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7:1
믿음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 욥이 자기의 노고가 속히 끝나고
평안을 누리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돌메(E.Dhoorme)는 이 부분의 말씀에서 고진감
래(苦盡甘來)의 인생 철학은 보지 못하고, 다만 원치 아니하는 노고만 당하다가 죽는
인간만 보았다(A Commentary on the Book of Job,1967,p.97). 그러나 2절의 말씀은 분
명히 품군과 같은 인생에게 안식도 있을 것을 암시한다. 2절의 "삯"이란 말(* )
은 여기서 노고의 결과를 의미하는데, 곧 보상을 가리킨다. 여기 "전쟁"이란 말은 신
자의 생활을 비유한 표현이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은 자기를 위하여 행동하지 않고 그
를 군사로 모집한 자를 위하여 봉사해야 된다(딤후2:4). 그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군인처럼 사명을 다해야 된다. 그는 자기를 기쁘게 할 자가 아니고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할 자이다. 욥은 자기의 생활을 이렇게 하나님 중심한 것으로 보았으니 여기
서도 그의 신앙이 나타난다.
그 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 다시 말하면, 인생의 한평생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군인과 같은데 그는 품군처럼 후에 받을 상급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욥
의 인생관은 내세의 상급을 중요시하고 있다. 인간에게 내세가 없다면 모든 것이 헛되
다고 생각함이 옳다.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
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하였고(고전15:19), 또
말하기를,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 하였다(고전15:32).
욥 7:2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군은 그 삯을 바라나니. - 곧, 종은 종일 봉사하다
가 날이 저물 때에 집으로 돌아가 쉬기를 기다리며, 품군은 일하기로 지정된 기간에
일을 마치고 노임(勞賃)을 받기 원한다는 뜻이다. 그와 같이, 신자는 이 세상에서 주
님을 위하여 충성하다가 세상을 떠나 주님이 계신 안식처로 돌아가 그에게서 상급 받
기를 기다려야 된다는 것이다.
욥 7: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 여
기 이른바 "수고로운 밤"은 고난의 때를 가리키는데 그것이 우연히 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작정되었구나"란 말씀이 이 사실을 가리킨다.
욥 7: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뒤
척 하는구나. - 욥이 이와 같이 애쓰는 것은, 그의 몸이 너무 괴롭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안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밤을 제정하셨는데, 욥에게는 밤중에도 안식이 없었
다. 그래도 그가 끝까지 참으며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를 유지한 것(7절)은 성도들의
모본이다. 우리는 밤중에 편히 쉴 수 있음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해야 된다.
"언제나 밤이 갈꼬." 욥은 세월이 더디 간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지리하게 보낸
다. 그것은 병고(病苦)에서 느껴진 그의 시간 관념이다. 이렇게 사람은 고통을 싫어한
다. 그러나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게 하는 것은 오직 고난 뿐이
다.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된다. 욥
은 그의 고통 중에 신음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계속 기도한다.
욥 7: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
나. - 이 말씀을 보면, 욥은 그 몸의 보기 싫은 부패를 보고 몸의 생명에 대하여 애착
을 끊는다. 인간은 누구든지 조만간 자기 몸에 부패를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
것을 지나치게 애착할 필요 없다. 몸을 지나치게 애착하는 자는 몸을 우상화하기 쉽
다.
욥 7: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 욥은 괴로움 가운데서
시간이 더디다고 탄식하기도 하였다(4절). 그러나 그 세월이란 것은 다 지난 다음에는
신속히 지난 것으로 느껴진다. 주야(晝夜)가 바뀐 것이 베틀의 북이 내왕함보다 빨랐
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병석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게 된 것도 그에게는
고통거리였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심리에서 생기는 고통이다.
욥 7:7-10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
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
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
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기 못하리이다. 욥은 여기서 특별히 자기의 죽은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말
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보고 욥에게는 내세 소망에 대한 신앙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여기 표현된 욥의 언사는 어디까지나 육신의 생명
에 국한하여 말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육신의 생명이 헛되다는 것을 심각히 느껴
야 된다. 그가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만을 소망으로 삼고 내세를 바라보게 된
다. 인간의 육신이 헛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은 언제든지 육에 속하여 하나님
을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육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산다. 전7:2-4
에 말하기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
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
는 집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욥 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 여기서부터 21절까지는 욥의 여러가지 탄식이 기록
되었다. 여기 "원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는 실상 "수심", "애소"를 의미하
는 것이고 원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원망"이란 히브리어(* )는 별도로 있다. 그
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주석가들이 이 말을 원망으로 해석하였다. 예를 들면, 바이젤
(Artur Weiser)은 말하기를, 이 귀절의 말씀은 하나님에게 대한 욥의 원망(Hiobs
Klage an Gott)의 둘째 부분(der zweite Teil der Klage)이라고 하였다(Das Alte Tes-
tament Deutsch, Das Buch Hiob, 1968, s.62). 그러나 성경에 의인(義人)으로 간주된
(겔14:14) 욥이 원망의 사람이었을 수 없다. 욥은 실상 이 부분에 있어서 자기의 기도
를 말하고 있으니, 기도자에게는 원망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여기서 여러가지 말로써
하나님께 애소(哀訴)하고 있다.
욥 7:12
내가 바다니이까 용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 여기 "용"이란
말(* )에 대하여 자유주의 학자들은 바벧론의 신화(神話)와 관련시켜 설명한다.
곧, 바벧론 신(神) 말둑(Marduk)이 바다의 용 티아맛(Tiamat)을 대적하여 싸워 이겨서
그 몸으로 하늘과 땅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말둑(Marduk)이 용을 대적하듯이
하나님께서 욥을 대적하신다는 것이다(H.H.Rowley, The Century Bible,1970,p.80). 그
러나 이런 해석은 억설이다. 여기 "용"이란 말은 악어와 같은 큰 물짐승을 의미한다.
바다나 악어는 사람이 다스리기 매우 어렵다. 욥의 애소는 다른 것이 아니고 자기는
극히 미약한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심한 고난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평과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 앞에 신앙을 가지고 솔직히 말한
것 뿐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지키시나이까"라고 한 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끊임 없이
괴로움을 주신다는 뜻이다.
욥 7:13,14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 사람이 비록 괴로
울지라도 침상에 누워 쉬는 동안 평안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은 잠자
리에서도 주님의 간섭으로 인하여 평안을 누리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셨으니(시127:2) 욥도 이런 은혜를 받을 만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그를 괴
로움 가운데 두신 까닭이었다. 이것을 보면, 신자가 괴로움을 당할 때에 역시 하나님
의 감시 아래서 그렇게 되는 줄 알고 그 가운데서도 신앙을 잃지 않아야 된다. 욥은
이런 일에 있어서도 모든 신자들의 모본이다. 그는 이런 괴로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니 그것은 그의 신앙이다.
욥 7:15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 여
기 "뼈"란 말은 그가 질병으로 인하여 매우 수척하여져서 뼈만 남은 것을 말함이다.
그는 이처럼 해골 같이 되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욥의 이
와 같은 소원을 이해해야 되며, 거기도 일리가 있음을 알아주어야 된다. 사람이 현세
의 생에 대한 욕망이 강할수록 더욱 죄를 많이 범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현세의 생
을 탐하지 않고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보는 동안에는 죄를 범치 않고 신앙으로 설 수
있다. 욥이 이 때에 죽기를 원하였으나 자살하려는 심정은 전혀 없었다. 자살은 가장
악한 죄이다. 자살은 회개할 기회도 없는 무서운 죄악이다.
욥 7:16-19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
니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
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 욥은 자기를 그 괴로운 자
리에 머물러 두시는 하나님의 손을 거두어 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된것이니이다"(16절 하반)라고 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병고를 멈
추시든지, 혹은 그의 생명을 거두시므로 성취될 것이다. 그가 그것을 원하는 이유로서
는 그의 날이 헛되다는 것이다. 여기 헛되다는 것은 저런 고통 중에서 세월을 허송하
는 자기 생명은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는 뜻이다(W.B.Renkema, Het Boek Job,
1899, pp.82-83).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17절). 곧, 하나
님께서 연약한 인생을 염두에 두시고 그를 문제시하여 괴롭히시는 것을 욥 자신으로서
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의 이와 같은 말은 하나님 앞에 경건치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말이 원망이 아니고 진리 탐구의 동기로 하나님께 드린 기도인
만큼,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다른 성도들
도 이와 같은 태도로 하나님께 기도한 실례가 있다(렘15:18).
욥은 이 점에 있어서 자기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 것을 하나님 앞에 진술한다. 곧,
아침마다 권징하신다는 것, 분초마다 시험하신다는 것(18절), 눈을 돌이키지 않으신다
는 것, 침 삼킬 동안도 놓아주지 않으신다는 것(19절) 등 여러가지 표현들로써 그의
고통을 계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진술한다. 욥은 그 고통이 하나님에게서 온 줄을 알았
으니 만큼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소망이 있었다. 아프게 하
시는 하나님이 싸매어 주실 것은 명백하다(5:1*). 호6:1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
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하
였다.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자가 그 고난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앎으로 비
로소 소망을 가진다. 사람이 자기의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우연에 돌릴 때엔 낙심할
것 밖에 없다. 그 이유는 우연이란 것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욥 7: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 욥은 자기가 범죄하였
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수 있지 않은가 하고 질문한다. 그는 인간의 죄악이 하
나님께 해를 끼칠 일도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빈다. 물론 욥은 이 점에 있어
서 하나님의 탁월성에 대하여 바로 이해하였다. 죄악 때문에 인간 자신은 손해를 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손해될 일은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서 인간을 통하여 그의 이름이 거룩되어지는 것을 원하시며 그의
영광을 찾으신다. 그것이 그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어찌하여 나로 고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20절 하
반). "과녁을 삼는다"는 말은 활 쏘는 자가 목적물을 쏘듯이 하나님께서 욥을 계속하
여 고난으로 괴롭히신다는 뜻이다.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신다"는 것은 욥이 환
난을 당하므로 자기가 자기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는 의미이다.
욥 7: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 이 귀절의 하반절에서 욥은 자기의 죽을 것을 상상해 본다. 그는 자기에게 찾아올 죽음을 고요히 당하고자 한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정하신 인생의 말로(末路)에 대하여 감심으로 순응하기를 원하였다. 이것이 역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취할 아름다운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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