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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베드로의 인사(베드로 전서 1:1,2)

1절과 2절에 있는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Ⅰ. 본서의 저자 문제가 나온다.

1. 본서의 저자는 베드로로 나타나 있다. 그의 본래의 이름은 "시몬"이었으며 그리스도는 그에게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가 하나님의 교리에 뛰어난 초석이 되어야 할 것을 알리는 "바위"를 의미하는 베드로란 또 다른 이름을 주셨다(갈 2:9).

2. 그의 직분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다. 사도란 말은 보냄을 받은 자, 대사, 전령,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나, 더 엄격히 말해서 사도란 말은 기독교회 내에서 최고의 직무를 의미하는 말이다. 고린도 전서 12장28절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로 사도들을 세우셨다." 그들의 권위와 탁월성은 이러한 점에 기인되고 있다. 즉 사도들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직접 택함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복음 선포의 최초의 증언자요, 전도자였다. 그들의 받은 바 은사는 탁월하고 특이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아무 때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때면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모든 진리로 인도되며, 예언의 영을 받았으며, 모든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큰 능력과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도는 누구나 모든 교회와 전도자들에게 있어서 다 같은 감독이었다. 베드로는 이처럼 겸손하게 아래와 같이 말한다.

(1) 사도로서의 자신의 특이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사와 은총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정당하게 인정하고 때로는 주장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체하는 것은 위선이며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은혜를 망각하는 일이 된다.

(2) 베드로는 그의 사도적 기능의 근거와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에게 본 서신을 기록할 소명을 받은 것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본서는 여러 가지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 특별히 목회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그들의 근거와 그들이 부르심을 받았음을 상기하도록 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이 다른 사람들 앞에 그들이 설 수 있는 이유이며 그들에게 내적인 도움을 주며 모든 위험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위로를 주는 것이다.

Ⅱ. 본 서신을 받을 사람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이 나타나 있다.

1. 그들의 외적인 상태를 볼 때 그들은 "본토와 갈라디아 등지에서 흩어져 사는 나그네"였다. 그들은 시리아의 안디오커스 왕의 명에 의하여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 200년 전에 주로 바벨론에 옮겨와 사는 유대인들의 후손들로서 소아시아 여러 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프리덕스(Dr. Prideuax) 박사가 생각하고 있는 것같이 아마도 사도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있으며 할례 받은 사도로서 그들을 회개시킨 것 같으며 그후 베드로는 유대 국민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던 바벨론으로부터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 같다. 당시 그들은 몹시 가난하고 괴로운 처지에 살고 있었다.

(1)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이라도 섭리에 따라 있어지는 시련 때문에 분산되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게 될 수도 있다. 세상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훌륭했던 이러한 사람들은 산과 들과 토굴로 유리하도록 강요되었던 것이다.

(2) 우리는 박해를 받아 각 곳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이들은 사도의 특별한 배려와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는 성도들의 탁월성과 궁핍한 생활에 대해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3) 선량한 백성의 가치는 그들이 처한 외적 조건에 의하여 평가되어서는 아니 된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탁월한 백성이 있었으며 그들은 아직도 세상에서 빈곤 속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의 눈길은 항상 유랑하는 그들 위에 있었으며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방향과 위로를 제시하기 위해 친절한 붓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2. 베드로의 서신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영적인 상태에 대해 기록이 되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었다. 세상에서 눌리고 멸시당하는 이 가난한 나그네들은 하나님과 함께 최고의 영광을 누리며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그들이 이러한 영광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이러하다.

(1)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택함이란 직분에 관계된 말이다. 즉 사울은 하나님이 왕으로 선택한 사람이었다(삼상 10:1). 그리고 주님은 그의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요 6:7)고 하셨다. 한편 그 택함이란 특별한 특권의 향유인 교회의 직위에 대한 택함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다 (신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또는 이 선택이란 영원한 구원에로의 택했다는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령의 성결케 하심과 진리를 통해 믿음으로 너를 구원하셨도다." 하여간 선택이라고 함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적당한 방법으로 영생으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섭리와 그의 결단을 수락하는 일을 의미한다.

[1] 이 선택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되어진 것임이 말씀되었다는 말이다. 미리 아심이란

첫째, 단순히 어떠한 사건이 이루어지기 전 그것이 앞으로 이루어질 것을 미리 아는 것, 선견지명 혹은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수학자가 월식이 나타날 때를 확실히 미리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예지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셔서 이미 있었던 것과 지금 있는 것이나 앞으로 있을지 모를 모든 일들을 보고 계신다. 그러나 이러한 예지는 그 사건에서 예지한 바가 그대로 정확히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사건이 일어난 원인에 대한 동기는 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월식을 미리 아는 수학자가 그 월식을 유발하는 동기는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둘째, 예지는 때때로 뜻, 약속, 그리고 승인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2장23절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대로 내어준 바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예지가 아니라 20절의 말씀대로 미리 정하신 바이다. 이러한 뜻을 여기에 적용시켜 볼 때 선택이란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무조건적 은총에 따라 선택함을 입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2] 선택이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이란 말로 첨가되어 있다. 여기에서 아버지란 말로 우리는 삼위일체의 제 1위를 이해하게 된다. 삼위 안에는 하나의 질서가 있다. 거기에는 우열이 없다. 그들은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일하며 그들의 일은 통일된 유기적 섭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택하심은 아버지에게 나타난 탁월한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은 삼위 중 한 분이 다른 두 분을 배제하는 일이 없이 이루어진 바 화해는 성자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성결은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과 같다. 각기 구분되어 있는 삼위되신 하나님 밑에서 우리 개개인의 의무가 어떠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2) 베드로의 서신을 받는 사람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선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선택의 목적과 최후의 결과는 영생과 구원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취되기 전에 선택함을 입은 자들마다 성령에 의하여 성결함을 얻고 예수의 피로 의롭다함을 얻어야 한다.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성령의 성결케 하심과 예수의 피 뿌림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 여기에서 성화(Sanctification)의 의미를 이해하되 단순한 내세와 관계된 성화만이 아니라 중생함으로 이룩된 현실적 성화를 이해해야 하겠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매일매일의 경건한 훈련을 쌓고 더욱더 우리의 정욕을 억제해 가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깨달음으로 복종이라고 하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든 의무를 하나님 앞에 수행해 나가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이란 말에 대해 어떤 사람은 사도 베드로가 영적인 사람 혹은 성령으로 성화된 사람을 의미하고자 하였다고 보고자 한다. 율법적이며 전통적인 성화의 개념은 육체적 성화의 한도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화는 인간의 영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그의 영혼을 정결케 한다. 반면 또 다른 이들은 보다 나은 이유를 들어 성령은 성화의 창조자이신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성령은 마음을 깨끗케 하며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신다(롬 8:13). 그리고 성도의 마음에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하신다(갈 5:22, 23). 이러한 성령의 성화는 수단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요한복음 17장 17절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다. "순종함"이란 말을 생각해 볼 때 순종이란 말은 이미 앞서 설명에서 지적한 바대로 순종 이전에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와 또 순종함이라고 하는 말씀은 성화의 궁극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이 목적은 반역한 죄인들로 다시 순종케 하며 더 나아가 절대적인 복종을 하게 했다. 이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가 진리를 순종하므로 너희의 영혼을 깨끗케 하였다"(22절)고 하는 것과 같이 죄인들이 진리와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케 됨으로 정결케 되었다.

(3) 베드로의 서신을 받는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게 하려 함"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정결케 되도록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여기에는 이 유대교의 개종자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 말인, 율법 아래서의 전형적인 피흘림에 대한 명확한 암시가 있다. 희생 제물의 피는 흘려야만 할 뿐 아니라 뿌려져야만 한다. 이미 예정된 축복이 제물을 드리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율법적인 희생 제물로 형태화 되었으며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충분한 희생 제물로써의 그리스도의 피는 흘려졌을 뿐만 아니라 뿌려져야 하고 선택된 모든 성도들에게 전달되어져야 한다. 이는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지은 죄의 용서함을 얻기 위해서였다"(롬 3:25). 이러한 피의 뿌림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며 (롬 5:9),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을 인봉하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언약에 관한 하나의 표시이며(눅 22:30), 그 피는 모든 죄를 사하시며(요일 1:7), 우리를 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히 10:19).

[1]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택하셨고 또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아니하셨다. 이들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 궁극적인 목적으로써의 영생을 얻도록 선택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수단이 되는 복종으로 택하심을 받았다.

[3] 인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되고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그의 생애는 진정한 복종이란 있을 수 없다.

[4] 인간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삼위 일체 되신 삼위(threepersons)께는 상호간의 일체와 협력이 있다. 그리고 삼위간의 행위는 상호간의 통일이 이루어져 있다. 성부께서 누구를 택하시든지 성령께서는 복종으로 말미암아 성결케 하시며 성자께서는 그의 피를 뿌려 주심으로 구속해 주신다.

[5] 삼위일체의 교리는 모든 계시 종교의 바탕이 된다. 만약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다면 성자의 구원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무효화하는 일이 되며 이것은 안전과 기반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Ⅲ. 베드로는 서신을 받은 이들에게 인사를 한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그들을 위해서 갈망하였던 축복은 "은혜와 평강"이다.

1. "은혜"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은혜란 모든 은사의 효능과 용서와 치유와 도움과 구원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을 의미한다.

2. "평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는 평강은 가정적, 사회적 평강과 아울러 교회 안에서의 신앙적이며 우리의 양심 안에서 평안의 감정으로써 하나님과의 영적 평안 등, 이 모든 류의 평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3. 이러한 축복에 연관된 요구와 간구가 여기에 나타나 있다. 그들에게 더 많은 축복이 있기를 간구하는 것인데 이는 이미 그들이 이 축복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또한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러한 축복의 연속과 증가와 완전함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러한 점을 알아두도록 하자.

(1) 자신의 영혼 안에 영적인 축복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과도 같은 축복의 관계를 가지기를 진실히 갈망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한 것이다. 절대로 어떤 이기적인 원리가 아니다.

(2)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서로를 위해서 갈망할 최고의 축복은 은혜와 평강이 넘치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 처음과 마지막에서 이러한 축복을 위한 기원을 자주하고 있다.

(3)진정한 은혜가 없는 곳에는 어떠한 평안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은 은혜요, 그 다음이 평강이다. 은혜없는 평강은 단순히 변변치 못한 것이나, 잠시 동안 실제적인 평강이 없는 곳에도 은혜는 진실할 수가 있다. 헤만(Heman)이 두려움으로 혼란을 겪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한때 고뇌 속에서 지내신 바가 있다.

(4) 첫째가 되는 은사와 더불어 은혜와 평강의 더함도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참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곳에 그는 더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리고 선량한 사람마다 이러한 축복의 증강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안에 충만히 되기를 진실히 바라고 있다.

 

1:2 없음.

 

1:3

영원한 구원의 산 소망 (베드로 전서 1:3-5)

지금부터 우리는 본 서신의 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루어 보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찬양하는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다.

Ⅰ. 신도들의 위임과 행복한 상태에 대한 축하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다른 서신들도 이러한 방법으로 시작되고 있다(고후 1:3; 엡 1:3). 여기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이룩되어진 임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축복하심을 정당하게 인식함으로 그를 찬양하게 된다.

2. 이러한 축복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서 묘사되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란 말씀에서 그 관계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중 한 분이신 한 위(one person)에 대해 그 사명을 나타내는 세 가지 명칭이 있다.

(1) 그는 절대 권위의 군왕 또는 군주로서의 "주"가 되신다.

(2) "예수"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제사장 혹은 구세주를 의미한다.

(3)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름 부음 받은 하나의 예언자를 나타낸다. 그는 그의 교회의 교리와 인도와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은사를 부여하신다. 축복을 받으신 이 하나님은 그의 인간성에 따라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의 아버지는 그의 신성에 의하여 하나님이 되셨다.

3.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의무가 주어지는 이유는 그의 "풍성하신 자비"에 기인된다. 우리의 모든 찬양은 하나님 자신의 자비하심에 기인한 것이지 결코 인간의 공로나 특히 개심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를 다시 낳으셨으며" 이 사실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특히 우리들이 그 열매를 생각해 볼 때 그 열매는 우리 안에 탁월한 소망의 은총이 되는 것이며, 이 세상적인 것이나 위선자들과 같은 허무와 죽음 그리고 멸망의 소망과 같은 것이 아니다. 산 소망과 생명과 강함과 민첩함과 참는 소망을 낳게 하신다. 이러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신" 기초에 기반을 둔 것이다. 여기에서 아래와 같은 사실을 배우도록 하자.

(1) 선량한 그리스도인은 조건이 극히 나쁘다 할지라도 아직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할 크나큰 이유가 있다. 죄인이 현재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항상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이 선량한 사람들은 그들의 더함 없는 고난 속에서도 아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2) 우리들의 기도와 찬양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언급해야만 한다. 이는 우리와 우리의 예배가 그를 통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3) 최선의 사람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에 대해서 그들의 최선의 찬양을 드려야 할 의무를 지닌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은 인간의 죄에 비롯된 것이나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중생함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로써 성취되는 것이며 나머지의 모든 것이 다 이와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의존하고 있다. 중생의 본질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3장 3절을 참고하기 바란다.

(4) 중생은 영원한 생명의 산 소망을 낳는다. 모든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소망없는 피조물이다. 중생한 인간인 척하는 모든 것은 다 뻔뻔스럽고 주제넘은 일이다. 정당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다시 낳는 것이다. 이러한 중생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져 주시는 은혜에 의한 것이다. 새롭고 영적인 생명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새롭고 영적인 소망으로 다시 낳은 사람이다.

(5) 그리스도의 소망은 탁월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탁월성은 산 소망이라는 것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생의 소망은 그로 하여금 생명력 있게 하며, 민첩하게 하고, 도와주며, 그를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것이다. 소망은 그 영혼으로 하여금 힘을 주어 움직이게 하며, 참고 힘을 내며 끝까지 견디도록 한다. 중생하지 못한 자의 환상적 소망은 헛되며 파괴적인 것이다. 위선자와 그의 소망은 죽어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다(욥 27:8).

(6)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심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근거요, 초석이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심판자로서의 아버지의 행위이시며, 정복자로서의 아들의 행위이시다. 그의 부활은 우리의 속죄를 위해 아버지께서 아들의 죽음을 수락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는 죽음과 무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영적 원수들에 대해 승리하신 것이다. 그것은 역시 우리들 자신의 부활도 보증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무리사이에는 뗄 수 없는 연관이 이룩되었으므로 그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덕으로, 아니 심판자로서의 그의 능력에 의하여 부활하게 된다. 골로새서 3장 1절에 보면 "우리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생의 소망을 이룩할 수 있는 튼튼하고 견고한 두 개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Ⅱ. 이 사람들의 거듭남과 영생에 참여케 되었음을 축사한 후 사도 베드로는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말로 생각되는 "기업"이란 개념으로 생명을 계속 묘사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본래 타고 난 유업에서 쫓김을 당함으로 궁핍과 핍박 속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슬픔을 달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상실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기업으로 그들이 거듭나게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려주신 기업의 땅인 가나안 땅에 대한 크나큰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혹한 심판으로 간주되는(삼상 26:19) 주의 기업에 머물러 살 수 없이 쫓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위로하는 길은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하늘에 고귀한 기업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일이다. 가나안 땅의 기업은 그들이 장차 받을 기업에 비교하면 단순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하늘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의심할 수 없는 기업이다. 거듭난 모든 자들은 기업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그의 자녀를 상속자로 삼는 것과 같다. 사도 베드로도 로마서 8장 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선물을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 그러나 기업은 모두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에게만 주신다. 곧 중생하고 그의 양자로 선택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는다(히 9:15). 이 기업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요, 우리들의 공로인 대가가 아니라 태초로부터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불변의 언약으로써 이 기업을 주신 것이다.

2. 이 기업의 비교할 수 없는 탁월성은 네 가지를 들어 말할 수 있다.

(1) 이 기업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그 기업의 창시자의 속성과 동일한 것이다. 즉 로마서 1장 23절에 나타난 바 "하나님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모든 부패는 좋은 것을 나쁘게 변하도록 한다. 그러나 하늘은 이러한 변화가 없고 종말도 없다. 즉 하늘의 장막은 영원하며 소유주는 영원히 존재한다. 곧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고전 15:53)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2) 이 기업은 히브리서 7장 26절에 나타난 바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분이신 대제사장이 지금 가지고 계시는 기업과 같이 더럽지 아니한 것이다. 이 세상을 부패하게 하며 동시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두 가지의 크나큰 더러움 즉 죄와 비참함은 우리들이 받는 기업에는 없다.

(3) 그 기업은 쇠하지 않는다. 언제나 생기와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은 항상 즐겁게 그리고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그들은 조금도 피로의 기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실증도 느끼지 않고 있다.

(4) 이 기업을 "너희들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해 두신 것이라"고 하는데 이 같은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1] 그것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기업이다. 하늘에 있는 것은 모두 영광된 것이다. (엡 1:18)

[2]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것은 우리들이 그것을 받기까지 안전한 가운데 보존되어 있다.

[3] 어떤 사람들을 위하여 이 같은 기업을 예비하셨는가 하는 것이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의 이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특성에 의해서 서술되고 있다. 하늘에 예비해 두신 기업은 "너희들"과 "우리들" 그리고 산 소망을 얻도록 "거듭난 모든자"를 위한 것이다. 이 기업은 그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다. 오직 그들만을 위해 예비된 것이지, 어느 다른 이들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 아니다. 모든 나머지 사람들은 영원토록 갇히게 될 것이다.

Ⅲ. 이러한 기업이 먼 미래의 것으로 서술되고 시간과 공간적으로 먼 것이기 때문에 도중에 그들이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므로 사도 베드로는 아직도 그들의 마음속에 약간의 의혹과 불안을 예측하고 있다. "비록 하늘에 안전히 보존되어 있는 기쁨이 있을지라도 우리들은 많은 시험과 불행 그리고 연약함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에 아직 거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곳에 확실히 이르게 될 안전한 상태에 거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안전하게 그곳으로 인도되고 들리울 수 있다고 대답한다. 이는 영생에 안전한 도달을 방해하는 파괴적인 시험과 손해로부터 그들은 보존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것을 상속하는 자는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아무런 보장도 없으나 하늘의 상속자는 그 소유를 누릴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이 있다. 여기에서 약속된 축복은 보호함을 받는다. 우리는 "보호함을 받는다. " 이는 보호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목적을 이루게 하는 수단은 우리들 자신의 "믿음"과 관심이다. 우리들이 보호함을 받는 궁극의 목적은 "구원"이다. 그리고 모든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은 "마지막 때"이다. 여기에서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보살핌은 그들에게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영광으로 보존케 하신다. 그들이 보호함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위험과 구원을 동시에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공격을 받게 되나 정복을 당하지는 않는다.

2. 영생으로 향한 갱신의 보전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이다. 일의 위대함이 원수들의 수와 우리 자신의 연약함의 힘은 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이 구원으로 인간의 영혼을 보존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라고 나타내고 있다. (고후 12:9; 롬 14:4)

3.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보존은 인간 스스로의 구원을 위한 어떠한 노력이나 관심으로 대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믿음이 필요하다. 곧 인간의 구원에 대한 열망과 그리스도의 초청과 약속에 따라 그를 의지함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무엇이든지 공격적인 것을 피하며 "은혜를 갚는데 대한 관심"과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참고 역사하며 정복하는 믿음으로 인해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은혜의 상태에서 영광의 상태로 영혼을 보존하는 주권자이다.

4. 이 구원은 "마지막 때에 나타나도록 준비되어" 있다. 여기에 성도의 구원을 위해 강조되는 세 가지 사실이 있다.

(1) 구원은 지금 준비되어 있고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다.

(2) 비록 그 구원이 지금 예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많은 부면이 감추어져 있고 구원을 추구하지도 않는 어두운 세상뿐만 아니라 구원의 후예들 자신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요한 1서 3장 2절 말씀대로 "장래에 어떻게 된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다. "

(3) 구원은 "마지막 때" 혹은 심판의 마지막 때에 "완전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생명과 영생도 복음에 의하여 밝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 생명은 임종시에 더욱 영광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그때에 영혼은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 받아들여지며, 그의 영광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에 성도의 충만하고도 놀라운 행복이 최후로 완전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의 육체가 부활하여 그들의 영혼과 연합하며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공개적으로 당신의 종들을 영화롭게 하며 충만케 해 주실 것이다.

 

1:4 없음.

 

1:5 없음.

 

1:6

믿음의 시련 (베드로 전서 1:6-9)

"그러므로"라고 한 첫 마디의 말은 앞서 말한 바 성도들의 현재 상태에서의 탁월성과 장래에 대한 그들의 크나큰 기대에 대해서 사도베드로가 말하고 있다. 6절에 있는 말씀은 아래와 같이 풀어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얼마간 혹은 잠시 동안 많은 시험으로 인하여 조심하지 아니할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Ⅰ. 사도 베드로는 그 성도들이 큰 역경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 것을 시인하고 있으며, 그들의 슬픔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들을 제의하고 있다.

1. 훌륭한 그리스도인마다 크게 기뻐할 수 있는 바를 항상 소유하고 있다. 크나큰 기쁨은 자체는 용모나 행위에서 나타나지만 특별히 찬양과 감사에서 드러난다.

2. 선량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은 영적이며 거룩한 것들에서 비롯되며 그의 하나님과 또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크나큰 기쁨을 얻는다. 그의 기쁨은 훌륭한 가치가 있는 본질로 이루어진 보화로 인해 이룩된 것이며, 그 본질에 대한 명제는 확실한 것이다.

3. 크게 기뻐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최선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시험으로 인해 크게 근심하게 된다. 각가지의 모든 역경은 시험과 믿음의 시련, 인내 그리고 항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경은 좀처럼 혼자 오지 않으며 여러 가지로 다른 모습을 지니고 찾아오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크나큰 근심을 이루게 된다. 보통 인간과 같이 우리들은 개인적 또는 가정적인 문제로 슬픔에 싸이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가 우리를 자주 슬프게 한다. 그리고 불쌍한 자에 대한 동정,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것, 그의 교회의 재난과 인간 스스로의 어리석음이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인류의 멸망은 슬기롭고 경건한 마음에 계속적인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서 9장 2절에 "내게 큰 조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4. 선량한 사람들은 고뇌와 슬픔이 있으나 얼마 동안이요, 잠깐이다. 그들의 고뇌와 슬픔은 심하나 잠깐 동안이다. 인생의 삶 자체가 잠간이요, 생의 슬픔이 생 자체보다 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어떠한 고뇌의 단축은 그 고뇌의 근심을 약화시킨다.

5. 크나큰 근심은 때로 그리스도인의 선량함에 필요하다.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의도적으로 괴롭게 하시지는 않으나 우리들의 요구와 부족에 비례하여 분별력을 가지시고 행하신다. 이러한 경우에 편리함이나 적합함이라기 보다 절대로 필요한 것이 되므로 그 표현이 "꼭 있어야 한다"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고통으로 요동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3:3)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근심을 낳는 이 고통은 우리에게 필요할 때에만 오는 것이지 아무 때나 임하지 아니하며 필요 이상 오래 머무르지도 아니한다.

Ⅱ. 사도 베드로는 고통의 목적과 그 고통 배후에 있는 성도들의 기쁨의 근거를 말하고 있다(7절). 선한 사람들의 고통의 목적은 "그들의 믿음의 시련이다. " 그리고 이러한 연단의 본성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것이다. " 시련의 결과는 바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다. 아래의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은 그들의 믿음의 시련을 위해 계획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백성을 단련시키려 함이지, 그들을 멸망시키려 하심이 아니며, 그들의 진보를 위함이지 파멸을 위함이 아니다. 시련은 그 말이 의미하듯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가치와 강함을 증거하는 어떤 고통을 통하여 인간에게 이루어진 하나님 경험과 탐구이다. 이 시련은 믿음에 임하게 되는데 이는 믿음의 시련이 어떤 다른 은혜보다 결과적으로 우리 안에 모든 선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는 우리들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만일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고 하면 우리 안에 영적인 선함이란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리스도는 "사도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셨다. 만일 이 믿음만이 이룩된다면 나머지 모든 것은 견고히 서게 될 것이다. 선한 사람들의 믿음이 단련받는 것은 그들 자신이 믿음의 위로를 받으려 함이며 하나님은 믿음의 영광을 또한 다른 사람들은 믿음의 축복을 얻으려 함이다. 연단된 믿음은 어떤 연단된 금보다 귀하다. 여기에 믿음과 금 곧 믿음의 연단과 금의 연단 두 가지의 비교가 있다. 금은 모든 금속 중 최고의 가치와 순수성과 실용성 그리고 지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덕성 가운데 가지고 있는 믿음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믿음이 영혼을 하늘나라에 인도하며 종국에 가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스런 열매를 맺기까지 믿음은 지속하는 것이다. 믿음의 시련은 금의 시련보다 더 귀한 것이다. 양자에는 순수함과 찌끼에서의 분리, 그리고 사물 안에 건전함과 양호함의 발견이 있다. 금은 불 속에서 연단됨으로 늘어나거나 더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믿음은 당면하는 반대와 고통으로 성취되며 증진되어지고 증가된다. 금은 종국에 가서 "없어질"이란 말씀과 같이 없어진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누가복음 22장 32절에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으니"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다.

2. 믿음의 연단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 영광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가게 되는 존경과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찬양이란 존경의 표현, 혹은 선포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오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여…"라고 하시며 그의 백성들을 명하실 것이다. 영광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광채로써 영광과 찬양을 받음으로 하늘에 찬란히 빛난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라"(롬 2:10). 만일 연단된 믿음이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면 이 사실은 그 믿음이 고난으로 인하여 공격을 당하고 시련을 겪는다고 하여도 금보다 더 귀한 것이므로 당신에게 믿음을 권유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현세에서의 실용면에서나 마지막 날의 사건으로써 믿음과 금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아무리 세상이 그것을 믿을 수 없는 역설로 취급한다 하여도 이 사실은 진실로 남게 된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 다시 나타나실 것이며 그가 그렇게 나타나실 때에 성도들도 그와 함께 나타나고 그들의 장엄함은 찬란히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연단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들은 더욱 빛날 것이다. 연단은 곧 끝날 것이다. 그러나 존귀와 영광과 찬양은 세세토록 지속될 것이다. 이 사실이 당신으로 하여금 현재의 고통을 잊게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좀더 찬란하고 영원한 영광을 여러분들을 위하여 이루신다. "

Ⅲ. 사도 베드로는 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두 가지 설명으로 특별히 칭찬하고 있다.

1. 믿음의 대상이 되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예수의 탁월을 들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 보았으나, 이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믿었다(8절).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마귀도 실로 그렇게 믿는다), 예수의 능력을 믿고 따른다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복종과 의지, 그리고 예수로부터 약속된 선한 모든 것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성도들의 괄목할 만한 신앙의 소산물이다. 결과는 사랑과 기쁨이다. 이 기쁨은 표현할 수 없는 크나큰 기쁨이다. 즉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너희가 기뻐하느니라." 아래의 사실을 알아두자.

(1)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나타난 사실에 어느 정도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감각은 느낄 수 있고 실제적인 것과 소통이 원활하나, 이성은 보다 높은 차원의 안내자이며 이는 보다 확실한 추론에 의하여 원인의 작용과 사건들의 확실성을 주도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은 한층 멀리 올라간다. 그리고 감각과 이성이 발견해 낼 수 없는 특이한 풍요함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2) 진정한 믿음은 결코 혼자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사랑을 낳게 한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에 대해 성실한 사랑을 가진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께 대한 최대의 존경에서 나타나며, 애정은 그를 갈망, 그와 같이 하기로 결심한 의지, 기쁜 생각과 즐거운 봉사와 고난 등등이 사랑의 본질을 나타냈다.

(3)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있다. 이 기쁨은 표현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최선의 발견은 기쁨을 맛봄으로 이루어진다. 곧 그 기쁨은 하늘에 충만된 영공이다. 성장한 그리스도인의 현대의 기쁨 속에는 충만한 하늘과 장래의 영광이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은 슬픔의 조건을 몰아내고 기쁨에 대해 최선의 동기를 부여한다. 선한 사람들이 때로는 어둠 속을 걷게 되나 이는 그들 자신의 실수와 무지, 혹은 두렵고 우울한 기질, 또는 약간의 죄된 행위나 얼마간 그들의 기쁨을 저하시키는 신의 슬픈 사건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주 안에서 기뻐할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구원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합 3:18). 그들은 매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 초대로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9절). 여기에서 아래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성도들이 받을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혼의 구원이다. "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영혼(전체 인간에게 자리 잡고 있는 가장 고귀한 부분)이다. 구원은 여기에서 "믿음의 결국"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종국에 가서 믿음은 끝난다. 믿음은 영혼의 구원을 도우며 그의 사명을 이루고는 영원히 사라진다.

[2] 사도 베드로는 현재를 말한다. 곧 지금 여러분들은 실로 "믿음의 결국"(영혼의 구원)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3] 여기서 사용된 말은 시합장에서 승리자가 심판으로부터 면류관이나 상급을 받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영혼의 구원은 이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상급이요, 이를 위해 수고하는 면류관이며 매일 매일 그들에게 더욱 더 가까워지는 목적이다. 이러한 점을 알고 넘어 가자.

첫째,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날그날 영혼의 구원을 성취하고 있다. 곧 구원이란 이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결코 죽음으로 중단될 수 없으며, 영원으로 계속 되어지는 하나의 영구한 사건이다. 이러한 신자들은 거룩함과 경건한 마음, 그들의 사명과 하나님과의 교제, 기업의 획득, 그리고 거룩한 성령의 증거를 얻음으로 천국의 시작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 괴로운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확히 언급되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패하는 편에 있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무엇을 얻고 있는가를 상기시키고 있다. 만일 그들이 보다 못한 행복을 상실했다면 그들은 항시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그의 영혼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당당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행복은 밀접히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하나를 정당하게 구한다면 다른 하나도 얻어야만 한다.

 

1:7 없음.

 

1:8 없음.

 

1:9 없음.

 

1:10

예언자가 나타낸 구원 (베드로 전서 1:10-12)

사도 베드로는 그의 편지를 받을 사람들에 대해 기술하며 그들이 놀라운 진보를 이룩했음을 선포한 후 계속해서 그가 구한 바 지니고 있는 근거를 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이요, 구약에 대해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옛날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핀 것과 같은 것임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선지자들의 권위를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Ⅰ.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피던 "선지자들"은 그들 자신의 연구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바 곧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든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특별한 일을 행하고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입은 자들이다.

Ⅱ. 선지자들의 연구의 대상은 구원과 "너희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만백성에게 주어질 보편적인 구원과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주어질 구원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들에게 임할 은혜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임할 빛과 은혜와 위로의 영광스러운 때가 임할 것을 내다보았는데 이러한 것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복음의 시대에 나타날 사건 등을 보기를 원하고 듣기를 바랬던 바이다.

Ⅲ. 선지자들의 탐구하는 방법은 이러하였다.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것"이다. 이 말들은 원광석에 이르기 위하여 땅을 파며, 흙뿐만이 아니라 바위를 꿰뚫는 광부들에 비교되리 만큼 강하고 두드러진 것이다. 곧 이 경건한 선지자들은 알기 위한 열심과 메시야 시대에 나타날 하나님의 은혜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열심이었다. 영감을 받은 그들의 존재는 그들의 연구를 무용지물로 만들지 아니했으며,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혜와 지식을 증진시키는 일반적인 모든 방법을 활용하여야만 했다. 다니엘은 크게 사랑을 받고 영감에 충만한 사람이었으나 책과 연구를 통하여 시대의 징조를 이해하였다(단 9:2). 그들의 계시도 연구와 명상과 기도를 필요로 했다. 많은 예언들이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첫 의도에는 가까이 있는 어떤 인물이나 혹은 사건을 다루었으나 그들의 궁극적인 의도는 고난받는 자에 대한 혹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사실을 기록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인간 구원의 교리는 가장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들의 연구와 찬양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아의 고귀함과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들의 이에 대한 관심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 구원의 교리를 연구하는데 가장 세심한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2.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나 또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많은 감동 감화를 받는다.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유대인에게나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긍휼로 크게 기뻐하였다.

3. 크나큰 구원의 성취와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 구원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이러한 것이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에게 필요하였다면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무지각한 인간들에게는 더욱 더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4. 복음으로 비롯된 은혜는 복음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것을 능가한다. 복음의 분배는 복음 이전에 있었던 어떤 분배보다 가장 영광스럽고, 확실하며 이해하기 쉽고, 광범위하며, 효과적인 것이다.

Ⅳ. 고대의 선지자들이 주로 연구하였던 특수한 일들은 11절에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연구의 주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때문에 선지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보다 더 알고 싶어하였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망, 그리고 그 사망의 영광스러운 결말.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에 대해서 선지자들은 알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선지자들로 하여금 복음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보게끔 하였다. 그 복음의 개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다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2. 메시야가 나타날 때와 그때의 형편을 말하고 있다. 의심할 것이 없이 이 경건한 선지자는 열심히 인자의 날을 보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에 다음 가는 것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 목적에 대해 어떠한 것을 지시하는 한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날이 성취되는 시간에 집착되었다. 그때(time)의 본질이 조용한 어느 한 때인지, 또는 괴로운 때인지, 평강 또는 전쟁의 어느 한 때를 이름인지 그들에 의해서 엄밀히 고려되었다. 아래의 몇 가지 사실을 알아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육신을 입기 전에는 하나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영은 당시 선지자들에게 임하였었고 또한 영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존재하여야만 했다.

(2) 삼위 일체의 교리는 구약 성서에 있어서 성도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선지자들은 그들 안에 있는 영에 의하여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곧 이 영이 그리스도의 영임을 알았는데 이 영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자신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복수(plurality, 複數)가 나타나며 구약의 또 다른 부분으로부터 삼위 일체가 정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3)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성령의 역사는 성령이 하나님이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성령께서 선지자들에게 이미 오래 전 그들에게 임한 여러 가지 사건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을 "지적하고" 나타내 증거 하셨다. 또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확신시키기 위한" 이적을 행함과 그의 고난을 받는 성도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함으로 그 사건의 확실성을 "증거 하거나" 오래 전 명확성을 제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지전능하심으로 이러한 사실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한다.

(4) 여러분들이 영광에 이르기까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예를 보아 봉사와 고난의 때를 예측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주님을 능가하지는 못하였다." 고난의 시기는 짧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하다. 고난의 때로 하여금 매우 날카롭고 가혹한 것으로 내버려 두라. 그것은 결코 상하게 하지 못하며, "우리에게 보다 놀랍고 영원한 영광을 이룩할 것이다."

Ⅴ. 그들의 꾸준한 연구와 노력이 성공의 열매를 얻게 되었다. 그들의 알려고 하는 경건한 노력은 헛되지 아니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평온케 하며 위로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만족할 만한 계시를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이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확고하며 확실한 것이다. 이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한 말씀과 같이 사도들의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성령의 완전한 지도 아래 온 세상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이것은 "천사들도 살피기를 원하는 바이다."

여기에 세 종류의 연구가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 구원의 대 사실을 탐구하는 자들이 있다.

1. 인간 구원의 사실을 "열심히 연구하는" 선지자들이다.

2. 모든 예언을 탐구하는 사도들은 그 예언의 성취를 증거 하는 자들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그들이 알고 있는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자들이다.

3. 천사들은 이 사실에 대해 아주 주의 깊게 알아보려고 한다.

아래의 사실을 알아보자.



(1) 그리스도의 지식과 우리의 임무를 추구하는 부지런한 노력은 확실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예언자들은 계시로써 응답을 받는다. 다니엘은 열심히 연구하며 해답을 얻었다. 곧 베레안(Bereans)들은 성서를 연구하여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2) 가장 경건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의 정당하고 고귀한 요청을 거부당한다. 선지자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를 알도록 허락 받은 이상으로 그들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합당하고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거부당하기가 일쑤이나 선량한 부모들이 그들의 부도덕한 자녀들을 위하여 또는 가난한 자들이 빈곤 때문에 선량한 사람이 죽음에 대항하여 드리는 기도는 합당하며 귀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정직한 요구가 가끔 거부를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에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신다.

(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보다 남들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는 것이 영광이요, 실재적인 것이 된다. 선지자들은 자신들을 섬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겼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롬 14:7)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인간이 자신의 목적만을 위하고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 더 인간의 본성이나 기독교의 원리에 위배되는 일은 없다.

(4) 하나님의 계시는 비록 점차적이며 지극히 조금씩 나타나는 것일지라도 모두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교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온 것으로 정확히 일치한다.

(5) 복음주의 적인 전도자의 능력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성령에 의존하고 있다. 복음은 성령의 임무다. 곧 복음 선포의 성공여부는 성령의 역사와 축복에 기인한다.

(6) 복음의 신비와 인간 구원의 방법은 매우 존귀한 것이므로 축복 받은 천사들이 열심히 그것들을 살펴보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 사실을 탐구하는데 진지하고 정확하며 근실하다. 그들은 인간 구원의 모든 계획을 깊은 주의와 흠모의 정을 가지고 숙고하고 있다. 특별히 사도들이 지적하고 하는 관점은 "아홉 천사 중 둘째 천사인 케루빔 천사가 하나님의 보좌를 계속적으로 흠모하듯이" 이것들은 천사들이 내려와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1:11 없음.

 

1:12 없음.

 

1:13

근신과 거룩 (베드로 전서 1:13-23)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는 전에 서술한 바 있는 존귀한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권유를 시작하고 있다. 이것으로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현명하게 할 뿐 아니라 더욱 선하게 만드는 믿음에 따르는 거룩의 교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Ⅰ.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로 하여금 조심하며 거룩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1.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13절)라고 하신 말씀을 상고해 보자. 이 말씀은 이렇게 풀이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우 존귀하게 되고 구별된 자가 되었으니 너희 마음의 허리띠를 동이라, 여러분들은 가야 할 예정이 있고 달려갈 경주가 있으며, 성취해야 할 전쟁과 행해야 할 크나큰 과업이 있다. 여행자와 경주자, 용사 또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길고 늘어진 옷을 여미고 띠를 띰으로 그들의 일에 착수할 준비와 신속성을 기할 수 있는 것같이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마음과 내적 인간을 또한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애정의 띠를 띠라. 그것들은 한데 묶어 띠를 띄우므로 늘어져 당신들에게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 그들의 낭비를 제지하고 혹은 마음의 강함과 용맹스러움이 당신의 임무를 다하도록 하라. 이로써 당신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을 해방시키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든 것이 여러분의 주관 하에 들어오도록 하라. 여러분의 영적인 위험과 모든 원수에 대해 조심하며 깨어 있으라. 그리고 먹고, 마시며, 입는 것, 즐기는 것, 사업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의사 표시이나 실천하는데 있어서도 근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여러분 자신을 판단하는 데에도 겸손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의 나타나심에 대한 그들의 소망을 나타내었다면 이것은 마지막 심판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안에서 혹은 그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혹은 순전히 바랄지어다. 이 은혜는 생명과 영혼을 빛으로 인도하는 복음에 의한 것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지금 주어질 은혜를 온전히 바라고 의심 없이 믿으시오.

(1)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일은 그의 생각과 마음의 올바른 관리에 있다. 사도 베드로의 첫째 지시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것이다.

(2)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근신하라는 권유를 받아야 한다. 탁월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것을 마음에 기억해야 한다. 곧 근신은 감독이나(딤전 3:2) 성숙한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며(딛 2:2), 젊은 여인들은 조심함으로 교훈을 받고, 젊은 남자들은 조심한 마음을 가지도록 요구된다(딛 2:6).

(3)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그가 은혜의 상태에 들어감으로 즉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더 많은 은혜를 얻기 위해 바라고 싸워야 한다. 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갔어도 여전히 좁은 길을 걸어야 하며,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마음의 허리를 동이어야만 한다.

(4)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철저하고도 온전한 신뢰는 우리들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최선의 노력과 바로 일치하고 있다. 곧 "우리는 온전히 바라고 허리를 동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격려를 받으며 보다 윤기 있게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착수하여야 한다."

2. "순종하는 자식처럼……되라"(14절). 이러한 말들은 하나의 경건한 생활의 규범으로 취급되고 있다. 즉 하나는 적극적인 면에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심을 받아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을 받은 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한편 소극적인 면에서는 "이전에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의 사욕을 본 삼지 말라"는 권면이다. 또 이 말들은 그들이 지금 순종의 자녀라고 하는 점을 고려하고 동시에 사욕과 무지 가운데 살던 때에 그들이 어떤 존재였는가 하는 것을 숙고함으로써 그들에게 거룩함을 강조하는 논의로 나타나고 있다.

(1)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복종과 현재적, 계속적, 그리고 절대적인 순종으로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해야만 한다.

(2)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자녀들도 사욕과 무지의 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는 그들의 생활과 처세, 그리고 양식의 모든 계획이 그들의 부당한 욕망과 부도덕한 기호를 만족케 하였던 때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과 그들 자신을 그리고 그리스도와 복음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3) 거듭난 사람들은 과거의 자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들은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양식과 행실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내적 상태와 행위와 그리고 언어와 행실이 그들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4) 죄인들의 사욕과 낭비는 그들의 무지의 열매이며 표증인 것이다.

3.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거룩할 지어다"(15,16절). 여기에 강렬한 논의로써 강요되고 있는 하나의 고상한 규범이 있다. 곧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이에 만족하리 만큼 합당한 자가 누구인가? 그러나 강력한 말로 요청되고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은혜와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명령 그리고 그의 모범으로써 비롯된 세 가지 이유로 우리에게 거룩하게 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1) 죄인을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에 대한 능력 있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와 비극의 상태에서 새로운 언약의 축복을 소유하는 상태로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다. 크나큰 은총은 강렬한 의무를 내포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거룩을 강요할 뿐 아니라 또한 거룩하게 하실 수도 있다.

(2) 온전한 거룩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요구이며 의무가 된다. 여기에 거룩의 두 가지 규범이 있다.

[1] 거룩함의 범위에 대해서는 전 우주적이어야 한다. 우리들은 거룩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곧 모든 신앙적인 일들에 있어서 잘 되든지 못 되든지 어떠한 처지와 형편에서든지 거룩해야 하며, 친구들에게나 원수들에게나 누구에게든지 거룩해야 하며, 우리들의 모든 대인 관계와 사업에 있어서 거룩해야만 한다.

[2] 거룩의 표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거룩하심같이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일할 수는 없으나 그를 닮아야 한다.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시고 영원히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이러한 상태를 갈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숙고는 우리가 이를 수 있는 최상의 거룩한 단계에 이루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가장 확실한 규범이 된다. 이 규범에 의하여 우리들은 나날이 거룩에 가까워지게 된다.

(4) 구약의 계명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연구되어지고 또한 지켜야만 한다. 사도 베드로는 모세로 인하여 주어진 계명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거룩을 요구하고 있다.

4.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두려움으로 지내라"(17절).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불렀는지에 대해 어떠한 의심을 여기에서 표시한 것은 절대로 아니나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 가운데서 지내라"고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는 "만약 위대하신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아버지와 심판자로 인정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여러분들의 나그네된 때를 살아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1)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나그네나 행인으로 보며 그들이 머물러 있던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지내는 나라의 나그네처럼 생각한다(시 39:12; 히 11:13).

(2) 우리들이 땅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지내야 한다.

(3) 하나님을 심판자로 생각하는 것은 그를 아버지라고 진실히 부르는 자에게는 부적합한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경건히 신뢰하는 것과 심판자로서 그를 두려워하는 것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을 심판자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4)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한다. 오로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인간의 외적인 관계는 그가 맡은 심판을 막아 주지 못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 또는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또한 외적인 판단으로 그들을 칭찬하시지 않으신다. 다만 각 사람의 행위대로 그들을 판단하신다. 인간들의 일은 마지막 날에 각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보시고 누가 그의 자녀인가를 만방에 나타내실 것이다. 우리들은 믿고 거룩하고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우리들의 행위는 우리가 우리의 임무를 수행했는지 아니했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다.

5. 이런 관점에서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권고한 사도 베드로는 18절에서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라는 두 번째 논란을 첨가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상기케 했다.

(1) 그들은 아버지께 속죄물을 드림으로 구원을 얻었다.

(2) 그들의 구속함을 위해 드리어진 대가는 "은과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다."

(3) 이러면 그들이 무엇으로부터 구속함을 받았는가? 그들은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로부터" 구속함을 얻은 것이다.

(4) 그들은 이 사실을 알았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해 모르는 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 우리들의 구원에 대한 숙고는 거룩함에 대한 영구적이며 힘있는 동기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되어야만 한다.

[2] 그리스도인은 그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합당하게 살 수 있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시편 39편 4절의 말씀대로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를 마음에 간직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3] 은이나 금이나 이 세상에 없어질 그 어느 것으로는 한 사람의 영혼도 구속할 수 없다. 그들은 때로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뱀이 되며 시험과 방해가 되기 일쑤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구원을 할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그들은 없어질 것들이므로 썩지 않는 영원한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4]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대가가 된다. 인간의 구원은 실제적인 것이지 결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가로 팔리었고 그 대가는 우리들이 얻은 바와 동일한 것이다. 곧 이것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다. 이 피는 무죄한 사람의 피요, 어린 양으로 나타난 흠이 없고 점도 없는 양의 피며,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무한성을 지닌 사람의 피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피라고 일컬어진다(행 20:28).

[5] 그리스도께서 그의 가장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계획은 우리를 이후의 영원한 비참한 상태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망령된 행실에서부터 구속하시기 위함이었다. 공허하고 경박하며 사소한 행실은 망령되며 하나님의 영광에 무용지물이 되며, 그것은 종교의 공적이며 불신자의 신념이며, 인간 스스로가 지닌 양심의 위로와 만족을 주는 것이다. 드러난 악의 요소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실이 공허하며 무익함은 가장 위험한 것이다.

[6] 인간의 행실은 현실적인 표현을 지닐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의 행실을 방어하기 위하여 고전적 유풍이나 관습, 또는 전통을 구실삼아 변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가장 망령된 행실일지도 모른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형식 존중으로 인해 이점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나,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망령된 것이요,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그들을 행실 주의에서 구원해 낼 수 있다. 고전적인 유풍은 진실에 대한 확실성 있는 규범은 될 수 없으며 동시에 현명한 결론은 될 수 없다. "내 조상들이 그렇게 살다가 죽었으니 나도 그런 방법으로 살다가 죽으리라"는 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6. 구속의 대가를 언급한 후 사도 베드로는 구속자와 구속을 받은 자 양자간에 관계된 바를 계속 언급하고 있다(둘째,21절).

(1) 구속자는 흠이 없는 양으로서만이 아니라 아래와 같은 자로 좀 더 서술되고 있다.

[1]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된 자" 곧 미리 알려졌거나 예지된 분이었다는 의미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지가 언급되어질 경우 그것은 밝은 전망 혹은 추리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행전 2장 23절에 나타난 바 의지적 행위, 이루어질 사건의 결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그의 아들이 인간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아실 뿐만 아니라 결정하시고 선포도 하셨다. 이 선포는 창세 전부터 이루어진 바다. 시간과 세계는 함께 시작되었다.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영원만이 존재하였다.

[2] 이는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바 구속자로 증거되고 나타났다. 그는 그의 탄생과 아버지의 증거와 그 자신의 역사, 특별히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증거 되었다(롬 1:4). "이 일은 너희들, 유대인인 너희들, 죄인된 너희들, 괴롬당한 너희들을 위하여 신약과 복음의 마지막 때에 행해졌다. 너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증거와 계시로부터 오는 위로를 닫게 된다."

[3] 그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게 영광을 허락한 것이다. 능력의 행위로 생각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부, 성자, 성신, 삼위 모두에게는 일반적인 사실이었으나 심판의 행위로써의 부활은 특별히 성부에게 관련된 것이다. 심판자가 되시는 아버지는 그리스도에게 실시한 그의 심판으로 무덤에서 그를 일으키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시며 죽음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심으로 그의 아들 되심을 만방에 선포하셨다. 그리고 하늘로 올리워 그에게 존귀와 영광의 면류관을 씌우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었고 만세 전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가지고 있었던 영광을 그에게 허락하셨다.

(2)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여기에서 역시 그들의 믿음과 소망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믿음과 소망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곧 "너희가 창조자와 권고자가 되시며 보조자가 되시며 너희 믿음의 완성자가 되시는 그로(예수) 인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너희의 믿음과 소망의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와 화목케 되신 하나님 안에 지금 있게 되었다."

(3) 이런 점으로 보아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그리스도를 중보자로서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전부터 있었으며, 의롭고 자비스러운 섭리였는데, 이 섭리는 사도행전 2장 23절에 나타난 대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인간의 죄를 결코 묵과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나타내기 오래 전부터 그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총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2] 말세에 나타날 기쁨은 옛 세대가 즐기던 기쁨과 비교할 때 그것은 굉장한 것이다. 빛의 선명함, 믿음의 유지, 법령의 효력, 그리고 위안의 정도 등이 일찌기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현현 이후로 더욱 대단한 것이 되었다. 우리의 감사와 봉사는 그러한 은혜에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의 구속은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오직 진실한 신자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탄원은 일부 사람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또 다른 일부층의 사람들에 의해서는 부인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일반적인 적용을 주장할 수 없다. 위선자들과 배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멸망을 다할 것이다.

[4]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절대적인 대상이 된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이에 따른 영광이 이를 크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Ⅱ.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형제애를 권장하고 있다.

1.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성령을 통하여 진리에 순종할 때 그 복음이 이미 그들의 영혼을 깨끗케 하리만큼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생각한다. 더욱이 그 복음은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도록 했다. 그 다음 사도 베드로는 좀더 높은 사랑의 차원을 향하여 순전한 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다(22절).

(1)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그의 영혼을 깨끗케 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는 말씀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 영혼을 더럽게 하는 어떤 굉장한 부정과 불결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불결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 아래서의 레위인들의 정결케 함이나 그 밖의 사람들의 위선적인 정결도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을 정결케 하는데 큰 교훈이 된다. 즉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케 하여"라고 하신 말씀으로도 알 수 없다. 복음은 위험과 실수와 그림자 또는 과오에 반대되는 진리라고 일컬어진다. 진리에 순종을 한다면 이 진리는 영혼을 깨끗케 하는데 효과적이다(요 17:17).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귀를 기울이나 그 진리로 인해 깨끗함을 입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그것에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을 깨끗케 하는데 크나큰 동기가 되신다. 성령은 영혼의 불결함을 확신시키며 믿음과(행 15:9) 소망과(요일 3:3) 하나님을 두려워함(시 34:9)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아름답고 정결한 미덕과 은혜를 제공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노력을 고무하며 또한 성공토록 하신다. 성령의 도우심은 우리들의 노력을 폐하시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을 정결케 하나 그러나 그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은 그들이 거짓 없이 피차 사랑할 수 있기 전에 정결함을 입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사욕과 불공평함이 깃들이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우리가 꼭 행해야 할 피차간 사랑하는 일도 할 수 없다. 깨끗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외에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5) 피차간 진지하고도 뜨겁게 사랑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우리들의 피차간의 사랑은 진실하고도 실제적이어야 하며 뜨겁고 지속적이며 광범위한 것이어야 한다.

2.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의 영적인 관계를 숙고함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더욱 뜨겁게 서로 사랑할 의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는 말로 이것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배울 바가 있다.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나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말한다.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새롭고도 가까운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그들이 거듭남으로 형제가 된다.

(2) 야고보서 1장 18절의 나타난 바 하나님의 말씀은 중생에 유일한 수단이 된다. 중생의 은총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3) 이 새로운 두 번째의 탄생은 첫 번째의 탄생보다 더 바람직하고 놀라운 것이다. 썩어질 씨에다 썩지 아니할 씨를 비교하며 이 사실을 사도 베드로는 가르치고 있다. 전자의 것으로 우리는 사람의 자녀들이 되며 후자의 것으로 자존자의 아들과 딸들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하는 그 씨는 외모로 볼 때는 비록 적은 것이나 작용의 힘은 놀라운 것이며, 얼마 동안은 감추어져 있으나 그것이 자라 종국에는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됨을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다.

(4) 거듭난 사람들은 피차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 태어날 때부터 형제들은 사랑으로 피차 매이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관계가 이루어진 곳에는 그 의무는 배로 증가된다. 그들은 동일한 통치하에 있는 것이며, 동일한 특권을 나누며, 동일한 관심을 가진 자들이다.

(5)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남아 있다. 이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히 4:12). 이 말씀은 생명으로 시작되고 생명 안에 보전되어 있는 말씀으로, 임무 수행에 있어서 우리를 생기있게 하고 힘있게 하는 영적 생활의 수단이다. 그 말씀은 영원한 진리로 존속하여 중생한 사람들의 심령에 세세토록 살아 남게 된다.

 

1:14 없음.

 

1:15 없음.

 

1:16 없음.

 

1:17 없음.

 

1:18 없음.

 

1:19 없음.

 

1:20 없음.

 

1:21 없음.

 

1:22 없음.

 

1:23 없음.

 

1:24

말씀의 영원성 (베드로 전서 1:24,25)

사도 베드로는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말미암아 거듭난 영적인 사람의 우월성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자연인이 가지고 있는 그의 모든 장식물과 이득물로 그를 다룸으로 그의 허무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곧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아무 것도 그를 견실한 본질적인 존재로 만들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존재는 썩지 아니할 씨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거듭 낳다. 이 말씀이 그를 가장 탁월한 인간으로 바꾸어 놓게 될 것이다. 그의 영광은 꽃과 같이 시드는 것이 아니라, 천사와 같이 빛나는 것이 될 것이다. 그의 말씀은 복음이 선포되는 가운데 앞에 우리 매일 존속하여 있다.

1. 최상의 번영과 영광 중에 있는 인간은 아직도 마르고 시들며, 죽어 가는 피조물로 남아 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은 것임을 간단히 생각해 보자. 욥기 14장 2절과 이사야 40장 6, 7절에 나타난 바 인간이 이 세상에 들어와서부터 그의 생애와 타락면에서 볼 때 인간은 풀과 흡사하다. 그의 영광을 볼 때 그것도 한낱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다. 즉 그의 재치, 아름다움, 강인함, 용맹, 부귀, 영화, 이 모든 것은 곧 시들어 죽어버릴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다.

2. 이 사라져 없어질 인간에게 견고하고 썩지 아니함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간직하는 것뿐이다. 이 사실은 영원한 진리로 남게 되며, 이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영생을 허락하고 세세토록 그와 함께 할 것이다.

3.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동일한 교리를 전파했다. 이사야와 다른 선지자들이 구약에서 언급한 바 이 말씀은 신약에 있어서 사도들이 전한 바와 동일한 것이다.

 

1:2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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