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데살로니가전서 0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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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성결에 대한 권고(데살로니가 전서 4:1-8)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Ⅰ. 거룩함에 풍성할 것에 대한 권고. 바울은 그들이 이 아름다운 일에 더욱 풍부하여질 것을 권면하였다(1,2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문제를 고찰하여 보자.

1. 권면이 주어진 방법. 그것은 대단히 넘치는 사랑으로 주어졌다. 바울은 그들을 형제로 대한다. 그는 그들을 형제로 불렀고 또한 그렇게 사랑하였다.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너무나 깊었으므로 그는 그들에게 매우 간곡히 권면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우리가 구하며 너희에게 권면하노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들 중 어느 하나도 그의 권고를 거부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권고를 계속 반복한다.

2. 그의 권고의 내용. 그것은 그들의 거룩한 행실이 더욱 풍성하여지고 또한 아름다운 일들을 위하여 더욱 열심이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타처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리고 그들은 이미 다른 교회의 모범이 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기를 바랐고 거룩함에 있어서 더욱 더 진보하기를 바랐다. 다음을 유의하라.

(1) 타인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들도 완전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도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달려가야"하는 것이다.

(2) 우리가 복음에 대한 믿음 안에 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믿음의 역사에 있어서 풍부하여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끝날까지 보존되어야 할 뿐 아니라 더욱 성장해야 하며, 하나님과 함께 친밀히 동행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3. 그의 권고를 뒷받침 하기 위하여 바울이 제시한 논거.

(1)그들이 이미 자기들의 의무에 관하여 배웠다는 점을 그들이 거룩해야 할 한 논거로 제시한다. 그들은 주님의 뜻을 이미 알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몰랐기 때문에 그 뜻을 이행 못했다고 변명할 수는 없었다. 믿음과 같이 지식도 실행이 없이는 죽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들을 개심시킨 사람들 또는 그들을 가르친 사람들에게 이미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를 배웠다. 복음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즉 복음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해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품과 행동을 절제하도록 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는 수단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가르쳤다. 올바른 삶을 동반함이 없이 말로만 끝나는 것은 결코 우리를 하늘 나라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의 성품은 "육을 좇지 아니하고 영을 좇아 행하는"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이 거룩해야 할 이유로 그가 제시한 또다른 논거는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또는 그의 이름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권면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대사로서 그들에게 주 예수의 명령하신 바와 뜻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선포하였다.

(3) 그들이 거룩해야 할 또다른 논거는 이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문이라고 한다. 거룩한 행실은 거룩함의 으뜸이신 거룩한 하나님의 가장 기쁘게 한다. 그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적이며 소망이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을 기쁘게 하거나 육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행하여야 한다.

(4) 그들이 행하고 지켜야 할 규례.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계명이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산이 계명이다. 왜냐하면 그 계명은 그의 권위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요, 그에게서 비롯된 지시이며 그러므로 그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들을" 사람들이 지키도록 가르치는 일을 그에게서 위임받았다(마 28:20). 사도들은 그리스도로부터 큰 권위를 부여받았지만 그렇다고 그들 자신의 계명을 가르치는 권위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유산에 대하여 주인으로 행세해서는 아니 되었다(벧전 5:3). 또한 그들 중 누구도 그리스도의 권위의 계승자인 양 행세를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그가 그들에게 준 계명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가 전한 계명은 그가 주 예수께 받은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Ⅱ. 부정한 것에 대한 경고. 이것은 거룩하게 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죄이며 또한 그가 그들에게 그렇게 간절히 권고한 거룩한 행함과도 상반되는 죄였다.

1. 이 경고는 "음란을 버리라"는 말씀으로 표현되고 있다(3절). 우리는 이 말씀을 결혼하였든지 안하였든지 간에 있을 수 있는 모든 부정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특별히 음란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간음도 물론 포함된다. 그리고 이외의 여러 부정이 금지되고 있다. 그것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들이다. 그럼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러한 행위들은 은밀히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마음과 언어와 행실의 순결과는 상대되는 것이며 십계명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과 상치되는 것이며, 복음이 요구하는 바 거룩함에 반대되는 행위들이다.

2. 이러한 경고를 뒷받침 해 주는 몇 가지 논거를 예로 들어보자.

(1) 특별히 성화(聖火)한 이러한 성결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3절).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또 우리는 "성령의 성결함을 통하여 구원에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거룩함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몸 또한 정결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욕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할 것이다. 몸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그를 위해 봉헌되며 구별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그 몸은 깨끗하고 순결하게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우리의 거룩함의 일면이듯이 또한 순결도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명령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진실한 믿는 자들 안에 열매 맺게 하시는 은사인 것이다.

(2) 성결은 우리에게 대단한 영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4절). 따라서 성결과 반대된 삶은 굉장한 불명예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이러한 부끄러움은 씻을 수 없나니"(잠 6:33)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몸은 영혼이 거하는 영혼의 그릇으로 불리운다(삼상 21:5). 그러므로 그것은 욕망으로 인해 더러워지기 않도록 순결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명예를 중하게 여기고 명예에 손상을 받지 않고자 한다면 이 문제에 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자기의 내면의 욕망과 열정이 그의 이성과 양심을 압도하고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하며 또한 그것이 그의 영혼의 뛰어난 기능을 폐쇄시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이성적인 영혼이 육신의 정욕과 야수적인 욕망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만큼 불명예스러운 일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3) 색욕의 욕망에 탐닉하는 것은 이교도처럼 행동하며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과 같이"(5절)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방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자연법(이성의 법)에 의해서 명확히 금지되지 않았던 관계로 일반적으로 부정의 죄를 잘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심성이나 뜻을 알지도 못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또 마땅히 알아야 하듯 즉 주로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그들의 육적인 욕망과 욕정에 탐닉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개심하지 않은 이방인들과 같이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자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벧전 4:3).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러한 정욕과 욕망과 함께 그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이다."

(4) 부정의 죄, 특히 간음은 하나님께서 보수하실 가장 큰 죄목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6절)는 말씀의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e`n tw,v| pra,gmati. 즉 이 일에, 이는 사도가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서 즉 "불결의 죄"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더 나아가서 복음에 대적되며 또한 확실히 죄인 부정과 압제와 우리의 인간 관계하는 사람들을 속이지 말고 또 모호한 말과 거짓말로 상대방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도 본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불결의 죄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여러 가지 경우의 불의와 부정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겠다. 음행이나 불결한 여러 죄된 행위들은 그 죄를 범한 사람 자신의 몸을 더럽히며, 더구나 그러한 죄들은 그 죄를 지은 자의 영혼이나 몸에 동시에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때때로 이러한 죄들은 다른 사람 특히 그 범죄인과 결혼이나 혈연 관계로 맺어진 사람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며 또한 그들에게 불의를 가하는 것이 된다(고전 6:18). 이러한 죄가 이같이 극악한 성격의 죄이므로 하나님의 그 죄에 대하여 보수하신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 13:4)고 하였다. 이 사실을 바울은 그의 복음(로마서 말함)에 의하여 경고하고 입증하였다. 로마서에는 대단히 고귀하고 위대한 약속들이 포함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남"을(롬 1:18) 보여 주고 있다.

(5) 불결의 죄는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이 갖는 특성과 목적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을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게 하심이니"(7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불결을 금하시며 복음은 최대의 순결을 요구한다. 복음은 우리를 부정한 데서 거룩으로 부르신다.

(6)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을 경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7절)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들과 같은 인간에게서 순결과 거룩의 개념들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것을 경멸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멸시임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바울은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분의 성령을 주셨음"을 말 하였다. 이 말은 모든 종류의 불결함은 특별히 성령을 슬프게 하며 그를 격노케 하여 그로 우리를 떠나가게 한다고 하였다.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러한 죄악에 대항하도록 우리를 무장시키기 위하여서이며 우리의 육신의 행위를 극복하도록 도움으로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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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사랑(데살로니가 전서 4:9-12)

본문에서 바울은 위대한 의무들에 대하여 언급한다.

Ⅰ. 형제 사랑의 의무. 바울은 그들에게 형제애가 더욱 증대되기를 권고한다. 이 권유는 그들이 이것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고 있기에 더욱 잘 행하게 하려고 주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기 ?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그것에 관하여 쓴다는 것이 별로 필요 없을 정도였다(9절). 이와 같이 그는 데살로니가인들은 칭찬하여 그에게 호감을 갖게 함으로 그들의 사랑을 불붙이고자 하였다. 즉 그는 그렇게 하여 그들에게 권면할 계기를 마련하였다. 우리는 타인들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하여 그들을 칭찬하여 주는 것이 좋다. 또 그렇게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 좋은 점이 더욱 더 풍부해질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다음을 살펴 보자.

1. 바울이 그들을 칭찬한 내용. 그것은 그들 자신의 공로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이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증거에 대하여 기록한다.

(1) 그가 특별히 칭찬한 것은 그들의 형제애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좋은 교훈을 전해 주셨음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9절)고 하였다. 선을 행하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행하도록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으므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르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도 가르침을 받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제복과 같은 것이다. 또한 성령의 가르침은 인간의 가르침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무도 하나님의 가르침과 상반되게 가르쳐서는 안 되듯이 또한 아무도 하나님의 가르침이 동행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가르침은 공허하여 무용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2) 데살로니가인들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한 사랑을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좋은 증거를 나타내었다. 이 사실을 그는 특별히 칭찬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속해 있는 도시와 사회에 속한 사람들 또는 그들과 가깝고 그들과 정이 통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랑을 더욱 넓게 베풀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사랑을 모든 성도들에게 베풀어야 한다. 즉 비록 자기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거나 그와 견해가 차이가 나거나 그보다 실천이 적은 자라도 사랑하여야 한다.

2. 그의 권고의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이 형제 사랑이라는 놀라운 은사와 의무를 더욱 증대시키라는 것이었다(10절). 비록 형제애가 어떤 의미에서는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전혀 결여된 듯이 그들에게 형제의 사랑에 대하여 권유할 필요는 없는 듯이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더욱 더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게 되기 위하여 그런한 권고가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하늘 이편에 사는 사람 중 누구도 완전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은사나 또 다른 은사에 있어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도 끝까지 이러한 사랑을 수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Ⅱ. 그들을 부르신 부르심 안에서 조용하고 부지런해야 할 의무.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바울은 이러한 의무들을 권고한다. 즉 "조용하기를 배우는 것이다"(11절). 조용하고 고요한 성품을 갖고 평화롭고 조용한 행동을 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조용히 사는가를 배워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어떻게 조용하고 고요히 사는가를 배우려는 포부를 가지고 부지런히 이러한 태도를 배워야 한다. 즉 자기의 영혼 가운데 이 고요함을 지니고 타인을 향하여 조용히 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또는 섬세하고 부드럽고 평화롭고 점잖은 성품 즉, 다툼이나 논쟁이나 분열의 초래하지 않는 성품을 배워야 한다. 사탄은 우리를 격동시키느라고 분주히 야단을 한다. 우리 마음에 사탄이 들어오면 우리로 평정을 잃도록 작용한다. 그러므로 조용하는 법을 다음에 "자기 일을 하라"는 또 다른 의무를 권고한다. 우리가 분수넘게 남의 일을 간섭하면 쓸 데 없이 불안에 우리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타인들의 일에 참견하느라고 대단히 분주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마음 가운데 평정을 지닐 수 없으며 그들의 아웃에게 커다란 분쟁의 원인이 되곤 한다. 그들은 본문에 나오는 우리의 다른 의무 즉, 자신의 일에 부지런해야 할 것, 본문을 인용한다면 "자기의 손으로 일을 함" 의무를 상념치 아니한다. 기독교는 우리의 특수한 부르심의 의무와 일로부터 우리를 놓여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의무와 소명에 근면하도록 가르친다.

2. 바울은 두 가지의 이유를 들어 그의 권고를 강조한다.

(1) 그러므로 우리는 신용을 얻으며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우리는 외인들을 향하여 정직하고 단정하며 신용있게 행하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21절). 이러한 의무들을 행하는 것이 복음답게 행동하는 것이며 또한 외인들 곧 복음에 대한 적수들로부터 좋은 평이 나오게 하는 것이 된다. 믿는 자가 부드럽고 고요한 성품을 지니고, 자신의 맡은 바 일에 힘쓰며 타인들의 일에 쓸 데 없이 참견하지 않는 것은 믿음에 광채를 더하여 주는 것임을 기억하자.

(2) 그러므로 우리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2절). 사람들은 종종 자기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자신을 협착한 상황에다 빠뜨리고 대단한 궁지로 자신을 끌어내리며 너무나 많은 부족에 자신이 놓여지게 한다. 한편 자기의 맡은 바 일에 근면한 사람은 편안하고 부족함 없이 산다. 이들은 자기 친구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으며 외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손수 자신의 양식을 벌어들이고 그렇게 함을 대단한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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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없음.

 

4:1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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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처한 상태(데살로니가 전서 4:13-18)

본문에서 사도는 주 안에서 죽은 친지나 친구들로 인하여 슬퍼하는 데살로니가인들을 위로하였다. 그의 목적은 데살로니가인들이 그 일에 대하여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너무나 서러워하는 것을 그치게 하려는 것이었다. 친구의 죽음을 슬퍼함을 부당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위해 슬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생각하고 울게 된다. 비록 죽는 것이 죽은자에게는 유익이 될지라도 우리는 자신의 상실을 생각하고 슬퍼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나친 슬픔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Ⅰ.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13절). 그러한 행위는 이 생의 후에 더 좋은 삶에 대한 희망이 없는 이방인이나 그렇게 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확실한 소망, 즉 "거짓을 말씀하지 않는 하나님께서"우리에게 약속하여 주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졌으므로 세상적인 일들로 인해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절제있게 해야한다. 이러한 희망은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슬픔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는 것이다.

Ⅱ. 그렇게 하는 것은 죽은 자들에 대하여 무지한 소치로 인한것이다(13절). 자는 자들에 관하여 우리가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나라는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또 연락도 할 수 없는 어두움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죽은자들 가운데로 가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들 가운데 가는 것이요,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는 말이다. 죽음은 미지의 사실이며 죽음의 나라와 죽은 후의 상태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특별히 주 안에서 죽는 자들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무지할 필요도 없고 또 무지하여서도 안 될 것이다. 만약 믿는 자들의 죽은 자들에 대한 슬픔을 충분히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1. 그들은 예수 안에서 잠든다. 그들은 다만 자고 있는 것이다(13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들을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 하였다(고전 15:18). 죽음이 그들을 멸망시키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잠재운 것이다. 죽음은 그들에게 쉼이며 고요한 안식이다. 그들은 이 곤고한 세상에서 은퇴하여 그들의 온갖 수고와 슬픔으로부터 안식하며 예수 안에서 잠자는 것이다(14절). 주님과 하나로 연합하여 그들은 그의 품에서 잠자며 주님의 특별한 돌보심과 보호 아래 거하는 것이다. 그들의 영혼은 그의 품 안에 있고, 그들의 덧없는 육체는 주님의 돌보심과 권능 아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잃어진 것이 아니며, 또 잃은 자들도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의해서 더 큰 것을 얻은 자들이 되었고, 그들의 이 세상으로부터의 떠남은 더 좋은 곳으로 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2. 그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을 것이며 그들의 잠에서 일깨움을 입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와 함께 그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14절). 그때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고 지금보다 더 좋은 곳에 거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의 교훈은 우리 믿는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지나친 슬픔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훌륭한 해독제이다. 우리가 이 교훈을 확신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믿기 때문이다"(14절). 그리스도인들로서 부활의 교리를 알고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며 그것은 또한 부활의 기쁨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은 망하지도 않겠고 잃어버림이 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5:18, 20). 그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며 불멸하는 빛을 준다.

3.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들의 모습이 영광을 입게 될 것이고 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15절) 즉 주 예수의 거룩한 계시에 의하여 이 사실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부활과 축복받은 자들에게 올 미래의 상태는 구약의 성도들에 의해서도 부분적으로 고백되었으나 복음에 의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1) 주 예수께서 저 높은 세계의 모든 화려함과 권능으로 하늘로부터 내려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16절). 그러므로 본문에 "주께서 천사장의 소리와 함께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고 하였다. 그는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는 가시적인 하늘을 지나서 삼층천으로 올라가셨다. 삼층천은 모든 것이 회복될 때까지 그를 자기 안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다시 오시되 영광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 그는 하늘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공중으로 내려 오실 것이다(17절). 그는 "환호성과 함께" 장려한 모습과 권능을 입으시고 오실 것이다. 그는 권능과 권위를 띤 능력있는 왕이요, 정복자로서 호령하실 것이고 천사장이 그의 오심을 외칠 것이다. 또한 무수한 천사들이 주를 옹위할 것이다. 아마 여호와의 만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주님의 나타나심을 알리고 이 위대한 구속자요, 심판주인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선언하며 공포할 것이다. "나팔 소리가 울릴 것이요" 이 소리는 땅 밑 진토 가운데서 잠자던 자들을 깨워 일으킬 것이요, 모든 세상을 그 앞에 불러 모을 것이다.

(2) 죽은 자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라"(16절)고 하였다. 그 후에 "그리스도의 오실 때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가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증명될 것이다(15절). 그날에 구세주께서는 먼저 죽은 성도들에 대하여 관여하실 것이다. 주님은 살아있는 자들에게 위대한 변화가 있기 전에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날에 죽음의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 안에서 잠자는 자들보다도 더 큰 특권이나 기쁨을 갖지 못할 것이다.

(3) 그 다음 살아서 그 날을 맞는 자들이 변화를 입을 것이다. 그들은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17절). 구름 가운데로 올림을 받는 순간에 또는 바로 직전에 살아남은 자들도 능력있는 변화를 죽은 자들이 변화된 것과 같이 동등하게 받게 될 것이다. 이 변화는 너무도 신비한 것으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에 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거나 거의 알지 못한다(고전 15:51), 다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이 썩지 않을 것으로 옷 입는다는 것"과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기에 알맞게 만들어진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현재로써의 우리의 그 혈육은 나라에 적합치 않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순간에 곧 눈깜박할 사이에" 있어질 것이다(고전 15:52). 즉 주님 안에 잠자는 자들이 일어나는 순간에, 또는 그 후 곧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여 변화를 입은 사람들이 구름 속에서 함께 만날 것이며, 또한 주님과 함께 만나서 그의 오심을 축하하며 주께서 그들에게 수여하시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고 그의 심판에 함께 참여하여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과 또한 악마와 그의 천사들과 함께 멸망할 운명에 처해 있는 모든 악한 자들을 향해 그가 형을 선고하실 때 이를 수긍하여 갈채를 보낼 것이다.

(4) 그날에 성도들에 대한 축복이 임할 것이다. 본문에 보면 그들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됨이 그들의 행복의 한가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의 주된 행복의 한가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의 주된 행복은 영원히 "주님과 동거하며"그를 대하고 그와 함께 거하며 그와 더불어 기뻐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의 친구들이 죽음을 맞을 때도 위로를 받아야 한다. 비록 죽음이 그들을 갈라 놓을지라도 갈라진 그들의 몸과 영혼은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그들이 다시 함께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며 주님과 또 다른 사람들과 헤어지는 일은 영원히 없게 될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슬픔을 당했을 때에 서로서로 도와 주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약화시키거나 다른 사람의 손을 나약하게 하지 말고 서로서로 위로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러한 위로의 행위는 죽은자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날에 있을 성도들의 영광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 또 이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고 또 서로 토의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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