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9:1-3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
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 앞장에서 빌닷은 욥의 문제 해결책을 제안한 바 있었다. 그것은, 욥에게
이제라도 회개하고 의인이 되어보라는 것이었다. 욥은 그 말을 듣고 진리대로 대답하
였다. 그것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라고 한 말이다. 그의 이와 같은 대
답을 보면, 그는 바울과 같이 인간의 전적 부패를 믿은 것이 확실하다. 바울은 말하기
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였다(롬3:10). 그러므로 사람이 스스로 자
기를 의롭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교만이 되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욥은 말
하기를,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
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고 할 수 없다는데 대하
여 완벽을 기한 말씀이다.
욥 9:4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곧, 하나님은 지혜로우셔서 모
르시는 것이 없는 것만큼 인간의 숨긴 허물도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
라, 하나님은 무소불능하시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는 사람들이 억지로 의로운 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앞에서는 아무리 강퍅한 자라도 껸이워서 자기의 죄를 그대로 다
직고할 수밖에 없다(롬14:12). 욥은 이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
와 및 그의 힘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표준 주석에 있어서 곽안련 박
사는, 의인이라도 하나님의 권력에 눌려서 억울하게 유죄자(有罪者)의 누명을 쓰게 된
다는 뜻이라고, 잘못 말한 바 있다(표준 주석, 욥기, p.96-97. 1954년 발행).
욥 9: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 여기서
부터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내세울 수 없는 근거로서 하나님의 능력 행위에
대하여 진술한다. 하나님은 산과 같은 견고한 것도 홀연히 변동시키실 수 있다. 그의
능력의 행사는 아무도 알아 볼 수 없으리 만큼 삽시간에 되어지기도 한다. 여기 이른
바 "산이 깨닫지 못하며"란 말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며"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또
혹은 "하나님이 깨닫지 못하며"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 마지막 경우에 있어서는 하
나님은 그런 일(산을 무너뜨림과 같은 일)은 문제시하지도 않으신다는 의미로 생각된
다.
욥 9:6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이며. - 이것은 하나님께서
땅이 흔들리는 지진도 주장하신다는 뜻이다. 여기 이 말씀은 시적(詩的)으로 표현되었
으니만큼 과학적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땅의 기둥이란
말이 난해구(難解句)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땅의 기초를 비유하는 것 뿐이다.
지진은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큰 재앙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재
앙 가운데서 인간은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누
가 자기의 죄를 직고하지 않고 견딜 수 있으랴! 3-4절 참조.
욥 9:7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시며. - 곧, 하나님의 허락이 없
이는 해와 별들도 빛을 발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자연계(自然界)에 대한 하
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자연계의 모든 현상의 원인을 생명 없는 법
칙에만 돌린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그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에 돌린다. 모든
법칙 있는 일들은 살아 계신 인격적 신(人格的神)의 수중에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우
리는 자연 만물의 현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행17:
24-28 참조.
욥 9: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 하나님께서 "하늘을 펴신다"는
말씀은 그가 하늘을 지으셨다는 뜻이고, 그가 "바다 물결을 밟으신다"는 것은 그가 바
다의 높은 데(* )를 밟으신다는 뜻이다. 여기 이른바 "바다의 높은 데"란
말은 하늘 궁창 위의 물(창1:7)을 가리킨다(Hahn, Schlottmann).
욥 9:9,10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 곧, 별들을 창조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며 그
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오늘날 우주 과학(宇宙科學)이 발달하여 사람이 달세계에서
까지 가 보았다. 그럴수록 별들의 세계는 더욱 신비롭다. 이 무한히 장엄한 별들을 주
장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다. 이처럼 신비로운 세
계를 창조하신 주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직고하지 않을 자 누구이랴! 누가 스스로 의
(義)롭다고 고집할 수 있으랴(1-2)!
욥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
지 못하느니라. - 10절까지에는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신 주권에 대하여 진
술하였으나 11절부터는 인간에게 대한 그의 주권이 어떠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
에게 주권을 행사하실 때에 보이지 않게 하신다. 사람들 중에 누가 보이지 않는 이를
대적할 수 있으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또 우리의 중심도 보신다. 그렇다면 누가 그의 앞에서 자기 죄를 직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가 그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찌무라 간조(* )는, 이 부분의 말씀이 모두 다 욥의 원망을 진술한 듯이
잘못 해석하였다. 곧, 욥이 여기서 하나님을 폭군(暴君)과 같이만 보고 하나님을 가리
켜 "위엄으로써 하인을 누르는 주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
그러나 이 부분에 나타난 욥의 말은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主權)에 대한 것이며, 그
권능은 보이지 않게 시행된다는 것이다. 그 앞에서 인간은 자기의 죄인됨을 솔직히 고
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 뿐이다.
욥 9: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
랴. - 여기 이른바 "빼앗는다"는 말(* )은 사람 보기에 빼앗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 뿐이다. 하나님은 불의하게 탈취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그 자신의 의(義)이시다.
단4:35참조. 일찌기 욥은 말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하였다(1:21).
욥 9:13,14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 하나님께서는
공의(公義)의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신다. "라합"(* )이란 말은 용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원수 곧 사단을 상징한다(계12:3-12). 많은 학자들은 이 낱말을 보고
주장하기를, 욥은 바벧론의 신화(神話) 곧 말둑신과 싸운 티아맛(Tiamat=신학적 의미
의 용)이란 설화에서 이 말을 인출(引出)하였다고 한다(Duhm, Rowley). 그러나 성경에
는 본래부터 사단이 뱀으로 상징되어 왔다(창3:1; 계20:2).
욥의 논조는 다음과 같다. 곧, 사단의 세력도 마침내 하나님께 굴복되는데 하나의
약한 인간인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과 다툴 수 있겠는가 한다. 그는 여기서도 자기의
죄인됨을 하나님 앞에서 직고(直告)할 수밖에 없는 사실(1-2_을 거듭 강조한다. 욥의
이와 같은 신관(神觀)과 인생관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의롭다고 할 수 없고 다만 하나
님의 은혜를 믿음으로만 의(義)를 얻을 수 있다는 참된 구원론만이 결론된다. 그의 세
친구의 상선벌악(賞善罰惡) 사상과는 달리 욥은 이렇게 믿음에 의한 구원을 전제(前
提)로 하고 생각한다.
욥 9: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 - 욥의 이 말은, 고전4:4-5에 기록된 바울의 말과 같다. 거기 말하기를, "내
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
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
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욥 9: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
가 믿지 아니하리라. - 욥은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다고 하였으니, 그가 기도를 부지런
히 한 것이 확실하다. 앞절 끝에도 말하기를,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
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힘있는 성도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헤랄드(Herald)라는
잡지에 말하기를, 기도하지 않는 것은 가장 무서운 죄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
다. 곧,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계속적으로 기도하
지 않는 것은 그에게 대한 반역이 아닐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에게 기
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이다."라고 하였다. 무디(Moody)는 매일 오
전 4시에 일어나 기도하였고, 허드슨 테이러(Hudson Taylor)는 밤중에 일어나 한 두
시간 기도하였다고 한다. 할레스비(Haesby)는 그의 저술한 "기도"(Prayer)란 책에 말
하기를,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욥이 여기 말한 대로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한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이 그의 음성을
의롭게 여겨서 그리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욥은 기도 응답을 받은 일에
있어서도 자기의 어떤 의(義)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욥의 이같은 태도는 극히 겸손
한 것이다. 그야말로 그는 자기를 언제나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알았다. 기독 신자는
언제나 이렇게 처신해야 된다. 헤랄드(Herald) 잡지는, 사41:14에 의하여 신자들이 마
땅히 지렁이 같이 낮아져햐 할 것을 강조하였다. 거기 말하기를. "지렁이가 되어라!
형제여 지렁이가 되어라."(Be a worm, borther! be a worm.)고 하였다. 지렁이는 사람
이 보지 못하는 땅 아래서 부지런히 일하여 땅을 비옥하게 만듬으로 식물들의 성장을
도와준다. 지렁이는 참된 겸손의 표상이다.
욥 9:17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 여기 "폭풍"이
란 말은 히브리어로 세아라(* )인데, 그것을 사아라(* )라고 읽는 경우
에는 머리카락이란 뜻이 된다. 그렇게 읽을 때에는 이 귀절의 말씀이 다음과 같이 번
역될 것이다. 곧, "그가 머리카락과 같은 작은 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
를 많게 하시며"라고. 그러나 우리는 재래의 번역과 같이 세아라(* )라고 읽어
서 그것이 폭풍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까닭없이." 이것은, 욥이 하나님 앞에 불신앙으로 원망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그에게 전연 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현재의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원인이
될 만한 범죄 사건은 없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 말은 도리어 그의 심령이
보통 이상으로 밝아서 사리를 바로 분변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 말은 그의 진실한
신앙에서 표현된 정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성도들은 이렇
게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기의 실정을 애소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주석가들이 이 귀절에 의하여 하나님에게 대한 욥의 무식
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우찌무라 간조(* )는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욥이여! 하나님은 또 부드러운 바람으로써 당신의 뺨을 스쳐가게끔 해주
지 않는가? 잔인 각박으로써 하나님을 책잡으려 하지 말라. 당신의 마음에 봄이 임하
는 때에 우주는 온통 꽃과 새의 그림으로 화하리라."고 한다(*
).
그러나 우리는 욥의 이 말씀(17절)에서 그의 무지한 불평을 볼 수 없다. 그의 이
말씀은 다만 그의 당하는 극심한 고통을 탄식하는 것 뿐이다. 성경에 있는 시문학(詩
文學)에는 신앙을 가지고 자기의 난관을 탄식하는 일이 종종 있다. 다윗도 역시 난관
가운데서 탄식하기를,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니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하였다(시13:1). 위의 15-16절에 표현
된 욥의 겸손으로 보아 그가 신앙 없는 불평을 말했을리 없다고 생각된다.
욥 9:18,19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 - 욥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의 간섭 때문에 지금 고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할 말이 없었으니, 그 이유는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공의의 심판장이시
기 때문이다.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란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지극히 높은 사실을 보여준다. 이 말씀 가운데는 욥이 진리대로 자기의 신앙을 나타낸
것 뿐이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내용은 없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지극히 높다는
것을 믿는 신앙은 귀하다. 이 세상에서 옳은 재판을 받지 못한 순교자들은 세상 끝날
에 있을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내다보고 끝까지 참아 견딘 자들이었다.
욥 9: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
괴함을 증거하리라. - 여기서도 욥은 자기가 죄인임을 명백히 내세운다. 그가 비록 그
당시에 당하고 있는 고난의 원인으로서의 특별한 죄악은 없다 하더라도(17절) 그는 부
패한 인류의 자손으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주석가들이 잘못 생각하기를, 욥이 여기서도 하나님의 권력에 눌려서 마지 못하
여 겁약한 가운데서 자기를 죄인으로 느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욥이 어디까지나 죄
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성경의 말씀
이 그를 인내의 사람으로, 또는 의인으로 인정하였으랴(겔 14:14,20; 약 5:11).
욥 9:21-24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
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
니면 누구이뇨. - 욥은 설혹 자기가 의롭다고(순전하다고) 가정하는 경우에라도 그는
자기의 영혼 형편을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란 말(*
)이 그 뜻이다. 욥의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은 바울의 그것과 같다. 고전 4:4-5참조.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곧, 욥은 언제나 자기를 근본적 의미에서는 죄인으
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이 세상에서 반드시 의(義)에 대한 상급을 하나님에게서 받
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선(善)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을 이 세상에서 다 받는다는
것은 욥의 세 친구의 사상이다. 욥은 그런 사상을 계속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런 이
유에서도 그는 자기 생명을 천히 여긴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이 말로써 이 세상이
반드시 심판의 기회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곧, 사람이 이 세상에서 행한대로 모
두 다 하나님의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어떤 때에는 의인과 악인이 다 함께 재앙을 받는다고 한다.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고 한 말씀은 한편 이상하게 보인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무
죄한 자를 무시하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문제시할 것은 없으니, 이
말씀은 시적(詩的) 표현이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에는 시인의 심리를 알아주어야 한
다. 욥이 이 말을 할 때에 표현코자 한 뜻은 다음과 같다. 곧, 하나님께서 어떤 때엔
의인의 억울함을 신원해주시지 않으시는데, 그 때엔 하나님께서 그의 고난을 비웃으심
과 같이 느껴진다는 것 뿐이고 사실상 하나님께서 비웃으신다는 것은 아니다. 고난을
받는 신자는 그런 때에도 더욱 주님을 믿어야 된다. 욥이 그렇게 말함은, 하나님의 공
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판단의 오묘함을 진술하는 것 뿐이다. 시36:6에 말하
기를,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고 하였다. 단 4:35 참조. 사실상 진실한 신
자들이 곤란에 빠지기도 한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좁고 사소한 기대
에는 응하시지 않고 더 큰 것을 주시는 일이 있다. 그는 우리의 병드는 것, 죽는 것까
지도 문제시 하지 않고 그냥 두시는 것 같다(그러나 이런 일들이 그의 오묘하고 선하
신 경륜에 포함되었음). 우리는 이런 불행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 줄
오해하고 믿음이 약해지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때에 더욱 그를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야 된다. 곧, 그는 위대하신고로 우리의 당하는 질병이나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
이나 재앙이나 죽음까지도 크게 문제시 하지 않으시나니, 우리는 그런 불행한 가운데
서도 크신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하실 일이 있는 줄 알고 기뻐할 줄 알아야 된다.
우리가 그런 난관 가운데서 주님을 즐길 줄 모르면, 욥을 시험한 마귀에게 흠잡히운
다. 사단이 참소하여 말하기를,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하였다(욥1:9-10).
우리가 평안과 건강과 세상 복을 누릴 때에만 하나님을 찬송한다면 그것은 불신앙이
다. 우리는 역경과 난제와 가난과 환난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에게 감
사할 줄 알아야 된다. 하나님은 그런 찬송을 천사의 찬송보다 우수하게 여기신다.
욥 9:25,26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 여기서 욥은 그 병든 몸으로 오
래 살지 못할 것을 내다보면서 탄식한다. 그는 한 번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생애를 복되게 마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에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것이
그의 탄식거리였다. 앞에 3장에서는 그가 고통을 생각하여 생일을 저주하였으나 그의
생각의 다른 방면도 여기 나타난다. 이것을 보아서 그는 낙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사람은 자기의 한 평생이 신속히 가는 것을 느낄 때에 자기를 반성하게 된다. 이런
사고 방식은 시 90:5-9, 10-11이 각각 보여주고 있다.
욥 9:27-30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
도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
이다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
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
를 싫어하리이다. - 욥은 여기서 자기의 곤란한 처지를 해결해 보려는 가상적 방법을
비판한다. (1)그가 과거와 현재의 실정을 잊어버리고 좋은 낯으로 지내볼 결심을 해
본다 해도 소용 없다는 것(27절). 곧, 그가 괴로운 것을 잊어버려서 마음의 평안을 얻
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욥은 사실상 이런 처세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너무 괴로운 가운데서 이런 가상적인 언사를 발한 것 뿐이다. 욥은 아무래도 고
통을 면할 수 없는 것을 알았으니,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줄 알기 때문이
다(28-29). (2)그가 자가 자신의 힘으로 정결함을 힘써서 자기의 의(義)를 세워 보고
자 하여도 쓸데 없다는 것(30절).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
라도"런 말씀이 그 뜻이다. 그런 주장을 세우는 자는 도리어 하나님의 정죄를 받는다
고 그는 말한다. 곧,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신다"(31절)는 말씀이 그 뜻이다.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31절). 곧,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던 자가 하
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정체가 드러내질 때에는 그의 옷도 그를 미워함 같이 그는 자기
의 더러움을 느낀다는 뜻이다. (1)자기의 의(義)를 주장하는 자는 외모로만 의롭게 나
타나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런 자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속을
깨끗이 하시는 이는 성령 밖에 없다. 빌 3:3참조. 속은 깨끗함이 없이 모양만으로 성
결함은 외식(外飾)이다. (2)외모만 위주하는 자들은 마침내 일의 경중과 선후를 혼동
시킨다.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자들이다(마 23:24). 그들은 예배
의식만 귀한 줄 알고 "의와 인과 신"은 버린다(마 23:23). (3)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가 자기를 심판장으로 세운다. 그들은 자기를 의롭게 여기며 또 남들을 정죄한다.
욥 9:32,33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 욥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중
보자를 요구한다. 그는 자기의 문제 해결이 중보자에게만 있다고 본다. 이렇게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장차 오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갈망하였다. 렌케마(W.B.Renkema)
도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는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단언하였다. 곧, "그가
우리에게 손을 얹으려면 사람의 아들일 수밖에 없고, 또 그가 하나님에게도 손을 얹으
려면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될 수 없다."고 하였다(Het Boek Job,1899,
p.101).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또한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양측(하나님과 사람)
에 만족한 화해를 성립시키신다. 만일 중보자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절대 완
전한 구원을 주실 수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성경에 많이 있지만 특별히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은 우선 대표적으로 롬 9:5과 요일 5:20을 들 수 있다. 롬 9:5에
는 말하기를,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하였
고, 요일 5:20에는 말하기를,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신약(바울 서신)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성호(聖號)는 구약에 있는 "여호
와"를 가리킨다. 구약의 "여호와"란 말(* )이 70인역(LXX)에서는 전부 "주"(*
)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중보역(仲保役)을 통하여 받는 그 의
(義)는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아야 구원을 받도록 구약에 예언되
어 있고(렘 23:6), 또 그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 세상에 오셨다. 그는 우리에
게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의이시다(롬1:17; 고전1:30; 고후5:21), 골2:9에는 말하기
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사실은 우리의 구원을 성립시키는 근본이 된다. 그가 하
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를 속죄하여 주실 이는
하나님 외에 없기 때문이다(시40:7-9).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인간성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다. 그는 피조물이 아니시다. 그는 계시지 않은 때가 없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무시무종하시다. 히7:3에 예수님의 그림자인 멜기세덱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라고 하
였다.
그리스도를 피조물이라고 한 학설은 4세기에 아리우스(Arius)가 주장하였던 것인
데,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학설은 325년에 니케아 공의
회에서 정죄되었다. 그 후에 아리우스의 학설은 추종한 사람들은 결국 다신론(多神論)
을 주장하는 데까지 떨어졌다. 일이 그렇게 되어진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이라는
사상이 그의 신성(神聖)을 부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에(전 3:11) 만족을 얻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들도 숭배하게 되어진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참된 만족을 얻는다.
욥 9:34,35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 - 욥이 여기서는 자기의 고난을 제거하여 주시기를 기도한다.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안니니라." 곧, 자기는 구속(球束)을 받은 자인 만큼 하나님 앞에서 그런 발언을 하지 못할 죄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현재에 있어서는 특별한 시험(고난)을 당하면서 아주 구원 받지 못할 인간처럼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장벽이 막힌 안타까운 사실을 당한다는 것이다. 11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