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그리스도인 상(빌립보서 3:1-3)
빌립보의 교회는 신실하고 번창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기독교를 유대교화하려는 교사들에 의해서 혼란이 있었던 것같이 보여진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보전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가 베푸신 제도들과 함께 율법 준수를 혼합하려고 하였다. 그는 본장(本章)을 이 유혹자들에 대한 경고로써 시작한다.
Ⅰ. 그는 주 안에서 기뻐하기를 권한다(1절). 즉 그들이 그로 인하여 얻게 된 기업과 그들이 그에 의해서 희망하게 된 약속으로 만족할 것을 권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성격과 기질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신앙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을수록 우리는 신앙에 더욱 밀접하게 매달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수록 우리가 그들 위하여 일하며 고난받는 것을 더욱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떠나게 될 위험에서 더욱 멀어지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고 하였다.
Ⅱ. 그는 그들에게 거짓 교사들을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네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1절)고 하였다. 여기서 "같은" 말이라 함은 "이미 내가 너희에게 전했던 것과 같은 것"이 라는 뜻이다. 그의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에 내가 너희에게 들려 주었던 것을 이제 너희 눈으로 보게 제시하노라. 즉 내가 전에는 말로 하던 것을 이제 기록하여 너희에게 알림은 내가 지금도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에 대하여 그는 이 일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다"고 말한다.
1. 사역자들은 회중들이 어떤 사실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 안전하고 유익하다고 생각되어질 때 그들에게 그것을 알리는 것을 수고롭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2.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하고 그리고 중요한 요점들을 특별히 잊지 아니하기 위하여 우리가 자주 같은 진리를 듣는 것은 유익하다는 점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듣고자 하는 것을 시건방진 호기심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본문에서 필요하게 여겨 주신 경고는 "개들을 조심하라"(2절)는 것이다. 이사야는 거짓 예언자들을 가리켜 벙어리 개라고 불렸다(사 56:1). 사도는 여기서 이사야의 말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같이 여겨진다. "개들"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히 고백하는 자들에 대해 해를 입히며 그들을 향해 짖어대고 그들은 물어뜯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반대되는 선행(율법의 행위)을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악행자들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열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찢어 분열시켰고 그리고 조각조각을 내었다. 그리고는 폐기된 의식을 단순히 무의미한 육체의 일부를 베어내는 것으로 자족하였다.
Ⅲ. 그는 참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한다. 이들이 실제로 할례받은 자들로 구약의 이스라엘 족속이 그리했듯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그의 선택된 백성이며 영적 할례를 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이 참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그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3절)고 하였다. 여기에 세 가지 특징이 있다.
1. 그들은 고기와 마실 것(drink)과 여러가지 정결법으로 구성된 구약의 육체의 의식과는 반대로 영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이런 껍데기를 베껴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내적으로 함께 하는 신앙적인 예배를 드리는 데 요구되는 의무들을 가르친다. 우리는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요 4:24). 신앙하는 데는 진심만이 제일 요구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골 3:23)고 하였다. 또한 우리는 진심으로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힘과 은혜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의 시대의 특징으로 곧 "영적인 예배"인 것이다(고후 3:8).2.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인들이 유대 교회에서 주어지는 특유한 특권들로 인하여 자랑하는 자랑이나 또는 교회에서 주어지는 기독교 교회가 그들에게 단순한 외적 즐거움과 자랑거리를 부여한다는 뜻의 자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의 안에서의 얻어지는 유업 때문에 기뻐하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들이 그의 전의 뜰에서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의무로 삼으셨다. 그러나 이제 본질이 나타났으므로 그림자는 폐지된 것이요 그리고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3. 그들은 육체를 즉 모든 육적인 의식들과 외적인 행위들은 신뢰하지 않는 자들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바탕을 신뢰하는 데서 벗어나서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 우리의 기쁨은 물론 우리의 신뢰도 그에게 근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절된 신뢰의 대상을 배격함(빌립보서 3:4-8)
그 사도는 여기에서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그에게 주어진 특권들을 신뢰하지 않은 실례로써 자신을 제시한다.
Ⅰ. 그는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으로서 자랑해야 하는 것은 보여준다. 이는(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자신이 이스라엘인으로서 별로 자랑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그러한 특권들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가 육체를 자랑하고 신뢰하기로 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그렇게 할 만한 조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누구든지 그러하다"(4절)고 말한다. 그는 어떤 뛰어난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 이상으로 자랑거리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1. 그의 혈통상의 특권. 그는 개종자가 아니라 토착 이스라엘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 자기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족속"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베냐민의 지파였다." 그 지파에서 속한 경내에 성전을 세웠고 베냐민 지파는 다른 모든 지파들이 반역했을 때도 유다를 지지 했었다. 베냐민은 아버지의 귀염둥이었고 이 지파는 가장 총애받는 지파였다. 또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고 했다. 즉 부모가 다 유대인이요 대대로 이방 혈통이 개입한 적이 없음을 말하며 그의 조상들 중 누구도 이방인과 결합한 일이 없음을 말한다.2. 그는 유대 교회와 계약과는 관계를 자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8일만에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자기 육체에 하나님과 계약의 표시를 가졌으며 또한 하나님이 지시한 바로 그 날에 할례를 받았던 것이다.
3. 학식에 있어서 그는 바래새인으로서 율법에 뛰어난 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았다. 그리고 유대인의 모든 학식에 능통한 학자였고 그 조상들의 율법을 완전한 격식을 따라 가르침을 받은 학자였다. 그 조상들의 율법을 완전한 격식을 따라 가르침을 받은 학자였다(행 22:3). 그는 "바래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행 23:6)이요 그리고 "그의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행 26:5)
4. 그는 흠없는 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에 의로는 흠없는 자라"(6절)고 하였다. 바리새인이 율법을 해석하는 바에 따르는 한, 또한 율법의 외적으로 보이는 바의 축조적인 준수에 있어서 그는 율법을 어긴 일이 없었고 또 누구에게도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아니하였다.
5. 그는 그의 종교를 위해서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으로서 부끄러움 없는 생활을 살았으며 또한 그는 자기 신앙의 적수로 간주되는 자들을 박해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다"고 그는 말하였다.
6. 그는 자기가 열성적으로 박해에 앞장 섰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박해를 지시하고 통솔하는 데 아는 것도 없이 열성을 내었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다(행 22:4)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유대인으로서 자랑할 만한 것이었고 그를 외롭다고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Ⅱ. 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가 받을 유익과 기대에 비하여 이러한 것들(유대인의 특권)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가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7절)고 말한다. 즉 그가 바리새인이었을 때 그가 유익하다고 여겼던 것들 그리고 그가 이전에 중대하게 여겼던 것들 "이 모든 것들을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해로 여겼다." 그는 "말일 그것들을 지키기 위하여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의 이익을 잃었다면 나는 자신을 말할 수 없는 손실자(損失者)라고 여겨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대인의 특권을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그것들을 그를 윤택하게 하기에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만일 그리스도에 반대하여 그가 그것들을 신뢰했다면 분명히 그를 허약하게 하고 파멸하게 할 것이라고 여겼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사도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 행한 것 이상의 것을 행하라고 설득하지도 또한 자기가 그만 둔 것 이상의 것을 그만 두라고 설득하지도 않았다. 또한 자신의 불멸의 영혼을 내겐 기초인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근거도 그들에게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8절)고 말하였다. 여기서 사도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그는 우리에게 그가 열망하였고 얻으려고 애썼던 것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그것은 그의 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이었다. 즉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경험하여 아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개념적이고 사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에게 실제적이고 효험있는 지식이었다. 한 지식은 때때로 믿음을 촉진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자식으로 혹은 그에 관한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외롭게 하리라"(사 53:11)고 하였다. 더구나 그가 가진 지식의 지식 중에도 가장 고상한 지식이었다. 기독교 신앙 혹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는 여러 뛰어난 인간의 지혜와 자연에 대한 모든 지식을 넘어서는 풍성하고 초월적인 고상한 지식이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지식은 타락한 죄인들의 정황에 알맞는 것이며 그리고 그 지식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그리고 그들이 바라고 희망하는 모든 것은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2. 그는 어찌하여 유대인으로서 또한 바리새인으로서의 그의 특권들을 포기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그러나"(7절)라는 말로 자신의 승리감과 자랑스러움을 표현한다. 그러나라고 우리말로는 번역되었으나 원래는 "avvvlla. me.n ou/n ne. kai,"라는 말로써 다섯 개의 작은 단어들로 구성된 말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이란 그가 앞서 말한 그의 유대인으로서의 특권이다. 그가 본문에서 "모든 것들"이라고 말한 것은 모두 세상적인 쾌락과 단순한 외적 특권들 즉 그리스도 대신에 그의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것들, 또한 그리스도 대신 가치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다만 해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연 "그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관했는지 또는 그것들을 표기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는가?"라고 반문해 볼 수 있겠다. 물론 그에게 그러한 점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현재 시제로 "그러나 내가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기노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러나 그가 시련을 당했을 때는 어떻게 할까?"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겼음을 말한 사실속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즉 그는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8절)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바리새인으로서 그의 모든 존귀와 이점들을 내어버렸다. 그리고 복음을 고백하고 전파함으로 따라 오는 모든 불명예와 고난을 견뎠다. 기독교 신앙에 닻을 내리게 되자 그는 거기에다 희망을 걸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특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 그는 그것들을 해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을 배설물 또는 빗물"sku;bala" 즉 개들에게 던져주는 찌꺼기로 여겼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에 비해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그리스도와 겨루고자 할 때 최고도로 경멸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신약 성서는 구원의 은혜를 손해보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반대로 구원의 은사를 인간의 영혼 안에 맺힌 성령의 열매로서 또한 인간의 영혼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형상의 결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신약 성서는 구원의 은사를 신적인 것,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믿음을 귀중한 믿음이라고 일컬어지며 온유함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값진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벧전 3:4; 벧후 1:1)
사도의 소망의 내용(빌립보서 3:9-14)
우리는 사도가 무엇을 배격하였나를 살펴 보았다. 이제 그가 붙잡고 집착하기로 결정하기로 무엇인지를 살펴 보자. 그는 주로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에 전념을 기울였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특색에 유념했다.
Ⅰ. 사도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의로써 마음에 모시었다. 그는 이것을 몇 가지 실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1.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리스도와 그의 의에만 관심을 쏟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의 주와 구세주가 된다면 이것으로 자신은 큰 승리자가 된 것으로 여겼다. 고로 그는 "내가 그를 얻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그는 경주자가 상을 얻으려는 것처럼 또한 항해사가 항구가 정착하는 것을 목적 삼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얻으려 하였다. 그 표현은 우리가 그를 위하여, 그리고 그를 좇아 노력할 필요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를 얻는 데 비하면 모든 것을 하찮은 것이라는 의미이다.2. 그가 "그의 안에서 발견되고자 하였다"(9절). 이 말은 살인자가 피의 보수자로부터 안전한(민 35:25) 도피성에 정착하듯이 그리스도 안에 정착되고 싶다는 내용의 표현이다. 또는 여기서 발견된다함은 법정에 서게 됨을 나타낸 말로써 우리의 재판관이신 주님 앞에 부끄러움없이 우리가 발견됨을 말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벧후 3:14).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그리스도의) 의가 없으면 멸망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를 위해 마련된 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의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그리고 진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 이외에 그 누구도 이 의에 의해 혜택을 얻지 못한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다. 표면적인 율법 준수와 선행들이 나의 악한 것들을 대속할 수 있다거나 혹은 선행으로 악을 누름으로 내가 하나님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생각지 말라. 오히려 내가 의지하는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율법적인 의가 아니라 복음적인 의이다.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는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또 지정해 주신 의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시는 주님이시다(사 45:24; 렘 23:6). 만일 그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우리의 의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섭리는 그의 고난에 상당한 가치와 공로를 부여하여 그 고통이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에 충족한 것으로 간주하셨고 또 그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유효한 의로써 삼으신 것이다. 믿음은 그의 피로 값을 주고 산 모든 것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또 구원의 은혜에 우리로 동참하게 하는 정해진 수단이다. 이 구원은 그의 "피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롬 3:25) 주어지는 것이다.
3. 그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였다(10절).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라고 말하였다. 이사야서에서 믿음은 지식이라고 불리워졌다(사 53:11). 따라서 여기서 그를 아는 것은 곧 그것은 그들을 변화시키는 능력과 덕은 느낌으로써 오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는 그가 의롭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화된 것을 자랑으로 알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덕택으로 의롭게 된 사실 뿐만 아니라 그의 안에서 죄를 죽이고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일으킨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알기를 열망했다.
4. 그가 그에게 순응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그의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 같이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을 때 그의 죽음에 순응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 때 육과 육에 대한 애착은 극복되어지며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하여 세상이 우리에게 대해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며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 이것이 그의 죽음에 자신을 순응시키는 것이다.
Ⅱ. 사도는 자기의 마음을 하늘에 두고 있음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겼다. 이러한 심정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11절)는 그의 말 가운데서 나타난다.
1. 하늘에서의 행복은 본문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라고 불리운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믿는 자들의 영혼이 세상을 떠날 때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최후의 날에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까지는 그들의 행복은 완성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Ana.stsij(부활)은 때때로 장래의 상태를 의미한다. 사도는 바로 이 부활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는 이 부활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때에는 불의한 자들도 부활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활하여 피하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이 기쁘고 영광스런 부활은 katV evxoch/|n-즉 권능에 의지한 부활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의 머리요 첫 열매로써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악한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그들에 대한 심판의 능력에 의해서만 부활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부활은 축복과 생명과 영광으로 환원되는 부활이 될 것이다. 반면에 악한 자들의 부활은 무덤에서는 부활하는 것이 되겠지만 그러나 그 부활은 두 번째의 사망을 위한 부활인 뿐이다. 반면 성도들의 부활은 "의로운 자들의 부활" 또는 "생명의 부활"이라고 불리운다(요 5:29). 그리고 이들 성도들은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로 간주된다(눅 20:35).2. 이 기쁜 부활을 향하여 사도는 전진하였다. 이 부활은 얻기 위하여 무슨 일이고 기꺼이 행하려 하였고 또 고통이라도 달게 받고자 하였다. 이 부활의 희망과 그것에 대한 기대가 그가 자기 사명을 수행하면서 만난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에게 많은 용기와 인내심을 부여해 주었다. 그는 마치 그들이 부활을 잃게 되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게 될 위험에 처한 것처럼 두려움으로 말한다. 부활에 미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로 인내하게 해 주는 최선의 방책이 된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으려는 데 있었다. 바울은 자신의 공로와 의를 통하여 그것에 이르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기 위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관심이 있는 자로 발견되려고 하노라"고 하였다. 다음사실을 명심하자.
(1) 그는 자신을 불완전과 시련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12절)고 말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현재의 그들 자신의 상태가 불완전함을 솔직히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성취하지 못했고 이미 온전히 된 것도 아니다. 우리의 모든 의무와 은혜와 위안에는 아직도 많은 부족이 있다. 만일 바울이 온전함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였다면(그는 실상 고도의 거룩함에 이르러 있었다.) 우리는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다. 다시 그는 "형제들아 나는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13절). ou` logdmai,-즉 내가 현재의 입장을 돌이켜 볼 때 나는 자신을 그렇게 여길 수 밖에 없노라는 말이다. 자신은 충분한 은혜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바로 그러한 생각이 그들이 거의 은혜를 갖지 못하였거나 또는 전혀 갖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참된 은혜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보다 많은 은혜를 갈망하게 되며 또한 은혜의 완성을 향한 전진이 있기 때문이다.
(2) 이러한 확신에 따른 사도의 생활 태도. 그는 자신이 다 이루지도 않았고 온전히 붙잡지도 못하였음을 살펴 본 후에 한걸음 나아가 "나는 좇아가노라"(12절)고 하였다. diw,kw-즉 나는 경주하는 자처럼 과감하게 좇아간다. 나는 보다 많은 은혜를 얻으려고 그리고 보다 많은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결코 내가 충분한 것을 행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말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러므로 우리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됨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먼저 붙잡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붙잡으시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에게 붙잡히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이 되며 구원이 된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사랑한다"(요일 4:19)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붙잡은 것이 우리에게는 안전하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벧전 1:5).
[2] 하늘에서의 행복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것을 붙잡으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붙잡을 때 우리는 하늘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붙잡은 것은 우리의 온전한 축복을 성취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13절). "오직 한 일(이것이 그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다.)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 한다." 과거의 죄들과 과거의 긍휼은 지속적인 회개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현재의 은혜의 분량만으로는 만족치 않기 위하여 뒤에 있는 것들을 갖기를 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좇아갔다. "evpektei/no,menoj-즉 전진하였다로 그의 열렬한 관심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3) 사도의 "좇아 감의 목표." 이에 대하여 그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14절)고 하였다. 그는 푯대를 향하여 나갔다. 경주하는 자가 목표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빨리 앞으로 뛰어가는 것같이 하늘을 그들의 목표로 바라보는 자들은 거룩한 바람과 희망 그리고 꾸준한 노력과 준비로 그것을 향하여 전진해야 한다. 우리가 하늘에 보다 적절하게 되면 될 수록 우리는 더욱 빨리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하늘은 푯대라고 불려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궁수(弓手)가 자기가 맞히려고 하는 표적에 자기 눈을 고정시키는 것과 같다. 이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시이다. 그리스도인으로의 부름은 위로부터 부름임을 기억하자. 이 부름은 하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그 부름은 하늘을 지향한다. 하늘나라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다. "to brabei,on"은 우리가 위하여 싸워야 하고 달려야 하며 씨름해야 할 그러한 상을 말한다. 또한 이런 "상"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목표가 되어야 하며 또 우리의 당한 모든 고통에 대한 보상이 될 것이다. 하늘 나라를 목적으로 삼는 것은 기독자로서의 과정을 추구함에 있어서 대단히 힘이 된다. 이것은 모든 섬김을 감당하도록 우리에게 힘이 되며 우리를 깨우쳐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게 해 준다. 하늘나라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러기에 하나님에게 우리는 그 나라를 기대하는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롬 6:23). 그러나 영생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주어진다. 영생이 그에 의해 우리를 위해 확보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손을 통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와진다. 우리의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를 우리의 집으로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고와 권고(빌립보서 3:15,16)
사도는 실례로 자신의 입장에 대하여 말한 후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기의 본을 따를 것을 촉구한다. 축복된 바울이 품은 것과 같은 마음을 우리 안에서 품도록 하자. 우리는 본문에서 그가 어떠한 마음을 품었는지를 보았다. 우리도 그와 같은 마음을 품자. 그리하여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에 우리의 마음을 두자.
1. 그는 그리스도를 가장 귀중한 분으로 삼고 그들의 마음을 저 세상에 두는 것이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일치하여 추구해야 할 일임을 제시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여러 사실들에 대하여 그들의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금생이나 내생에 있어서의 우리의 행복이 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입장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동일한 법칙을 따라 살며 같은 일을 생각하도록 하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로 우리의 전부를 삼으려 한다면 "우리에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어야만 한다." 우리 다같이 합심하여 푯대를 향하여 나가자. 그리고 하늘 나라를 우리의 목표로 삼자.2.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소한 견해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서로 관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된 문제에는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즉 너희가 먹는 것과 날들에 대해서 또한 유대의 율법의 여러 가지 사실들에 대해서 견해에 차이가 있고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너희가 서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너희 모두가 그리스도를 구심점으로 하여 만나며 머지않아 너의 집으로써 하늘 나라에서 너희가 만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소한 견해 차이에 대하여서는 그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이것까지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서로 입장을 달리 취하는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든지 너희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보다 좋은 이해를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때가되면 하나님이 그것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오히려 그 동안에 너희가 할 수 있는 한 너희는 함께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며 너희가 일치하고 있는 모든 위대한 목표를 향해 힘을 합해야 한다." 그리고 너희가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깨달음이 주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자신의 본을 따르라는 사도의 강권(빌립보서 3:17-21)
그는 본장을 경고와 권고로 끝맺는다.
Ⅰ.그는 그들에게 유혹자들과 악한 교사들이 본을 따르는 것에 의하여 경고한다. (18,19절). 그러므로 그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말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 같으나 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 노릇을 하며 십자가의 목적과 의도에 대적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그들이 어떠하냐 하는 것은 그들의 가식적인 고백에 의해서 보다는 그들의 행함에 의하여 잘 드러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은 알 수 있는 것이다"(마 7:20). 사도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회중들에게 경고한다.(1) 그는 매우 자주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내가 너희에게 자주 말했다"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경고들에 대하여 너무 부주의하기 때문에 반복해서 경고를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같은 말들을 쓰는 것이 안전하다"(1절)고 하였다.
(2) 또한 그는 정적으로 또 사랑에 넘치는 어조로 그들을 경고한다. 그는 "내가 이제도 눈물로써 말한다"고 본문에 술회하였다.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는 예언자였던 것처럼 바울도 상황에 따라 눈물을 잘 흘리는 설교자였다. 똑 같은 주제의 설교자라도 새로운 정열을 가지고 설교해야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는 전에 자주 말하였던 것을 되풀이해서 말해야 한다. 그러나 열정을 가지고 말해야 하며 설교의 능력에 사로잡혀야 한다.
2.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인 자들의 특징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1) 그들은 그들의 배로 자기의 하나님을 삼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의 육욕적인 욕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다. 감각적인 욕망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우상이요, 모든 사람들에게 거침돌 노릇을 한다. 이러한 감각적인 욕망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의 은총과 그들의 양심의 평화와 하늘 나라에서의 영원한 행복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탐식과 술취함에 대한 욕망은 그들로 그들의 배를 신으로 삼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배를 즐겁게 하게 것과 그리고 배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이다. 선한 회중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정성을 향락주의자들은 그들의 욕망에게 바친다.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그는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긴다"(롬 16:18)고 말하였다.
(2) 그들은 그들의 부끄러움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들은 죄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랑한다. 그리고 마땅히 그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죄는 죄인들에게 수치가 된다. 특히 그 죄를 영광으로 여길 때 그것은 그들의 치욕거리가 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흠과 책망이 되는 것을 오히려 높이 평가한다.
(3) 그들은 땅의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대하여 세상을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의 일들을 생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고 그것의 큰 목적에 직접적으로 대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땅의 일들을 좋아하고 영적이고 천상적인 일들에 대하여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땅의 일들에 그들의 마음과 사랑을 쏟는다. 그들은 그것들을 사랑하고 심지어 그것들에 빠져서 그것들을 신뢰하고 거기서 자기 만족을 갖는다. 그는 이러한 특징을 그들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것의 본을 따르며 그들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로 그러한 행위를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는 그들의 파멸의 운명을 우리에게 제시해 보여 준다.
(4) 그들의 종말은 파멸이다. 그들의 세상에서의 삶은 즐거운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 마지막에는 죽음과 지옥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롬 6:21)고 말씀되어 있다. 비록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시대에 영합하는 삶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따르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들의 길을 선택한다면 또한 그들이 당할 종말도 각오해야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유대 국가의 완전한 파멸을 말하려고 한 것으로 여겨진다.
Ⅱ. 그는 이러한 악한 본에 반대하여 자신과 그의 형제들을 한 본으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그는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그리고 여러분이 우리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듯이 그렇게 행하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라"(17절)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을 너희의 본으로 삼으라"고 한다. 그는 그들로 그리스도와 하늘 나라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예로써 설명한다. 그들이 하늘 나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20절).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일지라도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들의 poli,te.uma-즉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그가 말한 것은 세상과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리고서 예루살렘의 시민들이라는 뜻의 말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빚이 아니고 저 세상의 우리 집이다. 그 나라에 우리가 부여 받은 최대의 특권이 있으며 또 우리의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민권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의 삶도 그것에 준한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저 세상과 관련을 맺고 있으므로 또한 그 세상과 계속 교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을 목적으로 한다. 그는 그곳에 그의 마음을 두어야 하며 그 곳을 그의 집으로 여겨야 하며 곧 거기에 있을 수 있기 위하여 그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는 위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그 곳에 둘 때 그의 시민권도 다른 사역자들을 따르도록 촉구 하였다. 그들이 "왜 당신의 유명하지도 않고 세상에서 아무 권리도 행세하지 못하는 가난하고 멸시 받으며 박해받는 사람의 동무가 되고 있는가? 그래 가지고 누가 당신을 따르겠는가?"라고 말 할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자랑으로 여길 것은 저 세상에 대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모습처럼 미천한 것도 멸시받는 것도 아닌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와 친교를 갖는 자들과 그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1.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 나라로부터 구세주를 바라기 때문이다(20절). 그러므로 그는 "거기로써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으며 그는 위로 올라갔으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우리는 거리로부터 그가 재림하셔서 그 새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들을 자기에게로 불러 모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2.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우리는 거기에서 행복되고 즐겁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민권을 하늘에 둘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거기에 있을 뿐만 아니라 머지 않아 우리도 거기에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과의 몸의 형제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였다(21절). 성도들의 몸을 위하여 영광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이 부활때에 받게 될 것이다. 현재의 몸은 최대로 "낮은 몸" to. sw/math/j tapenw,sewj h/mw/n-즉 비천한 몸에 처하여 있도다. 몸은 땅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땅의 소산에 의해 지탱되며 그리고 많은 질병에 예속되어 있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게 된다. 게다가 몸은 자주 많은 죄의 기회와 도구 노릇을 한다. 그러므로 이 몸은 "이 사망의 몸"이라고 불리워진다(롬 7:24). 혹은 본문의 "낮은 몸"이라 함은 그것이 무덤에 있는 상태를 묘사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부활 때에 그것은 수치스러운 몸으로 발견될 것이며 썩어 진토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간다"(전 12:7)고 하였다. 그러나 성도들의 이 "낮은 몸"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될 것이다. 다시 생명으로 부활할 뿐만 아니라 부활하여 큰 특권을 얻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의 영광을 입으신 몸이 우리의 변화의 산 증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가 산 위에서 변화되셨을 때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마 17:2). 또한 그는 우리를 위해 하늘 나라의 기업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하늘로 가셨다. 또한 그가 육신을 입으시고 하늘 나라로 간 것은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난 자"가 되기 위해서이실 뿐만 아니라 "부활의 자녀들 가운데 처음 난 자"가 되시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이로써 그가 많은 형제 중에서 받아들이게 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롬 8:29).
(2) 또한 이 변화를 일으킨 힘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본문에 보면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라고 하였다. 그에게는 능력있는 힘 곧 "지극히 크신 능력과 강력한 힘의 역사하심"이 있으시다(엡 1:19). 그가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시킬 수 있었고 그리고 조만간에 만물을 그의 권한 아래 장악하시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리고 이 힘에 의해서 부활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일으키리라"(요 6:44)고 하였다. 이제 우리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튼튼하게 갖자. 그 이유는 우리에게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성서가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부활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마 22:29).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능력의 영화로운 실례이며 그러므로 그에 대하여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 1:3)고 선포되었듯이 또한 우리의 부활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구원자의 왕국의 모든 원수들은 완전히 정복될 것이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히 2:14) 뿐만 아니라 "맨 나중에 멸망받은 원수 즉 사망까지"(고전 15:26) "이김의 삼킨 바 될 것이다"(고전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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