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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고난과 죄의 종식 (베드로 전서 4:1-3)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숙고함으로 새로운 논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사도 베드로가 전에 신자들로 고난을 견디어 내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논한 것처럼 여기에서는 죄의 극복을 들어 말한다. 주의를 집중해 관찰해 보자.

Ⅰ. 사도 베드로의 권고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육체의 고난" 혹은 그의 인간의 본성으로서 당하신 고난이 전제 혹은 가설로 되어 있다. 또한 후제, 혹은 가정으로는 "같은 마음, 용기, 그리고 결단으로 무장하거나 자신을 강화하라"는 것이다. 본문 전반부의 육체란 말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후반부에 나타난 육체란 인간의 부패된 본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이와 같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본성으로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너희의 세례시 서약과 고백을 따라 자기 부정과 고행을 통해 죄의 육체를 죽임으로 너희의 부패된 본성이 고난을 겪도록 하라. 이는 너희가 이러한 고난을 받으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안위함을 얻고 또한 죄를 그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각종의 죄에 대한 가장 강렬한 최선의 논쟁점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부터 비롯된다. 고난받는 자로서의 그리스도께 대한 모든 동정과 친근함은 만일 여러분이 죄를 멀리하지 아니하면 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죄를 없애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그가 죄악의 고난에 순복했을지라도 그는 최소한의 죄악에도 결코 순복할 수가 없었다.

2. 모든 참된 고행의 시작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육체적인 고행이나 단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세속적이요,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이해력은 어두워졌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유리되어 있다(엡 4:18). 인간은 성실한 피조물이 못된다.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고 성화 되기까지는 그는 사악한 존재에 불과하다.

Ⅱ. 여기에 관하여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가를 2절에서 살펴보자. 사도는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과 그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소극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그의 육체의 남은 때를 사악한 인간들의 죄악된 정욕과 부패된 욕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적극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타내신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알아두어야 할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인간의 정욕은 그들의 모든 사악함에서 근원 된다(약 1:13, 14). 수시로 일어나는 시험이 어떻든지 간에 만일 인간들 자신의 부패가 없었다면 그 시험이 번창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2.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의 정욕이나 욕망, 또는 자신들의 삶과 행동의 기준을 설정하여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다.

3. 참된 중생은 그 중생함을 나누어 받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과 생활에 놀라운 변화를 이룩한다. 중생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오래되고 유행하는 감미로운 정욕과 세상의 넓은 길과 악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으로 옮겨지게 한다. 중생은 그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판단력, 애정, 길, 그리고 행실을 변화시킨다.

Ⅲ. 어떻게 이러한 권고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자(3절).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안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도는 공평성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너희가 지금까지 너희의 이전 모든 생활이 죄와 사탄을 섬긴 것과 같이 지금은 너희가 마땅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고 공평하며 합당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도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유대인들일지라도 그들은 이방인들 중에 살면서 그들의 길을 배웠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을 주시해 보자.

1. 한 인간이 참으로 중생되었을 경우, 그의 지난날의 삶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생각해 보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대단히 서글픈 일이 된다. 곧 그는 많은 해를 운명의 장난으로 보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고, 하나님께 부끄러움을 행했으며, 손해를 유지해 왔다.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몹시 괴로운 것이었다.

2. 인간의 의지가 성화되지 못하고 부패되어 있는 한 그는 계속 사악한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사악한 것을 그의 선택과 기쁨으로 그의 일과 사업으로 삼는다. 그리함으로 그는 매일매일 악화 일로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3. 허용된 하나의 죄는 또 다른 죄를 이끌어 온다. 여기에 여섯 가지의 죄가 있는데 그 죄목들은 상호간 연관과 의존의 관계에 놓여 있다.

(1) "음란" 다시 말해서 음탕은 외모와 몸짓 혹은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이다(롬 13:13).

(2) "정욕"은 매춘과 간음 같은 사악한 행위를 뜻한다.

(3) "술취함" 즉 술취함이 적다 하더라도 건강과 사업에 해를 끼치는 술의 무절제한 사용은 여기에서 비난을 받고 있다.

(4) "방탕" 혹은 사치스러운 잔치도 지나치게 빈번하며, 넘치며, 엄청난 값을 요구하는 잔치이다.

(5) "연락" 이는 과음과 과식을 의미한다.

(6) "무법한 우상숭배"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는 간악함, 마취, 포식, 모든 종류의 잔인성과 야수성을 수반하였다. 이러한 간악 중에 사는 유대인들은 적어도 그들 중 얼마가 이러한 행실로 말미암아 타락되고 부패되었다.

4. 크나큰 죄를 금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죄와 악의 모양이라도 금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술취함"이나 과도한 잔치는 정욕과 우상숭배와 같이 금지된 것이다.

 

4:2 없음.

 

4:3 없음.

 

4:4

산 자와 죽은 자 (베드로 전서 4:4-6)

Ⅰ. 여러분들은 먼저 구절에서 이전 생활이 심히 간악한 것으로 나타났던 그들이 여기에서 눈에 뜨일 만큼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이전의 행한 바대로 동일한 동료와 함께 동일한 코스를 달리지 아니한다. 여기에서 변화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사악한 친구들의 태도를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들은 그들의 옛 동료들이 많은 변화를 받아 이전에 하던 대로 저희와 함께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며, 그들 이전에 욕심으로 미친 듯이 추구했던 동일한 술취함과 사치를 멀리하는 것을 보게 되자 새롭고 특이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를 이상히 여기며 놀라게 된다.

2. "이방인들의 뜻을 좇는 자들은 극한 방탕에 다름질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비방한다." 그들의 놀람은 그들을 비방하는 곳으로 몰아 넣는다. 그들은 그들의 인품을 비방하며 그들의 길, 그들의 종교,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을 비방한다. 이런 점을 기억해 두자.

(1) 진실로 한 번 중생을 경험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눈살을 찌푸리며 아첨의 말로 많은 시험을 가할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이전 생활 과정으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다. 어떠한 설득이나 비난도 그들이 늘 버릇처럼 행하던 옛 생활로 돌아오게 하거나 또는 그렇게 행하도록 하는데 성공치 못할 것이다.

(2)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행동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여진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경멸해야 하며 다른 이들이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을 믿어야 하며, 그들은 지루하고 장황한 것을 즐겨야 하며 뚜렷한 이익도 없는데 열심이어야 하며, 소망에 의존하여야 하는 모든 것은 불신앙적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깃이다.

(3) 신앙적인 사람들의 최선의 행동은 불신앙적인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면할 수 없다. 선한 사람에게 극심한 고통과 위험, 그리고 자기 부정을 대가로 치르게 하는 이러한 행동은 무정하며 심술궂은 세상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량한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 긍휼, 그리고 선함의 열매를 맺지만 세상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을 비방하게 될 것이다.

Ⅱ. 하나님의 종들이 받을 위로를 여기에 첨가하고 있다.

1. 모든 사악한 사람들, 특히 그들 자신들 같이 나쁘지 아니한 자들을 비방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심판할 능력과 권위가 주어진 분, 머지 않아 심판하게 되며 살아있는 자들에게 선고를 내리며 모든 죽은 자들을 살리실 분에게 설명을 해야 하며 그들의 행동의 까닭을 밝혀야만 하게 될 것이다(약 5:8, 9; 벧후 3:7). 이 점을 주시하자. 악한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그들이 말한 모든 악한 말에 대해 위대하신 하나님께 잠시 동안 설명을 드리게 될 것이다(유 1:14, 15).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에게 언급한 모든 그들의 저주, 어리석은 농담, 중상과 거짓말에 대한 불행한 설명을 하도록 요구를 받게 된다.

2.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함이니라"(6절). 어떤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 장면을 이와 같이 이해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옛 성도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이는 사람들의 격분이 육체를 지니고 있는 그들 위에 임하게 한 불의한 심판과 핍박을 참도록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함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 가운데 살게 하기 위함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영적인 면으로 생각하고 있다. 즉 복음은 그들을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하여 전파되었고 그들이 이교도와 그리고 단순한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살아오는 동안 이룩된 본성의 부패와 그들의 생활이 악함을 비난하기 위하여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들의 죄에 대해 고행을 겪게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라 새롭고 영적인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렇게 취급하면서 이런 점을 배우도록 하자.

(1) 우리들이 죄의 고행과 하나님에 대하여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파된 복음의 바람직한 결과이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파된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자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계신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룩된 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그렇게 문제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의 복음을 헛되이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할 심판을 준비하고 계신다.

(3)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따라 행하고 산다면 육체의 사람들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

 

4:5 없음.

 

4:6 없음.

 

4:7

근신, 사랑, 봉사 (베드로 전서 4:7-11)

우리는 여기에서 무서운 상태, 혹은 교리에 접하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유도된 추리를 더듬어 볼 수 있다. 그 상태는 "만물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에 의하여 예언된 유대교회와 국가의 비참한 멸망이 지금 다가왔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박해와 너희들의 고난의 때가 이르렀는데, 매우 임박했다는 것이다. 너희와 너희 원수의 생명이 곧 극한 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세상 자체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큰 불이 세상의 종말을 초래한다. 그리고 모든 만물은 무한한 영원 속으로 사라져 없어지고야 만다. 이것으로부터 유도된 추리는 일련의 권고를 포함하고 있다.

1.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권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근신하라"(7절). 너희의 마음의 상태와 기질을 근엄하게, 안정되게, 그리고 견고히 하라. 그리고 모든 세속적인 오락을 이용할 때 엄격한 절제와 근신을 지키도록 하라. 너희의 이전 죄와 시험으로 너희 자신이 얽매어짐으로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라(3절). "그리고 깨어 기도하라." 그리고 기도에 합당한 조용하고 냉철한 성향을 계속 유지하도록 주의하라. 그리고 "마지막 날이 예고없이 너희에게 임하는 일이 없도록 자주 기도하라"(눅 21:34; 마 26:40, 41).

(1) 다가오는 종말에 대한 우리들의 고려는 모든 세속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근신하도록 하며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 열심있게 하는 가장 능력있는 논증이다.

(2) 목적 성취를 위하여 기도하는 자는 깨어 기도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들의 영혼을 깨어 주시해야 하며 적합한 모든 기회를 주시하며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들의 임무를 다 하도록 해야 한다.

(3) 육체의 올바른 질서는 영의 선함을 증진하는데 크게 유용하다. 육체의 기호와 경향이 하나님의 말씀과 참된 이성에 의해 통제되고 지배를 받을 때, 그리고 육체의 이익이 영혼의 이익과 필요에 순응할 때, 그때는 육체가 영혼의 적이 아니요, 영혼의 친구요, 조력자가 된다.

2.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8절). 여기에 기독교의 황금율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가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그들의 인품에 대한 애정, 그들의 복지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들의 복지 증진을 위한 마음으로부터의 노력 등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간의 애정은 차가워서는 안 되며, 뜨거워야 한다. 사랑은 진실하고 강렬하며, 영원해야 한다. 이러한 진실한 애정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권고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사랑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골 3:14). 사랑은 믿음이나 소망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고전 13:13). 사랑의 놀라운 효과는 사랑이 "허다한 죄를 가리운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1) 더 많은 뜨거운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보다 모든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있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사랑을 가지라." 사도 베드로는 이교도들이나 우상숭배자들을 위함도 아니요, 혹은 배교자들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서 사랑을 베풀라"고 하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히 13:1).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그들 안에 있는 온후한 마음과 사랑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즉 각별한 애정을 요구한다.

(2) 악의를 품지 않는다든지 피차간에 일반적인 존경을 하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강렬하게, 그리고 뜨겁도록 피차간 사랑해야 한다.

(3) "허다한 죄를 가리우는"것은 참된 사랑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다. 사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방의 죄를 용서하고 잊게 해주며, 다른 사람의 죄를 악화시키거나 퍼뜨리기보다는 그들의 죄를 가리워 조고 감싸주도록 한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연약한 자를 사랑하고, 사람들이 회개하기 전에 무수한 악한 죄를 범한 그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 자들을 용서하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긍휼을 준비케 한다(마 6:14).

3. 대접하기를 권하고 있다(9절). 여기에서 요청되는 대접은 나그네나 여행자에 대한 자유롭고 친절한 접대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대접을 받기에 합당한 대상은 피차간 모두가 해당된다. 그들의 밀접한 관계, 그리고 박해와 재난의 시기에 있어서 그들의 환경의 여건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피차간 대접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약탈당하였으며, 그들은 안전을 위하여 먼 나라로 피신을 했다. 이러한 경우 만일 그들의 그리스도인 동료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굶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지혜롭고 필요한 규칙을 제안했다. 이러한 것은 여러 곳에 지시되어 있다(히 13:12; 롬 12:13).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는 방법은 이러하다. 지나친 부담과 수고로 인한 시비와 불평이 없이 쉽고 친절하며 간단한 방법으로 행해져야 한다. 이러한 점을 알아두자.

(1) 그리스도인들은 사랑뿐만 아니라 서로 대접도 해야만 한다.

(2) 그리스도인은 사랑이나 대접의 방법으로 어떠한 일을 행하든지 그는 그것을 시비가 없이 기쁨으로 행해야 한다. "네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라"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4. 재능의 향상을 권고하고 있다(11절).

(1) 우리의 은사가 일반적인 것이든 특수한 것이든 권능, 능력, 혹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 등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간에 우리들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각양 은사를 맡은 청지기같이 서로 똑같이 봉사하며 섬겨야 한다.

[1] 선을 행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해야 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려야 한다.

[2] 우리가 받은 은사가 어떠한 것일지라도 그 은사는 서로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부여받은 것으로 경모해야 한다. 우리는 그 은사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쓸 것을 쓰지 않고 숨겨 놓아도 안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받은 바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섬겨야 한다.

[3]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고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오직 청지기로 생각하며 이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우리들에게 위탁된 재능은 하나님의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2) 사도는 두 가지를 들어 은사에 대한 교훈을 예증하고 있다. 즉 말하는 것과 봉사하는 것으로 이에 관한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1] 공석에서의 교역자나 사석에서의 평신도이든, 이들 간에 누구든지 말하고 가르치는데 있어서 그는 우리가 하는 말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를 지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 사석에 있어서의 평신도들이나 공석에 있어서의 교역자들이 가르치고 말하는 것은 정결한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만 한다. 말하는 방법을 말하자면 말은 신중, 경의, 그리고 엄숙함을 지님으로 거룩하고 신성한 말이 되게 해야 한다.

[2] 교회에서 구제를 행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는 집사나, 사랑에 넘치는 은사와 헌금으로써 봉사하는 평신도이거나 교역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주신 능력으로 봉사를 행하도록 하라.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함과 능력을 부여받은 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 마음껏 봉사해야 한다. 이러한 규칙은 여러분의 모든 은사와 봉사와 그리고 섬기는 일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선한 일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추종되고 시행되어야 한다(마 5:16). 그리고 그것들은 이러한 일을 시작하셨고 사람들에게 각양 선물을 나누어주시는 (엡 4: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오직 그를 통해서만 우리와 우리의 봉사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에서 몇 가지 일들을 알아두자.

첫째, 사적인 위치에 있는 평신도이거나 공적인 자리에 있는 교역자들의 임무는 하나같이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피차간 이야기하는 것이다(말 3:16; 엡 4:29; 시 145:10-12).

둘째, 하나님의 일에 관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하는 모든 복음 전파자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맡은 임무만을 행할 뿐 아니라 열심을 가지고, 그들의 최선의 능력을 따라 그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차원이 높고도 어려운 그리스도인의 일의 본질, 주인(그리스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상급의 탁월성 등,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의 노력이 필사적이어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일에 어떠한 부름을 받았을지라도 우리들은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그것을 행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넷째, 이 모든 임무와 봉사의 생활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다른 견해도 우리의 행동과 사업을 성결케 하는(고전 10:3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증보와 그의 공로를 통하여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행하는 어떠한 일들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은 범사에 영광을 받으신다.

여섯째,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무한하고 영원한 찬양과 권능을 돌리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존하신 하나님이시며 세세토록 모든 축복을 받으실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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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없음.

 

4:10 없음.

 

4:11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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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영광 (베드로 전서 4:12-19)

본서의 각 장마다 박해받는 사람들로 생각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자주 반복된 것은 이 새로운 개종자들이 처해 있던 크나큰 위험은 그들이 섬기고 있던 기독교 때문에 발단된 박해임을 보여 준다. 고난 가운데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실은 그들의 임무 중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들 자신의 위로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본장 전반부에서 그들에게 고행의 크나큰 임무 수행을 권고한 후, 여기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의 필수 조건인 인내의 임무를 그들에게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단련되지 못한 영은 시험을 참아 견디기에 매우 부적합하다. 이 점을 주시해 보자.

Ⅰ. 이 경멸을 당하고 있는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친절한 권고의 방법으로 그들을 그의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9절).

Ⅱ. 사도 베드로의 충고는 그들의 고난과 관련되었으며 그것은 이러한 것이다.

1.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이상히 생각지도 말고, 어떤 예기치 못했던 일을 당한 것처럼 놀라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 기억할 것은 아래와 같다.

(1) 그 고난이 심하고 극렬하다 할지라도, 이는 그들을 단련하고자 함이지 결코 멸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들의 성실성과 강함과 인내,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도를 시험하고자 함이다. 반대로 그들은 고난 중에서도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고난이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으로 마땅히 일컬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고난은 같은 종류의 것이며, 동일한 이유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다. 이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는 고난으로 고통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험하셨다. 만일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면 또한 우리들은 그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가 될 것이며 그의 원수들을 심판하고 그의 신실한 종들에게 면류관을 씌우기 위하여 재림하실 때 큰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살후 1:7).

[1]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가장 비천하고 천대받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감싸준다. 사도 베드로는 이 불쌍하게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자기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그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역경 속에서 피차간 더욱 사랑스러워 보인다.

[2]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불친절과 박해를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또는 놀랠 이유가 없다. 그 까닭은 이미 그들에게 이러한 고난이 경고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 고난을 스스로 견디어 내셨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저버리셨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제자로 받아들이시는 조건이 된다.

[3]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참아야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의 극심한 고난을 기뻐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극심한 고난이 거룩한 은총의 전조가 되기 때문이다. 고난은 복음을 증진시키며 영광을 예비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기뻐하는 자들은 영광 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승리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2) 사도 베드로는 불 시험에 대한 이야기에서 좀 덜 심한 핍박 즉 말로 인한 중상과 비난을 들고 있다(14절).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종류의 고난은 그들의 몫으로 임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그들이 비방을 받고 욕을 당하며 중상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사도 베드로는 "너희는 기뻐하라"고 강조한다. 기뻐할 이유는 이러하다. "너희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이 너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영광의 영으로서 너희를 고난 중에 보호하시고 영광 중에 부르시어 영원한 영광을 준비하사 너희를 인치실 것이다. 이 영광의 영이 너희 위에 임하고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를 돕고, 너희와 함께 기뻐하시리라.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놀라운 특권이 아니겠는가? 고난을 받고 있는 그리고 너희의 인내와 견인분발로 인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성령께서 나타내신 바 말씀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는 너희를 대신해서 영광을 받고 그러신다. 그러나 너희 위에 임했던 비난과 보복, 그리고 힐책으로 인해서 영 자체는 비방을 받고 또한 훼방을 받고 있다."

[1] 최선의 사람들과 최선의 것들은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비난을 당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과 그 복음은 모두 비방을 받는다.

[2] 선량한 사람들의 기쁨은 그들의 고난과 일치할 뿐아니라 그 고난으로부터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복이 있는 자들"이다.

[3]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있는 자는 비참하게 될 수 없다. 그의 고통이 항상 위대한 것이 되도록 하자. "너희는 복있는 자이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시기 때문이다."

[4]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에게 던진 훼방과 비난은 마치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자신에게 던져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비난을 받고 있다"는 말씀으로 알 수 있다.

[5] 선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난을 받을 때 그의 성령은 그 가운데서 영광을 받는다.

2. 사도 베드로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같이 마땅한 고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권고한다(15절). 어떤 사람은 이처럼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러한 주의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원수들은 이러한 죄나 또는 다른 어리석은 죄목으로 그들을 씌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가 기독교의 종교 강령을 제정할 때 그들 중 누구라도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이나 소유물을 해치는 일이라든가, 어떠한 종류의 죄를 행하는 것이나, 아무런 요청이나 필요성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감독권을 행사하는 일," 혹은 다른 사람의 일을 간섭하는 일을 금지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았다. 이 주의에 사도 베드로는 한 가지 지시를 더 첨가하고 있다. 누구든지 기독교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으며, 인내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으로서 고난을 당한다면 그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서는 아니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그를 존귀하게 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16절).

(1) 최선의 사람은 가장 악한 죄에 대해서도 경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2)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불러들인 고난에는 위로함이 없다.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그 고난의 참된 동기가 순교자를 만든다.

(3)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을 위해서 그리고 기독교의 어떤 교리나 임무 수행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받도록 부르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영광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3. 그들의 시험은 임박해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시험에 대비할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사도 베드로는 권고하고 있다(17,18절).

(1)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이르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내리시는 심판의 일반적인 방법은 이러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큰 재난과 혹독한 심판을 만국에 내리실 때 대체로 심판을 그의 백성들로부터 시작한다(사 10:12; 렘 25:29; 겔 9:6). "이러한 우주적인 대재난이 지금 임박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예언하신 것이다(마 24:9, 10). 이는 너희에게 필요한 인내에 대해 앞서 언급한 권고를 상기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너희들을 지속시키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이러한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하나님의 집 그리고 하나님의 식구인 여러분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며 너희의 시험과 징계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2] "사악한 세상과 너희 유대 백성들과 너희 중에 살고 있는 불신앙적인 자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에 비하면, 너희의 고통은 매우 가볍고 순간적인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했는가?"

첫째, 하나님의 가족에 그의 훌륭한 종들일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심판으로 그들을 징계하고 심판하는 것이 합당하고 필요하게 하는 그런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심판이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시작된다."

둘째, 하나님의 가족인 그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악한 일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당하는 악한 환경은 참을 수 있는 것이며 곧 종식될 것이다.

셋째, 아무리 큰 소리로 그럴 듯하게 주장할지라도 하나님의 복음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이나 단체는 하나님의 교회나 식구의 일원이 아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집에서 "불순종하는 자들을" 구분해 내고 있다.

넷째, 이 세상에서 당하는 선한 백성들의 고난은 불순종하는 자와 불신앙하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과는 구분이 된다.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한가?" 그들의 마지막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 될 것인가를 누가 표현하거나 말할 수 있을까?



(2) 사도 베드로는 사악한 자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18절). 이 모든 말씀은 잠언 11장 31절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이것을 70인역(LXX)은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가 인용한 것과 정말 똑 같게 번역을 하고 있다.

[1] 이 세상에서 선량한 사람들이 당하는 마음 아픈 고난은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들 위에 임하게 될 과중한 심판의 슬픈 전조이다.

[2] 선한 사람들도 그들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여야 할 일들이 많다. 고통과 유혹, 그리고 극복되어야 할 고난, 억제되어야 할 죄가 너무도 많다.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므로 의인이라도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하여야 할 일은 많다. 구원의 절대 필요성과 그 구원의 어려움은 평행한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자. 너희의 어려움이 우선 대단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도움을 허락하신다. 따라서 싸움은 오래 지속하지 않는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계 2:10).

[3]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은 말할 것도 없이 저주를 받는다. "죄인이 어디에 서리요." 어찌 그들이 그들의 심판에 견딜 수 있겠는가? 어디에서 그들이 머리를 들 수 있을까? "의인이 겨우 주의 구원을 얻는다면" 사악한 사람들은 확실히 멸망을 받게 된다.

4.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도록 부름을 받았을 경우 그들은 그들의 영혼의 안전을 기쁨으로 쳐다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보호해 주실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이는 그가 그들의 창조자이시며 그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친절한 약속을 은혜로 말미암아 이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한 영원한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이 미쁘시고 진실하심을 보여 주실 것이다(19절).

(1) 선한 사람에게 임할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에게 임하게 된다.

(2) 그들의 모든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육신의 보존보다 그들의 영혼의 유지를 더욱 주시해야 한다. 영혼은 최대의 가치가 있는 것이나 아직 크나큰 위험에 놓여 있다. 만일 불안감, 짜증, 그리고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다른 죄와 괴로움을 느끼는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 영혼은 매우 어려운 고통 중에 있다고 할 것이다. 만일 그의 영혼이 잘 보존되어 있지 못하면 박해는 그 사람을 배교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시 125:3).

(3) 영혼을 잘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 그 영혼을 맡기는 일이다. 너희의 영혼을 절대적인 헌신과 기도, 그리고 참고 선행을 지속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께 맡겨라(롬 2:7).

(4) 선한 사람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도록 큰 격려를 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창조주이시며 그의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데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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