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창세기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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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 25:1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 여기서 생각되는 난제(難題)는, 노쇠하여 자손을 볼 수 없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후처를 취하여 자식을 볼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가 그 아들 이삭을 약속으로 받을 때에도 "죽은 자와 방불한"자(히 11:12)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있다. (1) 유대인 학자들은  여기 이른바 "그두라"를 "하갈"과 동일인(同一人)으로 간주하며, 여기서는 다만 그  이름이 다르게 불리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억측이다. (2)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즈음에는 매우 노쇠하였었으나, 그 후 남은 평생 동안은 하나님의 은혜로 정력이 회복되어 왕성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칼빈(Calvin)도 이 해석을 지지한다.

  창 25:2-4
 "시므란"은 아라비아의 멕카(Mecca) 지방 서쪽에 있었고,
   "욕산"은 확실히 알기 어렵고,
   "므단"은 아카바만(灣) 머리에  있는 엘라드(Elath)의 남쪽으로 5일간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미디안"은  아라비아의 서북쪽으로  널리 흩어져  있는 족속이다(36:35, 37:28;출3:1, 18:1; 민 25:17; 수 13:21; 삿 6:1).
   "이스박"에 대하여는 확실히 알 수 없고,
   "수아"는  하란의 남쪽에 있었고,
   "스바"는 아라비아의 서남쪽에 속했고,
   "드단"도 그러하고,
   "앗수르"는 아라비아 북쪽 사막 지대 족속이고,
   "르두시"는 하야스(Hejas)에 있는 바누 라이츠족(Banu Leits)과 동일시되고,
   "르움미"는 바벨론과 메소보다미아까지 뻗친 바누 람(Banu  Lam)이란 족속과  동일시된다.
   "에바"는 역시 아라비아족으로서 금과 향품을  무역하는 족속이었고(사 60:6),
   "에벨"은 하야스(Hejas)에 있는 바누  기피이(Banu Gifai)족과 동일시되고,
   "하녹"은 메디나(Medinah)의 북쪽에 있었고,
   "아비나"와
   "엘다아"는 앗시르(Asir) 부근에 있는 아비데(Abide)족과 바다(Vadaa)족으로  생각된다.

  창 25:5,6
  아브람이 이삭을 특별 취급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다는 말로 알려진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삭을 특수 취급하셨으니 만큼, 아브라함도 그리해야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서자(庶子)들도 적당히 돌보아 재물을    주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특별히 한 일은, 그 서자들로 하여금 이삭과 동거하지 않도록 한  처사이다.  이복 형제(異腹兄弟)들이 동거하므로 피차 유익보다 손해를 보기 쉬운 고로,  이렇게 처사하였을 것이다.
   "동방 곧 동국"은 팔레스틴 동북쪽, 혹은 동남쪽을 가리킨다.  29:1 참조.

  창 25:7,8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가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  히브리 원문에는, "수가 높고 나이 많아"란 문구에 뒤이어 "만족히 살고"(*       )란 말도 있다. 여기 이른 바 "만족히 살"았다는 말은, 양심적으로 만족했던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죽을 때에 신앙에 의하여 기쁘게 별세한 것이 사실이다.
   "기운이 진하여 죽어." 이  말씀을 보면, 신앙의 사람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정하신 육신의 사망을 면치 못하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육신의 사망을 인생의 본연(本然)으로 간주하지는  않으나, 당연한 분깃으로 여겨야  한다. 롬 8:10 참조.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이  말은, 단순히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의 조상들이 들어간 사후(死後)의 세계, 곧 내세(來世)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이것은 가족 공동 묘지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이유는, 이 말이, 어떤 때에는 선조들이 묻히지 않은 곳에 장사(葬事)될 때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왕상 2:10, 16:28).

  창 25:9,10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에 장사된 사실을 말한다. 이런 사실은, 23장에 길게 말한 것과 같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후세에 전해 준다. 곧,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갈대아 땅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왔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400년 후에야 그 땅을 차지하게 될 줄로 믿고, 자기는 그 땅에서 기쁘게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행 7:3-7; 히 11:9)는 신앙 행적이다. 23:3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창 25: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하였더라 - 이 말씀을 보면, 이삭이 하나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죽은 뒤의 일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은 자손대(子孫代)에 가서 특별히 나타날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당대에  하나님의 축복을 한몫 다 받는 것이 아니니, 이렇게 그의 죽은 후에 그의 자손이 받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이와 같이 원대하시다. "브엘라헤로이"는, 이스마엘이 한번 거주하였던 곳인데(16:14), 그후에도 거기 가까이 정주(定住)하였을 것이다(21:21).

  창 25:12-15
  "느바욧"은 나바디안(Nabataeans)과 동일한 족속인듯 하다. 이 족속은 목축으로 부요하게    되었다(사  60:7),
   "게달"은  활  쏘는데  능숙한  족속으로서(사  21:17; 시120:4-5) 광야깊은  곳에 살았다(사  42:11).
   "앗브엘"은 아라비아 북방에 있었고,
   "밉삼"과
   "미스마"에  대하여는 알 수  없고,
   "두마"와
   "맛사"는  아라비아 북쪽에 있고,
   "하닷"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데마"는 "두마"의  남쪽에 있고,
   "여둘"도 아라비아족속이고,
   "나비스와 게드마"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십 이 방백이었더라 -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 17:20에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대로 된 것이다. 위(13-14)에 관설된 족속들의 수효는 모두 열 둘이다. 이렇게 예언은 정확히 성취된다.

  창 25:17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 8절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창 25:18
  "하월라"는  애굽 동쪽에  있는 사막  지방이고,
   "술"은 애굽에  가까운 지방이다(16:7).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 - 여기 "맞은 편"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알페네(*         )이니 반대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이스마엘 족속은 서로끼리 반대하는 호전 민족(好戰民族)이란 뜻이다. 16:11-12 해석 참조.

  창 25:20
  "리브가"의 출신에 대하여는 24장에 자세히 있으나(24:15,24), 여기서도 다시 밝혀졌다. 이런 중복체는, 그 사실을 강조하여 역설(力說)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이삭이 이방인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않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민족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다는 사실이 여기서 강조된다.

  창 25:21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우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비가가 잉태하였더니 - 여기서는 역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였던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을 보여 준다. 곧, 자식을 얻기 위한 이삭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이다.

  창 25:22
  아이들이 그 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 우리는, 이런 사실을 볼 때에 깨달을 것이 있다. 곧,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그의 백성에게 은혜를 주시되, 그 은혜를 받는 자로서는 역시 순조롭지 않은 일들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 응답으로 아들을 둘이나 받은 것은 기쁜 일인 동시에, 거기에는 그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기쁘지 않은 일도 내포되었다. 이것을 보면,  은혜가 은혜되기 위하여는 그것이 모든 역경과 난관과 적대 행위 같은 것으로 싸여 있다.

  창 25:23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 이 말씀을 보면,  큰 일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 이것은, 후에 에서의 후손이 야곱의 후손, 곧 이스라엘에게 정복될 일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삼하 8:12-13). 그리고 이 예언은, 사람이 혈육에 속한 장점(長點)을 자랑할 수 없다는 진리도 내포한다. 곧, 장자(長子)라고 하여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고,    사람이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만 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롬  9:11-18 참조.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따름이다.

  창 25:24-26
 여기 "갖옷"이란 말은 "털옷"이란 뜻이다.
   "에서"(*       )란 말은 역시 "털이 많은"이란 뜻이다. 그리고
   "야곱"(*          )이란 말은, "발꿈치를 따른다"는 뜻이니, 곧, 따라잡으려는 노력을 가리킨다.

  창 25:27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 여기  "종용한 사람"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이쉬 탐()이니 "경건한 사람"을 의미한다(Luther).
   장막에 거하니 -  곧, 야곱은 에서와는 달리  평화롭게 처신한다는 뜻이다. 에서는 들사람인 고로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다.

  창 25:29-32
  여기서는,   "에서가...장자의 명분(名分)"을  야곱에게 방매(放賣)한 사실이 진술된다.  "장자의 명분"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뻬코라(*         )니, 그 가정에 있어서 아버지를 계대(繼代)할 수 있는  가장(家長)의 권리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가계(家系)에 있어서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내포하기도 한다. 곧,"그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될 약속이다(12:3, 22:18).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보다도 신령(神靈)한 복을 요점으로 한다.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의하리요 - 에서의 이 말은, 육(肉)에 속한  것을 너무 중대시하고 신령한 것을 경홀히 취급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망령된 행동이다. 이 점에 대하여 히 12:16-17이 자세히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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