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에스라 0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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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 9:1,2

  가증한 일을 행하여(1절 끝) - 여기 "가증한 일"은 가나안에 있던 이방인들의 우상
주의와 그들의 악행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주의자들과  동화되지  말고
구별 의식을 가지고 또 구별되이 살아야 한다. 그것은 바리새주의의  교만이  아니고,
(1)의(義)의 표준을 보호하기  위함이고,  (2)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고후
6:14-18 참조. 이때에 바벧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가나안 본토인들과 합류하면  그
들의 가증한 일에 동참케 될 것이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들과 통혼하지 못하도록 되었는데(신 7:1-3) 그것은 그들이 그런 혼인으로 말미암
아 이방의 우상(偶像)과 타협하거나 그 우상을 끌어들일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
7:4 참조. 그런 우려가 없는 환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족(異族)과 통혼하는 일이 금지
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창 41:45;민 12:1;룻 4:9-10;삼상 25:40-42 참조. 그러나 이
때에 바벧론에서 돌아온 자들이 가나안 이족들과 통혼한 일은 용납될 수 없었다. 그들
이 돌아온 것은 거룩한 종교를 보존하기 위한 정화 운동이 아니었던가 ! 그것은  이사
야의 예언 성취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
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사 52:11). 고후 6:17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바벧
론에서 떠나 귀국한 후에 우상주의의 이방인들과 통혼하였으니 돌아온 성민(聖民)으로
서 가질 거룩한 종교는 성립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에스라의 근
심은 컸다.


  스 9:3,4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3절) - 에스라가 옷
을 찢은 것은 그의 슬픔을 표시한 상징적 행동이었다. 창 37:34 참조. 신자는  남들의
죄를 보고 그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도리어 슬퍼해야 된다. 그것은 그가 그런 죄를  미
워하기 때문이다. 시 119:158;렘 9:1,14:17 참조. "털과 수염을 뜯은"것은 정의감에서
원통함을 나타낸 것이다. 느 13:25 참조. 그러나 이것은 그 때의 범과자들에 대한  의
분이 아니고 남들의 과오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지고 원통히 여긴 심리 표현이었다. 에
스라가 그 공동체의 책임을 함께 느꼈다고 할 수 있는 증거는, 그가 "우리"란  대명사
를 사용하며 기도한 것으로 알려진다(5-15). "기가 막혀"란 말(*           )은  말도
못하는 괴로운 심리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4절 중간) -  "하나님
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니 하나님은 그런 신자들을 돌아보
신다(사 66:2). 이런 신자들이 에스라의 개혁 운동에 동조한 사실은  기쁜  일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의인은 외로운 가운데서도 진실한 동조자들을 만나게 된다.


  스 9:5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 "무릎을 꿇음"은 하나님 앞
에서 깊은 겸손과 애걸의 태도를 취함이고(눅 22:41;행 20:36), "손을 드는"것은 몸을
바치는 모습이다(애 3:41).


  스 9:6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 에스라가 하나님을  향
하여 "나의 하나님"(*        )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하나님에게 대한 그의  가까운
관계를   알려준다.   그가   이때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였으니만큼
(7:6,9,18,8:23), 그는 하나님을 그렇게 실감하게 된 것이다. 그는  관념적  종교인이
아니었다.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 사람이 자기의 잘못으로 인하여 사람들 상대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보통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신앙으로 참
되이 살아가는 자만이 가지는 영적 체험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면서도  뻔
뻔스럽게 지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에스라는 자기 민족의 죄악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그의 심령이 이렇게 된 것은 그가  무
엇보다도 하나님을 중하게 여김으로 마음을 정결케 한 까닭이다. 마  5:8,6:22-24  참
조.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중하게 여기는 생활은 하나님의 율법을 정미롭게 지킴으
로 실현된다. 시 119:9,56,136,139,158 참조.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깨닫는데  정
통하였고, 그는 그 말씀대로 실행하였다(7:10). 7:12 참조.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을 때에 영적(하
나님께 대한) 근심을 가진다(고후 7:10-11).
   우리 죄악이 많아 - 여기 "우리"란 말은 접미어 대명사(Pronominal suffix)로 기록
된 1인칭 복수이다. 이렇게 "우리"라는 접미어 대명사(*   )가 여기서부터 15절까지에
31회나 나오는데 이 말은 중요하다. 에스라는 다른 사람들의 과오에 대하여 자기 자신
도 책임을 지고 자기 자신을 그 범과자들과 동일시하여 "우리"라고 한  것이다.  이런
사랑의 심리로 범과자들을 접촉하거나 권면하는 지도자들이 언제나 그들의 사역에  참
된 열매를 거둔다. 갈 6:1-2 참조.


  스 9:7

  에스라는 이스라엘이 조상 때부터 범죄하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온  역사적  사실
(느 9:29-38;단 9:5-11)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하였다. 곧, 그들이  바벧
론에 사로잡혀 갔던 것이 하나님의 징벌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직도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로 남아 있었다. "오늘 같으니이다"라고 한 말씀이 그 뜻이다.
   신자들은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반성할 줄 알아야 되며 그것에 대한 책임
을 느껴야 한다. 미래의 밝은 전망은 과거를 검토하여 회개하는 자들의 것이다.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 여기 이른 바 "열방 왕들"이란 것은 그  때(이스라엘의
해방 후)의 파사 왕들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있다(Business  documents  of  Murashu's
sons, p.28, No.6). 그러나 이 문구는 역대에 이스라엘을 정복한 외국의 군왕들을  가
리킨다.


  스 9:8-10

  여기서는 에스라가 그 민족의 더 한층 부끄러운 일에 대하여 말한다. 곧, 하나님께
서 그들을 그 비참한 포로 생활에서도 망하지 않도록 남겨 두셨다가 본국으로  돌아오
게 하셨는데 이렇게 자비를 베푸시는 마당에서 그들이 또 다시 범죄하였다는 것은  매
우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8절 상반) - 이 말씀의 히브리어(*     
                                     )는 다음과 같이 개역되어야 한다. 곧,  "그의
거룩한 곳에 우리를 위하여 못을 주시고"라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남은  백성으로
하여금 팔레스틴에 장막 못을 박게 하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로 하여금 거기
와서 정착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눈을 밝히사...소성하게 하셨나이다(8절 하반) - 곧, 그들의 포로  생활의  고생은
눈을 어둡게 할 정도였으나 이제 거기서 구원받은 기쁨은 눈이 밝아질 정도의  경사라
는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을 주셨나이다(9절 끝) - 여기 이른 바  "울"이란
말(*     )은 '벽'(壁)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보호를 비유한다. 하나님의 성전은  그때
에 그들을 보호하는 성곽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이제  무
슨 말씀을 하오리이까(10절) - 이것은 이스라엘의 배은망덕한 죄를 지적하며 탄식하는
말씀이다. 그들의 죄야말로 주인의 떡을 먹으면서 주인의 발꿈치를  들어  넘어뜨림과
같은 죄악이다. 요 13:18 참조. 에스라는 이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용서를  빌지는
않았다. 그러나 참된 회개에는 하나님의 용서가 따르는 법이다. 잠 28:13  에  말하기
를, "자기의  에스라는 앞에(10절) 말한 "계명"의 내용을 자세히 밝히면서 기도를 계속한다.  여
기 나온 말씀이 어느 일정한 귀절의 인용이 아니고 여러 성구들의 대의(大意)를  말한
것이다.   출   34:16;레   18:24;신   7:1-4,11:8,23:4-7;삿   3:5;왕상   11:2;왕하
17:23,21:10,24:2;단 9:6,10 참조. 오늘 신약 시대에 신자들은 불신자와 통혼하지  않
아야 된다. 고후 6:14 참조. 신자들이 결혼 대상을 찾을 때에 상대방의 신앙보다 물질
적 부요나 육체미에 끌리는 일이 많다. 그것은 그들이 미혹에 빠져서 행함이다.  그와
같이 배필을 구한 결과는 축복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당사자들이나 부모들이 다 함께 조심해야 된다.


  스 9:11,12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
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긍휼은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는다. 사 1:18 참조.


  스 9:13-15
  에스라는 위의 말씀(8-12)의 요지를 간단히 반복하여 기도한다.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 남겨주셨는데 왜 그들이 이 장면에 또 다시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였는가 한다(13-14).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통탄의 말씀을 그 아래(15절) 또  다시(세 번째) 재설하였다. "남겨 두어 피하게"(*  )(8절 중간), "남겨 주셨사오니"(*                          )(13절 끝), "우리가 남아  피한 것"(*                       )이란 말씀들(15절 상반)은 모두 다 같은  뜻으로서  이 부분(8-15)에 있어서 중요한 말씀이고 이스라엘이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팔레스틴에 돌아오게 된 것을 가리킨다.
   주는 의롭도소이다(15절 상반) - 여기 "의롭다"는 말(*        )은 이스라엘  백성
이 범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변치 않는 것을 가리킨다(A. Bertholet, Tadelosigkeit des Vehaltens Jahwes gegenuber Israel Im  Gegensatz gegen Israels Sunde.-Die Bucher Esra und Nehemia, 1902, s.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