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1:1,2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 아하시야왕은 두 가지로 곤경에 빠졌으니, 그의 지배 아래 있던 모
압이 배반한 것과 그가 질병에 걸린 것이다. 사람이 난관을 당하는 것은 죄를 깨닫고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다. 특별히 아하시야의 경우는 그런 것이다.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보라. - "에그론"은 블레셋의
다섯 도시들 가운데 가장 북쪽 도시이다. "바알세붑"(* )은 '파리의
주'(lord of flies)란 뜻이며, 파리 모양의 우상인데(Delitzch) 파리들을 막는 자
(averter of flies)를 가리킨다. 우리가 이교(異敎)의 우상을 볼 때 참 하나님(성경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의 종교적 무지와 그들의 어리석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 받은 벌로 계속 어두워지는 것이다. 롬 1:21-23 참조. 아하시야의 어리석음
은 자기 병이 "낫겠나 물어보라"고 한 말에도 나타난다. 그것은 자기의 죄책을 도외시
하고 행운(幸運)만 바라보는 허황한 행동이다. 그의 종교는 윤리적(倫理的)이 아니고
마술적인 미신(迷信)이다.
왕하 1:3,4
"여호와의 사자"(* )는 구약 시대에 여호와로 더불어 일체(一體)
되신 이로 이스라엘에 계시(啓示)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천사가 아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3절
하반). - 이 말씀은 아하시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멸시하되 없는 것 같이 멸시한다
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없어서"란 말이 그런 뜻이다. 아하시야의 이와 같은 태도는
여호와를 아주 내어 던지고 안중에 두지도 않는 강퍅한(죄악이 관영한)행동이다. 그러
므로 그는 이제 징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왕하 1:5-7
아하시야의 사자들이 돌아와서 그 만났던 사람의 말대로 보고한 결과가 여기 나온
다. 그 보고는 아하시야에게 두려운 생각을 일으킬만하였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여전
히 강퍅하여 회개는 커녕 그 예언자를 죽이려고 그의 생김새를 물었다.
왕하 1:8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었다. 마 3:4 참조.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도 이것을 모방하
였던 것이다. 슥 13:4 참조. 이런 복장은 검소한 것을 의미할 뿐이고 금욕주의(禁慾主
義) 생활을 가리킴이 아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 사역에 총집중하였던 까닭에 자
기 생활의 편리를 도모할 겨를이 없었다. 9절 참조.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 이것을 보면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엘리야를 알았으니만큼 엘리야의 전하는 여호와의 말씀에 대하여서
도 늘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여호와를 멸시하였고(2,3) 또 여호와의 종
엘리야를 미워하여 죽이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죄악으로 강퍅해진 자에게 대하여 하
나님은 벌을 내리신다. 10-12, 17 참조.
왕하 1:9-10
아하시야는 하나님의 종 엘리야을 잡으려고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보냈다. 이
들은 이스라엘 군대의 한 소대(小隊)이다(삼상 8:12). 이 때에 아하시야가 한 사람 엘
리야를 체포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한 것은 엘리야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대
항하여 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쟁을 개시한 셈이다.
그의 이와 같은 죄악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심판도 내렸으니 그것은 전쟁 규모의 것이
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악에 비례하여 그들을 벌하심으로 그의 살아계심을 나
타내기도 하신다.
엘리야에게로 올라가서 본즉 산 꼭대기에 앉았는지라(9절 중간). - 엘리야의 거처
하는 곳은 어떤 때에는 들이나(왕상 19:4) 산이나(왕상 19:8-9) 산꼭대기였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택한 것이 사실이다. 왕상
18:42 참조. 하나님의 교통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임하는 경우가 많다.
저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9절
하반). - 이 때에 "오십부장"이 엘리야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람"(*
)이라고 부른 것은 그의 확신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능욕하는 마음에서 그리한 것으
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내려오라"고 한 그의 언사(* )가 교만한 명령이기 때문
이다(Lange's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s, Kings, Zondervan, 1872, p.5). 이
런 때에 엘리야는 자기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도록 기도하였고, 또 그대로 되었다.
왕하 1:11,12
강퍅해진 아하시야는 두 번째로 "오십부장과 그 오십 인"을 엘리야에게로 보냈다.
아하시야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두 번씩이나 하나님 상대로 군대를 보내어
전쟁을 벌였으니 그의 강퍅한 것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또 다시 전쟁
의 성격 있는 벌을 아하시야의 군인들에게 내리셨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 오십인을 살랐더라(12절 하반). 이것은 전쟁 때와
같은 비참한 광경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항하는 자들의 강퍅한 정도에 따라서 그
들을 벌하신다. 그러므로 이때에 군대를 동원하여 대항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그는 전
쟁시의 살륙 같은 재앙을 내리신 것이다. 계 11:5 참조.
몽고메리(Montgomery)는 이 부분(9-12)의 말씀에 대하여 말하기를, "엘리야의 이
이적 이야기는 무자비하게 청년들을 많이 죽였다는 것이니 그것이 그의 일반적 사역
성격과 다르다. 그러므로 이것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될 수 없다"고 하였다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The Books of Kings, 1951, p. 348). 그러나 몽
고메리의 이와 같은 비평은 엘리야의 기적 성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1) 엘
리야의 다른 사역에도 이렇게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성격이 나타났
다. 그가 갈멜산에서도 거짓 선지자 850명을 죽이지 않았던가! 왕상 18:19-20,40 참
조. (2) 이번 사건에는 하나님의 자비도 나타났다. 곧, 세 번째 보냄을 받은 부대는
겸손히 엎드려 간구하였으므로 그들은 멸망 받지 않았다. 13-15 참조.
왕하 1:13-16
아하시야가 보낸 세 번째 부대는 엘리야를 찾와서 그에게 굴복하여 살려주기를 애
걸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두려워말고 함께 내려가라"고 하셨다
(15절 중간).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하여 아하시야에게로 가서 그의 죄
를 꾸짖고 그의 받을 벌을 선포하였다(16절). 하나님께서 이미 엘리야에게 "두려워말
라고"고 하셨으니만큼 그 말씀대로 순종한 엘리야는 아하시야에게서 해를 받지 않았다. "두려워 말고 함께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는 죽이려고 하는 폭군 앞에서도 절대적인 안전 보장이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두려워말라"는 주님의 약속을 받고 있다(요 16:33).
왕하 1:17,18
엘리야의 예언대로 아하시야는 죽었다.
저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제 이 년이었더라(17절 하반). - 곧,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유다 왕 "여호람" 제 2 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왕하 3:1의 내용과 상충되는 것 같다. 거기서는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된 해가 "유다 왕 여호사밧(유다 왕 여호람의 부친)의 18년"이라고 한다. 이 난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된다. 유다 왕 "여호람"이 그 부친 여호사밧과 함께 섭정왕(coregent)으로 있은지(왕하 8:16) "2년"이 되는 해(여호사밧 18년)에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서론에 있는 남북조의 열왕 역대 일람표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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