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야고보서 0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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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부자에 대한 경고(야고보서 5:1-11)

야고보는 먼저 죄인들에게 말하고 그후에 성도들에게 말하였다.

Ⅰ. 죄인들에게 한 말을 생각하여 보자. 야고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동의하고 있음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화있을진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이 경고의 말씀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자들에게 할 것이 아니고, 세상적이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로서, 본문에 기록된 의인을 정죄하고 죽은 자들에게 대하여 한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권력을 가지지 못했었다. 이 서신이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여졌고, 또 주로 그들에게 보내어졌다고 하지만, 생략부호를 사용함으로 이교도 유대인도 충분히 암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글로 쓰여지게 되었다. 이 서신의 처음 인사말 가운데서 우리가 관찰해야 할 것은 이 서신이 사도 바울의 서신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형제에게"란 말로써 시작되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란 말로 시작된 것과 또 인사말을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라고 하지 않고, 그저 "문안"이라고만 한 점 등이다(1:1). 유대인들 중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복음을 믿었다. 그러나 부자들의 대다수가 기독교를 거부하고 불신앙으로 마음이 굳어졌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박해하였다. 야고보는 이렇게 압제하고 불신하며 박해하는 부자들에게 1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1. 야고보는 먼저 그들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예고한다(1-3절). 그들은 비참한 불행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두려워했던 그 무서운 재난 속에서 그들은 통곡하게 될 것이다. 이 재난은 그들이 행복을 얻으려고 했던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되고 또 그들이 행한 모든 일로 인하여 이 재난은 철저한 파멸로써 그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제 야고보는 그들로 하여금 당할 재난의 이유를 생각해 보며 그 재난의 중함을 깨달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1절).

(1) "대단히 무서운 재난이 너희에게 임할 것을 너희가 알터인데, 그 재난은 도움이 되거나 위로될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모든 불행만을 가져다 주는 재난일 것이다. 즉 영원한 고통과 외적인 환난 그리고 마음의 불안, 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고통과 지옥의 고통 등이다. 너희는 너희들에게만 임하는 고통뿐 아니라, 온 고통을 맛볼 것인데 너희의 교회와 국가의 멸망이 가까워 올 것이다. 또 분노의 날이 임하고, 그날에 부가 인간에게 아무 도움이 못되고, 사악한 인간들은 모두 파멸될 것이다."

(2) 그들에게 임할 재난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을 울리고 통곡하기에 충분하다. 부자들은 스스로에게 먹고 마시고 결혼하자고 말하기 쉽다. 회개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울고 회개하라"고 하지 않고(그는 권고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선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울고 통곡하라. 왜냐하면 너희의 심판의 날에 오직 울며 통곡하고 이를 갊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짐승같이 사는 자들은 짐승처럼 소리지르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함께 당하게 될 공동의 재난은 연락 가운데서 안일하고 관능적인 생활을 하는 부자들에게 가장 큰 비탄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장착 임하게 될 재난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슬퍼하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

(3) 부자들의 불행은 바로 지금 그들이 행복을 누리고 있는 그것으로부터 야기될 것이다. "부패와 부식, 파멸"이 너희의 모든 아름다운 재물 위에 임할 것이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을 좀먹었으며"(2절) 지금 너희가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고 있는 재물들이 앞으로 너희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상하게 할 것이다. 그것들은 너희에게 아무런 가치도 소용도 없게 될 것이고 오히려 많은 슬픔으로 너희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것이다.

(4)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3절). 성경에는 악한 인간들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는 데에 무생물들이 사용된다. 하늘, 땅, 광야의 바위, 땅의 소산물, 그리고 본문에서의 부정한 수단으로 축적한 재물들의 녹과 해독이 불경한 부자들에 대한 경고로써 말해졌다. 부자들은 그들의 말년에 늙었을 때 풍부히 쓰기 위하여 재물을 쌍아 두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전리품이 될 재물과 결국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계시되는 날에 진노의 재물로 밝혀질 재물을 쌓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날 심판 중에 그들의 죄가 불과 같이 그들의 살을 먹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수천 명이 불에 타 죽었는데,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사탄과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에 악한 자들이 던지움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사악한 자들의 죄에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다음에는 제시되는 그들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자.

2. 야고보는 위에서 말한 재난을 가져오는 죄들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그처럼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중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1) 이러한 사람들의 죄는 탐욕이다. 그들은 그들의 옷이 좀 먹을 때까지 간직해 두었고, 또한 금과 은을 녹슬 때까지 저장해 두었다. 이 재물들이 그 스스로를 부패시키고 소모시킬 원소를 자체 내에 끌어들여서 의복이 그 자체를 좀먹을 곰팡이를 기르고, 금과 은도 그 자체를 먹어 들어갈 녹을 기른다는 것이 아 재물들에게는 큰 치욕이지만, 그보다도 가장 큰 치욕은 이러한 재물들을 그처럼 부식되고 녹슬고 좀이 먹을 때까지 쌓아 둔 사람들에게 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을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며, 또 재물로 선을 행하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저비리고, 재물을 지나치게 사랑하거나 우리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함으로써 죄악된 방법으로 재물을 쌓아 둔다면, 이것은 아주 커다란 범죄 행위이며, 우리가 쌓아둔 재물에 슬어 있는 녹과 좀이 그 죄의 증거가 될 것이다.

(2) 그 다음으로 야고보가 기록하고 있는 죄는 억압에 관한 것이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4절). 재물을 소유한 자는 권력도 소유하게 되고 그후엔 자기의 밑에 있는 자들을 억압하여 그 힘을 남용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고용하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품삯에 의지하고 있듯이 부자들도 이들의 노동력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어서 그들이 없으면 대단히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부자들은 품꾼의 삯을 움켜쥔 채, 자기들에게 있는 권력을 사용하여 힘든 고용 계약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계약조차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소리지른 죄이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Kuriou sabaw.q ─ 즉 안식일의 주, 혹은 만군의 주라고 불리었는데,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방어할 힘이 없어서 보호되어야 하는 반면, 그들의 적은 많고 군사력이 강할 경우에 가끔 사용되었다. 모든 피조물을 섭리하시며 각 처소에 알맞게 모든 만물을 배치하시는 만군의 주께서 압제자의 냉혹함과 불의함으로 인하여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시며, 그의 수하에 있는 무리들(천사들, 사탄들, 폭풍우, 질병 등)을 명하여 부당하고 무자비하게 취급당한 그들의 잘못을 복수하게 할 것이다. 이 횡령과 탄압의 죄를 주의하고, 그러한 태도를 절대 나타내서는 안 된다.

(3) 여기에서 언급된 또 하나의 죄를 육욕과 관능에 빠지는 것이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5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즐거워할 것을 금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치 이제까지 그것 없이는 살지 못했던 것처럼 쾌락 속에서만 설려고 하는 것은 매우 자극적인 죄이다. 그리고 우리가 단지 순례자와 나그네로서 잠시 동안만 지낼 뿐이며, 영원을 위하여 준비하여야 할 이 땅에서 이처럼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관능적인 죄를 일층 더 심각하게 악화시키는 것이다. 사치스러움은 인간을 방종케 만든다(호 13:6 .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방종과 사치는 일반적으로 대단히 많고 풍부함의 결과이다. 인간이 많은 재난을 소유한 채 육체적 관능적 쾌락에 빠지지 않기란 심히 어려운 일이다. "너희가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고, 매일을 마치 제삿날이나 축제일처럼 살고 있다. 그러므로 너의 마음은 비대하여지고, 어리석고 우둔하며 교만해졌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자기 가진 것 이상으로 낭비하며 살지 않는 한 즐겁게 사는 것이 무슨 해가 된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으로 자비롭고 경건한 행위를 풍성하게 배푸는 대신, 자기의 배로 하나님을 삼고, 이 모든 것을 배를 채우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겠는가? 자기 육신의 욕망을 즐겁게 함으로 자기 영혼이 필요로 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어찌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겠는가? 소돔성에 유황불에 떨어진 것과 여기에 기록된 대로 부자들이 울며 통곡해야 할 재난들을 가져오는 것은 분명히 무서운 악 때문임이 틀림없다. 교만과 게으름과 풍부한 양식들은 연락(宴樂)하고 방조하며 도살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을 의미한다.

(4) 여기서 부자들이 책망 받는 또 다른 죄는 핍박이다. "너희가 옳은지를 정죄하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6절). 옳은 자에 대한 핍박이 부자들의 죄악의 양을 가득히 채웠다. 그들은 재물을 얻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을 매우 부당하게 억압하고 짓밟았다. 그리고 그들이 재물을 얻은 후에는 사치와 환락의 길을 걸었고, 다른 사람들의 요구나 고통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되고 말았으며, 심지어 양심의 아무런 가책도 없이 그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행동하는 척하여 죽이기 전에 저들을 정죄하였다. 그들이 법의 무슨 조항을 적용하여 그들을 정죄하든지 간에, 불의한 박해는 하나님께서 피에 대한 조사를 하실 때에 대학살이나 노골적인 살인과 마찬가지라고 단정될 것이다. 여기서 다음을 관찰해 보자. 옳은 자들이 정죄받고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그들이 고통을 당하며 박해자들의 불의한 선고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굴복할 때, 이 모든 것이 고통당한 자에게는 영광으로 그리고 박해를 가한 자들에게는 불명예로써 하나님께서 기록하길 것이다. 이 사실은 심판이 문 앞에까지 와 있음을 알려주며, 따라서 우리는 압박 받은 자들의 인내에 대하여는 보상되고 압제자에게는 파멸을 가져다 주는 결산의 날이 올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죄인들에게 주는 말씀이다.

Ⅱ. 다음으로 우리는 성도들에게 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들이 목회를 할 때에 죄인들을 책망하고 성도들은 격려하는 이 같은 방법에 대해서 멸시와 비난을 가한다. 그러나 야고보가 여기서 보여준 이런 식에 설교에서 우리는 이것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류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사악하고 옳은 자를 억압하는 부자들에 관하여 주신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고난받는 백성들을 위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길이 참으라.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들에게 그같은 재난을 내리실 때에 너희는 너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며 너희가 받을 가장 큰 격려나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1. 너희의 의무에 충실하라. "길이 참으라"(7절). "마음을 굳게 하라"(8절).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9절). 이 세 가지 표현의 의미를 잘 생각하여 보라.

(1) "길이 참으라는 말씀은 고난을 참고 투덜거리지 말며, 해받음을 참고 복수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비록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즉시 어떤 징표로써 나타나시지 않는다 하여도 그의 섭리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 징표는 약속된 시기에 나타날 것이다. 마지막 때에 말하여지고 거짓이 아님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이 징표를 기다리라. 그것은 잠시 후의 일이며 오실 그분은 반드시 오실 것이고, 결코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고난의 때를 지나도록 길이 참으라." 여기서 사용된 makro qumh,sate란 말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맡은 말은 일을 다 완수했을 때, 상을 받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인내는 어떤 철학자들이 가르치는 도덕적인 인내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것에 대한 단순한 순종이 아니고, 미래의 영광스러운 보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와 뜻 안에서 겸손히 묵종하는 것이다.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7절). 이 말씀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배워야 할 과제이므로 8절에서 반복하여 말씀되고 있다. "너희도 길이 참고."

(2) "마음을 굳게 하라(8절). 즉 너희 믿음은 흔들림이 없이 굳세고, 너희 선행은 피곤함이 없이 꾸준히 지속되며, 모든 고난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하늘의 뜻을 따르기로 한 너희의 결심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악인이 번영하는 반면 선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일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이 큰 시련이었다. 다윗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시 73:2, 3). 성 야고보가 이 서신을 쓰고 있는 대상인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 이들을 아마 다윗과 같이 곧 쓰러질지도 모를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음을 굳게 하라고 권고되었다. 믿음과 인내는 마음을 굳게 해 준다.

(3) "서로 원망하지 말라"(9절). mh. stena,zete ─ 즉 서로 대적하여 으르렁거리지 말라이다. 즉, "너희에게 닥친 일에 대하여 투덜거리는 불평으로 또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불신하는 불평이나 너희에게 고난을 가져다 주는 것에 대한 복수심에게 들끓는 불평, 그리고 너희 재난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잘 지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인하여 솟아오르는 불평등으로 너희들 서로간에 불화가 생기지 않게 하라. 너희들 자신이 불안해지거나, 위에서와 같이 불평함으로 서로간에 거북한 사이가 되거나 가슴아픈 사이가 되지 말아라." 맨톤 박사는 말하기를, "여기서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서로 해를 가하거나 원한 맺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한 것으로써, 그들은 할례당과 무할례당으로 나뉘고 피차간에 서로 가슴 아픈 일들과 불평할 일들을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그들은 부유한 압제자들의 억압으로 인하여서만 한숨을 지은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함께 거룩한 신앙을 고백한 형제들이 가하는 해로 인하여 한숨을 지었다." 사방에 공동의 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똑같이 고난의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서로간에 괴로움을 주며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들의 원수에게 임할 심판이 그들 위에도 떨어질 것이다. 이같은 원한 관계가 만연되면 될수록 그들 자신이 자기들에게 임할 심판을 더욱더 가까이로 끌어오는 것이다.

2.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며 서로간에 원한을 사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격려는 무엇인지 살펴 보라.

(1) 농부의 예를 보자.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바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7절) 너희가 땅에 옥수수 씨를 뿌렸으면, 너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위하여 여러 달을 기다리며 너희 수고의 결실을 거둘 때까지 이 비가 계속되기를 바랄 것이다. 이것은 바로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행복을 구할 때에 잠시의 폭풍우를 견딜 것과 끝까지 참을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2) "너희가 기다릴 시간이 얼마나 짧은가를 생각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8절).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서 계시니라(9절). 조급하지 말며 서로 싸우지 말라. 모든 사람을 공의 앞에 세우시고, 악한 자를 벌하며 선한 자를 상 주실 위대한 심판자께서 가까이에 계시다. 그분은 문 밖에서 문을 막 두드리고 계신 분으로서 너희에게 생각되어야 한다." 야고보가 이 서신을 기록할 때, 악한 유대인들을 벌하실 주님의 오심은 매우 가까웠다고 생각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내와 그 밖의 덕들이 특별히 주목되고 시련을 당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서 곧 강림하시리라는 확신이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해야 했다. 세상을 심판하려 오실 심판자의 강림은 이 서신이 기록되던 때보다 18세기 이상 더 가까워진 셈이다. 그러므로 이 권면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큰 영향을 주어야 한다.

(3) 심판자께서 오실 때 우리가 심판 받으리라는 위험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앞에 놓여진 의무에 관심을 가지게 해 준다.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9절). 조급함과 불만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위에 서게 하며, 우리의 투덜거리며 불신하고 미워하면서 서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행동은 우리에게 상상 이상의 큰 재난들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죄를 피하며 시련 중에서 길이 참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4) 우리에게 선지자들이 본보기를 보고 인내의 용기를 얻으라고 권고한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을 본을 삼으라"(10절).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큰 영광과 은총을 받을 선지자들은 가장 큰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선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고난을 기꺼이 용납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고난의 당하는 가장 큰 본이 되었던 사람들이 동시에 인내의 가장 좋은 본이 되었다는 것이다. 시련은 인내심을 일으킨다. 여기서 야고보는 주께 충성하는 자의 공통된 자세로써 그 예를 든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11절) 우리는 본서 1장 2-12절에서 의롭고 오래 참으며 고통 당하는 자가 가장 복있는 사람인 것을 본다.

(5) 욥도 고난 당한 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본보기로 제시되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11절) 욥의 경우에서 너희는 여러 가지 종류의 불행의 예와 그 슬픔을 본다. 그러나 욥은 그 모든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고, 그의 영혼은 꾸준히 인내하며 겸손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마침내 무엇을 얻었는가? 진실로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가장 자비하기고 긍휼히 여기는 자이신 것을 분명히 입증하는 그러한 일들을 성취하시고 또 욥에게 가져다 주셨는가!" 고난을 참는 최선의 길은 그 고난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그의 목적에 합치될 때 그 고난을 지체없이 끝나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심은 그의 백성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환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동정심은 그 백성들이 고난을 받는 동안에 발동되고 후에 그 보상으로 나타난다. 끝날에 면류관을 받을 것을 믿는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의 시련을 참고 견디자.

 

5:2 없음.

 

5:3 없음.

 

5:4 없음.

 

5:5 없음.

 

5:6 없음.

 

5:7 없음.

 

5:8 없음.

 

5:9 없음.

 

5:10 없음.

 

5:11 없음.

 

5:12

맹세에 대한 경고(야고보서 5:12-20)

이 서신을 이제 끝맺으면서 저자는 아주 재빠르게 한 가지 한 가지를 열거하며 지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여러 가지의 것들이 이 얼마 안 되는 구절들 속에서 한꺼번에 주장되고 있다.

Ⅰ. 맹세하는 죄에 대하여 경고되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12절).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아주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너희를 비난하며 모든 악한 말을 하는 너희의 박해자들에게 맹세하지 말라. 그들이 너희를 해하는 것 때문에 감정에 사로잡혀 쉽게 맹세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맹세는 여기서 물론 금하고 있으며 박해자들이 가한 해 때문에 알지도 못하고 걱정으로 맹세하는 죄를 범한 사람들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의 경고는 이러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종류의 맹세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 적용된다. 어떤 사람들은 pro. pa,ntwn - 즉 모든 것 앞에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의미는 그들이 일반 대화에 말하는 모든 것 앞에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습관적인 맹세 또한 분명히 금지되고 있으며, 그러한 맹세는 성서에 의하여 매우 중한 죄로써 취급되었다. 불경한 맹세가 유대인 사이에서 보통 습관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서신이 외국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보내졌다는 사실에서(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 권고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맹세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오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혐의를 받고 그 협의를 벗기 위하여 반증할 때에 최후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저주와 맹세를 한 것에서 볼 때, 그들은 감히 맹세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정립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지적된 다른 여러 죄와 함께 함부로 맹세하는 죄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며 그리스도인다운 특권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중에서까지 이 맹세하는 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영국 교회에서 맹세하는 죄를 저지른 국교 반대자에 대한 말을 듣기란 극히 드문 일이지만, 국교도라고 자부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에게도 더 나은 점이란 하나도 없다. 참으로 밉살스러운 맹세와 저주가 오늘날 모든 신중한 그리스도인들의 귀와 마음을 매일 상케 한다. 야고보는 여기서 말하기를,

1.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12절)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맹세하는 일을 경시하며 신성을 모독하는 맹세를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왜 여기서 무엇보다도 맹세하는 일이 금지되고 있는가?

(1) 왜냐하면 맹세는 가장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공격이며, 그의 이름과 권위에 대한 최대의 멸시이기 때문이다.

(2) 이 죄는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적은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무엇을 주거나, 쾌락 또는 명심을 얻게 하지도 않고, 오직 죄 속에 빠져 방종함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불필요하게 적대감정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시 139:20). 아무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부르는 척하거나, 예배 행위로써 때때로 하나님을 찬양할지라도, 맹세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라는 증거가 된다.

(3) 맹세는 사람에게 일반 버릇이 들면 그것을 떼어버리기가 가장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세로 무엇보다도 경계되어야 한다.

(4)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만약 네가 하나님의 이름 모독하며 또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회롱한다면, 너의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네게 지주가 되어 주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느냐? 그러나 (박스터의 생각과 같이) "이러한 모든 것이 필요한 맹세를 금하는 것은 아니고, 마땅히 필요한 맹세에 대해서는 거기에 적합한 존경심을 가지고 할 것을 확실히 해두는 것이다." 또한 "맹세의 참된 본질은, 우리가 어떤 의심할 것 없는 것에 대하여 단언하기 위해서 어떤 위대한 것의 명성을 들어 우리의 말로서 표현하는 것이지, (보통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나 다른 심판자에 대한 호소가 아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하늘과 땅으로 맹세하거나 또는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그 밖의 맹세들이 실제로 행하여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맹세를 하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지 않으면 무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점점 하나님을 욕보이되 피조물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그것에 맹세했고 마침내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반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들어 모독적으로 맹세하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을 같은 위치에 놓고 생각하게 되었다.

2.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다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정함을 면하라"(12절). 즉 너희는 너희의 뜻을 분명히 말해야 할 기회가 왔을 때에, 분명하게 예! 하거나 아니요! 함으로 충분하다. 또한 너희가 한 말에 확신을 가지며 진실하여 너희가 무슨 잘못으로 의심받을 만한 여유를 주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는 이미 말한 것이나 경솔한 맹세로써 약속한 것들 때문에 되돌이켜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될 것이며, 너희 자신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을 맹세하도록 이끄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서 의심받는다. 너희가 진실하는 것과 너희의 한 말을 너희가 확신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의 말할 때 맹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셋째 계명에 분명하게 첨부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주 여호와를 망녕되이 일컫는 자를 주께서 죄없다 아니하시리라."

Ⅱ.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적합하게 행동해야 할 것을 배운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13절). 이 세상에서 우리의 환경은 여러 가지이다. 우리의 지혜는 환경에 알맞게 순응해야 하며, 번영할 때든지 고난을 당할 때든지 항상 우리 자신에게 맞게 활동되어야 한다. 때로 우리는 슬프고, 때로는 유쾌할 것이다. 하나님은 한 가지 환경을 또다른 환경과 대치시킴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명하신 여러 가지 의무를 좀더 잘 관찰 할 수 있게 하셨고, 우리의 감정과 사랑에 새겨진 깊은 인상의 우리의 헌신에 도움이 되게 하셨다.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며, 반영은 우리를 찬양으로 충만케 해야 한다. 고난의 때에만 기도하거나, 즐거운 때에만 노래하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무는 수행되는 과정에서 특별한 유익을 가져다 주며, 또 적적한 때에 최고의 행복을 목표로 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1. 환난의 때에는 기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일이다. 괴로움을 당한 사람은 다른 위하여 기도해 주는 만큼 스스로 기도해야 한다. 고난의 때는 기도하는 때이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며, 우리는 좀더 일찍 주를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평소에 하나님께 대하여 무관심하던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하여 질문하게 될 것이다. 영혼이 그때에 가장 겸손해지고 굳은 마음이 깨지고 부드러워진다. 회개하는 겸손한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기도는 가장 하나님께서 가장 즐겨 받으시는 것이다. 재난은 자연히 불평을 말하게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을 말할 수 있는가? 고난 속에서 신앙과 소망을 훈련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도는 바로 이러한 은혜들을 우리가 얻고 또 키워 나갈 수 있는 약속된 방법이다.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13절).

2. 즐겁고 번영하는 때에 찬송하는 것은 가장 적합하며 알맞은 일이다. 원래는 falle,tw─즉 노래하다라고만 되었는데, 이것은 가사를 붙이지 않고 노래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초대 교회 시대의 몇 가지 글에서(특히 풀리니의 편지나 터툴리안의 글들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중에 찬송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서에서 혹은 그 밖의 개인적 명상에서 취한 것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골로새인들과 에베소인들에게 서로 시와 찬양과 영적 노래로 화답하라고 권고한 것은 성서에 속에 있는 것들로써, 다윗의 시편은 특히 히브리 말로 슈림, 테힐림, 미쯔모림으로 구별되었는데, 이것들이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찬송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기쁨중에 부르는 이 찬송은 복음의 지시하는 바요, 그 기쁨은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기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찬송은 어떤 사람이 즐겁고 번영할 때에 그 기쁨을 나타내는 한 방법으로써 사용되어야 한다고 여기에 제시되었다. 거룩한 기쁨은 공공 집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들 사이에서나 혼자 고요히 있을 때에도 맛볼 수 있다. 우리의 찬송이 주님께 드리는 진심의 노래가 되도록 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헌신을 기뻐하실 것이 틀림없다.

Ⅲ. 병든 자들에게 주는 특별한 교훈과 이 교훈을 따르는 자에게 약속한 치료와 사유의 은혜를 볼 수 있다. 병자가 있는데 그가 원한다면,

1. "장로들을 청하라." presbute,rouj th/j evkklhsi,aj─즉 장로들 또는 목적들을 의미한다(14,15절). 목사를 청하고 그들의 도움과 기도를 바라는 것은 병든 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2. 목자들의 의무는 그들이 청함 받았을 때 병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지니라"(14절). 목사들은 병든 자의 상황에 맞도록 기도해야 하며 중재 또한 재난을 당한 자들을 위한 중재 기도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형편에 적합해야 한다.

3. 기적적인 치료가 이루어지도록 그들은 병든 자에게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발랐다. 주석자들은 대개 기름을 바르는 의식을 지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의식으로만 생각하여 기적이 일어난 다음에는 이 의식도 중단하였다고 한다. 마가복음에서 우리는 주의 제자들이 많은 병든 자들에게 기름을 바르고 치료했다는 기록을 보라(막 4:13). 그리고 주후 200년경의 교회에서 이런 의식이 실행되었다는 기록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치료의 은사는 이때에도 계속되었는데, 이런 기적의 은사가 그친 다음에는 이 의식도 중단되었다. 그런데 카톨릭 교도들은 소위 "중부성사"라고 하여 이것을 의식화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처럼 병을 고치는데 그 의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 교회를 규정 속에서 성서의 가르침을 위반하듯이, 이 의식에서도 성서를 위반하여 이 의식이 죽음의 순간에 실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주의 제자가 기름을 바른 것은 병고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톨릭교는 그들의 기름 바름이 죄의 잔재를 추방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세상의 힘과 더욱 잘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카톨릭 교도들은 그들이 이러한 의식을 계속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증명하지 못하게 때문에 신도들에게 보이지 않는 결과가 더욱 훌륭한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이 의식이 성경에 씌인 목적과는 반대로 쓰이는 것보다는 아주 없애 버리는 것이 한결 더 나을 것이다. 어떤 개신교들은 기름 바르는 것이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허락되고 승인된 것이지 관습적인 것이 되도록 허락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고보의 말에 의하면, 이 의식은 치료되리라는 믿음이 있을 때에는 허락된 듯하다. 또 어떤 개신교도들은 이 의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주장한다. 즉 이 의식은 사도들이 시대에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의식이 어느 시대에나 완전히 중단되지 않아야 하고, 기름을 바르는 자들이나 기름 바름을 입은 자들에게 특별한 믿음이 있는 경우에는, 특별한 축복의 병든 자에게 행해지는 이 의식에 수반되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한가지 사실은 병든 자의 구원이 기름바름으로써가 아니라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15절) 따라서,

4. 병든 자를 위한 기도는 산 믿음에서 시작되며 계속해서 이 믿음이 동반되어야 한다. 기도하는 자난 기도 받는 자가 다같이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병들었을 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기도는 냉정하며 판에 박힌 평범한 기도가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5. 기도의 성취에 대하여 살펴 보자. 주님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며, 또 기도 받는 사람이 구원에 적합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에게 맡길 만한 일이 아직도 있을 때에 그를 치료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15절)는 것은, 그 병이 어떤 특별한 죄의 대가로 보내졌어도 그 죄는 사함을 받고 그 표식으로써 병도 치료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병들어 약한 사람에게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권하시고, 만일 이를 어길 때에는 더욱 큰 불행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는 어떤 특별한 죄가 그 병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바로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이다. 죄는 병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찌르는 가시이기도 하다. 죄가 용서되면, 고통은 은총 속에서 사라지거나 아니면, 그 고통 속에서도 은총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병의 치료가 죄의 용서받음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사 38:17)라고 말한 것이다. 너희는 몸이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주여 나에게 평안을 주시고, 내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대개 기도한다. 그러나 그런 때의 너희의 기도는 오히려 "주여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Ⅳ.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났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16절)는 권고는 받는다. 어떤 주석자들은 이 구절을 14절과 연결하여 생각한다. 따라서, 병든 자들이 목사들을 청하여 기도해 주기를 간구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목사에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 자기들의 병의 원인이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보복적인 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하나님께 그 죄의 용서를 빌지 아니하고서는 병이 치료됨을 바랄 수 없다고 생각될 때,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하여 목사들이 그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바로 알게 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렇지만 16절에 서술된 죄의 고백은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있어야 할 고백이고, 카톨릭 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신부에게 하는 고백은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해를 입혔을 때에는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상대방에게 그 불의한 행동의 잘못됨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사람들이 서로 죄 짓도록 유혹했거나, 동일한 악행을 공모했지만, 서로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고 자처하고 회개하도록 서로를 돋우어 주어야 한다. 죄가 공동의 성질을 띄고 있고 대중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공중 앞에서 그 죄를 고백하여 그것에 관계될 모든 사람들에게 그 고백이 미치도록 하여야 한다. 때로는 덕망 있는 성직자들이나 항상 기도하는 친구들에게 죄를 고백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은혜와 용서를 탄원하여 우리를 돕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때에 야고보가 우리에게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들 서로에게 잘못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들 서로에게 잘못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고백이 우리와 다툰 친구와 화해하는데 필요하거나 또는 어떤 이에게 잘못한 일에 대한 배상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양심에 가책을 받으며 영혼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한도 내에서만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자신의 연약함과 결점을 고백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다. 이때에 그들은 서로 친밀해지고 정다워지며 또한 서로간에 지은 죄와 알력에 대한 용서를 비는 기도로써 서로 도울 수 있게 된다. 그런 까닭으로 서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자들은 모두 함께 기도해야 하며, 또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13절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고,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또 14절은 목사들의 기도를 받으라고 권하고 있으며, 16절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모든 종류의 기도를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목회적, 사회적 그리고 개인의 비밀 기도).

Ⅴ. 기도의 위대한 유익과 효력이 여기에 선포되고 입증되었다. "의인의 간구는 자기를 위한 기도이든 남을 위한 기도이든 간에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16절). 이에 대한 증거로써 엘리야를 들 수 있다(17,18절). 기도하는 자는 의로운 자이어야 하는데, 이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엘리야도 완전한 의인이 아니고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음) 복음의 의미에서 의롭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죄로써 알려진 것은 결코 하나도 사모하거나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로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로다"(시 66:18). 더 나아가서, 기도 자체가 열렬하고 내용이 충실하며 정성 들여진 기도여야 한다. 그것은 마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쏟아 놓는 것이어야 하며, 꾸밈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이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즉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며 우리의 이웃에게도 유익을 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 주실 것을 확실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역사하실 만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엘리야의 기도가 성취된 것을 예로 들어서 기도의 능력이 여기에 증거 되었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경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엘리야의 기도가 성취된 것에도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엘리야는 아주 열정적이고 선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매우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감정을 혼란을 일으켰던 사람이었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인간의 장점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엘리야를 본받아 열심히 기도하고 엘리야가 기도한 바로 그러한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의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써는 불충분하고, 간절히 기도 드려야 한다.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키고 우리의 소망을 견고하게 하며 열심을 내어 바랄 뿐만 아니라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며 간구할 때 우리는 힘없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엘리야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기고 박해를 일삼는 그 나라에 대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셔서,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늘을 열고 닫는 열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예가 요한 계시록 11장 6절 암시되어 있는데, 두 증인이 하늘을 닫고 비가 오지 못하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였다. 이같은 기도의 특별한 능력이 기록된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까지고 즉시 기도하고 또 열심히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의 그 어느 자손에게도 "나의 얼굴을 헛되이 찾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만일 엘리야가 기도로써 그처럼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의롭지 못한 사람의 기도는 공허감으로 되돌아오고 말 것이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으로 응답하시지는 않을지몰라도, 많은 은혜로써 응답되고 있으리라는 것은 틀림 없다.

Ⅵ. 이 서신은 우리가 현재에서 다른 사람들의 회심과 구원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다하라고 권고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19,20절). 어떤 주석자들은 이 구절들을 해석하기를 야고보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결점과 잘못을 매우 노골적으로 혹독하게 질책한 것에 대한 사과의 말이라고 한다. 야고보는 그가 유대인의 잘못을 고쳐 주는데 크게 관심을 쏟는 이유를 확실히 보여 준다. 즉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구하고 많은 죄를 덮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을 야고보가 진리를 떠난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내용으로만 제한해서는 안 되고, 또한 이와 비슷한 종류의 또다른 연속적인 노력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잘못을 저지른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여 그로 하여금 또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게 하면, 잘못을 저지른 자를 돌아서게 한 그 사람은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도구인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들로 생각되었다. 자기에겐 과실이 없다고 자랑하거나 자신의 과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지혜롭다거나 경건한 사람의 표정이 될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잘못한 것을 말해 주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그들의 아주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사람일 때에 그들을 좀더 지혜롭고 훌륭하게 행동하도록 격려하는 일을 꺼려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을 진리, 즉 복음(가장 위대한 규칙이며 진리의 표준)을 떠나면, 그것이 생각에서이든지 실제 생활에서이든지 간에 그들이 이 규칙에로 되돌아 오도록 너희의 모든 노력을 다 하여야 한다. 판단의 잘못과 생활에서의 실수는 항상 서로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 실제적인 모든 실수의 근저에는 어떤 교의상의 오류가 있게 마련이다. 습관적으로 나쁜 사람이란 있을 수 없고, 다만 어떤 좇지 않은 원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돌이키는 방법은 그들의 과오를 줄이는 것이며, 그들을 끌고 다녔던 악으로부터 그들의 교화시키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는 형제에 대하여 우리가 반드시 힐책하고 공격해야 하며, 그들에게 치욕과 재난이 임하기를 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돌이키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모든 노력으로도 그들을 돌이킬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핍박하고 파괴할 권력을 아무에게서도 부여받지 못했다. 우리가 만일 어느 누구의 돌이킴에 있어 도움이 된다면, 이 돌이킴의 역사가 대체로 위력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우리에게 그들을 돌이키는 일이 맡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인들의 회심을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에는, 그들을 회심시키고 변화시키도록 하나님의 은혜와 영이 임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회심시키는 일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한 결과로써 어떠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현재에 큰 위로를 얻고, 마지막에는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19절에서 "진리를 떠난"이라고 말해진 사람이 20절에서는 "미혹한 길에서"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우리가 그들의 길을 고치고 수정하게 해 주지 않고는 단순히 그들의 생각만 바꿈으로써 그들의 회심시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회심이라는 것은, 죄인이 그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지, 이쪽 파에서 저쪽 파로 옮긴다든지, 또는 단순히 한 사상이나 사고방식에서 다른 사상이나 사고방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는 그 영혼을 사방에서 구원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일은 분명히 훌륭한 평가를 얻을 것이다. 영혼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써, 여기서는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만 언급되었지만 그것은 바로 전인적인 구원을 포함하는 것이다. 즉, 영혼은 지옥에서 구원되고 몸은 무덤에서 일으켜 세워지며, 이 둘이 모두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된다. 그리고 나서 마음과 생명의 회심으로 인하여 허다한 죄가 덮여질 것이다. 성서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구절은 바로 이 구절이다. 우리가 여기서 배우게 되는 것은 우리의 죄가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할지라도, 그 모두가 덮여지고 용서되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따돌려지고 버림받게 되면, 심판 때에 다시 우리에게 나타나지 못한다. 인간이 그들의 원하는 대로 죄를 방어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날 방도를 꾸미게 하라. 그것은 가장 효과적이고 최종적인 방법으로써 죄를 표기하는 것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가리켜, 회심이 허다한 죄를 방지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회심한 무리들에게 수많은 죄가 방지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회심한 무리들에게 수많은 죄가 방지됐다는 것은 논쟁할 여지가 없을 진리이며, 이러한 현상은 그 무리들의 영향을 받게 되거나 함께 회심하게 될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생각하여 볼 때, 죄인들을 회심시키는 일을 위하여 우리가 어떤 가능성 있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그것은 회심자들의 행복과 구원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많은 손해를 막으며, 죄가 세상에 퍼지고 난무하는 것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한 것이 되며, 마지막 날에 우리의 위안과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많은 죄인을 의인으로 돌아서게 한 사람들과 그러한 일에 협력할 사람들은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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