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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요한 계시록 2:1-7)

Ⅰ. 이 편지의 수신자에 대해 알아보자.

1. 첫 번째의 편지는 에베소 교회에 보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지고(행 19장), 나중에는 요한이 오랫동안 상주하면서 다스린 유명한 교회이다. 디모데가 그 당시의 이 교회의 담임 목사거나 감독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매우 우수한 인물이었으며, 백성들의 영혼을 훌륭하게 보살폈던 디모데가 이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퍼부었던 그런 비난을 받아 마땅한, 태만한 사람이 되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이 편지의 발신자에 대해 알아보자. 여기서 우리는 제 1장에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칭호들 중의 하나를 볼 수 있다. 그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있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걸어다니시는" 분이시다(계 1:13, 16).

이 칭호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고 있다.



(1) 그는 "오른손에 별을 쥐고 계시는 이"이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주님의 각별한 염려와 보호를 받고 있다. 별들의 수를 아시며, 별들을 각각 그 이름대로 부르시며,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시며, 삼성의 띠를 푸시는 것은"(욥 38:31) 하나님의 영광이시다. 그리고 별들이 세상에 대해 주는 축복보다도 더 큰 축복을 교회에 주고 있는 목사들이 주님의 손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시다. 주께서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지시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각자의 궤도를 따라서 돌게 하신다. 주님은 또 빛과 능력으로 그들을 채워 주시며, 그들을 돌봐 주신다. 그렇지 없으면 그들은 떨어지는 별의 신세가 된다. 그들은 주님의 손안에 들어 있는 도구이며, 그들이 행하는 모든 선은 그들을 쥐고 계시는 주님의 손을 향해서 이루어진다.

(2) "그는 금촛대의 사이를 거니신다." 다른 하나의 것이 목회자들과 주님의 관계를 말해 주는 것과 같이, 이것은 교회와 주님의 관계를 말해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친밀하신 방법으로 임재하시며, 그의 교회들에 대해 소상하게 알고 계신다. 주께서는 그들의 실정을 잘 아시며 또 언제나 주목하고 계신다. 사람들이 주님의 정원을 거닐 때 기쁨을 맛보는 것과 같이 주님은 교회들 사이를 거니시면서 즐거움을 느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하늘에 계시면서도 땅에 있는 교회들의 잘못이 무엇이며,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주시하시면서, 그것들 사이를 거닐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를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 주 예수께서는 그의 손바닥 위에 그 교회들의 이름들을 새겨놓고 계신다.

Ⅱ.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다음에 나오는 교회들에게 보내는 것도 대개 비슷하다.

1. 그리스도께서 이 에베소 교회와 목사들, 그리고 신도들에게 하신 칭찬의 말씀이 있다. 주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하시는 칭찬과 비난은 엄숙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생각 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알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에 에베소 교회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1) 그들이 책임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를 아노라"(2절). 이는 많은 수고를 하며 매우 부지런하였던 이 교회의 목사들과 관계가 있는 말씀이다. 권위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그리스도의 손안에 있는 별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나누어주기 위해 항상 활동할 필요가 있다.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3절).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그를 위해 일하는 종들의 수고를 알고 계신다. 따라서 "그들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는다."

(2) 고난 속에서의 그들의 인내 때문에 에베소 교회는 칭찬을 받았다. "너 수고와 네 인내를 … 아노라"(2절). 우리들이 부지런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서 우리는 고난을 참고 견디어야 하며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목사들은 많이 참아야 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인내가 없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의 모욕과 하나님의 책망을 견디기 위해서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어떤 시련이 있을 때에는 "네가 참고 견디었노라"(3절)는 약속의 말씀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그러한 어려움을 겪어야 할 것이며, 인내가 요청되는 일을 부지런히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

(3)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이 악한 자들과 맞서서, 그들의 거짓을 드러낸 열심을 칭찬하셨다.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절). 이 말씀은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며, 더욱이 죄를 용납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끈기와 잘 일치하는 말씀이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온유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그들을 꾸짖는 정당한 열의를 나타내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그들의 열의 때문에 보다 많은 칭찬을 듣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는 허위와 음모, 악인들의 교리에 대한 신자들의 시련 즉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이란 그리스도인의 분별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열심이란 신중성에서 비롯된다. 그 어느 누구도 시험받기 전에는 버림을 받아서는 안 된다. 어떤 이는 자기가 보통의 목사가 아니라, 사도라고 주장하면서 이 에베소 교회에서 행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허위를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사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드디어 그 진실을 알게 된다.

2. 이 교회에 대해 책망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4절), 좋은 점을 많이 가진 자는 또한 그 만큼 잘못된 점도 많이 가질 수 있다. 따라서 공정하신 주님이시며 심판자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다 주시하고 계신다. 비록 주님께서 먼저 좋은 것을 보시고, 이에 대하여 언급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또한 잘못된 점들을 주시하고, 그것들 때문에 그들을 엄하게 책망하시기도 한다. 주님께서 이 교회에 대해 책망하신 그들의 죄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그들의 사랑과 열심히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사랑과 열심 그 자체에서 떠나거나, 그것들을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처음에 나타내었던 사랑의 강렬한 정도를 잃었다는 것, 즉 열의가 전보다 식어졌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1) 사람들이 그리스도, 거룩한 것,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해 품었던 첫사랑은 대개 활기가 넘치며 뜨거운 것이다. 하나님은 남편이 어디로 가든지 그를 따르고자 했던 이스라엘의 신부들의 사랑을 기억하셨다.

(2) 이러한 활기에 넘친 사랑이 부단히 계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생동적인 사랑이라도 쉽사리 약해지며 냉냉해진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나태해지며, 자기에게 대하여 냉정해지는 것을 볼 때, 그의 백성들에 대해 애통해 하시며, 서글프게 생각하신다. 그리고 주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이 그들을 좋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신다.

3.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충고의 말씀을 내려 주셨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라."

(1) 그들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디서 그것이 떨어져 나갔는지 생각해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그들의 현재의 실정과 과거의 실정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때가 지금 보다 얼마나 더 좋았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또 그들이 그들의 처음 사랑을 떠남으로 얼마나 많은 평강과 능력과 순결과 즐거움을 잃었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밤에 누워서 얼마나 아늑하게 잠을 잘 수 있었으며- 그들이 아침에 얼마나 상쾌하게 깨어날 수 있었으며- 어떻게 굴욕을 견딜 수 있었고,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합당하게 즐길 수 있었으며- 죽음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수월한 것이었으며, 하늘나라에 대한 그들의 욕망과 소망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해 내야 한다.

(2) 그들은 회개해야 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부터 그들의 죄많은 타락을 애통해야 하며, 이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책망해야 하며,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하고, 그것 때문에,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자백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 스스로를 판단하고 책망해야 한다.

(3) 그들은 돌아와서 처음 행위를 다시 찾아서 행하여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하며, 그들이 맨 처음 발을 헛디뎠던 곳까지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되돌아가야 한다. 그들은 맨 처음에 가졌던 열심과 양순함과 성실함을 회복시키며 그것들을 되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길에 들어서서, 그들이 맨 처음에 드리던 것과 같이 진정으로 기도하며, 성실히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4. 주께서는 이런 좋은 충고의 말씀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하셨고, 재촉하셨다.

(1) 주님의 말씀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신 혹독한 위협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강요하고 재촉하셨다. 만일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존재를 무시한다면, 주께서는 우리를 매우 분히 여기시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주님은 회개하지 않은 교회와 죄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갑자기 그리고 놀라웁게 임하시사 교회의 특권 등을 박탈할 것이며, 그들로부터 복음의 말씀과 목사들과 예배 의식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복음의 말씀을 거두어 가신다면, 교회와 교회의 사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2)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6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그들 중에는 그래도 아직 선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격려의 말씀을 들려 주셨다. 이 말은 곧 "비록 너희들이 사랑에 있어서는 선하다고 할 수 없지만, 악을 증오하는데 있어서는 잘하였다"는 말이다. 니골라당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자신들을 위하는 불실한 종파였다. 그들은 가증스러운 교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악의에 가득 찬 죄를 짓고 있었고, 그리스도와 모든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하여는 증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였다. 사악한 교리와 음모에 대하여 바른 투기와 혐오심을 가지고 있었던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을 주님은 잊지 않고 언급하셨다. 진실과 과오, 악과 선에 대해 무관심한 심령을 두고 사람들은 "자비로운 마음" 또는 "온후한 마음"이라고 일컬을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마음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우리의 구속주가 되시는 주님은 자기의 충고의 말씀이 보다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그처럼 가혹한 위협의 말씀에, 이상과 같은 온후하신 칭찬의 말씀을 덧붙여 주셨다.

Ⅲ.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씀이 계셨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1) 이 말씀은 곧 성서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뜻이다.

(2) 어느 한 교회에 하신 말씀은 곧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있는 모든 교회들과 관련이 있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3) 우리의 청력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청력은 잃어버려도 무관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청력을 가지지 못하기를 바라고 싶다.

2.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커다란 은혜의 말씀이 계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와 사탄, 세상 그리고 육에 대한 싸움이다. 우리는 다만 이러한 싸움을 싸우기만 하는 것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리는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적에게 굴복 당해서는 안 되며, 앞서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승리를 얻은 것같이, 우리도 승리를 얻기까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그리하여 싸워서 승리하는 자는 영광스러운 개선과 보상을 받게 된다. 여기서는 싸움에 승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졌다. 그들은 아담이 그의 시련의 과정을 잘 극복하였다면 얻을 수 있었던 거룩함의 완성과 그 확실함을 받게 될 것이다. 잘만하였다면 아담은 낙원 한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는 계속해서 거룩하고 행복된 상태를 유지하리라는 보증을 확약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시련과 싸움에 이기는 자들은 이 지상의 낙원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완전하고도 학실한 거룩함과 행복된 생명 나무와 같이 길이 보호함을 받을 것이다(계 22:1, 2).

 

2:2 없음.

 

2:3 없음.

 

2:4 없음.

 

2:5 없음.

 

2:6 없음.

 

2:7 없음.

 

2:8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 (요한 계시록 2:8-11)

우리는 아시아에 있는 다른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를 계속해서 살펴보게 되었다.

Ⅰ. 서론이라고 할까 또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두 곳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 누구에게 이 편지가 직접 전달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서두가 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가는 것이었다. 서머나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상인들에 의해서, 큰 무역의 중심지요, 부요의 도시였던 것으로 유명한 도시였으며, 아마 일곱 도시 중에서, 유일하게 오늘날까지도 같은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회교에 의해 정복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의 존재는 조금도 돋보이지 못하게 되었다.

2. 여기에는 우리 주님의 또다른 영광스러운 칭호를 보여 주고 있는 설명이 있다. 그것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는 것인데 이 칭호는 1장 17,18절에서 온 것이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이요 나중"이시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 인간들에게는 아주 극소한 분량의 시간만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구속주 되시는 그리스도는 처음이요 나중이시다. 그는 처음이시다. 왜냐하면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음 받았고, 그리고 그는 만물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계셨는데 이는 곧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이시다. 왜냐하면 만물은 그를 위하여 지음 받았고, 그는 만물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실로, 영원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칭호이시다. 그리고 그것은 변함없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는 분에게 돌릴 칭호이시기도 하다.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다. " 그는 처음이시었다. 왜냐하면 교회가 처음에 그에 의해서 기초가 놓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나중이시다. 왜냐하면 시간이 종말을 고할 때, 그에 의해서 그 마지막 마무리가 맺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시다. 그는 죽었었는데,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던 것이다. 그는 살아나셨다. 그는 죽으셨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성취되었다. 그는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사심으로 이러한 구원이 우리의 구원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5:10). 우리는 성찬을 받을 때마다 그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매 주일마다 그의 부활과 생명을 기억한다.

Ⅱ.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들과 특히 그의 교회들이 행한 바에 대해 완전히 아신다고 하는 그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한 일반적인 선언과 함께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의 핵심 즉 다음과 같은 점들에 대해 그가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을 밝혀 주셨다.

1. 그들이 이룩한 영적인 성장에 대해 아노라고 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짧은 삽입구 모양으로 표현되었지만, 그러나 매우 힘이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3절). 물질 면에서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한 자이며--마음은 가난하나 은혜는 부요한 자이다. 그들의 영적인 부요는 그들의 외적인 빈곡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물질에 있어서 부요한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는 가난하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런 교회였다. 때로는 외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내적으로는 부요하며, 믿음과 선한 행위에 있어서 부요하며, 그 특권과, 은혜의 선물, 소망 그리고 상속할 재산이 부요한 경우가 많다. 영적인 부요는 흔히 부지런히 수고한 보상으로 얻어진다고 "부지런한 손이 부요를 이룩한다. "영적인 부요가 있는 곳에서는 외적인 빈곤을 잘 감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리고 선한 양식 때문에 물질상의 어려움을 겪게 되면 그들은 영적으로 부요한 자들이 되며, 그러한 영적인 부요가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것이며, 또 오래 지속되는 것이기도 하다.

2. 그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을 아신다고 하셨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기까지의 핍박을 당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모든 환난을 특히 주목하고 계신다. 그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중에 그리스도께서도 고난 당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그러한 고난을 갚아 주시며, 고난을 당한 자들에게는 그의 품안에서 쉿 수 있는 안식을 주실 것이다.

3. 그는 그들의 대적들의 악독함과 거짓됨도 아시고 계신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이미 버렸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계약 관계를 맺고 있는 백성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잘못 자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또는 지금은 낡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폐기된 그러한 유대인의 관습과 의식을 그대로 고집 하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이 실상은 "사단의 회"인데도,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할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적인 이스라엘로서의 교회를 이 세상에 가지시고 계신 것같이, 사단 역시 그의 회를 이 세상에 두고 있다. 세워진 복음의 진리에 거슬리기 위해 세워진 회합, 그리고 가증스러운 잘못을 조장 또는 선동하는 모임--복음적인 예배의 순수성과 신령함을 모독하기 위해 세워진 회합,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인간의 날조된 관습과 의식을 조장 또는 선동하는 모임--하나님께 때한 참다운 예배와 예배자들을 모욕하고 핍박하기 위해서 세워진 모임 등, --이런 모든 회합과 모임이 곧 사단의 회이다. 사단이 그 모임을 주장하며, 그 모임을 통해 사단이 일하고, 그들을 통해 사단은 자기 만족을 누리고 있고, 사단은 그들로부터 무시무시한 공경과 영광을 받고 있다.

(2) 사단의 회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교회 또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일컫는 것은 신성 모독이다. 사단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더럽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성모독을 분히 여기시사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빠른 보복을 내리실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당할 앞날의 시련을 미리 아시고, 이에 대해 미리 경고하심으로, 그들에게 미리 대비시키신다.

(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의 시련에 대해 미리 경고하신다.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라"(10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여러 고비의 시련이 계속 몰려 올 것이며, 그 고난의 도가 점점 더 높아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전에 있었던 시련으로 이미 약해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옥에 갇혀야만 하게 되었다. 마귀는 그의 수하인 악인들을 충동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게 한다. 폭군과 핍박자들은, 그들 스스로는 자기들의 적개심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마귀의 도구 노릇을 하고 있으며, 사단의 악의에 의해 총동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임박한 환난에 대해 미리 대비시켜 주신다.

[1] 그는 이런 말씀으로 권면하신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이것은 단지 명령의 말씀뿐만이 아니라 힘을 북돋아 주는 말씀이기도 하며, 아마 노예적인 공포심을 금하게 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으로 하여금 힘과 용기를 갖추도록 격려하여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당할 고난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를 보여 주셨다.

첫째, 그것은 전체적인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들 가운데서 옥에 갇히는 자는 전부가 아니라 그 중의 일부라고 하셨고, 따라서 옥중에 갇힌 자들은 그 남은 사람들의 방문과 위로를 통해 힘을 얻음으로 능히 그 고난을 참아낼 수 있다고 하셨다.

둘째, 그들은 영원히 옥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시간,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영원한 시련이 아니다. "택하신 자들을 인하여서 그 기한이 짧아질 것이다. "

셋째, 그 시련은 그들을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 인내, 그리고 용기가 과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가 아닌가를 시험하기 위한 것임을 알려 주셨다.



[3] 그들이 충성하면 영광스러운 보답을 내려 주신다고 제안하시고 약속하셨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첫째, 그 보상은 확실한 것이다. "내가 네게 주리라." 주께서는 그가 하실 수 있는 말씀들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가 하시고자 하신 일은 반드시 그대로 실행하셨다. 그들은 주님이 직접 내리시는 보상을 받을 것이며, 그들의 원수는 아무도 그것을 주님의 손에서부터 빼앗을 수 없으며, 그들의 머리로부터도 빼앗아 갈 수 없다.

둘째, 그 보답이 매우 적절한 보답이란 것을 보여 주셨다.

a. 그들의 빈곤, 그들의 충성, 그리고 그들의 분투 노력에 대해서 "면류관"이 보답으로써 약속되었다.

b. 죽기까지 충성하는 자, 죽어도 충성을 버리지 않는 자, 그리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된 것은 매우 적절한 보답이다. 그를 섬기거나 또는 그를 위해 목숨을 다 바친 사람에게는 다른 세상에서 그보다 훨씬 더 좋고, 또 영원히 계속되는 귀한 생명을 상급으로 받게 된다.

Ⅲ. 먼저의 편지와 같이 여기에도 결론 부분이 나온다.

1. 온 인류와 온 세상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들 사이에 주고받은 바를 귀 기울여 들으라고 하는 우주적인 부르심이 있다.--다시 말해서 주께서 그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셨으며, 주께서 그들을 어떻게 위로하셨으며, 주께서 그들의 실수를 어떻게 책망하셨으며, 주께서 그들의 충성에 대해 어떤 상급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는가를 들어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문제는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이다. 이로써 온 세상은 지식과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2. 승리하고 정복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혜로운 약속의 말씀이 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혀를 받지 아니하리라"(11절).

(1) 육체의 죽음이 있은 뒤에도 인간에게는 첫 번째 뿐만 아니라 두 번째의 사망도 있다.

(2) 둘째 사망은 첫째 사망보다 극도로 더 처참한 죽음이다. 죽어가는 자의 단말마의 부르짖음이 끊임없이 들려온다(그것은 아무런 도움을 받을 길이 없는 영혼의 처절한 절규이다). 그리고 그 기간도 "영원한 죽음"이다. 언제나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끊임없이 죽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죽음을 당하는 자는 정말로 비참하다.

(3)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비참한 죽음으로부터 그의 모든 충성된 종들을 지켜 주신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둘째 사망이 아무런 맥을 추지 못한다. 첫째 사망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며, 둘째 사망도 그들을 지배할 수 없다.

 

2:9 없음.

 

2:10 없음.

 

2:11 없음.

 

2:12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 (요한 계시록 2:12-17)

Ⅰ.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의 제목에 대해 살펴보자.

1. 이 편지의 수신인은 "버가모 교회의 사자"이다. 버가모는 "신 트로이(런던도 한때는 그렇게 일컬어졌던 것과 같이)라고 하며, 옛 트로이의 폐허 위에 재건된 도시였는지, 혹은 같은 이름의 다른 도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버가모는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고 또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시사 복음적인 교회를 세우게 하신 곳이다.

2. 버가모 교회에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여기서 그 자신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1:16),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이"라고 하신 바로 같은 예수님이시다. 각각의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앞부분에서 일컬어진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칭호들은, 각각 그 교회의 상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이 있다. 에베소 교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잠에 취해 타락해 가고 있는 교회를 일깨우고, 바른 길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는 "손에 별들을 붙잡고,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 이상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없다. 버가모 교회에는 타락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의 신앙과 풍습을 타락시키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의 검으로 그들과 대항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 자신의 칭호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라고 하셨다.

(1) 하나님의 말씀은 검이다. 그것은 공격과 방비를 겸할 수 있는 무기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죄와 죄인들을 모두 베어버릴 수 있다.

(2) 그것은 "날선 검"이다. 그 검으로는 아무리 굳은 마음도 찔러서 상처낼 수 있다. 아무리 단단하게 묶은 매듭이라도 짤라낼 수 있다. 그것은 혼과 영을 구분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혼과 어떤 관습들로 인하여 다른 영혼처럼 되어버리거나 또는 매우 중요한 요소처럼 보이는, 그런 죄된 습성을 분리시킬 수 있다.

(3) 그것은 "좌우에 날선 검"이다. 그것은 상하 좌우 어느 쪽으로도 찌를 수 있다. 거기에는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찌를 수 있는 율법의 "칼날"이 있으며, 복음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찌를 수 있는 복음의 "칼날"도 있다. 거기에는 찔러 상처를 낼 수 있는 칼날이 있고, 그리고 곪은 상처를 파헤쳐서 낫게 할 수 있는 칼날도 있다. 이 칼날에서 피할 수 있는 곳이란 없다. 오른쪽으로 피해도 거기에 칼날이 있고, 왼쪽으로 피해도 거기에 역시 칼날이 기다리고 있다. 그 칼은 어느 방향으로도 찌를 수 있다.

Ⅱ. 제목 부분에서부터 편지서의 본론 부분으로 옮겨갈 수 있는데, 이러한 방법은 다른 나머지 모든 서신에서도 같다.

1.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가 당하고 있는 시련과 어려움에 대해 주목하고 계신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라"(13절). 하나님의 종들의 수고와 노력은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그런 수고를 했는가를 바르게 이해할 때 더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이 버가모 교회의 선한 활동에 대해 그 광채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이 교회가 세워진 고장의 그 환경 때문인데, 그 곳은 다름 아닌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었다. 우리의 위대하신 주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에서의 우리가 얻는 모든 이점과 기회를 주시하고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에서 우리가 또 당하고 있는 모든 시련과 낙심의 조건들 역시 주시하시면서, 그것들을 크게 참작하여 주신다. 버가모의 교인들은 사단의 위가 있으며, 사단이 세력을 뻗치고 있는 곳에서 살았다. 사단의 "통치권"은 온 세상에 미치고 있었으며, 그의 "위"는 사악과 과오와 잔악함 때문에 악명이 높은 고장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도시의 로마 집정관은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적대시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의 핍박의 자리가 곧 사단의 자리였다.

2. 주께서는 그들의 견실함을 칭찬하셨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고,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 이 두 가지의 표현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아마 결과를 의미할 것이요, 그리고 후자는 원인 또는 그 방법을 말할 것이다.

(1) "너는 내 이름을 굳게 잡았다. 너는 나와의 관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이름으로 너희가 일컬어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아내가 남편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것같이 너희도 나의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이것을 너희는 너희의 영광과 특권으로 굳게 붙잡고 있다. "

(2) "너희를 이처럼 충실하게 한 것은 믿음의 은혜이다. 너희는 복음의 위대한 교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였으며, 기독교의 신앙에서도 떠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너희의 믿음을 굳게 지켰다. "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충실한 신앙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도 그들의 성실함, 그리고 하나님과 양심에 대한 충실함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나름대로의 충실한 신앙을 유지하려고 하는 이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을 파선시키는 암초 위에 그들의 선한 양심 역시 파선시킨다. 그런데 우리의 은혜로우신 주님은 그들이 살았던 장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살았던 시대적인 환경에 대해서도 그들의 신앙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교회의 충실성을 증진시켜 주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그들 가운데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그들의 신앙을 충실히 지킬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누구이며, 그의 이름에 어떤 애매한 점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다. 하여간 안디바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였으며, 그것 때문에 순교를 당했고,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그의 믿음과 충성을 그의 피로 보증하였다. 그리고 그 곳에 살았던 다른 나머지 신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보았지만, 그들 역시 그들의 용기를 읽거나 그들의 성실함을 저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것이 그들의 명예에 대해 추가해서 언급된 치하이다.

3. 주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태만을 책망하셨다(14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그리고 네게도 내가 미워하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들 가운데는 우상에게 받쳐졌던 제물을 먹는 것이 율법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며, 단순한 간음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것처럼 부도덕한 예배를 통해 그들을 부도덕한 생활로 유인하는 자들이었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자.

(1) 때로 영적인 불결과 육체적인 불결이 공존한다. 때로 타락한 교리와 타락된 예배는 타락된 교제로 사람들을 이끌고 간다고

(2) 이단사설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그들의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손쉽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타락된 교리와 행동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계속 사귐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것이며, 온 세상을 죄로 물들게 하는 처사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동참하는 자들이" 된다고 비록 교회가 그러한 이단 사설에 빠졌거나, 부도덕한 생활을 하고 사람들에 대해 육체적인 형벌을 내릴 권리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교회의 사귐에서 추방할 권리는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법을 정해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그것 때문에 노여워하실 것이다.

4. 주께서는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16절).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살펴보자.

(1) 회개란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은 복된 의무이다.

(2) 회개는 또 개개인의 의무인 동시에 교회와 공동체의 의무이기도 하다. 함께 죄를 범한 자들은 함께 회개하여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죄를 범한 사람들이 어떤 묵인 아래 그들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한 그러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회개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4)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의 타락된 지체들을 벌하실 때에는 그 교회가 그러한 자들과의 교제를 계속하는 것 때문에 그 교회 전체를 책망하시며, 온 사회에 대해 그의 책벌의 소나기를 쏟아 부어 주신다.

(5)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점 이상으로 깊은 상처를 내며, 치명적인 손상을 주는 점이 또 없다. 말씀의 위력을 가지고 죄인들의 양심을 찔러 줄 수 있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 죄인은 자신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위협이 실현되면 죄인들은 도리어 멸망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검은 조만간에, 그들에게 확신을 주든지 또한 혼란을 가져오게 하든지 하기 위해 죄인들을 붙들고 계신다.

Ⅲ. 이 편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주적인 경각심을 환기시킨 뒤에는, 이기는 자에게 줄 커다란 은총이 약속되었다.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이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17절).

1. 감추어진 만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서 얻어지는 그리스도의 영이 주는 영향과 위로는 시시각각으로 땅에 사는 인간들을 돕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늘에 사는 성도들과 천사들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을 땅에 사는 성도들이 미리 맛보게 하여 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만나가 감추어져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기쁨에 동참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만나는 지성소 가운데 있는 언약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

2. 흰 돌 위에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 흰 돌은 죄의 허물로부터 놓임을 받게 된 것을 말한다. 고대의 관습에서 형벌을 면제받게 된 사람에게는 흰 돌을, 형벌이 선고된 사람에게는 검은 돌을 준 것에서 유래되었다. 새 이름이란 양자로 들어가게 된 가정 즉 양가(養家)의 이름이다.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 사람은 그 양가의 성을 따라야 한다. 그 자신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가 양자로 들어간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그 사람도 언제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참고 견디면 그가 아들이 된 것과 상속자가 되었다고 하는 그 증거를 알게 될 것이다.

 

2:13 없음.

 

2:14 없음.

 

2:15 없음.

 

2:16 없음.

 

2:1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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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 (요한 계시록 2:18-29)

모든 편지들의 구성이 거의 같다. 따라서 다른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편지에서도 편지의 서두, 내용, 그리고 결론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Ⅰ. 서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1. 수신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이 편지는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다. 두아디라는, 북으로는 무시아와 그리고 남쪽으로는 무역의 고장 루디아와 인접하고 있는, 로마 총독이 관할하고 있는 아시아의 한 도시였다. 특히 루디아는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사업상 그 곳을 방문하였다가 "바울의 설교를 듣는 중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바울과 실라를 환대한 자주 장사 루디아의 고향이다. 그녀의 고향인 두아디라에 그녀가 복음을 전파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고장에 복음적인 교회가 성공적으로 세워졌다고 하는 것은 이 편지를 볼 때 확실하다.

2. 편지를 보낸 사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편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보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묘사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그의 총괄적인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독생자이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가지셨지만, 동시에 별개의 것이면서도 종속적인 삶의 양태를 가지고 계신 분임을 보여 준다고 그에 대한 여기의 표현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 불꽃과 같은 그의 눈은 그의 투시력과 완벽한 지식, 모든 사람과 사물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나타내며, 그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23절)이심을 보여 주며, 그가 그런 분이심을 모든 교회들에게 알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2) 빛난 주석과 같은 그의 말은 그의 섭리가 확고하고, 장엄하게 그리고 순결하고 거룩하게 시행된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준다. 그가 온전한 지혜를 가지고 심판하시는 것처럼, 그는 온전한 능력과 견고한 힘을 가지고 활동하신다.

Ⅱ. 다른 편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편지의 내용 또는 핵심 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이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명예로운 품성과 칭찬의 말씀이 있다. 그들에게 이러한 칭찬을 주신 분은 그들에게 대해 결코 낯설지 않으며, 그들 자신들과 그리고 그들이 취한 행동의 원칙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 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칭찬할 점들에 더해 언급하셨다.

(1) 그들의 "사랑"에 대해 아신다고 하셨다. 그들의 사랑이란,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었을 것이며, 보다 특별한 의미로는 믿음의 식구들에 대해 행한 것을 말할 것이다. 사랑이 없는 곳에 신앙도 있을 수 없다.

(2) 그들의 "섬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들의 목회적인 섬김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말씀과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수고한 교회의 임원들에게 주로 해당되는 말이다.

(3) 그들의 "믿음"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이것은 다른 나머지의 것들, 즉 그들의 사랑과 섬김이 가능하게 하였던 은혜이다.

(4) 그들의 "인내"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사랑하며, 부지런하며, 충실한 사람들도 아직도 그들에게 인내심을 길러 주는 사건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5) 그들이 점점 더 성숙해 가고 있는 것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그들의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 보다 좋다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의 훌륭한 성품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첫 사랑을 버렸고, 처음 열심을 잃어버렸는데, 이 사람들은 점점 더 지혜로워지며, 훌륭해지고 있었다. " 그들의 나중 일이 그들의 가장 좋은 일이 됨으로 그들은 매일매일 보다 더 훌륭하게 되고, 그들의 최후의 것이 가장 최선의 것이 되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사모해야 한다.

2. 잘못된 일에 대한 성실한 견책의 말씀이 있다. 이러한 견책은 교회 자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퍼부은 것이 아니고, 그들 가운데 있는 악독한 유혹자들에 퍼부은 것이었다. 교회의 잘못은 그들에게 지나치게 너그러웠다는 점이다.

(1) 이 아득한 유혹자들은 이세벨과 같은 여자로 간주되어, 그녀의 이름을 그들에게 붙였다.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핍박하였고, 우상을 섬기는 자와 거짓 선지자들을 크게 도와 준 여자였다. 이런 유혹자들의 죄는 하나님의 종들을 간음죄에 빠지도록 유혹한 것과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미혹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선지자라고 했고, 교회의 목사들 보다 훨씬 더 굉장한 권위가 있다고 선전하였다. 두 가지의 것이 그들의 죄를 가중시켰다. 그들은 그들의 정신과 의도가 같았음으로 마치 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리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반대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죄를 더 가중시켰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잘못 이용하여 그들의 악행을 더욱 굳게 하는데 이용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첫째, 회개는 죄인의 멸망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

둘째, 회개에는 시간, 어느 정도의 시간 즉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매우 위대한 일을 한다.

셋째,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하나님은 회개의 열매를 기대하신다.

넷째,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죄인은 이중적인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2) 그런데 두아디아 교회가 왜 이러한 이세벨의 잘못 때문에 책망을 받아야 할까? 왜냐하면 두아디라 교회가 그 여자로 하여금 그 도시의 백성들을 미혹하도록 용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그런 일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교회로서 그들은 그 여자를 벌주거나 옥에 가둘 수 있는 공적인 권리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여자를 책망하거나 파문시킬 수 있는 치리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그들이 사용하지 않음으로, 그 여자의 죄에 가담한 결과를 가져 온 것으로 보인다.

3.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 이세벨에 대한 징벌이 기록되어 있다(22,23절). 즉 바벨론의 멸망과 같은 멸망이 예언되었다.

(1)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라고 하셨는데, 그 침상은 안락한 침상이 아니라, 고통의 침상이며, 불꽃의 침상이다. 그리고 그 여자와 더불어 죄를 범한 자들도 그 여자와 함께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면 그것은 징벌을 미리 막을 수 있다.

(2)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라고 하셨는데 말하자면 둘째 사망이다. 그것은 결정적인 죽음이며, 다시는 생명의 가망이 전혀 없는 죽음이며, 부활의 소망도 없고, 오직 영원한 수치와 멸시만 있을 따름이다.

4. 이런 악독한 미혹자를 멸하시는 그리스도의 계획은 오직 다른 사람도, 특히 그의 교회를 교훈 하시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이 있다.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하나님은 "그가 행하시는 심판으로" 그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리고 이러한 미혹자들에게 보여 주는 보응으로써 아래와 같은 사실을 또한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

(1)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교리, 계획, 구조와 기질, 격식, 그들의 무관심 그리고 우상 숭배에 기울어지는 그들의 은밀한 경향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벽하신 지식을 나타내신다.

(2)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그리스도의 공정한 심판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며, 비록 교회라 할지라도 죄지은 자들에게는 그들의 보호처가 될 수 있는 성역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5. 스스로를 정결하고 순결하게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격려의 말씀이 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24절).

(1) 이 미혹자들은 자기들의 교리를 "깊은 것" 즉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심오한 신비라고 했으며, 목사들보다도 오히려 신앙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사탄의 깊은 곳" 즉 사탄의 미혹과 악독 그리고 악마적인 비법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경건한 자들의 위대한 신비"(mystery)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자들의 신비"(mystery)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멸시하는 것은 위험한 노릇이다. 그리고 사탄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한 노릇이다.

(3) 그의 충성된 종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온유하심을 보여주셨다. "다른 짐으로는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4,25절). "나는 어떤 새로운 신비(mystery)을 가지고 너희의 신앙을 더 무겁게 하거나, 어떤 새로운 법을 가지고 너희의 양심을 무겁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너희가 이미 받은 바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켜 주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올 때까지 그것을 굳게 붙잡아라. 나는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 "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미혹을 더 이상 받지 않도록 끝내 주려고 오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들의 굳건한 신앙과 선한 양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지키고 있으면, 모든 난관과 위험은 주목될 수 있다. "

Ⅲ. 이제는 이 메시지의 결론 부분을 살펴 볼 때가 되었다(26-29절).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1. 참고 끝까지 견딘 승리의 신도들에게 줄 보상의 약속이 두 가지로 제시되었다.

(1) 다른 모든 세계를 다스리는 매우 위대한 힘과 지배력을 약속하셨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현세에서, 콘스탄틴 황제때와 같이, 황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계가 그리스도인 황제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고, 또 다른 세계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의 보좌에 앉아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원수들에게 형벌을 선포하고 또 부과시키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올바른 자들은 아침에 왕노릇하리라."

(2) 그와 같은 권세자들에게는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노라." 그리스도는 새벽별이시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루의 광명을 가져다주시며, 은혜와 영광의 빛을 가져다주신다. 그리고 그들이 부활의 아침에 누리게 될 통치권과 위엄의 자리에 어울리는 빛과 지혜를 온전케 하여 주실 것이다.

2. 이 편지서도 다른 편지서와 같이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이 편지서 보다 앞서 나온 편지서들에서는 이러한 명령이 결론적인 약속 보다 앞에 나온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편지서들에서는 이러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명령이 약속의 뒤에 나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교회들에게 주신 권고에 말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약속의 말씀에도 주목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2:19 없음.

 

2:20 없음.

 

2:21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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