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시편 05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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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그휼히 여기시가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늬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  "인자"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케세트(*      )이고, "자비"란 말은 리카밈(*           )
인데, 이 두말은 크게 차이 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특별히  고려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다윗은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慈悲)를 배경하였다. 그가, 이제  하
나님의 자비를 배경으로 하고 나오는 이유는, 1 인간의 죄악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야 사함을 받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과거에 잘한 것을 가지고 현재의 자기의 잘못을 상쇄(相殺)시킬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과게에 잘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은 확실히 과거에 잘한 일이 많았다. 예를 들면, 자기를 죽이려던 사울을 여러 번 용서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후에 범한 죄를 보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의 "인자"와 "자비"를 배경하고 부르짖는다.  누구든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기도하면, 그것은 멸망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 사람이 범한 죄악은 너무도 큰 일을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지 않고는 용서될 수 없다. 사람이 지은 죄는, 비록 작은 것이라도  지옥불에 던짐이 될 만한 큰 화근(禍根)이다. 그 이유는, 사람의 범죄 중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거스렸기 때문이다. 이런 큰 화(禍)는, 어떠한 것으로도 해결 받을 수 없고 오직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만 해결해 주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그 "자비"로야 해결 받을 수 있다. 성경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히 무궁하시"다 하였고(애 3:22), 또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하였다(시 136:1)
   하나님의 자비는 여러가지로 알아 볼 수 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도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생명을 지으시고, 그 생명이  살 수 있는 음식물을 내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이 마련된 줄 모른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주시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마치 도토리나무 아래서 그 떨어진 도토리를 주어 먹으면서도 그 나무를 모르는 돼지와 같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적으로 보호하시는 것도, 그의 자비이다. 사람이 평안히 잘 살다가도 사고(事故)를 만나 근근히 생명이 보존되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며 감사한다. 그러나 사고에서  구출된 것만이 감사한 것이 아니다. 어떤 청교도(淸敎徒) 부자(父子)가 말을 타고  각각 다른 길로 가서 같은 곳에서 만아다. 그 때에 아들이 말하기를, "오는 도중에 말이 세 번 넘어졌으나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것이 감사합니다"고 하였다. 그 때에  아버지는 말하기를, "내 말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것이 감사하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은 우리에게 평범해 보여도, 우리가 그 일을 깨달으면서 당하면 거기서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는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주시는 것도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시니, 그것도 하나님의 자비의 행위이다. 그리고 그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
시며 멸망시키지 않는 자비도 가지셨다. 일례를 들면, 가나안 7 민족을 오래 참아  두시기 위하여, 400 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애굽에서 고생하도록 하셨다. 그 400 년간의 역사에 있어(歷史)서 있어서, 하나님께서 장차 가나안 땅을 400 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마 하신 약속을, 하나님의 백성은 믿었다. 그러나 가나안 7  민족은, 하나님의 그와 같은 말씀을 들은바 없으니, 죄를 지으면서도 잘 살며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자비의 결과로, 이렇게 불신자들은 그의 살아 계심을 모르고 도리어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그는, 불신자들의 멸시를 받으실지언정 자비를 베푸시나니, 그  자비기  얼마나 큰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만이 우리의 살 길이요, 우리의 용서  받을 길이요, 우리의 구원 받을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배경하고  굳게  서야 한다. 마치, 바다의 굴(조개)이 돌에 붙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단단히 붙어 있어야 한다. 이 시편의 저자는, 그런 의미에서 같은 말을 거듭한다. 곧, "인자를 좇아", "자비를 좇아"라고 하였다.
   (2)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윗이 여기서  사용한  용어들이다.
곧,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               =메케 피솨아이),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메카타티 타하레니)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가
선지자 나단의 선언한 벌(삼하 12:11-14)을 면제해 달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범한 죄악에 대해서만 이렇게 걱정한다. 그는 이렇게 벌보다 죄를 더욱  싫어하는 심리를 여기에 나타냈다. 이것은, 율법주의적인 회개가 아니고 복음적인  회개이다. 곧 그는, 벌을 걱정하는 것보다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장벽을 만들어 놓은 죄악을 걱정한다. 위의 세 마디 말씀("내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은 ,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결과로  하나님을 거스린 불행한 관계를 도말하여 주시기를 원함과, 또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이 더러워진 것을 깨끗케 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그가 범죄한  결과로 걱정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게 된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걱정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걱정이다. 위의 세 마디 말씀은, 분명히 그의 범죄한 결과가  하나님과 자기에게 미친 영향을 교정 받으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 영원히 죽는 큰 불행으로 느껴진 것이다. 과연  그것이 인생으로서 가질 참다운 근심이다. 인생이 하나님 없이 어떻게 살까? 인생에게 있는참다운 생명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이요, 참다운 광명과 행복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으로 하여금 복되게 하는 모든 요소는,  하나님만이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잃은 것은 영원한 불행과  멸망이다.  사람이 범죄하면 기쁨을 잃는다. 그 이유는,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가 바로 지옥 형벌의 시작이다.
   지옥을 가리켜, 1 "어두운 데"라고 하였으니(마 25:30), 이는  하나님에게서  끊긴
그 영혼의 영원히 소망 없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 "무저갱"(밑 없는  구멍)이라고도 하였으니(계 20:3), 이는 가면 갈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3  "영영한 불" 혹자느 "유황불 붙는 못"이라고도 하였는데(마 25:41; 계 20:20, 21:8),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에게 사정 없이 어디든지 침투하여, 온전히 괴로움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4 "둘째 사망"이라고도 하였는데(계 20:14), 사망은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지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을 반역한  죄("죄과"=*      )를 "도말하소서" 하였다. 또한 불의한 행동("죄악"=*      )과  탈선("죄"=*      )으로 더러워진 것을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하였다.

  시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페솨아이 아니 에다). 여기 "나는"(*      =아니)이란 말은 역설체(力說體)로서, 자기로서는 자기 죄를 원통히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로서는, 당연히 해애 될 회개를 한다는 것을 고조함이다.  "아오니"(*      =에다)란 말은, 단지 이지적 승인을 의미하지 않고, 참으로 그의  온  인격과 의지와  감정이  우울하여진  것을  가리킨다(Deze  kennis  is   niet   een   bloot verstandelijke, maar zulk ene, waar heel de mens( ook zijn willen en  gevo_  bij
betrokken is). ekdnltdl dl qnqns(1-3 절)에서, "내 죄"란 말(혹은 이와 같은  말)을
다섯 번이나 거듭 사용하였다. 그는 그만큼, 죄책을 다른데 돌리지 않고 자기에게  돌려 심히 고통한다. 우리에게 있는 의복과 음식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고 모두 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선물이다. 우리는 세상에 날 때 적신(赤身)으로 온 것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은 날 때부터 가지고 온 것이니, 어디까지나 "내 죄"란 것을  피할  수 없다.
   이 귀절은, 다윗이 범죄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계속하여 괴로운 것을 의미한다. 사람에게 종처가 나면, 그 아픔이 계속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범한 뒤에 고통을 당한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얼마나 괴로운가?
   (1) 사람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벌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고통함.  하나님은,
인간의 죄가 크든지 작든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한 마디 말씀을 어겼으므로 온 인류에게 멸망이  온 것을 생각해 보라. 죄는 그 어떤 것이든비 지옥을 성립시킨다. 죄는 이렇게 독한 것이다. 인간은, 창조주와 원수된 그 순간부터(그 범죄한 순간부터)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많은 눈물을 흘릴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사죄를 받기 전에는, 참된 평안을 찾지 못하며, 하나님과 화목되기 전에는 안정을 얻지 못한다.  사  57:20-21에 말하기를, "오직 악인은 능히 안청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라고 하였다.
   (3) 그 뿐 아니라, 범죄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질서와  상충되어  고통하게
됨. 범죄자의 영(靈)에게는, 만물의 빛과 조화(調和)로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사람이 만일 중력(重力)의 법칙을 무시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어찌 될 것인가? 그는 죽을 것이다. 사람이 자연 법칙을 거스려서 살려고 한다면, 그는 계속적으로 괴로울것 밖에 없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법칙을 위반하면 영적(靈的)으로 그렇게 괴로울 것  뿐이다.
   요한 번연(John Bunyan)은, 자기의 죄를 생각하고 자기는 차라리 두꺼비나  개구리로 났더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과거에 의로왔다고 생각한 것도 불의(不義)였던 것으로 느꼈다. 그는, 무엇을 한 번도 잘하였다고 생각되는 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4-12. 다윗이 선지자 나단의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정당시(正當視)한 것은, 그의 양심적인 태도이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한 말이, 바로 그 태도이다(삼하 12:13).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삼하 12:15-23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1)밧세바에게 난 첫 아이가 병들었을 때에, 그는, 7일간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있었다(삼라 12:15-18). 그가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그는 벌써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며 회개치 않았던가(삼하 12:13 하반)? 그는 벌써  사죄  선언(赦罪宣言)을 받지 않았던가(삼하 12:13 하반)? 이 문제들은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곧, 다윗은 앓는 아이를 볼 때에 아픈 죄감을 느꼈다. 그 때에 물론 그는  자기의 죄상(罪相)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그 뿐 아니라, 그가  사죄를  받아 자기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지만,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만든 점마에 있어서는, 벌을 받도록 되었으니 만큼(삼하 12:14 상반), 자기의 죄상에 대하여  원통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이 사울과 다르다. 사울은, 아말렉 족속과 관련된 범죄 사건에 있어서 말 뿐으로만 사과하였다(삼상 15:24). 또한 그가 다윗을  죽이려 하던 죄도 말뿐으로 회개하였다(삼상 26:21). 삼상 24:17 참조.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죄상을 심각히 취급하는 심정에서, 7 일 동안 금식하며 깨달은 결과, 시 51:5, 6 말씀이 나왔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죄악에 대한 심각한 깨달음이 생겼을 것이다. 참된 회개자는,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로 자기의 범죄 사건을  넘기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죄상을 깊이 깨달으며, 원통히 여기는 한 때가 있는 법이다.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신령한 근심을 가진다(고후 7:10, 11). 이 애통이 있은 후에야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된다(마 5:4).
   (2) 다윗은, 그 앓던 아이가 죽었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즉시 땅에서 일어나,  몸
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는 음식을 베풀게 하여 먹었다고 하였으니(삼하 12:20),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어찌된 일일까? 이것은, 그가 7 일 동안 금식 기도한대로 응답  받은  은혜의 결과이다. 그는, 금식기도 할 때에, 시 51:7 이하의 말씀대로 기도하였을 것이니, 곧,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부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꺽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 기도의 요지를 잘 추리면  다음과  같다. 곧,
   1 사죄의 기쁜 선언을 들으므로 "꺽으신 뼈"(뼈가 아플 정도로 심령이 괴로웠던 것을 가리키거나, 혹은 실패한 것을 가리킴)가 기뻐할 수 있기를 원하는 것(8 절).
   2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이제는 보시지 않고  "도말"하여  주시기를  원하는  것(9
절).
   3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10 절).
   4. "정직한 영"(*               =루아크 나콘), 곧, 믿음으로 "확정된 심령"이 되
도록 새롭게 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10 절).
   5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교제를 계속해 주시기 원하는 것(11 절).
   6 "주의 성령"을 자기에게서 거두지 마시기를 원하는 것(11 절 하반).
   7 "구원의 즐거움"으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는 것(12절 상반).
   8 "자원하는 심령"(*                   =루아크 네디바), 곧, 선을 기쁘게 따르는
심령을 가지도록 붙들어 주시기를 원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기도의 응답을 받아 사죄함이 된 후에는 마음에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란 문구에  있어서, "주께만"(*             =레햐 레바떼햐)이란 것은, 강화된 말이니, 그의 범죄가 지존하신 하나님의 엄위를 범했다는 것이다. 곧, 지존하신 하나님의 엄위를 범한 고로  그 죄가 크다는 것이다(Ridderbos, de zonde is daarom zo  ontzettend,  omdat  zij  is bedreven ,,tegen de allerhoogst majesteit Gods"). 이 말씀은, 그의 죄가 얼머나 크다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도 하나님 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긔의 회개가 얼마나 참도니 것을 보여 준다. 참된 회개는, 인간 상대로 문제 해결을 찾지 않고 영적으로 하나님 상대로 최후적인 해결을 찾는다. 이렇게 회개하는 자는, 자기의 죄악을 심각히 또는 바로 보는 동시에, 그 해결도 근본적인 완성을 얻는다.
   사람이 성경을 읽는 가운데, 죄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서도 자기 죄에 대한  아픔을 느끼지 못함은, 그가 아직 죄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죄는, 알고 보면,  가시와 같이 찌르고 아픈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죄의 통감(痛感)을 느끼지 못하는가?  그 원인은, (1) 그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심령이 마비된  데 있다. (2) 사람이 죄에 대하여 책망하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도 죄감을 가지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원인은, 그가 스스로 외롭다고 하는 심리는, 1 거짓된 것이며, 2  그것은 하나님보다 지혜롭다는 교만이며, 3 하나님 말씀의 권의를 부정(否定)하는  죄악이며, 4 그리스도의 보혈을 모독하는 죄악이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외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곧,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당연하신 말씀으로 인정되고, 또한  다윗을 판단하실 때에 명백하다고 인정된다는 뜻이다. 70인역(LXX)에서는, 여기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란 말씀(*        =티제케)이 "이기려 함이니이다"(*              ...             )라고 하였으나, 결국 같은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악의 지적을 받으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회개의 심리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 중 회개한 자도 그와 같이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고 하였다(눅 23:41).

  시 51:5,6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  "출생"이란  말(*            =콜랄티)은, 분명히 원죄(原罪)의 교리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다시 말하면, 그의  죄악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것임을 알려 주고 있다. 현대의 신학자들  중에는  원죄의 교리를 부인하는 자가 많다. 폴틸릭(Paul Tillich)은, 인조(人祖)의 타락(墮落)이  실제적 역사가 아니라 하고 (Systematic Thedldgy Vol. II, p.41), 바르트(Karl  Barth)는 역시 죄악을 역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철학적으로 생각하여, 죄악이란  것은 우리의 존재의 제한성을 승인하지 않은 것으로 시작된다고  하였다(Church  Dogmatics Vol. IV, p. 468). 그러나 성경은, 어디까지나 죄악이 역사적(歷史的)으로 선조(先祖) 때부터 부패성으로 내려오던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한 것은, 죄악에 대한 치료가 인력(人力)으로는 절망 상태인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                       =뻬아원 콜
랄티) 출생하였음이여"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1) 자기 자신보다 죄악이 도리어 그에게 주체(主體)가 되어 있다는 뜻이며, (2) 죄악과 자기 자신은 거의 일체(一體)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약 1:15 말씀, 곧,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란 말씀과 같은 원리를 보여 준다. 이 말씀에 있어서도 역시,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 자신이 주체가 아니고 욕심이 사람의 주체가 되어, 사람을 잉태의 기관(器管)으로 만들어 죄악을 잉태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람과 욕심은  거의 일체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사람에게 없이 할 방도(方途)는 없다.  만일 사람이 주체이고 욕심은 부속(附屬)된 것이라면, 죄악(욕심)을 없이 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욕심이 주체가 되어 있으니, 인격을 파괴하여 없앨지라도 욕심과 사람을 분리시킬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악은 암종(癌腫)과 같다고 생각된다. 암 병에 거린 자에게서 암종을 떼어내려고 하면, 그 사람을 전적으로 파괴하게 되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이와 같이, 죄도 인간을 깊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하였다(롬 7:24). 이런 극단적인 비애(悲哀)에서 사람이 할 말은, "오호라"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 동양 문자로는 "아이구테나"(   )라고 할것 밖에 없다. 죄악의  문제는 하나님께서만 해결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속죄의 희생이 되게 하셨다(롬 5:8; 갈 3:13). 그러므로 다윗은,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7 절)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하여 주시기를  원하는 말씀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다윗은, 자기의 죄악의 정체(正體)를 보았다. 그는,  몇가지
실수를 지명(指名)한 정도가 아니고, 자기의 존재의 시초부터 죄악에 물든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라고 한 말씀이 그 뜻이다. 그가 이렇게  자기의 죄악의 뿌리 깊은 내용을 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속에 부어 주신 지헤에 의하여 그의 중심(심령의 가장 깊은 데)의 진상(眞相)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를 깊이 보아야만, 자기의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줄을 알고 자기를  거부(拒否)하게 되고, 주님만 의지하게 된다.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한 말씀은,  신약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구약 성경에도 있다. 렘 17:9에도 말하기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다"라고 하였고 (엡 2:1 참조),  렘  17:1엔  말하기를,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이라고 하였다. 곧, 죄악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깊이 단단히 새겨져 있으니 그것이 생활의 원천(源泉)이 되어져 있고, "제단 뿔"에 새겨져 있으니, 그들은  심지어  성엄(聖嚴)스러운 종교 생활에서도 죄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생활도, 죄악이 움직이고 있다면(예켄데 외식하는 것), 그들은 전연 소망이 없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정체(正體)를 보는 성도들은 자기를 거부(拒否)한다. 자기를  거부하는 것이 참으로 사는 첫 걸음이다. 이시야는, 자기 죄악의 정체를 보았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하였고, 요나도 자기의 죄악의 정체를 보앗을 때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욘 1:12)라고 하엿다. 자기를 이렇게 거부하는 것이  참으로 사는 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먼저 죽고야(자기를 거부하고야)  참으로  살게
되는 법이다. 그가 죽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새 마음을 얻는다. 마 16:25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으려는  자가 먼저 자기를 거부해야 된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어떤 할머니에게  외아들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그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해변으로 나갔는데, 그 아들이 헤엄치다가 그만 빠져 죽게 되었다. 이것을 본 할머니는 옆에 서 있는 건장한 청년에게 자기 아들을 구출해 주도록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 힘 센 청년은 태연하게 서서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할머니는 당황하여 울부짖었다. 물에 빠진 아들은 한참 몸부림을 치다가 기진하여 물에 뜨게 되었다. 이 때에 그 힘 센 청년이 물 속에 뛰어 들어가 그  아들을 어깨에 메고 헤엄쳐 나왔다. 그리고 긴급히 인공  흡을 시켜  살렸다.  할머니는 기뻐하면서 그 힘 센 청년에게 묻기를, "당신이 어찌하여 나의 애원을 못들은척  하고 있더니 후에야 내 아들을 건져냈읍니까?" 하니, 그 청년이 대답하기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내려고 하면 거의 기진해 갈 때 들어가야 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발악할 때 옆에 가면 꽉 붙잡고 몸부림을 치므로 둘 다 죽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거부할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시 51:7
  우슬초를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 이 말씀은, 다윗이, 구원 사상(救援史上)에 계시(啓示)하신 하나님의 속죄법(贖罪法)에 의지한 담대한 호소이다. 다시 말하면, 범죄자가 지기의 의(義)가 없어도  하나님의 속죄법에 의하여 당당하게 칭의(稱義)될 수 있는 사실을 믿은  담대한  신앙이다. "우슬초"로써 송아지나 양의 피와 물을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므로 사죄함이  되는 원리가 구약(출 12:22)에 계시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피의 대속(代贖)을 예언한 것이다.(히 9:12-22). 다윗이,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라고 한 것은, 그야말로 죄인을 대속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법을 단순성 있게  믿음으로 말한 것이다. 우슬초로 피 섞인 물을 뿌리는것이 어떻게 사죄(赦罪)를  가져오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믿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리석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슬초로 피 섞인 물을 뿌리는 것을 우습게 볼  것이다(고전 1:23-25), 아무리 세상 사람들은 우습게 볼지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도라면, 그저 믿는 것이 신앙이다. 우슬초로 피 섞인 물을 뿌리는 것은, 실상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언한 제도였다. 이 제도는, 인간의 죄악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의  방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보혈만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혹시 잘못 생각하기를, (1)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단단히 붙잡는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듯이 생각하는 것, 그런 생각은 그리스도의  보혈만 믿는 신앙이 아니고 자기의 힘도 믿는 잘못된 신앙이다. (2) 체험이 있어야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도 그리스도의 보혈만 믿는 신앙이 아니다. (3)  그리스도의 보혈을 이해하는 상당한 지식이 있고 또 보혈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도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믿는 신앙이 아니니 잘못이다. (4) 우리가 능력도 행할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도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믿는 신앙이 아니닌 잘못이다. (5) 그저 우리에게 신앙만 있으면  된다 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우리의 구원을 성립시키는 유일한 공로로 생각하지  않는 것, 이것도 막연하게 믿음믿음 하면서, 그리스도의 보혈 대신에 믿음을 생각하는 것이니, 참으로 구원 받을 신앙이 아니다.
   위에 열거(列擧)된 노력, 체험, 지식, 능력, 그리고 신앙이 다  좋으나,  이것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시 51:8,9
  이 귀절들은, 사죄의 기쁜 선언을 원하는 기도이다. 주께서 꺽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 그가 범죄한 것은, 뼈가 부러진 것 같은 큰 불행이며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사죄(赦罪)하여 주신다면, 그 이상 큰 기쁨이 어디 있으랴.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죄악을 정죄하시는 태도로 그를 대하여 주시기 말기를 청원함이다.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절 하반절 해석을 참조하여라.
   위의 세 가지 말씀은, 다윗이 과거에 범한 죄악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원하는  기도이다. 그는, 용서를 구하는 청원으로 끝내지 않고 더 안전한 살 길을 찾았으니,  그것은, 앞으로는 범죄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주시기 원한다. 그것은 10-12절에 기록되어 있다.

  시 51:10-12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 이것은, 다윗이 이제부터 범죄하지 않게  되기를 원한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그의 마음이 새고 창조되는 길 밖에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께서만 인간을 구원하여 주실것을 믿었다.
   내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여기 "정직한 영"(*               =루아크
나콘)은 확정된 심령이니, 곧, 주님을 든든히 믿는 마음이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 이 말씀은, 그 아랫말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란 말과 실질적(實質的)으로는 같다. 이 두 문구는, 하나님과 그 자신(다윗)이 분리(分離)하게 되지 않기를 원함이다.
   "자원하는 심령"(*                   =루아크 네디바)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악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선을 감심(甘心)으로 행하게 되는 심령을 의미한다(Delitzsch).
   우리는, 이 부분(10-12)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생각할 만한 문제가 있다. 여기 이른
바,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고"란 말씀은, 우리가 한 번 생각할 만하다. 리델보스(J. Ridderbos)는 말하기를,  "이것은,  예언서(豫言書)에 나오는바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리라는 에언들과 동조(同調)한다(렘 24:7, 31:33, 32:39; 겔 36:25). 그리고 특별히 신약 시대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중생(衆生)에 대한 설명과도 일치한다(딛 3:5; 고후 5:17; 갈 6:15). 이 일에 대하여 구약은, 기도와 예언식으로 가르치고, 신약은 그것을 이루어진 사실로  가르쳤으니,  이 점에 있어서 두 시대의 각기 특이(特異)한 성격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  시대에 이루어진 사실로 전파된 중생(衆生)이 그 본질(本質)에 있어서, 구약 시대의  성도에게는 결여(缺如)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신약  시대에 주실 은혜로 예언 되어 있다(렘 31:33). 그러나 그것이 이 귀절에 있어서는,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있었다.
   이 시인의 기도한 바는 두 가지로 생각된다. 곧, (1) 여기서 그는 원하는 바를  필경 받았다는 것. (2) 그가 새로워지기를 원하는 것. 이것은, 자기가 자연인(自然人=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여기서 중생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받은 중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새롭게 하여 주시기를 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Com,entaar, De Psalmen II, pp. 92-93). 규약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는 개인을 중생시키는 일을 위시하여 모든 방면에 활동하셨으니, 신앙 시대의 것은 그것을 보편적으로 실시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것은 종자를 예비해 두는 것과  같고, 신약 시대의 것은 종자를 심는 것과 같다. 종자가 심기운 다음에는  자라나고  퍼지는 법이다.(Warfield,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 pp. 154-156).
   또 다시 우리는, "자원하는 심령"(               =루아크 네디바)을 주시기  원하
는데 대해서도 신학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원하는  심령"은  레델보스(J,
Ridderbos)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완수하는데 감심으로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Die gewillig maakt tot volbrengen van gods geboden). 그리고  노르디자이(A. Noordtzij)는 말하기를, "이것은, 죄를 물리치는 동시에 권능을 주어 하나님의 법도대로 행하게 됨을 의미한다. --- 다시 말하면, 죄의 주관(主管)에서 해방되어 거듭난 영이 자유롭게 됨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Wegneming van schuld en in  gods  wegente wandelen daarbij werkt intusschen het geheiligde van trouwen. Vandaar het vragen om de ondersteunende kracht  van  "den  geest  der  gewilliheid"  :  de  van  de heerschappij der zonde vrijgemaakte en  nu  gewillige  gemaakte  geest  van  den wedergeboren mensch.- Korte Verklaring, Psalmen, pp. 126) 델리취(Delitzsch)는 이 점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밝혔으니,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심령이  죄악의 주장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선한 것이 내부적인 필연성 같이  되어진 심령이다"라고 하였다(What is meant is the humen spirit set free by  the  Holy Spirit from the domynion of sin, a spirite to which what is good has  become  an inner, instinct-like necessity.-Commentary on the Psalms, pp. 161).

  시 51:13-15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드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 다윗은,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겠다고 서원한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의인을 쓰시는 것이나, 바울이나 어거스틴을  사용하신 것은 다 그와 같은 실례(實例)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한 죄인을 더욱 쓰시기 원하시는 이유를, 우리는 몇가지 더 생각할 수 있다. (1) 의인 아흔 아홉 사람을 인하여 기뻐하심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더욱 기뻐하시는 까닭(눅 15:17).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너라"라고 하셨다(마 9:13). (2) 하나님께서 본래 죄인이었던 사람을 사랑하시어 권능을  나타내실  때에, 보는 자들이 그 능력의 원천(源泉)이  하나님께 있음을 더욱 밝히 알게 되는 까닭(고전 1:28,29). (3) 죄를 회개한 자는, 자기 과거의 부족을 생각하여 겸손한  까닭이다.(약 4:6).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다윗은, 앞절들(1 하반, 7,9)에서 자기의 죄악을
도말해 주시기 원할 때에, 벌써 우리야 죽인 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을 재설(再說)하는 이유는, 그 죄를 너무 원통히 여기기 때문이다.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곧, 그에게는 의(義)가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여  주심은, 하나님의 의에 의하여 그리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찬송하겠다는  뜻이다.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하나님에게서 사죄하여 주시는  은혜를 받으면, 그 심령 속에서 견딜 수 없는 감사의 말씀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다,사 35:6에 말하기를,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메시야  시대에 구속을 받은 자들이 성신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찬송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이 전파하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야 입이 열려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종들의 입에 말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심에 대하여는,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에도 그의  말씀을 담아 주셨다 하였고(렘 1:9).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핍박을 당할 즈음에 말할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다(마 10:19,20). 신약의 오순절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행 2:4).

  시 51:16,17
  주는 제사를 즐겨 아나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상하고 통화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 여기 이른바, "상한 심령"(*                 =루아크 니쉐바라)이란 것은, 심령의 굳은 것과 교만한 것이 변화를 받아 하나님 밖에는 구원해 주실 이가 없음을 느끼는 심리를 의미한다(J. Ridderbos, De hardheid in weekheite, de hoogmoed im ootmoed is veranderd, em geen redding meer verwacht wordt dan van God alleen.-Commemtaar op het oude Testament, De Psalmen II, p. 96).   델리취(Delitzsch)는 말하기를, "상한 심령의 소유자는, 경건치 않은  이기주의(利己主義)라는 것은 죽고, 진리를 받지 않는 강퍅성은 녹아지고, 자고심(自高心)은 낮아진 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만을 모든 것의 모든 것으로 여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의 심령을 성전으로 여기신다(사 57:15)"라고 하였다. 그러면, "상한 심령"은, 신자가 회개하면서 자기를 아주 못쓸 것으로 돌려 놓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기를  파기(破器)와 같이 내어 던지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기의 중요성을 도무지 느끼지 않는다.  비유컨대 그는, 자기를 무너진 집과 같이 보므로 이제부터는 자기를 존중히  하기 위한
아무런 비밀도 없다. 이제부터는 그에게서 외식이란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사람이 바로 되는 데 있어서 최대의 원수는 외식(外飾)이다.
   "상한 심령"의 소유자는 이제부터 자기를 전연 의지하지 않는다. 사람이 구원   는데 있어서 가장 큰 또 하나의 원수는 자기 신뢰(自己信賴)이다. 자기를  신뢰하는  것은, 천하에 자기 이상 좋은 것이 없고, 자기 이상 힘이 있는 것이 없다는 어리석은 것이다. 사실상 자기라는 것은 자기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썩었고 더러운 것 뿐이니 그야말로 숨 쉬는 주검과 같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인생이 불행하게  되는 방법에 대하여 물으니., 그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1) 언제나 네  자신을  생각하여라. (2) 언제나 네 자신에 대하여 말하여라. (3) 언제나 "나"란 말을  많이  사용하여라. (4) 언제나 사람들의 말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자기를 생각하여라. (5)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대하여 말해 주는 것을 원하여라. (6) 언제나 남들이 내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고 의심을 풀어라. (7)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대하여 감심을 품는 것을 원하여라. (8) 언제나 사소한 일에 대하여 감정을 내어라. (9) 언제나 남들이 나만 못하기를 원하여라. (10) 언제나 내게 대한 비평을 용서하지 말아라. (11) 언제나 너 자신 밖에 다른 사람을 믿지 말아라. (12) 언제나 네게 대한 존경을 찾아라. (13)  언제나 남들이 네 의견과 합치하기를 원하여라. (14) 언제나 네게 감사하지 않는 자를  좋게 생각하지 말아라 (15) 언제나 네게 봉사한 것을 잊지 말아라. (16) 언제나 네게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려라. (17) 언제나 할 수만 있으면, 네가  할  책임을  피하여라. (18) 언제나 남들을 위하여 될 수 있는대로 일하지 말아라. (19) 언제나 네 자신을 가장 사랑하여라"라고 하였다.
   상한 심령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사 57:15, 66: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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