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지시 할 땅으로 가라 -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방법 대하여, 드라이버(Driver)는 그것이 아브람의 심령 속에 말씀함을 의미한다고 하였다(Genesis, p.144).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확실히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나님께서, 외부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씀을 하셨을 수도 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이 말씀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뜻이다(Calvin). 행 7:2-4 참조. 일설에, 이것은 하란을 떠나라는 뜻이라고 하나,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람더러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신 이유는, 그 곳에서 그의 부친까지도 우상을 섬기게 되어진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수 24:2-3). 그러나 그보다도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그의 자손들을 성별(聖別)하셔서 장차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시려는 원대(遠大)한 목적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아브람의 고향에 대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이라고, 유사(類似)한 말들을 되풀이 한 것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심각한 결심을 가지고 떠나게 하려는 것이다. 신앙의 용단은, 살깊은 희생을 각오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기분적으로 경솔히 움직이여지는 행동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 따르려는 제자에게 일러 주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우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셨다(마 8:20).
"내가 네게 지시살 땅으로 가라." 혹설에 의하면 이 말씀 뜻은, 아브람이 자기의 갈 곳이 가나안 땅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지만, 다만 그 땅이 그의 기업이 되리라는 것만은 아직 몰랐다는 뜻이라고 한다(Leupold). 그러나 이 해석은 히 11:8과 부합하지 않는다. 거기 말하기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하였다. 이렇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먼 길을 떠나는 것은, 신앙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용단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앞길을 반드시 가르쳐 주실 줄 알고 기쁨으로 취한 용단이다. 신앙자는, 하나님을 알고 또 믿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그의 모를 일들을 문제시하지 않는다.
창 12:2
이 귀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신앙을 뒷받침 해 주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축복 약속을 내다보고 움직이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하실 때에는, 축복의 약속을 주신다. 하나님의 약속이야말로 신앙의 발판이라고 할 수 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 아브람은 이 말씀을 신앙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의 아내 사래는 자식이 없었는데,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룰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가지고 있게도 하시나니, 그 일을 성립시키실 수 있다. 아브람은, 이 약속이 하나님의 것인 만큼 그것을 믿을 수 있었다. 신앙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이다(롬 4:18).
네게 복을 주어 - 이것은 위에 나온 말씀을 보장한다. 곧,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이때까지 무자(無子) 하였던 아브람도 큰 민족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 아브람의 "이름"이 크게 됨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그가 "많은 무리의 아버지"(17:5), "하나님의 방백"(23:6), "선지자"(20:7), "하나님의 종"(시 105:6), 하나님의 벗"(약 2:23; 대하 20:7)이라는 이름도 받게 된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저 그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며, 그의 자손중에서 메시야가 나심으로(갈 3:16) 그의 이름이 크게 될 것을 가리켰던 것이다. 이말씀은, 사람의 명예욕을 정당시 하거나, 혹은 그것을 만족시킬 것을 암시하는 말씀은 아니다. 칭송과 영예는,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하고 사람에게는 돌릴 것이 아니다(시115:1). 명예욕은 죄악의 심리이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다만 아브람을 통하여 그가 큰 일을 하실 것을 보여 주신 것 뿐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이 말은 히브리 원어로 헤예 베라햐( )니, "너는 복이 되라"란 명령사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복이 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아브람에게 약속된 복(그 자손 중에서 나실 메시야께서 구원해 주시는 복)이, 만민에게 미칠 복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혹설에, 이것은 구체화 된 복(der verkorperte Segen)이 된다는 뜻이라고 하나(Dillmann,Ges-Kautzsch), 명확하지 못한 해석이다.
창 12:3
너를 축복하시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축원하심과 동시에, 실제로 복을 주신다는 이중 의미(二重意味) 있는 말씀이라고 한다(Holzinger, * steht hier in doppeltem Sinn, Gedeihen und Gedeihen wunschen). 이 해석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 일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직접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 이 말씀은, 아브람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서 모든 민족들에게 구주(救主)가 되실 것을 예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 예언은 성취되었다(마 1:1; 갈 3:8; 행 3:25). 고등비평가 홀징겔(Holzinger)도, 이것이 메시야 예언인 것을 인정한다. 그는 말하기를, "여기에 장래 소망에 대한 예언적 사상이 나타나 있다. 곧, 이스라엘로부터 구원이 다른 민족들에게 온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So spielte hier der Gedanke der prophetischen Zukunftshoffnung herein, dass den andern Volkern Heil von Israel Kommt. -k. Marti, Hand-Commentar, p. 137).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람의 자손, 곧, 유대인으로 나심은, 메시야의 세계적(世界的) 성격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민족들의 혈통 관계에 따라 차별하시지 않는다. 실상 아브람도 본래 갈대아 우르 사람, 곧, 이방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도록 하심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메시야의 유대인적 요소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아브람의 자손을 택하신 선택의 요소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메시야의 유대인적 요소를 귀히 여겨 내세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고 하신 의도(意圖)가 여기 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할 때에, 예수님은, 유대인이라는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요 18:33-38). 그러므로 구약은 메시야에 대하여 "다윗의 자손", 또는 그와 같은 호칭을 많이 사용하였다(삼하 7:12-13; 눅 1:32-33; 사 11:1-5; 렘 23:5, 33:15; 겔34:23-24, 37:24-25).
창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라는 말은, 현저하게 아브람의 신앙 성격을 보여 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권위를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 알아, 보이지 않는 이를 보이는 것 같이 순종하였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음으로 하나님 자신을 모실 수 있는 줄 안다(Moody). 하나님께서도 그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를 돌보신다(사 66:2). 신앙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존종하는 동력(動力)을 가지고 있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신앙이라는 것은 생명 있고 능력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게으르고 잠 자는 하나의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물 위에 뜬 오리와 같이 마음 속에 떠돌아 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뜨거운 불로인하여 완전히 뜨거워진 물과 같다"라고 하였다(Faith is a lively and powerful thing; it is not merely a drowsy and idle thought; nor does if float somewhere upon the heart as a duck the water, but it is like water warmed throught and through by a good warm fire).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이말씀이 이렇게 자세한 것을 보아 이 부분 기록이 역사적인 것을 알 수 있다. 띨만(Dillmann)은, 창세기에 있는 족장들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가 아니고 전기(신화)라고한다. 그러나 그것은 억측이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났다는 말은, 그가 가나안으로 가던 도중에 하란에서 살다가 다시 출발한 것을 가리킨다.
창 12: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을 들어갔더라 - 그가 "하란"에서 "가나안 땅"을 향하여 출발한 것은, 또 다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하란에서 여러 해 동안 살면서 벌써 많은 재산을 얻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갔으니, 그것도, 어려움을 무릎쓰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순종한 일이었다.
그 당시 여행자가 하란에서 가나안 땅에 가려면 유브라데강을 건너야만 되는 것이었다. 하란에서 유브라데강까지의 거리는 60마일쯤 된다. 그리고 그는 남쪽으로 향하여 가면서 하맛(Hamath)과 다메섹(Damascus)을 지나야만 했다. 그 다음에는, 헐몬산의 남단을 지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창 12: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 "세겜 땅"은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의 매우 비옥한 골짜기에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30마일 북쪽이고 사마리아에서 5마일 동남쪽이다. "세겜땅"의 후대 역사에 대하여는, 성경이 많이 말한다(창 33:18-20; 수 20:7, 24:1,25,26,32; 삿9:2,3,6,7,18,20,23,25,26,31,39, 41,46,47,21:19; 왕상 12:1,25; 시60:6).
"모레 상수리 나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엘론 모레(*)인데,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신탁(神託) 상수리 나무"(Oracle-terebinth)라고 하며, 그 때의 나무 아래서 점치던 사실과 관련시킨다. 프리취(C.T. Fritsch)는 말하기를, "이곳은 고대 종교 행사의 중심지였다. 이곳을 '모레 상수리 나무'가 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가리켜 가르침, 혹은 가르치는 자의 상수리 나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나무는 신(神)의 지시를 전달하는 고대의 거룩한 난무였음에 틀림 없다(창35:4; 신 11:30; 수 24:26; 삿 9:37). 여기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라고 하였다(The Layman's Bible Commentary, p. 53). 그러나 우상을 피하여 간 아브람이, 그런 미신 장소에서 제단을 쌓았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 "모레"란 말은 땅 이름이고, "상수리 나무"란 말 엘론(* )은 두 개 이상의 많은 나무들을 가리켰을 것이다(Calvin). 13:18 참조.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가나안 사람은 물론 우상을 많이 섬겼다. 이 말씀을 보아도, 우리는, 아브람이 취한 신앙의 길이 역경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우상의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나 멀리 가나안에까지 왔으나, 이곳도 우상의 땅이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온상(溫床)은 아니었다. 신앙이란 것은 이렇게 역경 가운데서 싸워 나가는 것이다. 만일 아브람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인도가 이렇게 되었을 때(우상의 땅으로 오도록 하신 때)에 낙심 했을지도 모른다. 아브람에게 있어서, 이 때에는 갈수록 역경이고 어떤 신속한 성공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의 참된 노선을 걸어가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이 도리어 신앙의 길인 줄 알았다. 그는, 신앙에 의한 어떤 폭리를 도모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소망이 참 소망인 줄 알았다(롬 8:24-25).
창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 하나님께서 아브람더러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그를 거기까지 인도하신 목적을 말씀하신 셈이다. 아브람은, 감사하는 뜻으로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제단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미즈뻬가(* )니 "죽음의 장소"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제단은 짐승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곳이다. 짐승의 피를 흘려 제물을 바침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예표한 것이다. 이 제사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감사하는 표로 드렸든지, 혹은 언제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뜻으로 실행하였을 것이다.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먼제 제단을 쌓았다. 8절 참조.
창 12:8,9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이 말씀을 보면, 가나안 땅이 아브람의 자손들이 기업으로 약속 받은 땅이지만, 아브람은, 아직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받지 못하고(행 7:5) 여기 저기 유리하였다(히11:9). "장막"을 쳤다는 말은, 그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여기 저기 유리함을 의미한다. 9절 참조.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가 모순된 듯이 보였지만(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멀리 가나안 땅에까지 왔으나 아직 발 붙일 곳도 없음), 신앙에는 동요를 받지 않고 더욱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창 12: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 애굽은 나일강 때문에 가무는 때에도 곡식이 풍부하였다. 그러므로 흉년에는 아시아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 갔다. 애굽에서 셈족 사람들을 받아들인 역사는 애굽 비문(碑文)에도 기록되어 있다(H. Guth, Geschichte des Volkes Israel, 16). 아브람이 흉년을 당하여 애굽까지 내려 간 것은, 역시 고생길이었다. 이것도, 그의 신앙 생활의 일면을 보여준다. 곧, 하나님의 축복 약속을 받아 가지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난 길이, 이렇게 갈수록 역경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데 있어서는 흔들리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 고생길을 신앙자에게 만나지는 자연스러운 조건들로 간주하였다.
창 12:11-13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한 것은, 20장에도 있다. 고등 비평가들은 말하기를, 이 두가지 기록은 한 사건에 대한 두 기자들(J, E)의 기록들이고, 사건이 두 번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은 너무도 과감한 억측이다. 이 두 기록은, 각각 다른 사건을 취급한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그 두 기록의 사건들이 서로 다른 내용을 현저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장소가 서로 다르니, 하나는 애굽이요, 하나는 블레셋. (2) 그 사건들과 관련된 임금들이 서로 다르니, 하나는 바로요 하나는 아비멜렉. (3) 아브람이 남쪽으로 가게 되어진 동기가 서로 다르니, 하나는 흉년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유목 생활(遊牧生活)의 이동 때문임. (4) 그 사건의 결론이 서로 다르니, 하나는 아브람이 그곳에서 떠남이요, 다른 하나는 아브람이 체재(滯在)함이다. 그러므로 이 두 기록은 각각 다른 두 사건을 취급한 것이 분명하다.
하밀톤(F. E. Hamilton) 교수는,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한 제 20장의 말씀이, 본래는 12:10직전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말하기를, "20장의 사건과 관련된 사래는, 그 때에 90세나 된 노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90세나 된 노인을 아비멜렉이 취하였을 리는 만무하다. 만일 그 사건이 12장에 있는 사건과 거의 같은 시기(時期)에 되었다고 하면, 사래가 65세 때였으니 만큼 그 시대의 수명으로 보아 중년쯤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아비멜렉이 사래를 취할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이 20장으로 내려가게 된 것은, 원저작자가 쓴 토서판이 보관자들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잘못이다. 사래가 90세 된 때도 현대인의 수명 비례로 말하면 역시 중년 시대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래가 127세에 죽은 사실을 생각해 볼 때(23:1)에 90세 된 그는 앞으로도 37년을 더 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래는 그 때에 단산기(斷産期)에 있었다. 그러나 단산기의 사람을 반드시 노쇠한 사람이라고 할 것은 없다.
아브람이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믿지 않은 불신앙이었다.
창 12:14,15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 사래는 이 때에 65세쯤 된 중년 여성(그 당시 연한으로 보아)으로서 해산의 고통도 당한 일이 없었던 것인 만큼, 아름다왔을 것이다. 이 때에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였으니(4절), 아브람보다 10년 아래인 사래는(17:17) 65세였을 것이다.
"바로"(* )란 말은, "큰 집"이란 뜻인데, 그것이 왕의 칭호가 되었다. 그 때에 근동 지방의 왕들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강제로 취하여 첩을 삼는 일들이 많았다. 이제 아브람의 아내가 그와 같이 된 것은, 아브람에게 있어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저 양보하고 말았으니, 그가 그 때에 얼마나 약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공경하던 자가 신잉에서 떠나면, 이렇게 약하여진다. 신자는 오직 믿음으로만 힘을 얻는다.
창 12: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 비평가들은, 역기 "약대"란 말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다. 그 이유는, 고대 애굽에는 약대를 기르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대는 유목 생활하는 아브람에게 필요한 것인 만큼, 바로가 그것을 외국 무역자들에게서 매수하였을 수 있다(S. R. Driver).
여기 아브람에게 준 선물 중에 말(馬)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이 왕정(王政)시대 전에는 말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Holzinger). 아브람이 바로의 선물을 받은 것도 그의 약점이다. 그것은, 자기 아내를 파는 것과 같은 행동이 아니었는가? 위에 벌써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신앙에서 떨어진 때에는 무척 약하여진다.
창 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 지라 - 여기 이른바 "재앙"은, 어떤 재앙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그 재앙은 너무도 돌연한 것이기 때문에, 애굽 왕은 아브람의 아내에 대한 그의 잘못을 깨달을 만하였다.
사래가 애굽 왕에게 잘못된 취급을 당한 원인이, 그의 남편 아브람에게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사람에게 실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원하여 주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실수는 실수대로 다스리신다. 아브람의 이와 같은 실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징계하셨는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알 수는 없다.
창 12:18-20
아브람이 그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이 거짓이었음을, 바로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우리는 말하기 어렵다. 혹 그가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받았는지, 그렇지 않으면,어쨌든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아브람이 애굽 왕에게서 부끄러움을 당한 사실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실수하면, 하나님께서 불신자를 통하여 그에게부끄러움을 주시는 일이 많다. 욘 1:5-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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