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시편 034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시34: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 여기  "송
축함"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아바레카(*          )인데 그것은, 자기로서는 꼭  송
축하겠다는 결심을 보여 주는 역설 문체(力說文體)이다. 이 시인은, 여기서 언제나 하
나님을 송축하겠다고 굳세게 주장한다. 하나님이 주신 큰 구원을 체험한 자들은, 모두
다 이런 결심을 한다.
   유명한 순교자 부래드포드(Bradford)는, 그를 박해하는  영국의  매리  여왕(Queen
Mary)에 관하여 말하기를, "여왕이 나를 놓아 주면 나는 그(하나님)에게  감사하리라,
여왕이 나를 가두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리라, 여왕이 나를 불태우면 나는 그에게 감사
하리라"라고 하였다 한다(spurgeon). 이렇게 부래드포드(Bradford)는 어떠한 일을  당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한,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신자라야  계
속해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시 34:2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 이 시인은
윗절에 말한 것과 같이, 입으로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 영혼으로 찬송한다. "영혼"
(*      =네페쉬)은 인격의 중심 부분인 만큼, 그것으로써 찬송함은 인격 전부를 들어
바쳐 찬송함이다. 여기 "자랑하시니"라 함(*          )은, 교만하게 자랑함보다 도리
어 남들에게 대하여는 겸손해지는 자랑을 말함이다. 곧,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줄 알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자랑을 말함이다. 고전 1:13 참조. 이런  자랑
이야말로 "곤고한 자"들(곧, 고난과 환난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서  낮아진  자들)이
듣고 기뻐한다. 그 이유는, 그들도 다윗처럼 주님의 돌보아 주시는 은총을 받을  날이
이를 줄 알기 때문이다(Hengstenberg). "곤고한 자"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아나윈(*          
)인데, 그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고난을 받고 겸손해진 자들, 곧, 자신을 믿지  않
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시 34: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 이 시인은 다른 성
도들더러 "함께" 주님을 찬송하자고 요청한다. 이렇게 요청하는 이유는 몇 가지  있을
것이다. (1)그 자신의 심령도 남들의 협력을 받아야, 더욱 깨어 일어나서 하나님 찬송
을 힘있게 하게 되는 까닭이며, (2)그가 받은 은혜는 너무 감사하니 만큼, 남들의  감
사도 첨가 되기를 열원(熱願)한 까닭이며, (3)그의 받은 은혜는 다른 성도들에게도 유
익한 까닭이며, (4)다른 성도들도 그와 같이 은혜 받을 소망이 있는 까닭이다.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란 말씀의, "광대하시다"함은 히브리 원어로  까뗄류(*        
)인데, 그것은 "크게 함"을 의미한다. 이 말 뜻은,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을 크게 만듦
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그대로 위대하시다고 찬미함이니, 그것은 성도의  사
언행(思言行)으로 나타내야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는 무한하시니 만큼, 인간으로
서 하나님을 높이리만큼 높이는 찬미를 완전히 하기 어렵다.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자
신을 나타내시도록 하는 수 밖에 다른 길은 없나니, 곧,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성경)
대로 사언행의 찬미를 가지는 동시에, 아직 성경적으로 되지 못한 점이 자기에게 많은
줄 알고 부족을 느끼며 겸손해지므로 하나님은 높아지신다. 인간이 낮아질 때에  하나
님의 위대는 그만큼 더욱 드러난다.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란 말은, 상반절의 사상과 같은 뜻을 가진다.


  시 34:4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 이
귀절부터 7절까지는, 윗절들이 말한바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를  말한다.  "여호와께
구하매"란 말씀의 "구하매"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따라쉬티(*           )니  힘들여
찾음을 의미한다(Delitzsch). 그것은, 간절하게 계속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제나 기도는 간절해야 응답된다(히 11:6; 눅 11:8; 삼상 1:15,16).
   "모든 두려움"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메구라(*          )니,  두려움의  대상을
말함이다(Hengstenberg). 다윗도 공포심에 사로잡힌 때가 있었던 사실이, 이 문구에서
알려진다. 그는, 두려운 것들 앞에서도 주님을 의뢰하고 기도한 결과로 하나님의 건져
주심을 받았다.

 

  시 34:5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 여기서는, 이 시인이 "저희가"라고 복수를 사용하면서,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성
도들의 받은 은혜와 전망(展望)을 진술한다. 이것을 보면, 이 시인은, 자기를 그 당시
성도들의 대표자로 알고 말한 사실이 드러난다(Hengstenberg). 곧 그는, 자기  개인의
사정을 말할 때에 다른 성도들을 포함시켰고(1-3), 다른 성도들의 처지를 자기의 것으
로 착색(着色) 하였다. 요컨대, 그는, 개인주의자가 아니고 교회와 함께 동정(動靜)하
는 교회인이었다.
   "앙망하고"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히삐투(*          )이니, 구원을 열렬히 찾으며
쳐다봄을 의미 한다(Delitzsch). 우리가 이 복잡하고 미혹하는 세상에서 주님만을  바
라보지 않다가는, 별 수 없이 그 모든 미혹건들에게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마
치, 깊은 강 위의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이다. 그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자가 눈을 이리 저리 팔다가는, 그 다리에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는 그 다
리만 보고 걸음걸음 옮겨야 된다.
   "광채를 입었으며"란 말의 히브리 원어는 나하르(*      )인데,  일설에는  이것이
흐른다(flow)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도들이 서슴치  않고  하나님께로
모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델리취(Delitzsch)는, 우리 한역과 같이 "광채를  입었으나"
란 뜻을 택하였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도들이 그 현재에 하나님의 영적 은혜를  받고
또한 미래의 복된 소망을 확실히 내다봄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실패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땅 위에 계실 때에도, 병자들이 그에게 찾아 와서 고침 받
지 못하고 돌아간 일은 없었다.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란 말은 히브리  원어
알 예크파루(*                )란 말의 의역(意譯)이다.  이  말을  직역(直譯)하면,
"영영히"는 없고 그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이다.              

 

  시 34: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뽑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 "이 곤고한 자"란 말은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 "부르짖으매"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카라(*      )니, 강력히 소리질러 하나님 앞에 간구함을 가리킨다. 그 기도는,  소리
의 높이보다도 중심의 간절성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런  간절한  기도는,  종종
"부르짖음"으로 표현된다(욥30:28; 시18:6, 22:2, 28:1,  55:16,  88:13,  130:1,  욘
2:2).

 

  시 34:7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 "여호와
의 사자"란 말(*                 )은, 하늘 군대의 장관(長官)을 가리킨다. 하늘  군
대 장관의 나타남은 성도의 위태한 때에 종종 있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공격하
려 할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수 5:14, 6:5), 야곱이 에서를 두려워할 때에  그리하
였고(창 32:1, 2), 아람 왕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잡으려 할 때에도 엘리사에
게 불말과 불병거가 나타나 보였다(왕하 6:8-17).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성도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늘 군대를 동원시켜 그들을 보호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강적
마귀가 우리의 신변에 가까이 오는 줄 안다. 그러나 그놈이 우리를 죽이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놈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는 까닭일까?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놈은 우리를 제일 미워하는 자이다. 그러면 그 놈에게 힘이 없는 까닭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그 놈은 사람보다 강하다. 그 놈이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 놈을 대
적하여 이기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우리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
리를 도와 주시기 위하여 무수한 천사들을 가지고 계신 사실을 알 때에 우리의 신앙이
굳어진다(Calvin).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천사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방편
(方便)으로도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시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이
어귀는, 하나님의 친밀하신 은조(恩助)를 아는 방법을 보여 주었으니, 곧,  체험함(맛
보는 것)이다. 체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실행함으로 되어진다. 이런 체험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모든 놀라운 행사들을 깨닫는 밝음에 이른다. 하나님께 "피한다"함은,
그를 신뢰하여 그에게만 소망을 걸고 순종함을 말함이다.

 

  시 34: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  시
23:1 참조, "경외하라"란 말(*      )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하
나님을 두려워하기만 하면, 그는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  이
유는, 하나님만이 가장 두려우신 대주재이시기 때문이다(마 10:28). "부족함이 없으리
로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주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 모든 것을 소유하셨다. 그러므로  참
된 신자는 말하기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한다(시 121:1, 2).

 

  시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
으리로다. - "사자"는, 잔인하여 남을 해하고 탈취하므로 궁핍해질 염려가 없다. 그렇
다면, 청렴(淸廉)하여 남을 해하지 않는 성도는 쉬이 굶어 죽을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사자는 굶어  "주릴지라도"  성도는  주리지  않는다고  한다(시
37:25). 풍족히 살기를 원하는 자는, 사자처럼 남을 해(害)해서는 안된다. 13, 14절의
내용을 보아라.

 

  시 34:11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로
다. - 여기서는 이 시인이 교사(敎師)의 처지를 취한다. "소자"란 명칭은  제자(학도)
를 가리킨다. 궁켈(Gunkel)은, 이 점에 있어서 여호와를 섬기는 종교의 객관적 내용이
교수(敎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반대로 그 종교의 주관적 방면이  교수
된 것이다(J. Ridderbos). 곧, 이 귀절부터 이 시인이 가르친 것은, 사람이  실제적으
로 여호와를 두려워할 구체적 방법이다.

 

  시 34:12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 여기 이른바 "생명"
이란 말과 "장수"란 말은, 신약이 명백히 말하는 영생(永生)과 같은 뜻을 가진다고 하
는 학자가 있다(J. Ridderbos).

 

  시 34: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  이것은  입술로써
남을 해하는 죄, 곧, 악담, 저주, 아첨, 훼방, 누설, 황언(慌言) 등을 멀리 하라는 뜻
이다. 인간이 입술로써 남을 해함이 다른 방법으로써 함보다 많으니,  입술은  위험한
것이다. 약 3:5 참조.

 

  시 34: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 사람들끼리의 "화평"은, 서로
다툼이 있는 뒤에는 얻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화평"은, 다투기 전에 서로 "선을
행하"므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화평은 잃기 쉬운 것이니 만큼, 이 시인은 그것을
찾으며 따르라고 한다. 위의 13,14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사회 생활에  있어서
그 언행이 어떠해야 될것을 가르친다. 그는 사자처럼 남을 해하는 자가 되지 말고  남
에게 선을 행해야 된다. 그렇게 행하므로 축복은 그가 받는다. 그 이유는,  15-19절이
보여 주는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는 까닭이다. 만일, 그가 기도하지 않거
나, 또는 그가 기도할지라도 들어 주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사자처럼  약탈하지
않는 그의 생활 방법으로써는 살아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도가 있고,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주님이 살아 계시니 만큼, 그는 부족함이 없다.

 

  시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 이 귀
절은, 성도가 악한 사회에서 선(특별히 화평)을 쫓으려 할 때 일어나는 여러가지 곤난
을 극복할 심리적 준비에 대하여 말해 준다. 그는, 선을 행하려고 할 때에 고독의  쓴
잔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때에도, 외로운 자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을 기억
하므로 낙심하지 않게 된다.

 

  시 34:16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 이 귀절도, 역시 성도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에 일어나는 곤난을 참을 수 있게 하는
심령상 준비를 준다. 그가 선을 행할 때에 대적하는 자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그런 원수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처분이 있을 것을 기억하므로 참아 나아갈 수 있다.  

 

  시 34:17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  일례를
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으
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다. 하나님이 놓아 주시는 자를 가둘  감옥이  없
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
다. - 17절이, "의인"의 행복에 대하여 말씀한 반면에, 이 귀절은 죄  많은  인간들의
행복에 대하여 말한다. 곧, 비록 죄인들이라도 마음이 상하면(통회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까이 하시며 구원해 주신다고 한다. 윗절에 말한 "의인"과 이 귀절의  "마음
이 상한 자"는 같은 사람을 가리킨 듯하다. 그러나 "의인"이란 말은 좀더 범위가 넓어
서 다른 경건한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시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 "의인",  곧,
경건한 자가 고난을 많이 당한다는 사상은 신약에도 많이 가르친다(딤후 3:12).  그들
에게 고난이 많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세히  감시하시며  구원해  주신다(눅 12:7).

 시 34: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환난 중에서 돌아보사 치명상(致命傷)에 이르지 않게  하심을  말함이다. 성도가 실패하는 듯하나 적어도 영적(靈的) 의미에서는 실패하지 않는다.

  시 34:21,22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  여기 "그 종들"이란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일반적 명칭이다(왕하 9:7,  10:23; 느 1:10; 시 34:22, 69:36, 102:28, 105:25, 113:1, 134:1, 135:14). "영혼"이란 말은
생명을 의미한다. "저에게 피하는 자"란 말은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를 가리킨다.


Articles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