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69;1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 "물들"이라는 표현으로 시인은 자신의 처지가 극도
의 절망에 사로잡혀 심한 곤경에 놓여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
가 부드럽고 여성다운 사람이었다기보다는 무서운 시험을 비상한 용기를 가지고 대하
여 이겨 낸 자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가 그 당시에 당했던 고통의
쓰라림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영혼"이라는 말이 '생명'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차라리 '심장'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잠
시 동안이나마 숨을 쉬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깊은 물속에 빠진 사람은
입과 코가 막혀 질식당하여 그 물이 심장에까지 침투할 것이므로 자기 몸이 물에 빠지
지 않도록 막을 것이다. 다윗이 이 비유를 통해서 나타내고자 한 것은 단지 물이 자기
를 뒤덮고 억누른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자기 몸 안으로 들어오려는 위협을 당
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69;2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 여기서 다윗은 그가 당하는 고통을 더욱
위험한 깊은 수렁에 비유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단단한 바닥에 발을 딛고 있다면 그
는 혼자서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바닥에서는 갑작
스럽게 일어나는 사고나 큰 물의 위험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한 번 수렁이나
늪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요, 도저히 스스로 살아날 방도가 없다. 시인은
고통당하는 형편을 설명함에 있어 또 다른 실례를 말하고 있다. 그는 "깊은 물에 들어
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라고 한다. 이 말은 그를 괴롭히고 핍박하는 것들이 가
져오는 무질서와 혼란을 가리킨다.
69: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 다윗이 그러한 혼란과 격심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은 것은 보기 드문 놀라운 인내의 실례를 보여준 것이다. 그는 자기가 권
고받을 때까지, 목소리가 쉴 때까지, 모든 소망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부르짖었다
고 탄원한다. "피곤하여"는 그가 기도하기를 포기하여 마치 전심으로 하나님 사랑하기
를 그치고 구원의 방편으로써 무익한 것을 찾아 나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오래 참음을 말하는 것이다. "목이 마르며"와 "눈이 쇠하였나이다"라
는 말의 의미도 이와 같은 뜻이다. 다윗은 분명히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거짓으로
부른것이 아니다. 이렇게 목이 쉰 것은 온 종일 부르짖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
므로 우리는 비록 그가 육체의 감각은 쇠하였지만 그의 신앙의 용기는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다윗이 말한 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사실은 그리스
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모든 참된 성도들의 입에서부
터 나오는 말씀이다. 설혹 어느 때 우리에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와 같은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삶의 소망을 분간함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칠 수 없
는것으로 여겨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이 진리에서 가르쳐 주는대로 하나님께서 우리
를 구해 주시며, 재난 중에도 적합한 도움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을 곧 깨닫도록 하자.
가장 극심한 깊은 역경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 그 외에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도록 하겠는가? 바울이 증거한 대로(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지옥까지라도 모든 깊음을 말끔히 없애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69:4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 시인은 자기가 수렁과 거세게 밀
려오는 큰 물로 비유했던 것을 이제는 비유하지 않고 직접 말한다. 수많은 원수들의
무리에게서 당한 그의 핍박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면에서 죽음의 공포를 주기에 충
분했다. 다윗이 자기 원수들이 "내 머리털보다 많다"고 말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
는 온 나라에서 치명적인 증오와 믿음을 받는 미천한 사람이며, 자기 나라를 반역한
흉악한 반역자라는 일반적인 평을 받았다. 더우기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사울이 그를
죽이기 위해서 보낸 군대가 얼마나 많았으며 막강했었는가를 알고 있다. 그들이 고의
적으로 자기를 패망시키려 했고 처참하게 죽여 없애려고 열렬히 바랐었다고 다윗이 말
한 것은 치명적인 증오를 의미한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그러한 가혹한 핍박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일이 없다고 공언한다. 우리가 '까닭없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
(히남)을 어떤 사람들은 '쓸데 없이'라고 번역하고, 이것은 다윗이 그들에게 가장 사
소한 잘못조차도 행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도전하는 어떤 해로운 말을 한 마디도 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윗을 해하기 위해 강렬히 불타던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다윗이 그의 원수들을 가리켜 * (셰케르), 즉 '거짓말장이들'이라는 다순
한 칭호를 사용한 이유도 비록 그들이 자기를 대적으로 삼았을지라도 자기는 그들과
싸워야 할 만한 가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을 본받아서
혹 우리가 핍박을 당할 때가 있을지라도 결국 선한 양심의 증거가 일어난다는 것과 원
수들이 우리를 거스려 원한을 품는 증오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기꺼
이 항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이 말은 사람이 스스로 자제한다는 것
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스스로 자제하려는
노력을 더욱 굽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을 참기 어려운
악으로 여기는 것은 단지 나약한 것이다. 이러한 어리석음이 소크라테스의 그 고상한
대답에 의해 드러나 있는것은 아주 즐거운 일로서 소크라테스가 부당한 정죄를 받고
감옥에 갇혀 있던 어느 날, 그는 탄식하는 그의 부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자, 무엇
때문에 그러오? 내가 오히려 범죄로 인하여 죽음의 고통을 받기를 바라오?' 더우기 다
윗은 맹렬히 거스르는 자들에게서 고난을 당할 뿐만 아니라, 마치 많은 죄로 정죄를
당한 사람같이 욕을 당하고 모욕적인 대접을 받았다고 말한다. 순진한 사람이 배반을
당하는 것은 백 번 죽는 것보다도 더 쓰라리고 견디기 어렵다. 단호하게 죽음을 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은 수치를 견디는 것도 그와 같은 꿋꿋함을 보여줄 준비
가 된 자들이다. 다윗을 탈취하고자 하는 자들이 격렬함으로 인해 자기의 선한 것들을
탈취당했을뿐만 아니라, 마치 그가 절도요, 강도인 양 그의 인품이 찢겨지고 말았다.
"내가 취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이와 같이 원수들이 그를 약탈하고
학대했을 때 그들은 분명히 자기들의 행위가 사악하고 악한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었다
고 자랑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를 통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고통, 심지어 죽
는 것까지도 끝까지 인내하고 견딜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설혹 근거
가 없는 비난으로 짐을 지워 비난하고 수치를 당케 할 때에라도 끝까지 견딜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모든 의와 거룩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도
부당한 비방을 당하시는 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와 비슷한 반역을
받을 때 어찌 낙심할 수 있겠는가? 비록 이러한 것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은 보상이기
는 하지만 의를 실행하기를 꿋꿋이 지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완전함을 시험하는 것임
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을 지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69:5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 어거스틴은 이 말씀이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
도에게 적용되는가에 대한 문제로 매우 고심했었다. 그는 교인들에게 길게 설명하기를
머리로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다윗은 여기서 반어법을 사용한다. 그는 이 표현 방법
을 통해서 그가 사람들에게 부당한 판단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또 자신을 하나
님께 맡겼음과 하나님께서 자기의 보호자로 나타나실 것을 간구한다. 이것은 다윗이
자기의 완전함이 아무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알려졌음을 명백하게 단언하는
것보다도 더욱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이 말씀으로 그의 원수들을 날카롭게 꾸짖고,
그 원수들이 자기를 거스려 비방하는 말을 정중히 경멸하고 있다. 예레미야도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렘 20:7)라고 말했다. 어떤 무식한 사
람들은 예레미야의 이 말을 극단적으로 해석해서 마치 그가 실제로 권유를 받은 것으
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가 비방자들에게 쓰라린 비방을 받은 것은 그들
이 그를 악하게 말하면서 하나님을 또한 비방하고 욕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
이다. 이와 같이 다윗도 이 귀절에서 사람들의 사악한 심판으로써 자기를 비방하는 것
을 견디면서 하나님께 자기 원수들의 심판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선한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를 추측하는 성격과는 많은 부당한 차이점이 있다고 본
다. 우리의 완전함을 사람들이 알아 주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이것이 자신에게만
이 아니라 우리 형제들의 건덕(建德)을 위한 것이 된다는 것은 실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이 칭찬하고 호의적인 생각을 가질 만한 일을 우리 힘으로 이루
어 놓았는데도, 만일 그들이 우리의 모든 선한 말과 모든 선한 행위를 곡해하고 그르
친다면 우리는 담대하게 세상과 모든 거짓된 비방자들을 멸시하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는 오직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자기들
의 마음을 연약하게 만드는 경험만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사람들을 만족하게
해줄 수 있는 준비를 하도록 하자. 그러나 만일 그들이 나쁜 결과가 올 때에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4 장 5 절에서 보여준 대로 나아가도록 하자. 바울은 두려움없이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라고 하나님의 판
단하심을 호소했다.
69:6
만군의 주 여호와여...... - 다윗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소
망 혹은 절망의 문제를 예를 들어 제시한다. 비록 그가 대다수의 백성들에게는 미움과
저주를 받았지만 아직도 그의 무죄함을 공평하고 정당하게 증명해 줄 수 있는 적은 수
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다윗이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부당하게 고통을 받고 있
음과, 그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의 용기를 무력하
게 만들 유혹이나 참된 경건 생활을 계속해서 실천함을 막을 만한 것이 그에게는 없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옳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으며 비방을
당하는 것을 볼 때에 다만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고통과 수고를 완전히 내던
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을 구원하시는 모든 실례들은 하나님께
서 우리를 위하시는 선하심과 은총에 대한 확증을 주는 증거들이다. 믿음이 있는 자가
큰 실망을 당할 때 다윗은 지금 이러한 사람들의 위험성을 하나님 앞에 아뢰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필요성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
리로 하여금 친밀하게 은혜의 보좌에서 그와 함께 대하기를 허락해 주신다. "바라는"
이라는 말은 소망을 의미하고 "하나님을 찾는"이라는 말은 기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해된다. 이 두 가지의 말들이 서로 관련을 갖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유익한 교훈은
믿음이란 활동성이 없이 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우
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자극시켜 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69:7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 다윗은 5 절에서 비유적으로 말했던 사실,
즉 자기의 실수가 하나님 앞에 감추어지지 않았음을 이제 보다 명확히 말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자기가 원수들에게서 받은 악한 대접은 부당하고 전혀 근거가 없을 뿐
만 아니라, 자기가 받은 대접은 실로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무엇
을 계획하고 무엇을 행하였든지 간에 모두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표식이었기 때
문이다. 사울은 다윗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른 이유, 최소한 다른 핑계를 가지고 있었
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왕으로 기름
부으신 자임을 전혀 의심치 않고 계속 말함으로써 다윗은 여기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를 비난하고 격렬하게 정죄하는 것은 자기가 악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이었다고 탄원한다. 참다운 성도들은 자기들이 계획하고 행한 일은 무엇
이든지 하나님께 그 근거가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었다고 탄원할 수 있을
때 가장 큰 위로를 받는다. 만약 우리가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과 우리들이 바
라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면, 악한 자들이 항상 하나님의 진리
와 참된 종교를 공격할 때보다는 맹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이중(二重) 확신을 갖
는 근거로 삼아야 하다. 우리는 또 이 귀절에서 참된 신자들이 생명력을 얻어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열심을 비방과 비난거리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악함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한 자로 하여금 우리를 핍박하게
하심으로써 비방을 없애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치켜세워서 세상의 모든 영광과 승리
이상 가게 하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유익이 된다. 시인은 자기의 가족과 형제들에게서
잔인하게 내쫓김을 받은 사실을 덧붙여 말함으로써 자기의 탄원을 한층 더 심화시킨
다. 여기서 우리는 헌신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것으로 인해서 우리를 반대하는 형제들
의 불만을 자극시키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될 때, 혈육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
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 다윗의 원수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에 관한 것 이외에는 자기들의 마음에 간직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가장하지만, 다윗
은 그들의 위선적인 거짓된 것을 일일이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하나님 편에서
싸운다고 단언한다. 다윗은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와 더불어 그의 영혼이 불타
오르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정열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그가 받았던
악한 대접에 대한 원인 - 곧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의 열정 - 을 스스로 허여(許與)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마땅한 이유 없이 그 자신이 어떤 악한 대접의 대상이 되었을지라
도 실제로 그가 보여주었듯이 자신을 잊어버리고 교회, 동시에 교회와는 끊을래야 끊
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동시에 위하는 거룩한 열성으로 불
타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보다 분명히 하려면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비록 모든 말로써 하나님께 그가 받으실 만한 영광을 돌린다고 할지라고, 그들
이 도덕과 거룩한 삶의 규율이 되는 율법의 준행을 강요받을 때에는 다만 하나님을 속
이게 될 뿐이요, 또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거스려 맹렬한
노를 발하면서 대적하게 된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입술로만 존경받고 섬김받기를
원하시기나 한 것처럼 또한 하나님이 인간들 중에 보좌를 세우시지도 않고 율법으로
그들을 다스리시지도 않는 것처럼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여
기서 교회를 하나님 집 안에 있다고 했다. 이것은 교회를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변형
시키려는 의도에서 한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체하는 자들의 거짓됨이
공허한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의 지
배를 받는 일에서 흔들림 받을 때는 교회가 신실한 보호자가 된다. 한 편 다윗은 위선
적이고 거짓된 사람들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인 체 가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급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사울에게 영광을 돌리기를 고집
하면서 다윗을 배교자 혹은 타락한 사람으로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와 같은
부당한 취급을 당하면서도 결코 실망하지 않고 참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모
든 공격을 감수했다. 그는 자기가 원수들의 손에 인격적으로 고난을 당하였던 모든 과
오와 욕설에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은 제쳐 놓고서도
교회를 대적하는 행위에 대해서 만은 결코 잠잠하거나 괴로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
려 강한 슬픔으로 여위어 갔다.
하반절은 같은 내용, 즉 자기는 결코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어
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즉 사악하고 교만한 자들이 다윗을
공격할 생각으로 직접 하나님 자신을 대적해서 그들의 분노와 강포를 발하고 이와 같
은 방법으로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상하게 했으며, 이렇게 하는것보다
다윗에게 더 참기 어려운 것이 없음을 알았다는 사실이다. 또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비방과 비난으로 훼방당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간
구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거스리는 반역죄를 벌한 것처럼
여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도 꽤 지지를 받는다. 나는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다윗은 자신에 대한 것들은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끔찍한 비방으로 모욕을 당하고 훼방을 당하는 것을 볼 때 그의 불타는 거룩한 열성은
온갖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는 의미를 가졌다고 본다. 우리는 여기서 견딜 수 없는 무
시(無視)와 비방을 매우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여겨서 우리의 마음속에 이러한 불행을
평안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비방에는 슬픔과 고통을 느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심한 분개심을 느끼기도 하고, 때
로는 격렬한 언어로 이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으로 당하는 과오
와 비방으로 인한 고난을 불평없이 견디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높이려
고 사소한 것을 찾아 나서게 될 때에는 결단코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하고 높이고자 하
는 참된 열성으로 불붙을 수가 없다. 다윗은 전 교회의 이름으로 말했기 때문에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한것은 무엇이든지 최고의 머리가 되신 분 안에서 성취되는 것
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이 이 귀절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것을 조금도 놀라
운 일이 아니다(요 2:17). 바울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로마서 15 장 3, 5, 6 절에서
신실한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권면하면서 그들 모두에게 하반절을 적용시켰
다. 바울은 그곳에서 또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헌신하는 모든 언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지 않도록 힘쓸 것과, 행여나 실
수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히 지켜야 할 것을 요구하는 매우
포괄적인 교리가 하반절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모든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나타
내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모든 비방을 스스로 감
당하시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셨는데, 우리가 그것들 때문에 움츠러든다면 이 얼마
나 비열하고 수치스러운 일이겠는가?
69:10,11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 다윗은 여기서 행위 혹은 외모
를 통한 순전하고도 잘 정돈된 열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아가는 자기의 노
력을 말하고 있다. 그는 육신적인 충동에 의해서 자극을 받거나 흥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슬픔의 증인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 사실을 통해서 원수들의 고칠 수 없는 완악함을 보다
더욱 명백하게 보여준다.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는 편에 담대히 서는 사람들
은 종종 악한 자들을 논쟁적으로 또는 무절제하게 공격하여 그들을 극도로 선동하거나
노하게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다윗의 열성은 매우 단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한 강
철이라도 부드럽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귀절에서 보여주는 다윗의 모습은 그가
원수들의 완강한 공격으로 심한 압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입을 벌려 하나님의
영광을 변호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으며, 오직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도리
밖에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할 길이 없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그는 마음속의 감정을 말로써 나타낼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더우기 그의 말은
정죄를 받은 사람의 말과 같이 극심한 비방으로 반발을 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다
윗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열성으로 계속 불타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을 돌리기 위해서 그가 늘 행해왔던 자발적인 슬픔을 끝까지 감수해 왔다는 사실은 그
의 지조가 얼마나 굳세었는가 하는 것을 증명해 준다. 따라서 그는 "내가 곡하고 금식
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라고 선포한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
인들이 슬픔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그러나 그의 원수들은 이런 모든 것들을 조롱거
리와 웃음거리로 삼았다. 이 행위는 그들이 마귀의 광포함을 좇아서 한 것이었음을 증
거해 준다. 우리는 이 예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된다. 즉 오늘날 우리가
복음의 원수들로부터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마귀들이 행하는 것과 같은 완악함을
만나게 될 때에 실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미 활활 타는 불 속에
기름을 부어야 하고, 악한 자를 책망할 자유를 빼앗겼으면서도 자기들의 마음속으로는
큰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던 다윗과 롯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악한 자들이 억
지로 우리에게 무슨 말을 강요할지라도 유순함과 겸손한 것만이 유력한 방법일 것이
며, 거룩한 열성을 발휘하여 훌륭한 맛을 발휘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굵은 베옷을 입었다는 사실에서 추측하기를 다윗은 자기가 원수들을 대신하여
형벌의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보다 단순한 의미로 다윗이
그와 같은 혼란의 상태를 바라볼 때 자발적으로 이 슬픔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의 거
룩하신 이름이 오만한 자들에게 훼손당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도 더욱 자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없다고 나타내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69;12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 만약 다윗이 평민들에게서만 괴롭힘을 당하였거나
국민들에게서만 거절을 당했다면 보다 견디기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장래성이 없고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남을 비방하는 자리에
빠져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 일을 일으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높은 지위에 있는 재판관들이 자기들의 직무에 따라야 할 위엄을 망각하고 뻔
뻔스러운 행동을 저지를 때에 그 불의와 비열함이란 몹시 화를 내게 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당시 최고 지위를 가진 자들이 사용하던 속담과 격언으로 자기의 탄식을 표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문에 앉은 자"란 온 국민 전체를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것은
문맥상 일치하지 않고 별로 좋은 해석도 못된다. 왜냐하면 성문에는 모든 지위를 가진
사람들과 갖가지 형편에 처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 곳에 앉을 수 있
는 사람은 오직 재판관들이나 상담자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반절이 이것을 확증하고
있다. "취한 무리"는 그들의 재산과 지위로 인해서 높임을 받았던 지도자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이 거룩한 사람은 백성들에게서만 괴로움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재판할 때
재판장이 되는 자들과 다른 사람들을 인도해야 할 교회 지도자들에게서도 괴로움을 당
한 것은 참으로 극심하게 부당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성령께서 우리의 눈앞에 이러한 예를 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교황정치에 있어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보다 존경을 받을수록 그는 복
음과 그 사역자들에게 대항해서 더욱 만족하고 우악스러워진다. 이는 그가 가톨릭 신
앙에 보다 열렬한 수호자로 자신을 드러내려 함이다. 이것은 참으로 거의 모든 왕들과
방백들이 즐겨 했던 병폐이다. 이러한 행위는 덕을 갖춘 참다운 권위와 탁월함에서 나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좋게 생각되는 대로 무절제하게 행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생각에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들을 핍
박하고 있는가?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주요한 것 중의 하나는 할 수만 있으면 그리
스도의 신실한 종들을 부끄럽게 하여 믿음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식탁에서뿐만 아니
라 보좌에서도 조롱하고 비방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일반
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웃고, 이들의 순진함이 마치 하나님께 경배함에 지
쳐 버리고 또 경배를 쓸모없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것같이 말하기를 좋아한다.
69:13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 이러한 어려운 취급을 당하념서
도 마음이 흔들리지도 않고, 실망에 빠지지도 않은 것은 다우시이 갖고 있었던 특별한
미덕의증거였다. 다윗은 이 미덕으로 무서운 장애물들을 막아 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악한 자들이 재치와 조롱으로 다윗을 정면으로 도전하여 마치 전쟁무기를 사용
하는 것같이 다윗의 믿음을 전복시키려 했을 때, 그는 모든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한 방
편으로 까자기의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브득이 사람들 앞에서는 침
묵을 지키고 세상에서는 소외당했으나 하나님 앞엣서는 자신을 내세웠다. 이처럼 오늘
날 신실 한 사람들이 악한 자들을 억누른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같이 보이지만, 세상을
떠날 때에는 궁극적인 승리가 예비되어 있으므로 이들은 하나님앞애 직접 나아가 그에
게 기도드리는 것이다. 요컨대 이 귀절의 의미는 다윗이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기
의 수고가 헛된 것임을 깨달아 사람자르 상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상대했다는 것
이다.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라는 말을 많은 주석가들이 달리 설명하고 있다. 이
들은 한 절 속에 두개의 문장이 있다고 본다. 즉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
께 기도하오니"하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고 하신 말씀과 일치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
들은 이 귀절을 '내가 은혜를 입을 때가 오기를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내게 긍휼을
베푸시기 시작했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다윗은 비록 지금은 고난당하고 자기의 기
도가 전혀 무용(無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것들을 모두 바꾸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받게 될 위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는 말하
기를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지 보리라.(합 2:1)고 했다.
이사야도 이와 같이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17)고 했으며, 예레미야도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
은......"(렘 14:22)이라고 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승리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어둠속에서도 우리 안에 비치는 소망을 가지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다윗이 이와 같이 자기가 기다리는 자세로 계속 인내했음을 말
한 후에 곧이어 "많은 인자......로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말한다. 다윗이 "인자"와
"구원의 진리"를 연결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자기의 종
들을 구원하실 때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확실한 결과로써 증명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확신에 가득찬 이 기도에서 다윗이 나타내고자 한 것은 지금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암흑이 적당한 때가 되면 걷히게 될 것과 청명하고 구름 걷힌 하나님의 자비하심
의 계절이 계속되리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향하는 모든 생각에서 되살아 일어난 확
신은 그로 하여금 악한 자들에게 쉴새없이 공격을 당하는 경우에도 결코 연약해지 않
도록 할 것이다.
69:14-15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 시인은 앞에서 사용했던 것 같은 비유
를 반복하고 있으나 그 사용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앞에서 그는 자기가 수렁에 빠졌
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그곳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요컨대 앞에서 자신이
탄식했던 그러한 일이 이제는 자기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다. 이 두 귀절 사이의 차이점을 해소하는 것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이 시편의 초두
(初頭)에서는 자기의 실제적인 감정과 경험에 의지하여 말을 했고 지금은 비록 사망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15
절 하반절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시인은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나를 해치려는 원수들의 무리
가 매우 많아지거나 그 힘이 강해지지 않게 하시고, 내가 삼킴을 당하는 슬픔에 빠지
지 말게 하소서'라고 하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이다.
64:16-17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며 내게 응답하시며 - 다윗이 여기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들어 호소하고 있는 사실은 그가 곤경을 당하는 처지에 붙들려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만일 다윗이 단지 자기의 안전만을 위해서 이것을 간구했다
면 그의 간구는 무서운 갈등을 일으키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
서는 우리에게 노를 발하시면서 자비로우시며, 멀리 떠나 계신대도 가까이 계시다고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다윗은 불신앙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에게 크신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도록 간구한다. 그리고 자기가 소망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롭고도 자비로우신 성품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다윗이 잠시 후
에 "내게로 돌이키소서"라고 말한 것은 자기가 들은 대로 하나님은 자기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모든 행위로 나타내 보여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그는 다음 귀
절에서도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처럼 다윗은 여러 차례같은 것을 반복함으로
써 자기의 쓰라린 슬픔과 간절한 소망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다윗이 하나님께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라고 간구한 것은 그가 배척을 받음으로 어떤 매
임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재난에 눌려 있는 자는 정신적인 불안으로 초조해
하고 어수선해함을 피할 수가 없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다윗은 마치 하나님께서 특
별한 방법으로 자기 종들을 부르시는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 한 사람이
라는 것을 공언하고 있다.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다윗은 이러한 말이나 좀더 나아
가 보다 긴 말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어떤 보상을 하나님께 받으
려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
니라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복종하며 경배하는 것이 곧 자기의 경건함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속하시며 -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와 가까이 계신다는 것
을 의심없이 믿음으로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치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거나 방심하신 것을 그 결과로써 판단하는 습관이 있는 것처럼 다윗은 여기서 그
육신에 따라 판단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다고 은연중에 하소연
하고 있다. "가까이하사"라는 말에서 다윗이 의도하는 것은 자기가 현재 당하고 있는
형편을 거두어 주시지 않는 한 하나님은 자기의 축복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버림받은 것과 같은 형편을 하나님께 '주의 생명으로 가까이 하소서'라
고 간구함으로써 그의 믿음의 강도에 대한 증거를 특히 드러내고 있다. 그가 악한 자
들과 교만한 자들에게서 당하는 괴로움이 잔인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하나님께서 자
기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다른 곳에서도 살펴보았듯
이 우리는 항상 다음과 같은 분명한 진리를 지켜야 한다. 즉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기"(약 4:6)때문에 비록 한때는 그들을 못본 체할는지 모르지만 조만간에 하
나님을 오만하게 거스르는 자들의 무례함과 교만함을 억누르시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69:19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 이 귀절은 앞절을 확증해 준다.
많은 사람들이 사악한 자들이 자기에게 우악스럽게 들이닥치고 모든 것을 쓸어 버리는
홍수와 같은 그들의 사악함을 볼 때 정신을 잃게 되는 일은 웬일인가? 이는 다만 그들
의 생각에 하늘이 어둡고 구름으로 덮여서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서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교리, 즉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나타나신다는 것을 의심없이
확신하는 교리를 기억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에서 그의 눈을 돌리
실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 없이는 악을 행한
자들이 벌을 받지 않고 넘어가도록 허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
님께서 자기의 슬픔과 두려움과 수치와 근심의 증인이시라는 것과, 세상을 심판하기고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춰진 것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위로
를 받는다. 다윗이 종종 자기의 "훼방과 수치"를 말하는 것은 공연히 반복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용맹한 사람도 벌벌 떨며 무서운 시험의 공격에 붙잡히게 되
는 것은 자기 힘으로 강한 장벽을 물리쳐 막아 내 보려는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
는 결과이다. 지혜가 있고 고상한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 훼방보다 더 쓰라리게 하는것
은 없다. 그러나 이 훼방이 반복되고 수치와 훼방이 무더기로 우리에게 뒤덮여 올 때
에는 여기에 압도되지 않고 한결같이 용감하게 나아가는 것이 가장 필요하지 않겠는
가? 왜냐하면 구원이 늦어지면 우리의 인내함은 무너지기 쉽고 절망이 쉽게 우리를 엄
습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수치와 훼방은 외적인 형편과 마음에 느껴지는 실제적인 감
각에 똑같이 관계되었다고 보는 것이 매우 타당할 것이다. 다윗은 가는 곳마다 공개적
으로 비웃음을 당했으며 조롱하는 자들로부터 크나 큰 수치와 슬픔을 겪어야만 했었다
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같은 이유에서 다윗은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 아신다고 첨가하여 말한다. 이 말은 '주여, 주께서는 내가 수많은
이리에게 둘러싸인 가련한 한 마리의 양과 같음을 아시나이다'라는 뜻일 것이다.
69;20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 다윗은 자기가 버림받은 자처럼 조롱
과 수치를 당하는 슬픈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과, 또 자신이 오랫동안 훼방과 수치를 당함으로 인하여 슬픔으로 압도당하는 것과 같음을 보다 명확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이 슬픔을 이겨 내는 데는 고통이 없을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또 이 귀절을 통해서 다윗이 시험의 물결들을 그렇게 꿋꿋이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에 이런 슬픔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고,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겪으면서도 담대히 나서서 그것을 물리치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분명하다.다윗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까지 빼앗긴 것이 자기의 슬픔을 더욱 가중시켰다고 말한다. 그에게 동반자가 되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의 슬픔을 덜어 줄만한 사람도 전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 (누드)라는 말을 '말하다' 혹은 '자세히 이야기하다'라고 번
역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민을 친구들에게 털어놓고 나면 어느 정도 슬픔이 누그러지게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하는 말 속에는 친구들로부터 모든 도움과 위로를 빼앗겼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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