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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인사말(야고보서 1:1)

본문은 본서의 서문이다. 서문은 세 가지 주요한 부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Ⅰ. 저자의 명칭.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1절)라고 명칭으로 알려지기를 바랐다. 비록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으뜸가는 사역자였지만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종이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는 가장 최고의 직분을 가진 사람이거나 또는 아무리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종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사역자로서 행동해야 하고 주인 행세를 하여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서 그는 복음 전도자들 간에 "주님의 형제"라고 불리웠으나 그 자신은 육을 따라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자랑하고자 하지 않고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을 더 영광되게 알았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명칭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해야 한다. 야고보가 자기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고백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섬길 때 아버지와 함께 아들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아들의 종으로서 일하지 않는 한, 아버지께 대한 섬김도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기를" 바라신다(요 5:23).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 용납 받고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받으며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또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기를 바라신다.

Ⅱ. 야고보는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의 정황을 본문에서 언급하였다. 즉 그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라고 하였다. 어떤 주석자는 본문의 흩어진 자들을 스데반의 이후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행 8:1). 그러나 그때의 흩어진 범위는 유대와 사마리아에 한정된 것이다. 다른 주석자들은 본문의 흩어진 유대인들을 앗수르와 바벨론과 애굽 및 여러 나라들 가운데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들이 이들 나라로 가게 된 것은 전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열두 지파 중 열 지파의 대다수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혀가서 그 나라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각 지파 가운데 몇 사람들이 남아서 "열두 지파"라고 전통적인 명예로운 존칭으로 일컬어진 것이다. 여하간 서신을 받은 사람들은 흩어진 유대인들이었다.

1. 하나님이 그들을 흩어진 것은 자비의 섭리가 있으셔서였다. 구약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섭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각 나라로 흩으시고 그들을 통해 각 나라에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퍼뜨리고자 하였다.

2. 또한 그들이 흩어진 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유대 나라는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었고 그 백성들은 자기의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들의 나라는 그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난을 주었다. 그 백성들 가운데 선한 사람일지라도 모두가 당하는 재난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3. 본문의 흩어진 유대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박해를 받았고 그러므로 다른 나라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그리스도교인에게 친절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선택하신 백성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각지로 흩어지게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들이 다시 모이는 날은 마지막 날까지 보류되고 있다. 그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흩어진 자녀들을 모두가 그들의 우두머리 되시는 그리스도께로 함께 모일 것이다. 그 동안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각지로 흩으시며 한편 또 그들을 돌볼 자를 그들에게 보내신다. 본문에 보면 한 사도가 흩어진 유대인을 위하여 편지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그의 성전에서 쫓겨나 이제는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라고 낙심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었다. 본문의 정황을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자. 에스겔은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얼마동안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겔 11:16)고 말씀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추방당한 자기의 백성들을 특별히 돌보신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너 모압이여 내가 나의 쫓겨난 자들로 너와 함께 있게 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사 16:3, 4). 하나님의 백성들도 흩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외적으로 누리는 특권을 너무 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외적인 재난을 당한다고 낙심하거나 하나님께 거부당하였다고 생각하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그의 백성들을 기억하시고 위로를 주시기 때문이다.

Ⅲ. 야고보는 본문에서 흩어진 유대인들에게까지 존경을 표하였다. 본문에 보면 그는 그들에게 "문안하였다." 즉 그들에게 인사를 보내고 그들의 평안과 구원을 기원하였다.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이 고난당하고 있다고 해서 낮게 평가하여서는 안 된다. 사도는 흩어진 유대인들이 위로를 받는 것이 그의 진정한 소망이었다. 즉 그는 그들이 잘되고 평안하며 어떤 곤경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 어디서나 기뻐할 이유가 충분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넉넉하신 주님이 이 모든 수고에 대하여 풍성한 것으로 갚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1:2

신앙과 인내의 필요성(야고보서 1:2-12)

이제 우리는 야고보서의 본론을 다루게 되었다. 위의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들을 고찰하도록 하자.

Ⅰ. 본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이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말씀되고 있다.

1. 시련과 고통은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을 수 있음을 본문은 말해 준다. 즉 가장 사려가 깊고 소망에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것임을 말해 준다.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선한 백성들이 흩어짐을 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 것처럼 또한 그들이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서도 안 된다.

2. 이러한 외적인 고난과 고통을 그들에 대한 일종의 시험이다. 사탄은 고난과 십자가를 인간에게 매워 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고 가지의 의무를 태만히 하게 만들려고 애쓰며 또는 그들로 의무를 감당할 수 없게 만들려고 애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이 시련을 극복하면 그 시련은 오히려 우리의 믿음의 덕을 증강시켜 주는 것이다.

3. 이러한 시험들을 대단히 많고 다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야고보가 본문에서 말한 대로 "여러 가지의 시험"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대단히 많고 또 그 종류가 다양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갑옷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빈틈없이 무장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시험은 사방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4. 선한 사람은 시험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거나 또한 죄를 지으므로 스스로 시험에 빠져들지 아니한다. 그에게 주어진 시험은 그에게 그냥 닥쳐 온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선한 사람은 시험을 더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Ⅱ. 본문은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의 상황에서도 지녀야 할 믿음의 덕과 지켜야 할 의무를 알려 준다. 만일 우리가 고난 중에도 우리의 할 바를 다하여 믿음이 자라날 수 있다면 고난 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하겠는가!

1. 그리스도인의 시련 중에 지녀야 하는 덕 가운데 하나는 기쁨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고 하였다. 우리는 시험을 당하여서 슬픔에 빠지거나 마음이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를 시험에 패배하게 만든다. 다만 우리는 고난을 당하면 우리의 영혼을 깨닫고자 노력하고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고난에 대처함으로 좀 더 큰 유익을 얻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철학도 인간들로 하여금 고난의 때에 평정을 유지하도록 가르칠 수는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들에게 고난을 당할 때 기뻐하도록 가르친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련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대장되시는 그리스도와 같은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을 우리의 양자됨의 표지가 된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인간들 가운데 세워진 주의 나라의 유익을 위하여 섬기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빛내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현재의 우리의 믿음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며 마지막날에 우리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무를 행하는 중에 온갖 시험과 어려움이 닥치면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진리는 신약에서 처음 말씀된 것이 아니고 이미 욥의 시대에도 말씀된 것이다. 거기 이르기를 "하나님에게 매를 맞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약 우리가 시험을 당하므로 믿음이 더욱 온전해질 수 있다면 우리가 환난 가운데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더욱 커지는 것이다.

2. 믿음은 하나의 덕으로 어떤 사람은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에게는 명백히 필요한 것이다. 본문에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절)라 했고, 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6절)라고도 했다. 시련의 때에는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에 대한 건강한 믿음과 그 진리에 굳게 매달림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환난으로 시련 당한 믿음은 하나님의 권능과 말씀과 약속에 대한 믿음과 주 예수께 대한 신실성과 견고함에서 생겨지는 것이다.

3. 인내하여만 한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절). 한 가지 덕에 대한 시련은 또다른 덕을 만들어내고, 그리스도인의 덕들의 많은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 덕들은 점점 더 강하여 진다. "환난의 인내를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 이제 그리스도인의 인내를 올바르게 단련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의 일을 행하여야 한다.

(1) 인내심이 작용하도록 해라. 인내는 마비된 것이 아니고 활동적인 것이다. 금욕적인 냉담과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매우 다르다. 금욕적인 냉담으로 인간은 자기가 당하는 환난에 대하여 다소 감각이 무디어지지만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인간들로 하여금 그 환난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만들어 준다. 시련의 때에 우리들 속에 인내가 작용하고 열정이 작용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행하든지 간에 인내가 말하고 인내가 행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열정이 인내의 작용과 그 고귀한 결과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열정은 근심으로 번민할 때에 활동하여 놀라운 결과를 이루도록 해 준다.

(2) 우리는 인내로 하여금 그 사명을 다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어떠한 제한을 두거나 인내를 약화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다만 인내로 하여금 그의 모든 목적을 수행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만약 한 가지 환난의 뒤를 이어서 또다른 환난이 잇달아 오고, 이러한 환난이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인내는 그의 임무를 완전히 이룰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고, 그가 명하시는 동안 죽 계속하여 겸손한 복종의 눈으로 그를 지켜보며 그 분부하신 것으로 마음에 근심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할 때, 비로소 인내는 그의 사명을 완전히 수행해 냈다고 할 수 있다.

(3) 인내가 그 사명을 온전히 이루었을 때 그리스도인은 완전해지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인내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투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며 마지막날까지 견디도록 도와줌으로써 그 사명을 다하게 되고, 마침내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우리들이 먼저 다른 많은 덕들로 풍부하여진 후에야 인내를 필요로 하게 된다(히 10:36). 그러나 인내로써 그 완전한 사명을 수행케 하면 우리도 완전해지고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질 것이다.

4. 기도는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권고된 의무로써 이에 대하여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우리가 특별히 위하여 기도할 것은 지혜로써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하나님께 구하라"(5절)고 말한다. 우리는 환난이 옮겨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기 보다 지혜를 바로 사용하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커다란 시련 속에서 지혜를 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과 자신의 정신과 기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기 일을 혼자서만 떠맡아 해결해 보려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시련의 때에 지혜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여만 하는 것이다.

(2) 이러한 지혜를 얻는 방법은 그것을 얻기 위하여 탄원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일지라도 은혜의 보좌 앞에서 빈털털이가 되게 하면 그들은 지혜로운 자가 되는 가장 올바른 길에서 있는 셈이 된다. 이 말은 그 어떠한 인간에게도 지혜를 요구하지 말고 하나님께 요구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지혜를 요청하는 자를 만드신 분이고 그에게 이해력과 이성의 사고의 능력을 주신 분으로서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들은 그분에게 속하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함을 하나님께 고하고 날마다 그에게 지혜를 구하여야 한다.

(3)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5절)이란 말씀에서 지혜를 구하는데 대한 큰 용기를 얻는다. 그렇다 지혜를 구하기만 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절)고 분명하게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려 할 때 우리의 마음을 낙심케 하여 변절시키는 모든 요소에 대하여 대답해 주는 그 무엇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지혜의 필요성에 의하여 우리가 보내어진 그분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지혜를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시기를 즐겨하시는 성품의 소유자이시다. 이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은 어떤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어 그 밖의 사람들 또는 변변치 못하게 간구하는 영혼은 제외된다는 등의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대단히 많은 양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고 간구하면, 결코 그보다 작은 양의 지혜가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이에 대하여 확언하기를 하나님은 후회 주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는 아무 때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자기 자신이 어리석음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하나님은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우리가 언제든지 간에 지혜를 구하고 싶거든 얼마든지 자주 구하라. 그러면 아무 책망도 받지 않고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말씀들이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적중하는 말일지 몰라도 내가 지혜를 구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에서처럼 지혜가 주어질 것 같지 않아 두렵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말씀이 얼마나 각별하고 분명한 약속인가를 생각토록 하여 주어야 한다. 지혜가 요청되어지게 되면,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의 어리석음 속에서 당연히 파멸해야 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4) 우리가 지혜를 구할 때 고려해야 할 한 가지는 믿음으로 꾸준히 구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6절). 우리가 그런 조건을 지킬 때 그 약속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께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며 이 지혜를 얻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순수한 지혜를 만드실 수 있는 분이며, 또한 자신의 말씀을 의지하여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켜 주시는 분이심을 믿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고쳐 주심을 바라고 나온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신 조건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으리라고 네가 믿느냐?" 믿음에는 조금도 의심으로 인한 동요가 있어서는 안 되며 불신앙이나 또는 순전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손해나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불안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5. 단 하나로 집약된 의도와 그 성실성, 그리고 믿음의 굳셈을 환난 중에 요구되는 또 하나의 의무를 이룬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6절) 때로 믿음으로 들어 올려졌다가는 그 다음 순간에 불신으로 인하여 다시 내팽개쳐지고 또 때로 영광과 존귀케 됨과 불멸을 얻고자 하는 의도에서 하늘나라를 향하여 올라갔다가는 그 다음 순간에 육신의 안일과 이 세상의 향락을 찾아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하는 식의 태도가 바다의 물결에 아주 적합하고 어울리도록 비교되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바다의 물결이란 바람이 상하로 불어대거나 좌우 사방으로 불어댐에 따라 높이 치솟았다가는 떨어지고 또 불어났다가는 다시 가라앉아 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있는 영적이고 영원한 관심거리에 대하여 집요하고 풍성한 관심을 가지며 그 목적을 꾸준히 하나님께 집중시키고 있는 사람은 환난으로 인하여 오히려 더 지혜로워지고 열렬한 헌신의 생활을 계속할 것이며 또한 모든 시련과 반대를 초월하여 그보다 우위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게 야고보 사도는 의심하는 영혼과 약한 믿음을 고쳐 주기 위하여 그것들의 나쁜 결과를 제시한다.

(1) 야고보는 이쯤에서 기도의 성취에 대한 말은 끝내고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7절)고 한다. 불신하며 자주 변하며 안정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을 마땅히 그가 존귀히 여겨야 할 것으로 생각지 않기 쉽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신적이며 하늘에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함에 있어서 우리가 그 지혜를 이 세상의 루비나 그 밖의 가장 귀중한 것들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지 못하면 그 간구는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2) 의심하는 믿음과 영혼은 우리들의 대화에 나쁜 영향을 준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8절). 우리의 믿음과 영혼이 이차적인 것에 대한 원인으로 인하여 심한 변화를 일으킨다면 우리의 언행은 대단히 불안정할 것이다. 이러한 언행으로 인하여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멸시를 당하게 되며 또한 그런 태도로써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한 분 하나님만을 믿을 때 한 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므로 이러한 상태 속에 우리는 조용히 그리고 끈기 있게 남아 있어야 한다. 물과 같이 불안정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결코 드러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Ⅲ. 그리스도인의 거룩하고 겸손한 성격의 좀 더 성숙한 것과 아직 미성숙한 것의 두 가지가 묘사되어 있고, 가난한 자와 부한 자는 그들의 기쁨과 위안을 어떠한 기반 위에서 얻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된다(9-11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살펴 보자.

1.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형제들로서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9절) 가난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친교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2,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도 풍부하게 살 것이다. 은혜와 풍요함이 전적으로 서로 상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은과 금이 풍성하였다.

3. 그러므로 가난하든 부하든 간에 우리는 즐거워해야 한다.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는 조건이란 아무 것도 없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일 뿐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믿음이 부유한 자로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존귀케 되면 그는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유한 자는 낮고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 그 겸손한 섭리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태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의를 위하여 가난해지는 자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의 빈곤은 오히려 그들의 존귀케 됨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치욕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누구든지 낮은 자리에 처하고 은혜로서 낮아진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존귀함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

4. 부유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가진 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까닭을 살펴보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재산이란 모두 지나가 버리는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풀의 꽃이 쇠잔함과 같이 부한 자와 그가 지닌 재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11절) 이제 다음을 주의해 보자. 세상적인 제물은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부는 너무나 불확실한 것이며(박스터가 말한 바와 같이) 또한 아주 사소한 것이어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우리 마음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꽃이 뜨거운 태양열에 시들어 버리는 것처럼 부한 자도 그의 부유함 속에서 행하는 일이 이와 같이 쇠잔할 것이다. 이 세상을 위한 부자의 계획과 의도와 경영이 바로 11절에서 말하는 "그 행하는 일"로써, 이 속에서 그는 시들어 버릴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인하여 부한 자는 자기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가 아니고 그를 겸손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기뻐해야 하고 또한 그로 하여금 썩어질 쾌락에서 행복을 구하게 해 주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행복을 구하도록 가르쳐 주는 시련과 고난을 기뻐해야 한다.

Ⅳ. 12절의 말씀과 같이 괴로움과 시련을 견디는 사람들은 여기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시험과 축복을 받을 것이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12절). 다음을 주의해 보자.

1. 축복을 받는 자는 고난만을 받는 자가 아니라 그의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당면하는 모든 어려움 가운데도 인내와 견실함으로 견디어 내는 사람인 것이다.

2. 만약 환난이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축복은 환란으로부터 생겨지게 되며, 우리는 그 환란 속에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환란이 선한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그 행복을 증진시켜 주는 것이다.

3. 고통과 유혹은 영원한 축복을 향하는 것이다. 시험을 당했을 때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은, 그가 옳다고 인정함을 받은 때인 것이다(12절). 그리고 그의 덕이 진실한 것과(마치 금속이 불로 제련되어 순수하게 됨으로써 가치가 인정되듯이) 그 고귀한 가치가 인정될 때, 그리고 그의 온전함이 분명히 밝혀질 때 비로소 위대하신 심판자로부터 모든 것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시련 중에서 가져야 할 최대의 목표이고, 이 목표의 성취가 결국 그리스도인의 축복이며 따라서 이것으로 인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시련당한 그리스도인은 면류관을 쓴 사람이 될 것이며 그가 쓰게 될 그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이다. 그 면류관은 그에게 희열이 될 것이며,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우리는 잠시 동안 고통을 당하나 면류관은 영원히 쓰게 될 것이다.

4. 생명의 면류관 속에 포함된 이 축복은 의의 고난자들에게 약속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약속에 확고하게 의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천지가 다 지나갈 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에게 주어질 미래의 보상은 빛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운 약속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임을 주시하자.

5. 우리가 시험이 이기고 견디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원리로부터여야 하며 그렇지 아니하다면 우리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셨다"는 약속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종교심에서 자기의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 줄지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며, 그에게 주시는 대상이 못하는 것은 긍휼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신실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고전 13:3).

6. 생명의 면류관은 위대하고 남보다 뛰어난 성자들에게만 약속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이 하나님의 사랑의 지배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모든 영혼이 이 세상에서 받을 시련이란 사랑이 완전히 성취된 윗 세계에서 충분히 보상될 시련인 것이다.

 

1:3 없음.

 

1:4 없음.

 

1:5 없음.

 

1:6 없음.

 

1:7 없음.

 

1:8 없음.

 

1:9 없음.

 

1:10 없음.

 

1:11 없음.

 

1:12 없음.

 

1:13

죄의 진행과 결과(야고보서 1:13-18)

Ⅰ.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어느 누구의 죄도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인간에 대하여 박해하는 자들이 누구이든간에 또 그들에 대하여 저지른 불의와 죄가 무엇이든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에 아무런 책임도 없으시다. 그리고 또한 선한 인간이 시험과 환난으로 인하여 자극 받아 저지른 죄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 죄의 원인이 아니시다. 여기에 암시되어 있는 것은 어떤 신앙 고백자들은 시험의 때에 넘어지며, 그들의 받는 채찍으로 말미암아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나쁜 길로 인도되고 그 손으로 부정을 저지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발생하고 범죄자가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께로 돌리려고 할지라도, 그들이 저지른 비행에 대한 비난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이 받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1.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는 범죄자들로부터 비난 받으실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시험받아 악한 길에 들어서거나 악한 일을 행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기 때문이다"(13절). 모든 도덕적인 죄악은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인간 본성의 혼란에서 연유하며 또한 그의 의지가 지혜롭지 못하고 무력하고 단정하고 성결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누구 이 모든 것을 기본 본질로 삼고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그러한 성품이 부족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떠한 위급한 곤경의 사태도 하나님께 대하여 스스로 치욕을 받으시게 하거나 부인하시도록 시험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받으실 수 없는 것이다.

2. 인간에 죄에 대한 책망을 하나님의 섭리에 돌릴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없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기 때문이다"(13절) 하나님께서 스스로 악에게 시험 당하실 수 없는 분인 것과 마찬가지로 친히 다른 사람을 시험하는 분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품격과 모순되는 일을 조정하시는 분이 될 수 없다. 육욕적인 마음은 자기의 죄의 짐을 하나님께 지우려고 하며, 이러한 마음은 유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첫 조상인 아담은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나를 유혹했다고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가 비난을 하나님께로 돌려버리고 하나님을 시험하시는 분으로 규정해 버렸다. 아무도 이렇게 말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죄를 짓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면서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결 더 나쁜 일이다. 자기들의 죄를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구조적 결함이나 삶의 조건 때문이라고 불평하고, 또 자신들이 어쩔 수 없이 죄지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써, 그를 만들어 내시는 분이라고 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덕을 지니게 하기 위함이시며 결코 우리들을 타락시키기 위함이 아니시다.

Ⅱ. 우리는 악이 임하는 진정한 원인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과 그 악으로 인한 책망을 어디에 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나쁜 의미에서) 자기의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4절)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마귀는 유혹자라고 불리우며, 그 밖의 어떤 요소들이 때때로 우리들 시험하는데 함께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하여 용서받기 위하여 악마나 다른 사람 또는 그 밖의 어떤 요소를 책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죄와 유혹의 근원은 바로 우리를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비록 어떤 외적인 원인에 의하여 불꽃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더욱 타오르게 해 줄 자연적 물질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잠 9:12)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음의 것을 관찰해 보자.

1. 죄가 진행되어 나가는 방법을 보자. 먼저 죄가 다가들고 그 다음에 유혹한다. 거룩함이 두 가지면, 즉 악한 것을 떠나서 선한 것에 접착되는 과정을 지닌 것처럼, 그 반대되는 악도 다가들었다가는 유혹하는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선한 것에서 옮겨진 후에 악한 것에 접착되도록 유혹을 받는다. 그것은 먼저 생명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타락할 가능성과 육욕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되고 그 다음으로 점차 죄의 길에 고착되는 것이다.

2. 우리는 여기서 죄의 능력과 그 정책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욕심에 끌려"라는 단어는 "억지로 세게 잡아 끌다"의 뜻을 나타낸다. "미혹됨이니"라고 번역된 단어는 evxelko,menoj kai. deleazo,menoj ─ 즉 어떤 것이 유혹이나 속임수로 인하여 꾀임을 당하거나 기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음과 양심에 대하여 가해지는 타락의 힘이 폭력을 보게 되며, 우리로 하여금 죄에 흥미를 가지게 하기 위한 죄의 거대한 속임과 기만과 아첨을 본다. 죄의 권세와 능력은 그 교활함과 속임수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번성하지 못한다. 멸망하는 죄인들은 감언이설로 꾀이고 아첨당하여 스스로의 파멸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파멸 속에서 하나님을 영원히 정당화하는 것으로써 그들이 그들 자신을 파괴한 결과인 것이다. 그들의 죄는 그들 자신의 탓이며 따라서 그들의 피에 대한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게 되는 것이다.

3. 마음의 부패함이 이뤄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15절) 즉 죄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는 욕망을 흥분시키도록 허용하면 곧 이어서 그 욕망을 승낙하도록 무르익게 되며 이렇게 된 상태를 가리켜 "잉태한즉"이라고 표현하였다. 죄는 비록 태아와 같은 초기 단계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분명히 죄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충분히 크게 자라면 그 다음에는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최초의 생성을 중지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악에 대한 결과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이 되고 말 것이다.

4. 죄가 만들어내는 최종적 문제는 무엇이며 그 마지막은 어떠한가.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5절). 죄가 행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한 후에 그 마지막 결과는(맨톤 박사의 견해와 같이) 빈번한 범죄 행위와 습관으로 굳어버려서 더욱 더 그 힘이 강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죄악이 가득차게 되었을 때 죽음이 싹튼다. 이 죽음은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을 말한다. 그리고 영적이며 일시적인 죽음외에 죄의 값은 또한 영원한 죽음이다. 그러므로 죄가 종말에 이르기 전에 죄를 회개하고 버려야 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죽음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그가 너희 죄와 아무 상관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죄와 불행은 다만 네 자신으로 인한 것일 뿐이다. 너희 자신의 마음의 탐욕과 타락이 너희들의 유혹자들이다. 점차적으로 너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고 죄의 권세가 너희를 사로잡고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에 비로소 이 유혹자들이 너희의 파괴자로서 입증될 것이다.

Ⅲ.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당면하는 모든 죄와 불행의 원인이라는 사실에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근원이 되심을 배운다(16,17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개념이 오해되지 아니하도록 특별히 주의하여야 한다. mh. la/na/|sqe ─ 즉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도록 하라. 잘못된 견해에 빠지지 않도록 방황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으며 그의 영의 지시하심으로 인하여 얻은 진리의 모든 표준에서 떠나지 말라. 아마도 야고보가 여기서 특별히 경계하라고 하는 것은 시몬과 니콜라당(후에 이들로부터 노스틱이라고 불리우는 가장 육욕적이고 부패한 집단의 사람들이 생겨났음)의 막연하고 정함이 없는 주장을 가리키는 듯하다(이들에 대하여 더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단설에 대한 이테니우스의 책 1권을 보라). 타락한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사상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예수에게서처럼 진리는 그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악한 일을 만드시거나 옹호자가 아니며 그런 분이 되실 수도 없고 다만 선한 모든 것의 원인과 그 출처이신 분으로서 알려져야 한다. "각 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나니"(17절). 여기서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이시다. 태양과 그 밖의 다른 전체로부터 오는 모든 보이는 빛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다. 따라서 하나님은 태양의 창조자로서 증거 되었고, 또 어떤 점에서는 태양과 비교되었다. 태양은 그 속성과 위력이 변함없이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지구나 구름의 영향으로 인하여 해가 뜨기도 하고 자기도 하며 다른 형태로 보이거나 심지어 안 보이는 경우까지도 있어서 자주 변하는 것같아 보이지만 실상 그러한 변화는 태양 자체의 변화는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불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나 그림자 같은 것은 하나님의 본체 내에 있는 어떤 변하기 쉬운 것이나 그림자 같은 변화로 인하여 된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 자신들의 속성에서부터 연유되는 것이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7절). 태양은 자연계에 속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은혜와 섭리와 영광 가운데 존재하시는 분이다. 더욱이 모든 것에 무한하신 분이다. 왜냐하면

2. 모든 선한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로서 이성의 빛을 주신다. "사람의 속에서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욥 32:8). 하나님께서는 또한 배움의 빛을 주신다. 솔로몬의 자연에 대한 지식과 정사를 다루는 기술과 그가 날로 진보해 나갈 수 있었던 모든 일들에 잠재되어 있었던 그의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다. 신의 계시의 빛은 더욱 직접적으로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믿음과 성결의 빛, 그리고 모든 종류의 위로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이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모든 악과 죄는 우리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창조물에게 힘을 주시고 완전케 하신 분으로서, 그리고 이들 힘과 완전함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또 이것들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모든 이익을 주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영접해야 한다. 반면에 창조물에게 있는 모든 어두움이나 불완전한 그리고 잘못된 행동들은 하나도 빛의 아버지께 그 책임을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와 미래에 올 시대의 생활에 적합한 모든 선하고 완전한 선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3. 모든 좋은 선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과 같이 특별히 우리의 본성의 혁신과 재생, 그리고 이같이 변화가 가져다 주는 거룩하고 행복한 모든 결과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8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주의하여 보자.

(1) 참된 그리스도인은 새로워진 피조물이다. 그가 재형성되고 새로워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영향을 받기 이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2) 이같이 선한 사업의 근원이 무엇인지 여기에 선포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뜻으로써 우리의 재주나 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며, 또한 우리 자신 앞에 있는 어떤 훌륭한 예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은혜로부터만 오는 것이다.

(3) 이러한 선한 사업이 이루어지는 방법에 대한 것이 지적되어 있는데, 그것은 진리의 말씀, 즉 복음으로써 사도 바울이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이 복이야말로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며 그 밖의 그 무엇도 이처럼 참되고 영속하여 위대하고 고귀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의지하고 이 복음을 기반으로 한 우리의 불멸의 영혼을 탐구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 복음은 진리이므로 우리가 성결케 되는 수단이 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요 17:17).

(4)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롭게 하는 은혜의 목적과 의도가 여기에 나타나 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18절) 즉 우리는 하나님의 몫이 되고 보배가 되어야 하며 더욱이 열매처럼 그의 특별한 재산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첫 번 열매가 하나님께 성별 되어졌던 것처럼 주님께 성별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첫 열매이시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피조물들의 첫 열매이다.

 

1:14 없음.

 

1:15 없음.

 

1:16 없음.

 

1:17 없음.

 

1:18 없음.

 

1:19

부패한 성향의 억제(야고보서 1:19-27)

1장의 이 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요구되고 있다.

Ⅰ. 인간적 열정의 발로를 견제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은 환난 가운데서 되어져야 하며, 만일 우리가 참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이러한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관계가 이루어진다. 즉 노하며 경솔한 영혼은 환난을 만나게 될 때 쉽게 자극되어 좋지 않은 일을 행하며, 우리들 자신이 악하고 공허한 성격으로 인하여 실수와 악한 생각들이 만연하게 된다. 그러나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것들을 억제하도록 가르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를 더디하여 성내기도 더디하라"(19절). 이 말씀은 다음의 것들을 설명하여 주는 것 같다.

1. 앞 절에서 말한 진리의 말씀에 관한 말씀인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환난이나 인간의 생각을 따라서 말하며 이런 생각으로 열을 올리거나 흥분되고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들의 죄의 기회가 되신다는 조급하고 다소 분노 섞인 우리의 주장은(또다른 잘못을 가져 올 수 있는) 잘못된 견해로 규정되어야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지도해 주시는 말씀임을 인정하고 경청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2. 이 장의 처음 시작 부분에서 말했던 환난과 시험에 대한 말씀인 것 같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다윗이 조급해서 "내가 주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나이다"라고 한 것이나, 요나가 화를 내면서 "내가 화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할 것이 아니고,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들을 어떻게 설명하시며, 그 섭리를 통하여 무엇을 계획하시는가를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비난하는 대신에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다.

3.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을 당했을 때 서로간에 있었던 언쟁과 불화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이 부분은 앞부분에서 언급한 내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볼수도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불화의 사건이 일어났을때에는 언제나 쌍방이 상대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반대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이 주장만을 고집하게 된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양측 주장의 이유와 진실성을 듣기에 신속해야 하고, 반면에 이러한 태도에 방해되는 어떤 것도 말하기에는 더디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말할 때에는 분노가 섞여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유순한 대답이 분노를 쉬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서신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었던 여러 가지 형태의 무질서를 교정할 목적으로 기록된 것임을 고려할 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는 말씀은 세 번째 설명에서 가장 잘 해석된 것 같다. 또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은 혀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열정을 먼저 제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의 영혼이 격노하였을 때 그는 그의 입술로 경솔하게 말하였다. 만일 우리가 더디 말하고자 한다면 더디 노하여야 한다.

Ⅱ. 분노를 억제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주어진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20절). 이 말씀은 야고보 사도가 마치 "인간이 흥분과 열정 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열망하는 척할 때에, 하나님은 어느 인간의 인간적 열정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게 해 주시며, 그의 뜻은 분노와 격정으로 보다 부드러움과 온유함으로 섬김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종용이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전 9:17)고 했다. 만튼(Manton) 박사는 어떤 모임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우리가 말하려 하는 만큼 빠르게 듣는다면 분노가 한결 감소되고 우리의 모임에는 한층 더 많은 유익을 주게 될 것이다. 나는 한 만니교도가 어거스틴과 논쟁할 때에 귀찮을 정도의 시끄러운 소리로 내 말을 들으시오! 내 말을 들으시오! 라고 외치자, 교부 어기스틴이 겸허한 말로 Nec ego te, nec tu me, sed ambo audiamus apostolum ─ 즉 나로 하여금 당신의 말을 듣게 하거나 당신이 내 말을 듣게 할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함께 사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라고 대답한 것을 기억한다. 우리가 종교적 토론을 할 때에 동반하게 되는 가장 해로운 것은 분노이다. 분노는 비록 옳고 바른 것에 대한 관심에서 발로된다 할지라도 신용되지 아니한다. 분노는 인간적인 것이며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항한다. 그러므로 인간적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크신 뜻을 섬기는 체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들이 하나님도 알지 못하며 그의 뜻도 알지 못할 것이 여기서 드러난다. 이러한 열정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특별히 경계되어야 한다(벧전 2:1, 2 참조).

Ⅲ. 우리는 격노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부패한 성향을 억제하도록 요청한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21절) 여기서 "더러운 것"이라고 번역된 말은 가장 큰 타락과 호색을 지닌 번뇌를 의미한다. "넘치는 악"이라고 표현된 말은 사악함이 차서 넘치는 상태 또는 그 밖의 정신적인 악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배우게 되는 것은, 단지 사람을 더럽히는 야비하고 육체적인 기질과 성향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과 도에 대하여 반감을 갖게 하는 부패한 마음의 모든 무질서까지도 경계하고 내어버리라는 것이다. 다음을 유의해 보라.

1. 죄의 더럽히는 것으로써 그 자체가 더러운 것으로 불리운다.

2.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경계되어야 할 죄악이 너무나도 많다. 그것이 바로 넘치는 악이다.

3. 악한 성향들은 억제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우리들로부터 내던져지고 버려져야 하는 것이다.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사 30:22).

4. 이것은 우리의 외면적인 죄나 좀더 큰 혐오뿐만 아니라 말과 행실과 더불어 사상과 성향의 모든 죄를 다 포함한다. 따라서 pa/san r`upari,an ─ 즉 모든 더러운 것이란 부패하고 죄적 경향이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5. 1장의 앞부분에서부터 모든 더러운 것을 버린다는 것은 시험과 환난을 당할 때에 요구되는 것이며, 또한 실수를 피하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받아들이며 그 말씀을 활용하여 나가는데 필요한 것임을 유의해 두어야 한다.

Ⅳ. 여기서 우리는 간략하나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관하여 충분한 가르침을 받는다.

1. 우리는 2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준비하도록 요청된다. 즉 모든 부패한 성향과 모든 반감과 선입견은 피하고 판단을 그르치며 마음의 눈을 멀게 하는 죄들을 내어버리라는 것이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어떤 의미에서 설명되기 이전에 이미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정복되고 내팽개쳐져야만 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에 대하여 배우게 된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마음에 새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21절)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그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동의하는 것이 바로 그 말씀의 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씀을 줄기로 받아들임으로 그것에 집붙임을 당하게 되고, 따라서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열매는 신나무 본래의 열매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접붙여진 복음의 말씀의 본질을 지닌 열매인 것이다.

(2)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순종하며, 겸손하고, 다루기 쉬운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이것이 "온유함으로 받는"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지적을 끈기 있게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해야 하고 또한 복음의 교리와 가르침에 의하여 인격이 도야되고 형성되기를 바라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린 영혼의 구원을 목적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관심 갖도록 우리를 지혜롭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도 평범하거나 낮은 목표를 지니는 자들은 복음을 불명예롭게 하며 자신의 영혼을 실망시키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아와야 하며(그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하며)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롬 1:16)을 알아야 한다.

3. 우리는 말씀을 들은 후에 무슨 일이 되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배운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 여기서 다음의 것을 살펴 보자.

(1) 듣는 것은 행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아무리 주의 깊게 그리고 아주 빈번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한 주일 내내 설교를 들으며, 또 그 설교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저 듣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그 말씀은 우리를 하늘나라에까지 이끌어 가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들을 바를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의심할 여지없이 필요 불가결한 요소로써). 박스터는 말하기를 명상을 통한 내면적 실천이 있어야 하고 또 참된 순종을 통한 외적인 실천이 있어야만 한다고 했다. 우리가 들은 것을 기억하거나 되풀이 말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증거하고, 추천하고 들은 바를 써서 또 그것을 보존하는 등의 것들로써는 충분치 않다. 이 모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들은 말씀에 실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이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2) 듣기만 하는 자들은 자기를 기만하는 자들이다. 원어의 paralogizo,menoi ─ 즉 인간들이 자기 자신들에 대하여 궤변적으로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네 마음속에 선한 기질이나 결심도 없고 또 그들의 삶에는 선행의 열매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서로 짊어져야 할 의무를 벗어버리고, 단지 머리 속에 개념적인 것들이 채워져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논리정연한 주장은 기만적이고 잘못된 것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자기 기만은 결국 가장 나쁜 속임수로 드러날 것이다.

4.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절히 이용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할 말씀으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 말씀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23-25절). 이들 각각의 경우를 명확하게 고찰해 보자.

(1) 우리가 심중에 새기고 깊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용하는 방법은 사람이 자신의 본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에 비교됨으로써 가르쳐진다. 거울이 우리 얼굴의 오점이나 더러움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교정하거나 씻어 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비쳐 주셔서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게 하며, 우리의 실수를 보여 주고 고칠 수 있게 한다. 세상에는 사람을 우쭐하게 돋보여 주는 거울들이 있으나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실물 이상으로 돋보이게 하는 거울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아첨한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의 잘못이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는 어떤 사람에게도 아첨하지 않는다. 진리의 말씀에 주의 깊게 유의하라. 그리하면 그 말씀이 당신의 부패한 본성과 마음과 생활의 무질서 앞에 세워지고, 그리고 당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그대로 말하여 줄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율법의 거울을 통하여 자신을 바라볼 때는 자신의 본성의 부패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고 기술한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롬 7:9) 즉 나는 나의 모든 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하였고 또한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나 자신이 청결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계명이 이르매 즉 율법의 거울이 나의 앞에 놓여지니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그 결과 나는 나의 오점과 추악함을 보았고 이전에 내 속에 있었으나 깨닫지 못했던 나 자신의 결점들을 발견하였다. 이후에 내가 죽음과 심판의 자리에 서있는 나 자신을 깨닫게 된 것은 율법과 죄의 권능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과 형편과 처지를 보며 잘못된 점을 고치고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하고 새 것으로 단장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유의하는 것이 그의 말씀을 바로 이용하는 것이 된다.

(2) 우리는 여기서 또한 하나님 말씀의 거울을 마땅히 이용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 버리거니와"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바른 설명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음으로 자기 자신의 죄와 불행과 위험과 죄의 악을 앎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필요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들은 후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회개할 줄 모르며 선한 성품도 사라지고 땅을 휩쓰는 홍수의 물결처럼 지나가 버린다. 이것이 그는 "곧 잊어버리고"의 의미이다. 맨톤 박사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죄를 벗어나세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치장하고 장식할 것인가를 발견케 해 준다. 우리의 죄는 율법이 찾아내는 오점이고, 그리스도의 피는 복음이 보여 주는 정결케 하는 대야이다. 만약 우리가 죄의 오점을 씻어 버리는 대신 그냥 지나쳐 버리고 오점을 잊어버리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복음에 자신을 적용시키는 대신에 그 구제책을 잊어버리고 만다면, 우리는 아무 쓸데없이 공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며 복음의 거울을 그저 들여다보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듣고 행해야 할 말씀으로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듣고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마땅히 사용해야 할 거울로 사용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여기세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축복 받는 자들이라고 불려졌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25절). 여기서 다음을 살펴 보자.

[1] 복음은 자유케 하는 율법이며 박스터의 표현을 빌린다면 자유의 법으로써 우리를 유대교의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고, 죄와 죄책감, 그리고 진노와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하여 준다. 의식을 위한 율법은 구속하는 멍에였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케 하는 율법이다.

[2] 그것은 완전한 법으로써 아무것도 더 첨가시킬 것이 없다.

[3] 그 말씀을 듣는 중에 우리는 이 완전한 법을 보게 되고 우리는 의논의 상대로 삼고 지시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삶의 표준을 찾게 된다.

[4] 우리가 계속하여 들여다보고 있는 때에만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으로써 자유케 하는 율법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박스터는 "그 자유케 하는 율법이 우리의 영적 생활로 바뀌기까지 그 말씀을 배우는데 거하면 우리는 그 말씀의 나무에 접붙임을 당하고 동화되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잊어버리지 않고, 또 그 선행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상의 일로 삼으며 그 말씀을 항상 눈앞에 두고, 우리의 대화와 행동에 있어서의 원칙으로 삼고 우리 마음의 성질이 그 말씀으로 인하여 규정되고 새로 형성되도록 함으로써 되어진다.

[5] 이와 같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계속하여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이다."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시편 1편을 암시하는 듯하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고 실행하고 자가 복을 받으리라고 한다. 교권주의자들은 이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축복을 받았다는 명백한 근거를 여기서 발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톤 박사는 이같은 주장에 대하여 답변하여 말하기를, 이 성경 구절의 분명한 의미에 대하여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야고보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행한 행위 때문에 축복 받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행위 속에서 축복 받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축복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의 문제이지 그 원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축복은 하나님의 뜻을 앎에서가 아니고 그 뜻을 행함에서 오는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7).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걷는 행위이다.

Ⅴ. 다음으로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헛된 경건과 순수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경건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어떤 경건이 거짓되고 헛된 경건이며, 또 어떤 경건이 참되고 순수한 경건인가에 대한 문제는 이제까지 큰 관점 속에 뜨겁게 논란되어 온 문제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성서에서 찾게 되기를 바라며, 그 분명하고 결정적인 답변이 여기에 선포되어 있다.

1. 헛된 경건이란 무엇인가?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다"(26절).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의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1) 헛된 경건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종교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들과 매력적인 것들이 많이 있다. 내 생각에 이 구절(26절)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하는 것은 "생각하며"라는 말에 우리의 생각을 집중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 더 신앙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은 그들의 신앙심이 공허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증거이다. 신앙 그 자체는 헛된 것이 아니다(주님 섬기는 일은 헛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큰 물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경건의 모양만은 본따면서 진실로 경건의 능력은 가지지 않았을 때에 거기에는 신앙을 헛되이 만들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2) 헛된 경건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욕하고 깎아 내리는 일들을 자주 한다. 여기서 재갈먹이지 않은 혀라는 것은 혀가 저지르는 이러한 악을 삼가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잘못을 말하며, 부끄러운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비난하고 그들의 지혜와 경건함을 깎아 내려서 자기를 좀 더 현명하고 선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채비를 차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 우리는 그들이 헛된 경건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남을 깍아내리는 혀를 가진 사람은 참으로 겸손하고 덕스러운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자기 이웃을 해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한다 할지라도 남을 비난하는 그의 혀가 그를 위선자라고 입증해 보이게 될 것이다. 남을 비난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부합되는 유쾌한 죄이며 그러므로 비난은 그 사람이 아직도 성장하지 못한 인간의 본성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혀가 저지르는 이 모든 죄들은 야고보 사도가 이 서신을 쓰던 시대에 가장 큰 죄악들이었다(이 서신의 다른 부분에서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또한 이것은(맨톤 박사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 시대의 악들과 함께 사라져 버려야 할 거짓 경건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표징이다. 비난은 위선자들에게 주도적 역할을 한 죄로써 자신들을 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야심이 크면 클수록 남을 비난하고 넘어뜨리는 일을 더욱 예사로 해댔다. 혀와 마음 사이에는 긴밀한 상호 관계가 있기 때문에, 입으로 저지르는 죄는 그 자신의 사람됨됨을 듣는 이에게 재빨리 폭로시키는 결과가 된다. 이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재갈먹이지 않은 혀가 의심할 바 없이 헛된 경건의 분명한 증거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인간의 혀에 재갈을 물릴 수 없는 경건은 아무런 강함도 능력도 지니고 있지 않다.

(3) 헛된 경건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마음까지고 기만하게 한다. 그런 사람은 타인을 깎아 내리는 짓을 계속하고 자신을 본질과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하며 마침내는 자기자신의 영혼을 기만함으로 자기의 경건의 헛됨을 극치에 이르게 한다. 자기의 믿음이 헛된 것임이 드러날 때 그 공허함이 얼마나 큰 것일까?

2. 어디에 참된 경건이 존재케 되는가에 대하여 여기서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언되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이것이니라"(27절). 다음을 유의하라.

(1) 경건함이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은 순결하고 깨끗하며 인간적 생각이나 세상의 부패에 물들지 않았을 때이다. 거짓 경건은 그 불결함과 냉혹함에 의하여 알 수 있는데 이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말하기를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라고 하였다. 반면에 거룩한 생활과 자비로운 마음은 참된 경건의 모습을 드러낸다. (맨톤 박사는 말하기를) 우리 기독교는 의식으로 장식하지 않고 정결함과 사랑으로 장식한다고 했다. 순수한 경건은 불결한 것을 멀리해야 한다는 야고보 견해는 옳은 것이라고 본다.

(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러움 없는 경건이야말로 진실로 순수하고 정결한 경건이다. 이 경건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경건이듯이 진실로 올바른 경건이고 이는 또 하나님의 인정받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한다. 참된 경건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듯이 모든 일을 행하도록 가르치며 우리의 모든 행위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도록 노력할 것을 가르친다.

(3) 참 경건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필연적인 부분은 가난한 자와 슬픔 당한 자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으로써, 그것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다"(27절). 여기서 돌아본다함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모든 방법의 위안을 말한다. 또 고아와 과부들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그들이 대개의 경우에 소홀히 취급당하고 압닥받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할 대상이 누구이며,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바로 깨닫게 된다. 만약 하나가 이것으로써 고난당한 사람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일이다.

(4) 순결한 생활은 거짓 없는 사랑과 자비를 동반해야 한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27절). 세상은 영혼을 더럽히고 해하기 쉽고 또 그 안에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야 하되 세상에 물들어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계속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때에 정결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경건이 조성된다. 만일 우리가 세상적인 것들과 깊은 관계를 가지면 그것들은 우리들의 영혼을 몹시 더럽힐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 세상의 죄와 탐욕은 우리들의 영혼을 참으로 애처로울 정도로 훼손시키고 더럽힌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해서는 안 되는 모든 세상적인 것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는데, 그것은 육신의 욕망과 눈의 탐욕과 생활의 자만이며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길은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써 세상에 대한 사랑과 세상적인 악한 인간들의 유혹으로부터 우리의 마음과 생명을 지켜 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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