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2:1,2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 여기 이른 바 "준수함(*=토브)을 보고"란 것은, 행 7:20에 있는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움"을 보았다는것이다. 모세의 부모는 이렇게 모세의 얼굴에서 영미(靈美)를 느낄만치 영감(靈感) 속에서 살았다. 따라서 그들은 바로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기를 "석달 동안 숨겨" 키웠다 이것은, 그들(특별히 그 어머니)의 신앙이었다(히 11:23). 잠 29:25 참조.
출 2:3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 "더 숨길 수 없이 되매"란 말은, 그들이숨길 수 있는데까지는 숨겼음을 알려 준다. 그 때에 아기 모세를 보호하는 방법은, 숨기는 길 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길을 최후까지 갔다. 그런데 이제 그 이상 더 숨기지못한 것은, 그들은 이제 부터는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이상 더 숨기지 못한 것은, 숨길 방법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때에 애굽 왕이 이스라엘의 가정들을 감시하는데 있어서 더할나위 없이 그물을 폈었을 것이다. 이때에 그들이 끝까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아기를 그 이상 더 가정에 숨겨 두는 것은, 아기의 생명을 보호하는 좋은 방법이 아닌줄 알았다."갈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갈"은 히브리 원어로 꼬메(* )라고 하는데, 애굽말에서 유래된 것이다(Holzinger, * istagyp-tisches Lehwort). 그것은 손가락 만큼 굵은 삼각형의 줄기로서 10 척(英尺)쯤높이 자란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갈(葛)과 달라서 섬유질(纖維質)이 많은고로 종이를 만들기도 하고, 또는 배(周)를 만들기도 하였다. "역청"은 식물의 기름으로만든 것인데 아스팔트와 유사하다. 혹, 그 아래 "나무진"리란 말이, 이것에 대한 설명어(說明語)가 아닌가 생각된다. 갈상자에 이런 것을 발라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한것이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갈상자"에 담아서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둔 것은, 그 하수(河水)에 바로의 딸이 가끔 목욕하러 내려오는 것을 알고, 그 아기를 주어다 기를까하여 최후의 소망을 건 것이다. 이것은, 폭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 두려워하는모세의 어머니에게 임하였던 영적(靈的)지혜의 처사였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평탄한 길이 열린다(잠 29:25). 시 76:10 참조.마틴 노드(Martin Noth)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나의 신화(神話)인 듯이 잘못해석한다. 신화란 것은, 사실이 아니고 영웅 숭배를 위하여 꾸민 애야기를 의미한다.마틴 노드(Martin Noth)는 다른 나라의 신화를, 아기 모세의 사건과 동일시 하는 의미에서도 말하기를, 메소보다미아의 살곤왕(Sargon)(주전 3000년 경)이 났을 때에 그 모친이 그 아기를 갈상자에 담아서 유브라데강에 띄웠는데, 어떤 농부가 그 아기를 가져다가 길렀다고 한다(Exodus, 1959, pp. 26-27).
그러나 노드(Martin Noth)의 이와 같은 견해는 잘못이다. 성경의 어떤 기사(記事)가 이방(異邦)의 어떤 이야기로 더불어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하여, 대번 양자(兩者)를같은 종류라고 할 수 없다. 가령 회회교 교도들이 예배당을 가지고 있는 점이 기독교와 유사하다고 하여, 두 종교를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특별히 어린 아기를 기를 수 없는 궁지에 따진 부모가 그 아기를 어떤 처소에 가져다 주은 것은, 오늘날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모세의 부모가 한 일은, 그들이 당면하였던 역사적 사실과 환경에 잘 부합한다.
출 2:4-9
이 부분의 말씀을 보면, 아기 모세에 대한 그 모친의 처사가 계획적이었던 것이 알려진다. 그가 아기를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둔 것은, 절망하고 유기(遺棄)한 것이었다.신앙에는 절망이 없다. 신앙은 최후까지 소망의 달음질을 한다. 모세의 모친은, 최후로 아기를 살릴 곳이 왕궁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을 믿고 폭군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에게(히 11:23), 이런 깨달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고 요동하지 않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이다(약 1:5-8). 모세의 모친은 "바로의 딸"(공주)이 하숫가에 목욕하려 오던 사실도 알았고, 자기의 아기는 그(공주)를 통하여 왕궁에서 키움이 될 수있는 줄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기를 갈상자에 담아 하숫가에 두고, 적당한거리의 지점에서 "그 누이"로 하여금 지켜 보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모든 처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믿었다. 일은 그의 믿은대로 실현되었다. 그가그렇게 처사한 후에 과연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와서, 그 아기를 발견하였으며, 그 아기 "누이"의 주선으로 유모(乳=실상은 그가 아기의 어머니였다)도 정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맞아 나간 것은, 모세의 어머니(부모)의 신앙에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참된 신앙은 반드시 열매를 가져오는 법이다. 일설에 의하면, 마호메트교의 풍속을 따르는 근동 지방(팔레스틴과 애굽)에서는공주와 같은 상류 계급의 여자들이 도시(都市)가까운 하구에서 목욕하는 일이 없다고하면서,우리 본문의 기사(記事)를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Lane, Manners and Customs).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상고 시대(上古時代)의 애굽에서는, 상류 계급의 여성들이 나일(Nile)강에서 목욕하는 풍속이 있었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나일강을 종교적으로 숭배하였고, 여자들이 그 강물에서 목욕하면 생산도 잘 하고 장수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Strabo, XV, p. 695, Seetzen, Travels, p. 204).
출 2:10
이름을 모세라 하여 - 여기 이른바 "모세(* )란 이름이 애굽말 "모우세스"(Mouses)에서 유래하였다는 학자들이 있다. 델리취(Delitzsch)에 의하면, "모"(Mo)는애굽말로 "물"이란 뜻이고, "우세스(uses)는 "건짐 받은 자"란 뜻이라고 한다.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 이 문구는, "모세"라고 한 애굽말의 뜻을 해설한 것이다. 그러나 칼빈(Calvin)에 의하면, "모세"란 이름은 바로의 딸 공주가모세의 모친에게 히브리 말을 물어서 지은 히브리식 이름이라고 한다. "모세"란 히브리어의 "건짐"을 의미한다.
출 2:11-14
이 부분 말씀은, 모세가 장성한 후에 자기 동포들의 고역(苦役)하는 마당에 찾아간 것을 보여 준다. 이 부분애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때에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위하여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왕궁을 아주 떠나 나왔던 것이다(24-26). 그러나 이 때의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날 애굽 사람이 자기동족 치는 것을 보고 의분(義憤)으로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었다 . 이점에 있어서 그가 정의감(正義感)으로 그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편벽되이 동포를 위하는 감정에 치우쳐 애굽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것은, 도리어 정의를 어긴 것이다. 그다음 날에는 그가 자기 동포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말렸다. 싸움을 말린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도 그는, 인류를 볼 때에 하나님 중심하여 공정하게 취급하지 않고 좁으랍게 육적(肉的)인 민족주의로 기울어졌다.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란 말이, 이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는 자는, 이렇게 육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구약이 가르치는 이스라엘 민족 운동은, 결코 육적인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의 모든 민족들을 멸망시킨것도 혈육에 속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정하신 심판을 대행(代行)한 영적(靈的)운동이었다. 후일에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받아 바로 깨닫게 된 모세의 사상(思想)은, 이방 민족들까지도 긍휼히 여기게 되었다(신 14:29, 16:11, 26:12,13, 27:19). 렘 7:6, 22:3 참조.모세는 이 때에 잘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하고 미디안으로 도망하게 되었다. 모세가 이장면에 있어서는 물론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가 바로의 궁중에서 나와서 이스라엘 민족의 고역을 보는 그 행동이(11절), 벌써 신앙의 동기에서 출발하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행 7:25 참조. 그는, 이 때에 벌써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고" 나섯던것이다(히 11:24-26). 다만 그가 그의 사명을 실행함에 있어서 그릇된 방법으로 한 것은 잘못이다. 그는, 마땅히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함으로만 그의 사명을 성취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때에 자기 심리의 충동대로 개인적으로행동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실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
출 2:16,17
"미디안"은 미디안 족속들이 살던 땅이다.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이 그두라를통하여 낳은 자손이다(창 25:1-2, 4). 그들이, 엘란(Elan) 만(灣)의 동쪽에 살다가점점 모압쪽으로 퍼졌다(민 22:4,7).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미디안족의 일부가 엘란(Elan) 만을 건너서 시내 반도(半島)의 남쪽(호렙산 부근)에도 거주하였을 것이라고 한다(3:1).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 왔을 때에 그곳 제사장의 "일곱딸" 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다가 목자들에게 구박 받는 것을 보고, 그는 그 목자들을 쫓고 그 딸들을 도와 주었다. 그는 이 때에 전과 같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여기서 미디안 "제사장" 의 이름을 "르우엘"이라고 하였는데, 3:1에서는 그를 "이드로"라고 하였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몇가지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르우엘"은 그의 이름이고,"이드로"는 그의 존호(尊號)였을 것이라는 것. (2) 또 혹은 말하기를, 히브리어는 "아버지"란 말(*=아브)들 조부에게도 사용하므로 "르우엘"은 "일곱 딸"들의 조부였을 것이고, "이드로"는 그들의 부친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그런데, 또한 가지 문제는, 삿 4:11에는 모세의 장인을 "호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잘 해결된다. 히브리 원어로 장인을 코덴(* )이라고 하는데, 처남을의미할 때에도 같은 말을 사용한다(민 10:29). 헬라어에서도 장인과 처남을 다 같이깜브로스(* )라고 한다. 그러면, "호밥"이란 사람은 모세의 장인, 혹은 처남이었을 것이다.
출 2:18-21
창 29:9-10참조. 근동 지방에서는, 오늘날도 여자들이 양을 먹인다고 한다(Dean Alford). 이 때에 모세는 이방인 미디안 제사장의 딸 "보라"(* = "칩포라"라고 번역해야 됨)를 아내로 취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모세의 인격과 사업에 영향을주었을 것이다. 곧, 이 때에 모세의 결혼은, 육적(肉的)인 민족주의로 기울어졌던 그의 사상을, 세계 동포주의(世界同胞主義)로 확대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였을지도 모른다.
출 2:23
이스라엘 자손은...탄식하며 부르짖으니 - 곧, 그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는 것이다(신26:7).
출 2:24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 "그 언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내용으로 한다(창15:16,46:4).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심은, 무엇보다도 그의 "언약"대로 실행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구원은,그의 선택과 언약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시는 도중에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도 절대 필요하다(23절). 다니엘서9장을 보면, 다니엘도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알았기 때문에(단9:1-2),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단9:3).
출 2:25
"권념"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야다(* )니 알아 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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