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21:3,4
그 피살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 곧 그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우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고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 장로들은 그 지방 책임자들이니 만큼, 그 지방을 대표하여 송아지를 제물로 쓰기 위해 죽이는 역할을 하였다. 그 송아지는 아직 멍에를 메지 아니한 것이다. 송아지는 순진한 성격을 가진 짐승으로서 하나님 앞에 제물 될 자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니 만큼 순전히 하나님에게만 바쳐진 속죄 제물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도 어떤 의미에서는(속죄 제물 이외의 다른 의미) 하나님 앞에 순전히 바침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라고 하였다(고후 11:2).
신 21:5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 제사장들이 그 사건 해결의 장소에 참석함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그리한 것이다. 이것은 사건 해결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로야 만족하게 된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들의 임석이 하나님의 권위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몇 가지 표현이 나온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는 것,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다는 것, 또 그들은 소송과 논쟁을 판결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그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대로 지도하였다. 오늘날 신약 시대 신자들에게는 성경 말씀이 그런 역할을 한다.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문제를 해결할 때에 그것으로 잘 낙착된다.
신 21:6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 이 때에 장로들은 그 지방 사람들을 대표하여 그 살인 사건에 관계한 일이 없음을 맹세하는 의미에서 손을 씻은 것이다. 이 맹세에 그 지방 사람들도 다 참가한 셈이 된다. 그리고 그 죽은 송아지는 발견되지 않은 범인을 대신한 것이다. 이와 같은 대신 속죄의 사상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에서 열매를 거둔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없다면 짐승들의 피로 말미암는 속죄는 무의미할 것이다. 그러면, 이 때에 그 속죄 제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중의 죄가 사유함이 된다. 이스라엘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고 무죄한 피에 대한 그들의 공동적 죄책(그 범인을 잡아 처리하지 못한 限)이다. 그들이 범인을
잡지 못했으면 그 대신 송아지를 잡아 속죄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범죄자 처리에 대하여 사회에 공동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무죄한 자의 죽임 당한 사건이 공정하게 처리되지 못하면 그 사회가 공동적으로 화를 받는다는 것이 여기에 계시되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너무 무식하다. 그들은 자기 개인에게 피해가 돌아오지 않는 한, 불의한 사건들을 묵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손 씻는 장로들의 처사를 배워야 된다.
신 21:8
여호와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 장로들은, 무죄한 피값이 그들의 사회에 돌아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속죄제와 결례를 행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 자신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복리를 위할 처지에 있었다.
신 21:9
정직한 일 -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을 가리킨다.
신 21:10
네가 나가서 대적과 싸움함을 당하여 -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민족들로 더불어 전쟁할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주(定住)한 후에 그 주위의 다른 나라들로 더불어 싸우게 될 것을 말함이다.
신 21:10-13
네가 만일 그 포로 중의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연련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그를 제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거하며 그 부모를 위하여 일개월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 -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전쟁 포로를 아내로 삼는 경우를 말씀하여 준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얼른 보면 이것이 7:3-4의 내용과 맞지 않는 것 같다. 거기서는 이스라엘더러 이방 여자(가나안 여자)를 취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여기에 관설된 여자는 가나안 여자를
포함하지 않는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취하지 못할 이방 여자는 그 때에 우상주의로 팽창하였던 가나안 여자들에게 국한된다. 모세 자신이 이방인 구스 여자를 취하였고(민 12:1), 요셉은 애굽 여자를 취하였고(창41:45), 보아스는 모압 여자 룻을 취하였다(룻 4:13).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바벧론에서 돌아온 때에 문제 되었던 유대인들의 결혼 문제로 가나안 여자들을 취한 사건이었다(스 9:1-3).
"그 여자가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벤"것은 그의 부모를 떠난 슬픔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로 하여금 1 개월 동안 슬퍼하도록 기회를 준 것은 인정을 존귀히 여긴 제도이다. 사로잡혀 온 그 여자의 심리가 아직 슬픔에 잠겨서 안정되지도 않은 때에 결혼을 강행한다는 것은 인도적(人道的)으로 통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그런 사람과의 결혼을 허락하시되 사리에 합당한 순서를 밟도록 하셨다.
신 21:14
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 마음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 - 하나님께서는 사로잡혀 와서 결혼한 여자의 인격을 존중히 여기는 편으로 가르치신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남자가 그 여자를 사랑해주지 않는 한, 외국에서 고독의 쓴 잔을 마시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 때 그의 생활이야말로 감옥의 죄수와같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대화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그로서는 자기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 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이다. (2) 그를 종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역시 그의 인격을 존중시한 말씀이다. 비록 그 여자가 이스라엘로 포로(포로는 종과 같았음)로 왔지만 이제는 자유인으로 대우를 받아 돌아가데 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의문되는 것은,이 사건에 있어서 남편 된 자가 그 여자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니겠는가? 그의 기뻐하지 않은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우리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우리로서는 이에 대하여 말할 근거가 전연 없다. 설혹 남편이 그 여자를 기뻐하지 않은 것이 옳지 않은 동기에서 생긴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를 붙잡아 두라고 하실리가 없다. 그 이유는 만일 그를 미워하면서도 붙잡아 둔다는 것은 그를 더 괴롭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신 21:15-17
여기서는 두 아내를 가진 자가 그 소생들에 대하여 대우할 규례를 말해준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1) 여기서 두 아내를 가진 남편의 경우를 취급할 때에 두 아내를 소유한 것이 본래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두 아내를 가진 자의 불행한 사태에 대한 수습책을 말한 것 뿐이다. 구약 시대에 있어서도 다처주의가 본래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마 19:4-6;말 2:15). 다만 그 때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그런 일이 저질러진 것이었다(마 19:8). 그러므로 그 시대에 있어서 어떤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중혼을 묵인하신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이 중혼으로 인하여 좋지 않은 열매를 거둔 것도 사실이니, 그것은 중혼을 기뻐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다. 신약 시대는 이 점에 있어서 구약 시대보다 엄격하다. 그 이유는 신약의 복음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그 본래 대로 회복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중혼을 엄금하셨다(마 19:3-9). (2) 두 아내를 가진 자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말고 의리적으로 해야 될 것을 가르친다. 곧, 그가 미워하는 아내에게서 아들을 먼저 보고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아들을 추후에 본 경우에는 그는 의리를 따라서 그의 미워하는 아내에게서 난 아들에게 장자의 기업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처사는 그가 인생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의리를 찾아보기 원하심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가정 생활에 있어서나 사회 생활에 있어서나 심지어 교회 생활에 있어서도 의리보다는 자신들의 심리적 경향(미움,혹은 사랑)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되어 중요한 일들이 본 궤도대로 움직이지 못하므로 모든 악한 결과들을 가져온다. 우리는 쉽게 심리적으로 흘러가지 말고 굳게 서서 의리를 지켜야 된다.
신 21:18-21
여기서는 불효한 아들을 처리함에 대하여 말씀한다. 그런 아들은 결국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런 벌을 받을 아들은 어떠한 자인가?
(1)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 - (18절 상반). 그것은 고집스럽고 반역하는 자를 말함이다.
(2)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 - 는 자(18절 하반). 다시 말하면, 그런 자는 끝까지 부
모의 권위를 무시하고 반역하기를 계속하는 자이다.
(3) 방탕하여 술에 담긴 자 - (20절 하반). 그야말로 단 한가지 좋은 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광인과 같이 되어 모든 것을 파괴하고, 가정 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도 해독만 끼치는 자이다. 방탕하고 술에 잠긴 자는 이렇게 위험한 자이다.그런데 이런 아들을 처리함에 있어서 그 부모가 먼저 그를 재판정에 이끌어 가게 한다.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 란 말씀이 그 뜻이다. 이것은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취하여진 순서이다. 죄인을 처벌하는 일은 개인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고 공적 재판에 속한 일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은 공정하다.
얼른 보면 패역한 자식을 죽이도록 하는 법은 가혹해 보인다. 그러나 그 때에 이런 벌을 당할 만한 자식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으리 만큼 극도로 흉악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한 자에 한하여 이것이 실시되도록 하셨을 것이다. 우리가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이런 법을 보아서 부모를 거역하는 죄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을 거역하는 죄니만큼 극히 악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옛글에도 불효와 같이 큰 죄가 없다(罪莫大於不孝)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점을 더욱 밝히 드러낸다.
신 21:22,23
나무 위에 달려 죽은 시체를 밤 새도록 두지 말라고 한다. 그가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그것은 극히 잔인하게 죽임이 된 시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오래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오래 볼 수록 그 잔인성에 감염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잔인한 사형을 받으셨으니, 곧 저주의 죽음이었다(갈 3;13). 그는 죄가 없으시되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음이 되셨다(고후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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