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아내들의 직분(베드로 전서 3:1-7)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군주에게와 그들의 주인에게 사환들이 순복해야 할 의무를 다룬 다음 남편과 아내들의 의무를 계속 설명하고 있다.
Ⅰ. 그리스도에게 돌아온 기독교 부인들의 귀의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에 그들이 이교도에게나 혹은 유대인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의무에서는 제외된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1. 아내들의 의무에 속하는 것은 아래와 같다.(1) 그들의 "남편"의 뜻에 애정을 가지고 순복하는 것과 정당한 권위에 대해 복종하는 것이다. 복종의 행위는 말씀을 거역하며, 그들의 아내들의 조심성 있고 온화한 행실을 보는 것외에는 달리 진리의 확실성은 찾아보려 하지 않는, 순종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남편들을 구원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몇 가지 점은 이러하다.
[1] 각기 다른 관계는 그 관계에 상응하는 특유의 의무가 있다. 즉 목사는 설교를 해야 하며 청중들은 그 설교를 이해해야만 한다.
[2] 기쁨으로 하는 "순복"과 자비롭고 경건한 존경은 그들의 남편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그리스도인 여인들이 그들의 남편에 대해 가져야 할 의무이다. 이러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타락 이전의 이브로부터 아담에 이르기까지 합당한 것이었으며(창 3:10), 그들이 이전보다 더욱 곤란해진 지금도 아직 요구되고 있는 바이다(딤전 2:11).
[3] 복음의 말씀의 계획은 그리스도에게 영혼을 인도해서 구원하는 일이라 하여도, 아직도 너무나 완고함으로 "말씀에 의하여"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4] 선한 행위와 상호적인 임무의 이행보다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사람들을 구원시키는데 더 큰 능력은 없다.
[5] 비신앙과 불성실은 속박을 해결할 수 없으며 시민적 상호 관계의 의무를 폐하지 못한다. 남편이 "그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아내는 그의 "남편에 대한 의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2) 아내들은 "두려움으로" 그들의 남편을 공경해야 한다(엡 5:33).
(3) "정결한 행실"은 그들의 믿지 않는 남편들이 신랄하게 주시하며 엿보기를 즐기는 바이다.
[1] 악한 사람들은 신앙 고백자들의 행실을 엄격하게 주시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호기심과 시기, 질투는 선한 사람들의 길과 생활을 면밀히 살피게 한다.
[2] 적당하며 타당한 존경을 수반한 "정결한 행실"은 복음의 믿음으로 그들을 구원하며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우수한 수단이 된다.
(4) 몸단장에 비한 마음의 단장을 언급하고 있다.
[1] 사도 베드로는 신앙있는 여인들의 옷치장에 대한 규례를 정하고 있다(3절). 여기에 금지된 세 가지 종류의 단장이 있다. "머리의 꾸밈을" 금했다. 이는 그 당시에 음탕한 여인들에게 유행되었던 것이다. "금을 차는 것"도 금하였다. 혹은 "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금했다. 이것은 리브가와 에스더와 다른 신앙있는 여인들에 의해서 행하여진 바가 있었다. 그러나 후에 창녀들과 간악한 여인들의 옷이 되었다.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을 금했다. 이는 절대적으로 금해진 것은 아니며 지나치게 사치하며 값비싼 옷에 한해서 금해진 것이다.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첫째, 신앙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외적인 행위가 그들의 기독교 신앙 고백에 합치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행실에 있어서 거룩해야 한다."
둘째, 몸의 외부 단장은 자주 음란하며 과도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그 몸단장이 적당치 않고 세상에서 자신의 생활 수준 이상의 것일 경우 여러분이 그 옷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우쭐댈 때 계획적으로 그 옷을 입음으로 다른 사람을 유혹하거나 시험하려 한다든가 여러분의 옷이 지나치게 사치하거나 호기심을 자아내는 것이거나 지나친 것일 경우, 당신의 옷차림이 죄악의 사람들과 경솔과 허영심을 모방한 것으로 기묘한 것일 때와 몸치장이 주제넘고 변덕스러운 것일 때를 말한다. 창녀의 옷이 결코 정결한 그리스도인 여성의 것이 될 수 없다.
[2] 몸의 외부 단장 대신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아내들에게 좀더 우월하고 아름다운 단장을 하라고 지시한다(4절). 여기에서 기록하기를
첫째, 단장되어야 할 부분은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영혼 곧 숨겨있는 내적 인간을 이름이다. 여러분의 몸보다 여러분의 영혼을 단장하고 미화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라.
둘째, 장신구에 대해 지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영혼을 미화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은총과 덕성으로 이룩된 "썩지 아니할 것"이다. 몸의 장신구는 좀으로 인하여 파괴되며 사용 중에 없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더 오래 지린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더욱 더 빛나고 훌륭한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 여인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이며 평온한 마음의 감정, 교만과 지나친 격분을 피하고 그들의 남편과 식구들에게 온화한 순종의 행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만일 남편이 거칠고 종교에 대해 반대하는 자라면(사도 베드로가 이 지시를 하고 있는 선량한 아내의 경우) 신중하고 온유한 행실 외에 다른 것으로 그의 남편을 구원할 만한 길이 없다. 적어도 안정된 심령은 선량한 은인으로 하여금 평안하게 하며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 사랑스러운 단장이 되는 것이다.
셋째, 단장의 우수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심령의 온유함과 안정됨은 하나님의 측면에서 볼 때에 큰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인간들 편에서는 온유한 것이며, 하나님께는 보배로운 것이다. 이러한 점을 배우고 넘어가자.
2. 참된 그리스도인의 주된 관심은 자신의 심령에 대한 올바른 명령과 지시에 있다. 위선자의 일이 끝나는 곳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일은 시작된다.3.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재산은 그리스도인의 주요한 장식물이다. 특별히 고요하고 안정된 심령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 아름다움과 자비로움을 부여한다.
4. 그리스도인 아내들의 임무가 본래 어려운 것이므로 실례를 들어 그 임무를 강조하고 있다.
(1)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옛날 거룩한 부녀들의 예를 들고 있다(5절). "여러분들은 여자라고 하는 약점으로 인하여 그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반면 옛날의 부녀자들은 그렇지 아니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옛날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을 깨우쳐 줄 지식도 없었으며 그들을 격려해 줄 본보기도 심히 적었다. 그러나 모든 연령층의 여성들이 이 의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거룩한 부녀들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본은 의무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으나 인간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아니했다. 여러분들에게 부과된 안정된 심령과 여러분의 남편에게 순복할 의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부녀들에 의하여 시행되었던 바다."
(2) 사라의 예를 강조한다. 사라는 그의 남편에게 순종하였으며, 그는 그의 남편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도 그를 주라 부르며" 그의 남편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그를 좇았다. 그는 이로써 그의 남편에게 존경과 그 남편 자신이 그에 비해 우월함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여왕으로 선포되었고, 이 사실은 그의 이름이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만일 여러분들이 믿음과 선한 행실에 있어서 그녀를 모방하며, 여러분의 남편들을 두려워함으로 여러분이 고백한 진실을 저버리거나 남편들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양심과 남편들에 대한 의무감을 가지고 그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딸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두자.
[1]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남녀들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며, 하나하나 정확히 기록하신다.
[2] 그들의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복은 지난 모든 세대에 경건한 부녀들에 의하여 전적으로 실현된 바 있는 의무이다.
[3] 모든 남녀의 가장 큰 존귀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설정하신 관계와 조건 가운데 있는 그들의 겸손하고 성실한 행동에 있다.
[4] 하나님은 그들의 존귀와 이익을 위해 그의 종들 안에 있는 선함에 주의를 기울이신다. 그러나 그들의 실수도 감싸주신다. 사라의 불성실과 비웃음도 그의 덕성이 높이 평가되어질 때 관대히 보아졌다.
[5]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이나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서로서로 그들의 임무를 다 하도록 해야 한다. 아내들은 두려움이나 놀라움으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그들의 믿는 남편들에게 순복해야만 한다.
Ⅱ. 아내에 대한 남편들의 의무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특별히 언급되어지고 있는 것은 아래와 같다.(1) "동거하라"는 것인데, 이는 불필요한 별거를 금지하는 것이며 기쁨과 조화 가운데 가지게 되는 상호간의 물질적이며 인격적인 교류를 의미한다.
(2)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는 말씀은 짐승들과 같이 정욕에 따라서가 아니고, 마귀와 같이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임무를 아는 현명하고 온순한 남자처럼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함을 의미한다.
(3) 아내를 "귀히 여기라." 즉 아내에게 합당한 존경을 베풀고 그의 권위를 유지시켜 주며, 그의 인권을 보호해 주고, 그의 행실을 기뻐하며, 그에게 충분한 생계비를 지급하며 아내를 신뢰하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2. 아내가 지식을 따라 보호를 받아야 할 이유는 그녀가 본성적으로나 신체 구조면으로 볼 때 연약한 그릇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내는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좀더 높고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아내는 그의 남편과 동등한 존재다. 그들은 현세와 내세의 모든 축복을 포함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화목하며 유순하게 피차간 살아가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지내지 못한다고 하면 서로를 위한 그들의 기도가 지장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여러분들은 기도를 전혀 하지 않게 될 것이며 만일 한다해도 안정되지 못한 마음으로 하게 되므로 아무런 기도의 응답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1) 여성의 연약함은 구별이나 경멸을 위한 적합한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여성의 연약함은 존귀와 존경의 이유가 된다. 곧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2) 여기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에게 합당한 영광이 있다.
(3) 모든 기혼자들은 피차간 사랑스럽고 화목한 관계를 유지함으로 가정불화로 인하여 그들의 성공적인 기도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친구와 원수들에 대한 의무 (베드로 전서 3:8-15)
사도 베드로는 특별한 권고로부터 떠나서 보다 보편적인 권고로 그 방향을 돌리고 있다.
Ⅰ. 사도 베드로는 먼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들과 동료들이 서로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마음을 같이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곧 동일한 믿음의 신앙에 있어서와 신앙의 동일한 의무를 실행함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동시에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이 고통스러운 환경 가운데 있었으므로 서로서로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행 가운데 있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며 모두에게 겸손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배우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큰 목적에서와 실제적인 애정과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행실에 있어서 모두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곧 "하나님이 너희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신 바대로" 인간의 쾌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은 한 마음을 이루어야 한다(롬 15:5).2.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꼭 같은 마음을 이룰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사랑해야 한다. 즉 그들은 서로서로 괴롭히거나 미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보편적 애정 이상의 것으로 서로 사랑해야하되 형제같이 사랑해야 한다.
3. 기독교는 고난 당하는 자에게 대한 동정을 요구하며 모든 사람에 대한 겸손을 요구한다. 그런 사람은 악명 높은 죄인이거나 또는 악랄한 배도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정중한 인사를 차릴 필요조차 없다(고전 5:11; 요이 1:11).
Ⅱ. 사도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원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멸시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아래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1.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악은 악으로 욕은 욕으로" 갚지 말라고 경고한다. 오히려 반대로 이렇게 교훈한다. "그들이 너희들을 욕할 때 너희들은 그들을 축복하며, 그들이 너희에게 악한 말을 할 때에 좋은 말을 하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과 본으로써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비록 너희가 가치가 없을지라도 너희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축복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악한 것을 참고 너희들의 원수들을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 다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1) "악을 악으로 갚고 욕을 욕으로 갚는 것"은 사악한 비기독교적 행실이다. 치안 판사가 "악을 행하는 자"를 처벌할 것이다. 일반 서민은 부당한 취급을 받았을 때 법적인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투, 면책, 혹은 숨겨진 악으로써 복수를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잠 20:22; 눅 6:27; 롬 12:17; 살전 5:15). 욕을 하는 것은 사람에게 좀더 혹독하고 강렬하게 복수에 가득 찬 말로 욕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에게 있어서 신랄하게 꾸짖고 사악한 세대를 향한 열심있는 설교는 욕이 아니다.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이전 일을 행했던 사람들이다(사 56:10; 습 3:3; 행 20:29).
(2) 그리스도의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욕을 축복으로 바꾸도록 강권한다.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여러분들은 죄중에 있는 그들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의가 요구하며 자비가 요구하는 바 모든 것을 여러분들의 원수들에게 행해야 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욕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위하여 기도하고 사랑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그에게 영광스러운 특권을 부여하는 것과 같이 그 소명은 그에게 어려운 의무를 강요한다.
(4) 하나님의 진실한 모든 종들은 온전히 축복을 위엄으로 받게 될 것이다. 이미 그들은 현세에서 많은 것을 받았으며 내세를 위하여 충만한 축복이 예비되어 있다.
2. 사도 베드로는 시끄럽고 말썽 많은 이 세상에서 만족할 만한 행복에 대해 탁월한 설명을 가하고 있다(1절). 여기에 있는 말씀은 시편 34편 12-14절로부터 인용된 말씀이다.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여러분의 이웃에 대해 어떠한 손해와 상처를 입히는 일을 피하며, 선을 행하도록 힘쓰며, 선으로써 악을 이기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며 그 평화가 여러분에게 떠났을지라도 그 평화를 계속 추구하라.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들에게 선한 말을 하도록 하며 여러분들과 함께 화목하게 살도록 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아래 사항을 기억하자.
(1) 구약과 신약의 선한 사람들은 동일한 도덕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 즉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 하신 말씀은 다윗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지켜야할 의무로 남아 있다.
(2) 현세의 이익을 신앙에 대한 동기와 격려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합당하다.
(3) 신앙의 실천, 특별히 혀의 올바른 관리는 그의 삶을 평탄하게 하며 번창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진중하고 공격적이 아니며 현명한 혀는 이 세상을 우리로 하여금 평화롭게,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4)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일은 현세와 내세에 만족과 행복의 길이 된다.
(5) 평화가 주어질 때에 그것을 부여잡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평화가 거부되어질 때 이를 찾고 추구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즉 분열과 논쟁으로 반목 상태에 있는 집단간의 평화와 아울러, 특수한 개인들간의 평화가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다.
3. 이미 기술한 이러한 끈덕진 비공격적 행위가 그들의 원수의 잔인성을 불러들이며 촉진케 되리라는 걱정을 그리스도인들은 할 필요가 없음을 사도 베드로는 보여 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편에 계셔서 도우시기 때문이다. 즉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있기" 때문이다(12절). 하나님은 그들을 주시하시며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영구한 통치를 시행하시며,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귀는 그들의 간구에 기울이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처가 그들에게 주어진대도 그들은 치료를 받을 수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귀가 항상 고난 가운데 있는 그의 종들에게 집중하고 있으며 불의한 원수들에 대해 그들을 확실히 도와주시게 될 하늘의 아버지에게 불평을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외면하신다." 즉 그의 분노와 불쾌 그리고 복수는 늘 그들을 뒤좇게 된다. 이는 주님이 인간들에게 있어서 보다 사악한 박해자들에게 더 큰 대적자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를 주시해 보자.
(1) 우리들은 성서에 나타난 말을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대로 고집하지 말고 그 말씀의 의미와 뜻을 연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불경한 과오와 모호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성경의 표현이 이렇게 나타나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눈과 귀와 얼굴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상상해서는 아니 된다.
(2) 하나님은 그의 모든 의로운 백성들을 향해 특별한 관심과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가지고 계신다.
(3)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기도를 항상 듣고 계신다(요 4:31; 요일 5:14; 히 4:16).
(4) 하나님은 무한히 선하실지라도 그는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들을 증오하시며 그의 진노는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퍼부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의를 행하시게 될 것이며, 온 세상을 의롭게 하실 것이다. 그의 선하심은 이러한 의를 행하시는데 장해물이 되지 않는다.
4.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끈기 있고 겸손한 행동은 두 가지의 생각으로부터 충고되고 촉구되고 있다.
(1) 이런 끈기 있고 겸손한 행동은 고난을 방지하는 가장 훌륭하며 확실한 방법이 될 것이다. 13절에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일반적인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이지, 박해가 극심한 때의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추측이 된다. "보통 여러분들과 같이 결백하고 의미있게 살고 있는 모든 자들을 해하는 매우 극악무도하며 사악한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다."
(2) 이것이 고난을 개선하는 길이 된다. 즉 "만일 여러분들이 선을 추구하다가 고난을 받는다면" 이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된다(14절). 여러분은 이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 되며 여러분의 영광과 행복이 될 것이다(마 5:10).
[1] "여러분들을 때리는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여러분들의 원수들의 걱정이나 힘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또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것을 알아두자.
첫째, 선한 것을 좇는 일은 해로운 길로 들어서지 않는 최선의 길잡이가 된다.
둘째,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영광이며 행복이 된다. 진리의 목적을 위하여 선한 양심과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큰 영광이다. 고난의 기쁨은 슬픔보다 더욱 크며 영광은 치욕보다 더욱 큰 것이요 획득은 상실보다 더욱 큰 것이 된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원수들의 어떤 위협이나 분노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들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요, 그의 얼굴은 그들을 향하고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며 원수들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여러분들에게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원수들로 인하여 격동하지 말라."
[2] 사람들의 무서움을 두려워하는 대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15절).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사 8:12, 13).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을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눅 12:4, 5). 우리들이 성실과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할 때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두려움과 존경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의 성실하심을 신뢰하며 그의 지혜에 순복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모방하며 그의 최상의 놀라운 완전하심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때에 우리는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된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존귀하게 하도록 다른 이들을 인도하고 격려하는 것 같은 일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한다. 즉 예레미야 10장 3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두 가지 일이 요구된다. 이 원리가 여러분의 마음 속 깊이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사람들에 대해 부차적인 일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즉 여러분들이 고백하는 믿음에 관해 답변을 하거나 방어하기 위하여 준비를 갖추되 세상에서 어려운 고난을 당하나 여러분들이 그 중에도 모종의 소망을 가지게 되는 이유를 묻는 자에 그리고 대답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두자.
첫째,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대한 경외심은 고난에 대한 공포심을 해결하는 최선의 해독제가 된다. 곧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함으로 우리는 분명히 인간들을 덜 두려워 할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믿음은 온 세상을 방어하는 무기가 된다. 여기에 신앙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성립된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라 불쌍한 죄인들의 모든 필요에 타당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 중에 온전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며, 하늘로부터 계시된 합리적 계책안이다.
셋째,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의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한 답변과 변호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기독교에 대해 언급할 준비된 답변이 서 있어야 한다. 이는 그들이 어리석음이나 환상에 의해 충동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러한 변호는 한 두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만일 변호를 요구한다면 행정 관리들에게나 혹은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그의 지식과 진보를 위해 알기를 원한다면 그들에게도 변호를 할 수 있도록 항상 준지 해야만 한다.
넷째, 우리의 신앙에 대한 고백은 "온유한 두려움으로" 해야 한다. 우리의 소망에 대한 변명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에 대한 경계심과 우리들의 윗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겸손과 온유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선행과 고난 (베드로 전서 3:16,17)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여기에서 상세히 설명되어진 두 가지 수단 즉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이 아니고서는 반드시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양심은 그의 임무를 수행할 때에 순결하고 부패치 않았으며, 죄악으로부터 깨끗이 보전되어 있을 때에 선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비난할지라도 선한 양심은 여러분들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한 행실"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보이신 본을 따라 사는 거룩한 생활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양심과 행실을 잘 살피라. 그리고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욕하고 거짓으로 악을 행하는 자라고 비방을 할지라도 여러분은 자신의 정결함을 나타내어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선한 양심과 행실을 지킴으로써 당하는 고난이 어려운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는 아무리 여러분의 원수가 악할지라도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1. 가장 양심적인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의 모략과 중상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욕하며, 그들의 심령의 범죄를 그들의 책임으로 전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도 이렇게 취급을 당했다.2.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은 훌륭한 명성을 얻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 이러한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은 견실하고 영원한 명성을 부여한다.
3. 결국은 비난자들의 무분별, 부정, 거짓과 몰인정이 드러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거짓된 비방은 비난하는 자의 부끄러움을 초래케 한다.
4. 선한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함으로, 또한 그들이 정직과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이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다.
5. 선한 행동은 선한 사람에게 고난을 부여하는 것처럼, 악한 행동은 악한 사람에게 악을 면할 수 없게 한다. 사람은 두 가지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사도는 생각한다. 선을 함으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가혹하다면 악한 사람들이 악을 행함으로써 당하는 고난을 어떠할 것인가? 죄와 고난이 동시에 함께 임하는 사람은 매우 불행한 처지에 있다. 죄는 고난을 극심하게, 무익하게, 불쾌하게 그리고 파괴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 (베드로 전서 3:18-20)
Ⅰ. 그리스도의 본은 고난을 참는 것과 만일 우리들이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몇 가지 점을 상고할 경우 인식될 수 있는 그의 인내하는 능력에 대한 논의로써 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죄가 없음에도, 또한 만일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고난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고난에서부터 면제되지 아니했다.2.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의 이유와 명예로운 원인은 인간들의 죄이다. 곧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참되고 타당한 처벌이었다. 이러한 처벌은 속죄를 위해, 그리고 죄를 보상키 위해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속죄는 모든 죄에 대해 효과를 미친다.
3. 우리 주님의 당하신 고난의 경우에 있어서, 불의한 자를 위해 고통을 당하신 이는 의인이었다. 곧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우리와 대치시켰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죄를 모르는 그가 의를 모르는 자들을 대신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와 안전함은 그가 한 번 고난을 당하심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율법적인 희생 제물은 매일, 또는, 매년 반복되어졌으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 한 번 드려짐으로 모든 죄를 깨끗이 하셨다(히 7:27; 9:26, 28; 10:10, 12, 14).
5. 우리 주님의 고난의 축복 목적과 계획은 우리를 하나님께 이끌어 하나님과 화목케 하며, 우리를 아버지께 가까이 하고,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합당케 하며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엡 2:13; 3:12; 히 10:21, 22).
6. 그리스도의 고난의 문제와 사건은 그 자신에 있어서 이러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인간의 질에서 죽음을 당했으나 영으로서 다시 살아 일어나셨다. 자, 만일 그리스도가 고난을 면치 아니하셨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면케 되기를 기대하는가? 만일 그가 죄를 속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고난이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단련과 바르게 함일 때 왜 우리는 만족하며 감사치 아니하는가? 온전히 의로우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고난 중에도 감사하셨다면, 그 고통이 잠시적이요, 그 후엔 영광의 주님을 따르게 된다면 우리들은 어찌 고통을 참지 못하겠는가? 만일 그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면"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귀의하도록 하며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촉진하는데 유익이 되는 이상 우리들이 어찌 어려움을 감수하지 않겠는가?
Ⅱ.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본으로부터 옛 세대의 본에 이르기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서신을 받는 유대인들 앞에 그들은 같은 형벌 아래 있었음을 암시하면서 불순종과 불신앙을 계속하던 유대인들로부터 노아로 말미암아 전파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자들의 색다른 사건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더 오래 참으실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긍휼을 베푸는 자를 지금 맞이했다. 그 긍휼을 수락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와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노아 시대에 있던 불순종하던 자들과 같이 분명히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1.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1) 전도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담과 맨 처음으로 언약하신 이후로 교회와 세상의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창 3:15). 그리고 하나님이 자주 이동하라고 명하신 것처럼(창 11:5; 호 5:15; 미 1:3) 그리스도는 편협한 목적지가 아니라 각별한 동기로써 "나가셨다." 그는 나가서 "전파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분투하며 백성들에게 탄원하도록 에녹과 노아에게 능력을 주었고 그들에게 의를 전파했다(벧후 2:5).
(2) 듣는 자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죽고 육체와 영이 분리되었으므로 사도는 그들을 적당히 감옥에 있는 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저속한 라틴어 번역이나 카톨릭 교회 해석자들의 주장과 같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전파할 때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 것은 아니다.
(3) 이 백성들의 죄는 이러하다. 그들은 그 말이 의미하는 대로 "반역하며" 따르지 않는 불순종이며 또한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참으심과 고통으로 인해서 더욱 악화되었다(노아가 방주를 준비하고 그들에게 전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임할 바를 명확히 경고하는 동안 하나님은 120년 동안 그들을 기다리셨다).
(4) 그 사건의 전모는 이러하다. 그들의 육체는 몰락되었고 그들의 영은 지옥에 던져졌다. 이를 가리켜 감옥이라 불렀다(마 5:25; 벧후 2:4, 5). 그러나 믿고 순종한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
2. 이러한 이야기 전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이러하다.
(1) 하나님은 사람들이 모든 세대에 그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기 위해 지니고 있었던 모든 수단과 유리한 형편을 정확히 주시하고 계신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의 성령을 보냈으며 노아를 통해 밝히 경고했으며, 그들의 회개를 오랫동안 기다리신 옛 시대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인내가 죄인들을 오래 기다린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인내는 사라진다. 즉 그것은 헛되이 인간들을 항상 기다리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미치지 못한다.
(3) 불순종하는 죄인들의 영은 곧 그들의 육체에서 벗어나와 구원이 있는 지옥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4) 가장 많이 가는 길이 결코 가장 좋고 지혜로운 것이나 따르기에 안전한 길이 되지는 못한다. 홍수에 빠져 지옥의 저주를 받은 팔백만보다 방주 안에 있는 여덟 명을 따르는 일이 더욱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구원의 표증인 세례 (베드로 전서 3:21,22)
물 위에 있는 방주 안에서의 노아의 구원은 세례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방주에 의한 일시적 구원은 하나의 예표이었다. 그 대형(對型)은 세례에 의한 신도들의 영원무궁한 구원이며, 또한 사도 베드로가 아래에서 말하고 있는 것에 관한 잘못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Ⅰ. 사도 베드로는 구원의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표명하고 있다. 세례란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물로 씻는 외적 의식이 아니다. 세례에는 성실한 대답, 혹은 결정적인 선한 양심의 응답이 있으며, 믿음의 서약과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전적인 헌신을 약속하며, 동시에 육신과 세상, 그리고 마귀를 포기함을 의미한다. 이루어지고 보존되어진 세례의 언약은 확실히 우리를 구원한다. 씻음은 볼 수 있는 상징이다. 이것은 중대한 사건이다.
Ⅱ. 구원에 대한 세례의 효력은 어떤 공로가 아니라, 죽음을 상기케 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존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기초가 된다. 우리들의 죄에 대하여 죽고 거룩함과 새 생명에 대해 다시 사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다. 아래의 두 가지 점을 기억하자.
1. 옳게 받아들여진 세례 예식은 구원의 수단과 약속이 된다. "세례는 지금 우리를 구원한다." 하나님은 그의 의식 안에서 또는 의식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행 2:38; 22:16).2. 세례의 형식적인 참예는 응답적인 선한 양심과 행실을 갖추지 못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 있어야만 한다. 어린아이들은 이러한 응답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례를 받을 수가 없다. 참된 할례는 마음과 영의 응답에 있었다(롬 2:29). 유아들이 이 대답을 지금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팔일이 되면 할례가 허락되었다. 기독교의 유아들도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타난 어떤 금지법에 의하여 할례를 금지당하지 않는다면 유대의 유아들처럼 세례가 허락될지도 모른다.
Ⅲ.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한 다음 그의 승천과 동시에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 신자들에 의해 주제라고 생각되어지는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22절). 그리스도의 증진된 삶이 그의 깊은 겸손 다음에 이룩된 큰 영광이라면 성도들도 그와 함께 놀라운 기쁨과 영광에 이를 것이다.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세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의 그의 수고와 고난을 마친 후에 의기양양하게 하늘로 들리우셨다(행 1:9-11; 막 16:19). 그는 자신이 획득한 면류관과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셨다(요 17:5).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서 이룩하지 못한 그의 중보적 역사의 일부를 완성하기 위함과 그리고 그의 백성을 위해 중보를 이룩하며 당신의 만족이 충만함을 드러내고 그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을 소유하고 그들을 위해 집을 예비하며 그리고 그의 중보의 첫 열매이었던 보혜사를 보내 주시기 위해 승천하셨다(요 16:7).2. 그가 하늘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아버지 우편의 왕좌를 얻으셨다.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앉아 계시다고 함은 모든 수고와 고난에서의 완전한 휴식과 단절을 그리고 가장 존엄하신 인격의 권위와 군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3.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복하게 되어 있다. 지시하고 율법을 주며, 명령을 발포하고 최후의 선고를 하기 위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이며, 동시에 인간인 예수에게 위탁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원수들은 영원한 슬픔과 혼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종들은 영원한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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