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디모데전서 0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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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종들의 의무(디모데 전서 6:1-5)

Ⅰ. 본문에는 종들의 의무에 관하여 설명되고 있다. 바울은 앞에서 교회 내에서의 제반 교제를 설명하였고 본문에서는 가정에서의 제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종들을 가리켜 "멍에 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종의 예속성과 노동을 하여야 한다는 두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그들의 멍에는 일하기 위한 것이지 게으르기 위한 것은 아니다. 만약 기독교가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로 하여금 그 멍에를 계속 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자연법에 의해서나 혹은 상호 동의에 의하여서나 체결된 의무를 묵살하자는 않기 때문이다. 종들은 주인을 "존경하며 섬겨야 할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그 이유는 그들이 바로 자기들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존경과 규칙을 준수함과 순종함으로 공경해야 하며 이러한 것들은 종들의 주인에 대한 마땅한 의무이다. 종들은 주인에게 그렇게 섬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주인을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아서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린 종들이 그 이전보다 더 나빠서 그 주인에게 무례하고 불순종하게 되면 마치 기독교가 그들을 이전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든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만약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범한다면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교훈은 우리가 부르는 값진 이름을 훼방하려고 찾는 자들에 의하여 훼방받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잘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가진 믿음을 비난하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주인도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인이요 종도 그리스도인인 경우라 할지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매인 자도 없고 자유자도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사회의 여러 관계를 해체 시키려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관계를 더 긴밀히 하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애는 영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며 그것이 곧 외적인 인간관계(상하관계)를 무시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신앙을 빙자하여 그들의 상하관계에서 부과되는 의무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을 신앙을 오해하고 남용하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본문은 "더 잘 섬기라. 이은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 받는 자 임이니라"고 하였다. 믿는 종들은 믿는 주인에게 더욱 더 충실히 봉사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스스로 생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믿음과 사랑이 그들에게 선행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 믿음이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요, 함께 은혜에 동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큰 위로를 받게 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믿는 주인과 믿는 종은 형제요 함께 은혜에 참여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매인 자나 자유자가 없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갈 3:28). 디모데는 이러한 사실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목회자들은 모든 사람을 일반적인 의무뿐만 아니라 특별한 상하관계에서의 의무도 가르쳐야 한다.

Ⅱ.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로막고 주의 복음과 더불어 변론과 언쟁과 싸움을 일으키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면"(3-5절) 즉 행함으로 복음을 나타내지 못하거나 경건을 증진시키기 위한 교훈이나 권고를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약 영혼을 치료하는 건전한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이라고 본문은 말씀을 시작한다. 우리들에게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전부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경건에 관한 교훈인"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만 착념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의 교훈은 경건케 하는 교훈임을 명심하자. 그의 말씀은 경건하게 만들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 인간은 "교만하고"(4절) 다툼을 좋아하며 무지하고 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므로 교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적게 아는 사람이 가장 교만한데 이는 그들의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하여도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만 변론과 언쟁만을 좋아한다." 명백한 기독교의 실제적인 교훈에서 떠난 사람들은 다만 논쟁만을 일삼으며 지낸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신앙의 생명과 능력을 침식시킨다. 그들은 변론과 언쟁을 일삼고 이러한 언쟁은 교회에 큰해를 초래한다. 바로 이 언쟁 때문에 "시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만들어낸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성령의 가르친 것으로 하지 않고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것으로 하면(고전 2:13) 그들이야말로 교회 안에 재앙의 씨를 뿌리는 자들인 것이다. "마음이 썩은 자들에게는 분쟁이 있게 마련이다"(5절).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며 그 어떤 것도 확고한 것은 없는 것이다. 부패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진리가 빈곤한 사람이라는"것을 명심하자.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는 까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착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며" 신앙도 세속적인 이익에 따라 흔들리게 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도록 하라고 경고하였다. 여기서 다음의 것을 명심하자.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유익한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주의 말씀은 상처난 양심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상처를 치료하거나 방지하는데 있었어도 가장 적합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지혜가 있어서 피곤한 자들을 치료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사 50:4).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 안의 불화를 막는 가장 최선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자기들의 구주이며 선생이 되시는 주의 말씀의 확실성과 권위에 대하여 이론을 제기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이 주의 말씀과 꼭같이 생각되어지거나 어떤 경우에는 더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어질 때 교회 안에서는 논쟁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2. 누구든지 다른 것을 가르치거나 이 유익한 말씀에 동의하지 아니한다면 그는 교만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자라는 사실이다. 교만한 무지는 항상 병행하는 법이다.

3.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교만한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다른 유익한 말씀은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인 것이다.

4. 우리는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결과로 오는 슬픈 결과를 배우게 된다. 변론을 일삼는 데서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온다는 것을 또한 알게 되었다. 또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익한 말씀을 떠난다면 다른 어떤 말씀이나 인간의 말에도 결코 뜻을 정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다만 계속 논쟁과 변론만을 일삼을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이 자기가 택한 주장보다 더 나은 것같이 보일 때 투기를 일으킬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간의 질투와 의심이 따라 올 것이다. 바로 이 의심에 대하여 바울은 "악한 생각"이라고 불렀다.

5. 악한 논쟁을 일삼는 그런 사람들은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사도는 경건을 가장 큰 이익으로 생각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자들은 경건보다 물욕에 눈이 어두어 바울의 말을 반박하여 나섰고 그러기에 그들은 더욱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며 진리를 잃어버린 자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 좋은 목회자의 좋은 그리스도인은 이런 모든 일들을 삼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여호와께서 "내 백성들아 너는 이런 것들로부터 돌아서라"고 하신다.

 

6:2 없음.

 

6:3 없음.

 

6:4 없음.

 

6:5 없음.

 

6:6

만족하는 삶(디모데 전서 6:6-12)

믿음을 남용하여 세속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Ⅰ. 바울은 지족하는 마음에서 오는 유익과 탐욕의 해로움을 보여 주고 있다.

1. 만족의 유익(6-8). 어떤 이들은 기독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유익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를 통해 어떤 세속적인 이익을 얻을 것으로 생각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면 그것은 거짓된 것이라 하지만 기독교가 장사로 치자면 밑지는 장사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를 이용하여 돈을 벌고자 하는 자들은 다만 이 세상을 섬기는 자들일 뿐이며 그들은 곧 기독교가 손해나는 장사라는 것을 알고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자기의 소명으로 알고 그것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은 기독교가 유익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와 다가오는 시대에 생명의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 바울이 말한 진리는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지족하는 자의 경건"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즉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적어도 그것으로 충분히 생활해 나간다면 그는 더 이상 욕망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럴 때 그가 가지고 있는 경건은 그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다"는 말로 본다. 그러므로 의인의 적은 소유자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시 37:16)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는 말씀을 다음과 같은 뜻으로 본다. 경건은 그 자체가 대단한 유익이라는 것이요 그것은 모든 일에 대하여 유익을 주게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참된 경건이 있는 곳에는 만족이 있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본다. 경건함으로 만족하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확실히 이 세상에서 가장 쉽게 가장 큰 행복에 도달한 사람이다. "지족하는 경건" 즉 그리스도인의 지족성은(만족은 경건에서 만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큰 유익이다. 경건은 세상에서의 가장 큰 부(富)이다. 경건한 사람은 저 세상에서도 확실히 행복될 것이다. 더욱이 어떤 환경 속에서도 지족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자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1] 그리스도인의 이익. 그것은 지족하게 하는 경건이다. 이것은 이익을 얻는 진정한 길이며 이익 그 자체이다.

[2] 그리스도인의 유익은 대단히 크다. 그것은 세상에서 티끌 만한 이익만 생겨도 좋아하는 그러한 유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잘 것 없는 세상적인 이익과 같은 것은 아니다.

[3] 경건은 풍족하던 가난하던 언제나 만족을 준다.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은 바울처럼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거기서 만족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빌 4:11).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분배하여 주신 것에 만족하여 그것이 자기들에게 가장 좋은 것인 줄로 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드가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경건을 얻도록 노력하자.

(2) 바울이 지족의 교훈을 준 이유.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7절)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왜 우리가 작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하여야 하는가의 이유인 것이다.

[1] 우리가 이 세상에 벌거벗은 몸으로 왔으므로 또한 우리가 돌아갈 때 주장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무엇을 소유했던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덕분이다. 주신 그 분이 원하실 때 원하시는 것을 가져 가시는 것을 그분의 자유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존재와 육체와 또한(음식이나 의복보다 중요한) 생명이 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벗은 몸으로 온 것외에 아무 것도 가져온 것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바 모든 것은 소유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존재가 계속되고 생명이 유지된다면 만족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주시고 우리를 돌보사 우리는 오늘까지 생명을 유지하고 먹고 살아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큰 어려움에 떨어질 때라도 이 세상에 벌거벗고 태어났을 때보다 더 가난하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가난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쓸 것을 공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남은 순례의 생애를 돌보아 주실 것을 믿자!

[2]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가 없다. 가장 큰 부자라도 그 많은 것 중에서 한 벌의 수의와 한 개의 관 그리고 무덤만이 그가 가지고 갈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많은 것을 욕심내는가? 우리는 왜 적은 것을 가지고 만족하지 못하는가? 결국 우리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모든 것을 남겨놓고 가야하는데도 말이다(전 5:15, 16).

(3)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8절). 이 말은 음식과 의복을 말하는 것으로 입을 것이라는 말속에는 의복 뿐 아니라 주거지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것들을 주셨다면 우리는 그것이 화려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해야 한다. 만족할 줄 아는 성품을 지녔다면 본문을 통하여 비록 우리가 맛좋은 음식을 가지고 못하고 값비싼 옷을 입지 아니하였다 해도 만약 우리가 어느 정도 먹고 입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만족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아굴의 기도를 들어보자. 그는 "나로 하여금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자로도 마시고 다만 나를 위하여 먹고 살 양식으로 먹여 주시옵소서"(잠 30:8)라고 기도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1] 이러한 세상적인 것들에 우리의 행복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하였다면 저 세상으로 갈 때 또한 아무것도 가지 못한다. 세상이 주는 행복과 재산들을 죽음이 벗겨갈 때 또 누구나 이것들과 영원히 작별해야 할 때 이 세상적인 것에만 마음을 두고 살던 속물들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그들은 가련한 미가처럼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삿 18:24)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생필품 이상의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 그는 생필품으로 만족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그는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는 다만 "음식과 입을 것"이 주어질 것만을 바라야 할 것이다.

2. 탐욕의 악함. "부하려 하는 자들은[이 세상의 부(富)에 마음을 쏟고 옳든 옳지 않든 그것을 가지려는 사람들] 시험과 올무에 떨어진다"(9절). 바울은 부자라고 말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는 자들이라고 말하였다. 즉 그들의 행복을 이 세상의 부함에 두고 부당한 방법으로 그 부를 탐내며 그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열심을 내며 무섭게 날뛰는 사람들을 가리킨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이 시험과 올무에 떨어진다. 왜냐하면 사탄은 그들의 욕망이 어디에 쏠려 있는가를 알기만 한다면 그는 곧 그의 낚시 바늘에다가 그들이 바라는 미끼를 걸기 때문이다. 마귀는 금덩어리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를 알았으므로 그 앞에 그것을 놓아두었던 것이다. 이런 자들도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9절). 다음을 명심하자.

(1) 바울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추론한다.

[1] 어떤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부자가 될 것을 목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결핍 속에서는 결코 만족할 줄을 모를 것이다.

[2]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안전할 수도 없고 또 무죄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히 멸망할 위험 가운데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시험과 올무에 걸리게 될 것이다.

[3] 세속적인 욕망은 어리석고 해로운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사람을 파멸과 지옥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4] 육신적이요 세속적인 욕망의 해로움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어리석은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부끄러워해야 하며 또한 그것은 해로운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특히 그것들이 어느 정도 해로운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들을 멸망하여 지옥에 떨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2)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확언하였다(10절).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죄를 지을 까닭이 없을 것이다. 특별히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떠나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그들이 돈을 사랑하는한 그들은 믿음에서 떠나고 기독교를 포기하게 되고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된다. 다음을 명심하자.

[1] 일만 악의 뿌리가 무엇인가? 돈을 사랑함이다. 돈을 소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과도하게 돈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곧 그 사람을 악의 구렁으로 몰아 넣을 것이다.

[2] 탐욕적인 사람은 돈을 버는 방법이 있다면 믿음까지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믿음에서 떠났다"고 하였다. 또 바울은 다른 곳에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렸다"(딤후 4:10)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데마에게 세상은 기독교보다 더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믿음에서 떠난 자들은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른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게 근심을 저축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Ⅱ.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고하고 또한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며 특히 목회자로서 맡은 바 책임에 충실할 것을 명하였다. 바울은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사람이며 또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합당하도록 행하여야 한다.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을 위해 즉 더욱 직접적으로 그의 명예를 위해 일하도록 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 구약 시대에서는 예언자들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1. 바울은 디모데에게 많은 사람을 해롭게 한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도록 경계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본문에서 "바로 이런 것들을 피하라"고 하였다(11절). 돈을 사랑함은 어떤 사람에게도 해가 될 것이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돈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마음을 이 세상에 쏟게 하므로 해로운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일에 전념해야 한다.

2.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무장하고 선한 것들을 좇으라고 지시하였다. 즉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을 것"을 지시하였다. 의는 생활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이며 경건은 하나님에게 대한 것이요 삶의 원칙으로써의 믿음과 사람은 의와 경건을 실행하도록 그를 도와주고 이끌어 주는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믿음과 사랑의 원칙에 의해 의와 경건을 좇는 자들은 거기에다 인내와 온유를 덧입는 것이 필요하다. 즉 인내라 함은 하나님의 섭리의 꾸짖음과 또 사람들의 비난을 참는 것이요 또 온유라 함은 우리를 험담하는 자들을 교훈하고 또 우리에게 주어지는 도전과 해함을 받아들일 때 지녀야 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것들을 피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그반대되는 것들을 좇아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의를 좇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인가! 그들은 이 땅에서 뛰어난 사람이며 하나님께 받으심직한 사람이요 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다.

3. 바울은 디모데에게 군사와 같은 태도로 복음을 전할 것을 권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12절)고 하였다. 하늘 나라를 얻고자 하는 자는 자기들의 길을 전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들은 부패와 유혹과 어둠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그것은 선한 싸움이요, 또 선한 목적을 위한 싸움이며 또 그 싸움에는 선한 결말이 있을 것임을 명심하자. 그것은 믿음의 싸움이다. 우리는 육체를 따라 싸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병기는 육체가 아니기 때문이다(고후 10:4).

4. 바울은 디모데에게 "영생을 취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다음을 명심하자.

(1) 영생은 우리의 싸움에 용기를 주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게 하는 우리에게 약속된 면류관이다.

(2) 우리가 그것에 미치지 못하거나 또는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이것을 꼭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고 결코 놓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속히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고 한 것이다.

(3) 우리는 싸움을 위해 또 영생을 붙들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4) 디모데와 모든 목회자들이 많은 증인들 앞에서 해야 할 고백은 선한 증거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고백하고 종사하는 일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한 것이며 영생을 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소명과 고백 때문에 선한 증거를 해야 하는 것이다.

 

6:7 없음.

 

6:8 없음.

 

6:9 없음.

 

6:10 없음.

 

6:11 없음.

 

6:12 없음.

 

6:13

디모데에 관한 사도의 엄숙한 경고(디모데 전서 6:13-21)

위의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이 없이 이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이 계명이란 것은 그의 목회상의 모든 사역과 그에게 책임 지워진 모든 것과 그가 해야 할 모든 봉사를 가리킨다). 그는 목회를 하는 동안 어떤 비난에 자신을 들어내거나 비난을 초래할 어떤 일을 하지 아니하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그러면 디모데가 이같이 행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Ⅰ. 바울은 디모데에게 엄하게 명령을 하였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네게 명하노니…"바울은 디모데가 모든 것을 보시며,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를 모두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마지막 날에 보고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은 만물에 살게 하시고 또 스스로 안에 생명을 지니시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시다. 만물을 소생시키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우사 그를 섬기게 하신다. 이제 바울은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디모데를 명한다. 그런데 디모데는 특별한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자로 불리움을 받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희생제물로서 뿐만 아니라 순교자로서 죽으셨음을 명심하자.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 앞에 소환되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이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라"(요 18:36, 37)고 선한 증거를 하셨다는 것을 명심하자. 빌라도 앞에서의 그의 선한 증거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 증거로 말미암아 그를 따르는 자들 곧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이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Ⅱ.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그가 과거에 하였던 증거를 생각나게 한다.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12절 하). 이 고백은 바로 디모데가 장로회에서 안수받음으로 직분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그 증거에 의해 생활하고 또 그 증거에 의하여 새롭게 각성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Ⅲ.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까지 이 계명을 지키라." 즉 네가 살아있는 한, 즉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짐을 벗겨 주실 때까지 이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계산할 그 때 즉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 그 계명을 지키라는 말이다(눅 16:2).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것인데 그때는 초림 때와 같이 겸손한 모습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임을 명심하자. 목회자들은 그들의 목회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언제나 그의 오심을 주시하고 있으면서 흠이나 책망받을 것이 없이 이 계명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사모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도 바울은 그의 나타나심에 관해 언급할 때에 그의 나타나심을 즐거운 마음으로 말하였고 또한 나타나실 그분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확실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그 때와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권세 아래 두셨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즉 그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실 때 주님의 재림이 실현된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을 유의하라.

1.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바울은 대단히 놀라운 사실들을 언급한다.

(1)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자이시다. 지상의 왕들의 권력은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이며 그에게 속한 것이다. 현재 있는 권력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롬 13:1). 하나님은 절대적이며 주권적이시며 완전히 독립해서 존재하시는 유일하신 전능자이다.

(2) 그는 찬양 받으실 분이요 유일하신 전능자이시오 아무도 그의 행복을 침범할 수 없는 행복을 영원히 가지신 분이다.

(3) 그는 왕 중의 왕이시오 만군의 주이시다. 지상의 모든 왕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세를 받은 것이다. 그가 그들에게 왕관을 주셨으며 그들은 그에게서 면류관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치하시는 권력을 가지고 계신다. 만왕의 왕이라는 칭호는 바로 그리스도의 칭호이다. 이 칭호는 그리스도의 "옷과 다리에 씌어있다"(계 19:16). 왜냐하면 그는 모든 지상의 왕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4) 오직 하나님만이 불명하시는 분이다. 그만이 홀로 불멸하시며 또한 불명의 근원이시기도 하시다. 왜냐하면 천사들과 영들의 불면성이 바로 그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은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서 거하신다. 즉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 가운데 거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곳에 오게 하시고 그의 왕국에 들어오게 허락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들어 갈 수 없다.

(6)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자이시니"(16절), 썩어질 눈으로 그 밝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살수 없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영광된 속성에 대해 말한 후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써 끝을 맺었다.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스스로 모든 권세와 영광을 지니고 계시므로 주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돌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1) 복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대적하는 것은 대단한 죄이다. 사람의 악은 더 증가한다.

(2) 우리와 같이 누추하고 죄악된 피조물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겸손이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복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신단 말인가?

(3) 이 위대하고 복된 전능자와 함께 거하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 왕에게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고 말했었다(왕상 10:8)(스바 여왕이 솔로몬왕에게 한 말임). 그러나 왕 중의 왕 앞에 서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더욱 더 복있는 사람인 것이다.

(4) 위대하신 하나님께 사랑과 경배와 찬양을 돌리자.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평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나이다"(계 15:4).

Ⅳ. 바울은 부자들에 대한 가르침을 덧붙였다(17-19절)

1.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자들에게 그들의 풍부한 환경에서 오는 유혹을 경계할 것과 그들의 부를 선용할 것을 경고하라고 지시하였다.

(1) 디모데는 부자들에게 교만을 경계하도록 주의시켜야 했다. 교만은 세상이 그를 향하여 미소 지을 때 부유한 사람들이 쉽게 저지르는 죄이다. 또한 디모데는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지 말고" 또는 자기가 실제 처한 위치보다 더 높은 것으로 여기지 말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가지고 으시대지 말도록 권하여야 했다.

(2) 디모데는 부자들이 자기의 재물에 대하여 헛된 신뢰를 품지 않도록 경고해야만 하였다. 즉 "정함이 없는 재물을 의지하지 말도록"권해야 했다. 이 세상의 재물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없다. 오늘 재물이 많다가도 다음날 그것을 모드 잃어버리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 것이다. 재물이란 날개가 돋혀있기 때문에 언제 달고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릴지 알 수 없는 것이다)(잠 23:5).

(3) 디모데는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도록 부자들에게 명하여야 하였다. 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물을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부요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부자들이 재물은 있으면서도 인색하며 좋은 일에 재물을 사용할 마음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4) 디모데는 부자들에게 그들이 가진 것으로 선을 행하도록 권면하여야 했다(그 이유는 재물이 가치있는 그것이 보다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행함에 부하라"고 했다. 선한 일을 행함에 부한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이다. 또한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하라"고 했다(18절). 이 말은 그것을 행할 뿐만 아니라 기꺼이 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즐겨 주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5) 디모데는 그들에게 저 세상에 대한 생각을 하고 찾아 오는자들에게 구제를 베풀도록 권면하여야 했다. 이것은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으로 영생을 취하기 위한 것이다.

2. 이제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것을 볼 수 있다.

(1) 목회자들은 부자를 두려워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목회자들은 어떤 부자에게도 위의 교훈들을 말하고 경고할 수 있어야 한다.

(2) 목회자들은 부자에게 그들의 교만과 그들의 재물에 대한 신뢰의 헛됨을 주의시켜야 한다. 복음 사역자들은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도록"경고해야 한다. 또한 부자들로 하여금 자비와 사랑의 사업을 힘쓰도록 권해야 한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행하고(18절)"라고 하였다.

(3) 바로 이렇게 함으로 부자들은 앞으로 올 세상을 대비하여 저축하는 것이 되며 또 "영생을 붙잡는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바라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자들에게는 영생이 주어질 것이다(롬 2:7)

(4)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교훈에서 모든 목회자들이 배울 것들이 있다. 바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20절)는 말씀이 그것이다. 모든 목회자들은 위임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위임된 것은 소중한 보물인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지켜야 한다. 그 보물은 하나님의 진리이므로 그의 복음 사역자들은 "망령되고 허한 말을 피하고"이것들을 지켜야 한다. 사역자들은 그럴듯한 미사려구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그것을 허한 말 또는 인간 지식이라 불렀다. 이것들은 자주 하나님의 진리를 반대한다. 다만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위임된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많은 학문과 거짓되어 일컫는 지식을 자랑하는데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이끌어 타락시키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복음을 분명하게 보존 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또한 그것에 의해서 살고 또 죽을 결심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음을 유의하라.

[1] 목회자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라는 권고를 아무리 들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목회자들에게 맡겨진 너무나 큰 위탁이기 때문이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고 사도는 본문에서 말하였다. 이 말은 곧 "내가 너에게 이것을 다시 한 번 명령하지 않고는 말을 마칠 수가 없다. 네가 무엇을 하든지 이 부탁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홀히 하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부탁이기 때문이다"라는 말과 같은 뜻인 것이다.

[2] 만약 목회자가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려고 하려면 헛된 말은 파하여야 한다(왜냐하면 헛된 말은 공허하며 부패한 것이기 때문이다).

[3]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는 지식은 거짓된 지식이다. 그것은 참된 지식이 아닌데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참되다면 복음을 인정하고 또한 찬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런 헛된 지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믿음을 떠날 위험이 있다. 즉 신앙보다 이성을 위에 올려 놓는 사람은 믿음을 떠날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Ⅴ. 바울은 엄숙한 기도와 축복으로 디모데 전서를 끝맺는다. "은혜가 너희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이 말이 비록 간단하지만 우리의 형제들에게 알기 쉬운 기도라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은혜라는 말에는 모든 좋은 의미가 다 들어있기 때문이며 또 은혜는 영광의 시작의 징조요 시초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곳에 그가 또한 영광도 주실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의롭게 행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은 하나도 거두어 가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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