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3:1-3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
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1절) - 사무엘은 비록 어렸지만 엘리제사장에게 잘 순종하였
다. 그는 인생의 초기에서부터 경전의 훈련을 받아 장차 큰 일을 맡게 된다. 전 12:1
참조. 그런데 그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환상=* )으로 나타나는 일
이 매우 드물었으니 그 이유는 그 때에 이스라엘이 전반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사무엘과 같이 경건하고 충성된 자가 드물었다. 시대가 부패한 때에는 하나
님께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역사하신다. 노아 시대에도 하나님은 노아 한 사람과 함께
하셨다. 창 6:5-8 참조.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3절 하반) - 사무엘이 누웠던 곳은 성
소였으니 그가 성막 봉사에 충성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삼상 3:4-8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
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4-5). 사무엘에게 들려온 음성은 꿈 가운데 들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세 차례나 같은 음성을 들었고, 그 때마다 엘리에게 가까이 가서
그가 자기를 불렀는가 확인했다. 그는 그때에 긴장할대로 긴장한 중에 네 번째 같은
음성을 들었다. 고슬링가(C. J. Goslinga)는 말하기를, "그가 깨어있을 때에 이 음성
이 들렸으니만큼 우리는 이것이 객관적으로 참된 사건(een objectief-werkelijke-
gebeurtnis)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Commentaar op het oude Testament, I
Samuel, 1968, p.131).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10절 상반).
이것은 네 번째 부르심인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셨다. "전과 같이"란
말씀을 보아 이미 세 차례 부르신 때도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신 것이 확실하다. 하나
님께서 그 개인의 이름을 부르심은 그 개인에게 대한 그의 완전한 지식과 사랑을 표시
하심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도 그의 이름을 부르셨고(창 22:1, 11),
모세를 부르실 때에도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창 3:4). 그리고 예수님은 마리아를 향하
여 그의 이름을 부르셨고(요 20:16), 바울(사울)을 부르실 때에도 그의 이름을 부르셨
다(행 9:4). 출 33:12, 17참조. 여기 이른바 "임하여 서서"(*
)란 말씀을 보면 사무엘이 음성을들었을 뿐 아니라 어떤 환상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15절에는 이 계시(啓示)를 가리켜 "이상"(* )이라고 하였다. 욥
4:16참조. 그 형상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교통하시기 위하여 취하신 사람의 형상이
었을 것이다. 창 18:1-2참조.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10절 하반). 이것은 엘리가 사무엘에게 가르쳐
준 대답 그대로이다. 사무엘은 언제나 엘리의 지도대로 순종하였다. 그가 그리하였기
때문에 그와 엘리 사이는 항상 순조로왔다.
삼상 3:11-14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신 말씀은, 엘리와 그 자손에게 임할 벌(罰)에 대한 것이
었다.
두 귀가 울리리라(11절 끝). 곧, 엘리와 그 자손에게 임할 벌이 그 죄값인 것을 드
러내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는 자마다 깨닫는다는 뜻이다. 즉 우뢰소리가 사람들의 귀
를 크게 울림과 같이 너무도 명백하게 깨닫도록 들린다는 것이다. 엘리의 두 아들이
전사(戰死)한 사건,엘리 자신이 목이 부러져 죽은 사건(4:11, 18), 그리고 그의 며느
리가 해산하다가 죽은 사실(1:19-21)이 모두 하나님의 명백한 심판이다.
내가 그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13절 상반). 곧,하나님께서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셔서 그에게 벌하시겠다고 경고하신
것(2:27-36)은 그가 알면서도 고치기를 힘쓰지않은 죄(그 아들들이 제물을 모독한 죄.
2:21-17)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죄악은 어는 정도 짐짓 범한 죄의 성질을 가진 것이
다. 히 10:26참조. 그러니만큼 그 죄는 영원히 속죄를 받지 못한다고 하신다(14절).
삼상 3:15-18
그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15절 하반). 사무엘은 그 받은 계시
를 자진하여 엘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어린 소년으로서 겸손함
과 신중함을 보여준다. 그는, 엘리 가정의 중죄(重罪)와 심판에 대한 말씀을 받았으니
그 말씀을 엘리에게 얼른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선지자는 말하는 직분이지만 역시
말에 신중을 기하는 자이다. 신중성이 없는 경솔한 발언은 덕을 세우지 못하여 효과를
내지도 못한다.
삼상 3:19-21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19-20). 사무엘의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주신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고 한다. 말에 실수가 없는 것은 "선지자"의 또 한 가지 특징이다. 세례요한이 전한 말씀도 그와 같이 효과을 냈다. 요 10:41-42 참조.
사무엘은 일찌기 여호와께 바침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체험을 하였다. 그는 비록 나이 어리지만 온전히 성소에서만 기거하며 경건하게 살았던 것이다.
1.여호와께서 이름을 불러주신 체험.
이름 부르는 계시(啓示)는 그 계시자가 그 계시 받는 자를 익숙히 아시는 증표이
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주님이신 줄 모르다가 주님께서 "마리아야" 하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다(요 20:16). 사무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이렇게 그를 움직일 태세로 임하였다. 나를 아는 자라야 나를 사로잡을 수 있다. 복음은 나를 아시는 하나님아버지의 음성이다. 복음의 말씀은 나를 부른다.
2.여호와를 대면한 체험.
사무엘이 네 차례나 이름 불리운 계시에 있어서 그는 객관적으로 그 계시를 다루었다. 이 때에 그가 주관적인 착각에 빠진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그에게 임한 계시를 얼른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각하지 않고 세 번은 엘리 제사장을 찾아가서 그의 부름인가 하고 알아보았었다. 네번째 부르심에 그는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인 사실을 알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객관적 탐색(客觀的探索)에 의하여 그 참된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그 받은 자의 정서(情緖)나 기분이나 지식의 산물이 아니며 그 사람의 어떤 주관적 상황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엄연히 인간계의 밖에서 내게 와서 나의 결단을 요청한다. 진정한 신앙 결단은 성경을 사람의 말로 알지 않고 인간 세계 밖에서 오는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고"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하는 자에게만 생긴다. 소위"나와 너"(I and thou)의 상황에서 생기는 결단은 이런 경우에만 가능하다.
3.여호와께서 함께 해주신 체험.
19절에 말하시기를,"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하였다. 그는 말할 때에 자기 홀로 발언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함께 계셔서 말씀하시는 체험을 하였다. 그는 말을 안하래야 안할 수 없게 되는 체험을 하였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전도한 것이 이같은 내용 있는 말씀 체험이다(행 18:5).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말한 것은 땅에 떨어지지 않을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어주심으로 그것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 신구약 성경은 그런 성격을 가진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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