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독과 외식에의 반대 (베드로 전서 2:1-3)
경건한 사도 베드로는 상호간에 이루어져야 할 사랑을 권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썩지 아니할 씨"라 칭하며 이 말씀의 탁월성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세세토록 살아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의 말을 계속하는 중 "그러므로 모든 악독을 바리라"라는 말을 아주 적합한 시기에 충고하기에 이른다. 이것들은 사랑을 파괴하며, 말씀의 효과를 방해하고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중생을 방해하는 죄들이다.
Ⅰ. 그의 충고는 마치 낡고 썩은 옷을 벗어버리듯이 악한 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곧 "분개하여 집어 던져 다시는 그것을 더 입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1. 벗어 던져 버려야 할 죄는 이런 것들이다.첫째, "악독"이다. 이는 모든 종류의 사악함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약 1:21; 고전 5:8). 그러나 제한된 의미로 생각할 때 어리석은 자의 심중에 거하고 있는 분노, 즉 넘치는 격분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악의를 계획하고 행하도록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악독을 기뻐하도록 하기까지 유리되는 것이다.
둘째, "궤휼"이다. 말하는데 있어서 속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아첨, 거짓, 그리고 망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무지와 나약함을 교활하게 이용하고 있다.
셋째, "외식"이다. 복수로 되어 있는 이 말은 모든 위선적인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거짓된 경건이다. 시민적인 행위에 있어서 외식은 거짓된 우정이요, 그 우정은 그들이 믿지 않는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과 그들이 결코 행하려 하지 않는 것들에 관해서 약속을 하는 또는 악의가 그들 마음 가운데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가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행하여지고 있다.
넷째, "모든 시기"이다 "시기"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 즉 선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복지와 그들의 능력과 번영, 명성, 혹은 그들의 성공적인 수고에 대해 한탄하는 모든 것이다.
다섯째, "비방"이다. 이것은 비난이며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이며 또는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즉 "중상"을 의미하고 있다(고전 12:20; 롬 1:30).
2.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다.(1)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들도 최악의 죄 곧 악독, 외식, 그리고 시기와 같은 것들에 대해 주의받고 경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일면 성화 되었으나 아직도 그들은 시험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최선의 봉사는 만일 우리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의식하지 못하였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한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죄는 두 번째 식탁에 대한 반대이다. 이것들은 버려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다.
(3)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은 우리들의 영적 유익과 영원한 복지를 방해할 것이다.
(4) 악독, 시기, 증오, 외식, 그리고 비방은 대개 병행한다. 비방은 그의 마음 가운데 악독과 궤휼이 자리 잡고 있는 표시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지는 유익을 방해하기 위하여 합세한다.
Ⅱ. 현명한 의사와 같이 사도 베드로는 악의에 찬 농담을 없이 할 것을 서술한 다음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위생적이며 규칙적인 식사를 권유한다. 권고된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렬하고도 부단한 사모이다. 그 말씀은 여기서 "신령한 젖"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구절은 영어로는 적당한 표현이 아닌데, 번역자는 그것을 "말씀의 젖"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들은 영혼이나 이성적인 인간을 위해 합당한 양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으로 육체가 아니라, 마음이 영양을 공급받고 강건해진다. 말씀의 젖은 "순전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어른들의 혼합물에 의하여 질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간혹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킨다(고후 2:17). 그들이 신령한 하나님의 젖을 사모하는 태도는 이렇게 나타나 있다. 곧 "갓난아이들같이" 사모하라고 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들의 중생을 상기시키고 있다. 새로운 생명은 합당한 음식을 요구한다. 새로운 존재로 탄생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만 한다. 유아들은 합당된 젖을 갈망한다. 그들의 젖에 대한 갈망은 강렬하며 자주 일어난다. 마치 굶은 사람이 참을 수 없는 감정으로 먹을 것을 탐하듯 유아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젖을 사모한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갈망은 이러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구원에 달하도록 성장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 주님과 구세주의 지식과 은혜 가운데서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벧후 3:18).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렬한 갈망과 애정은 그 사람이 중생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만일 그들이 어린애가 젖을 사모하듯 하는 갈망이 있다면 그 갈망은 그 사람이 거듭 났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최소한의 증거이지만 그 증거는 확실하다.2. 지혜와 은혜에 있어서 성장과 증진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포부와 욕망이 된다. 모든 영적인 수단은 교화와 발전을 위한 것이다. 옳게 사용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 발견한 상태의 사람을 그대로 남겨 놓지 않고 그를 좀더 증진시키며 훌륭하게 이룩한다.
Ⅲ. 사도 베드로는 그들 자신들의 경험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논쟁을 추가하고 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절).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의심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너희들은 악한 죄를 버리라"(1절). 너희가 이미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니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낸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에게 매우 인자하시다. 그는 그 자신 안에 무한한 선량하심을 지니고 계시며, 그는 매우 친절하고 자유하며 불쌍한 죄인들에 대해 인자하시다. 그는 가치가 없는 인간에게 자비롭고 선량하시다. 그 안에 은혜가 충만하시다.2. 우리의 구속자의 인자하심은 그것을 맛본 사람들에 의하여 발견된 회상의 것이다. 미각 기관에 대한 대상물의 즉각적인 반응이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보고 듣고 냄새를 맛보는 것처럼 멀리서는 맛을 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경험적으로 맛보려면 믿음으로써 그와 연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모든 섭리 안에서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시험에서 그리고 매일 그의 말씀과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서 우리는 그의 선하심을 맛보게 된다.
3. 하나님의 종의 최상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 삼은 적다. 그것은 한껏 마시는 것이 아니며 흡족하지 아니하다.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위로는 이와 같다.
4.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그 은혜를 인간들에게 나타내시며 전달하는 크나큰 도구이다. 신령한 말씀의 젖을 먹고사는 사람들은 그의 최상의 은혜를 맛보며 경험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서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의 은혜를 더욱 더 이해하고 경험하기를 항상 힘써야 한다.
산 돌 되시는 예수 (베드로 전서 2:4-12)
Ⅰ.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산 돌로 묘사하고 있다. 변덕스러운 재치군이나 신앙심 없는 불신자들은 그들의 장엄한 성전에 신앙적인 비중을 많이 두고 있으며, 예언자적인 칭호를 잘 이해하고 메시야를 "돌"로 명명하는 유대인들에게까지도 (사 8:14; 28:16) 이 묘사는 거칠고 눈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주 우아하고 품위있게 나타났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묘사하는 가운데 그의 강대하심과 영구한 지속성을 나타내며 그리스도는 그들의 보호와 안전, 그리고 그들이 세워질 토대로 그들의 모든 적에게 거치는 반석이 된다는 것을 그의 종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그리스도는 돌이라고 일컫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산 돌이시며, 그의 백성에게 생명의 왕이 되신다. 하나님과 인간에게 다루어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평판과 존경이 전혀 다르다. 그는 인간들에게 버림을 당했으며 그 자신의 나라인 유대인들에 의하여 또한 모든 인간에 의해 비난을 받거나 거부를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는 교회의 기호가 되도록 구별되어 미리 정해졌고(1:20), 하나님의 관점에서나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판단으로는 보배로우며 가장 존귀하며 선택되고 귀하신 품위를 지니신 분이다. 산 돌로 묘사된 그리스도에게 우리들은 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에게 나가는 것"은 편협한 행동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믿음으로만 나갈 수 있다. 우리들은 믿음으로 최초로 그와 연합이 되고 이후에도 믿음으로 그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1)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들의 소망과 행복의 초석이 되신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전하신다(마 11:27).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갈 수 있다(요 14:6). 그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영적 축복을 함께 나누게 된다(엡 1:3).
(2)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며 거부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경멸하고 싫어하며 반대하고 또한 거절한다(사 53:3).
(3)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는 사악한 세상에 의해 버림을 당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요, 하나님이 보실 때에 보배로우신 분이다. 그는 세상의 주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그의 백성의 구세주가 되시며 그리고 세상의 심판자로서 선택함을 받으셨다. 그는 그의 탁월한 본성에 있어서나 그의 직무의 권위, 또는 그의 봉사의 기쁨에 있어서 뛰어나신 분이다.
(4) 이 은혜로우신 구속자로부터 자비를 기대하는 자들은 그에게 나가야만 한다. 비록 은총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지만 그에게 나가는 것은 우리의 행위, 육체가 아닌 영의 행위, 열매 없는 소원이 아니라 진실한 노력인 것이다.
2. 그리스도를 기초로 묘사한 후 사도 베드로는 건축물과 그리스도 위에 세움을 입은 재료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5절에 너희들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졌다"고 말한다. 사도 베드로는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회와 법규를 소개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장엄한 성전도 그리고 많은 제사장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지휘를 반대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교회의 제도는 빈약하고, 유대 교회의 예배와 제물과 같이 장엄하고 화려한 맛이 없었다. 여기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대교의 성전보다 더 고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산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의 기초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산 돌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산 돌이시며 이 산 돌이 신령한 집을 이루며 그들은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그들은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리지는 않지만 그들은 더욱 좋고 더욱 귀하게 열납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그들의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제단을 또한 가지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거룩한 열납될 수 있는 희생의 제물을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1) 모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진 영적인 생활의 원리를 그들 안에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산 돌로 일컬어지는 것처럼 그들도 활기있고 생명있는 돌로 일컬어지게 된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지 않고 중생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생명있는 자가 된다.
(2)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인 신령한 집이다. 그 기호는 그리스도이시다(엡 2:20). 건축자는 목회자들이며(고전 3:10), 거기에 거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엡 2:22). 하나님의 집은 견고하고 아름다우며 모든 면이 다양하며 만민에게 유용한 것이다. 교회는 그 터에 있어서 신령하며, 그리스도는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재료로써 거룩하며, 그 집의 가구는 성령의 은혜요, 교회에서의 상호 관계는 하나님의 영과 믿음으로 이룩된 것이며, 그 집의 용도는 신령한 역사로 영적인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이 집은 매일 이루어지고 있다. 그 집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은 나날이 발전되어 가고 있으며, 전체는 모든 연령층의 새로운 사람들이 첨가됨으로 충만해진다.
(3)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거룩한 제사장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은 모두 선택된 사람들이요, 하나님 앞에 성별된 자들이며,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고 거룩한 은사와 은총을 부여받았었으며 하나님께 선하게 쓰여질 수 있는 자들이다.
(4) 이 거룩한 제사장은 하나님께 영적인 희생 제물을 드려야만 하며 또한 드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영적인 희생 제물은 그들의 몸, 영혼, 애정, 기도, 찬양, 긍휼,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의무이다.
(5) 최선의 사람들이 드려야 할 가장 귀중한 영적인 희생 제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다. 곧 그는 우리와 우리들의 예배가 그를 통해서만 상달될 수 있는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야하며 그에 의하여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Ⅱ. 사도 베드로는 이사야 28장 17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는 산 돌이 되신다"고 재차 강조한다.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가 책이나 장, 절을 인용하지 아니한 성서의 인용 방법을 주시해 보자. 이는 그 당시 성경에 이러한 구분이 이루어져 있지 않았음으로 사도행전 13장 33절에 나타난 바 특별한 시편에서 한 번 언급되어진 것외에는 모세나 다윗 혹은 선지자들에 관한 언급 이상의 것은 없었다. 이런 경우 선지자들에게 있어 이야기된 바가 어떠한 것인지를 의미하듯이 그들은 그들의 성경 인용에 있어서 성경의 구절보다 그 의미를 고수하려 하였다. 그는 성서를 인용할 때, 히브리어 성경이나 70인 역을 구구절절이 인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당하고 참된 인용을 할 수 있었다. 성서의 참된 뜻은 성서 가운데의 구절보다는 다른 말을 더 올바르고 충분하게 나타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기록되었다"는 말 가운데서 동사 "있다"는 능동형이지만 우리들의 번역자들은 이런 경우에 과거 주석 자들이 자주 혼돈을 이루었던 바 주격을 찾기 곤란함을 피하기 위해 수동형으로 나타내고 있다. 인용구의 내용은 이러하다. "보라 내가 시온에 둔다."
1. 종교의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들은 전적으로 성서적 증명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모세, 다윗 그리고 고대 선지자들에게 호소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규범이다. 그것은 완전하고 충분한 규범이며 그리고 놀랍고도 확실한 규범이다.2. 하나님께서 성서 안에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주신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각별한 관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보라! 내가 두노니." 세례 요한도 동일한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요 1:29).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관심의 요청은 그 문제의 탁월성, 그 문제의 중요성, 그리고 우리들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을 나타내 준다.
3. 교회의 머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심은 "나는 시온에 놓는다"란 말과 같이 하나님의 뛰어난 역사이시다. 교회의 머리로 교황을 제정하는 일은 인간의 고안물이요, 거만스러운 자만이다. 즉 그리스도는 유일한 터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4.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의 영적인 건축물에 놓여진 크나큰 모퉁이 돌이다. 모퉁이 돌은 건물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보좌하며, 연합하고, 그 건물을 꾸민다.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한 교회와 자신의 영적인 점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다.
5.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이가 아니라 그의 신실한 백성들의 보조와 구원을 위한 모퉁인 돌이 되신 것이며 결코 바벨론과 그의 원수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실된 믿음은 인간의 극심한 혼란을 방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세 가지 사실들이 인간을 크나큰 혼돈에 빠지게 한다. 곧 실망과 죄와 심판이다. 그러나 믿음이 이 모든 것들을 방지한다. 믿음은 이것들을 위한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
Ⅲ. 사도 베드로는 7절에서 중요한 추론을 유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신다. 사도 베드로는 선량한 사람들이 대한 경의를 표하고 예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요, 또한 존귀하신 분이다. 고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면류관이며 영광이시다. 믿는 너희들은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를 영원히 영화롭게 함으로 부끄러움도 당치 아니하리라." 사악한 사람들과 같이 불순종의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변격하기를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모퉁이의 머리돌로 삼으실 것을 결정하셨다.
1. 정당하고 필요한 결말에 의해서 성서로부터 추론해 낸 것은 무엇이든지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말씀처럼 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도 베드로는 선지자의 증거로부터 추리해내고 있다. 선지자는 속단하여 그와 같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결말을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구세주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의심하였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성서를 연구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는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 되심을 언급한 곳이 성서 가운데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러한 성경은 왕권이 유대 나라를 떠나기 전에 두 번째의 성전이 존속하던 기간, 그리고 다니엘의 70주가 지난 뒤에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야 했던 그가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결론을 얻기 위하여 인간은 이성과 역사를 보는 눈과 경험을 사용해야 한다. 더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혀 오류가 없는 성서적 결론이다.2. 신실한 목회자의 임무는 일반적인 진리를 그의 청취자들의 특수한 조건과 상태에 적용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6절). 그리고 그 말을 어느 면에서 좋은 사람에게나 나쁜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지혜와 용기와 신실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청취자들에게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들에게 가장 보배로우신 분이다. 그의 인격의 위엄과 우아함, 그의 직분의 권위, 그의 친밀한 관계, 그의 놀라운 역사, 그의 무한한 사랑, 이 모든 것이 신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최대의 경의와 존경을 가지게 한다.
4.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참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들은 설득되지 아니하며 쉽사리 믿으려고 하지 않는, 그리고 회개치 않는 자들임을 알자. 이러한 견해가 다소 타당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진실한 믿음은 찾아 볼 수 없다.
5. 그리스도의 교회에 건축자들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최악의 원수들이 되고 있다. 구약에 있어서 거짓 선지자들은 가장 큰 불행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 그리고 신약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당한 가장 큰 반대와 잔인함은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대제사장, 그리고 로마의 성직자였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최악의 원수가 되기까지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를 보호하는 척"하는 자들이었다.
6. 하나님은 거짓된 친구들의 허위와 그의 최악의 원수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자신의 역사를 수행하시며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도와주실 것이다.
Ⅳ. 사도 베드로는 8절에서 돌에 대한 비유를 견지하면서 좀 더 서술을 첨가하고 있다. 그 말씀은 이사야 8장 13,14절에서 인용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그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른 반석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군의 주 그리고 가장 높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1. 건축자들과 대제사장들은 그를 거부했으며 백성들은 그들의 지도를 따랐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넘어지며 상처를 입었다. 이에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권능한 돌과 반석으로 임했으며 그들을 멸망으로 벌하셨다. 마태복음 21장 44절 말씀에 의하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가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셨다.(1) 불순종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역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넘어지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의 교리, 그리고 그의 훈계의 정결성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학자들은 그리스도 출현의 초라함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만을 신뢰하자는 제의에 특별히 주저한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은 얻을 수 없었고 기록된 대로 율법의 행위로써만 가능했다. 이는 로마서 9장 32절에 있는 바와 같이 "부딪힐 돌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2) 어떤 자에게는 예수께서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반면 또 다른 어떤 자들에게는 그들의 죄와 멸망의 근거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소생과 멸망을 위하여 세우심을 입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의 창시자는 아니며, 다만 그 죄를 유발케 하는 동기가 되신다. 그들 자신의 불순종이 그리스도에게 부딪히게 하며 그를 거부함으로 그리스도는 심판자로서 그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가하신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들은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질 것이다.
(3) 하나님 자신이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넘어지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멸망을 정하였다. 복음에 결정적으로 불성실하며 경멸하는 모든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멸망당할 자들이 누구임을 아셨다.
(4)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전반적으로 거부하고 모든 연령층의 무리들이 그를 경멸하는 것을 보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과 의무를 이행함에 실망을 줄 수는 없다. 이는 이미 선지자들에 의하여 오래 전에 예언된 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성서와 메시야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를 영립하는 자는 크나큰 특권을 갖는다(9절).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으로 인해 특권을 얻었으며 세상에 남은 자들로부터 분리되어질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은 각별히 그들의 고전적 특권을 귀중히 여기었다. 유대인들은 "자, 만일 우리들이 복음의 제정을 수락한다면 우리는 이 모든 특권을 상실할 것이며 이방인들과 똑 같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1) 이 반대의 이유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만약 그들이 복음의 제정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파멸되었다(7,8절)고 말한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였다면 그들은 실제적 이익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고 있었던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가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1]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택하신 족속"이다. 곧 그들은 모두 한 가족을 이루며 일반 세상과는 구분된 사람들이며,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고 그의 성령에 의하여 성결되어지지 못하였더라면 이룩할 수 없었던 새로운 영과 원리 그리고 행위의 사람이 될 수 없었다.
[2] 그리스도의 모든 진실한 종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들과 그들의 영적인 모든 원수들에 대한 그들의 그 능력에 있어서 왕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그들의 진보와 탁월성에서, 그리고 그들의 소망과 기대에 있어서 왕과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죄와 죄인들로부터 분리되었으며 하나님께 성별되어 하나님께 열납되어질 수 있는 영적인 예배와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3]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간에 하나의 거룩한 나라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한 통치자 밑에 모이어 같은 방법과 관습에 동의하며, 동일한 법에 의해 통치를 받는 하나의 국민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성별 되어지고 헌납되어졌으며 그의 성령에 의하여 새롭게 성화 되어졌으므로 거룩한 백성들이다.
[4]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됨은 그리스도의 종의 영광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획득하고 선택하고 보호하며, 기뻐하시는 백성들이다.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이 네 가지 위엄은 그들에게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본래 그들의 처음 상태는 무서운 어둠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다행히 어둠에서 놀라운 빛과 기쁨, 즐거움, 그리고 번영의 상태로 부름을 입었다. 그들은 말과 행동으로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해야 한다.
(2) 이 백성들을 만족케 하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이룩된 크나큰 긍휼과 권위에 대해 감사토록 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전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비교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린 때에는 긍휼도 얻지 못했으며 오히려 버림을 받고 이혼을 다한 상태였다(렘 3:8; 호 1:6, 9). 그러나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긍휼하심을 힘입어 얻은 바 되었다.
[1]훌륭한 백성들은 과거의 그들 상태를 가끔 회상해 보아야 한다.
[2]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백성들이다. 나머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그들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3]하나님의 백성의 수에 들어가는 것은 가장 큰 자비이며 또 그렇게 될 수 있다.
Ⅴ.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육체의 정욕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11절). "택하신 족속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선량한 사람들일지라도 사도 베드로가 그들을 향하여 열심히 또는 사랑스럽게 그들을 권고하고 있는 바, 죄악을 제어하기 위한 권고가 필요하다. 베드로는 어려움과 의무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최대의 관심을 표시한다. 즉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간청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의무는 우선 육체적 정욕의 경향과 발등을 제어하고 억누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본성의 부패에 기인하고 있으며 육체적 성적 욕망과 육욕을 만족시키고 있다.
1.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것들을 기피하는 까닭은 하나님과 선한 사람들에게 대해서 존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자들이다."2. 그들의 세상에서의 상태가 "나그네와 행인들" 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통과하는 나라의 사악과 정욕에 빠져 그들의 여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3. 이러한 죄악이 이루는 불행과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그들을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1) 죄가 인간에게 행하는 가장 큰 불행은 "영혼을 거스려 사우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도덕적 자유를 파괴하고 영혼의 기능을 약화하며 쇠약하게 한다. 그것은 영혼의 위로와 평화를 앗아간다. 그것은 영혼의 위엄을 떨어뜨리며 파괴한다. 그리고 영혼의 현재의 번영을 방해하며 영혼을 영원한 불행으로 몰아 넣는다.
(2) 죄의 모든 것 중 "육체의 정욕"보다 영혼에 더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은 없다. 육체적 정욕, 음탕 등은 하나님께 추악한 것이며,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는 파괴적이다. 이와 같이 그러한 죄악들에 넘겨지는 것은 혹독한 심판이다.
Ⅵ. 사도 베드로는 그들로 하여금 깨끗한 행실로 그들의 고백을 진실되게 하라고 권고한다. 모든 기회와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행실과 행위는 정결하여야 한다. 이것은 선하고, 사랑스럽고, 향기가 나며, 호감을 주는 것이며, 비난받을 것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그들에게 상습적인 원수가 되고 있으며 항상 그들을 중상하고 "악을 행하는 자"라고 비방하는 이방인들과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정결해야 한다. "결백하고, 의롭고, 선한 행실은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함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될 때 그들이 여러분에게 돌아오게 된다. 그들은 지금 여러분들을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선한 일을 행함으로 그들에게 여러분들 자신을 변호하는 이것이 그들에게 확신시키는 방법이다. 권고의 날이 임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 말씀과 은혜로써 그들을 부르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1장 68절의 말씀대로 그들이 여러분들의 훌륭한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여러분들을 칭찬하게 될 것이다. 복음이 그들에게 이르고 그리고 효력을 거둘 때 좋은 그들의 행위를 고무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쁜 행위는 그들의 행위를 방해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은 빌립보 4장 8절에서 나타난 대로 정결한 행실을 수반해야 한다.2. 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비방을 받는 것은 선량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공통된 운명이다.
3. 하나님의 자비로운 권고 아래 있는 자들은 선한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즉시로 바꾸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전에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 비방을 받던 자들을 칭찬하게 한다.
윗 사람들에 대한 순복 (베드로 전서 2:13-25)
그리스도인의 행실의 일반적 원칙은 정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상관적인 의무의 양심적 이행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특별히 명백하게 다루고 있다.
Ⅰ. 순복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에 있어서 소문난 개혁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나라의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행정 관리들에게 순복해야 하는 규칙과 규범을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므로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서술하고 있다.
1. 요청되는 의무는 순복이며, 이는 그들의 사람들에 대한 충성과 존경, 그들의 정당한 법률과 명령에 대한 복종, 그리고 정당한 처벌에 대한 순복을 내포하고 있다. 이 순복이 이루어져야 할 사람들과 대상은 아래와 같다.(1)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세운 모든 제도"에 대한 순복이다. 행정 관직은 분명히 신성한 권리이다. 그러나 정부의 특별한 형태, 관직의 권력, 그리고 이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인간의 제도의 하나이며 특수한 각 국가의 법과 제도에 의하여 통치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국가를 하나로 묶는 일반적 규범으로써 어떠한 형태이든지간에 정부의 형태를 이룩케 하는 것이다.
(2) 특별히 권위에 있어서 으뜸이요 놀라운 지위에 속한 "위에 있는" 왕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왕은 법인이지 폭군은 아니다. 또는 "방백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대리자이며, 총독 대리이며, 지압 통치자를 말하는 것이며, 어떠한 사람들은 "왕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즉 왕에 의해서 통치하도록 임명을 받은 자이다.
2.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주를 위해서"이다. 이는 인류의 선한 사람들을 위한 행정관으로 정해진 자들이며, 그들은 순종과 순복을 요구하고 있다(롬8장). 그리고 그들의 존귀는 그들의 군주에 대한 신하들의 의무적인 처신에 관여해 있다.
(2) 행정관의 임무의 목적과 용도는 악을 행하는 자를 처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그들은 선한 사회를 위하여 임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과오는 그들의 기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행에 있는 것이다.
[1] 참된 종교는 시민 통치의 최고 지지자이며 주님과 양심을 위하여 순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2] 모든 처벌과 모든 세상의 법정관들을 방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세상에 악을 행하는 자들이 있다.
[3] 행정관이 자기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세상을 바르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정당하게 형벌을 가하며, 정당하게 상을 주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들이 행정관에게 순복해야 할 다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요, 결과적으로 그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악의에 찬 중상을 못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대문이다(15절).
[1] 선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의무를 수행하는데 가장 유력한 판단 기준이 된다.
[2] 행정관들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무 중 중요한 일부분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불합리한 비난을 받지 않도록 처신하도록 힘써야만 한다.
[4] 신앙과 신앙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들은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이다.
(4)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영적인 본질을 상기시키고 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 17장 15절에서 나타난 대로 군주가 아닌 그들의 "형제 중에서 택한 한 사람에게"순종할 것이라고 결론을 줄이고 있으며, 개종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때문에 그러한 복종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오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유하나 무엇으로부터 자유한가를 말해 주고 있다. 결코 시민 행정관에게 순복을 요구하는 율법에 대한 의무나 복종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죄와 사탄의 압박으로부터 또한 형식적 율법으로부터 영적인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악을 가리우는 데나 혹은 하나님이나 그들의 윗 사람에게 대한 어떤 의무를 게을리 하는데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인이다(요 8:36). 그들은 사탄의 지배로부터 자유하며, 율법의 정죄와 하나님의 정죄, 임무의 무거운 짐, 그리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하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함부로 남용하지 아니하도록 단단히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대해 악을 가리거나 윗사람에게 대해 불복종을 가리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3. 사도 베드로는 네 가지의 찬탄할 만한 순복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마치고 있다.
(1) "뭇 사람"을 공경하라는 것이다. 적당한 존경을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것을 말한다. 가난한 자가 멸시를 받아서는 안 된다(잠 17:5). 사악한 무리들이 공경을 받아야 한다. 다만 그들이 사악함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또 다른 기질 곧 재질, 신중함, 용기, 고용의 우월성, 혹은 백발의 머리 때문에 공경을 받아야 한다. 아브라함, 야곱, 사무엘,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은 선량치 못한 사람들에게도 적당한 경을 베푸는 일에 주저하지 아니했다.
(2) "형제를 사랑하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이다. 그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고, 거의 같은 자격을 부여받았으며,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같은 본향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한 애정으로써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
(3) 최고의 공경과 의무와 순복으로써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면 다른 세 가지 임무의 어느 하나도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해야 할 임무는 수행되지 않는다.
(4) 어느 다른 사람에게 보라. "왕에게 해당한 최상의 공경을" 그에게 드려야 한다.
Ⅱ. 종들의 경우에 대해서도 백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도적인 결론을 격려하고 있다. 이는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그들의 불신앙적이며 잔인한 주인들로부터 그들을 자유케 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도는 "종들아!순복하라"(19절)고 말한다. 사도 베드로가 의미하는 종은 고용되었거나 돈으로 팔려 온자, 혹은 전쟁에서 잡혀 온 자, 집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면 계약에 의해서 견습자로 얼마 동안 섬기는 자들을 말한다. 아래의 사실들을 주시해 보자.
1.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임무를 성실하게 그리고 결백하게 이행하도록 하급자가 해야 하듯이 존경과 애정으로 회신하며, 고난과 불편에도 인내로 "순복하도록" 복종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사환들은 그들의 주인들에게 마땅히 순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주인이 사람들의 섬김을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 곧 그들을 잘 대하면서 조금씩 그들의 권리를 감사하는 자에게 뿐만 아니라 전혀 기쁘게 해 주지 아니하는 왜곡되고 심술궂은 자에게도 순복하라는 것이다. 아래 사항을 알아두자.(1) 사환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순복함으로 그들을 혹시나 기분 상하게 할까 하는 두려움으로 그들의 주인에게 처세해야 한다.
(2) 어느 한 관계의 죄 많은 비행은 또 다른 관계에 대한 죄 많은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즉 사환은 비록 그 주인이 몹시 까다롭고 사악하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맡은 바 직분을 수행하여야 한다.
(3) 선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환과 아래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온순하여야 한다. 우리들의 경건한 사도 베드로는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가난한 사환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명백히 그들의 경청자들 중 좀 더 가난한 자와 그 외의 사람들에게 적용해야 할 목회자들이 사도 베드로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
2. 사환들에게 순복할 임무를 부여한 사도베드로는 그것에 관하여 정중히 이야기를 계속 펴 나간다.
(1) 그들이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지 않고, 고집이 센 주인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계속하며 고난을 감수하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생각함으로 겪었던 고난에 상급을 더 하실 것이다. 그들이 정당하게 벌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견디는 것이라 해도 칭찬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19,20절). 아래의 사실을 알아두자.
[1] 세상에 천박한 상태란 없다. 다만 거기에서 인간은 양심적으로 살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2] 가장 양심적인 사람은 종종 크나큰 고난을 겪는 자가 된다. "하나님께 대한 양심 때문에 그들이 최악의 고난을 당하고, 그들이 선을 행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고난받는 자는 칭찬받을 만하며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신앙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는 그들의 최상의 소망이요, 만족이다.
[3]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고난을 인내로써 견디어야 한다. "죄가 있어 매를 맞으면 참아야 한다. " 이 세상에서의 고통은 언제나 우리들의 미래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곧 만일 아이들과 종들이 예의가 없고 불성실함으로 이로 인해 받는 고통은 하나님께 용납될 수도 없거니와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도 없다.
(2) 부정당한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인 종들이 참아야 할 것을 격려하는 몇 가지의 이유를 더 하고 있다(21절).
[1]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를 위하여" 부름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며,"우리의 "본"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아래의 몇 가지를 기억하자.
첫째,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받은 사람이라 일컬어질 종류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을 기대해야만 한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는 자기를 스스로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도록 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과 하나님의 섭리,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예비된 은총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부름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마땅히 고난을 받도록 되어 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하여 아니 "우리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즉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성결케 하신 그가 고난을 받으신 것이며,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고난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의 육과 함께 영이 고난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의 선함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24절).
셋째,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가장 부당하고 잔인한 고통에도 우리로 하여금 잠잠케 하실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선의 준비와 온전한 인내로써 우리를 위하여 자진해서 고난을 당하셨다. 이 모든 고난은 그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God-man)이심에 당하신 것이다. 따라서 최악의 징벌을 당해야 할 우리 인간들이 후세에 말할 수 없는 상급을 이루게 하는 이생의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3. 그리스도의 순복과 인내의 본에 대해서 여기에 보충 설명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다. "(1) 그리스도는 불법적으로 까닭없이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22절). "그는 아무에게도" 폭력이나 불의, 혹은 "악을 행하신 바가 없다. " 그는 어떠한 종류의 죄악도 행하시지 않았다. "그의 입에는 궤사도 없으셨다"(사 53:9). 그의 말씀과 그의 행동이 모두 진실하고 의롭고 올바르다.
(2) 인내하셨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다"(23절). 그들이 주님을 비방하고, 욕하며, 망령되이 불렀으나 그는 "잠잠하고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다. "그들이 계속 상처를 입히고 때리며 그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웠으나 그는 "위협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로지 때가 이르러 그의 순결성을 밝히시며 그의 원수들을 갚아 주시며 "의롭게 판단해 주실" 하나님께 자신과 모든 문제를 위탁하셨다. 우리는 아래 몇 가지 사항을 알 수 있다.
[1] 우리의 축복 받은 구속자는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며 죄에서 해방되시었으므로 어떠한 시험도, 비난도, 그로 하여금 최소한의 죄악된 또는 예의에 벗어난 말을 저지르도록 할 수 없었다.
[2] 죄에 대한 비난도 그것의 임무를 정당화할 수 없다. 따라서 원수들의 무례함과 잔인함 그리고 불의함을 비난 복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정당화해 주지 않을 것이다. 죄에 대한 이유는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파하기 위한 강력한 이유를 항상 간직하고 있다.
[3]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사람과 모든 문제에 대해 정당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들은 인내와 순종으로 우리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
4. 21-23절을 미루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순히 고난 가운데 인내의 본보기만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죽음에 대한 더 영광된 계획과 효력을 첨가하고 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지해야 할 사실은 아래와 같다.
(1) 고난받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친히"라고 하는 말은 "몸소"라는 의미이다. "친히"라고 하는 표현은 강력한 표현이며 그가 모든 고대 예언을 입증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그리스도를 레위 제사장들(그들은 다른 짐승의 피를 드린 자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몸소 피를 흘리신 분이다. 히 1:3)과 구분하며, 인간 구원을 위한 역사에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참여를 배제하는 것을 보여 주기에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몸으로"라고 하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데 이는 마음으로 받는 고통이 아니었다(마 26:38). 마음의 고통은 내적인 것이요, 감추어져 있는 것인데 반해 몸의 고통은 본을 보이기 위한 이 고난받는 종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이며 더욱 명확한 것이다.
(2) 그가 받은 고난은 "벌거 벗기움"과 상처와 죽음, 곧 가혹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3) 그가 고난을 받으신 까닭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이다. 이는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1]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시키심으로"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신 분과 같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사 53:6).
[2] 그리스도는 그들의 징벌을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켰다.
[3]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제하시며 우리로부터 멀리 하셨다. 이는 마치 속죄양이 사람들의 죄를 머리에 지고 상징적으로 담당하였고 그 죄를 먼 광야로 내어쫓은 것과 같이(레 16:21, 22) 하나님의 어린양은 몸소 우리의 죄를 단번에 담당하시고 세상 죄를 없이하셨다(요 1:29).
(4) 그리스도의 고난의 열매는 이러하다.
[1]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룩된 성화와 죄의 극복, 그리고 의의 거룩한 신생이다. 이에 대한 본보기와 능력있는 동기와 권능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나타났다.
[2] 의롭다하심이다. 그리스도는 속죄 제물로서 장사되었고 십자가에 못 박힌 바 되었으며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 " 여기에서 알아야 할 점은 이런 것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셨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들을 속죄하셨다.
둘째,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의 죄를 속죄하셨으므로 그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죽기까지는 그리스도께 안전하게 의지할 수 없다.
5.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이런 상태와 현재 상태의 다른 점을 상기시킴으로 그리스도인 된 사환들에게 대한 그의 충고를 마치고 있다(25절). "저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하는 말은 아래와 같은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1)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그는 길을 잃는다. 이는 인간 스스로의 행동이며 그는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떠나 길을 잃은 것이다.
(2) 그의 비극은 바로 이것이다. 그가 목장을 떠나며 목자와 양떼들을 떠나 크나큰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3) 중생함으로 이러한 상태에서 회복을 얻는다. "돌아왔느니라" 하는 이 말은 수동형으로써 죄인이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실수와 방황에서 그의 양떼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참된 목자이시며 부지런한 목자요, 감독이요, 그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배울 바 몇 가지는 아래와 같다.
[1] 중생하기 이전의 죄인들은 항상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삶은 과오와 실수로 일관된 삶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의 양떼와 함께 거하며 그들을 돌보는 영혼의 목자장이며 감독이시다.
[3] 이 절대적인 목자의 사랑과 보호를 기대하는 자들은 그에게 돌아와야만 하며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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