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8: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 "권념하사"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자카르(* )니, "기억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때까지 방주에 있는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시기에 전념하셨다. 그가 그들을 잊어버리신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기억한다는 말은, 이때까지 기억해 오시는 대로 지금도 기억하심을 의미한다. 그는 이렇게 그 택한 백성을 사랑하신다(사 49:15-16). 그와 반면에 그 때의 수다한 사람들은 홍수 속에서 죽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사랑하시지 않으신 까닭이 아니었다. 그는, 죄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겔 18:32).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들은 멸망을 당하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公義)때문이다.
우리 본문을 보면, "바람으로 ...물이 감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람에 의하여 물을 말리웠다는 의미가 아니고, 바람에 의하여 물을 바다 가운데로 이동(移動)시킨 것을 가르킨다. 그러므로 그 때의 홍수는, 비로 말미암아 된 것 뿐 아니라, 해일(海溢)로 말미암아 된 것으로도 생각된다. 이 사실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람이나 바다를 제재하셔서 인류를 해하지 못하게 하심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제재하시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그것들이 인류를 멸절시킬 수 있다.
창 8:4
칠월 곧 그 달 십 칠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 "아라랏산"은, 우랄투(Urartu)라고도 하는데 아루메니아(Armenia)에 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말하기를, 쿨디스탄(Kurdistan)에 있는 산이라고도 한다. 쿨디스탄(Kurdistan)은 메소보다미아 평원을 바라보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카스피안 해 남쪽에 있는 엘벌츠(Elburz)산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 산이 메소보다미아 지대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그 지대가 세계의 중심으로서 거기서부터 인류가 퍼지게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아라랏산의 초고봉은 해발 16,916피트(feet)라고 한다.
창 8:7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 노아가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어 보냈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은혜를 잊어버린 증거이다.
창 8:8,9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 들이고 - "비둘기가...방주로 돌아와" 노아에게 온 것은, 지면에 물이 있다는 소식을 전함이다. 비둘기는 깨끗한 새로서 이렇게 돌아와 노아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그것은, 은혜를 갚는 새라고 할 수 있다. 노아도 그것을 기뻐하는 의미에서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 들였다.
창 8:10,11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 이번에는, 비둘기가 그 입에 감람 잎사귀를 물고 왔다. 여기 이른 바 "새 잎사귀"란 말은, 홍수가 지나간 뒤에 돋아난 새 잎을 가리킨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의 새 출발을 가르키며 새로운 생명의 출발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을 본 노아는 말할 수 없이 기뻤을 것이다. 비둘기는, 저렇게 노아를 위하여 뜻 있는 봉사를 하였다. 그것이 몰고 온 새로운 감람 잎사귀는 노아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이 땅 위에 새로이 출발함을 깨닫게 한 것이다.
창 8:12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 비둘기는, 세 번째 방주 밖에 놓음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번에는 아주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돌아오지 않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제는 지면에 물이 말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에 방주 안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 하였을까! 아니 그보다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화급히 육지에 내려 갈 생각으로 불 붙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린 것이, 역시 신앙이다.
창 8:13,14
육백 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이월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 홍수 사건의 기록에 있어서 여기에 또 연대가 기입된 것은, 우리가 명심할 만하다. 이와 같은 기록은, 이 사건이 신화(神話)가 아니고 역사성을 가진 사건(事件)인 것을 보여 준다. 이 귀절 외에도, 홍수 사건에 관련하여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7:11, 8:4-5 참조.
창 8:15-19
이 부분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후 비로소 방주에서 나와 육지로 내렸다는 사실이다. 육지에 물이 마른 줄 알게 된(11절)그는, 벌써부터 방주에서 육지로 나갈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기다렸으니 그것이 그의 신앙이었다. 그는 이렇게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줄 알았다.
창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 여기서도 노아의 신앙이 나타나 있디. 그는 구원 받은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방주에서 나와 먼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 여기 "번제"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올라(* )니, "올라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올려바침을 의미한다. 노아가 이와 같이 제물을 바친 것은, 그것을 죽여서 바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가 단 위에 바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단"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미즈뻬카(* )니, 죽이는 곳을 의미한다. 이렇게 제물을 죽여서 바치는 법은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가르쳐 주신 바이며,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예표한 것이다. 구약시대에 이렇게 죽여서 바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하는 뜻 뿐으로서 그 때에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공로(功勞)로만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물을 드렸다. 짐승을 제물로 한 제사 그 자체가 공로는 될 수 없다.
창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 "향기를 흠향하시고"란 말은 비유적 표현이니, 하나님께서 신앙으로 드린 노아의 제물을 기쁘시게 받으신다는 뜻 뿐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앞으로는 땅에 저주하지 아니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가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단순히 그의 긍휼 때문이다. 시 103:13-14 참조. 죄대로 갚으신다면, 앞으로도 인간은 멸망을 받을 것 밖에 없다. 인간의 계획하는 바는 "어려서부터 악"하다.
창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연 법칙을 여전히 정상적(正常的)으로 운영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런 약속은, 모든 자연법칙을 폐지시킬 듯이 위협하던 홍수 뒤끝에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으로써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위안을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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