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에 대한 분별 (요한 1서 4:1-3)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우리와 함께 거하심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려질 수 있음을 말한 다음부터 성령은 식별되고 구분되어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Ⅰ. 사도 요한은 성도들로 하여금 영들과 한참 성행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계와 세심한 조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1. 조심할 것을 이르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라. 하나님의 영에 대해 가식적인 것을 취하고 있는 모든 영들에 대해 또는 환상, 영감, 혹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모든 신앙 고백자들을 관심도 두지 말고 믿지도 말며 따르지도 말라." 진리는 허위와 거짓에 대한 반증이 된다. 진리는 언제나 성령과 더불어 참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은 이에 반(反)한다. 비록 악용되어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와 선하신 방법을 취하신다. 비록 다른 자들이 마치 동일한 자격을 가진 것처럼 심히 교만하고 악할지라도 하나님은 세상의 영감을 받은 선생들을 보내셨으며, 우리들에게 초자연적인 계시를 나타내 주셨다. 성령과 영감을 빙자한 모든 거짓된 것과 이에 대한 어떠한 해명도 믿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악을 행한 경우는 영적인 사람이 패역해 있을 때였다(호 6:7).2. 세심한 조사를 해야 한다. 성령께서 요구하시는 바인가를 시험해야 한다.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1절).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러나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가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 믿을 만하고 신뢰할 수 있는 영을 따르며 거짓과 참을 식별하는 자들에게만 성령을 허락하신다. 이성은 이러한 식별을 위해 주어졌다.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왔음이니라"(1절). 구세주의 강림의 시기에 대한 많은 기록이 세상에 나타나 있는데 이스라엘의 구속자에 대한 유대인 중의 일반적인 기대와 구속자가 받는 치욕과 정신적인 혁명, 그리고 그의 고난은 구세주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예견하신 대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선지자와 메시야로 행세하였다(마 24:23, 24). 거짓 선생들이 교회에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러한 현상은 사도 시대에도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미혹의 영이었으며 그들 자신이 선지자와 영감받은 전도자로 자처하며, 큰 소리를 쳤으니 어찌 용납될 수 있겠는가?
Ⅱ. 사도 요한은 제자들이 이러한 거짓 영에 대한 시험을 시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거짓 영들은 선지자와 의사, 그리고 신앙의 군주로 군림하는데, 그들은 스스로 교리를 만든다. 사도 요한이 살고 있던 당시의 시험은(여러 시대 여러 교회에서 시험하는 기준이 다양하다) 이러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2절), 즉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영원한 생명, 그리고 말씀으로써 고백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유한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나중에는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당하셨다. 신앙적으로 단련되어지고 교화된 마음으로써 이 사실을 고백하고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이를 행한 것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알게 하신 주동자가 되신다. 이와 반대로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3절). 비록 지금은 하늘에 계실지라도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우리의 몸과 동일한) 이 세상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은 많은 증거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증거를 보여 주심은 이에 상반되는 어떠한 충동이나 거짓 영감은 모두 하늘이나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계시종교의 전모는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 그리고 사명에 대한 설명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명에 대한 더욱 악화된 조직적인 반대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세상에 있느니라"(3절). 적 그리스도의 출현과 그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그의 진리를 대적하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알려 주신 바다. 또한 유력한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 영광을 대항하는 세상에서의 장기간의 지루한 싸움이 있을 것이 예언되었다. 무서운 적 그리스도는 그의 길을 예비하게 되며 그의 도래는 그의 보다 작은 적 그리스도들과 그를 위해 사람들의 마음에 악한 역사를 이룩할 악령에 의하여 촉진될 것이다. 즉 적 그리스도는 일찍이 사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적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과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에게 나타내신 모든 증거에 대적함으로 어두움과 미혹에 내던져짐을 당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나 무섭고도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이러한 대적이 일어날 것은 이미 예언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격정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들은 그 말씀의 진리를 더욱 더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의 대한 식별 (요한 1서 4:4-6)
여기에서 사도 요한은 이 미혹하는 적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한 두려움과 위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제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1. 사도는 그들 안에 좀더 거룩한 원리가 있음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고 있다. 즉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4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6절)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하나님에 의해 가르침을 받으며, 그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고 악한 미혹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은 치명적인 미혹을 받지 아니하도록 그의 택한 자들을 보호하고 계신다.2. 하나님은 그들에게 승리에 대한 소망을 부여하신다.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4절). 여러분들은 이로써 이 미혹하는 자들과 그들과 그들의 시험을 극복했으며 지금도 계속 증거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승리할 수 있는 소망의 두 가지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 여러분 안에 든든한 보호자가 계신다.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4절).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그는 사람들이나 마귀보다 더욱 권능이 크시다.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심은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2) 여러분들은 미혹하는 자들과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합당하도록 지으셨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 안에 있는 영은 세상으로 그들을 인도한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에 빠져 있다. 그들은 허영과 쾌락과 세상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한다. 그들은 세속적인 메시야와 구세주를 믿는다. 또한 그들은 세속적인 생각과 통치를 계획한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적 것이 아님을 잊고 세상의 재물과 보화만을 탐한다. 이러한 세속적인 의도는 그들로 하여금 변절자들을 낳게 한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5절). 세상은 이러한 것들을 따르게 된다. 즉 세상은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세상의 것은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극복하는 자는 크나큰 상처를 입게 하는 미혹을 이기게 된다.
3. 사도는 믿는 무리의 수가 비록 적을지라도 보다 나은 점이 그들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보다 신성하며 거룩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거룩하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하나님의 진리와 신실하심,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 하나님의 징후와 증거를 아는 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우리에게 속하고 또한 우리와 함께 거하게 된다. 자연 종교에서 원만하게 육성된 자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한층 더 침착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본성과 도덕적 우월성 계시와 역사에 관한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6절). 반대로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아니한자(자기 자신의 본능적 성향을 따라 행하는 자)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종으로부터 비롯된 자들이다. 이 세상에 더 깊이 몰두해 있는 자들은 누구보다도 기독교 정신에서 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다. 이와 같이 우리와 다른 이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6절).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여러분을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가르침은 진리의 영의 표시이며 이는 미혹의 영에 대해 적대관계에 놓여 있다. 교훈이 순수하고 거룩하면 할수록 이는 더욱 하나님의 것임에 틀림이 없다.
형제애 (요한 1서 4:7-13)
진리의 영이 교의(敎義)에 의하여 밝혀질 수 있듯이, 사랑에 의하여 또한 밝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7절). 그는 피차간 사랑으로 연합하도록 하기 위해 사랑 안에 그들을 결속시키려 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사랑함으로 피차간 영원한 사랑을 나누도록 간청하노라!" 이러한 권고가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Ⅰ. 사랑은 가장 높고 귀한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사랑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요, 창시자요, 부모요 명령자이시다.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과 복음의 총체이다. 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7절). 하나님의 영은 사랑의 영이시다. 하나님의 자녀의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그 성품의 성격과 외형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다"(갈 1:22). 사랑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Ⅱ. 사랑은 거룩한 성품에 대해 참되고 바른 이해를 나타낸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안다"(7절).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8절).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을 온 세상에 비추신다.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나타내고 있는 그의 지혜와 위대함, 그리고 광대한 창조의 유용성은 동시에 그의 사랑을 보여주며 증명해 준다. 그리고 자연과 절대자의 탁월성에 대하여 생각하며 추리하도록 주어진 이성은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추리하고 발견해 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건전하고 온전한 지식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즉 그의 사랑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신 완전하심 가운데 빛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며 그의 본성과 본질이 또한 그의 끗과 역사 하심이 본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기념은 단지 사랑뿐만 아니라 사랑과 아울러 빛이 되심을 알게 된다(요일 1:5).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본래 사랑이시며 사랑으로 비롯된 완전함을 소유하고 계심과 같이 그는 필연의 실재성과 탁월성과 영광을 지니셔야만 한다. 오직 사랑은 거룩한 전능자의 본성이며 속성이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1. 그가 우리를 사랑함은 이렇게 나타났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3절), 곧 반역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이 더럽고 헛되며 악하고 먼지와 재같이 쓸모 없는 자들을 사랑해 주심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2.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리 만큼 우리들을 사랑해 주신 까닭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다"(9절).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각별히 따로 세움을 받은 자이다. 그는 독생자이다. 만일 우리가 그를 하나의 피조물 혹은 창조된 존재로 간주한다면 그는 독생자가 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그를 하나님의 영광, 혹은 영광스러운 실재 또는 본질로부터 비롯된 자연적인 필연의 방사(放射)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독생자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아들을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 주심은 거룩한 사랑의 신비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놀랍고도 기이하며 엄청나게) 사랑하사"란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3.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흔히 예측할 수 없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10절).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못하고 죄와 비참과 피 아래 있을 때, 또한 용납될 수 없고 부패하고 더럽고 거룩한 피로 우리의 죄씻음 받을 자격조차 없었던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4. 하나님은 아래와 같은 사명과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주셨다.
(1) 그의 임무는 우리의 죄를 사해 주는 것이었다. 즉 "결과적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의 율법과 저주 아래 죽고 그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그의 영혼의 상처를 입고 그의 옆구리에 창이 박히고 우리를 위해 장사되시는 것이다"(10절).
(2)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주신 목적은 우리에게 선하고 유익한 목적, 그를 통해 우리를 살리려 하시고(9절), 그를 통해 영원히 살고, 하늘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며 그와 함께 영원한 영광과 축복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Ⅲ. 형제에 대한 거룩한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강권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큰 관심을 가지고 내가 말하는 바 사랑을 기억해 주기를 간청하노라)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이 말씀은 저버릴 수 없는 논증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자녀로서 그의 제자(혹은 모방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영원한 하나님이 사랑하신 그들을 어찌 우리가 사랑하기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의 사랑을 숭배하는 자 또는 그의 사랑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그 안에 있는 자비심과 만족함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가 사랑한 자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은 전 인류 가운데에 보편적인 사랑을 강권하고 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교회와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은 단 하나의 각별한 사랑을 이룩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Ⅳ.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거룩한 임재의 보증이 된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12절). 하나님은 가시적인 임재로 우리의 눈에 직접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12절) 그의 성령으로(13절) 우리 안에 거하신다. 곧 하나님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자신을 나타내거나 우리의 직관에 나타내 보이지 않으신다. 또한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아니하신다. 다만 그는 받을 만하고 요구할 만 한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사랑을 요구하시며, 기대도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그의 사랑을 모든 교회 특별히 교회의 형제들과 성도들에게 주셨음을 예증하는 것이 된다. 그들 안에 그들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전이된다. 전능자는 특별히 그 안에 거하신다."
Ⅴ. 여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은 우리 안에 이루어진다.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12절).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와 우리 위에 온전히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신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와 우리와 더불어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사랑은 결코 우리 안에서 헛되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참된 목적과 초점은 이로써 성취되어짐으로 그 사랑은 온전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 믿음의 역사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며, 사랑은 그 사랑의 수고로 말미암아 온전케 된다. 거룩한 사랑이 하나님과 형제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사랑을 이룩하게 될 때에 우리의 사랑이 현세에서 비록 불완전하고 또한 우리에게 사랑의 높은 목적이 부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은 세상에 존재하며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이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이루신 자신의 사랑을 평가한다면 이 형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사랑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에 대한 크신 사랑을 언급한 다음 아래와 같은 설명을 첨가하고 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13절). 확실히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하는 일은 우리들이 알고 증거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고귀하고 위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안에 거하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라고 하신 말씀 중에 나타나 있다. 거하심에 대한 온전한 의미는 축복받은 세계에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상호적인 내재의 뜻을 알게 된다고 사도는 말한다. 곧 그가 우리 마음속에 그의 성령의 형상과 열매를 이룩하셨고(13절),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그의 것 혹은 그에게 속한 능력과 관대하심 그리고 왕국에 대한 사실을 바로 일깨워 주는 혁명과 이해력을 부여하시는 분이시다(딤후 1:7).
거룩한 사랑(1) (요한 1서 4:14-16)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이룩하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불길로 옮겨져야 하므로 사도는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초석으로써 사랑을 말하고 있다.
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조항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14절)라고 하신 말씀 중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아래와 같다.
1. 주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즉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시며 이 아들과 같은 또 다른 이는 없으며 하나님도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유일한 분이시다.2.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계와 사명은 세상의 구주란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그의 죽음과 모범과 중재와 성령, 그리고 구원을 방해하는 대적을 대항하는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3. 그가 우리를 위해 구원을 이루신 목적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 또한 그는 아들의 동의를 얻어 이후에 이뤄질 재림을 선포하셨다.
4. 이 근거에 대한 확증은 사도와 그의 형제들이 본 바에 의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실한 성품과 그의 경건한 행실과 역사, 변화 산상의 모습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 하늘로 승천하심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 그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이었음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모든 것을 그에게서 없었다.
5. 이에 대한 사도 요한의 증거는 아래에서 나타난다. 즉 "우리가 없었고 또 증거하노니"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서 알 수 있다. 이 진리에 대한 증거가 우리로 하여금 그 사실을 증거하도록 강권한다. 세계의 구원은 이 진리에 의존된다. 이 진리의 명확성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증거가 정당함을 입증한다.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손은 그 진리의 증거자가 되었다.
Ⅱ. 사도 요한은 이 진리를 시인함으로써 주어지는 탁월성 혹은 탁월한 특권을 말하고 있다. 즉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4절). 이러한 신앙 고백은 신앙 고백의 기초로써, 마음속에 있는 믿음과 입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시인함과 세상의 모든 아첨과 비난에 대항해서 생활과 행위로써의 신앙 고백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성령이 아니고서는, 또는 성령의 외적인 증거와 내적인 역사가 없이 주라고 할 수 없다(고전 7:3).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되고 그에게 사로잡힌 바되며, 하나님에 대한 만족할 만한 지식과 그로 더불어 누리는 크나큰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Ⅲ. 사도 요한은 거룩한 사랑의 고취를 위한 목적으로 아래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났고 그 안에서 시행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16절), 우리에게 꼭 알려져야 할 계시는 거룩한 사랑에 대한 계시다. 우리들에게 계시된 신조는 거룩한 사랑에 대한 조항이 가장 많다. 주 그리스도의 역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역사이다. 그의 아들 안에서 또한 그와 더불어 이룩하신 모든 사건은 우리를 위한 그의 사랑의 증거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끄시려는 수단일 따름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화해를 이룩하셨다"(고후 5:19)> 우리는 여기에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16절). 즉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무한한 사랑이시다. 그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사명과 중재로써 세상에 있는 우리를 위해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주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매우 생소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진다면 이는 기독교 계시에 대한 가장 큰 장애와 그릇된 생각이 된다. 그렇게 위대한 분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아들의 영원성과 신성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그것은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말할 수 없는 풍요함이 있다." 거룩한 사랑의 방대함이 사랑에 대한 계시와 믿음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크나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온전한 사랑의 극치를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에 못이루실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그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시고자 하셨을 때 이와 같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당신의 보다 큰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셨을 때 보좌 앞에 섬기는 무리들을 위해 하늘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의 사랑 곧 최고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그 자신이 사랑이심과 그 사랑은 그의 영원한 본성에의 가장 밝고 사랑스러우며 초월적이고도 역동적인 탁월성을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 무엇을 하실 수가 없겠는가. 이러한 일은 우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세계와 하늘의 주권자들과 능력자들을 위해 나타내시며, 잠시동안 우리를 놀랍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영원토록 그의 능력에 대한 존경과 찬양 그리고 축복을 위해 나타내심이 아닌가? 하나님이 이루시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들을 세우셨다는 것보다 우리를 위해 영원한 아들을 주셨다는 것이 그의 사랑의 목적과 위엄 그리고 풍성함에 더욱 부합되는 표현이 된다. 우리를 위해 독생하신 영원한 아들을 주심 같이 섭리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사랑을 분부하신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위탁하시고 하늘과 땅과 지옥의 면전에서 사랑을 분부하시며 그가 우리에게 자신을 위탁하시고, 최고의 진리와 사랑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맡기실 때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지 못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일 거룩한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결과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면, 이로써 섬기는 자들에게 나타날 하늘의 영광과 이 세상의 구원의 기쁨의 근거와 반면 지옥의 고통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 결과는 가장 기이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그의 율법과 나라와 사랑 그리고 영광 가운데서 자신이 사랑이심을 확신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저주받은 자들이 받을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1)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한 것이 이미 드러났기 때문이다.
(2) 약속하신 사랑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3)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만족과 기쁨의 대상이 되기에 부적합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들과 보다 높은 사랑을 거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통해 영원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위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2.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게 된다"(16절). 사랑의 하나님과 사랑하는 인간 사이에 놀라운 교통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관계와 그의 용납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룩된다. 거룩한 사랑에 거하며 그의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을 소유하고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결케 되고 인침을 받은 자는 거룩한 사랑에 대한 명상과 감명 그리고 취향 속에 살게 되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거룩한 사랑(2) (요한 1서 4:17-21)
사랑의 근원과 동기를 이루고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권유한 사도 요한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좀 더 사랑을 권장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형제애 혹은 그리스도인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
Ⅰ. 하나님에 대한 사랑-모든 사랑할 만한 존재와 대상들 중에 첫째가 되며 으뜸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그는 모든 아름다움과 탁월성 그리고 사랑의 총체가 되시며 모든 인간들에게 선과 사랑을 부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래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영혼의 평정과 만족이 요구되는 그 날 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기쁨이요 축복이 되는 그 날에 우리에게 심령의 평안과 만족을 주게 될 것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17절), 우주적인 심판의 날이 올 것이다. 그에 신앙적인 담대함을 가지고 얼굴을 들고 주님을 대면하고 그가 그들의 친구와 대변자가 되심을 알 수 있는 자들은 얼마나 복될 것인가? 그 날을 대망하는 가운데 거룩한 담력과 확신을 가지며 그날과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자는 복된 자다.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복되고 복된 자들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케 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친구 되심을 확신케 할 것이다. 즉 그가 우리의 사랑을 알고 계심을 확신할 때 우리의 친구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우리는 더욱 그의 사랑을 신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며 그의 약속에 신실하신 것과 같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심을 아신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의 사랑을 쉽게 따라갈 수 있으며 그의 사랑의 기쁨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룩된 우리의 소망은 결코 우리를 멸망시키지 아니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롬 5:5).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 마음에 부은 바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소망의 기초가 되며 우리의 소망이 드디어 아름답게 성취되리라는 확신의 기초가 된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의 의미와 확실성은 그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부은 바 되었다. 이로써 우리들은 그에 대한 신뢰와 그 안에 있는 평안과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그는 그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일치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된다. 즉 "그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17절). 사랑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간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을 지극히 사랑한 것처럼 그는 또한 우리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자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변치 아니할 것이다. 그의 사랑은 우리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가르칠 것이다. 우리는 그를 위해 그와 더불어 고난을 당하며 그와 함께 영광에 참예할 것을 바라며 신뢰하지 아니할 수 없다(딤후 2:12).2. 사랑은 크나큰 두려움으로부터 생기는 불쾌한 결과를 방지해 주거나 또는 제지해 준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18절). 사랑이 넘치는 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내 생각으로는 두려워하는 것과 불안해하는 것 혹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불안해하는 것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써 언급되어지고 또한 지시되었다(벧전 2:17; 계 14:7).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그의 권위와 통치에 대해 지극히 높은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온전한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한편 죄책감과 복수의 감정으로 비롯되는 하나님에 대한 불안한 감정이 있다. 이러한 경우에 하나님은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감정은 공포하는 한 마디 말로 대치될 수 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가장 선하며 우월하고 귀엽고 사랑할 만한 존재로 생각한다. 사랑은 하나님을 가장 선하신 존재로 생각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가장 귀한 존재로 생각게 하며 두려움을 내어쫓고 그 대신 우리 안에 기쁨을 이룩한다. 사랑이 상징하는 것만큼 기쁨도 따라 증가된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이나 공포를 내어쫓는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들은 그들의 성품과 언어와 서약 중에서 온전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며 인간에 대한 공포심에서 온전히 해방을 받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진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의 사랑으로 승리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는 사실을 사도는 이와 같은 말로 재치 있게 언급하고 있다. 즉 형벌은 두려움이나 공포를 내어쫓는다. 그 이유는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기 때문이다(18절). 두려움은 특별히 복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의 불안해하는 고통스런 감정이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 완전한 복종과 만족을 이루게 함으로, 형벌을 내어쫓는다. 이와 동시에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18절). 곧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나 염려는 우리의 사랑이 아직 온전한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다. 온전한 사랑을 간구하며 이를 이룩하도록 힘쓰자. 여기에 우리의 마음의 평정과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정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3.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의 선행적 사랑의 기초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절). 그의 사랑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극과 동기가 되며 도덕적 근원이 된다. 사랑할 줄도 모르며 받을 수도 없던 우리를, 최초의 사랑의 행위자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의 사랑을 애타게 기대하며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피흘리시게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을 낮추며 우리와 화해하기를 원하셨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온 하늘과 땅들은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의 사랑은 우리에게 모든 풍성함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의 뜻(그의 사랑하시고자 하시는 자유 의지에 의하여) 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태어났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롭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아 알도록 선택함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그의 거룩한 사랑의 인을 쳐주셨다. 이는 주께서 우리의 마음이 그만을 향해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살후 3:4).
Ⅱ.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지고 있다.
1.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 안의 신앙 고백에 가장 부합되며 일치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우리는 고백한다. "만일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이름과 집과 예배를 사랑하는 자로 자처하면서 사랑해야 할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이다"(20절). 이로써 그의 고백이 거짓임이 드러난다. 이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함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의해 쉽게 드러나고 있다."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20절). 보이는 것이 심령에 미치는 바 영향이 크다. 곧 보이지 않는 것은 마음과 심령에 미치는 바 영향이 크지 못하다. 하나님에 대한 한계성은 그의 불가시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는 자신 안에 하나님에 대한 가시적인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인간)을 미워하는 자가 어떻게 근원적이며 불가시적인 하나님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겠는가?
2.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에 가장 부합한 것이며 정당한 전제가 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21절).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의 사랑을 확신시키도록 하셨다.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형제들은 하나님에게 기원을 두었고 그에 의해 용납된 자들이며 하나님이 관심을 두고 있는 자들이므로 하나님 안에서 다른 형제들도 사랑함이 마땅하다. 우리 믿는 형제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성품과 놀라운 특권이 주어졌고, 하나님은 우리들만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형제도 또한 사랑해야 함은 당연한 의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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