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2: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 하나님은, 큰 복을 받을 사람에게 큰 시험을 주신다. 아브라함의 당한 시험은, 하나님을 믿던 심령에 의심을 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극복했다. 우리 일반 신자들도 어떤 때에 시험을 당한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도 없고, 믿자니 의심이 떠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될까? 우리는 먼저 그런 때를 시험의 때인 줄 아는 것이 요긴하다. 그리고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그 때를 잘 통과해야 되며 더욱 잘 믿어야 된다. 그 시험 고개를 넘어 가면, 또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는다. 욥은, 하나님에게 대하여
의심이 일어날 만한 때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때에 그 아내까지도 그에게 한 말이,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욥은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하였다(욥 2:9-10). 그는 또 말하기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하였다(욥 13:15 각주).
우리의 마음이 약해질 때에는 지식적으로 그것을 치료함보다, 그런 때일수록 경건한 생활을 용단하므로써 강해지며 힘을 얻게 된다. 우리가 시험을 잘 통과하면 축복을 받는다.
창 22:2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번제로 드리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15:5) 그 씨로 주신 "이삭"인데, 이제는 그를 죽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서로 맞지 않는 듯이 생각되는 것은 큰 문제이다. 사람이 당하는 시험은 사자(獅子)를 만난 것처럼 괴로운 것이다.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다가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나 찢어 죽였는데, 후에 다시 그 곳을 지나가다 보니 사자의 죽은 몸 속에 벌 떼와 꿀이 있었다(삿 14:5-9). 잘 이긴 시험 속에는 꿀과 같이 단 맛 있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법이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의 믿음이 참된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죽여서 태워야 된다.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서 예수님께 합당한 제사가 되려고 하는데, 그것은 진실하지 못한 태도이다. 그런 태도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태도와 같다. 그것은, 일부만 바치고 다 바친 자들의 반열에 끼우려는 거짓된 태도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고전 16:22). 이렇게 하나님보다 무엇을 더 사랑함은, 심각한 죄악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뜯어 고치는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휘장가(Huizinga)는 말하였다.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 그의 이와 같은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그의 감심 순종(즉각적 순종)을 나타낸다. 시 119:60에 말하기를,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그렇게 감심으로 즉각 순종한 것은, 그 시험을 통과하는데 절반 이상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그는, 그 시험이 반드시 자기에게 유익할 줄 알았다(약 1:12).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여기 "돌아오리라" 한 말(* = 나슈바)은 히브리 원어로 1인칭 복수(一人稱複數)니, "우리가 돌아오리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것은, 아브라함 자신과 이삭이 돌아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어떻게 번제물로 죽임이 될 이삭이 거기있는 종들에게 돌아올 수 있을까함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물로 죽일 각오를 하였던 것이 아닌가? 그 종들을 중도에 머물러 두는 것도, 그가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 위해 아이를 죽일 때에 그들이 그의 행위를 만류할까 하여 그리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그는, 이 점에 있어서 자기가 "아이와 함께...돌아오리라"고 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분명히 그가 사람을 죽은 가운데서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으로 한 말이다. 히 11:17-19에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하였다.
창 22:7,8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 여기 나타난 아브라함의 대답으로 보아 그는, 그 아들 이삭이 죽임이 될 것 없고 하나님께서 다른 제물을 예비하실 줄 생각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는, 아직까지도 이삭에게, 번제물이 이삭 자신임을 말하기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였다. 그러면, 이것은 거짓말로 대답한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 말씀의 뜻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으로 다른 번제물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주시기를 기대한 것임. 그는 이렇게 기대하면서도 하나님의 명령 순종하기를 중단한 것은 아니니, 그의 신앙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보다는 다음과 같이 생각함이 자연스럽다. (2)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본의(本意)아닌 예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양을 예비하시리라는 예언이다. 이것이 확실한 예언인 사실은, 13-14절에 기록된 말씀이 증명한다. 과연 이 예언과 같이, 하나님께서 한 수양을 제물로 준비하여 주셨고, 또한 그 일로 인해서 그 땅의 이름이 "여호와 이레"(* = 여호와께서 예비하심)라고 불리워졌다. 사람이 본의 아닌 예언을 한 사실은, 성경 다른데도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뒤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걱정하니, 가야바가 말하기를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였다(요 11:50). 그것은, 유대 민족이 로마에게 아주 망하지 않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여야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유대 민족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이방인들 중에도 있음)가 집합(集合)되어 하나 될 구원 운동을 예어한 것이다(요 11:47-53).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 하반)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삭이 바로 하나님이 예비하여 주신 "번제할 어린 양"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 말이 본의(本意) 아닌 예언이 되었다.
창 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 이 말씀은, 최후까지 변함 없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해 준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순종함에 있어서, 준비 단계에는 잘 하지만 최후의 가장 어려운 단계에 이르러서는 순종을 포기하는 일이 많다. 그들은 그 가장 어려운 고비가 마지막 고비인 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배가 항구에 다 들어와서 파선하듯이 아깝게도 실패하는 일이 많다. 그 가장 어려운 고비는, 하나님의 간섭이 매우 가까운 기회인줄을, 그들은 생각지 못한다. "인간의 힘이 다 한 데서 하나님은 간섭하신다."
이 부분(9-10)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순종은 모든 신자들에게 모본이다.
(1) 아무 잡념도 없고 말도 없이 단순하였던 사실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는, 이삭을 제물로 잡아 바치는 일에 도무지 지체하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직행(直行)하였다. 그것은 롯과 다른 점이다. 19:15-20의 해석 참조.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의 진리요 유일(唯一)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 다른 이론을 한다면, 그것은 쓸데 없는 말이 될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순종이 있을 뿐이다.
(2) 신앙은 어떤 때에는 인정(人情)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면이 없으면, 주님의 큰 일 들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은, 군대식으로 해 나아가야 할 일이다. 아브라함이 이런 순종을 하기까지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여러가지 은혜로운 생각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1)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할 때에 군인이 상관의 명령을 생각하듯이 두렵게 생각하였음("하나님을 경외함"-12절). 2) 하나님의 뜻을 이삭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였음. 3) 그가 이 일을 실행해야 될 것을 이삭에게 설득시켰으므로 이삭도 잘 순종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 때에 이삭이 번제물 되는 것은, 그들에
게 살인 행위로 생각되 지 않고 도리어 유쾌한 제사 행위(祭祀行爲)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창 22:11-13
아브라함이 그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바친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앙을 알아 보셨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었다. "경외"(敬畏)란것은,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을 정서적으로 두려워하는 것만 아니라, 실상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죄를 미워하여 회개하며, 성결(聖潔)한 생활을 행복보다 더 사모함이다.
하나님께서 이석을 대신하여
"한 수양"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시험을 잘 통과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축복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지적(理智的)으로는 잘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모든 난제가 풀리고 큰 축복을 받는다.
창 22:14
"여호와 이레"(* )란 말은 여호와께서 준비해 주신다는 뜻이다.
창 22:17,18
이 부분에 대하여는, 12:2-3의 해석과 18:18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13:14-17, 15:7,18, 17:4-8 참조.
창 22:20-23
이 부분은, 하란에 살던 "나홀" 곧, 하브라함의 동생의 족보를 진술한다. 이것이 여기에 기록된 목적은,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가 그 가문에서 올 것을 내다보기 때문이다. 24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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