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욥기 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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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 32:1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 곧, 욥이 그 당한 환
난의 원인이 될 만한 특수한 죄악이 자기에게 없다고 하므로, 그의 세 친구는 그 이상
더 변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변론을 더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하였으니(3
절) 그것은 잘못이다. 왜 진리와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고 남을  정죄하는가?  그것은
자기들의 지식 이상의 지식은 없다는 교만이다. 사실상 그들의 지식은 높은 차원의 영
적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까지 그들의 신학적  변론은,  의인도
고난 받게 된다는 하나님의 경륜은 모르고 단지 상선 벌악(賞善罰惡)의 섭리에 머물렀
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 되었던 자를  정죄하려
던 생각과 같다(요 9:1-2). 재앙 중에서 수난(受難)하는 자들에게 대하여는 신학적 변
론으로 그들의 죄를 추궁함보다 사랑의 구제를 힘써야 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
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


 
  욥 32: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의롭다 함이요. - 여기 엘리후의 족보가 기록된 것을 보아도 욥기 저
자가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기록하려고 노력한 것이 분명하다. 소설이나 우화를  기록
하는 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
   엘이후가 노(怒)를 발하였다는 말을 보면 그에게 정의대로 사리를 판단해야 된다는
정의감(正義感)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변론의 내용도 세  친구의
변론의 내용과는 달리 욥의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경륜에서 온다고 하였
다(33:19-33). 그러므로 엘리후의 변론은 욥의 당한 고난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방향
으로 가까워진 셈이다. 물론 그 완전한 해결은 이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
으로 말미암는다(W.H.Green, Job's Triumph over Satan, 1891, PP.63-64).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이 말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주장하기 때문이요"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 문구에 대하여 1절 해석을  참조하
여라. 곧, 욥은 그 당한 고난의 원인이 될 만한 특별한 죄가 자기에게 없다고  주장한
것 뿐이다.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사상은 욥에게 없었다(9:1).

 

  욥 32:3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
그들이 욥의 말을 꺾지는 못하면서 그를 정죄한 것은 그들의 횡포라고 할 수 있다. 그
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합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와 같은  행동에  대하여
엘리후는 분노하였다. 엘리후의 태도를 보면 그는 세 친구보다 공평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욥 32:4

  엘리후의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음으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  이것을
보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경로(敬老)의 예의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매우
합당한 예절이었다. 노인을 공경함은 제 5계명을 지킴이니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건을 배양하는데 도움을 준다. 배교자들과 무신론자들의 대부분은 노인을  존대하지
않고 저희들의 동류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윤리면(倫理面)에  있어서
노인을 존중한다. 레 19:32에 말하기를,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
며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한다.   

 

  욥 32:6-10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
함으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
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내
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 이 부분에 나타난 말씀의 내
용은, (1) 젊은 사람이 노인 앞에서 먼저 지도자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 아니
라고 함(6-7). (2) 그러나 팰요한 경우에는 젊은 사람이라도 나이 많은 사람 대신으로
옳은 말을 할 수 있다고 함(8-10). 이런 주장이 당연한 이유는 젊은 사람에게도  성령
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8절).
여기 "심령"이란 말(*    )은 성령을 의미한다(Keil & Delitzsch). 사람이 성령의  감
동을 받아 말할 때에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의 권위를 가진다.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말하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청종해야 된다. 사무엘은 비록 어렸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
씀을 받은 후에는 (삼상 3:4, 10-14)당시의 늙은 제사장 엘리도 그의 말을 듣기를  원
하였다(삼상 3:16-17). 시 119:100에 말하기를,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라고 하였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지혜의 영을  소유함이  언제나
노인의 특전이 아님을 밝힌다(Artur Weiser, Der Gottesgeist der Weisheit ist nicht
immer das Privileg des Alters.-Das Buch Hiob, 1968, s.221). 엘리후의  이와  같은
주장은 철저한 신본주의(神本主義)이다.    

 

  욥 32:11-14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의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그가 내게 말을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
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 여기서는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의  변론
이 무능한 사실에 대하여 탄식한다.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11절). 곧, 욥의 세 친구가 욥에게 대하여 적당한 대답을 하려고 애쓰는 동안에 엘리
후는 귀를 기울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오래 참아가면서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
들의 말을 들어 보려고 힘썼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태도로써 자기의 겸손과  예
의를 보여 주었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모든 변론하는 사람들이 배워야 될  예의에
속한다. 사람들은 흔히 변론중에 예의를  잃어버리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된다.  잠
18:13에 말하기를,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하였
고, 잠 18:17절에는 말하기를,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 와서  밝
히느니라"고 하였다. 이런 성귀들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란 지혜를 가르친다(약 1:19).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13절 하반). 엘리후
는 욥의 세 친구에게 욥을 당할 자 없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도
능히 욥을 이길 수 있다고 한다.
   "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
라."(14절). 이 문구는 다음과 같이 개역할 수 있다. 곧, "그가 나를 거스려 말한  바
없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항변하는 식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다시 말
하면 욥이 아직 엘리후에게 대하여는 말을 한 적이 없으니 그로서 욥에게 대하여 변론
하는 그 방식은 욥의 세 친구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욥 32:15-22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
히 서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보라 내 가슴을 봉
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아첨할  줄
을 알지 못함이니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 여기
서 엘리후가 말하는 것은 욥의 언사에 대한 자기의 답변이 있어야 할 것을 토로(吐露)
한다.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7절 상반). 그는 욥에게 대하여 답변할 책임이 있다
고 한다.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18절). 곧, 그의  마음
속에는 욥에게 대하여 답변할 말이 솟아오른다는 뜻이다. 19절이 역시 그런 의미이다.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21절). 엘리
후는 여기서도 변론자로서의 자기의 완전한 자격을 표시한다. 곧, 그에게는 하등의 편
견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도 모든 변론 석상에서 사람들이 본 받아야 할 정신이다. 변
론하는 사람들은 이기려는 생각으로 진리대로 말하지 않고 편파적으로 기울어지기  쉽
다.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라."(22절). 우리는 엘리후의 이와 같은 인격을 배울만하다고 느낀다. 그는  아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첨할 줄도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아첨하는 것을 큰 죄로 여겼다. 곧, 아첨하는 자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취하여 가심이 마땅하다고 한다. 시12:3에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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