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 구약 성경에 의하면, "생산치 못하"는 것은 저주 받은 일로 간주되고, 자식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어 있다(출 23:26; 신 7:14). 사래가 애굽 여자를 여종으로 받은 때는, 애굽 왕 바로에게 데려감이 된 때였다. 12:16에 의하면, 바로가 아브람에게 "노비"(남종과 여종)를 주었다고 한다. "하갈"(* )이란 이름의 뜻은 "도망간다"는 뜻이다.
창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 사래는 아브람과 함께 신앙으로 살아 오다가(벧전 3:6), (1) 이제 불신앙의 시험에 떨어졌다. 왜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도 자녀를 생산케 될 것을(히 11:11) 못믿었던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12:2-3, 13:15-16)은 사람의 힘으로는 성취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으로야 실현될 것이었으니, 그와 사래는, 하나님의 능력만 바라보아야 될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래는, 인간적 수단 방법으로(여종을 아브람에게 주므로) 그것을 성취해 보려 했고, 아브람은 그 제안에 동조(同調)했다. 그 뿐 아니라, 아브람과 사래는 이 점에 있어서 남자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2:24; 말 2:15)를 어긴 것이다.
창 16:3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 - 이 말씀을 보면,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약속("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7)을 받은 뒤에 "십 년" 동안 무자하였어도 믿음으로 오래 기다려 왔다. 그러나 십 년이 지난 뒤에 그들의 믿음이 일시 동안이나마 식어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인간은 누구든지 선을 위하여 오래 동안 참아 오다가도 실수 할 위험성이 있다. 배가 항구(港口)안에 들어와서 파선되는 일도 없지는 않다. 그러므로 언제나 인간성을 떠나지 못한 우리 신자들은,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힘써야 된다.
창 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아 낼 수 있다. (1) 첩을 둔 가정은 반드시 불안하다는 것(삼상 1:1-8 참조). (2) 사람을 지나치게 높여 주면 그가 그 만큼 교만하여진다는 것. 잠 29:21에,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체 하리라"고 하였다.
창 16:5
이 귀절에서는 다시 사래의 과오를 진술한다. 그것은, 그가 그의 당한 고난이 자기 잘못으로 온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 원인을 그 남편에게 돌린 일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의 고난이나 잘못된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악한 근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조상 아담과 하와로부터 내려온 것이다(3:12-13).
창 16:6
아브람은 그 아내 사래의 원망(5절)을 온유하게 받는 의미에서, 하갈에 대한 사래의 권한을 인정하여 준다. 이 때에 사래는 또 다시 과오를 범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하갈을 학대한 일이었다. 이렇게 죄악은 계속적으로 증가되어 가는 법이다.
창 16:7,8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예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시대에 찾아 오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일반 천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친히 하나님의 입장을 취하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사자(使者)의 입장을 취하기도 하신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면서도 하나님과 다른 이시다. 그가 형상을 취하신 점에서는 하나님과 다른 이요, 그가 친히 하나님의 처지을 취하여 말한 점에서는 하나님과 돌일하신 이시다. 겔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는 여기서 이중 의미를 발견했다. 첫째, 상징적 의미. 곧, 보이는 형상을 취하여 사람의 감각 접촉을 가능케 한 것. 둘째, 하나님의 영성(靈性) 표시의 의미, 곧, 보이는 그 사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사람의 주의를 끌어 하나님을 제3자로 가리킨 점이다. 이런 이중 의미는 후대에 그리스도의 화육(化肉)을 예언한 것이다.
"술"은 애굽과 유다 사이에 있는 광야 지방이다. 하갈이 여기서 사래를 가리켜 자기의 "여 주인"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겸손해진 태도를 보여 준다. 그는 사래에게서 학대를 받고 도망해 가는 처지였으나, 그 심령이 악화되지는 않았다. 그는 그 고생길을 기도하면서 갔을 것이며, 따라서 자기의 교만해졌던 것(4절)을 회개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자에게 나타나시는 법이다(사 57:15, 66:2).
창 16: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 종으로서는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엡 6:5-8). 그러므로 상전에게 반항하고 도망하는 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 귀절 내용과 같을 것 밖에 없다. 딤전 6:1-2 참조. 하나님의 뜻을 좇아 복종하는 것이 혹시 어려울지라도 그것은 결코 치욕(恥辱)을 당함이 아니다. 그것은 높아지도록 하는 덕(德)이다. 심상 2:8에 말하기를,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 도다"라고 하였다. 특별히 하갈은 그 상전
사래를 멸시한 죄를 범한 자였으니(4절), 이제는 회개하는 정신으로 복종의 길을 택해야 될 것이었다. 애 3:29-33에 말하기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라도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하였다. 삼상 15:22-23; 히 5:8-9 참조.
창 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 외로이 광야길로 도망하는 하갈에게는 이 약속이 큰 위로가 될 것이었다. 자식은 여호와의 축복이다(신 7:14; 시 127:3). 하갈에게 약속하신 이 축복은, 아브람에게 약속된 것만(12:2-3) 못하다. 아브람에게 약속된 것은, 그 자손이 번성할 뿐 아니라 그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실 것을 포함한다. 메시야는 천하 만민을 위하여 오시므로(12:3) 하갈의 자손(아라비아족) 중에서도 그(메시야)의 구원 축복을 받게 된다.
창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 "이스마엘"(* )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것인데, 그 설명 문구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고 함이다. 여기 "네 고통"이란 뜻은 이스마엘이란 말속에는 들어 있지 않고, 다만 보충적으로 첨부된 설명어이다. 그러면, "네 고통을 들으셨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고통 중에 부르짖는 하갈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뜻이겠다(Leupold). 하갈을 아브람의 가정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생활을 배웠을 것이다. 아브람의 남종 엘리에셀도 신앙으로 기도하였는데(24:12-14), 여종 하갈은 기도할 줄 몰랐으랴? 하갈은 하나님을 아는 영적(靈的) 지식이 있었으니(16:13), 진실히 기도할 줄 알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특별히 고통 중에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되 사람을 차발하시지 않는다. 골 3:11 참조.
창 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리라 - "들나귀"는 길들지 않는 짐승으로서 들에서 자유로이 산다(욥 39:5-8). 그와 같이, 이스마엘의 자손인 아랍 족속들은 아라비아 사막 지대에서 이리 저리 다니며, 유랑 생활(遊浪生活)을 하게 되었다.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다는 말씀은, 그들이 다른 민족들로 더불어 사이 좋게 지내지 않을 것을 예언함이다.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고 한 것(* )은, "모든 형제를 대항하여 거주하리라"고 개역(改譯)해야 된다.
창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엘 로이(* )니, "나를 보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 이 문구 중에 "어떻게 여기서"(* = 하감 할롬)란 말은 중요하다. 이것을 개역하면 "어떻게 여기서도"이다. 이 말씀을 보면, 하갈의 놀란 것은, 그가 광야의 도피 생활(逃避生活)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일이었다. 그가 신앙의 사람 아브람의 지도 하에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정 제단을 쌓기가 용이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그의 상전(上典) 사래를 멸
시한 교만죄를 범한 까닭에 도망가는 처지에서, 또한 쓸쓸한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다니! 이것은 놀랄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리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지 원하시며(마 9:12-13), 또한 비참하고 외로운 자를 돌보신다(시 10:14-18).
창 16: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 "브엘라해로이"(* )란 이름의 뜻은, 한역 각주(韓譯脚註)에 있음과 같이, "나를 감찰하시는(보시는) 생존자의 우물"이란 것이다.
창 16: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 이 말씀을 보니, "하갈"은 아브람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것은, 그의 회개한 결과이며, 하나님의 말씀(9절)에 대한 그의 순종이었다. 그것이 그의 신앙이다. 그는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사람 앞에 자기의 체면이나 위신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학대한 사래의 수하로 되돌아간 것이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아들을 "이스마엘"이라고이름 지은 사실은, 광야에서 된 하갈의 신앙 체험(11절)을 옳게 인정한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만큼, 그는 이제부터 하갈을 잘 대우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 동기에서 취한 행동이다.
창 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 육세이었더라 - 아브람의 가정에서는 사래가 무자한 것이 큰 문제였다. 그 문제 때문에, 그 가정은 한동안 불안에 떨어졌었다(1-6). 이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 났으나 그는 약속의 자식은 아니었으니,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 앞으로 13년을 더 기다려야 약속의 자식 "이삭"이 날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신자들로 하여금 기다리는 생활을 하도록 하신다. 신앙은, 기다릴 줄 아는 자의 분깃이다. 약속 성취도 그런 자의 분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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