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를 다스리기(야고보서 3:1-12)
전 장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무익하며 쓸모 없이 죽은 믿음인가를 보여 주었다. 그러한 믿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의 성품과 말에 있어서 잘난 체하며 거만하게 만들기가 쉽다는 것이 3장에서 분명하게 연관되어 기록되어 있다. 2장에서 정죄되고 있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본 장이 비난하는 혀의 죄를 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혀를 사용하는 최선의 방법이 혀를 함부로 사용하여 남을 명령하고 비난하여,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에 대한 경계로써 요구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배우게 된다.
Ⅰ. 우리의 혀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도록 하라. "내 형제들아,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1절).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하여 지시하고 가르치거나 잘못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갈 때에 그들을 책망하는 것을 금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씀은 항상 지휘자의 위치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즐겨해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 자신의 판단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도록 명령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각기 다양한 은사를 주셨으며, 그들이 받은 바 지혜에 따라 합당하게 행동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였다. 즉, "너 자신이 선생과 권세기와 재판관과 같은 거만한 자세를 지니지 말고 다만 배우는 자로서의 겸손과 정신으로써 말하라. 마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너의 기준으로 판단 받아야 하는 것처럼 서로 비난하지 말라." 이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강조되었다.
1.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남을 비난하고 재판하는 자로 나선 자는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우리 자신은 그 보다 더 엄격하고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 7:1, 2). 다른 사람의 잘못을 몰래 염탐하는 것을 즐겨하고 오만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말하고 행한 잘못들을 극도의 노하심으로 기록해 두실 것이다.2. 선생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2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잘못과 범죄에 대하여 좀더 깊이 생각한다면, 한결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남에게서 잘못을 찾아내려는 심한 충동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남을 향한 범죄 의식을 깨닫지 못한다. 스스로의 의롭다 여기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다른 사람의 약함과 허약성에 대하여 헛되이 떠드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내적으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거의 생각지 못한다. 아니, 아마도 그들의 거만한 태도와 비난하는 혀가 그들이 비난하는 다른 사람들 속의 잘못보다 더욱 나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을 판단할 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는 자비롭게 하는 태도를 배우자.
Ⅱ.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혀를 제어함으로 우리 자신이 완전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판명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몸 전체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2절). 여기서 암시되어 잇는 것은 양심에 혀로서 저지르는 죄의 유혹을 받고도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고결한 사람이며, 그것이 바로 참된 은혜를 받았다는 분명한 표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만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1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하면, 그의 신앙 고백과 경건은 헛 것이다(1:26). 더욱이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성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증명될 뿐만 아니라 한층 진보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도 판명된다. 따라서 한 사람의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은혜와 지혜는 그 사람의 모든 행동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비교함으로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1.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며 이끌 수 있는 것은 그 입에 재갈을 먹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의거하며"(3절)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짐승과 같은 맹렬함과 방약무인한 요소가 다분히 많다. 이런 요소는 거의 대부분이 혀에 의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혀를 재갈먹여야만 한다. 이 필요성에 대하여서는 시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가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우리의 혀가 재빠르며 활동적이면 일수록 더욱 더 그것을 다스리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마치 의거하지 못하고 다스리기 힘든 말이 주인을 태운 채 달아나거나, 주인을 내동댕이치듯이, 다스려지지 못한 혀도 그 주인에 대하여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을 받아 마음에 각오와 경계심으로 혀를 제어하게 하면, 우리 몸이 행하는 모든 몸짓과 행동이 쉽게 인도하며 다스려질 것이다.2. 키를 바르게 조종함으로 배를 조종할 수 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4,5절). 키가 배의 작은 부분인 것과 같이 혀도 우리 몸에서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키를 올바르게 조종할 때 그 배가 운전하는 사람의 뜻대로 움직여 나아가는 것과 같이, 대개의 경우에 혀를 바로 사용함으로써 한 인간이 전체적으로 다스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비교에는 작은 것들이 거대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경이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혀의 바른 사용에 대하여 더욱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혀가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대단히 큰 유익을 가져다 주거나 아니면 크나큰 해를 입힐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Ⅲ. 우리는 다스려지지 않은 혀를 가장 크고 치명적인 악으로써 두려워해야 할 것을 배운다. 많은 가연성 물질 가운데 있는 적은 불꽃이 순식간에 큰 화염으로 변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과 같이, 혀는 작은 불꽃에 비교되었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5,6절). 혀에는 그것이 불의의 세계라고 불릴 만큼 많은 죄가 포함되어 있다. 혀가 저지르는 더러운 죄악이 얼마나 많은가! 혀가 일으키는 불길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것인가! "하늘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6절). 여기서 혀가 일으키는 죄 가운데는 크나큰 공해와 불결히 있음을 명심하라. 더러운 정욕이 불타오르고 남에게까지 나타나며, 마음속에 이 정욕이 솟아오르는 것은 모두 이 제어되지 못한 혀로 인하여 되어지는 것들이고, 온 몸이 죄에 빠져 범죄케 되는 것도 바로 이 혀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말하기를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전 5:6)고 하였다. 인간들이 자기의 혀로 인하여 걸려들게 되는 덫은 스스로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며 타인들에게는 파괴적인 것이다. 혀가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6절). 인간과 그 사회의 일은 자주 혼란에 빠지며, 모든 것이 불꽃과 같이 격렬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 대부분이 인간의 혀가 원인이 되는 수가 많다. 어떤 주석자는 위의 구절을 "우리의 모든 세대가 혀로 인하여 불살라진다"라고도 해석한다. 이러한 예가 적용되지 않는 시대나 삶의 정황, 그리고 개인 또는 집단이란 없다.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6절). 지옥은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혀에 불을 더해 준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인간의 혀가 격분되어 불타오르는 것은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되며, 결국 악마적 계획에 종사하게 된다. 악마는 거짓말쟁이 이며, 살인자이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라고 분명하게 불리운다. 인간의 혀가 이러한 일에 사용될 때는 언제나 지옥의 불로 타오르게 된다. 성령이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진 형태로 내려온 적이 한번 있었다(행 2장). 그때에 혀는 하늘로부터 있었다(행 2장). 그때에 혀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에 의하여 말해져서 선한 마음과 거룩한 감동, 그리고 뜨거운 헌신을 불일 듯하게 했다. 그러나 인간의 혀가 지옥의 불로 뜨거워졌을 때에는 적당한 열이 가해지지 않았을 경우처럼 우리에게 해로울 뿐이며 분노와 미움만을 일으키고 사탄의 계획에 종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너는 불꽃과 화염을 두려워하듯이, 말다툼과 욕설과 중상모략과 거짓말, 그리고 그 밖의 너의 영혼이나 다른 사람의 영혼에 진노의 불을 타오르게 하는 모든 일을 두려워해야 한다.
Ⅳ. 그러나 다음으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혀를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이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나"(7,8절), 야고보가 말한 것은 마치 다음과 같다. 사자들과 야수들과 가장 힘센 동물들도 말과 낙타처럼 길들여져서 인간이 다스리고,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공중의 날아다니며 야생적이고 겁많은 새들도 인간에 의하여 다스려지며, 독을 지니고 교활한 뱀도 인간과 친밀해지고 무해할 뿐만 아니라, 바다 속에 있는 생물까지도 인간에게 이용되고 필요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피조물들은 기적에 의하여서만 인간에게 길들여지는 것은 아니고(사자가 다니엘을 삼켜버리기는커녕 그저 웅크리고 앉아만 있었고,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었으며, 고래가 깊은 바다 속에서 요나를 건져내어 마른땅에 데려다 준 기적들처럼),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되어질 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써 사람이 길들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혀는 그러한 동물들보다도 더욱 길들이기 힘들며, 이런 동물들을 길들이는 기술과 능력으로는 결코 길들일 수가 없다. "혀로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혜와 도움뿐이다." 야고보가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그 일이 아주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며, 따라서 혀를 질서있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경계와 수고와 기도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때때로 이 모든 수고가 그래도 부족하여 수포로 돌아갈 때가 있다. 왜냐하면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8절)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서운 짐승도 어떤 우리 안에 가두어 둘 수 있고 어떤 훈련법으로 다스릴 수 있으며, 심지어 뱀까지도 그들의 모든 독에도 불구하고 해롭지 않게 이용할 수 있다. 그들의 인간의 혀는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울타리와 규칙을 파괴하고 때때로 독을 뱉어내기 쉽다. 그러므로 혀에 대해서는 야수나 또는 해롭고 독을 지닌 생물들처럼 다스려지고 경계될 뿐만 아니라 그 해롭기 이를 데 없는 피해의 발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좀더 강력하고 세심한 주의와 수고가 필요한 것이다.
Ⅴ. 우리는 신앙 생활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우리의 혀를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가르침을 받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러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우리의 혀를 남을 욕하고 비난하며 그밖에 악을 행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9,10절). 자기의 혀를 기도와 찬송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또한 그 혀를 저주와 비난과 같이 악한 일에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만약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선한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을 한 혀가 또한 자기의 동료 인간들을 욕하는 언쟁적인 말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은 남을 욕되게 하는 비난을 감히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이 지음 받은 인간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 자신과 그들이 위대한 원천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체하는 태도와의 사이에는 가장 부끄러운 대조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10절)는 말씀대로 만일 이런 생각이 항상 가까이에 있다면 설마 그같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경건에 사랑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경건은 그 나타내는 모든 일 중에서 치욕을 당하게 된다. 이 같은 사람의 혀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찬양을 돌리는 척하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동시에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처럼 말하고 표현을 나타내지 않을 때에는 그 사람을 정죄하는 자신을 또한 변호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러한 생각을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야고보는 동일한 원인에서 상반되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 근본이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이는 덕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11,12절). 참된 경건은 부정을 받아들일 수 없고, 참으로 경건한 사람은 자기의 말과 행동에서 이같은 자가당착을 허용할 수 없을 것이다. 경건은 진실로 이러한 죄를 방지하며, 믿음과 행실의 상호 모순 가운데 빠진 인간을 다시 회복시켜 항상 자기 자신과 일치한 삶을 살게 해 준다.
위로부터 온 지혜(야고보서 3:13-18)
이미 전 구절에서 정죄한 죄들이 남보다 더 현명한 체하며 자기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더 총명한 듯이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이 구절에서 스스로 지혜 있는 자인 체하는 사람과 진실로 현명한 사람 사이의 차이를 보여 주며, 또한 아래에서(이 세상과 지옥) 생겨진 지혜와 위에서부터 온 지혜의 차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Ⅰ. 우리는 그 특이한 표식과 열매로써 참 지혜를 분간해 낼 수도 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13절). 참된 지혜가 있는 사람은 사물을 바로 인식하는 사람이다. 그는 충분한 지식을 지니지 않은 채 현명하다는 평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또한 그 지식을 올바르게 적용하며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단지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가치 있게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참 지혜의 진위를 결정하는데 꼭 같이 필요한 요소이다. 누가 지혜로우며, 또한 지식을 부여받았는가? 다행히도 이 두 가지가 더 구비되어 있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함께 있을 것이다.
1. 선행.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지혜롭다면, 우리의 행실에서 거칠고 허탈함이 보이지 않고, 선함이 보임으로써 그 지혜가 증명되어야 한다. 남에게 알려 주며 화해시키고, 선을 행하는 말들을 지혜의 표지가 되고,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나 또는 다른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위대하게 보이면서 해독을 끼치며, 악의 기회가 되는 말들은 지혜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다.2. 참된 지혜는 그 행하는 일로써 알려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행"의 의미는 단순히 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전 인격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선행으로 네 하는 일을 나타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참된 지혜는 선한 개념이나 환상속에 남아 있지 않고, 오히려 선하고 유익한 행위로 나타난다. 만일 선하게 행동하며 선하게 살지 않는다면 그가 아무리 깊이 생각하고 훌륭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성서가 의미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다.
3. 참된 지혜는 영혼과 성격이 온유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13절). 우리들 자신의 진노를 조심스럽게 재갈먹이며, 다른 사람의 노함을 끈기 있게 참고 견디는 것은 지혜가 있음의 훌륭한 증거가 된다. 또한 지혜는 온유함으로 자신을 증명하듯이, 온유함은 지혜의 둘도 없는 벗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격정이야말로 우리가 지혜롭게 행동하는데 필요한 공정한 사고력과 엄격한 판단, 그리고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유하고 마음이 고요할 때 사건의 이유에 대해서 가장 잘 들을 수 있고, 또 그에 대하여 가장 적절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는 온유함을 낳고, 온유함을 지혜를 더해 준다.
Ⅱ. 우리는 여기에 언급된 것에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랑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들의 지혜는 그들의 자만함과 행실에서 그 성격이 밝혀진다.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14절). 만일 네가 사랑과 화평케 하는 생활을 그만두고 시기와 다툼으로 일삼는다면, 이것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며, 겉으로 현명한체 행세하는 네 자랑을 즉시 중단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만일 네게 진리와 정통적인 것에 대한 열심히 있으며 남보다 더 많은 지식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길지라도 이것들을 남을 미워하는데 사용하거나 네 마음을 원한으로 불타오르게 하는데 사용한다면, 이는 너의 기독자로서의 신앙 고백에 부끄러움이 되며, 기독교에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거슬려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다음을 유의해 보자.
1. 시기와 다툼은 지혜의 온유함에 반대된다. 우리 마음은 이 두 가지가 다 거처할 수 있는 진리이다. 그러나 시기와 지혜가 한 마음속에 함께 거하지 못한다. 거룩한 열심과 격심한 질투는 천사들의 거룩한 화염과 지옥의 불길이 서로 다른 것과 같이 상이한 것이다.2. 시기와 다툼에도 순서가 있다. 시기심이 먼저 발생하고 이것이 다툼을 일으킨다. 다툼은 헛된 자랑과 거짓말로 자신을 변명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로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뒤따라 일어나게 된다(16절). 악함과 시기와 자만과 혼란 가운데 사는 사람은 모든 악한 일을 행하도록 자극 받고 서두르게 되기 쉽다. 그러한 무질서는 많은 유혹을 일으키며, 그 유혹을 점점 더 거세게 만들어서 마침내는 인간들로 하여금 대단히 많은 죄를 짓게 한다. 하나의 죄는 또다른 죄를 낳으며, 그 악 영향이 얼마나 클 것인가는 결코 상상할 수 없으며 많은 죄악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지혜를 자랑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의 가르침이 거짓이라고 비난하며 이 거짓 지혜가 정직한 지혜인 체 속이지 않고서야 이 지혜가 자랑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을 명심해야 한다.
3. 이런 지혜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이 땅에서 생겨난 것으로써 더 분명히 말한다면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것이다(15절)" 그것은 이 세상적인 원칙에서 생겨나서 세상적인 동기에 따라 행동하고, 세상적인 목적에 사용되기 위한 것이다. 이 지혜는 정욕적이고 육의 쾌락을 도모하며 육신의 번뇌와 욕망을 성취시키려고 준비한다. 또한 원어인 fukikh.라는 단어의 뜻은 영적인 것에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동물 또는 인간으로서 어떤 초자연적인 빛의 도움이 없는, 전적으로 본성의 욕구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히 악마적인 것으로써 이 지혜는 마귀의 지혜이며(불만을 조성하고 해를 입히며), 마귀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마귀의 꾀임은 교만이며(딤전 3:6), 성서의 다른 부분들을 이 마귀가 내뿜는 분노와 형제에 대한 비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악한 지혜를 갖춘 사람은 마귀가 받을 심판을 함께 받아야 한다.
Ⅲ. 우리는 이 땅에서 생겨난 마귀의 지혜와 반대되며, 하늘로부터 내려온 충만한 지혜의 아름다운 모습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즉,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17절) 참된 지혜는 오직 하나님의 은사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지혜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인간과 더불어 사귀는 가운데 얻거나 세상 지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지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구성된다.
1. 이 지혜는 그 가치를 떨어뜨리게 될 다른 교훈이나 목적과 뒤섞이지 않은 채 성결하며, 또한 불의와 더러움과 상관이 없고 죄라고 알려진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지혜는 오직 마음과 생활에 거룩함을 간직하기를 바랄 뿐이다.2. 하늘로부터 오는 이 지혜는 화평하다. 평화는 성결함의 뒤를 따르며 성결함에 의존한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평화를 보존할 수 있는 일을 하므로 평화가 결코 깨어지지 않으며, 또한 그들은 평화를 이룩하는 일을 하므로 평화가 상실된 곳에 평화가 다시 회복되게 된다. 국가와 가정과 교외와 모든 사회안에, 그리고 모든 회담과 계약에서,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인간을 화평케 만든다.
3. 위로부터 이 지혜는 관대하여서 재산 문제에서 과격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거친 말과 행동으로 남을 비난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에 대하여 그 의로나 중요성을 무시한채 무조건 자신의 의견만을 맹렬히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타인과 대화할 때 무례하거나 오만하지 않고, 또 성격이 거칠거나 무정하지 않다. 이와 같이 관용함은 이 모든 것에 반대된다.
4. 하늘에서부터 온 지혜는 양순하다. 여기서 양순하다는 말은 euvpeiqh.j ─ 즉 매우 쉽게 권고될 수 있다는 뜻으로써 선한 일을 권하거나 악을 떠나라고 권하는 말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연약하고 그릇된 양순함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권고하는 바와, 우리의 동료들의 모든 정당하고 합리적인 조언과 요청에 대하여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은 비난받을 양순함이 아니다. 이 양순함은 논쟁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고, 또 그 논쟁을 통해서 선한 결과가 오게 될 때는 논쟁도 포기하지 않는 양순함이다.
5. 하늘에서 온 지혜는 구제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구제하며, 죄를 범했을지라도 용서를 구하는 자를 용서해 주는 등 친절하고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생각을 내면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실제로 그러한 기회가 생겼을 때는 그 기회에 적절하게 행동하는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차 있다.
6. 하늘에서 온 지혜는 편파적이 아니다. 원어인 avdia,kritoj는 여러 사람 중에서 특별히 한 사람을 지목하여 의심하거나 판단 또는 엉뚱하게 그릇된 추측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난외의 주에 의하면 이 말의 뜻은 분파적인 행동이나 지기파의 유익만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해 주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비난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7. 위로부터 오는 지혜에는 거짓 없다. 이 지혜는 위장하거나 속이지 않는다. 또 이 지혜는 교활하고 간사하며, 세상에서 현명하다고 말하는 술책에 빠져들지 않는다. 이 지혜는 오직 신실하고 개방적이고 꾸준하고 변동되지 않으며 그 지혜 자체와 항상 일치된 길을 걷는다. 당신과 내가 다같이 이와 같은 지혜의 인도함을 받는다면 우리로 바울처럼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말하는 것은 육신의 지혜를 따름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단순함과 경건한 신실성으로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참된 지혜는 계속하여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둠으로써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룰 것이다(18절). 평화로 심은 것은 기쁨의 수확을 얻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경쟁에서 얻은 열매를 수확하도록 하자. 그들은 거기서 자신의 유익을 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화평으로 의의 씨를 계속 뿌리도록 하자. 우리가 이 수고를 계속하는 한 그 수고한 대가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빛은 의로운 자들에게 비추어졌고, 기쁨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의가 하는 일은 화평을 이루는 일이고, 그 결과는 마음의 평온과 영원에 대한 보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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