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골로새서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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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관심(골로새서 2:1-3)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그와 개인적인 면식이 없는 이들 골로새 교인들과 다른 교회들에 대해 갖는 큰 관심을 살필 수 있다. 그 사도는 결코 골로새에 들린 일이 없었고 그리고 거기에 세워진 교회는 그가 설립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그 교회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인 것처럼 그는 그 교회를 친절히 돌아보았다(1절). 그러므로 그는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바울은 그 교회에 대한 염려로 노심초사하였다. 그는 그들로 인하여 일종의 고뇌를 느꼈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여 끊임없은 두려움을 가졌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맛보신 주님을 따라 역시 타인을 위하여 괴로워하였다.

2. 우리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며 그리고 함께 교제를 나누어 본 적도 없는 교회들과 그리고 동료 그리스도인들과도 믿음과 소망과 거룩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무리 멀리 있다 할지라도 서로 위하여 생각하며, 기도하며, 그리고 염려할 수는 있다. 그리고 육체로는 결코 보지 못한 그러한 자들도 우리가 천국에서 그들을 만나게 될 것을 소망해야 한다. 그러나

Ⅰ. 사도가 그들에게 소망을 둔 내용.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것이었다(2절). 그가 염려한 것은 바로 그들의 영적 안녕이었다. 그는 그들이 건강하게 되고, 부요하게 되며, 즐겁게 되며, 잘 되고, 번성을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이 "마음의 위안을 받기를" 바랐다. 영혼의 잘됨은 최선의 잘됨이며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물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염려해야 할 내용임을 기억하자. 본문에서 우리는 영혼의 잘됨이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기록을 대하게 된다.

1.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과 아버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밀을 이해하는 데까지 자랄 때 그리고 우리가 예수와 같이 진리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고 명료하고, 규칙적인 지식을 갖게 될 때, 우리 영혼이 잘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비밀은 이해한다"는 말은 이전에는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아버지와 그리스도에 관하여 알려진 것을 이해한다는 말이거나 혹은 아버지와 그리스도가 복음 안에서 그것을 나타내신 바대로 앞서 언급되었던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불러 비밀을 이해한다는 말이다. 또한 이해한다는 말은 우리가 기계적으로 그것을 되풀이한다거나 또는 우리가 교리 문답에 의해서 그것을 배운 것처럼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암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비밀을 꿰뚫고 들어가, 그것의 의미와 계획을 파악한다는 뜻의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위하여 힘써 수고해야 할 것이며 그러므로 영혼이 잘 될 수 있게 된다.

2. 우리의 믿음이 이 비밀에 대한 충분한 확신과 담대히 시인할 수 있는 데까지 자랄 때 영혼이 번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 이러한 상태는 복음의 위대한 진리를 의심하거나 의문을 제거하지 않고 신실한 말씀이요,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말씀으로 최대의 신뢰로써 포옹하며 확신에 거하며 그 증거를 확신하는 상태이다.

(2) 그 진리를 거리낌 없이 긍정하며 마음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회상할 때마다 진리의 적들의 위협이나 폭력 앞에서도 우리의 입으로 그것을 고백하며 우리의 주님과 우리의 거룩한 경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켜 확신에 이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본문에서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라고 불리운다. 위대한 지식과 강한 믿음은 영혼을 부유하게 만든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한 것이며 그리고 참된 부유함을 소유한 상태인 것이다(눅 12:21; 16:11; 약 2:5).

3. 우리의 영혼의 잘됨은 우리 영혼에 위로가 풍성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들의 마음의 위로를 받게 하려 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영혼이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찰 때(롬 15:13), 그리고 영혼의 외부의 어떠한 어려움도 어지럽힐 수 없는 그러한 만족을 갖게 되며 모든 다른 위로가 실패할 때도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을 때 영혼이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합 3:17, 18).

4. 우리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갖는 친교가 친밀하면 할수록 영혼은 더욱 더 부요해진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들이 "사랑 안에서 연합하기를" 바랐다. 거룩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서로 연합시킨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은 우리의 위안에 기여한다. 우리의 믿음이 강할수록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따뜻할수록 그외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그는 그리스도의 존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3절). 즉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었느니라" 하였고 "모든 충만이 그의 안에 거한다"(골 1:19)고도 말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를 "지혜와 지식의 보고로" 특별히 언급한다. 그의 안에는 지혜의 충만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인류에게 나타내실 수 있었다. 지혜의 보고는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데 이는 우리로 그것을 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롭고자 하여 지식을 얻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간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안에 쌓여진 재산을 쓸 수 있어야 하며, 그리고 그의 안에 숨겨진 보고로부터 보화를 끌어내야만 한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전 1:24, 30).

Ⅱ. 그들에 대한 그의 관심이 반복되어 말씀된다(5절). 그러므로 그는 다시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고 말한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몸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과도 영 안에서는 함께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교제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 대하여 그들이 질서있고 규모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결코 그를 보지 못했고, 그들과 같이 있지 않았지만 그가 그들 가운데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선한 행위를 기뻐하노라고 말한다.

2. 그리스도인들의 규모 있음과 견고함은 사역자들에게는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질서와 그들의 규모 있는 행위와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변함없는 추종을 볼 때 기뻐한다.

3.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굳어지면 그만큼 우리의 전 생활 안에 보다 좋은 질서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살며 행하기 때문이다(고후 5:7; 히 10:38).

 

2:2 없음.

 

2: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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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취하여야 할 영광된 경륜(1)(골로새서 2:4-12)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속이는 자들을 경고한다(4절). 이에 대하여 그는 본문에서 "내가 이것을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라고 하였고 또 8절에서 "어떤 사람이 너희를 노략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복음의 원리를 그릇되게 하려는 자들의 유혹하는 달콤한 말들로부터 그들은 보존하기 위하여 그는 그리스도와 복음의 계시의 완전함에 대하여 강조한다. 다음의 사실을 주의하자.

1. 사탄이 영혼을 노략하는 방법은 영혼을 기만함으로써라는 사실이다. 그는 그들을 속이고 나아가 이 속임수를 통해 영혼을 죽인다. "그는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옛 뱀이다"(고후 11:3). 그가 우리의 단점과 어리석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는 우리를 속일 수 없다.

2. 영혼을 노략하고자 노리는 사탄의 대리자들이 유혹하는 말로 자신의 참 모습을 은폐한다는 사실이다. 유혹하는 말들의 위험스러움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자들이 속이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있는 자들의 아침에 의해서 그리고 악의 주관자들과 행악자들의 그럴 듯한 외모가 거짓 속임들에 의해서 파멸당했던가! "그들은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한다"(롬 16:18). 그러므로 "너희는 유혹하는 말을 경계해야 하며 너희를 악에로 유혹하려는 자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목적하는 것은 너희를 노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잠언에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잠 1:10)고 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라.

Ⅰ. 유혹자들을 저지할 수 있는 효과 높은 방파제(6,7절). 이에 대하여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으라"고 한다 본문에서 다음의 사실을 주의하자.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고백을 통해서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즉 그를 그리스도로서 교회의 위대한 예언자로서 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에 의하여 예언자로서 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받아들어야 한다. 또한 이 예수를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로서 그리고 자신을 죄사함의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죄와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구세주로서 그리고 우리가 복종하고, 또 예속되어야 하는 주님 즉 주권자 혹은 왕으로서 영접해야 한다. "그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를 승인한다는 말이며 또한 우리의 생의 모든 문제에 그를 따라 산다는 말이며 우리의 것을 위하여 그는 우리의 생의 목적과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2.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들이 해야 할 과제는 "그의 안에서 행하는"것이다. 즉 그들의 행위들을 그들의 원리에 따라 일치시키는 것이고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그들의 약속과 일치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거나 우리를 그의 것이라고 수긍하였다면 또한 우리는 그와 우리의 교제를 지속시켜야 한다.

3. 우리가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행할수록 우리는 "믿음 안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며 세워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훌륭한 생활이야말로 훌륭한 신앙을 나타내는 최선의 증거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는 그의 안에서 뿌리박히게 될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굳게 그의 안에서 뿌리내리게 되면 그만큼 우리는 더 밀접히 그의 안에서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으라"고 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먼저 그의 안에서 뿌리를 박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움을 입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는 활력있는 믿음에 의해 그와 연합해야 하며 진심으로 그와의 계약을 수긍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안에서 자라나게 될 것이다." 또한 "너희가 가르침을 받은 바대로"라고 하였다.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교의의 법칙에 따라"라는 뜻이다. 훌륭한 교육은 우리가 굳게 세움을 입는데 훌륭한 효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는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한다"(7절).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되 그 안에서 풍성해야 하며 그리고 그것을 더욱 더 증진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감사함으로 이를 넘치게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위안과 유익함을 얻는 길을 주어진 은혜에 대하여 더욱 감사하는데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진보에 감사함을 더해야 하며 또 우리에게 자비로써 주어진 모든 특권들과 성취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Ⅱ.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에 대한 정당한 경고. 이에 대하여 사도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8절)고 하였다. 우리의 이성적인 기능을 고귀하게 활용하게 하며 또한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철학이 있다.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탐구는 우리를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인도하며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여 준다. 그러나 헛되고 속이는 철학이 있다.

이것은 신앙을 왜곡시키며 인간의 지혜를 들어 하나님의 지혜와 대립하게 하며 인간의 상상력을 즐겁게 하면서 한편 그들의 믿음을 파멸시킨다. 우리에게 소용도 없고 또한 우리와 관계되지도 않는 초월적인 것들에 대한 그럴듯한 호기심에 의한 사변과 말 장난을 공허하고 속임수로 가득찬 지식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본문에 보면 사도는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아서"라고 말하고 있다. 이 뜻은 이교의 학문은 물론 유대인의 현학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장로들의 유전과 그리고 세상의 초등 학문들과 복음의 세계에는 초보이며 입문에 불과한 의식과 계율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반면 이방인들은 자기들은 철학 원리들을 기독교의 원리들과 혼합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양쪽 모두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졌다. 자기 신앙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고 세상 길로가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서 돌아선 자들이다. 여기서 속이는 자들은 특히 유대인 교사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그리스도의 복음과 결부시켜 지속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그리스도 복음과 경쟁하고 그것을 대적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제 사도는 본문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보여준다.

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림자에 불과했던 모든 의식적 율법의 실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1) 그때 그들이 세키나(Shechinah) 혹은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체험하고 영광으로 여겼다면 우리도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한다.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보좌를 덮었던 구름 속에서 그룹들 사이에 계셨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우리의 본성에 참여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시며, 그리고 우리에게 아버지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선포하신 구속자의 안에 거한다. 하나님의 그의 안에서 육체로 거하셨다. 이 말은 영에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몸으로 거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그림자와는 상치되는 몸으로써 거하신다는 말이다. 신성의 충만함은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셨고 상징적으로 거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2) 계약을 인친 것으로써 할례를 그들이 가졌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은 것이다"(11절) 이 할례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중생의 사건에 의한 할례이다. 이것이야 말로 영적인 할례 또는 그리스도인의 할례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 2:29)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에게 분배되는 것이다. 그것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이다." 또한 그것은 어떤 피조물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복된 영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영으로 난 자다"(요 3:5). 또한 그것은 "중생의 씻음"이며 "성령의 새롭게 함이다"(딛 3:5).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육체의 죄의 몸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즉 단순한 외적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를 부인하고 우리의 생활을 개혁하는 데에 있다. 또한 그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감이다"(벧전 3:21). 그리고 우리가 어떤 한 가지 특수한 죄를 제거하는 것으로써는 충분치 않고 우리가 전체 죄의 몸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죄의 몸은 멸하여졌다"(롬 6:6)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할례를 받으셨고 또한 우리가 그와 연합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육체의 죄의 몸을 벗어버리는" 놀라운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 유대인들은 스스로 의식적인 율법에 있어서 온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다(10절). 유대인의 율법은 불완전하고 결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만일 첫 언약이 무흠하였다면 둘째 것은 요구할 일이 없었으리라"(히 8:7)하였고 그리고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오는 자들은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히 10:1). 그러나 그것의 모든 결점이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의 하나님의 뜻의 계시와 죄를 위한 온전한 희생에 의하여 보충되었다. 또한 "그는 모든 정사와 능력의 머리가 되심이다"라고 하였다. 구약의 제사장직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됨같이 구약 시대에 뛰어난 정사와 능력이었고 그리고 유대인들이 스스로 매우 크게 평가하는 다윗 왕국도 또한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주님이시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능력들 곧 인간과 천사들의 으뜸이 되신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벧전 3:22)고 하였다.

2. 우리는 사도의 모든 활동 속에서 그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보게 된다(12절). 그러므로 그는 "너희가 세례로 장사한 바 되고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와 함께 장사되고 동시에 일으키심을 받는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우리의 세례에 의해서, 그렇다고 장사되고 일으키심을 받은 것을 표현하는 세례 의식 혹은 상징 안에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못박히심 이상의 것이 성만찬식에서 어떤 가시적인 형태를 띠고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를" 말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세례에 의해서 의미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이다. 이때 세례는 계약의 인침이 되며 죄에 대한 우리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그 의미는 의로운 삶 또는 새로워진 생명의 인침이요, 그 책임이 부과됨을 뜻하게 된다. 세례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되시며 그리고 우리는 그의 백성으로 보장된다. 그리고 그의 은혜로 인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해 살며 혹은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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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취하여야 할 영광된 경륜(2)(골로새서 2:13-15)

사도는 여기서 유대인들보다 우월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을 표현한다. 이 특권들이란 매우 놀라운 것이다. 특권은 다음과 같다.

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특권이다. 그러므로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셨다"(13)고 하였다. 죄의 상태는 영적 죽음의 상태다.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죄 가운데서 죽은 것이다. 몸의 죽음이란 몸이 영혼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듯이 영혼의 죽음은 영혼이 하나님과 거룩한 은혜에서 분리되는 것이다. 몸이 죽는다는 것은 몸이 부패하고 썩는다는 뜻인 것과 같이 죄란 영혼의 부패와 타락을 뜻한다. 죽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듯이 상습적인 죄인은 도덕적으로 무능력하다. 비록 그가 타고난 힘 혹은 이성적인 피조물로서의 힘을 가질 수는 있을지라도, 그가 신적인 생명 혹은 새롭게 된 본성을 부여받을 때까지는 그는 영적인 힘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자들은 주로 "악의 한가운데 있는" 이방 세계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골로새 교인들도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었다"(엡 2:11, 12). 그들의 무할례 때문에 그들은 죄 안에서 죽어 있었다. 본문에서 무할례는 영적인 무할례 또는 본성의 부패로 이해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말은 이 율법 안에서 죽었고 그리고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율법 안에서 죽었다함은 유죄 판결을 받은 악인이 사형 선고 아래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같은 뜻에서 한 말이다. 또한 죄의 혐의를 받고 있는 죄인들은 율법의 판결 아래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것과 같은 자들이 것이다.(요 3:18). 그리고 죽은 상태라 함은 우리 육체의 무할례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성결되지 못한 마음이 본문에서 할례받지 못한 마음이라고 일컬어진다. 이것이 우리의 상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가운데서 죽은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자신을 드리심이 죄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서 제거하며 그리고 죄의 세력과 지배를 부순 것이다. 또한 "그와 함께 생명을 얻었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가 그와 연합함으로 그리고 그와 일치하여 생활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의 죽음이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영혼의 소생이었던 것이다.

Ⅱ. 그를 통하여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가 우리에게서 모든 죄를 사하셨다"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소생을 뜻하는 말이다. 사면을 받는 것은 범죄자에게는 생명을 얻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물론 그의 부활에 은혜를 입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같이 그가 우리의 의인(義認)을 위하여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롬 4:25)

Ⅲ. 우리를 거스리던 모든 세력들이 우리 앞에서 제거되어지는 특권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거스리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셨다"(14절).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1. 죄의 책임을 지고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책임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셨다는 말이다. 율법의 저주는 벨사살의 벽에 나타난 손으로 기록한 글자와 같이 우리를 정죄하는 증서다. 율법은 그 모든 내용을 계속 지키지 않는 모든 사람을 저주한다. 이것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증서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파멸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고 그리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했을 때" 이것은 제거되었다(갈 3:13). 그는 회개하고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 채무를 말소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의 아버지여, 저희의 저주를 내게로 돌리소서"라고 했던 것이다. 그는 우리를 거스리는 심판을 취소하고 폐기하시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율법의 저주도 십자가에 못 박힌 바 되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의하여 못박혔다. 우리가 주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를 볼 때 우리는 우리를 거스리는 증서가 도말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또는 증서를 도말하셨다는 말은 의식적인 율법을 도말하셨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즉 "의식을 기록한 증서" 또는 의식적 제도 또는 "의식으로 이루어진 계명의 율법"(엡 2:15)을 도말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멍에요, 이방인들에게는 장벽이었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그것을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즉 율법에 대한 채무를 말소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그것이 더 이상 자기들을 구속하지 못함을 보고 만족할 수 있게 하셨다. 실체가 나타나면 그림자는 물러난다. 그것은 없어질 것이요(고후 3:13) 그리고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인 것이다"(히 8:13). 이러한 여러 말씀들은 약정을 취소하는 고대의 방식들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즉 고대에는 약정을 폐할 때는 그 문서를 십자로 긋든가 혹은 그 패에 못 구멍을 뚫어서 표시로 삼았던 것이다.

Ⅳ. 그는 우리를 위하여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고 영광스런 승리를 얻으셨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사도는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힌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15절)고 말하였다. 율법의 저주가 우리를 정죄하는 것같이 사탄의 세력도 우리를 대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우리를 위해 값을 치루심으로 그의 공의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심판의 집행자인 사탄의 손으로부터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는 이제 위를 사로잡았던 자들을 사로잡으셨다." 지옥은 모든 세력들과 악마는 죽으신 구속자에 의해서 정복되었고 무장해제되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첫 약속에 이 사실이 표시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자신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으심은 뱀에게는 그의 머리가 부서지는 치명타가 되었다(창 3:15). 얼마나 장엄하게 구약 성서는 이 사실을 표현하였는가? 좀 거리를 두고서 이 큰 광경을 바라보자. 구속자는 죽음으로써 세상을 정복했다. 그의 가시관이 월계관으로 바뀐 사실을 상기해 보라. "그는 그들을 명하시고 악마의 세력을 부수시었다." 그리고 악마를 정복하여 무력하게 했으며 그리고 패배한 "그의 세력들을 밝히 드러내셨다." 즉 그들에게 수치를 주시고자 천사와 사람들에게 그들을 내보이시었다. 악마의 왕국은 주 예수에 의해서 주어진 것과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적은 결코 없었다. 그는 그들을 수레 바퀴에 묶고서 개선하셨다. 적을 수레 바퀴에 묶는 것은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의 승리를 표시하는 관례이었다. 또한 본문에 그가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하였다. 즉 그가 그의 십자가로써 그리고 그의 죽음에 의해서 승리하셨다는 말이며 혹은 어떤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듯이 자기 혼자의 힘으로 승리하셨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포도 압축기를 혼자 밟았고 그리고 그 백성들 중에서는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2:14 없음.

 

2:15 없음.

 

2:16

경고와 교훈(골로새서 2:16-23)

사도는 본장을 마땅히 해야 할 의무에 대한 권고로 끝맺는다. 그리고 이러한 권고를 그의 앞의 강론으로부터 이끌어낸다.

Ⅰ. 여기에 기독교를 유대교화하려는 교사들이나 혹은 의식적인 율법의 멍에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우려는 자들을 조심하는, 경고가 주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16절). 모세의 율법에서의 대부분의 의식들은 먹는 것들과 날들을 분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로마서 14장에 나타나는 바에 의하면 그 구분들을 유지하기를 찬성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 나타난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는 그리스도가 와서 그가 의식적인 율법을 취소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음을 보여 준다. 그는 "아무도 그일들을 너희에게 부과하지 않도록 하라. 이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부가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셨으니 너희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그는 말씀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장래 일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 이기 때문이다(17절). 그것들이 장래 일이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그것들이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그것들이 이제는 제거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본문에 "그러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였다. 즉 거기서 그림자가 비롯된 실체인 몸이 왔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복음의 모형들과 그림자에 불과한 의식적인 의문들을 계속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고 그리고 복음의 나라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표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 아래에서 갖게 된 유익이 그들이 율법 아래에서 가졌던 이점들보다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명심하자. 그들은 그림자를 가졌었으나 우리는 실체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Ⅱ. 그는 이방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개자로서 천사들을 숭배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을 조심할 것을 그들에게 경고한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18절). 천사들의 중재를 부탁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기에는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같이 여겨져 그것은 겸손의 형태로 간주되기 쉬었다. 그러나 그것이 겸손을 나타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겸손함이지 계명에 근거한 겸손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용납될 수 없었고 또한 신빙성 있는 것도 못되었다. 그것은 마땅히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할 존귀를 취하여 피조물에게 돌리는 행위였던 것이었다. 게다가 이 행위가 근거되어진 개념들은 다만 인간의 발상(發想)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며 신적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것은 인간 이성의 교만스런 자만의 결과로써 사람들로 충분한 지식과 근거가 없이 사건 속에 뛰어들어 자신의 행동을 결정짓게 하는 이성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가 보지 못한 사물들에 억지로 참견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였다"(18절)고 하였다(역주: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추었던 천사들의 계열과 그들 각각의 직무들을 나타내려는 무리한 시도를 초래케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외양으로는 겸손의 모습은 있었다 할지라도 원리에 있어서는 실제로 교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육적인 환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런 관념들은 발전시켰으며 그리고 다른 사람들 보다 자기들이 더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좋아했다. 교만은 크고 많은 오류와 부패들 그리고 심지어 많은 악한 행위들의 근원이다. 이 교만은 그래도 겉으로는 겸손한 척 자신을 과시한다. 그렇게 하는 자들은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자들이다"(19절), 그들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인 그리스도의 권리를 박탈하려는 자들이다. 교회의 지체를 중의 어느 것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과의 중개자로 나서려고 한다는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최대의 경멸이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붙잡은 손을 놓을 때 그들은 그들 곁에 있는 아무 것이나 붙잡게 되며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19절0고 사도는 말하였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통지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교회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머리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몸의 여려 지체들이 머리와 연합하여 거기에서 생명과 영양을 공급받는 것같이 그들도 마디와 힘줄로 그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몸은 성장하는 몸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으로 자란다." 새로운 사람은 자란다. 그리고 은혜의 본질은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돌발적인 방해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라게 하심"으로 자란다. 즉 성장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의 성장은 있어지게 된다. 또는 이 성장이란 관례적인 히브리 사상에 있어서와 같이 크고 그리고 풍성한 자나남이라고도 하겠다. 에베소성에서는 이 하나님의 자라나게 하심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엡 3:19) 사도는 기원하였다. 이와 유사한 말씀으로써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입음으로 그 몸을 자라게 한다"(엡 4:15, 16)고 한 말씀이 있다.

Ⅲ. 이러한 말씀을 한 후 사도는 다시 그들을 경고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20절) 만일 그리스도인으로서 너희가 의식적인 율법의 의문들에 대하여 죽었다면 왜 너희가 그것들에 순종하는가? 그 의문들은 이런 것들이니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아야 할 것이라"(21,22절)고 하였다. 율법 아래서는 죽은 자의 몸에 손을 대거나 우상에게 드려졌던 어떤 것에 접촉한다거나 혹은 어떤 금하여진 음식을 맛보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고 말함으로, 이러한 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하였다. 이것들은 그것들을 지탱할 본질적인 아무런 가치도 자체 안에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리고 그것들을 접촉하거나 먹던 자들도 그것들이 멸망하고, 지나가는 것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다만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부패시킬 뿐으로 인간들이 정한 규정과 유전에 불과한 아무 권위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으로 나타나는 지혜의 모양에 불과한 것"(23절)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준수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그들이 그 이웃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점에 있어서는 적어도 그들이 옳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것은 지혜의 모양 또는 단순한 창안 그리고 가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먹을 것들을 금하고 그들의 육체적 쾌락과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몸을 무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참된 경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되 신령과 진정으로 하고 의식적인 습관으로 하지 말 것과 그리스도의 매개만을 통해서 하고 어떤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서 예배하지 말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세의 율법의 의식적인 준수에서 자유롭게 되며 그리고 바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웠던 종의 멍에로부터 놓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2. 의문들에 대한 순종이나 혹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서 인간들이 정한 것들은 복음의 자유와 해방과는 상반되는 것이요 비난받을 요소들이라는 사실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요구한다. 그러므로 종의 멍에를 지우는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요, 그리스도께 옛 계명을 폐기하셨는데도, 의문에 속한 계명의 또 다른 율법을 도입해 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엡 2:5).

3. 그러한 것들은 다만, 지혜의 모양만을 가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어리석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복음의 약속들을 믿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참된 지혜다.

 

2:17 없음.

 

2:18 없음.

 

2:19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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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없음.

 

2:22 없음.

 

2:23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