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창세기 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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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2:1-4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흉년 때에 필연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잇는 것은, 이런 자연적인사건들을 통하여 결국 하나님이 목적하신(15:13) 일이 이루어진 사실이다. 이런 것을가리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이때에 야곱이 그의 열 아들을 애굽에 보내면서도 "베냐민"만은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베냐민은 그에게 있어서 특수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멀리떠나 가는 것을 야곱은 원치 않았다. 이와 같은 사실이 기록된 것을 보면, 이 부분 기사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실정을 근거로 한 역사적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함이었더라. 루터(Luther)는,야곱에게 있었던 이와같은 공포심은 그의 불신앙이었다고 간주한다.

 창 42:5,6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 이것을 보면, 야곱의 아들들외에도 많은 가나안 사람들이 곡식을 사려고 애굽에 갔던 것을 알 수 있다. 곡식을 사려고 많은 사람들이 애굽으로 모여들었지만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특별 취급을 받는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었다. 땅 위에 무수한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들 가운데 섞여 있다.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팔더니 - 요셉은, 바로왕 다음가는 영광의 지위에 있었으나 이렇게 평민들과 함께 섞여서 곡식 파는 일을 살폈다. 이것이 역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영광 받는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도리어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기뻐한다.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 이것은, 일찌기 요셉에게 있었던 꿈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37:5-9).이와 같은 성취는, 물론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았다.

 창 42:7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 아나 모르는체 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 요셉이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한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일찌기 자기에게 행하였던 그들의 악에 대한 보복이었을까? 그런 것이 아니다. 요셉은 그렇게 좁으라운 사람이 아니었다(45:5-7). 그가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한 것은, 그 강퍅한 형들을 회개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9 절 해석 참조.

 창 42:8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 요셉의 형들이 왜 요셉을 알아 보지 못했을까? 얼른 생각하면 이것이 의문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요셉이 17세 미성년(未成年) 시절(37:2)에 그 형들과 헤어졌는데, 이때 만난 것은 20 여년 후였다(41:46, 53-54, 45:6). 그러므로 그의 육체는 많이 장성했을 것인 만큼, 그에게서 어렸을 때의 모습을 찾아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욱 이때에 요셉은 애굽은 고관으로서 엄한 태도로 애굽말을 하고 있었으니, 그 형들이 알아볼 리 만무하다.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은, 37:5-9에 기록되어 있다. 요셉은 이제 그 형들이 자기 앞에 와서 굴복함을 보고, 그 꿈이 성취되는 줄 알았다. 형들에게 대한 요셉의 엄한 태도는, 공연히 흥분된 인간적 동작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말은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무서운 말이다. 그 때에 애굽은, 아시아 민족들로 말미암아 여러 방면으로 침략을 받을 위험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만큼, 그 나라는 외국어가서 들어오는 정탐을 극히 예민하게 감시하였다(S.R. Driver, Erman, Hogarth). 이 때에 "정탐"이란 말을 들은 그들은, 자기들의 신변이 크게 위태로운 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을 반성할 만한 처지었다.

 창 42:10-12
 요셉의 형들이 자기들의 신분을 변호함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완강히 거부하며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하면서 그들을 "정탐"이라고 우겼다. 이만큼 그는, 그들을 회개시키려고 그의 엄격한 발언을 굳게 주장하였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요셉의 태도를 오해하면 안된다. 곧,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참되지 않은 주장을 세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셉의 이와 같은 주장은, 참되지 않은 것을 끝까지 주장하려는 속셈이 아니고, 그 형들의 회개 여부를 시험해 보려는 것 뿐이었다.
 선한 뜻으로 시험하는 일은 예수님께서도 하셨다. 그가 5 천명 이상 되는 군중에게 떡을 먹이시는 이적(異蹟)을 행하시기 전에, 제자 빌립을 시험 하신 것이 그 일례이다(요 6:5-6).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어 그의 독자(獨子)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것도 역시 그와 같은 사건이다(22:1-14). "독실한 자"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케님(* )이니, "정직한 자들", 혹은 "진실한 자들"이란 뜻이다.

 창 42:13-16
 요셉의 형들은 이제 두 번째 자기들의 신분을 변호한다. 곧, 자기들은 정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 변호에 있어서, 저희의 가정 실정까지 말하였다. 이런 말을듣는 요셉으로서는, 그야말로 눈물겨운 생각이 일어났을 것이다 20 여년 전에 보았던사랑하는 아버지와 그의 동생 베냐민에 대한 말은, 그의 정서(情緖)를 자극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정서의 움직임을 밖에 나타내지 않고 도리어 더 엄중한 방침으로 나왔다. 그것은, 그들 중 하나가 가나안에 가서 베냐민을 데려오기 까지 그 남은 자들을 모두 감옥에 가둔다는 것이었다. 이 말대로 그는, 그들을 다 함께 3 일 동안 가두었다.
 요셉이 이와 같이 눈물겨운 감정을 억제하고 인정(人情)을 초월하여 그들을 회개시키려는 목적으로 3 일 동안 그들을 가둔 것은, 그의 지도자 자격(指導者資格)의 한 방면을 보여준다. 10-12 절 해석을 참조하여라.

 창 42:18-20
 요셉은 이 시점에 와서 본래의 결정을 완화시켜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다른 사람들은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 "말째 아우를...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그가 이렇게 완화된 동기는 그의 말대로 "하나님을 경외" 하는데 있다고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로서는, 아무 증거 없이 남들을 정탐이라고 단정하여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 완화책(緩和策)에 의하여 그들의 진상을 더 알아 보려는 것이며, 또 이와 같은 말로써 그들에게 어느정도 안심을 주려고 함이었다. 그어나 그들은 요셉의제안에 동의하면서도(20 절) 그들의 공포심은 여전하였다. 그것은 다음 귀절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들은 왜 아직도 공포심을 가졌을까? 그 이유는, (1)그들 중 한 사람이 애굽에 억류될 터인데, 그 억류될 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까닭이며, (2)그들이 고향에 가서라도 말째 아우를 애굽으로 데려 오는 것이 또 하나의 난관인 까닭이며(3 절참조), (3)그들이 요셉의 심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창 42:21,22
 요셉의 형들은 이제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1)그들은 십 여년 전에 요셉을 판 저희 행위를 "범죄"라고 시인하며, (2)그 때에 요셉의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저희 자신이 그 보응을 받는 것이라고 깨닫는다. 르우벤은, 자기들이 요셉의 "피 값을 내게 되었"다고까지 말한다. 죄를 깨닫지 못하던 사람도 고통을 당할 때에는 죄를 깨닫는 일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회개시키는데 있어서 고난을 좋은 방편으로 사용하신다.

 창 42:23-28
 요셉은 그 형들의 회개하는 기미를 보고 마음 가운데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생각이 북받쳐(잠 28:13) 은밀한 곳을 찾아 가서 울었다. 요셉이 "시므온을...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한 것은, 그의 의지적 결단(意志的決斷)이다. 그는, 중심으로는 그 형들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그들의 회개를 결실케 하기 위해서 이미 세운 방침대로 강행하였다.하필 "시므온"이 애굽에 억류되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그가 세겜 사건 이후(34 장) 그 잔인한 심리를 회개치 않다가 필경 요셉을 죽이기로모함하는데 선봉자 노릇을 했었는지도 모른다(37:18-20). 그렇지 않으면, 시므온은 르우벤 다음으로 연장자(年長者)였으니 만큼, 이 때에 그들의 대표자로서 억류된 듯도하다. 르우벤이 가장 연장자이지만, 그는, 그 형제들이 요셉을 해하려 할 때에 그들을만류시킨 자였으니 만큼(37:21-22), 이 때에 억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요셉은, 사람들을 시켜서 그 형들의 자루에 곡식을 채운 후 그들의 지불했던 돈을도로 그들의 자루에 넣도록 하였다. 이것은 다만 그들을 불쌍히 여긴 표요, 후에 그들을 트집 잡으려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43:23). 이것은,하나님의 종의 은밀한 친절(secret kindness)인 선(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은밀한친절은 하나님의 행사들 중에 많이 있다. 요셉은, 그 형들에게 은밀한 친절을 베풀기 위하여 이렇게 하였는 데,그들은 자루에서 돈을 발견한 후에 도리어 두려워 떨었다(27-28,35, 43:12). 그들이요셉의 인격을 두려워하기만 하고 아직은 그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두려워하며 떨었다. 이와 같이,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믿지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나타난 은밀한 친절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28 절). - 곧, 곡식 값으로 지불했던 돈이 그 자루에 도로 들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벌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그 일 때문에 장차 요셉으로 말미암아 저희에게 화(禍)가 미칠 것이라는 뜻이다.

 창 42:29-32
 이 부분에서는, 그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와 애굽에서 당한 그 모든 일을 부친에게 보고한 사실과 및 그들 각 사람의 자루에서 돈이 나옴에 따라 모두 두려워한 사실이 기록되었다. 그 결과는 야곱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걱정이 생겼다. 그는 실상 속아서 걱정 가운데 떨어졌다. 애굽에서 된 일들은 요셉이 그 형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꾸민 사건들이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사람을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야곱은 일찌기 작 부친 이삭을 속여 그에게서 축복을 받은 바 있었다(27:18-29). 물론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요셉이 애굽에서 그 형들에게 대하여 취한 행동들은, 그들을 회개케 하려고 시험한 것이었으니 근본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속인 것이 아니다. 신자들은, 흔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역경과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그의 사랑으로 깨닫지 못하고 화(禍)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생각할 때에 그것은 화가 아니라 참는 자에게는 복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역경과 고난은, 비유컨대 암행어사(暗行御史)와 같다. 그 암행어사가 민간에 정체(正體)를 드러내지 않고 찾아 오지만, 실상 선한 뜻으로 오는 것이다(롬5:3, 8: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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