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욥기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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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 16:1,2

  욥이 대답하여 기로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하는 위안자
로구나. - 욥은 그 친구들에게서 많은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 많은 말들은 결국 같은
내용의 중복이었다. 고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말을 계속적으로  늘어놓으면  결국
그 수난자인 욥을 괴롭히는 것이 될 뿐이었다.
   사람은 육신의 고통을 정신적 위안에 의하여 이겨 나갈 수 있다. 잠 13:14에  말하
기를,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라 사람으로 사망의 그물을 벗어나게  하느
니라"고 하였고, 잠 15:4에는,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욥의 실정에 맞지 않는 말로써 그의 회개를 강요하였음으로 도리어 그를  번
뇌케 하였다.

 

  욥 16:3,4상반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하는고 나도 너희
처럼 말할 수 있나니. - 욥의 친구들은 그 때에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을 많이 하
기에 열중하였다. 그 말은 욥의 당한 고난이 그의 특수한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
게 (1)남의 죄를 지적하기 좋아하는 것이 인류의 경향이다. 옛글에도 "사람이 극히 미
련하여도 남을 꾸짖는데는 밝다"(*                )란 말이 있다. (2)사람들은  서로
변론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을 이기려고 열을 띠게 되는 법이다. 이것도 일반적  경향이
기도 하다. 그들은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 자기 편에서 말을 토하기에 바쁘다(잠 18:
13). 잠 17:27-28 참조.

 

  욥 16:4하반,5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말을 지어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
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 여기 이른바 "머리를 흔든다"는 것은  멸시하는  태도이다
(왕하19:21; 시22:7, 44:14, 109:25; 렘18:16; 애2:15). 욥도 그  친구들처럼  남에게
대하여 멸시하는 행동을 하려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실상 그렇게  하
겠다는 것은 아니다.
   욥은 여기서 풍자적으로 말한다. 곧, 이제 처지를 바꾸어 자기는 위로자가 되고 그
친구들은 수난자인 경우에 그도 입술의 위로(이는 참된 위로가 아님) 쯤은 할 수 있다
고 한다. 비참한 곤경에 빠진 자에게 대하여 멸시하는 마음(4절 하반)이 있는 자가 어
떻게 참된 위로를 베풀 수 있으랴? 입술로만 나타내는 사랑(5절 상반)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약2:15-17에 말하기를,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
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요일 3:17-18 참조.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대하여  체
휼하는 사랑은 없이 이론만을 늘어 놓았던 것이다. 상선벌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논하는 신학 이론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비참해진 욥에게 그것을 적용함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나면서 소경이 된 자를 앞에 놓고,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
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한  제자들의  질문과
마찬가지이다. 요 9:2 참조. 우리로서는 우선 비참한 곤경에 빠진 자를 구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아야 한다.

 

  욥 16:6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나니 잠잠한들 어찌 평안하랴. - 욥은 여기
서 자기의 고난이 어떻게 심각함을 진술한다. 사람이 괴로우면 비명(悲鳴)을 울리므로
그 고통스러운 느낌을 경감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욥의 고통은 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고통 중에서 잠잠히 참음으로 그
것을 견제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욥에게는 그 방법도 무효였다. 그는 이래도  괴로왔
고 저래도 괴로왔다. 그 어떤 방법으로든지 괴로움을 덜어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상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도 욥은 그런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음 귀절부터는 그의 신앙적 언사들이 나온다. 그 언사들은, 욥이  하나님에게  아주
버림 받은 것 같이 생각하고 낙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것은 불신앙의 폭발인  것
같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 신실한 성도를 이 자기들의 당한 고난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인식하고 그에게 애소한 것은 도리어 신앙의 표현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환난도 섭리하신다는 믿음이다.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가 역시 고난  중에
애가를 지었다(애 3:1-18). 그런데도 그도 낙심하고 만 것이 아니고 신앙적 기도로 결
론지었다(애 3:19).

 

  욥 16:7

  이제 주께서 나를 곤고케 하시고 나의 무리를 패괴케 하셨나이다. - 여기서는 욥이
자기와 자기 가족("나의 무리"란 말 뜻)이 환난 당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  이
환난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상은 신앙적이다. 이런 신앙은 그  환난에서  구원하실
이도 하나님이신 사실을 믿게 된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
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라고 하였다(욥 5:18). 호 6:1-3 참조.

 

  욥 16:8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
양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나의 죄를 증거하나이다. - 이 말씀은 욥의 비참한 병환을 염
두에 둔 것이다. 그의 병세는 그의 죄를 책망함 같이 보였다.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
으심이라"함은 그의 죄에 대하여 입증(立證)하심을 가리킨다. 욥의 수난이 어떤  특수
한 죄 때문은 아니건만 그것이 그의 죄를 꾸짓는 것 같이 욥에게는 느껴졌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이면에 있어선 하나의 실험이었다. 그런 처지에서도 욥은
양심을 굳게 지켜 아닌 것은 아니라고 주장을 세우고 그 친구들의 변론에도  말려들지
않았다. 그것이 역시 신앙적인 인내였다.

 

  욥 16: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군박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대적이  되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보시고. - 여기 "뾰족한 눈"은 날카로운 눈을 가리킨다. 여기 나온  표현
들은 사자와 같은 맹수가 그 먹이를 보고 나오는 것 같은 행동을 묘사한다.  하나님께
서 자기 백성을 곤란케 하시는 행동을 이렇게 비유한 것은 애 3:10에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그의 의로우신 처사가 어떤 때에 필요에  의하
여 사정 없음을 비유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보고
구약 시대 성도들의 신관(神觀)이 저열(底劣)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욥의 이와 같은
언사는, 도리어 그의 믿는 하나님이 관념론적인 이상(理想)이 아니고  엄숙한  현실적
간섭으로 임하시는 살아 계신 인격적 신(人格的神)이심을 알려 준다.

 

  욥 16:10,11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나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
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불이시며 악인의 손에 던지셨구나. -  여
기서는 불경건한 군중의 박해를 진술한다. 욥은 이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고  한
다. 이런 사고 방식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아니고 경외(敬畏)이다. 모든 것에  대한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르시게 될 일이 어디 있으랴?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
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마 10:29). 특별히 하나님
의 진노가 인간의 행동을 도구로 하여 나타나기도 한다(사 10:5). 다윗도  시므이에게
서 저주를 받았을 때에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라고 하였다(삼하 16:10).
   여기에 묘사된 욥의 당하는 고난의 성격은 예수님의 고난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
(Matthew Henry). 행 2:23참조. 여기 나온 표현들이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언(시
22:16; 미 5:1)과 유사하다. 마 26:67 참조.

 

  욥 16:12-14

   내가 평한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던져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리고 그 살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 인정 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
로 땅에 흘러 나오게 하시는구나 그가 나를 꺾고 다시 꺾고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
니. - 여기서는 욥이 그 받는 환난을 전쟁에서 받은 상처로 비유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두어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1)그에게 중상을 입히신 이가 하나님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문제를 영적으로
깊이 본 바른 견해이다. 그에게 환난을 가져온 자는 사단이었으나 사단은 하나님의 허
락을 받아가지고 한 것 뿐이었다(1:12, 2:6). 삼상 16:14; 왕상 22:21-23; 사 45:7 참
조. 문제를 이렇게 본 욥은 그 해결책도 하나님께 있는 줄 믿고 그에게 애소한다.  그
것이 그의 옳은 신앙이다(C.Van Gelderen, De Hoofdpunten Der Zielsgeschiedenis van
Job, 1931, pp.40-41).
   사람을 아프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만 그 아픔을 참으로 치료시킬 권위와 능력을  가
지셨다(욥 5:18; 호 6:2).
   (2)욥이 길게 말한 대로 그의 받는 상처는 시험의 성격을 지녔다. 시험의 성격이란
것은 여러 방면으로, 또는 계속적으로 사람을 괴롭게 하여 그로하여금 못견디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시험에 대하여 성경은 그런 의미로 묘사하였다. 예를 들면, "여러가지
시험"이란 말(약1:2; 벧전1:6), "가시"란 말(가시는 계속적으로 찌르는 것임)과  같은
것이다(고후 12:7).
   "과녁을 삼으시고 그 살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란 말씀(12-13)이나, 또는 "그가 나
를 꺾고 다시 꺾고"란 말씀(14절)이 계속성, 중복성을 보여준다. 시험은 한 번만 찾아
오는 것이 아니고 거급거급 찾아온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기를 방법은 인내이다. 욥은
인내의 표본된 신앙가였다(약5:11). 우리 본문의 말씀은 물론 비유적 표현이다.  전쟁
때에 용맹스러운 군인이 적에게 대하여 행함 같이 하나님께서 욥에게  대하여  그렇게
사정 없이 행하신다는 것이다. 14절 참조.

 

  욥 16:15,16

  내가 굵은 베를 궤어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내 얼굴은 울
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 "굵은 베"는 미천해진  처지를
비유한다. 욥은 그 당한 고난 때문에 낮아졌다. 그가 그 전에도 교만하였던 것은 아니
지만 이때에 더욱 겸손해졌다.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란 것은 그의 권세와 영예
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욥이 이렇게 되었어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였
으니, 미래에 큰 복을 받을 것은 명백하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다(약 4:6).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란 문구에 있어서 "붉었다"는 말(*              )은 "부
었다"(ist geschwollen)는 뜻으로도 번역된다(Luther). 어쨌든 이것은 많이  운  것을
가리켰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귀하다. 왕하  20:1-7;
시 56:8; 사 22:12; 눅 6:21; 약 4:9 참조.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곧, 그의 시력이 쇠약해져서 보지 못할 정
도로 무력해졌음으로 이제는 죽게 되었다는 뜻이다.

 

  욥 16: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 욥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환난을 당하면서도(6-16) 그것이 자기의 어떤 특수한 죄값은 아니라고 다시 고백한다.
이것은 교만이 아니고 그의 양심적인 언사이다.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욥은 수난 중에서 이 말을 하였다. "내 얼굴은  울음으
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란 말씀(16절)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면 깨끗한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 그것은 거짓(부정)이 없는 기도 곧, 신앙의  기
도이다. 불신앙은 거짓이다. 시 12:6, 17:1 참조. 비유컨대 우리가 불을 불이  아니라
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불을 불이 아니라고 하면서 불을 가까이 하는  그
사람은 그 자신이 손해를 받을 뿐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알지  않고
"하나님 하나님"한다면 그는 화(禍)를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신데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불신앙은 가장 큰 거짓말이
다(요일 2:22).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을 보시고 상대해 주신다. 그가  우리의  진실을
알아 보시는 방법은 흔히 우리로 하여금 어려운 고비를 당하도록 방임하심으로써 하신
다. 우리가 정말 믿는다면 어려운 고비도 넘으면서 끝까지 믿는다. 욥의 기도를  우리
본문에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의 말은, (1)땅에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여도
문제 없다고 한다. 곧,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고 하였으니(18절), 죽도록 하나
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쉬지 않겠다는 것이며, (2)그가 땅에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
면 하늘에서 받는다고 믿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
니"라고 한 말씀(21절)이 그 뜻이다.

 

  욥 16:18-21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지
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 데 계시니라 나의 친구는 나를  인자
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 -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는 욥의  신앙
이 여기에 진술된다. 욥은 자기를 도와주실 중보자가 하늘에 계심을 알고 눈물을 흘리
며 그를 바라보았다. 19절의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란 말씀과 "높은 데  계시니
라"란 말씀은 중요하다. 그 증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증인은 동시에 사람일 수
밖에 없다(C. Van Gelderen, De advocaat, die voor hem pleiten zal, moet zelf  God
wezen. Maar deze goddelijke Middelaar moet ook mensch wezen.-De Hoofdpunten  Der
Zielsgeschiedenis Van Job, 1931, pp.41-42). 하늘의 중보자를 믿는 신앙은 그리스도
를 믿는 신약 교회의 신앙을 예언하는 것이다.

 

  욥 16:22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이 귀절의 초두에 히브리
원문에는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    )이 있으니, 그것이 그 윗절에 말한 바  중보
자를 만날 그의 소망의 이유를 보여준다. 그가 하늘의 중보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그가 자기의 생명이 이 세상에 오래 머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
년"이란 말(*              )은 계수된 연세를 말함이다. 욥은 자기의 죽을 해도 하나
님께서 정하셨다고 믿었다. 이렇게 욥은 사람의 생사(生死)가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었다. 우리도 그렇게 믿고 날마다 죽음을 준비하고 살아야 된다.  이렇게  준비하는
자만이 이 세상에서도 바로 산다.
   욥이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간다고 함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17:1 참조.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육신이 티끌로 돌아간다는 견지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영(靈)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견지에서 나온 말이다. 욥은 종종 인생의 죽음에 대하여 육신을 염두에 두고 말한 적도 있지만(17:13-16) 소멸되지 않는 영을 염두에 두고 말하기도  하였다(19:26).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간다고 함은 한 가지 중요한 뜻을 보여준다. 곧, 이 세상은 나그네 세상이고, 저 세상이 영원한 고향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은 나그네  세상인만큼 우리는 잠간 후에 이 세상을 떠난다. 사람의 죽는 것은  소멸되어  없어짐이 아니다. 사람의 죽는 것을 가리켜 "돌아간다", 혹은 "간다"란 말로 표현함은 성경적이다(창 37:35; 삼하 12:23; 전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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