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란 문구(*)에 있어서 "잠잠히.......바람"(* =뚜미야)은, 사람이 자기의 소욕이나 또는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 움직임이 없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근근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쉬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을
가리킨다(J.Ridderbos, Het stil-zijn is dus geen doffe berusting, maar de
overgegevenheid van het geloof.). 이것은, 정적주의(靜寂主義=Quietism)를 일삼는
마담 까이온(Madame Guyon)의 신비주의(神秘主義)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마담 가이온
(1648-1717)의 정적주의, 성경과 성찬과 그리스도를 존중히 하면서도, 이들을 저급 경
건에 관계된 것이라 하고, 영혼이 무한하신 하나님께 들어가기 위하여는, 영혼 자신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기까지 정적을 힘쓴 것이다.(Charies Hodge, Systematic
Theology l, pp. 84- 88). 마담 까이온(Madame Guyon)은, 자기의 주장을 세우려다가 7
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일도 있었다.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 이 문구에 있어서, "하나님만"(*
=아크 엘 엘로힘)이란 말씀에 중점을 두고 생각할 것이고, "잠잠히 바람"(* =
뚜미야)의 주관적 태도 그것이, 어떤 공효를 가져오는 매력이나 의(義)로움이 되는 줄
생각하면 안된다. 신앙이란 것은, 신앙자의 주관 편의 어떤 태도 자체가 구원 받을 덕
을 성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근대에 이르러 실존주의 철학자들 중에, 신앙의 주관성(主觀性)을 고조 하면서 기
독교의 객관적(客觀的) 방면을 거의 무시하는 일이 많다. 예를 들면, (1) 키엘케골
(Soren Kierkegaard)은, 주관성이 진리(眞理)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신앙이, 하나님
에게 대한 객관적 지식이나 증거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고 하며, 50 척 깊은 물 위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신앙자는, 모든 불확실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거기서 자기의 주관적 욕망(passion)에 의하여 찰나적(刹那的=moment)인
봉착(逢着=encounter)을 가진다고 한다. 찰나적 봉착이란 것은, 시간과 영원의 타촉
(打觸)을 의미한다. 신앙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동시대성(同時代性)이 되는 것인데,
이 동시대성을 실현시키는 방법은, 논리적 이유를 필요로 하지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는 것 뿐이라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복음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사적(事蹟)을 믿는데 이른다고 하였다. 이것은, 신앙의 사리(事理)
를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사건(事件)이 먼저 있기 때문에 그것
을 듣는 자로 신앙을 얻게 한다(롬 10:17)(Christian Faith, Modern Theology, p.
343). (2) 에밀 브루너(Emili Brunner)도 결국 키엘케골(Kierkegaard)과 다를 것이 없
다. 그는 신앙을 가리켜, 신뢰(信賴)의 모든 행동과 다른 원행동(Urakt)이라 하였고,
또한 피안(彼岸)의 속으로 뛰어 들어감(Sprung ins jenseitige.).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신앙은 하나의 빈 것(leeghejd)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얼핏 보면, 키엘케골
(Kierkegaard)의 주관주의와 반대되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 이른바 빈 것(leegheid)
이란 것은,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啓示)에 대하여가 심리적, 또는 역사적인 파악을 부
정(否定)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역시 빈 것을 위주하는 주관주의이다
(Erlebnis, Erkenntnis and Glaube, 1923, pp. 35, 37, 92-96, 101). (3) 고갈텐(F.
Gogarten)은 말하기를,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수납(受納)하는 중립적인 기관
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계시이다"(Der Glaube gehort selbst zur Offenbarung.)라고
하였다(Von Glauben und Offenbarung, 1928, p. 48; Die religiose
Entscheidung.1924, p. 59). (4) 칼 바르트(Karl Barth)는, 신앙을 가리켜 이적
(Wunder), 시작(Anfang), 창조(Schopfung)라고 하였고, 그는 또다시 말하기를, "신앙
은 성취품도 아니며, 가까운 것도 아니며, 안전한 것도 아니며, 그것은, 심리적으로
말하면 미지(未知)의 세계와 어두움 가운데에 허공에 거듭거듭 뛰어 들어감이다"
(Geloof is nie fertig, nie gesichert, er ist, von der Psychologie aus gesehen,
immer und immer aufs nenu der Sprung ins Ungewisse, ins Dunkle, in die leere
luft.)라고 하였고 . 또한 이것을 진공(Hohiraum)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로 말하면, 사람이 객체요 하나님은 주체이다"
(De subject-object-relatie wordt omgekeerd: de mens is object en God is
Subject.)라고 하였다(Romerbrief wordt omgekeerd: de mens is object en God is
Subject.)라고 하였다(Romerbrief Cap. IV, pp 42, 73, 125; Prolego,ena, p.103).
신앙에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을 주격(主格)으로 하는 사상을, 인간이 하나님의 피
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별개의 존재자로서 하나님을 신앙할 자임을 무시하는
사상이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신앙하였으나, 범죄한 후에는 그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을 새롭게 하시므로 하나님
을 신앙하게 되었다. 워필드(Warfield)는 말하기를, "사람이 새롭게 된 후에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의 성품(인간의 성품)에 전연 생소한 것은 아니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것은 불가능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새롭게 하시므로
그의 신앙을 회복시켰다"(And, therefore, though in renewed man it is a gift of
God's grace, it does not come to hin as something alien to his nature. It is
beyond the powers of his nature as sinful man; but it is fomething which belongs
to human nature as such, which has been lost through sin and which can be
restore only by the powers of God.)라고 하였다.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참된 신앙은, 그 자체에 구원의 공로(功勞)나 의(義)를 지니
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믿는다는 표현 내용이 역시 그것을 가리킨다. 곧, 하나님을 "의
뢰한다"는 말(* =빠타크), 하나님에게 "피한다"는 말(* =카사), 하나님에
게 "맡긴다"는 말(* =가랄), 하나님께 "신뢰한다"는 말(* =케쎌), 하나님을
"쳐다본다"는 말(* =힛삐트),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 =니쉐안),
하나님에게 "머문다"는 말(* =니스마크), 하나님에게 "마음을 정한다"는 말(*
=헤킨 레브), 하나님에게 "사랑을 붙인다"는 말(* =카솨크), 하나님에게 "집착
(執着)한다"는 말(* =다바크),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말(* =키와), 하나님
을 기다린다는 말(* =이케르), 하나님을 "사모한다"는 말(* =킥카), 하나님
을 "참아 기다린다"는 말(* =히드콜렐)이다. 믿음에 대한 이와 같은 술어
들은, 모두 다 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에게만 구원의 "능력"이나 "덕"이나 "의"가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구원하는 능력은 신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신앙의
대상인 구주님에게 있다. 성경이 말한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는 것은, 믿
음의 심리적 태도가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만하다거나, 혹은 그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
님과 교통(交通)하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믿음
이 대상하고 있는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이다. 믿음은, 다만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인간 편에 있는 방편에 불과하며(행 15:9, 26:18; 롬 3:28, 4:20, 5:2, 11:20; 고후
1:24; 히 6:3, 4, 5, 7, 8, 9, 11, 17, 20, 21, 23, 24, 27, 28, 29, 30, 31), 그것마
저 하나님의 선물이다(행 3:16; 롬 10:17; 고후 4:13; 가 3:2, 5, 5:5; 엡 2:8, 9
6:23; 빌 1:29; 벧전 1:21; 벧후 1:1; 히 7:2; 유 3).
시 62:2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 여기 "나의"란 말
이 세 번 나왔으니 곧, "나의 반석"(* =추리), "나의 구원"(* =예
슈아티), "나의 산성"(* =미세까삐)이란 문구들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자기
개인의 구원자로 따겁게 느끼는 확신은, 다윗의 시(時)에 종종 나온다. 3:7, 4:1,
5:2, 18:1, 2, 22:1, 23:1 참조. 하나님에게 대하여 이렇게 뜨겁게 개인적으로 모시는
의미의 말씀은, 강력한 신앙 고백이다. 다윗은 어떤 심리에서 이런 신앙 고백을 하였
을까?
(1)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게약에 속하는 백성 중 한 사람으로서 말 한 것이다.
신자는, 자기의 처지를 생각할 때에 언제나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한다. 곧, 그는 아브
라함의 자손들 중 하나인 것을 기억한다. 곧,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하신
내용에 참예한 택한 백성인 사실을 믿는다. 그가 이 사실을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그
가 그것을 믿게 되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롬 10:17).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성경 말씀)을 기뻐하며 따라갈 마음이 생긴 것은, 마치, 양
이 목자의 음성을 따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따라간다(요
10:4,5,27). 누구든지 성경 말씀의 진미(眞味)를 아는 자는, 자기가 택한 백성 중의
한 사람인 줄 확신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은 나의 구원(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
다. 리델보스(J. Ridderbos)는 말히기를, "이런 신앙(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
는 신앙)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 계시, 곧, 아브라함과 그 자손으로 더
불어 맺으신 계약에 근거한 것이다. 그 계약의 내용은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구약시대
에도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앎이다"(Dat geloof berust op de
heilsopenbaring, aan Israell gegeven, op het verbond, gesloten met Abraham en
zijn zaad waarvan, Chris de inhoud is, zodat ook onder het OV het geloof is een
kennen van God in Christus,-De Psalmen I, PP. 32-33)라고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
를, " 이와 같은 표현에 하나님과 개인 신자와의 관계가 표시되었다. 하나님에게 대한
이런 개인적 관념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계약을 배경으로 하고 나온다. 야곱도 일
찌기 그런 의미에서 말하기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갓의 섬기던 하나님, 나
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 라고 하였다(창 48:15). 하나님에게
대한 단체적 관련(교회적 관련)과 개인 신자와의 관련은, 서로 떠날 수 없다. 하나님
께서 그 택한 백성에게 대하여 단체적으로 취급하시는 것 만큼, 개인 신자도 같은 취
급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하실 때에 장차 생길 백성까지 염두에 두셨
던 것이다. 이 두 가지 관계의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 착근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동시에, 각기 신자는 개인적으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Hier wordt de band tussen Jahwe en de enkele gelovige
ermede aangeduid; ook Jakob sprak reeds van "de God, die mij geweid heeft", Gen.
48:15. Het hemeenschappelijke en het persoonlijke staan niet los naast elkander.
Aan wat Jahwe voor het volk is, heeft de gelovige per-soonlijk deel; en
datzelfde was Hij reeds, eer het volk bestond, voor de aartsvaders persoonlijk
(en in hen volk der toekomst). De eenheid van beide verhou-dingen ligt in
Chirstus, in wie beide wortelen; in hem is de gemeente als eenheid en iedere
persoonlijk met God verbonden-De Psalmen I, p. 203)라고 하였다.
(2)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반석"(* =추리), "나의 구원"(*
=예슈아티), "나의 산성"(* =미세까비)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대한 자기
개인의 뜨거운 관련성을 고백하는 확신은, 그의 신앙 생활의 체험에도 근거하였다. 다
윗의 많은 시는, 그의 과거의 구원 체험을 많이 말허고 있으며, 그 체험에 따라 그는
하나님과 자기와의 밀접한 관계를 단언하였다. 시 27:9, 63:7 참조. 그렇다! 체험은
신앙을 확고히 하여 준다. 그러나 우리가 체험을 신앙의 모체(母體)로 생각하면 안된
다. 신앙의 모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체험은 신앙의 아들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에 체험이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체험이, 그것을 낳
아 준 신앙을 다시 도와 주는 것만은 사실이다(Spurgeon, Experience is child of
faith; experience is nurse of faith). 우리에게는 체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귀한
체험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 하는 생활이다. 만
일, 1 우리가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인 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바로 믿
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명백히 체험하게 되며, 2 우리
가 영원히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줄 알고 살아 왔으면, 이때 까지 받아 살아
온 좋은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
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사실을 체험하려면, 스스로 의롭다는 악한 정신을 근본적으로
없애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어야 된다.
불건전(不健全)한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부적인 절대의 권위로 알지 않
고, 명상(暝想)이나, 고행(苦行)이나, 혹은 기도에 의한 심령 속의 깨달음을 최고의
권위 있는 광명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성경보다 체험을 앞세운다. 이런 체험주의는,
특별히 정서면(情緖面)의 느낌을 위주하여, 성경 말씀을 아주 무시하든지 혹은 그것을
자기의 체험에 종속시키는 정도로만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높인다고 말하면
서도 자기의 종교적 체험을, 하나님에게 대한 확실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다. 이 점이
기독교 복음 신앙과 다르다. 복음 신앙은, 인간의 주관적(主觀的) 정서면의 체험이나
깨달음에 근거하지 않고, 외부적 권위(external authority), 곧, 성경 말씀위에서 안
식한다. 외부적 권위란 것은, 신자의 심령 속에 있는 정서적 느낌이나 깨달음과 달라
서, 외부적 역사(歷史)로 성립되어 있나니, 곧,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 다
시 살으심, 또한 이와 같은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기록, 곧, 성경이다. 물론 신자가,
심령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외부적 권위의 의미를 깨닫고, 믿어서 그 외부적 권위
때문에 평안을 얻는 것은 옳은 신앙이다. 그러나 그가 만일 외부적 권위를 존중히 한
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이용하는 정도로만 취하고 심령 속에 정서적인 느낌만 위주하
낟면, 상당한 결함을 내포한 신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B.B. Warfild, Biblical
and Thedlogical Studies, pp. 445-462).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신자가 외부적 권위에서만 안식하는 신앙을
가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체험을 가지는 것은 귀하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두뇌
(頭腦)의 종교가 아니고 심장의 종교(heart religion)라고 할 수 있다. 촬스 핫지
(Charles Hodge)는, 복음적 신비주의자들에 대하여 말한바 있다. 그것을 초역(抄譯)하
면, "버나드, 유고, 리촤드, 겔손, 도마스 아켐피스(Bernnard of Clairvaux, Hugo and
Richard of St. Victor, Gerson, Thomas a Kempis) 등은 복음적 신비주의자들이다. 이
들은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힘썼는데, 그 연합이 완전히 성경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교회에 유익을 주었다. 그 시대에는, 형식주의(形式主義)와 의식
주의(儀式主義)기 성행하여 교회에 내적 생명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사람
의 양심을 인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버나드(Bernard)의 저서(著書)
들은 아직까지 높이 평가되고, 도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의 기독 성범(基督聖
範)은 향기와 같이 세계 교회에 널리 퍼져 있다"라고 하였다(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I, p. 79).
시 62:3
넘어진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 (* )
이 말씀은, 칼빈(Calvin)이 번역한 것과 같이, "너희가 한 사람을 일제히 박격하기
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너희들은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도다"라고 개역해야
옳을 것이다. 그 이유로서는, (1) 그런 번역이 문맥에 부합한다. 이 시편에 있어서 다
윗은, 자기의 실패보다 그 원수들의 실패를 내다 보고(9, 10), 어디까지나 하나님 한
분에게서 안전감(安全感)을 느낀다. (2) "넘어져 가는 담과 같다"는 표현으로써, 악인
들의 말로(末路)에 대하여 이시야도 예언하였다(사 30:13). 다윗이 자기 자신을 넘어
져 가는 담에 비유했다는 해석은 자연스럽지 않다. (3) 그 뿐 아니라,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다(* =케키르 나투이 까데
르 하메쿠야)는 형용사구(形容詞句)가, 히브리 원문에서는 "너희가 일제히"란 말(*
=쿨레켐)에 직속(直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과 떨어져 있는 "사람"이란 말(*
=이쉬)을 형용한다고 하기 어렵다.
이때에 다윗을 반역하는 자들은, 실상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다. 다
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합법적인 이스라엘의 왕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를 반역하였
으니, 그것이야말로 발뒤꿈치로 송곳을 차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이었다. 하나님을 반
역하는 자들은 자멸(自滅)의 길을 택하는 자들이다. 이시야 시대에도 유대인이 하나님
을 극도로 반역하며 하는 말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 떠나게 하라"라
고 까지 말하였다(사 30:11). 이런 반역죄를 범하는 자들은 필경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그 때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죄악이 너희로 마
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 라고 하셨
다(사 30:13).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세우신 사람을 반역하는 자들의 그 반역 해위 자
체가, 자기 자신을 멸망시킨다는 의미로 많이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7:15에 말하기
를,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하였고, 9:16에는, "열
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악을 채우는 죄인들이 한 번 갑자기 망하는 일이 있음을 비유한다. 잘못 쌓은
담은 속이 궁글었기 때문에, 보기에는 두터워도 곧 넘어진다. 그와 같이, 반역자들은
교만으로 부풀어서 모양은 든든해 보이지만, 그 내용이 헛되기 때문에 갑자기 멸망한
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하나님 편에 있는 다윗은 한 사람이
었으나, 그는, 하나님을 반역한 많은 사람들의 많은 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한 사
실상 절대 안전한 처지에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한 사람이 무수한 무리
보다 오히려 힘이 있다.
시 62:4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
이여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 - 반역자들은, 다윗을 왕 위에서 떨어뜨리기 위하여
모든 간계(奸計)를 사용하였다. 그들이 "거짓을 즐겨"(* =이레추 가자
브)한다고 하였으니, 그들은 어쩌다가 거짓말을 하는 정도만이 아니고, 도리어 거짓을
좋아하기까지 하는 극단적 악인이다.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
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 이
부분의 "하나님만"이란 문구(* =아크 렐로힘)와 "저만"이란 문구(*
=아크 후)에 있어서, "만" 자(* =아크)가 중요하다. 델리취(Delitzsch)는 말하기
를, "이 글자(* =아크)는 믿음을 표시하는 말씀이다. 다윗은 이것으로써 모든 반대
앞에서도 확고히 성립된 진리를 고백하며, 확신한다"(Das glaubenswort, mit welchem
aller Anfechtung gegenuber feststehende Wahrheiten bekannt und
bestatigt...werden.)라고 말하였다. 다윗이 이 말로써 고백한 신앙은, 오직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이다.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말슴을 그대로 고백하지 않음은
비진리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알기에는 자기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데, 자기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면, 자기 밖의 모든 다른 것들로도 자기를 구원치 못할 것은 확실하
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죄인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죄악으로 단단히 얽혀
있다. 그를 죄악에 얽맨 것이 강철이라면 끊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것이 그의
살과 피처럼 그에게 가까이 얽혔으니 가그 자신을 전부 파괴한들 문제 해결이 될 것인
가?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피조
물들은 더욱 그를 구원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만 그를 구
원하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하나님만"(* =아크 레엘로
힘),"저만"(* =아크 후)이란 말씀이 여러번 나온다. 여기 "만"(* =아크)
자는 그의 신앙의 참된 성격을 보여주는 요긴한 말이다. 우리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구원자이신 동시에 우리 자신이나 혹은 다른것들도 역시 구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사상이다. 하나님께서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
시며, 또한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만 전적으로 믿어야 된다. (1) 우리가 그리스도만 전적으
로 믿지 않고 다른 것도 우리 구원의 보조자로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간음하
는 죄와 같이 보신다. 그가 그렇게 보시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그렇게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주님 회에 다른것을 사랑할 때 저렇게 극도로 싫어하신다.
(2)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아야 된다. 우리가 두 가지를 함께 보려고 하면, 자세히 보
지 못한다. 우리는 주님만 보아야 주님을 확실히 보고, 그를 바로 따라가게 된다. 누
구든지 주님을 바라본다고 하면서 다른 것도 함께 보려고 하면, 갈 길을 바로 가지 못
하고 무엇에든지 걸려 넘어진다. (3) 우리가 다른 것들을 주님과 같이 사랑하거나 혹
은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화를 받는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참된 구주님이신데도 불
구하고 다른 것들을 구주님처럼 존중하며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
신 선물들(물질이나 자녀들)을 주님과 같이, 혹은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 자녀들이
복이 되지 않고 드리어 화가 되어진다. 그러므로 어떤 때에는, 우리가 신앙을 위해서
나녀에 대한 인정도 끊어야 된다. 자녀를 주님께 밀어 맡기고 도무지 상관치 말아야
될 경우에는 감심으로 그리해야 된다. 신앙에 손해를 보면서까지 인정에 끌리어, 자녀
문제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다가는 도리어 피차간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원
인은, 자녀 문제에 관하여 주님께 맡기는 것보다, 부모된 처지에서 그들을 더 잘되게
할 줄로 잘못 생각한데 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그 뿐 아니라, 우리가 주님에게서 받은 신령(神靈)한 은혜나 덕행에 대해서도, 우
리가 주님보다 그것들을 더 제아하고 더 의지하면 주님을 노엽게한다. 어떤 남편이 아
내에게 좋은 선물을 주었는데, 그 아내가 그 선물에 도취되어 남편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이 없고 사랑도 없어졌다면, 그 남편은 그 선물 준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스펼죤(Spurgeon)은 말하기를, "신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혜나 덕행이나 의(義)
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며 더 의지할 경우에는, 그 은혜와 덕행과 의는 죄악보다 더
위험한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the treasury of the Bible Vol. II, p. 567).
시 62:6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 이 말씀은,
탈환된 이스라엘 나라 왕조의 수명을 길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이
것은, 장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천국 운동의 영원성에 대한 예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Calvin).
시 62:7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
"인자와 진리"에 대하여는, 57:3의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여라. "인자"는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은혜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진리"는 약속대로 구원을 실시하시는 그
의 신실성을 가리킨다.
시 62:8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위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
로다(셀라). - 여기"백성들"이란 말(* =암)은, 히브리 원어로는 단수 명사로서 "백
성"인데, 다윗이 자기에게 충성하고 있는 민중을 가리킨 것이다. 리델보스
(J.Rodderbos)는 말하기를, 여기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다른 사람들도
참여하기를 요청한다고 하였다(시 130:7, 131:3 참조). "시시로"란 말(* =
베콜 에드)은 "이따금"이란 뜻이 아니고 "언제든지"를 의미한다. "그 앞에 마음을 토
하라"(* =쉬페쿠 레파나우 레바브켐)란 것은, "하나님 앞
에 너희 마음을 쏟으라"는 뜻이다. 이것은, 물 쏟듯이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뜻
을 가진다. 물을 쏟으면, 그것이 담겼던 그릇은 비고 그 쏟아진 자리에만 물이 있다.
신자도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친 다음에는,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만 가 있어야된
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친다는데 대하여 두 가지로 생각할 것이 있다. 신자도 그 마음
을 하나님 앞에 바친 다음에는,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만 가 있어야 된다. 하나님께 마
음을 바친다는데 대하여 두 가지로 생각할 것이 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그에게 마음을 전적으로 바쳐 사랑함. 우리는,
마귀에게서 사랑 받기를 원치 않는다. 그 이유는, 마귀의 사랑을 받는 자는 마귀와 같
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만 받기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만 우리의 마음을 전적으로 드려야 된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도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신 6:5; 대하 16:9; 잠23:26). 사람이 마음없이 사업을 하
여도 성공하는 법이 없는데,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은 신앙 생활이란 것은, 거짓
된 것이고 따라서 유익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친다면, 그것을
전심으로 바쳐야 된다. 마음이란 것은, 그 어느 부분이 떨어졌을 때에는 죽은 마음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갈라진 마음 혹은 한 부분 떨어진 마음을 원치 않으신다. 마귀는
그런 갈라진 마음 조각이라도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전심을 바쳐야
된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려고 할 때
에 우리의 바칠 마음이 벌서 상실된 것이 문제이다. 가령, 우리의 마음이 혹시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렸으면 하나님께 바칠래야 바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혹은 명예나 권
세나 기타 이 세상 것들에게 사로잡혀 감옥에 갇힌 것 같이 된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
지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해결 방법은 있다. 그것은, 이런 처지에 있는 자로서
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된 그 비참한 포로 생활을 원통히 회게해야 된다.
그렇게 회개하는 자는 마음을 찾아 내어 하나남께 바칠 수 있다.
(2)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는다는 것은, 모든 난관을 하나님께 고하고 그를 전적으
로 의지하고 안심함을 의미함.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안심을 그 신뢰심(信賴心)의 시
금석(試金石)으로 알아야 된다. 어려운 문제를 주님께 고했다고 하면서도 그 뒤에 안
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물 쏟듯이 참되이 의탁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가까운
친구에게라도 무엇을 부탁 하고는 안심하는 법인데, 하나님께 부탁하고야 어찌 안심되
지 않으랴!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참되이 난관을 부탁하는 것은, 물을 쏟듯이 구체적
(具體的)이고 사무적(事務的)이어야 한다.
시 62:9
진실로 천한자도 헛되고 높은자도 거짓되고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
다. - 이것은,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다른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없음으로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하여는 렘 17:9에도 말하였으
니, 곧,"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할 것은 마음이라"라고 하였다. 인간은 본래 하
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영육(靈
肉)이 아울러 사망을 당하였다(롬 5:12; 엡 2:1), 인간의 전적 부패의 교리(敎理)는
이렇게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보면, 펠라기우스(Pelagius)의 운
동과 알미누스(Arminus)의 교훈이 이 진리를 반대하였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실존주의
학자들이 이 진리를 그대로 믿지 않고, 다른 교훈을 퍼뜨린다. 니버(Niebuhr)는, 인간
을 그 유한성과 그 자유성과의 결합으로 보았으니, 그것은 바로, 이원론(자연과 정신)
적 인생관(二元論的人生觀)으로서 헬라 철학과 스콜라 척학으로 더불어 통하는 이론이
다. 이와 같은 인생관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 부패의 인간으로 생각지 않은 것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창 1:26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역시 인간의 윤리적 타락을 부인한다. 그 학설 내용으로 말하면, 이렇
다. 곧,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계
신 것과 같이 사람이 사람을위하여 잇도록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일남
일녀를 창조하셔서 그들이 서로 교제할 수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사람으로 더불어
교제하실 수 있음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Wie Gott fur den Menschen ist, so ist
der Mensch fur den Menschen; indem namlich Gott ful ihn ist.-K.barth, Dog. III
1, p. 219)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르트(Barth)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동반성(同伴性), 곧, "나와너"의 개념으로 교제할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르트(Barth)는 말하기를,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될 일이 없었다. 곧, 부분적으로든지, 전체적으로든지, 형식적으로든지,
실질적으로든지 상실될 일이 없다. 인간이 가질 수 없었던 것을 누릴 수도 없고 잃을
수도 없는 것이다. '나와 너'의 개념으로 생각되는 신인교제(神人交際)의 관계가 하나
님의 형상인 것만큼, 그것은, 상실되지 않고 역사상에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도리어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시작될 만한 일이다"(Was der Mensch nichtbesitzt, das kann
er wie nicht vererben, so auch nicht verlieren. Und so kann anderseits auch
Gottes Absicht bei des Menschen Erschaffung und die damit aufgeerichtete
Verheissung und Zusage doch nicht wohl verloren gegangen, keiner totalen oder
partiellen Zerstorung unterworfen worden sein, Dass dem nicht so ist, das zeigt
die tatsache, dass die Geschichte der Gemeinschaft und des Verkehrs Gottes mit
dem Menschen mit dem Sundenfall, in welchem das Versagen des Menschen in diesem
Verhaltnis Ereignis wird, nicht etwa abbricht, sonder genau genommen gerade
anfangt.- K. Barth, Dogmatik III, 1, p.225)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근대의 실존주의자들과 위기신학자들이 얼마나 심하게 인간의 자율주
의를 세워 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저들의 사고 방식은 어디까지나 계시 의존 사색
(啓示依存思索)이 아니고, 교묘하게 인간 자신을 주체화(主體化)시켜 우주 만물을 대
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 본문은 분명히 인간의 전적 부패(全的腐敗)를 보여 주고 있
다.
"천한 자"란 말(* =빼네 아담)은 실상 "사람의 아들들"이란 뜻이고,
"높은 자"란 말(* =빼네 이쉬)도 "사람의 아들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므
로 이 두 가지 문구는,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 70인역(LXX)이 역시 이와 같은 뜻으로
되어졌다. 곧, "그러나 사람들의 아들들은 헛되고 사람들의 아들들은 거짓되니 저울에 달 때에 거짓되어지도다. 저들은 다 함께 헛된 것으로 되었도다"(*
). 여기 70인역(LXX)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입김보다 경하리로다"라고 한 우리
한역(韓譯)은 적합하지 않다.
이 시인은, 인간은 하나님 밖에서 구원 받을 길이 없음을 고조한다. 헛된 인생을
믿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시 62:10
이 귀절은 사람이 마땅히 자기의 포학한 행동이나 재물을 믿지 말라고 부탁한다.
시 62:11
이 귀절들은,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만 믿어야 될 것을 결론한다. 그 이유는, 권능
과 인자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