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1:1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 "사라를 권고하셨"다는 말씀은, 그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는 것은, 그가 약속하신대로(18:10-15) 이루어 주셨다는 뜻이다.
창 21:2
사라가...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 "기한"이란 말에 대하여는 18:14을 참조하여라. "늙은 아브라함"이란 말이 여기 사용된 것은, 아들을 볼 수 없는 노경의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히 11:11-12 참조.
창 21:3
이삭이라 하였고 - "이삭"이란 히브리어(* )는 "웃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신앙적으로 웃은 것(17:17,19)을 가리키지만, 겸하여 일시적 불신앙 표현이었던 사라의 웃음(18:2)도 생각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이 이름은, 사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놀라운 기적적 출생을 생각한 명칭이다.
창 21:4
"할례"에 대하여는 17:9-27을 참조하여라.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의 백성됨을 표하기 위한 행사였다.
창 21:6,7
여기 있는 말씀은, 이삭의 출생으로 인하여 터져 나온 사라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다. 과연 이 부분 문투는 시적(詩的)으로 되었다. "말하였으리요"란 히브리어 원어 밀렐(* )은 시가(詩歌)에 사용되는 말이다. 무자(無子)하였던 자로서 아들을 낳았을 때의 기쁨은 크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도 이런 경우의 것이다(삼상 2:1-10). 사라의 말도 역시 웃음에 관하여 두 차례나 나온다(6-7). 그것은 그의 기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창21:8
옛날 유대 나라에서 아이의 젖을 떼는 것은, 보통으로 세 살이나 네 살 때에 실행되었다. 삼상 1:21-25, 2:11 참조.
창 21:9
"하갈의 소생(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였는데, 그것은 불신앙, 시기, 교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바울은, 이스마엘의 이와 같은 행동을 가리켜 이삭에 대한 "핍박" 행동이라고 하였다(갈 4:29).
창 21: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 사라가 아브라함더러 "여종(하갈)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얼른 보면 너무 잔인한 처사와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되어지는 정당한 처사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경륜대로 보아 이스마엘은 본래 약속된 기업을 누릴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대조시켰다. 곧,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을 "육체"에 속한 자로 비유하고, 사라에세서 난 이삭을 "성령"에 속한 자로 비유하였다. 갈 4:22-31은 이 부분 말씀의 풍유(諷諭)를 자세히 풀이하였다.
창 21:11-13
사라의 말을 따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축출하는 일은 아브라함에게 큰
"근심"거리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그가 받은 약속에 부합한 것이므로, 그는 이삭의 편으로 기울어졌다. 그 뿐 아니라,
"여종의 아들(이스마엘)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하신 하나님의 약속도 그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는 유쾌히 처사할 수 있었다.
창 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하갈과 그 아들을 내어 보내는 처사를 단행하였으니,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유쾌한 순종이었다. 22:3 참조.
"떡과 물"은 광야 여행을 위한 것이다.
"브엘세바"는 헤브론에서 서남쪽으로 28마일 밖에 있다. 그 땅은 매우 건조하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축출하는 일은 하나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 때의 실정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렇게 처사하지 않을 수 없는 딱한 사정이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하갈과 사라 사이에는 벌써 충돌이 있었다(16장). 성경에 기록된대로만 여기 21장에 두번째로, 하갈의 계통 때문에 그 가정에 불화가 생겼다. 그런 때에는, 부득이하여 분가(分家)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다가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오 보내는 방향으로 말씀하여 주셨으니, 그 때에 단행한 아브라함의 처사는 당연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소실(小室)을 둔 남자는 그 소실로 더불어 갈라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일에 용단하는 것은, 사실상 잔인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물론 그가 갈라진 뒤에도 그 소실 되었던 자의 생활 책임만은 져야 된다.
창 21:15,16
그 때에 이스마엘은 15세쯤 되었는데, 광야에서 목이 말라 죽을지경에 이르렀다.
그 가련한 정경을 본 하갈은
"방성대곡"하였다.
"살 한 바탕"이란 것은 사정 거리(射程距離)인데 270미터 가량 된다. 이런 자세한 기록을 보면, 본서의 저작자가 진실하게 역사적 사건을 취급한 것이 드러난다.
창 21:17-19
이 부분에는, 하나님께서 하갈과 그의 아들을 긍휼히 여기신 사실이 기록되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사라와 이삭의 처지에는 설 수 없으나, 역시 동일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것만은 확실하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취급하심에 있어서 사람에 따라 주시는 은혜는 다르지만, 누구에게나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베푸시는 데는 일반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쫓겨난 것은 당연하였다. 하나님께서도 그 일을 그렇게 보셨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은 무한하셔서 쫓겨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니, (1) 아이(이스마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심"(17절 상반). (2) 하갈더러
"두려워 말라"고 하심(17절 하반). (3) 이스마엘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심(18절).
(4) "하갈의 눈을 밝히"셔서
"샘물을 보"게 하심이다(19절).
하갈이 샘물을 보게 된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받을 교훈은 다음과 같다. 곧,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심려의 눈이 어두워져서 경영하는 일마다 실패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뒤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심령이 평안해지고, 또한 밝아져서 모든 일(특별히 靈的事理)에 대한 해결을 바로 깨닫게 된다.
창 21:20,21
이스마엘이
"활 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무사(武士)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의 자손들은 오늘날 아라비아족인데, 그 족속들은 전쟁을 좋아하였다. 16:12 참조.
창 21:22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끌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 이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방 지도자들에게도 분명히 알려졌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을 이렇게 유달리 사랑하셔서 끝까지 형통케 하신다.
창 21:23-26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 아브라함더러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맹세하라"는 아비멜렉의 요청은, 일찌기 아내를 누이라고 하였던 아브라함의 행동에 대한 경계를 암시한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자기 우물을 빼앗은 아비멜렉의 종들의 비행을 지적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촉구하였다. 그는 한 나그네였지만, 한 나라의 왕과 일대 일(一對一)로 우호 조약을 맺었다. 그의 배경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당당하였다.
창 21:30,31
그 땅은 매우 건조하기 때문에
"우물"이 귀했는데, 특별히 목축업에 있어서는 물이 많이 수요되었다.
"브엘세바"(* )는 "맹세의 우물"이란 뜻이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확고히 소유한 우물을 이삭의 시대에 아비멜렉이 빼앗았다(26:12-16). 이렇게 세상 것은 믿을 수 없다.
창 21:33
"에셀나무"(* = 에쉘)란 말은 그저 수풀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여호와를 섬기며 그에게 예배드렸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제단 쌓기를 우선적으로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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