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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 14:1,2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 인생이 "여인에게서"났다는
말은 그의 연약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구약 학자 바이젤(A.Weiser)은 말하기를,  구약
에서 여인은 더욱 불결한 편에 속한 자로 취급되었다(레12:2-5, 15:19)고  하였다(Das
Alte Testament, Das Buch Hiob, 1968, s.102). 그러나 욥은 여기서 인생의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비관한다. 그것은 인생의 사는 날이 오래지 못하다는 것과 또한 그  삶
이 괴롭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는 야곱이 체험적으로 말한 바도  있다
(창47:8-9). 욥은 여기서 특별히 인간의 한평생이 잠간이라는 것을 실감 있게  보여주
기 위하여 그것을 "꽃"과 같다고 하였고, 또 "그림자"와 같다고도 하였다.  약  4:14;
벧전 1:24; 시 39:6 참조. 우리는 욥과 같이 인간 자체에 대하여 비관할 때에는  하나
님을 의뢰하게 된다. 시 90:1-17 참조. 현세에 만족을 느끼는 자는 내세를 생각해  보
지도 않게 된다. 그러므로 현세가 짧고 괴로운  것이  도리어  인생에게  유익하다(시
39:4-7).

 

  욥 14:3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
시나이까. - 곧, 욥 자신은 인생 뿐으로서 보잘것 없는 자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고 엄하게 다루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낙심의
표시가 아니다. 이것은 연약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시103:14-15)에
소망을 걸고 나오는 신앙의 애소이다. 그런데 렌케마(Renkema)는 욥의 말을  오해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만나게 된 것이 도리어 은혜가 될 수도 있는 사실을 욥은  잊
었다고 말하였다(Het Beok Job, 1899, p.128). 욥의 말에 대한 렌케마의 이와 같은 비
판은 잘못된 것이다. 굳센 신앙가들도 종종 하나님께 질문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그
들의 끈질긴 신앙의 애소인 것이다. 진리를 바로 파악하고 그것에 굳게 서서 하나님게
질문할 수도 있는 신앙은 높은 차원에 속하는 신앙이다.

 

  욥 14: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  우리
는 여기서도 욥의 인생관을 볼 수 있다. 그는 인생이라면 누구든지  불결하다는  것은
인정하였다. 따라서 자기 자신도 불결한 자들 중 하나임을 자인하였다. 즉 욥은  자기
의 죄인됨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것이다. 곧,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
를 심판하심보다 용서하셔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셔야(시 130:3-4) 되지 않겠는가 하
고 질문한 셈이다. 욥의 이와 같은 질문은 자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
님의 긍휼을 움직이기 위한 것이다(E.W.Hengstenberg, nicht um sich zu entschuldig-
en, sondern um Gott zur Barmherzigkeit zu bewegen. - Das Buch Hiob, Erster Teil,
1875, s.301).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이  말씀에
서 우리는 (1)원죄의 교리를 믿게 된다. 사람은 그 근본에서부터 죄인이니 스스로  의
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소망 없는 미련한 자이다(잠26:12). (2)인생에게 중보자 없이는
구원의 소망이 전연 없다는 것도 믿게 된다. 둘함(Durham)은 이 점에  대하여  말하기
를, "인간의 전적 부패를 보면 구속은 인간 밖에서 오시는 중보자로 말미암아서만  가
능한 것이 필연적 사실이다."라고 하였다(An Exposition of the Book of Job, p.105).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딤전 2:5).

 

  욥 14:5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 수도 주께 있음으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
셨사온즉. - 욥은 인간의 수명의 장단(長短)을 정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어떤 학자들이 욥의 이 부분 탄식을 원망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의 수명을  정
하신 하나님께서만 각 사람의 죽을 날을 아신다. 사람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  도리어
좋다. 사람이 자기의 죽을 날이 가까운 줄 알면 그는 근심과 걱정에 빠지기 쉽고,  그
것이 먼 줄 알면 그는 방종하기 쉽다(Albert Barnes).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죽을
날을 모르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도 우리는 각 사람의 수명(壽命)의 작정자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알 수 있다.


 
  욥 14:6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로 쉬게 하사 품군 같이 그 날을 마치게 하옵소서. - 여기
서 욥은 그의 죽기 전에 평안한 날이 한 번 있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것은
10:20-21의 내용과 같다. 거기 말하기를,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
고 나를 버려두사 저으기 평안하게 하옵시되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라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자기가  계속  받고
있는 고난이 하나님께로서 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결코 원망이 아니고 그의  신앙적인
발언이다. 그가 자기의 고난이 하나님께로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그것은 그 고난이 해
제될 소망을 가지는 신앙적인 생각이다. 만일 그 고난이 우연한 것이라면 사람의 힘으
로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고난이 하나님께로서 온 줄 아는 사람은  하나
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 그의 긍휼로 말미암는 선한 해결을 받을 수 있다. 욥이  자기
에게 메워진 그 고난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품군"(*        )의 처지와  같
다고 말함은 원망이 아니다. 그것은 고난의 제재 아래 있는 그의 할 수  없는  형편을
잘 표사한 것이다. 이것도 그의 당면한 현실을 하나님께 결부시키는 신앙이다.

 

  욥 14:7-9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
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 여기서는 인생의 이 세상 생명이 나무만 못하다고 한다. 나
무는 찍혀도 산다. 그것은 뿌리를 박고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뿌리를  박는다
는 사상은 귀하게 간주되었다. 골 2:7에 말하기를,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라고 하였
고, 엡 3:17에는 말하기를,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라고 하였다. 렘 17
:8에는 말하기를, "그는 물 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
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
니함 같으리라"고 하였다. 뿌리는 어떤 생리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바깥 세상에 정
체를 나타내기를 위주하지 않고 땅 속에 묻히어 산다. 우리 신자들은  나무  뿌리에서
배울 점이 있다. 어찌하여 인생들은 표면에서 살기를 좋아하는가? 신자들이  자기에게
신앙이 없는 것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명예 문제에 대하여는 심각해진다. 그러나 바
울은 겉사람에 있어서 후패하고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생활을 하였다(고후 4:16).  사
람이 명성을 구하는 것은 저주를 구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법황 클레멘트 4세가 주는 나폴리 대주교의 영예를 거절하였다.

 

  욥 14:10-12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물이 바다에서 줄
어지고 하수가 잦아서 마름 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
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 이 귀절들은 인간의  육신  생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고 그 영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육신은 물질로 되었으니만큼 물질
의 소모됨과 같이 소모되며 또 사망한다. 그것은 동일한 물질인 물과 마찬가지로 소멸
된다.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이렇게 바로 평가해야 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존중시하면
안된다. 우리가 그것은 벌써 죽은 것처럼 판정하고 그것보다 영적 생명의 일을 위주해
야 구원을 얻는다. 롬 8:10 하반에 말하기를,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
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하였다. 마 10:28 참조.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육신의 부활에 대한 욥의 견해를 바로 평가해야 된다. 그는
여기서도 부활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고 한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사람의 몸이 부활하지 못하는 것은 시간적 제
한을 받고 있는 탓으로 그것은 하늘이 없어지기 전에는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의
부활은 천지의 판국이 변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천지 갱신(天地更新)의  구
속 완성의 시기에 이루어진다.
   렌케마(W.B.Renkema)도 이 점에 있어서 옳은 해석을 하였으니 곧, "얼마나 오래 동
안 인생은 음부에 머물게 되는가? 우리가 그것을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잠을 깨
기 전(부활하기 전)에 먼저  하늘이  물러가야  된다."고  하였다(Hoelang  zij  daar
moeten blijven? de hemelen moeten voorbijgaan, eer uit den slaap des doods ontw-
aken. - Het Boek Job, 1899, pp.130-131).

 

  욥 14:13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
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 이 말씀을 보면 욥은 하나님에게서만 영생의  소
망을 가진다. 이 귀절은 분명히 그가 죽은 후에라도 하나님의 기억하여 주시는 은혜로
만 영생이 성립됨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신다면 그가 음부(무덤,  혹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내세)에 들어가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거기에 감추어 주시
는 은혜로운 일이고 또한 부활을 내다보는 과도적인 임시성을 띤 것이다.
   욥이 자기 자신에게서는 영생할 수 있는 소망을 전연 발견하지 못한다(12절). 그러
나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는 자기의 영생이 가능한 것을 내다보았다. 이것이 성경적 사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서만 부활의  소망을  가진
다. 마 19:25-26에 말하기를,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
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다.

 

  욥 14:14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
를 기다렸겠나이다. - 70인역(LXX)은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란  문구의
문체를 긍정 문체로 번역하여 "사람이 죽으면 그가 살리라"라고 하였다. 이  번역문도
우리로서 얼른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학자들중에 어떤 학자들은 이  의문  문체에
근거하여 추측하기를, 욥은 역시 구약적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치중하여 생각하고  내
세 소망을 의문에 붙였다고 잘못 말한다(A.Weiser, Das Diesseitsbewusstsein des al-
ttestamentlichen Menschen ist auch fur Hiob eine deutlich  Schranke,  die  jeden
vorschnellen menschlichen Jenseitsglauben in Frage stellt. - Das Buch Hiob,1968,
s.106).
   여기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란 문구에 있어서 "어찌"란 말이  히브리
원문에는 없다. 이 문구에서 "어찌"란 말을 빼도 그것은 부활에 대한 의심이  아니다.
그것은 문답식으로 부활의 진리를 말하는 표현이다. 곧, "사람이 죽으면 사는가?"  이
에 대한 답변은 그 아래 문구들(14절 하반-15절)이 말해 준다. 곧, 그 아래  "놓이기"
(*            )란 말이 죽음에서 해방됨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님께서 죽은 욥을  불
러 주실 때에 그는 대답하게 된다는 말씀(15절 상반)도 부활을 의미하고(요5:28), "주
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신다"는 말씀(15절 하반)도 그러하다. 위의 모든  말씀
은, 사람의 구원 소망이 전연 하나님께만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 단독  역사
주의(Godsmonergism)에 속한 구원론이다. 크루제(J.H.Kroeze)도 이 부분 말씀을  부활
소망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곧, "여기 '싸우는 모든 날'이란 말(*               )이
이 세상 생애의 기간을 말하나 이것이 여기서 음부의 생애 기간까지도 포괄한다. 그리
고 '놓이는 것'(*        )은 죽음에서 놓임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초역 - Commen-
taar Op Het Oude Testament, 1961, Job, p.173).
   칼빈(Calvin)은 이 귀절에 있어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라고 한  문
구가 그 당시 잠간 있었던 욥의 불신앙을 보여준다고 말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
를, 욥의 신앙이 그렇게 약하여졌었으나 그는 다시 경성하여 내세에 대한 신앙을 고백
하였다(15절 이하)고 한다(Calvin's Sermons from Job, 1952, pp.81-85).  그러나  이
해석은 자연스럽지 않다.

 

  욥 14:15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
을 아껴 보셨겠나이다. - 여기 이른바 "부르셨겠고"란 말(*         ), "대답하였겠나
이다"란 말(*        ), "아껴보셨겠나이다"란 말(*        )들은 모두다 단순한 미래
사(未來詞)로 번역되어야 한다. 곧, "주께서 나를 부르시리니 나는 대답하리이다 주께
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원하리이다"라고. 하나님께서 욥을 부르신다는 것은 그를
부활시키기 위하여 부르신다는 것이다(J.H.Kroeze Henry). 그리고 욥이 대답한다는 것
은 물론 그가 부활하여 하나님과 교통함을 말한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란 말은 욥의 몸을 가리키고, "아끼시리라"는 것은 하나
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인데 곧, 욥을 다시 살리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15절)에 있어
서 반 겔데렌(Van Geldere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욥은 여기서 두 가지로 장래
의 소망을 발견한다. 하나는 자기 생애의 분투에서 해방됨이고, 또 하나는 세상  끝날
의 승리이다."라고 하였다(Eene dubbele hope der toekomst vinden we hier bij  Job:
afflossing uit het strijdperk aan't einde zijns levens, en  genot  der  victoris
aan het einde der eeuwen. - De Hoofdpunten Der Zielsgeschiedenis Van Job,  1931,
p.38).

 

  욥 14:16,17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 여기서 욥은 다시  하나님의
긍휼을 빌어 마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악을 기억하시고 벌하시는  듯한
재앙을 면케해 주시기를 원한다. 여기 이른바 "나의 걸음을 세신다"는 사상, "나의 죄
를 살핀다"는 사상,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신다"는 사상, "내 죄악을  싸매신다"는
사상은 모두 다 신앙 수준이 높고 죄감에 명민한 성도들의 사고 방식이다. 이런  사고
방식은 신앙이 천박한 사람들은 가져보지 못한다. 다윗도 죄감에  명민하였기  때문에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하였고(시 51: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하였다(시32:3-4).
   욥에게는 사실상 그 당한 환난의 원인이 될 만한 죄는 없었다. 그러나 그 때에  하
나님이 그에게서 멀어지신 사실에 대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엄히  다루시는
것으로 느껴졌다. 이런 느낌은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던 독실한 신자만이 가져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의 이와 같은 언사에 의하여 도리어 그의 깨끗한 경건을  볼
수 있다. 만일 욥이 하나님을 멀리하는 외식하는 신자였다면 어떻게 이렇게  영적으로
긴장되어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었으랴? 진실한 신자는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어
떻게 되어 있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살피며, 또 걱정한다. 스펄죤(Spurgeon)은 길을 가
다가도 하나님이 가리워진 듯한 느낌 때문에 발걸음을 멈추고 가지 못한 때도  있었다
고 한다.

 

  욥 14:18,19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자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
이다. - 욥은 자연 현상에서 추리하여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깨닫는다. 산이나  바위
도 무너지도록 되어 있고 돌도 물에 닳도록 되어 있음 같이 인생은  점점  소멸된다는
것이다. 여기 진술된 자연 현상은 물론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그렇게 된다는  것이
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뜻을 볼 수 있다. (1)사람이 지켜 볼 수 없는 사이에
어느덧 산이나 돌이 소모되듯이 사람도 자기 자신도 모르게 노쇠해진다는 것이다. (2)
자연 현상이 불가항적(不可抗的)인 천연의 힘에 의하여 분쇄됨 같이 사람이  노쇠하여
살 소망이 희박해짐도 하나님의 경륜에 의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사이에 불가항적으로 쇠잔해지는 인생은 하나님을 유일한 소망으로 믿고 또 안식
처로 알아야 된다. 시 90:1-17을 자세히 참고하라.


 
  욥 14:20-22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시오니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 -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곧, 인간이 죽을 때에 얼굴 빛이 변함을 가리킨다.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
가 알지 못하며." 곧, 죽은 자는 그 아들이 땅에서 영광 받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뜻
이다.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니." 곧, 죽은 자는 그 아들이 아주 비천하여져도
그의 고통을 동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해석하기는 다소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사람이 죽은 후에 음부에 간 영혼이 그 육체가 무덤 속에서 썩는 것을
아프게 여기는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해석하기를, 사람이 그 죽는  순간에
당하는 고통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들이 합당치 않다고 생각된다.
이 말씀의 뜻은 차라리 사람이 죽은 뒤에 당하는 것은 자기 혼자 당할 뿐이고  남들이
몰라준다는 것이다. 여기 "살"에 대한 관설은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니, 이것은  시
적(詩的)인 표현으로서 그저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 뿐이다.
   욥은 이 귀절들(18-22)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 받기 전에 그가 당할 죽음이 어떻게 비참할 것을 보여준다. 내세를 믿는 성도들은 혹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동안에는 죽음에 대하여 이와 같은 비관을 표현하기도 한다. 시6:5에 말하기를,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처지에서는 내세와 영생을 실감 있게  즐거워한다. 시 17:15에 말하기를,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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