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디모데후서 0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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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마지막 날의 표적들(디모데 후서 3:1-9)

전 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안에 악한 사람이 있다 하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였다. 왜냐하면 복음의 그물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한꺼번에 걸려들기 때문이다(마 13:47, 4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혹자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24장). 따라서 우리는 유혹자의 활동을 보고 설득당하거나 교회나 기독교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여서도 안 될 것이다. 옥에도 티가 있으며 밀이 타장 마당에 놓여 있을 때 밀 가운데는 많은 겨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Ⅰ. 디모데는 복음의 시대인 마지막날에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하였다. 복음의 시대는 여러 가지 면에서 개혁의 시대이지만 이러한 복음의 시대일지라도 고통의 때가 있을 것을 디모데는 알아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통은 밖에서부터의 박해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 내에서의 부패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는 어려운 시기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시대에서는 사람들이 선한 양심을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통의 때가 이를 것인데 왜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세하여 기독교를 박멸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는 고통의 때가 이를 것인데 왜냐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없는 자들이 더렵혀지고 악해져서 교회에 대단히 많은 해를 끼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이천명의 포위하고 있는 군대보다 아군의 두명의 배반자가 더 많은 해를 끼치는 것이다. 고통의 시대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악하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을 기억하자.

1. 죄는 고통의 때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도덕과 기질이 일반적으로 타락할 때 시대는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된다. 왜냐하면 모두가 타락한 가운데서 우리의 순결함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2. 고통하는 때가 올 때 우리는 성경의 예언이 진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예언된 대로 고난의 때가 닥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격의 신적 권위에 대하여 의심하게 되는 시험에 들게 될 것이다.

3. 우리가 고통하는 때가 이른 것을 볼 때 놀라지 아니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세에 대해 예언한 내용을 알고 또 믿으며 숙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네가 이것을 알라"고 하였다.

Ⅱ.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슨 이유 때문에 고통의 때가 닥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말세를 알 수 있는 징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였다(2절이하).

1. 자기를 사랑함이 고통의 때의 요인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자기 사랑은 비정상적인 자기애(自己愛)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영적 자아 보다는 죄된 육체적 자아를 더 사랑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보다는 자기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그 욕망을 위하여 준비하기를 더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기독교적인 사랑 대신에 그들은 자기에 대해서만 관심을 지니며 또 교회의 덕에 앞에 자신의 만족을 추구한다.

2. 탐욕이 고통의 때의 요인이다. 자기 사랑은 죄와 재앙이라는 기다란 기차를 끌고 간다는 것을 명심하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는 많은 선행을 기대할 수 있으나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 그에게서는 아무런 선행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탐욕이 일반적으로 널리 유행되므로 모든 사람이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을 위하여 또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게 될 때 인간관계는 험악하여질 것이고 사람은 이웃끼리도 경계하게 될 것이다.

3. 자긍과 교만이 또 하나의 요인이 된다. 고통하는 때가 되면 사람들은 교만에 빠져 자랑하는 자가 되고 훼방하는 자들이 된다. 자랑하는 자라 함은 사람들을 경멸과 조소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자들이요, 훼방하는 자들이라 함은 하나님과 주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들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인간도 무시하게 되고 정반대로 변해 버린다.

4.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의무와 감사로 부모에게 대하여야 되고 그리고 자주 부모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의지해야 하는 데도 자녀들이 자기들의 이 의무를 저버리게 될 때 이것들이 고통하는 때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들의 부모를 거스리고 배반하는 자들에게는 재앙이 닥치는 법이다.

5. 감사하지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는 것들이 고통의 때의 요인이 된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따라 다닌다. 인간이 거룩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면 또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감사하지도 않게 된다. 그것은 배은망덕과 불경건은 함께 따라 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은망덕은 가장 나쁜 죄 가운데 하나이다. 감사치 아니함, 불순함, 육적 욕망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 육신을 위하여 좋은 것들을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배은망덕의 증거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들을 우리 정욕의 음식과 연료로 삼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들을 남용하는 것이 된다.

6. 자연법 또는 보편적 선을 사람들이 무시할 때 그때는 고통의 때이다. 그때도 사람들이 무정하여 원통함을 풀지 아니한다. 사람의 성품에는 누구에게나 따스한 온정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자기와 똑같은 본성을 향한 인간애가 있게 되며 특히 친족들 사이의 정은 각별한 법이다. 그러나 고통의 때에는 자녀들은 부모에게 불순종하며(2절), 부모들은 자녀에게 대해 무정해진다(3절). 본성의 타락의 죄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라. 본성이 타락될 때 그들은 본래 타고 난 인간끼리 느끼는 따듯한 마음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이 땅에서 인류가 번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깨지게 된다. 그리고 본능적인 애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또한 신앙적인 계약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으려 할 것은 뻔한 일인 것이다. 그들은 "무자비 하게 된다." 즉 그들은 혈연에 대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게 되는 것이다.

7. 인간들이 서로 참소할 때 그것은 고통의 때이다. 참소한다는 것은 희랍어 성경에는 "dia,boloi"라 하였다. 이 말은 사람이 서로에게 악마가 된다는 뜻인 것이다. 즉 사람들이 상대를 존경하지 않으며 또는 서원한 신앙의 의무를 무시해 버리고 자기들은 자유로와 마음대로 말하고 행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시 12:4).

8. 인간이 자기와 자기의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할 때 고통의 시대가 올 것이다. 스스로의 욕구를 자제하지 못하는 것은 "절제할 줄 모르기 때문이며 자기의 정열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은 "사나웁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할 때 무너지는 도시와 같은 것이다. 또한 성벽이 없는 도성과 같아 약한 병력의 침입 앞에서도 곧 불타고 말 것이다.

9. 선하고 존경받아야 할 것이 일반적으로 멸시를 받으며 경멸당할 때가 고통의 때이다. 박해자들은 선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10. 인간들이 배반하고, 고집하며, 자고할 때가 고통의 때인 것이다(4절). 즉 사람들이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할 때"가 그러한 때인 것이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형제가 형제를 배반하여 죽음에 내어 주며 아버지가 자식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10:21). 그런 자들이야말로 가장 최악의 배반자들인 것이다. 또한 성경을 박해자들에게 내어 주는 자도 배반자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위임된 신임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성미 급하고 과장하여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대할 때 또한 이런 경향이 일반적으로 풍미할 때 고통의 시대가 올 것이다.

11. 인간들이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때"가 고통의 때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보다도 쾌락주의자들이 더 많아질 때 바로 그때가 악한 때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 보다 사물을 더 좋아할 때 그 마음이 육욕적인 마음이며 그 마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가득찬 마음인 것이다.

12. 이러한 모든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다"(5절).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불리우고 기독교를 믿는 것으로 간주되어 세례를 받고 신앙 고백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경건의 모양이 그럴 듯할지라도 사실은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경건의 모양에는 경건의 능력이 따라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있게 하신 둘 중에서 경건의 능력은 잘라 떼어버린다. 그들이 경건의 모양으로 가장 하는 것은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제거해 주는 경건의 능력에는 순종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것을 볼 수 있다.

(1) 사람들이 신앙 고백을 했을지라도 대단히 나쁘고 사악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경건의 모양은 지닌다.

(2) 경건의 형태는 경건의 능력과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경건의 형태는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능력이 전혀 결핍되어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능력을 부인한다. 특히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경건의 능력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3) 이러한 악으로부터 선한 그리스도인은 돌아서야만 할 것이다.

Ⅲ.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유혹자들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디모데 자신이 그들에 의해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될 것을 물론이어니와 그가 책임맡고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무장해 주라고 명하였다.

1. 바울은 그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활동하는 가를 설명하여 주었다(6절). 그들은 변절시키기 위해 특별히 정한 사람의 집을 비공개적으로 방문한다. 왜냐하면 악을 행하는 자들은 빛을 미워하기 때문이다(요 3:20). 그들은 박해자들이 그리스도인의 가택을 수색할때하는 식으로 강제로 집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사람들의 집에 살금살금 들어가서 그 사람들의 환심을 먼저 얻은 다음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을 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이 그들에게 넘어가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들은 약한 자들로서 곧 "어리석은 여인들"이며 또한 악한 자들로서 곧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는"자들인 것이다. 어리석은 머리와 더러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중에도 특히 여자들이 쉽게 유혹자들의 먹이가 된다.

2. 바울은 그런 자들이 "항상 배우지만"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7절).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항상 배워야 하며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회의론 자들로서 경솔하고 불안정하여 무슨 새로운 사실을 대하게 되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다는 구실 아래 쉽게 그 교훈에 젖어버린다. 결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지식에는 이르지 못한다.

3. 바울은 그들의 진전을 막는 어떤 방해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이런 방해자들을 모세를 대적한 애굽의 마술사들 즉 본문에 그 이름이 기록된 얀네와 얌브레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비록 구약 성경에서 이들의 이름을 볼 수 없지만 고대 유대인의 저술물들 가운데 그들의 이름이 명기되었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끌고 애굽에서 인도해 내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왔을 때 그 마술사들이 모세에게 대적하였던 것이다. 이 방해자들은 "진리를 대적하고" 또한 애굽이 마술사들처럼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었고 진리를 곡해하며 편견과 삐뚤어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고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며 진실한 그리스도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그 어리석음이 드러나서 결국은 그 방해하려는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는 못할 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다음을 유의하자.

(1) 유혹자들은 비밀 장소를 찾고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중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며 몰래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간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가장 약한 자들, 즉 어리석고 부도덕한 여인들을 공격한다.

(2) 유혹자들은 전(全) 세기를 통하여 모두 비슷하다. 그들의 특징은 언제나 똑같다. 즉 모세를 대적하였던 얀네와 얌브레같이 진리에 대적하는 행위를 한다. 또한 그들의 기도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는 데도 그들의 운명은 일치하는 것이다.

(3) 진리에 대적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진정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magna est reritas, et proeualebit 즉 위대한 진리가 마침내는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4) 비록 하나님께서 범죄한 영혼을 당분간은 활동하도록 내버려두실 것이지만 곧 그들은 사슬에 묶어 놓으실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이상으로 국가나 교회를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어리석음은 온 천하에 드러나서 결국 성공을 거두지는 못할 것이다." 즉 그들이 사기군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요 또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3:2 없음.

 

3:3 없음.

 

3:4 없음.

 

3:5 없음.

 

3:6 없음.

 

3:7 없음.

 

3:8 없음.

 

3:9 없음.

 

3:10

고난의 때의 표적들(디모데 후서 3:10-17)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가 걸어야 할 길을 확실히 설명하여 주고 있다.

Ⅰ.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본받을 것을 제시하였다. 디모데는 바울을 오랫동안 수종하면서 바울의 생활을 직접 목격하였었다(10절). 먼저 바울은 디모에게 "너는 나의 교훈을 본받으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교훈을 더욱 충분히 알고 확실히 알게 되면 우리는 그 교훈에 굳게 붙어 있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진리에 소홀하게 되는 까닭은 그들이 그 교훈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적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진리를 모르거나 충분히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그들을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였던 것이다. 디모데가 바울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1. 바울이 설교했던 교훈을 알고 있다. 바울은 자기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숨겨두지 않고 전하였다(행 20:27). 그러므로 그들이 잘못하지만 않는다면 그 진리를 충분히 알 수밖에 없었다. 디모데는 그러한 선생님의 밑에서 훈련을 받는 유익과 또 그러한 선생이 전수하는 교훈을 알게 되는 큰 유익을 가지고 있었다.

2. 디모데는 바울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네가 나의 교훈과 행실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그의 생활은 그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 양자 사이에는 어떤 대립도 없었다. 그는 자기가 전한 복음을 그의 생활에 의하여 무너뜨리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르치는 교훈과 행실이 일치하는 사역자들만이 선을 행하며 또 그들의 수고의 영구한 열매를 남길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설교는 잘하나 생활은 제멋대로인 목회자는 사람들에게 전혀 유익을 줄 수 없는 것이다.

3. 디모데는 바울이 가르치고 실행함에서 그의 의도한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네가 나의 의향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내가 가르친 것이 세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과 속된 생각과는 거리가 얼마나 멀고 또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들의 영혼을 좋게 하는 데에는 얼마나 가까운지를 너는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4. 디모데는 바울의 선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선한 성품을 바울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을 통하여 엿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기의 믿음의 증거(즉 이 믿음의 증거란 그의 성실함과 고결성의 증거라는 뜻도 되며 또는 바울이 근거하여 생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앞으로 올 세상의 증거라는 뜻도 된다)들과 그가 가르치고 다스렸던 교회를 위한 오랜 참음과 모든 사람에게 대한 그의 사랑과 인내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은사에 있어서 바울은 탁월하였고 디모데는 또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5. 디모데는 바울이 선을 위하여 고난받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11절).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을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라고 기록하였다(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고난들은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 있을 때 당한 고난들만인 것이다). "따라서 네가 만일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놀라지 말라. 그것은 내가 이미 겪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바울은 말한다.

6. 디모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울을 돌보아 주셨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음"을 네가 알고 있다고 하였다(11절). 바울이 주님을 위해 결코 실망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결코 바울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고 바울은 말한다. "당신은 나의 모든 고난을 아시나이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었다. 우리가 선한 사람들이 어려움 당하는 것만을 볼 때에 그들이 당하는 그 어려움들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유혹으로써 작용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어려움만을 알게 될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즉 "그 진리를 소유하는데 그렇게 큰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면 포기해 버리겠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난을 충분히 알게 되면 즉 선한 사람들이 고난받는다는 것 뿐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고난 가운데서 어떻게 도움을 받고 어떻게 위로를 받았는가를 알게 된다면 용기를 잃는 대신 오히려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모든 고난을 헤아리기 전에 다음의 말씀 즉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알게 될 때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12절).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언제나 똑같은 형태의 핍박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초대 기독교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다른 시대를 보다도 더욱 박해를 심하게 받았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는 것이다. 그들은 비난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또는 기독교는 그들의 박해 받음을 통하여 더욱더 확고히 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 특히 기독교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 곧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의 심정을 지니고 또 그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자들은 박해받을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자기들의 행실 가운데서 믿음을 보여 주고자 하는 자들 즉 경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박해받을 것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사도 바울의 생활은 세 가지 면에 있어서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하였던 바울의 "교훈"과 또한 교훈과 일치한 그이 "생활"과 또한 바울이 당한 "핍박과 고난"에 있어서 그는 좋은 본이 되었다.

(2) 그의 삶에 대단히 유익한 삶이었을지라도 그의 생은 심한 고난의 생애이었다. 이 세상에서 탁월한 봉사를 하고 심한 고난을 받는 일에 있어서 위대하신 우리 주님에게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은 바울 외에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바울은 거의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또는 성령께서는 사실과 핍박이 그에게 있을 것을 증거하였다(행 20:23). 본문에서 바울은 그가 다른 곳에서 당한 고난들을 제외하고 오직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고난만을 언급하고 있다.

(3) 디모데와 우리가 고난당할 때 용기를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주께서 그 모든 것에서 자신을 구해 주셨음을 말하고 있다.

(4)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고 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실천이다. 또한 그들은 핍박을 받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들이 세상에서 받으리라고 각오해야 할 대우인 것이다.

Ⅱ.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이는 자들의 마지막 운명을 경고하였다. 그는 디모데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 더욱 더 가까워지게 하기 위하여서 위와 같은 경고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13절0라고 말씀되고 있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선하여지고 악한 사람은 사탄의 음흉함과 자기 자신의 부패의 힘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악하여지는 것임을 명심하자. 죄의 길은 내리막 길이다. 왜냐하면 죄의 길은 악한 데서 더욱 악한 곳으로 나아가며 서로 "속이고 또 속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람은 곧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오류에 빠지게 하는 자는 스스로 더욱더 잘못된 길로 달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에 자기의 행한 바의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Ⅲ. 바울은 다모데에게 그가 받은 좋은 교훈. 특히 그가 성경으로부터 배운 것을 잘 지키라고 명하였다(14,15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였다. 선한 것을 배웠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배우기를 계속해야 하며 그 선을 끝까지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제자가 되는 것이다(요 8:31).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말아야 하리니 이는 사람의 궤술과 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되려 함이라(엡 4:14)고 하였고 또한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다(히 8:9)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배우는 배움을 계속 지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리고 젊었던 시절에 잘못 배운 과오를 계속 행해서는 안 된다(왜냐하면 우리는 확실한 지식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것들을 버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성경에서 배운 것들을 보존하는데 장애물이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디모데가 진리를 배운 그대로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성경이 유혹자들의 함정과 유혹을 피하게 해 주는 무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여야만 했다는 것"을 명심하자.

1. 우리가 배운 것들의 확실함을 안다는 것은 대단히 축복된 일이다(눅 1:4). 즉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임을 안다는 것은 축복된 일인 것이다. 우리는 배운 것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즉 진리에 굳건히 서 있기 위하여 온갖 오류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확실한 믿음은 대단히 중대하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본문에 "알며"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 너는 좋은 선생들에게 배웠다는 것을 "알라." 네가 "진리를 누구에게 배웠는지를"생각해 보라. 너는 악한 사람이나 속이는 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들에게서 배웠는데 그들은 그들이 네게 가르친 진리의 능력을 직접 경험하였고 또한 진리를 위해 고난 받들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진리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참된 것임을 명백하게 증거하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2) 네가 세움을 받은 든든한 기초 즉 성경을 알라(15절).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느니라"는 말씀이다.

2. 하나님의 일을 잘 알고 그 일에 확신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신적인 계시를 요약해 놓은 책이기 때문이다.

3.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안다는 것은 대단히 복된 일이다. 또한 어린이들은 늦지 않게 성경에 대한 지식을 배워야 한다. 어린시절은 배우는 시기이다. 또한 참된 지식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배워야만 한다.

4.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책은 성경이다.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거룩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거룩한 교훈을 담고 있으며 거룩한 일을 말하고 있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복을 받도록 성결에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성경은 바로 위의 사실 때문에 다른 모든 종류의 속된 책이나 또는 거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단순히 도덕을 다룬 책이나 일반적인 정의와 정직만을 다룬 책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성경을 알려면 베뢰아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매일 성경을 읽고 상고하여야 한다(행 7:11). 우리는 성경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또한 가끔 읽거나 또는 전혀 읽지 않거나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볼 수 있다.

(1) 성경의 탁월성.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여진 것"이다(16절).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우리는 그것을 절대적인 진리로써 의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지각을 주신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계시(성경)를 내려 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언은 언제든지 사랑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고 하였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자기들의 이야기를 말하지 아니하고 다만 주께로부터 받은 것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것은 다음에 열거하는 성경에 나타나는 요소들을 통하여 증명되어진다. 즉 문제의 웅장함, 담고 있는 교훈들의 진리성, 순수성, 탁월성, 여러 부분들의 조화, 성경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과 효력, 모든 인류를 넘어서 서로 연관된 수많은 예언들의 성취, 그 책이 신적 기원임을 증명해 주는 상상도 못할 기적 등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뜻을 따라서 성령을 선물로 나눠주심으로써 그들의 증언을 뒷받침해 주셨다"(히 2:4)고 하였다.

(2)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1] 그것은 "우리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한다(15절).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게 하는 참된 안내자이다.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있는 자임을 기억하자.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지혜롭게 해 준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성경에 다른 어떤 것을 더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성경을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성경의 진리와 유익함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목적, 즉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모든 목적이 담겨진 책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것을 가르쳐 주며 우리의 잘못된 것을 책망하여 주며 선한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준다.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교훈과 바로 잡음과 책망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특히 사람들을 가르치고 바로잡고 책망을 해야 하는 모든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3]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여 준다"(17절). 그리스도인과 목회자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케 하여 주는 것은 성경뿐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모든 선한 일을 온전히 행할 수 있게 된다." 성경 안에는 인생의 온갖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의무와 우리에게 요구되는 봉사가 어떤 것이든 성경은 그 모든 대답을 우리에게 하여 준다.

(3) 전반적인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보게된다.

[1] 성경은 용도가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에 유익하며" 우리의 모든 판단과 생활에서의 잘못을 시정해 주는 것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이다."

[2] 성경은 믿음과 실천의 완전한 규칙이며 하나님의 사람들 즉 하나님께 자기를 드린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사역자를 위해 기록된 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훈과……에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3]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가까이 하고 그 교훈을 따른다면 우리는 "전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질 것이다.

[4] 철학자들의 기록들이나 랍비들의 우화나 카톨릭교의 전설들이나 또는 구전되어 오는 전승들이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에게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더 성경을 사랑하고 가까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거기에 담겨있는 유익을 발견하고, 결국 그 안에 약속되고 확증된 축복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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