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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교회의 축복(베드로 후서 1:1-4)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편지를 쓰도록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베드로는 그 서문에서도 역시 전서에서와 같은 식으로 축복과 인사의 말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이 서문 가운데서 우리는 약간의 첨가 변경된 부분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사도는 자기를 나타내는 칭호에 있어서, "베드로"라는 이름과 함께 "시몬"이란 이름을 덧붙였고, "사도"라는 칭호와 함께 "종"이란 칭호도 아울러 사용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란 이름은 두 편지에서 흔히 사용된 이름인데, 이 이름은 "예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고백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으로부터 수여 받은 이름으로써 아마 그가 즐겨 사용한 이름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집을 지을 때 반드시 반석을 기초로 해야 한다는 진리의 근거가 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몬"이란 이름은 전서에는 생략되었으나 여기서는 기록되어 있다. 이 이름은 그가 할례를 받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베드로는 그가 그러한 이름을 생략함으로 율법에 대해 열심인 유대인 신자들로부터 그가 할례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으로 알고 질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이름을 덧붙였다고 보여진다.

베드로는 여기서 자신에 대해(사도라는 호칭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호칭하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다윗이 행했던 것처럼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시 116:16). 그리스도를 섬긴 것은 가장 귀하는 영광에 이르는 길이다(요 12:26). 그리스도께서는 "왕중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님"이시다. 또 그는 그의 종들을 "하나님을 위한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아 주신다(계 1:6). 이러한 주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따라서 죄만 없다면 조금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의 생을 살게 하는 사람이 마땅히 받을 만한 칭호이다.

Ⅱ. 우리는 본 서신을 받을 수신자들에 대한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전서에서는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 후서에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믿음은 이교도들의 허황된 믿음이나, 위선자들의 거짓된 믿음과 그리고 아무리 정통적이라 할지라도 형식주의자들의 열매 없는 믿음과는 매우 거리가 먼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부름 받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다(딛 1:1).

1. 참으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보배로운 은사이다. 그리고 보이는 교회의 많은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참다운 신앙의 소유자는 그 수가 적고 희귀할 뿐만 아니라(마 22:14), 그러한 믿음은 매우 탁월한 것이며 그러한 믿음의 소유자에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 준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다시 말해서 참으로 경건하고 영적인 삶을 산다. 믿음은 이러한 탁월한 삶에 필요한 모든 도움과 위로를 공급한다. 믿음은 새로운 인간을 양육하는데 필요한 포도와 젖을 사기 위해(사 55:1) 그리스도께 나가게 하여 준다. 믿음은 또 우리를 부요하게 하는 불로 연단된 금과 하늘의 보화를 사가지고 오게 해 준다. 그리고 경배의 대상이 되게 하여 주는 왕의 옷인 흰 옷을 입게 하여 준다(계 3:18).

2. 믿음은 일반 그리스도인이나 사도들에게 있어서 마찬가지로 귀한 것이다. 그리고 양자에게 모두 귀한 결과를 가져다준다. 믿음은 강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와 단단히 결합시켜 주는 것처럼 연약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결합시켜 주며, 그들의 마음 역시 모두 깨끗케 하여 준다. 그리고 모든 신실한 신도들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모든 죄로부터 깨끗함을 받는다(행 13:39). 믿음을 가진자는 누구든지 다 같이 귀하신 주님을 영접할 수 있으며 다 같이 귀하신 약속을 받아 누릴 수 있다.

3. 이 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우리가 소유할 수 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은사이다.

4. 믿음의 귀중함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완전하고도 만족할 만한 의와 순종이 믿음에 대하여 그 가치와 귀중함을 부여하여 주신다. 그리고 믿는 자의 의로움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 그 무한한 가치가 더욱 인정될 수밖에 없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 그는 태초적부터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참된 하나님이시며, 무한하신 존재로서, 이러한 의를 이룩하셨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를 인정받게 된 분이시다.

(2) "그는 믿는 자들의 구주이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완전한 순종을 보여 주셨다. 보증자와 구세주로서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을 대신하여 이러한 의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의 순종은 믿는 자들에게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Ⅲ. 베드로는 사도로서의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 그 축복에서 그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할 것과 그들 속에 은혜의 역사가 증진하고 성장할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들의 양심 안에 충만한 평강이 넘치기를 기원하고 있다(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가능하지 못하다). 이것은 전서에 나오는 기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첨가되었다.

1.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되는" 방법과 수단이 설명되었다. 그 방법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맒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은 영적인 삶에 커다란 증진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과 믿음이 없이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요 17:3).

2. 충만한 은혜를 구하는 사도 베드로의 믿음과 이를 기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근거를 덧붙여 주고 있다. 우리가 이미 받은 바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구하도록 고무한다. 은혜의 사역을 시작하신 이는 그것을 완성해 주실 것이다.

(1) 이 모든 영적인 축복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 아니었다면 중보자의 모든 사명을 감당하실 수 없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이시다.

(2) 진실한 영적인 생활과 거룩한 삶과 능력에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의 안에 모든 충만함이 있으며,"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가 무든 것을 받으니 곧 "은혜 위에 은혜"이다(요 1:16). 그리고 은혜와 평강을 보존하며 증진시키며 완전케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그로부터 받는데 어떤 주석가는 이 구절에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고 있다.

(3)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믿음은 모든 영적인 도움과 위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수단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우리를 확실히 부르신 분이라고 고백하며 또 그렇게 인식하여야만 한다. 즉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자"이시다. 인간을 부르사 회심시키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에게 "영광과 덕"을 가져다주시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 같이 "평강과 은혜"를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저 많은 사람들은 난외의 주와 같이 "영광과 덕으로써"라고 읽기를 좋아한다(역주. 한국어 성경은 그렇게 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영광과 덕의 활동 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말미암아 확실하게 부르심을 받았다(엡 1:19). 죄인을 회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모여지고 경험되어지는 능력과 영광이다(시 63:2). 이 능력과 덕은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간" 모든 자들의 찬양을 받아야 한다(벧전 2:9).

(4) 제 4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은혜와 평강을 증진시켜 주기 위하여 그들의 믿음과 소망에 대해 격려하고 있다. 왜냐하면 같은 은혜와 덕이 우리를 부르신 복음서 약속을 확실히 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채용되었기 때문이다.

[1] 약속을 성취시키는 좋은 일들은 사실 위대한 것들이다. 죄의 용서는 여기에 언급되어진 하나의 축복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능력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신속히 죄를 고백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은 "주의 크신 능력"(민 14:17)이 나타내 주시기로 약속하신 은총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영원히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흉악한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시편 119편 18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매우 기이한 것이다.

[2] 복음서에 나타난 약속된 축복은 매우 귀한 것이다. 구약 성서의 위대한 약속이 "여인의 후손" 곧 메시야라면(히 11:39) 신약 성서의 위대한 약속은 "성령"이시다(눅 24:49). 우리를 생기 있게 하여 주시며, 깨우쳐 주시며, 성결케 하시는 성령은 매우 위대하시다.

[3]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식과 의와 성결에 있어서 그들의 심령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 지움을 받는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그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 동시에 그들은 거룩한 성품과 영적인 성향을 소유하게 된다. 율법은 "죽음을 부여하는 것"이요,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복음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요, 성령은 "죄와 허물 가운데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

[4] 성령께서 거룩한 성품을 그들 속에 이룩해 주신 사람들은 멸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자들이다. 성령의 은혜로 "그들의 심령이 새로 지음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왜냐하면 "멸망이 지배하는" 곳은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이 세상의 자녀"가 된 자들은 죄의 세력 아래 있다. 이 세상은 악한 자의 손안에 놓여 있다(요일 5:19). 죄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정욕을 통해서이다. 그들의 욕망은 정욕에 매여 있다. 따라서 정욕이 그들을 지배한다. 우리를 다스리는 죄의 지배는 우리가 정욕을 좋아하는 데서 비롯된다.

 

1:2 없음.

 

1:3 없음.

 

1:4 없음.

 

1:5

경건의 진보 (베드로 후서 1:5-11)

사도 베드로는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하였고,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 되었으므로 그들로 하여금 은혜와 경건에 있어서 더 큰 진보를 이룩하도록 격려하며, 고무시키려는 이 서신에 있어서의 중요한 문제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출발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완성된 자인 것처럼 생각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안주해서는 안 된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도록 이미 기도했으며, 지금도 그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도록 힘쓰기를 바래서 그들을 권면하고 있다. 우리는 기회가 있는 대로 우리가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권면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려 주시기를 원하는 바를 그들이 얻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도록 그들을 권면해야 한다. 신앙의 진보를 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극히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노력해야만 한다. "힘써" 근면하지 아니하고서는 거룩한 사업에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앙의 사업에 있어서 게으른 사람들은 아무런 성과를 올릴 수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하는 사람들은 분투 노력해야 한다(눅 13:24).

Ⅰ. 여기에서 우리는 신자들의 진보가 어떻게 점차로 이룩되어지는 것인가를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신자는 "덕"을 지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의"(義)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거기에 "지식, 절제 그리고 인내"를 계속해서 지녀야 한다. 그것들은 덕의 항목에 밀접하게 관련되어진 것들이다. 그들은 매우 중요한 네 개의 덕목이며, 모든 덕목 중의 덕목으로써 그들이 힘써야 할 것이라고 사도는 생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며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다"(딛 3:8)는 말씀을 볼 때, 여기에 나오는 "덕"이란 "힘과 용기"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힘과 용기가 없는 신도들은 반드시 수행해야 할 수많은 선한 사업을 성취할 수 없다. 의인은 사자와 같이 담대해야 한다(잠 28:1). 믿는 바 자기의 신조를 고백하거나 복음의 사명을 수행하기를 두려워하는 비겁한 그리스도인은 그 날에 가서 그리스도께서 그를 부끄럽게 할 것이다. "너의 심령이 악한 날에 처하여 있는 너 자신에 대해 외면하지 않도록 하라. 모든 반대에 맞서 대항하며 모든 대적과 세상과 육신 그리고 죽음까지라도 대항해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담대한 자신을 보여 주라."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덕을 지녀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더욱이 우리들이 죽음에 임하게 될 때 이러한 덕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2. 신자는 그의 덕에 "지식"을 용기에 지각을 더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에 앞서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시 9:10).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우리가 받아들일 만하며, 온전하신 뜻을 따라 시행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임무 수행을 위한 적합한 환경이란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환경인지 알아내어야 한다. 그리고 적절한 방법과 시간을 활용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지각은 우리가 함께 일해야 할 사람들과 우리가 끼어들어야 할 장소와 무리들을 살펴보게 한다. 모든 신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임무가 잘 수행될 수 없는 적절한 방법과 규칙을 바르게 가르쳐 주는 지식과 지혜에 따라서 수고를 기울여야 한다.

3. 우리는 우리의 지식에 "절제"를 더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여러 물질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온전하고도 온당한 위치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외적인 위로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가치와 효용성이 영적인 축복에 비해 훨씬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육체적인 우월성이나 육체적인 특권은 다소 유익은 있으나 매우 적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그 일에 따라 고려되고 또한 사용되어야 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정직할 것을 가르치며 동시에 절제할 것도 가르쳐 준다(딛 2:12). 우리는 우리의 본능적인 삶에 있어서 좋은 것들, 다시 말해서 고기와 술, 옷, 잠자기, 오락 그리고 명예와 같은 것들을 바라고, 또 그것들을 이용하는데 있어서 이를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과도한 욕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생각과는 상치되는 것이다. 이것들을 더욱 취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 할 수 없다.

4. 절제에 대해 인내를 더해 주라. 그것은 모든 것을 "온전하게 이루게"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수가 없다(약 1:4). 왜냐하면 우리는 환난을 받도록 태어난 존재이며, 많은 환난을 겪고서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런 환난이다(롬 5:3). 환난은 인내를 낳으며, 연단과 은혜의 증가를 가져다주며,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아무런 불평이나 불만을 토하지 아니하고, 침묵과 순종으로 모든 재난과 십자가를 견디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환난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처사가 바른 것임을 인정하며, 우리는 또 우리의 고난은 우리의 죄값에 비해서는 휠씬 가벼운 것임을 고백하며, 그 환난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5. 우리는 인내에 "경건"을 더해야 한다. 경건은 바로 인내로 말미암아 이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내는 연단을 낳기 때문이다(롬 5:4). 그리스도인들이 인내로써 환난을 이겨 나갈 때 그들은 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계"할지라도 그의 "인자함을 그들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랑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다(시 89:32, 33). 참다운 경건이 있는 곳에 어린아이들과 같은 두려움과 외경에서 오는 사랑을 가지게 된다.

6. 우리는 여기에다가, 동일한 아버지의 자녀요, 동일한 주인의 종들이며, 동일한 가족의 권속들이며, 동일한 고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이며 그리고 동일한 유업의 상속자들인 그리스도인 동료들에 대한 "형제애" 즉 따뜻한 애정을 더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순전한 마음과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각별한 기쁨을 얻게 되는 우리의 가장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자들이다(시 16:3).

7. "사랑" 즉 모든 인류에 대한 선의의 사랑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자원적인 사랑에 첨가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을 한 혈통으로 지으셨다. 인간의 모든 자녀들은 같은 인간의 본성을 나누어 가졌으며, 그들은 같은 자비를 받을 수 있고, 같은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비록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 보다 우위에 있도록 구별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재난 속에 있는 자들을 동정하며, 기회 있는 대로 그들을 궁핍으로부터 구원하고, 영육간에 그들의 복리를 증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어야 한다.

Ⅱ. 우리는 앞서 언급한 모든 은사들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든 선한 일들" 즉 계명에 나타난 모든 의무와 능동적 혹은 수동적인 복종이라든가 또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모방하기 위한 그런 봉사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귀한 은사를 근면함과 불요불굴의 태도로 추구하도록 하기 위해, 열심하는 자들이 누릴 여러 가지 풍성함과 이익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8-11절).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우선 보다 일반적인 면에서 말한다(8절). 이런 은사를 가지면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방법 그대로 그 외적인 표현 이상의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대의 왕들 중에서 가장 사악하고 선동적인 왕이었던 아하스 왕에 대해서 이야기 될 때 그는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였다고 한다(왕하 16:2). 이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즉 그의 그후의 생활이 보여 준 것과 같이 그는 가장 반역적이며 지독한 삶을 살았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 안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은사가 충만하게 넘치게 됨은 우리로 하여금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삶에 있어서, 우리들을 보다 의욕적이고도 생기있게 그리고 용맹스럽고도 활기있게 만들며, 모든 선한 사업에 있어서 놀라운 성과를 맺도록 한다는 사실을 알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열매를 맺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풍성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겨 주신 일을 풍성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증거하는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게 한다.

이러한 것은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는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은사가 심령 속에 내재하게 될 때, 그 은사들은 피차간에 증진시키며, 강화시키며, 또한 격려하고 새롭게 하여 준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8절 초반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들은 모두 번창하며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은사가 충만하면 선한 행위도 풍성하게 된다. 사도 베드로가 내세우고 있는 증거는 매우 멋진 증거이다(9절). 거기서 베드로는 생명력을 통해 열매를 맺게 하는 은사가 함께 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가를 보여 주었다. 앞서 말한 그러한 은사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또는 있는 척해도, 그 은사를 활용하거나 증진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소경"이라고 했다. 그것은 "원시치 못한다"는 다음 구절이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영적이며 하늘에 속한 일들에 관해 소경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 악한 현세의 것들을 볼 수 있고, 또 지극히 사랑하지만 영적인 특권과 거룩한 축복을 누릴 수 있으리 만큼 내세를 위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기독교의 탁월성을 아는 자는 "영광과 존귀와 그리고 영생"을 얻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모든 은사를 추구하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은사를 못 얻거나 또는 추구할 수 없는 경우에 사람들은 실제에 있어서 먼 곳에 있지 않으며, 드러나 있고 또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 있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그것들을 그들이 먼 곳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그들로부터 거리감을 유지하게 하고 있다. 내세에 누릴 그처럼 놀라운 사실에 대해 소경과 같이 보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무서운 형벌의 실재성과 그 확실성, 그 위대함과 그리고 그것들이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매우 가련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신앙에 덕과 지식 등등을 더하지는 못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련함의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앞을 바라보지 못하듯이 또한 뒤로 돌아다보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시력이 부족하여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들의 기억력이 감퇴되어 지난 일을 지탱하는 것조차 불가해진다.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세례를 받았다는 것과 따라서 그들의 마음과 생활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된다.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죄에 대항하여 거룩한 싸움을 싸워야 하며, 육과 세상 그리고 마귀와 싸우도록 소집을 당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주님의 것이 되겠노라고 한 단단한 약속과 그리고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을 벗어버리고자 하였던 여러분의 진취적인 마음과 결단을 때때로 기억해 내기를 바란다.

2.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과업을 근면하게 수행하는데 따라오는 두 가지의 특별한 이점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은혜 안에서의 안정과 영광에 이르는 승리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제시함에 있어서 앞서의 권고를 요약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다. 앞서 5절에서는 "더욱 힘써 너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공급하라"고 했던 것을 10절에서는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아래의 몇 가지 점을 유의하자.

(1) 신자들이 그들의 "부르심을 굳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다.

(2) 신자들이 그들의 영원한 택하심을 굳게 하는 길은 그들의 부르심을 실제화 시키는 데 있다. 아무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그의 섭리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요,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구체화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3) 우리가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굳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즉 여기에서 우리 자신에 택한 지극히 면밀한 시험과 우리들이 온전히 중생하고, 마음이 교화되고, 의지가 새로워졌으며, 온 심령이 바른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는가를 밝히기 위한 면밀한 조사와 엄격한 심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에 이르기 위해서는 최선의 근면이 요청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도 또한 보전될 수도 없다(시 139:23; 롬 8:16). "그러나 그 수고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그렇게 괘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수고 때문에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

[1] "이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타락하지 않도록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 어떤 때, 어느 시기든지 더욱이 이 땅에 임하는 어 시련의 때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보호를 받는다. " 다른 사람들이 사악하고 가증스러운 죄 가운데로 빠져 들어갈 때에도 그처럼 근면한 자들은 지극히 주의 깊게 행동할 수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바르고도 온전하게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2] 신앙 생활에 부지런한 사람들은 영광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비록 한편 하늘에 들어가는 사람이 적고 또 겨우 구원을 얻으며(벧전 4:18), "불 가운데서 얻는"(고전 7:15) 것같이 구원을 받기가 매우 어려워도, "은혜 중에 성장하며," 그리고 "주의 일을 많이 힘쓰는" 사람은 "그들의 주님의 기쁨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영원한 왕국에까지라도 들어갈 수 있으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

 

1:6 없음.

 

1:7 없음.

 

1:8 없음.

 

1:9 없음.

 

1:10 없음.

 

1:11 없음.

 

1:12

영적 분발 (베드로 후서 1:12-15)

Ⅰ. 은혜와 경건을 발전시키며 또 유지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자기의 의무를 부지런히 행하였으며, 따라서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행하도록 고무하며 격려할 수 있게 되었다. 만일 목사들이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나태하면 성도들이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부지런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나태할 수가 없었다(다시 말해서,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떤 일을 하든지 나태할 수가 없었다). 오직 그는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행동을 해야 했으며, 어떤 일에 대해서도 부지런해야만 했었다. 더욱이 성도들에게 많은 은사를 생각나게 하는 일에는 더욱 그랬다. 이것은 사도 자신들까지 포함한 모든 훌륭한 주의 종들의 직무이다. 그들은 "여호와를 기억하시게"(사 62:6)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특히 하나님의 약속들을 언급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백성들에게 선을 베풀기로 약속하신 바를 기억나게 하도록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또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교훈을 일러주며, 기독교의 교리와 의무를 기억나게 하여 주며,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행하게 하여 주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말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으며, 그가 주장하고 있는 진리 가운데 이미 굳게 서 있기 때문에 그런 교훈은 새삼 필요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해도, 그는 여기서 그러한 교훈을 다시 일깨워 주고 있다.

1.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라 할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의 지식을 더욱 증진시키며 나가고, 아는 바를 실천에 옮기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늘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우리는 또 어떤 교훈의 풍조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진리의 믿음, 특히 현존하는 진리에 굳건히 서야 한다. 더욱이 이러한 진리는 우리를 평안케 하는 것으로써 이 시대의 것과는 상반되며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더욱 알아야 할 진리이다. 그 진리 즉 복음서가 가르치는 위대한 교훈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삼가 조심하며 선을 행하여야 한다. " 이것은 사도들이 그들의 시대에 널리 선포한 진리이다. 그리고 이 진리의 말씀은 어느 시대의 교회라도 "받아들여야 할 신실한 말씀"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은 목사에 의해 늘 강조되어야 하고(딛 3:8), 동시에 사람들은 이 말씀으로 잘 교훈함을 받고 확신을 얻어야 하며, 비록 지식을 얻은 뒤에도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고, 아직 그처럼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고 늘 생각하여야만 한다. 제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계명의 범위를 초월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주시고 부여해 주신 방법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교훈과 권고를 필요로 한다면 그들이 이 장막에 머물러 있는 동안 목회자들이 그들을 교훈하고 권고하며 그들이 전에 들어서 아는 진리라도 다시 기억나게 해 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그들을 일깨워서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열심히 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Ⅱ. 사도는 이러한 작업을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말하기를(14절),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 열심을 내는 것은 그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할뿐만 아니라, 그가 "이 장막을 벗어날" 날이 임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 우리의 몸은 우리 영혼의 장막에 불과하다. 이 몸은 비천하고 유동적인 구조를 자기고 있고, 그 기둥은 쉽사리 움직여질 수 있으며, 그 기반은 당장에 파괴된다.

2. 이 장막을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이 흙집에서 오래 살 수 없다. 밤에 옷을 벗어서 옆에 내던지는 것같이 임종시에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벗는다. 그리하여 부활의 아침이 이를 때까지는 우리의 육신이 무덤 속에 눕혀질 수밖에 없다.

3. 임박한 죽음은 사도 베드로로 하여금 생명의 활동을 더 열심히 하게 하였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그가 떠날 날이 임박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따라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일깨워 더욱 열심을 내어 부지런히 일했다. 그는 그의 편지를 받을 사람들과 곧 헤어져야만 한다. 그리하여 사도 베드로는 그가 떠난 후에라도 그가 그들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그들이 꼭 기억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권면을 그의 서신에 첨부하고 있다.

베드로는 구전으로 전달되는 것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본 것 같다. 사실 구전이라는 방법은 베드로가 기대할 만한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다. 베드로는 독자들이 이러한 말씀들을 항상 기억하되, 다만 그 정도로 생각만 하지 않고, 맨 처음 들려지던 그대로 항상 그들에게 들려지도록 하기를 원한 것이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며," 그의 친절에 대해 말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지식을 널리 펴는 길이며, 베드로는 이러한 것을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 자가 곧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1:13 없음.

 

1:14 없음.

 

1:15 없음.

 

1:16

복음의 확증 (베드로 후서 1:16-18)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그러한 권면, 다시 말해서 그처럼 열심을 가지고 진지한 태도로 권면한 그 이유가 나온다. 이것들은 근거없는 폭넓은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복음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의 말씀은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거나 간교한 수법으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계략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다시 말해서 무한히 지혜로우신 여호와의 가장 탁월한 섭리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는 이 방법을 창안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이 복음서에 나타나 있으며, 사도 베드로의 설교는 이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1. 복음의 설교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오는 모든 죄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능력이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그의 죄와 그 죄의 허물에서부터 구해 줄 수 있다.

2. 복음의 설교는 또한 그리스도의 강림을 가르쳐 주었다. 인간의 타락 직후 때가 차면 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나리라고 약속되어진 그 분이 이제는 육신을 입고 오셨으며,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적 그리스도요(요일 4:3), 적 그리스도의 영에 미혹되어 영향을 받은 자이다라고 설교한다. 그러나 또 그리스도께서 구약 성서에 나오는 모든 신자들이 믿고 죽은 그러한 약속에 따라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은(히 11:39)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요 그리고 사역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라고 설교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기로 약속하신 자들이 "살과 피를 함께 나눈 자들이기 때문에," 그 자신도 인간의 본성을 지니사, 고난을 받음으로 속죄의 제물이 되기 위하여 "사람들과 같은 살과 피를 나누어 가지셨다." 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복음서는 가장 알맞고도 평이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음으로 해서 복음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 중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그가 산 자와 죽는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 역시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복음에 의거하여 정당하게 심판하며, 선악간에 우리가 우리의 육체로 행한 바에 따라서 우리를 보응해 주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

3.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의 "꾸민 이야기"라고 모욕적으로 하고 있는데 대해, 베드로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의 일은 매우 확실한 것이며 실제적인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상을 취하고 사람의 모습으로 계셨을 때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난 일도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앞에서 변형하셨을 때, 그의 얼굴이 해갈이 빛났고, 그의 옷이 빛과도 같이 그리고 눈과도 같이 하얗기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처럼 하얗게 만들 수 없으리 만큼 빛나던 그런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이 일의 목격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사실을 증거할 수 있으며 또 증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들은 바를 증거하는 것이기에 그 증거가 참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지상에서 그리스도께 주어진 보이는 영광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들려진 음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1) 은혜로운 선포가 있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것은 하늘로부터 땅에 들려진 가장 좋은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기뻐하셨고, 그를 통해 우리도 기뻐하신다. 그는 약속된 메시야이시며, 그를 믿는 자는 모두 영접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2) 이 선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것인데, 그는 자기 아들에 대해 공적인 선언을 내리시는데(그가 종의 형상을 입어 비천한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공언하셨다. 그리스도의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처지가 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사랑이 있기에 감히 그의 목숨을 버릴 수 있었다(요 10:17).

(3) 이 소리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이 낮은 세상에 있는 동안 구세주로서의 그에게 영광을 돌려주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존귀하게 하기를 기뻐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아들에 대해 그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고백함으로 그에게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을 원하시듯 그 스스로는 그를 그의 아들이라고 밝히심으로 우리의 주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 주셨다.

(4) 이 소리는 하늘로부터 들려 왔다. 그리고 "지극히 큰 영광" 중에 들려 왔다고 했는데, 이는 우리 주님에 대해 놀라운 영광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선포는 존귀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거하시는 영광의 보좌인 하늘로부터 들려 왔다.

(5) 이 소리가 들려졌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다른 사람들 모양으로, 요 12:28, 29) 소리만 들은 것이 아니요, 그 의미까지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동행자들처럼 소리는 듣되(행 9:7) 그 의미를 알지 못하므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할 때에도(행 22:9), 그의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알아들어야 할 말씀을 알아듣도록 귀를 열어 주시고 이해하는 마음도 주신다. 이 사실을 증거한 베드로와 같이 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그 뜻을 깨달으며, 그 진리를 믿으며, 하늘로부터 들려 오는 소리의 능력을 깨닫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능히 그의 증거를 받아들일 만한 많은 까닭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는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6) 그 소리를 그들이 예수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 들었다. 그런데 그 산이 거룩한 산이 된 것은 그곳이 본래부터 거룩한 땅이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심으로 그 땅이 거룩한 땅이 되었으며(출 3:5), 그리고 성전이 세워짐으로 거룩한 산이 된 것과 같이 (시 87:1)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을 현현하심으로 인하여 거룩한 산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장소는 상대적인 면에서의 거룩한 곳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현현하심을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동안이거나 또는 말씀의 보증을 받고 그러한 현현을 믿음으로 기대하는 동안은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다.

 

1:17 없음.

 

1:18 없음.

 

1:19

성서의 영감 (베드로 후서 1:19-21)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복음의 진실성과 실재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또 다른 논증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논증은 앞에서의 논증보다 더욱 강력하고 또 확신에 찬 것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재림에 관한 교리는 단순히 만들어낸 이야기나 또는 인간의 공교한 고안물이 아니라, 거룩하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지혜롭고 놀라운 섭리에 의한 것임을 더욱 철저하게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독과 지시에 따라서 말하기도 하고 책을 쓰기도 한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과 저자들이 예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몇 가지 사실에 대해 유념하자.

Ⅰ. 구약 성서에 대한 설명에 대해 유념하자. 구약 성서를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하였다.

1. 그 예언은 우리 구세주의 능력과 강림 그리고 신성과 성육신에 대한 예언적인 선포인데, 구약 성서에 나와 있는 것이다. 구약 성서에는 "여인의 자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라고 예언되어 있다. 악마와 악마의 활동을 멸하는 그의 능력과 그가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이 성경에 있다. 그리고 구약 성서가 말해 주고 있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하신 이름인 "여호와"란 이름의 뜻은 단순히 "그는 있는 자다"라는 뜻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출 3:14). 따라서 그러한 뜻으로 해석되었기에 예언자들은 하나님 스스로가 그의 백성을 구속하고, 구원하기 위해 이미 "이루어진 바"와 같이 육신을 입게 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구약 성서가 예언인데 반해 신약 성서는 그러한 예언의 역사이다. 다시 말해서 "요한의 시대까지의 모든 선지자와 율법에 예언된 것이다" (마 11:13).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들이 기록한 것은 전에 예언의 말씀으로써 주어진 말씀의 역사이다. 그런데 신약 성서는 구약 성서의 완성이며, 신약 성서와 구약 성서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구약 성서나 신약 성서 모두가 진실하다는 것에 대해 충분한 증명이 된다. 구약 성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신약 성서는 구약 성서의 주석서로써 부지런함과 감사한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2. "구약 성서는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다." 그것은 구약 성서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 유대인에게 있어서 더욱 그렇다. 후배 예언자들은 선배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을 확증하였다. 이러한 예언들은 명확한 지시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특별한 배려에 의해 보전되었다. 그리고 많은 예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이야기 보다 성서의 말씀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더 확실한 것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이" 기사 이적보다도 더 설득력이 있다(눅 16:31). 이러한 확고부동한 말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우리의 믿음은 매우 견고하고 확실한 것이다. 더욱이 모든 예언의 말씀이 정확하고 세밀한 부분까지도 성취되었다는 것을 아는 우리들에게는 구약 성서의 예언이 보다 더 확실하고 명확한 것이다.

Ⅱ. 사도 베드로는 우리더러 성서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며, 이러한 확실한 말씀에 관한 진실성을 믿도록 우리의 마음을 모을 것뿐만 아니라, 그것에 집중하라는 것인데, 이는 우리들이 그 예언의 말씀으로 다시 지음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힘써 지켜야 할 교훈의 본이며(롬 6:17), 우리의 모든 행실을 조정해야 하는 "지식의 바탕"이다(롬 2:20).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전력을 기울이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또 우리 자신들도 이롭게 할 수 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돌려야 할 경의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언의 말씀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성서에 접근하는 자들에게 유용한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1. 그들은 성서의 말씀에 대해, 그것은 온 세상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빛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 빛을 활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들의 발의 등불이 된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하게 해 준다.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있다.

2.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움을 인식해야 한다. 이 세상은 과오와 무지가 들끓는 곳이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불가불 영생을 얻는데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3. 인간이 구원을 얻을 만큼 지혜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속에 빛을 비쳐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이해는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인간이 최선을 다해 알고 있다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알아야 할 만한 분량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것이며,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 대해 알던 것에 비해서도 지극히 적은 것이다.

4. 성서의 말씀의 빛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경된 마음과 어두어진 지각에 비쳐질 때, "그들의 심령에는 영적인 새 아침의 서광이 비쳐오고 샛별이 떠오르게 된다." 이처럼 여명의 빛이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것은 날이 점점 밝아져서 드디어는 원만한 광명에 이르는 것같이, 그 영혼을 점점 더 밝게 하여 주고 점점 더 증진시켜 준다(잠 4:18). 그것은 점점 성장하는 지식이다. 이렇게 해서 깨닫게 되는 사람들은 결코 그들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 빛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요 또 의무이어야 한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이 빛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진리를 행하는 자들은 이 빛에 가까이 이르게 된다.

Ⅲ. 사도 베드로는 우리들이 성서의 말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며 또 거기서 어떤 이익을 얻는데 있어서 그보다 앞서서 필요한 사항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진리를 그는 다만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입증하기도 한다.

1. 성서의 말씀은 사적인 설명이 아니다(혹은 한 인간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자기의 의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지자와 세상에 속한 거짓 선지자와의 차이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참된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모세와 같이 그들의 마음에 있는 어떤 것을 말하거나 거기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민 16:28).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 줄을(또는 직분을 주거나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님을) 이 일로 인하여 알리라."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헛된 것을 가르치는데 그들의 말한 즉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렘 27:16). 선지자들과 성서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말했고 또 기록했다. 그들이 성령의 감화를 받고 그러한 것들을 나타내고 또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고 기록하게 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말씀이 개개 인간의 의견이나 의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그것을 탐구해야 하고 또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2. 하나님께 근원을 둔 중요한 성서의 진리는(하나님의 생각이니 인간의 생각이 아닌데)참다운 예언의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알리고 또 고백되어질 수 있다. 성서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은 그 말씀이 참다운 기독교의 신앙을 나타낼 아니라, 과학과 지식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인간이 그의 참다운 친구의 인격 속에서 그의 모든 타당하고, 특성이 있고, 현저한 표징들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믿을 뿐만 아니라 확실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안에서 그 책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 감동되어 저술한 책임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독특한 표징들을 찾아보고 있다. 그들은 성서의 말씀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단맛을 맛보며, 능력을 힘입으며, 영광을 바라본다.

3. 사람들이 성서의 말씀을 타당하게 이용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또 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전에 먼저 그 신성을 깨달아야 하고 또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을 다른 책들로부터 성서로 돌리며,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하여 그것을 우리의 행동 지침으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전 존재가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거기에는 참으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인하여야 한다.

Ⅳ. 성서의 근본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납득시켜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사도 베드로는(21절) 구약 성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1. 부정적인 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다." 구약 성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록들은 인간의 의견이 아니며, 또 성경의 정경이 되는 말씀이라도 그것을 말하고 기록한 예언자들이나 저자들의 뜻이 반영된 것이 아니다.

2. 긍정적인 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그대로 말한 것이다."

(1)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책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다. 발람이나 가야바 또는 거룩치 못한 다른 사람들이 때로 예언의 영을 받았던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의 소용이 되는 성서의 말씀의 어떤 부분을 위해서도 그것을 쓰도록 쓰임을 받지 못했다. 성서의 모든 기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다.

(2)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달함에 있어서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성령은 위대한 시동자요 거룩한 사람은 그 도구에 불과하다.

[1] 성령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를 감동시켜 주고 지시하여 주었다.

[2] 성령이 그가 그들의 입에 담아 준 바를 말하도록(쓰도록) 감동을 주고 자극하여 주셨다.

[3] 성령은 그가 그들에게 전해 준 바를 바르게 전하도록 지혜롭고도 세심하게 도와주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나타내 보여 준 바가 잘못 이해되지 않도록 지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서의 모든 말씀은 성령의 말씀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성서가 가지고 있는 모든 평이하고도 단순하며, 능력과 덕이 함양되어 있으며, 우아함이 있고 예의가 바른 말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인정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성서의 말씀에서 발견한 것에 믿음을 더해야 한다. 그리고 성서는 성령에 의해 감화 받고, 영향받고, 도움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책으로써 존중히 여겨야 한다.

 

1:20 없음.

 

1:21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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