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9:1-7
이 부분에는, 하나님께서 홍수에거 구원 받은 노아와 그 가족에게 축복하신 말씀을 보여 준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케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축복이야말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인류의 거의 전부는 홍수 가운데 멸망 받았고 이제 그들만 남았으니, 그들에게는 "번성"하는 것 이상 더 필요한 축복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로 번성케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법을 세우셨다.
(1) 모든 금수(禽獸)와 곤충과 어류(魚類)로 하여금 사람을 두려워하게 함(2-3). 생각컨데 이 때 전까지는 그것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듯하다. 그것은, 일찌기 그것들이 방주 속에 인도함이 됨을 보아서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주신 식물은 채소와 과실 뿐이었고, 동물은 동물은 아니었으니(1:29), 사람들이 동물들을 죽이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만큼, 그것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홍수가 지나간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사람에게 식물로 주셨으므로 그것들이 이제는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2) 생명을 신성시(神聖視)하는 관념을 보수하게 함(4절). 우리 본문에,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고 한 것은, 생명의 근원(根源)이 되는 피를 천대하지 않게 하려는 교훈이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짐승의 고기를 식물로 허락하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짐승의 생명이라도, 그 생명을 존중시하는 관념을 보존하게 하신 것이다. 그들이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허락을 조건으로 하여 먹을 것이고 그것들의 생명을 멸시하는 관념으로 먹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이 교훈을 볼 때에도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짐승들의 생명 자체의 존귀성을 보아서는 사람으로서 그것들을 식물로 취급할 수 없지만, 다만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그것을 먹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그것들의 생명을 천대하지 않는 관념을 보수하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짐승의 피라도 천대하지 않도록 하셨으니, 피를 존중히 하는 사람들은 서로 해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므로 번성하게 될 것이었다.
(3)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이 되게 하시므로 인류를 번성케 하심(5-6). 우리 본문의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란 말씀은, 짐승이 사람을 죽였으면 그 짐승을 죽이도록 하신다는 뜻이다(출 21:28).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란 문구는, "사람에게서, 다시 말하면,그의 형제된 사람에게서"라고 번역해야 된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죽임이 된 사람의 생명 값을 찾으시되 그 죽은 사람의 형제(동생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같은 인류라는 의미), 곧, 살인자에게서 채으시겠다는 의미이다(Lange).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 이것은, 누가 사람을 죽이면 다른 사람이 개인적으로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살인자에 대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신 국법(國法)으로 사형 줄 것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이 귀절에 있는 사형 집행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집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政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국법에 의해서 살인자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 사람이 사적(私的)으로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금지한다(출 20:13).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은이니라 - 이 문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개인적으로 살해하지 못할 이유를 보여 준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지음 받았다는 말씀에 대하여는, 1:26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사람을 살해하지 못할 이와 같은 이유(하나님의 형상된 이유)는, 그야말로 사람의 가치가 너무 높아서 형용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캔들리쉬(Candlish)는 말하기를, "한 개인은 계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의 생명은 하늘과 영원의 표준에서 볼 때에 셀 수 없이 중요하다"라고 하였다(Therfore every living individual is of inestimable value; and his life, viewed in light of heaven and eternity, is beyond all calculation important. - Commentary on Genesis, Volume I, p.146).
창 9:8-11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들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로 더불어도 언약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하나님"(* )이란 말로 씌어 있다. "하나님"이란 성호는, 자연계에까지 관계된 능력의 하나님을 말함이다. 여기 "내가"(* )란 말은, 역설체(力說體)로서 하나님 자신이 솔선하셔서 언약을 베푸시고 그대로 실행하실 것을 보여 준다. 이 언약은, 상대방(인간편)에게 어떠한 협력 조건도 요구하지 않고 실시되는 것이니, 이것도 무조건적 긍휼로 성랍되는 것이다. 물론 이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에 의하여 모든 생명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이 세상에는 지역적으로 홍수 재앙이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 노아 시대의 홍수처럼 세계적으로 생명을 멸절시키는 일은 다시 없다.
창 9:12-15
여기서는, 하나님이 "언약의 증거"가 무엇임을 보여 주신다. 그것은 "무지개"이다. 이 부분에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구름 속에"두신다는 말씀이 세 차례나 나온다(13, 14, 16). 이렇게 그 말씀이 중복되는 것은 역설체로서, 그 언약의 확고부동성을 강조함이다. 이렇게 그는, 인종(人種)과 자연계를 이 앞으로는 보호하실 것을 강력히 약속하시며, 노아와 그 가족들을 위로하신다. 하나님께서 공의(公義)에 의하여 회개하지 않는 인류를 징벌하시되, 그는 이렇게 긍휼을 잊지 않으신다(합 3:2). "무지개"에 대하여 우리는 몇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1) 하나님께서 신령한 진리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자연물로 사용하신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런 교수법을 사용하신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시랑을 기억시키기 위하여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다(마 6:26-30).
(2) 무지개의 보편성. 무지개가 나타나면 사람들만 아니라, 모든 다른 동물들도 그것을 볼 수 있다. 이 현상은, 여기 관설된 언약이 사람과 및 짐승에게까지 관련된 것임을 알게 한다.
(3) 무지개는 아름답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기쁘고 아름다운 것임을 생각케 한다.
(4)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목을 이루어 주신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에게 주신 언약은 그 때에 절대로 필요하였다. 무서운 세계적인 홍수 재앙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거의 다 멸절되었는데, 이제 거기서 구출된 소수의 사람들의 마음에는 소망과 확신이 필요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자연계의 무서운 세력(비와 같은 것)이 언제든지 또 습격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안심과 발전의 소망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의 장래를 위하여 안전 보장의 언약을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홍수 이후에 인류의 문화 건설을 위한 새질서(新秩序)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현세에 있어서의 인류의 소망도 하나님께만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창 9:18,1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을 셈과 함과 야벱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 5:32, 6:10, 7:13, 10:1;대상 1:4 참조.
창 9:20-23
노아가....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 이 말씀은 노아의 실수를 가리킨다. 이렇게 성경은, 그 세대 중에서 가장 경건한 자의 실수도 거리낌 없이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정하다.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이 말씀은 "함"의 잘못을 지적한다. 함의 잘못은 무엇인가 ? (1) 아버지의 권위(權威)를 존중하지 않은 점과, (2) 성(性)문제에 대하여 염치(廉恥)를 가지지 않는 점이다. 그는 이와 같은 실수로 그 자손들에게 저주를 끼쳤다. 이것을 보면, "함"의 범죄가 얼마나 컷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회개하는 자를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함"의 자손들이 저주를 받은 것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의 자손에 대한 저주 선언은 하나의 예언이다.
셈과 야벱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덮였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 이 말씀과같이 "셈과 야벳"의 행동은, 그 아버지의 권위를 존중시하였고, 또한 성(性) 문제에대하여 염치 있게 처신하였다.
창 9:24-27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벱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노아의 이 예언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곧, (1) 가나안은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리라고 하였으니, 후대에 가나안족이 이스라엘에게 정복 당할 것을 의미하고, (2) 하나님을 "셈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셈족 곧, 이스라엘이 참 종교의 전파자가 될 거싱라가는 뜻이고, (3) "야벳을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리라고 하였으니, 이는 유럽의 백인들이 셈의 자손, 곧, 유대인들이 전한 그리스도를 믿고 축복 받을 것을 가리킨 예언이다.
이 예언은 실제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중심한 것이다. 그 후에 노아의 자손들이 각처에 퍼져서 나라들을 이루었다. 하나님께서 그 중에서 특별히 셈 족속을 택하여 한 나라를 이루게 하셨으니, 곧, 아브라함의 선택이다(11:10-32).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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