 가장 가망이 없어 보이는 부분까지도 적에게 이기지 못하는 곳이 없을 산들, 즉 일반적으로 볼모지로 알려지거나 최소한 계곡처럼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없는 곳으로 알려진 장소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한편 "평강"이라는 말과 "의"라는 말이 한 귀절에 서로 연결되어 두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는데, 이것은  공의로 말미암는 평강이 세상의 모든 부분에까지 확대되어져야 할 것을 의도한다.  어떤 사람들은 "의로 인하여" 대신에 단순히 '공의'라고 번역하면서 여기서 자주  반복되고 있는 *   (베트)라는 문자를 무시해 버리고 있다.

72;4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 시인은 계속해서 의로운 통치의 결과와 그 열매에 대해서 묘사하면서 자기가 짤막하게 언급했던 백성들 중에 핍박을  당하는  장에 관해서  보다 더길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왕들이 공의와 공평으로 자신을 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라는 진리를  마음속에  간직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왕들이 하늘에서 주시는 의의 영으로 지배받지 않게 되면 그들의 통치는 전제정치와 폭군정치로 전락되어 버리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돌보시기로 약속하셨으므로 다윗은 왕을 위해 드리는 기도 가운데서 이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가난한 자를 위로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실로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하게 보살펴 주시는 것이다. 만약 율법과 공의의 시행이 없어진다면 힘이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형제들을 더욱 압제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특별히 왕에게 말하기를 판사의 보호를 받음으로만   안심할 수 있는 자들을 보호하고,그들이 부당하고 그릇되게 희생당할 때에는 그들의 원수를 갚아 주는 자가 되라고 한다. "궁핍한 자"를 말할  때  매우 흔하게 사용했던 말이다. 때때로 헬라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 것을
(휘우스 이아트론;의사의 아들들)이라는 말로'의사들'을  가리킨  것을 볼때에  알 수 있다. 왕은 다윗이 자기에게 지워 준 가난한 자들을 구해 주고  보호해 줄 의무를 수행하려면 권위와 칼의 위력을 가지고 악한 자들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귀절 끝에 의가 다스리게 되면 '핍박하는 자'혹은 '강탈하는 자들은 산산조각이 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리를 내놓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은 마땅히 자기들의 뻔뻔스러움과악함을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도록 칼로 말미암아 압제를 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왕이 지혜로운 자가 되어 포악하고 사악한 자들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온유하며  올바르게 질서를 잘 지키는 자들이 손해받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일은 필요불가결한 일이다. 이와 같이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엄격하게 보호와 억제를 시행하는  일을  배우지 않는 자는 결코 백성들을 다스리는 자로 합당치 못하다. 나약하고 소극적인  통치하에서, 혹은 너무 얌전하여 참고 넘기기만 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  밑에서는  필연적으로 방종이 일어난다. 모든 일을 너그럽게 하는 것만 옳게 여기는 임금 밑에 사는  것보다 아무것도 전혀 행할 자유가 없는 폭군 밑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한 옛 말에는 많은 진리가 들어 있다.

72;5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 이 말씀은 호칭으로  보든지,  아니면 인칭을 바꾸어 번역하면 왕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의미가 더 명확해진다.  이  말씀의 뜻은 왕이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경의를 받을 수 있는 요인이나 특성이란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권리를 누리도록 보호해 주어야 하며 항상 가난하고 비참한 자들을  구하기 위한 인본주의적 정신으로 준비해야 하며 아울러 악한 자의 뻔뻔스러움을 멸하려는 준엄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칭을 바꾸지 않고 하나님 자신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성 있게 보인다. 사람들이  피차  공평이 유지되는 것은 측량할 수 없이 크신 축복이지만, 이것보다도 더욱 고귀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거룩하고 의로운 통치의 복된 열매를  우리에게 매우 적절하게 말해 주면서 잇달아 참된 종교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여기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왕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면서 우리의 기도 중에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 2:2)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세상  정부가 무너진다면 종교가 파괴되거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폐기될 위험이 적지 않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왕을 지켜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또 다윗은 이 말씀을 통해서 열왕들에게 자기들의 의무를 기억나게  함과  동시에 백성들에게는 기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간구가 기도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화롭게 함을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은 진실로 다른 무엇보다도 귀한 일이다. 참된 종교는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있는 것이다. 또한 다윗은 세상 끝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길 것을 말하는데,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에 대한 염원으로 가득차 있다.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2:6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 - 이 비유는 처음 언뜻 대하게 되면 약간 어색한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선하고 공평한 나라의  체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이점을 재치 있고 적절하게 나타낸다. 우리가  아는 대로 풀을 베는 시기는 더위가 맹위를 떨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새로운 습기를  섭취할 수 없으며, 풀포기의 뿌리마저도 메마르고 갈한 토지의 상태로 말미암아 말라 버리는 초여름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햇빛으로 뜨거워진 대지를 비를 내리사보존하시는 것과 같이, 교회의 축복도 이러한 방법으로 예비하시며 왕의 통치  아래서 유지되도록 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은밀하신 은총으로 교회를 흡족케 하사 열매를 맺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루셨다.

72:7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 이 말씀은 모두 1 절에 연결된 말씀이므로  나는  한 번 설명한 것을 다시 되풀이해서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다윗은  왕에게 의와 판단력을 채우사 흥왕케 하시어 백성을 공정하게 다스릴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실로 솔로몬이 해야  할  의무는 의인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의롭게 만드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가지신 것을 각 사람들에게 내어 주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이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각 사람을 새롭게 해주신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의인을 만들어 주시는 것이 마치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자들을  포로된 자리에서 돌아오게 해주시는 것과 같다. 의인이 흥왕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깨닫게 해준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은 범사가 왕되신 그리스도 아래서 볼 때에는 행복과 경사의 표징임을 깨닫고 기뻐하게 된다. 혹 어떤 사람이 "평강"이라는 말을 더욱 적합하고 보다 함축된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 할지라도 나는 이에  대해서 반대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란 대부분 전쟁의  와중과 치열함 속에서는 모든 소유물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릴 것에 불과하므로 풍부하게 소유하기를 다 싫어하는 것은 행복된 삶의 극치란 평강이외에 아무것도 더 바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윗은 왕의 생명이 세상 끝날까지 계속하리라고 한 말 속에서, 단지 세상적인 보좌를 차지하게 될 자기의 후계자만을 묘사하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사 스스로 하늘의 생명과 영광을 취하고 영원히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게  될 그리스도까지를 내다보고 말하는 사실도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72:8-9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다스리리니, -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실 때, 이와 같은 사방의 경계를 세우셨기  때문에(창 15:18) 다윗은 신실한 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왕국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한 그 약속받은 땅을 마침내 온전하게 차지하게 될 것이며, 이 나라가 흥왕하게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축복이 완전하게 성취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가 홍해, 즉 애굽의  세력이 미치고 있는 바다에서부터 블레셋 바다라고 불리는 수리아의 바다까지를, 그리고 유브라데스강에서부터 그 큰 광야까지를 다스리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좁은 경계는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 이르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범위와  부합되지 않는다고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다윗이 아직 완전하게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보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그 당시 자기가 사용하던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율법과 선지서에서  잘  알려졌고
흔히 사용되었던 어법(語法)을 가지고 묘사의 출발점을 삼고 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까지도 자기가 다스리던 제한된 통치 구역을 들어 그의 나라의 경계가 땅 끝 가장  먼 곳까지 미치고 있음을 예표하고 있다. 시편 110편 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라고 했다. 그러나 시인은 곧이어 이 왕이 다스릴 왕국의 범위를 확대하여 말하기를 바다 건너에 있는 왕들도 그에게 공물을  드리며 광야에 거하는 자들도 그의 멍에를 메게 될 것이라고 한다. "광야에  거하는  자"라고 번역한 *     (치임)이란 말은 가나안땅에서 남쪽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사는자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인은 또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라는 말로 그들이 경배를 드리게 될 모습을 곧이어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고대 중동 지방의 나라들에서 행해진 습관적인 예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알렉산더 대왕은 동방 나라들을 정복한 후에 그 나라들에게 이러한 예식을 행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마게도냐 사람들은 피지배국의 이와 같은 노예적이요, 불명예스러운  표지에 복종하기를 거절하고 경멸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유다에게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왕이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원수들을 쳐부수고 완전하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들은 겸손하게 왕께 충성을 바치게 된다는 의미이다.

72:10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 시인은 앞절에서 언급했던  왕국의  범위에 대해서 계속 말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길리기아로 향하는 모든 항구들으 "다시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므로 "섬"이라는 말은 길리기아에서 그리이스로 향하는 모든 지중해의 항구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생산되는 물건들로  만족하였기 때문에 다르 나라나 먼 지방으로 여행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백성들이 낯선 습관들로 인해서 타락하지 못하도록  자기들 나라 영토 안에서 머물기를 원하셨음이 분명하다. 이런 이우로 해서 이들은 바다 건너편에 있는 나라들을  "섬"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구브로, 그레데 외의 다른 섬들도 이 이름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지중해 건너편에 위치란 모든 나라들도 가리킨다고 확신한다. "공세"라는 *        (미느하)와 "예물"이란 *         (에쉬카르)는 자진해서 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어떤 의무나 습관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은 원수들을 지배하게 된 표지나 증거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명칭은 이같이 커다란 정복의 징표에 당연히 따르는 증오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곳에서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 같다. 이것은 영감을 받은 저자가 종속(從屬)들이 왕에게  바쳐진 공세를 몰래 탈취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      (스바)는 아라비아를 가리키고 *      (시바)는 에디오피아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      는 아프리카 쪽을 향해서 위치한 모든 아라비아의  늪지대를 가리키는 것이요, *  (싸멕)이라는 문자가 있는 *      는 살기가  좋고  소출이 많이 나는 나라이 시바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으로는 두 가지 중 후자가  더 옳은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로마 교회가 이 귀절에 대해 왜곡하고 있는 어리석음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가를 논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들이 이  귀절을  그리스도께 경배라기 위해 나오는 철학자나 현명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으로써  열왕들에
대한 말씀을 순식간에 자기들이 확보하고 있는 철학자들의 능력에 관한 것으로 날조한 결과를 저지르고 있다. 이것으로 말미암는 결과는 세상의 4분의 1을 바꾸거나 동을 남이나 서로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일 것이다.

72:11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 이 귀절은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권위로 다스림을 받게 될 사실을 보다 명확히 진술하고 있다. 유다 왕국은 분명히 솔로몬이 통치를 할 때 보다 더 번영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솔로몬 임금에게 공물을 바쳤던  왕들의  수자는 매우 적었고 그들이 드린 예물의 분량도 매우 하찮은 정도에 불과했다. 더구나 이  예물은 자신들의 법 아래 자유를 누리며 살 것이 허락된다는 조건하에 바쳐졌다. 그런데 다웠은 아들과 또 그 아들의 자손에 대해서 말하기를 시작할 때에 예견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을 예언했다. 이 점은 우리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 것도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기로  이미 계획하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교회, 즉 그리스도의 양 무리 속에는 열왕들을 위한 장소도 있다는 사실이다.  다윗은
여기서 열왕드을 교회 안으로 모으기 위해서 무장을 해제시키거나 그들의 면류관을 빼앗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부복한 모든 위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72:12-14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 시인은 자기가 그렇게도 크게  확장시킨 나라가 결코 반역적이거나 잔인한 나라가 되지 않을 것임을 또다시 확언한다.  왕들의 대다수는 일반 대중의 복지는 도외시하고 사적인 관심사에 마음이 온통 사로잡혔다.결과적으로 이런 왕들은 그들의 비참한 종속을 무자비하게 억압한다. 심지어는 그  행위가 잔혹하고 그 탐욕이 담대하면 담대할수록 그만큼 더 훌륭하고 뛰어난 왕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왕은 매우 다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축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잠언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자기와 가까이 있게 하신 왕들에게  보여주시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랑하는 왕은 마땅히 공의와 공평을 지켜야 할 뿐만아니라, 가장 멸시당하는 자를 구원할 수 있도록 자비하고 인자한 자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성품은 자신의 영달에만 눈이  어두워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과는 거리를 멀리하는 통치자들에게서는  매우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이와 같은 일들을 무익하고 가치없는 일로 여기고 왕권을 사용해서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고 있다. 다윗은 흔히 미천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반 백성들의 피를 이 하늘에 계신 임금께서는 매우 값진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저희...구속하리니"라는 말은 불변성과 너그러움을 뜻하고 있다. 왜냐하면  왕이 해야 할 의무는 단순히 사기나 강탈을 미워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단호하게 이같은 죄악을 벌하고 압제당하는 자들을 지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압박"과 "강포"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 그릇된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사자나 혹은 여우와 같은 자이다. 어떤 자들은 심한 분노를 발하는가 하면, 어떤 자들은 은밀한 방법으로 남모르게 악을 저지르고 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점과(마 28:18), 권세를 가진 자들은 백성들이 모든 고통에서 건짐을 받을 때까지 일시적인 모든 위험뿐만 아니라, 특별힐 사단의 모든 공격과 괴롭힘에서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 깨닫게 된다.

72:15
 저희가 생존하여 - 어떤 사람들은 "생존하여"라는 말이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는데, 이 생각은 무리인 것 같다.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왕이  오래 사는 축복을 받으리라는 것과 이 장수(長壽)는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 중에서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다음 계속되는 말은 어떤 특정한  사람을 지적하지 않고 다만 막연하게 지칭한 말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아라비아의 황금을 저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모든 곳에서 저의 번영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라는 뜻으로 앞에서 저의 권세에 대해서 말했던 바를 다시 한 번 반복할 것이다. 만일 아라비아가 저에게 공물을 바쳤다면 수많은 인접 국가들로부터 모아들인 재물의 분량이 얼마나 막대하였겠는가!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황금을 쌓아 두시지는 않지만, 다윗은  이 비유를 통해서 가장 먼 곳의 나라까지도 저에게 복종하며 모든 소유물들을 바침과  같이 그리스도께 충성을 바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영적인 그리스도  왕국의  영광을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호화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별로 특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성경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입장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 영적인 성격상 재물과 구분 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교황주의자들이 이 귀절으 곡해함으로써 세상의 썩어질 재물을 긁어  모으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사악하며 터무니없는 짓인가를 보여준다. 또 다윗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기도로 하나님의 보살펴 주심으로 왕이 번성하시를 간구할 것이라는 말에서, 백성들이 저의 백성이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길 것이라는 점과 그들은 왕의 권위 앞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가장 바람직하게 여길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많은 자들이 자신의 멍에 매기를 거부하고,  위선자들은 초조해하면서 남몰래  마음속으로 불평을 내뱉고, 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기억을 기꺼이 떨쳐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언되고 있는 높으신 이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관심은 모든 참된 성도들이 갖추고자 하는 성품이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이 땅의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마땅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기를 바라고 이 나라에 하나님의 엄위가  비취며, 또한 자기들의  재물과 행복도 마땅히 여기에 포함되기를 특별한 욕망과 열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118편 25절에서 모든 교회가 본받아야 할 기도의  모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종들에게 참된 경건의 증거를 요구하심이 당연하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72:16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 "풍성하고"라는 말은 적게 뿌린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자들의 견해는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여기에 언급된 두 가지의 실례는 진귀하고 흔하지 않은 비옥한 땅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손으로 쥘 수  있는 정도의 매우 적은 양의 곡식이 뿌려졌고 그것도 대부분 열매를 거둬들일  수  없는 산꼭대기에 뿌려졌지만 매우 풍성하게 자라게 되어 그 이삭이 마치 레바논의 나무들같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물결을 이루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윗이 씨뿌릴 때와 추수할 때를 한꺼번에 비교하여 그렇게 말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 말씀은 다윗이 단순하게 산출할 것이 너무 많아 산꼭대기에서 거두게 될 곡식이  풍성해져서 손에 가득히 베어 들이게 될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즐기게 될 모든 좋은 것들이 지극히  풍성함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엔 자녀들의 번성함도 첨부된다. 땅의 소출은  모든  갖가지 열매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라는  말과 이 성읍 사람의 번성함도 그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레바논"이라는 말을  주격 대신 소유격으로 번역하고 싶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약간 거칠게  표현된 대로 레바논이란 산의 이름은 그 산에 있는 나무들 대신에 환유법으로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72:17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 영감을 받은 저자는 이 나라의 영구적인 지속에 대해 앞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조심스럽고도 명확하게 이 나라와 땅에 속한 나라들, 즉 순식간에 없어지든지 아니면 조만간 자기가 가진 힘에  짓눌려 멸망에 떨어짐으로써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견고한 것이 없으며  오래  지속되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자기들의 멸망으로 명백하게 증거해 주가 나라들과를 구별하고 있다.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라는 말씀은 마치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려는자들이 자신의 이름이 자기 육체와 함께 묻혀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죽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이름이 계속해서 남아 있기를 단순하게 의미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는 없다. 이보다는 차라리 이 임금의 이름이 계속해서 유명해지며 영원히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한 말은 그 나라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해와 같이"라고 번역한 *              (리프네 슈메쉬)란 말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유다 왕들에게 부어 주실 영광이 햇빛의 찬란함을 능가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문맥상 서로 모순된다. 왜냐하면 5 절에서 언급한 "해가 있을 동안에"  그리고 "달이 있을 동안에"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왕의 이름이 영원히 지속할 것을 말한 후에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라는 설명을 추가하고 있다. 이 말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그의  이름이 자녀들을 가질 것이라'이다(왜냐하면 이 말의 히브리어 동사가 '아들'이라는 명사에서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이름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계속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마치 태양이 매일 떠올라 세상을 밝혀 주는 것처럼 이 왕의 힘이 날로  새로와져서 자자손손 영원토록 계속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해와 달을 영원한 것의 증인이라고 부른 것을 우리는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시 89:37).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다윗 시대에 잠간 동안 꽃을 피웠다가 삼대째에 그 힘을 잃어버렸고 얼마 안가서 수치수럽게 망해 버리고 말았던 이 땅에 속한 나라를 가리키는 말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리킨다. 비록 그 나라가 모든  세상의 맹렬한 증오를 당하거나 가장 무시무시한 사단의 병기와 더불어 싸우게 될  때는
흔히 이 땅에서는 비틀거림을 당하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놀랍게도 보존되고  붙들림을 받아 결코 완전히 쓰러지지 않는다. 그 다음에 나오는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축복을 간구하는  기도의 모형이나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은총과 자비하심을 다윗에게 부어주심과 같이 그렇게  해주시기를  구하는 자라면 그는 다윗과 더불어 스스로를 복되게 하는 자이다. 반대로 소돔과 고모라의 이름은 어떤 저주를 하는 말로 쓰여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라는 말과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라는 말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사람들이 왕을 복되다'라고 한 것은 '온 세상에서 칭송을 받을 만하게 행복한 처지에 있었던, 이 하늘의 축복을 받은 왕에게 임하였던 그 축복과 똑같은 번영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기어이 이 두  가지  표현을 구별하려고 생각한다면(얼마든지 있음직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왕을 복되다'라고 한 것은 그 왕에게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모든 열방들이 그에게서 율법과 명령을 받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72:18
 홀로......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 다윗은 자기 후계자들의 번영을 위해 기도한 다음 하나님께 찬송을 터뜨린다. 그 이유는 자기의 기도가 하나님의 계시로 인하여 헛되지 않게 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만일 다윗이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그의 기쁨은 한낱 헛된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만이 "홀로 기사를 행하신다"라고 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탁월함을 말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그런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시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능력을  행해 주시도록 기도하게 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이 말을 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보좌가 결단코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한 말씀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파멸하고 말았던 다윗의 후손들을 두고 한 말씀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솔로몬이 당했던 가장 수치스러운 반역은 쓰라린 멸망을 가르쳐 주지 않는가? 또 요시아,  히스기야, 여호사밧 기타 몇몇 사람을 빼놓고는 다윗의 모든 후계자들은 마치  조상들보다 더욱 악해지려고 기를 쓴 것처럼 점점 더 악해져서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 밖에 없었음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멸망하기 위해 분노의 벼락을  즉각적으로 때리시지 않을 것은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예언의 영을  부여받았던 다윗은 사단이 교회가 잘 되는 일에 항상 잔인스러운 원수가 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히  보존되도록 하기 위해서 크고도 험난한 어려움들을 막아내 주시리라는 것도 알았다.  후일에 일어날 사건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신 것에 의해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그 약속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벧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나뭇가지에서 돋아난 연한 순같이 오시므로 이루어진 그 놀라운 구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선한 의도에서 하나님 이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케 되도록 기도한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땅 끝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가장 정직하며 마음에 불타는 사랑을  지닌 모든 경건한 자들은 '아멘 아멘'하고 회답하면서 다윗이 드렸던 기도와 동일한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72:19
그 영화로운......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 이 말씀은 솔로몬이  아무 뜻도 없이 공연히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가  시적인 구문을 맞추기 위해 이 말을 하게 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솔로몬이 자기 아버지가 받아야 할 찬양을 자기에게 속한 것인 양  속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윗이 최후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같은 기도, 즉 교회가  번영하도록 하나님께 더욱더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말을 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제 우리는 교회가 인자의 통치 아래서 유지되고 보호함을 받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거짓없는 진실과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기도의 의무가 우리에게 지워졌다는 것을 기억하자.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이름이 여기에 소개된 것은 다윗의 근원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인 것 같다. 다윗은  보잘것없는 한 사람의 목동으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연약하다고 생각되는 자였는데, 그를 일으키사 가장 영광을 받을 만한 높은 지위에 올리시고 택한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만들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보다 쉽게 설명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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