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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도적 축복(빌립보서 1:1,2)

우리는 여기서 헌정사와 축복을 보게 된다.

Ⅰ. 본 서신을 기록한 사람들 . 그들은 "바울과 디모데"였다. 바울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 할지라도 자신의 겸비를 나타내고 그리고 디모데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그는 디모데와 연명으로 인사를 한다. 나이 들고, 강건하며 그리고 뛰어난 사람들은 연소하고, 약하고 그리고 명성이 적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명성을 높여 주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했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라는 공통된 관계를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역의 특수한 일, 사도와 복음 전도자의 높은 직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장 위대한 사도 그리고 가장 뛰어난 사역자들의 가장 높은 명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되는 것임을 기억하자. 즉 교회들의 주인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들이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Ⅱ. 서신을 받는 사람들

1. "그리스도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역주: 본문 한글 개역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로 되어 있음). 그는 교회를 사역자들보다 앞서서 언급한다. 이것은 사역자들이 교회를 위하여 즉 그들의 건덕과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교회가 사역자들을 위하여 즉 그들의 존귀와 지배와 부(富)를 위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한다"(고후 1:24)는 말씀을 그는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들일 뿐 아니라 그를 위한 교회의 종들이다. 고로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되었다"(고후 4:5 하)고 그는 말씀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성도들이라고 불려진다. 즉 그들은 가시적인 신앙 고백 혹은 실제적인 거룩함에 의해서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자 혹은 그의 영에 의해서 성별된 자라고 불리워진다. 그리고 실제로 지상에서 성도가 아닌 자들을 결코 하늘에서도 성도가 되지 못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점을 또 기억해야 한다. 이 서신이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어졌다는 사실이다. 즉 다른 사람들 곧 심지어 가장 처한 자들, 가장 가난한 자들 그리고 가장 적은 은사를 가진 자들에게도 보내진다. 그리스도는 차별하지 않는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가 그의 안에서 만난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그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에서 차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 된다"(약 2:1).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므로 혹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므로 성도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없이는 가장 훌륭한 성도도 죄인들로 드러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2. 사역자들 혹은 교회 직원들 - 감독자들과 집사들 - 에게 보내어졌다. 우선 감독들 혹은 장로들의 직분은 가르치고 다스리는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집의 외적인 일 즉 장소, 시설, 사역자들의 부양,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공급하는 일을 돌보는 것이었다. 이 직책들이 당시 교회에서 알려졌고 그리고 신성하게 임명된 직분들의 전부였다. 기독 교회에서 알려졌고 그리고 신성하게 임명된 직분들의 전부였다. 집사직만을 인정한다[하몬드(Hammond) 박사와 다른 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신약을 통하여 어디서나 감독들과 장로들에게로 본문의 감독과 집사의 경우와 동일한 성격과 명칭들, 동일한 자격, 동일한 직분의 활동, 그리고 동일한 명예와 존경이 돌려졌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감독과 장로란 명칭을 전혀 별개의 임무를 말하는 것으로 여긴다든가 혹은 다른 직책에 속한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Ⅲ. 다음에 사도의 축복이 나온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절). 이 인사말로 모든 서신마다 거의 단어 하나 틀림없이 같음을 보게 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형식에 매이지는 말아야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형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특히 성서에 있지 않은 형식일지라도 말이다. 구약에서의 유일한 변함없는 형식은 축복의 형식이다(민 6:23-26). 즉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지키실지어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어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실지어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의 빛을 들어 네게 평강을 주실지어다"라는 형식이다. 신약에도 그와 같이 변함없이 요구되는 축복의 형식이 있는데 이것은 영적인 선 즉 "은혜와 평강"이다. 즉 하나님이 그저 주시는 은혜와 선하신 뜻 그리고 그 은혜의 결과로 이루어진 모든 축복된 열매와 결과들이다. 그것은 모두 비록 방법은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로부터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고 이들 둘에서 공동으로 오게 된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은혜가 없이는 평화도 없다는 사실이다. 내적인 평화는 하나님의 은총을 의식하는데 나온다.

2. 모든 축복의 시초이며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이외에 다른 은혜와 평화는 없다는 사실이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약 1:17)

3.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부터 직접 오는 은혜와 평화는 없고 그것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온다는 사실이다.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교회에 전하며 주는 통로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그의 모든 족속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1:2 없음.

 

1:3

사도의 감사와 기쁨(빌립보서 1:3-6)

사도는 헌정(獻呈)과 축복 다음에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감사를 말한다. 그가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말한다. 본문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Ⅰ. 바울은 그들을 기억했다. 그는 오랫 동안 그들을 생각에 두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보이지 않고 그가 그들에게서 멀리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evpi. pa,sh| th/| mnei,a u,mw/n-즉 너희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라고 본문에 쓰고 있다. 그가 그들을 자주 생각했던 것처럼 또한 그들에 대하여 자주 말하였고 그리고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에게는 기쁨이었다. 함께 있지 못하는 친구의 안부를 듣는 것은 바로 하나의 기쁨인 것이다.

Ⅱ. 그는 기쁨으로 그들을 기억했다. 빌립보에서 그는 학대를 받았었다. 거기에서 그는 채찍질을 당하고 착고에 채워져서 그는 당장은 자기의 수고의 결실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즐거이 빌립보를 기억한다. 그는 자기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그의 명예, 상급, 그리고 위안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자기가 고난 받았던 곳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기뻐했다. 그는 그들을 부끄러이 여기거나 또는 그의 고난의 순간에 대하여 듣기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실들을 기쁨으로 기억했다.

Ⅲ. 그는 기도를 통하여 그들을 기억했다. 그러므로 "너희 모두를 위하여 내가 기도할 때마다 언제든지"(4절).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 친구들에 대한 최상의 추억은 은혜의 보좌에서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바울은 오랫 동안 자기 벗들을 위하여 특히 그의 모든 벗들 중에서도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하였다. 그는 은혜의 보좌에서 그에게 관심이 있고 관계있는 여러 교회들을 특별히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가면서 언급했던 것 같다. 그는 빌립보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정해 놓고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때에도 그는 우리가 누구에 대해 기도하는지를 아시지만 그래도 그는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기를 더 바라신다.

Ⅳ. 그는 그들과의 아름다웠던 일을 기억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즉 감사는 모든 기도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뻐하는 사실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우리의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 그는 간구할 때 기쁨으로 간구했던 것처럼 또한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거룩한 기쁨은 감사의 찬양의 핵심이요 감사 찬양은 거룩한 기쁨에 대한 표현이다.

Ⅴ. 우리의 기도에서와 같이 우리의 감사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으로" 여겨야 한다. 그러기에 바울도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3절)고 하였다. 우리는 다름 사람들에게 주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에 대하여 또한 은사와 유익한 것들을 베풀어 주신데 대하여 우리가 그것들을 받았을 때처럼 감사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감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면 바울의 감사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그는 그가 그들 안에서 가진 위로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므로 그는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5절)고 한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복음의 교제는 아름다운 교제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미천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복음 안에서 가장 훌륭한 사도들과 교제하게 된다. 왜냐하면 복음의 구원은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며(유다서 3절) 그리고 미천한 자들도 사도들과 함께 "귀중한 구원을 얻었기"(벧후 1:1) 때문이다. 복음을 진지하게 받고 명심하는 자들은 "처음부터" 복음 안에서 친교를 갖는다. 풍성한 그리스도인은 만일 그가 참으로 태어나기만 했다면 그가 중생한 첫 날부터 모든 복음의 약속과 특권들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시작을 잘 한 자들이 시작할 때의 붙잡은 것을 잘 붙잡고 계속 간직할 때 사역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점이다. "복음 안에서의 그들의 교제"라는 본문을 어떤 이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데 대한 그들의 열심히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코이노니아(ko`i,nwnia)를 "친교"(Communion)로 번역하지 않고 "전달"(Communication)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본문을 다른 교회들에 대한 바울의 감사와 비교할 때 본문은 그들이 믿음과 소망과 거룩한 사랑 안에서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가졌던 친교를 말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즉 그들이 복음의 약속, 의식, 특권, 그리고 소망들 안에서의 친교를 나누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교제는 "첫날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것 이었다.

2. 그가 그들에 대하여 가졌던 확신에 대하여 감사한다(6절). 고로 본문에 "바로 이 일에 대하여 확신함으로"라고 말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인이 지닌 확신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대한 위안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 데 대하여 찬양할 뿐만 아니라 소망을 주신 데 대해서도 찬양해야 한다. 현재에 주어진 소유와 확신에 대해서는 물론 우리가 장래에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한다. 바울은 큰 확신을 가지고 타인들이 받을 훌륭한 기업에 관하여 말하며 그리고 그들이 심판날에 자비를 입을 것임을 확신을 갖고 소망한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신실하기만 하면 그들은 축복의 생활을 한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는 u[mi,i.nevn-즉 너희 가운데 시작된 선행이란 일반적으로 그들 가운데 교회가 설립된 사실로써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 교회를 세운신 그분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또한 그것을 보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가 성취되고 그 신비한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교회는 존속할 것이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지고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 16:18)." 그러나 교회가 세워질 반석을 선택된 인물들에게만 적용되며 또한 어디서 교회가 시작되든지 그곳에서는 어디서나 은혜의 역사가 성취되고 있음에 대해 말하여질 것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은혜의 사업은 선한 사업 즉 축복받은 사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선하게 만들고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선(善)의 징조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같이 만들고 그리고 우리들 하나님의 기쁨에 합당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에게 최대의 선(善)을 이루어 놓는 선한 사업이라고 불려질 수 있다.

(2) 이 선한 사업은 어디서 시작되든 그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신다는 사실이다. 고로 "그가 너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6절)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 그것을 시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악행과 죄 가운데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대체 죽은 자들이 어떻게 스스로 생명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결국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이다(엡 2:1; 골 2:13)

(3) 은혜의 사업은 이 세상에서만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완성되는 곳은 여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한 장래에 이루어져야 할 보다 많은 것들이 있는 것이다.

(4) 만일 선한 사업을 시작하신 그 하나님이 그 일을 수행하시고 종결하시는 일을 맡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영원히 불완전채로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일은 시작하신 바로 그분이 그 일을 또한 완성하셔야만 하는 것이다.

(5)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가 시작하신 일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가 그의 손의 일을 종결하고 영화롭게 하실 것을 확신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사업을 완전하게 성취시키는 분이기 때문이다."

(6) 그 은혜의 사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날" 즉 그의 나타나시는 날까지 결코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세상을 심판하려 오셔서 그의 증보를 마치실 ? 이 사업은 완성될 것이고 그리고 머릿돌 되시는 주님의 통치가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10절에서도 대하게 된다.

 

1:4 없음.

 

1:5 없음.

 

1:6 없음.

 

1:7

사도의 사랑과 소망(1)(빌립보서 1:7,8)

사도는 그들에 대하여 가졌던 열려한 사랑과 그리고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다. 고로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7절)고 말한다. 그는 그들을 자신의 영혼과 같이 사랑했고 그리고 그들은 늘 그의 마음에 가까이 있었다. 그는 그들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그리고 그들을 염려했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그가 자기 마음에 그들을 늘 생각한 이유. 그 이유는 본문에 의하면 "이러므로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니라"(7절)는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그들이 그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사역에 의해서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참예자들이 되었다. 이것은 그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손을 통하여 그들에게 전달되어진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을 그들의 사역자들에게 귀중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또는 본문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너희가 나의 은혜의 참여한 자니라. 즉 너희가 나와 함께 나의 수고와 고난에 동참하였느니라." 즉 그의 수고와 고난에 동참하였기 ?문이라고도 하겠다. 그들은 동정과 관심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 도우려는 자발적인 마음으로 그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었다. 이것을 가리켜 그는 그의 은혜에 함께 참예한 자들이었다. 이것을 가리켜 그는 그의 은혜에 함께 참예한 자들이라고만 한다. 왜냐하면 성자들과 함께 고난받는 자들은 그들과 함께 현재에 위안을 받으며 그리고 장래에도 위로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짐을 함께 하는 자들은 그 상도 함께 받게 될 것이기 ?문이다. 그들은 그가 매인 바 된 때에도 그를 따랐고 또한 그가 "복음을 변명함과 확증함에" 있어서 그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가 그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그들의 선 위치에서 그리고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사도가 복음을 변명한 것같이 자기들도 복음에 대하여 변명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마음 속에 그들을 간직했다. 함께 고난받은 동료들은 서로에게 귀중하다. 하나님과 신앙이라는 동일한 선은 동료들을 서로에게 귀중하다. 하나님과 신앙이라는 동일한 선한 이유로 위험을 무릅쓰고 고난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더욱 서로 매우 사랑한다. 또는 그가 그들을 마음에 둔 것은 di,a to. e;ceinme evn th|/kardi,a| u`ma,j-즉 너희가 나를 마음에 두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들은 그에 대한 자기들의 존경을 그가 전한 교의를 확고하게 지지함으로써 나타내었고 그리고 기꺼이 그와 함께 그것을 위하여 고난을 받았다. 우리의 사역자들에 대한 가장 참된 존경의 표시는 그들이 전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의하여 사는 것이다.

2. 그가 그들을 마음에 기억하였다는 증거. 이 사실은 본문의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은 너희가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7절)는 말씀에서 나타난다. 즉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에 둔 것은 그가 그들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였고 그리고 그들에 관하여 선한 소망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나타났다. 다음의 사실들은 명심하자. 할 수 있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최선을 다하여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정이 허용하는 한 그들을 좋게 보려고 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3. 자신의 말의 진실됨을 사도가 하나님을 들어 호소함(8절). 고로 본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고 그는 말한다. 그들의 그이 심중에 간직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들을 사모하였다. 사모하였다는 말은 그가 그들을 보기를 열망하며 그들에게서 소식듣기를 열망하였다는 뜻으로 한 말이든지 혹은 그가 그들의 영적인 뜻의 말씀이든지 일 것이다. 그는 "그들로 기쁨을 가졌다"(4절). 그 이유는 그가 그들 가운데서 보고 들은 선한 일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그들 가운데 있는 선한 일에 대한 보다 많은 것을 듣기 위하여 그들을 사모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 모두를 사모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그들 가운데 재치있고 부요한 자들뿐만 아니라 가장 미천하고 가난한 자들까지 사모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대단히 사모하였다"고 하였다. 다른 말로 강렬한 애정과 큰 선한 뜻을 가지고 그들을 사모하였다. 그러므로 사모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였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지니셨고 또 고귀한 영혼들에게 나타내 보였던 그 부끄러운 관심으로 그들은 사모하였다. 이 같이 무슨 일에서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추종자였다. 따라서 모든 선한 사역사들도 그렇게 되기를 목적해야 한다. 가난한 영혼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연민의 심정이 어떠하였던가! 그들은 구원을 담당하시고 그것을 달성하고자 너무나 큰 희생을 당하신 것은 그들에 대하여 연민을 가졌고 그리고 그들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였다. 그리스도가 그런 사랑과 연민으로 대하였던 그 영혼들을 우리도 사랑하고 동정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 사실을 그는 하나님을 들어 증거한다. 고로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다"고 말하였다. 그의 내적인 마음은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라는 뜻으로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들어 호소하였다. "너희야 그것을 알든 모르든 혹은 그것을 인식하든 못하든 하나님의 내심중을 아시리라"는 말이다.

 

1:8 없음.

 

1:9

사도의 사랑과 소망(2)(빌립보서 1:9-11)

이 구절들은 그가 그들은 위하여 올린 기도문을 담고 있다. 바울은 자주 그의 벗들로 하여금 그가 그들은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리려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스스로 무엇을 간구할지를 알게 되며 그리고 그들 자신의 기도에서 방향을 얻게 되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활기 있고, 강하게 하고, 영원하며, 위로가 되는 은혜를 받는다는 희망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들에게 있어지기를 바울과 같은 매우 강력한 중재자가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이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그의 기도가 상납된다고 여길 수 있는 우리의 벗들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격려가 된다. 또한 본문의 말씀은 그들의 가던 길을 계속 가게하며 또 그들도 그들을 위한 그의 기도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게 하려는 의도도 포함된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본문에 의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음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는 그들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을 기대했었다. 본문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하도록 하는 하나의 자극이 된 바 우리가 의무를 다해야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벗들과 교역자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1. 그들은 사랑스런 사람들이 되며 그리고 사랑이 그들 가운데 풍성하게 될 것을 기도했다.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라고 그는 말한다. 그가 말한 사람은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리고 서로에 대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사랑은 불법과 복음 성취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은혜가 풍성한 자들은 더욱 더 풍성해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그래도 결핍된 무엇이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우리가 최선의 것을 이루었다고 하여도 거기에는 불완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지식과 총명이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즉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하게 되기를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식과 총명에 근거한 사랑이다. 우리는 그의 무한한 뛰어남과 사랑스러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의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정확한 판단력이 없는 강렬한 정열은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행하지 못하게 하며 오히려 선보다 해를 입힐 때가 많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가졌으나 그 사랑이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으므로 그 열정은 폭력과 광분으로 변모되고 말았던 것이다(롬 10:2; 요 16:2).

3. 그들이 분별력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위해 기도했다. 분별력은 지식과 총명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본문에서 그는 "너희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사"(10절)라고 기도한다. 혹은 난외주에는 지극히 선한 것이 다른 것과 eivj to. dokima,zein jma.j ta, diare,ronua-즉 차이 있음을 분별하여라고 하였다. 즉 "우리가 지극히 선한 것들을 시험하여 그 우수성을 입증하고 다른 것과 그것들이 차이점을 식별하며"라는 내용의 말씀이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의 진리들과 율법들은 지극히 선한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들을 분별하고 그것들은 선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는 그들을 분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시험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그 선한 것들은 탐구적이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쉽게 식별이 될 것이다.

4. 그들은 정직하고 곧은 심정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므로 본문에 "진실하여"라고 그가 간구함을 보게 된다. 신실성은 우리의 복음의 완성이다. 우리는 세상과 대화를 나눌 때 이 성실성을 갖고 임해야 하며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은총중에 가장 존귀한 은혜이다. 우리의 목적이 흔들리지 않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일을 행하며 우리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나타내고 정직하게 살면 우리는 신실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5. 그들이 범죄치 않는 사람들이 되기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허물이 없이 이르고"라고 기도한다. 즉 범죄적 성향이 발동되지 않기를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은 혹은 그들의 형제들을 격분케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될 것을 위해 기도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으로 그들은 살게 하기 위함이며"(행 28:1),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게 하려 해서였다"(행 24:16),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까지 흠없이 계속 살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날"에 부끄러움 없이 나타나게 될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는 교회가 "티와 주름이 없이" 나타나기를 바라시며(엡 5:27), 그리고 현재의 믿는 자들도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겁게 서게 되기를 바라신다"(유24절)

6. 그들이 열매있는 유익한 사람들이 되기를 위해 기도한다(11절).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의의 열매로 가득하기를"위해 기도한다. 우리의 열매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그것을 요구되어야 한다. "의의 열매들은" 우리의 거룩하여짐의 증거이며 결과들이다. 그리고 거룩해지기 위한 의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열매로 "가득하여"지기를 간구했다. 다음 사실들은 명심하자.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보다 많은 선을 행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의 교회의 양육을 위하여 생겨진 의의 열매들로 우리는 질적으로 채워져야 하고 그리고 우리가 그 속에 완전히 삼킨 바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의의 열매를 맺음으로 자신은 텅비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지 말자. 왜냐하면 의의 열매들도 우리가 채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열매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그의 힘과 은혜에 의해서 맺혀진다. 왜냐하면 "그가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참 감람나무의 뿌리이시다. 나무는 그 뿌리로부터 양분을 공급받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하게 되며"(딤후 2:1) 그리고 "그의 성령에 의하여 강건하게 된다"(엡 3:16). 그리고 이 열매들은 우리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열매 맺음에서 우리 자신의 영광을 목적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을 목적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만물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벧전 4:11). 또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전 10:31). 그리스도인이 선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고 또 선한 일에 풍성할 때 하나님께서 많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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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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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사랑과 기쁨(빌립보서 1:12-20)

우리는 여기서 사도가 그들이 그가 당하는 고난으로 인하여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당시 로마에서 구속된 죄수였다. 이 사실은 그의 사역에 의해서 복음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려는 유혹도 받을 수 있었다. 즉 만일 이 가르침이 하나님께 실제로 속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전파하고 전도하는데 그렇게 활동적이고 유익한 자를 마치 멸시받은 깨어진 그릇과 같이 내어 던져져서 고난을 받게 하지는 않으시지 않겠느냐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은 동일한 어려움에 처하지 않으려 하여 그들이 이 가르침을 갖게 된 사실을 후회스럽게 여길 수도 있었다. 이제 이 십자가로 인한 저희의 범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는 이 어둡고 힘든 그의 고난에 대한 상황을 해석하여 이 고난이 그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과 조화됨을 그들에게 알리며 또한 매우 쉽고 이해가 가능한 일이라고 그들에게 제시한다.

Ⅰ. 그는 복음을 대적하고자 시원한 원수들에게 고난을 받았다. 그들은 그를 감옥에 넣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복음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고난은 오히려 선한 결과를 낳고 또한 그것이 복음의 성자에 기여했기 때문이었다(12절). 그러므로 그는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말한다. 복음의 확대와 같이 너무나 큰 선(善)을 사도의 구속이라는 너무나 큰 악(惡)에서 이끌어내신 이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놀라운 역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그는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였다(딤후 2:9).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둘 수가 없다. 비록 내가 구속된다 할지라도 복음은 자유로운 행로(行路)로 나간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면 그가 당한 고난은 어떠한 효과가 있었는가?

1. 그것은 복음밖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13절).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 황제와 대신들과 집정관들은 내가 죄인으로서 고난을 받지 않고 선한 양심을 가진 정직한 사람으로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며 그리고 어떤 비행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라고 말한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1) 바울의 고난이 그를 궁전까지 알려지게 하였다는 점이다. 아마 다른 방법으로는 그가 결코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그들 중의 몇을 그가 위하여 고난받은 복음으로 풀어보게 하였다. 그들이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 결코 복음으로 들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2) 그의 구속됨이 궁전 안에서까지 알려졌기 때문에 이 일은 모든 곳에까지도 알려졌다는 사실이다. Regis ad exemplum totus compontur orbis-즉 궁전의 의견은 모든 사람의 의견에 큰 영향을 갖는 것이다.

2. 그것은 복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복돋우어 주었다. 그의 원수들이 그의 고난으로 놀랐으나 그의 벗들은 그의 고난에 의해서 용기를 얻었다. 이는 "정직자는 이를 인하여 놀라고 무죄자는 사곡(邪曲)한 자를 인하여 분을 내나니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篤實)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욥 17:8, 9)는 말씀과 같다. 여기서도 같은 말씀이 주어진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게 되었다"(14절). 일반적으로 신앙을 가짐으로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사람들을 낙담시키고 실망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투옥된 바울을 보았을 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과 그의 이름을 찬양하는 일에 대해 좌절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은 그들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이는 그들이 기꺼이 바울의 동반자로서 고난받을 수 있었음을 보아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강당에서 감옥으로 쫓겨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들은 그것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에서 좋은 동반자(바울)를 볼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바울이 그의 고난 중에 가졌던 위로는 고난의 상태에서 그리스도로부터 특별한 위로를 받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위로는 그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야 말로 참으로 훌륭한 주인을 섬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를 위하여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그들로 하여금 지탱하게 하셨고 또 지지해 주시는 것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pepoiqotaj-즉 나의 매임으로 인하여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본 것에 의해서 보다 완전히 만족하였고 확신하게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기억하도록 하자. 원수들의 복음 전파자들을 실망시키려던 의도가 오히려 반대로 전도자들에게 용기가 되었다. 또한 이로써 그들은 "두려움이 없이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그들은 복음으로 인한 최악의 사태까지 보았다. 그러므로 오히려 모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확신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리고 그들의 용기는 그들로 공포의 세력을 극복하게 해 주었다.

Ⅱ. 그는 적들에게는 물론 거짓 친구들로부터 고난을 받았다(15,16절). "어떤 사람은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 또 어떤 이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되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한다"는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이에게 거침돌과 그리고 실망이 될 것이다. 교회 안에 바울이 명성과 그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지닌 인기를 시기하여 그의 인기를 빼앗고 해치려던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떤 이들에게는 거침돌과 낙담의 계기가 되었었다. 이들 거짓 친구들은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남몰래 기뻐하였고 이 기회를 사람들의 바울에 대한 사랑을 제거할 보다 좋은 기회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바울을 그 때문에 시기한 그 명성을 얻기 위하여 자기들의 도를 전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한 줄로 생각하고 이렇게 하였다"(17절)고 말한다. 그들은 이로써 그의 영을 괴롭힌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로 하여금 그의 인기가 떨어질까 염려하게 하고 이 때문에 자신의 감금을 불안하게 여겨 석방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였다. 복음을 고백한다는 사람들이, 특히 그것을 전파하고 복음의 원리들에 근거하여 다스려짐을 받는다는 자들이 바울을 적대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리고 그의 매일의 괴로움을 증가시키기 위해 그들 전파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 당시도 이런 일이 있었으나 그 후 보다 타락된 교회의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것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생각지 말아야 하겠다. 그러나 바울의 고난에 의해서 보다 활기를 얻은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어떤 이는 착한 뜻과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한다"(15절)고 하였다. 복음에 대한 진실한 사랑으로 전파 할 사람들에게도 용기가 되었다. 일하는 자가 누워있는 동안에는 그 일이 서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이들은 "내가(바울)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복음을 전파했다(16절). 그들은 그가 지명된 것은 복음을 보존시키고 전파하기 위하여 임을 알았고 그리고 그가 복음이 그의 구속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받을까보아 염려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은 말씀을 전파하기에 더욱 담대하게 되었고 교회에 대한 섬김에서의 그의 부족을 메우게 되었다.

Ⅲ.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가 얼마나 태평하였는가를 보는 것은 매우 감격적이다. 그는 본문에서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절)고 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스도가 전파됨은 사람들 가운데 그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비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된다. 그리스도의 전파는 많은 사람의 선행에 기여함으로 비록 그것이 외모로 행하여지고 실제로 행하여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기뻐해야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의지하고 행동하는 원리들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역밖의 일이다. 바울이 구속되어 있는 동안, 그는 복음을 전파할 자유를 가진 자들을 시기하기는 커녕 기뻐하였고 더구나 외모로 하고 참으로 하지 않는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일까지 기뻐하였다. 그렇다면 비록 그것이 많은 약점과 약간의 실수를 수반한다 하더라도 복음 전파를 진심으로 사는 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더욱 기뻐해야 되지 않겠는가? 복음의 전파됨으로 사도가 기뻐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 복음 전파가 인간의 영혼 구원에 기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이것이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19절)라고 말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악에서도 선을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역자들이 자기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사역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의 사역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툼과 시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면 신실한 사역자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는 자들이 무슨 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또한 외모로 전파하고 참으로 전파하지 않는 자가 무슨 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럴지라도 그들의 전파가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기뻐한 것은 그들의 시기에 의한 복음 전파가 그의 구원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이것은 구원을 동반하는 일들 중의 하나다. 비록 그리스도에 대한 전파가 우리에게 손해를 주고 우리의 명성에 손실을 준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이로써 구원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 고상한 정신이 그가 최초로 그리스도를 공중에게 전파할 때 세례 요한에게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9, 30). 비록 내가 가리워진다 할지라도 그는 빛나야 한다. 그리고 나의 파멸이 온다할지라도 그의 영광은 높여져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원수들의 악의에 대한 바울의 이러한 넓은 이해가 그들을 패배하게 하였고 또 그들로 그를 구출하는데 기여하게 했다고 본다. 또한 시기어린 저들의 전파가 구원을 이루는 것은 "너희가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11절)라고 말한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무엇이든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령의 공급 혹은 도우심과 조력에 의해서라는 사실이다. 교인들이 기도는 그 공급을 내게로 오게 하는 지정된 수단이다. 교인들의 기도는 그들의 목회자들에게 성령의 공급원이 되며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데도 그들에게도 힘이 된다.

2. 복음의 전파는 그리스도에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20절). 20절에는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섬김에 대한 자신의 전적인 헌신을 말한다. 그러기에 그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명심하자.

(1)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큰 소망은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아서 그의 이름이 위대하게 되고 그리고 그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2)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게 되기를 참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그가 "자기들의 몸 안에서 존귀케 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롬 12:1). 그리고 "그들의 지체를 의의 병거로 하나님께 드린다"(롬 6:13). 그들은 그들의 영혼의 기능은 물론 그들의 몸의 모든 지체를 가지고 그의 계획에 기꺼이 봉사하며 그리고 그의 영광에 도구가 된다.

(3) 좌절됨이 없이, 마음의 자유와 해방을 가지고 우리가 그를 대담하게 봉사하고 그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단한 영광이 된다는 사실이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온전히 담대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노라"(20절). 그리스도인들의 담대함은 그리스도의 명예다.

(4)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그들의 바람과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은 또한 그것을 그들의 장래의 기대와 소망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것이 참으로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달성되어진 것이다. 만일 진실로 우리가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면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는 그리스도가 받으셨던 것과 같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게 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5) 그리스도가 그들의 몸에서 존귀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이 생을 누림으로 이루어지든 혹은 자기에 죽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든 문제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에게 어느 길이 그들이 그의 영광에 도움이 되게 하는 길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의 영광이 그들의 수고 혹은 고난에 의해서 이루어지든, 그들의 근면 혹은 인내에 의해서 이루어지든 살아서 그를 위하여 일하면서 그의 명예를 추구하는 것에 의해 또는 죽어서 그를 위해 고난을 받음으로 그를 영예롭게 함으로 이루어지든 어느 길이든지 개의치 않고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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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깊은 환희(1)(빌립보서 1:21-26)

우리는 여기서 축복받은 바울의 생사관에 대한 기록을 보게 된다. 그의 생명은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도 유익하게 여겼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그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확고한 특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의 법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 삶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서 그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요, 법칙이요 목적이다.

2. 그에게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모든 사람들을 죽는 것도 유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큰 유익으로 현재적인 유익이 되는 동시에 영원한 유익이 된다. 죽음은 육적이고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는 큰 손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그의 위로와 그의 모든 희망을 이로써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훌륭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것이 얻음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모든 연약함과 미천함의 마침이며 그의 위로와 그의 소망의 성취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를 모든 삶의 악(惡)으로부터 구출하며 그리고 그를 최고의 선을 소유하는 데까지 이끈다. 또는 "내게 죽는 것이 유익하다"는 말은 다음의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즉 "나 자신은 물론 복음이 내가 살아서 한 수고에 의하여 확고하게 되었듯이 이제 나의 피의 인침에 의하여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 존귀케 되자 하려 한다"(20절)고 하였다. 어떤 이는 "내게 있어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유익하게 되게 하려 함이라"는 전체의 말씀을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랜 살아야겠다든지 또는 내가 언제 죽고 싶다든지 바라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한다"는 말 뜻으로 해석한다. 혹 만일 죽음이 그에게 얻음이 된다면 그는 삶을 괴로워하고 죽음을 갈망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음을 말한다.

Ⅰ. "만일 내가 육신 안에 사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라면" 즉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하는 일이라면 살아야 할 것을 그는 말한다(22절). 만일 그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명예와 관심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도구가 될 수 있었다면 그는 마땅히 살아서 수고를 해야 된다고 보았다. 이것을 그는 karti,oj e;rgon, operea re-ptium-즉 보람있는 일(나의 일의 열매)로 여겼다. 선한 그리스도인과 선한 사역자는 그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고 그의 교회에 유익을 행하는 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내가 무엇을 가릴는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기 ?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바울이 느낀 것은 축복된 곤궁이었다. 그는 두 악한 일들 사이에서가 아니고 두 선한 일들 사이에서 고뇌를 느꼈다. 다윗은 세 가지 즉 칼과 기도와 염병 중에 하나를 택할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두 축복 즉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느냐 아니면 죽어 그와 함께 거할 것이냐"는 문제로 고민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사도 자신의 논리 추구를 보게 된다.

1. 그는 죽음을 동경했다. 신앙의 힘과 신성한 은혜의 힘을 보라. 그것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며 오히려 우리로 기꺼이 죽음에 임하게 한다. 비록 죽음이 현재 우리의 본질을 파괴하고 그리고 그것이 자연이 주는 최대의 재난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에게는 본능적으로 죽음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죽음을 오히려 동경하였다(23절). 고로 그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심정을 술회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1)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 때문에 착한 사람은 죽음을 바란다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죽는 것 혹은 몸을 떠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리고 죽음 자체 또한 죽음을 위한 죽음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죽음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없다면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죽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2) 영혼은 떠나자마자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한다"(고후 5:8)등의 말씀에서 죽음과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간격도 없음을 알게 된다. 바울은 povvllw/ ga.r ma/llon krei/ssun-즉 이것이 더욱 좋다(훨씬 더 좋은 매우 좋은 의 뜻)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와 하늘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 하늘에 있는 것, 즉 피조물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음을 인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죄로 둘러 싸여있고, 고통 가운데 태어나고 그리고 죽어서 다시 고통에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알게 된다면 영원히 죄와 유혹과 작별하고 슬픔과 죽음과도 작별하게 될 것이다.

2. 그러나 그의 이성적 판단의 결과는 교회의 봉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잠시 더 오래 사는 것이었다(24절).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역자들을 갖는 것은 교회를 위하여 필요하다. 그리고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을 때"(마 9:37) 신실한 사역자들이 줄어든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세상을 하직하기를 구할 만한 그럴 듯한 이유를 가진 사람들도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신 한에는 세상에서 계속 기꺼이 머물러야 한다. 바울에게 문제가 된 것은 이 세상에서 사느냐 하늘에서 사느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그에게 문제된 것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느냐 아니면 저 세상에서 그와 함께 즐길 것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언제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리스도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그가 반대와 어려움들에 직면되는 이 세상에 머물기를 오히려 택하고 그리고 상을 받음으로 와지는 만족은 잠시 동안 보류하였다. 그러므로 나아가서 그는,

Ⅱ.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안다"(25절)고 말한다.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에 큰 확신을 가졌다. 바울은 하나님께 그에게 가장 유리하도록 모든 것을 지시하신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가장 유리하도록 모든 것을 지시하신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육체 속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는 이 확신이 내게 있으므로 나는 내가 거할 것을 안다"고 말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를 위하여 최선의 것은 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것이 주어질 것을 믿어도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교회를 보살필 것이며 그리고 교회가 처한 그 상황에 따라서 전후 사정을 다 살피신 후 교회를 위해 최선의 길을 택하여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3. 사역자들이 무엇을 위하여 이 세상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진보와 기쁨" 즉 성결과 위안에 있어서의 우리의 진보를 위하여서이다.

4. 우리의 "신앙과 그리고 신앙의 기쁨"을 증진시키는 것은 우리로 하늘에 이르는 길을 열심히 가게 하기 위하여 매우 많다는 사실이다. 신앙이 많을수록 기쁨도 많다. 그리고 신앙과 기쁨이 많을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행로를 힘차게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5. 죄인들로 죄를 깨닫게 하며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 또 성도들의 양육과 영적 달성에 있어서 그들의 진보를 위해서 고정 사역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Ⅲ. 또한 그는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함이다"(26절)고 말한다. 그들은 그를 만날 것과 그리고 그들 중에서 그가 더욱 수고를 해 줄 것을 소망하고 기뻐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1. 사역자들의 교회에서 수고함이 교회가 잘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2. 우리의 모든 기쁨은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 선한 사역자들로 인한 우리의 기쁨은 그들을 위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우리의 기쁨의 결과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랑의 친구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를 위하여만 영접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2 없음.

 

1:23 없음.

 

1:2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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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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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깊은 환희(2)(빌립보서 1:27-30)

그 사도는 두 가지 권고로 본장을 결론 짓는다.

Ⅰ. 그는 절제있는 생활을 그들에게 권고한다(27절).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그렇게 생활하라"고 말한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는 자들은 그들의 생활을 바로 복음과 일치하도록 또는 복음의 합당하고 타당한 생활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복음의 진리를 믿고 복음의 법도에 순복하고 그리고 복음의 약속에 의존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되 응답받는 신앙과 성결과 위안을 가지고 그리하자. 모든 점에 있어서 인간 세계 가운데 있는 종들인 자들답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이 복음에 부합할 때 우리의 생활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돋보여 줄 것이다. 그는 또한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내가 너희 일(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그 일을 말함)을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비록 그가 지금은 죄수지만 그는 26절에서 그의 다시 올 것을 말했는데 그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로 그의 간다는 사실에 온갖 기대를 걸기를 원치 않았다. 우리의 신앙이 사역자들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본문은 이런 뜻이다. "내가 자든지 혹은 자지 않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만 나로 너희에 대하여 좋은 소식을 듣게 하도록 하고 너희는 굳게 서서 행하라." 사역자들이 오든 혹은 오지 않든 그리스도는 항상 옆에 계신다. 그는 우리와 결코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가까이 계시며 재림을 서두르고 계신다. 고로 "주의 강림이 가까우시다"(약 5:8)하였다. 또한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을"나로 듣게 하라(27절)고 말씀한다. 세 가지를 그는 그들에 대하여 듣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모두 복음과 상응되는 그러한 삶이다. 그럼 복음에 합당한 삶은 어떤 것인가?

1. 복음을 고백하는 그들이 복음을 위해 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탈취하는 거룩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다. 본문의 "복음의 신앙"은 가르침에 대한 믿음 또는 복음에 대한 신앙을 말한다. 복음에 대한 신앙 가운데는 위하여 노력할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 만일 신앙이 가치 있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가장 가치있는 것이다. 복음에 대해서는 많은 반대가 있다. 가기도 한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주변을 살펴보고 그리고 근면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들의 통일과 의견의 일치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다. "함께 협력하여 싸우라"는 본문의 말씀은 서로 싸우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너희 모두다 공동의 원수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한 마음과 한 뜻을 품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세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여러가지 일에 대하여 견해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한 마음과 한 사랑은 꼭 지녀야 된다.

3. 확고한 태도가 복음다운 삶이다. 그러므로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협력하라"(27절)고 했다. 어떤 반대에 직면해서도 "동요되지 말고 확고히 서 있으라"는 말이다. 복음을 고백한다는 자들이 지조없이 마음이 불확실하고 물과 같이 동요할 때 그것은 신앙에 대한 수치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믿음을 위하여 노력하는 자들은 거기에 굳게 서야만 한다.

Ⅱ. 그는 그들이 고난 중에도 불변함과 용기를 갖도록 권고한다. 고로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28절)고 한다. 복음의 고백자들은 항상 대적하는 자들을 만난다. 특히 기독교가 처음 전파될 때 그러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늘 지닐 수 있기 위해 또 변함이 없이 신앙을 간직할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떠한 반대에 우리가 부딪치든 간에 박해하는 것보다 더 좋고 그리고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박해하는 일은 멸망의 분명한 징조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고 그리고 복음의 고백자들을 해하는 자들은 멸망을 위해 정해진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박해를 받는 것은 구원의 징조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위선들도 그들의 잘못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인하여 바르게 고난을 받을 때는 그것은 우리가 신앙속에 거한다는 좋은 표시가 되며 또한 구원의 전조가 된다. 그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29절)고 하였다. 여기에서 두 가지 값 비싼 선물이 주어진다. 그리고 둘 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1. 그를 믿는 선물이다. 믿음을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믿음의 목적인 축복뿐 아니라 믿음 그 자체의 은혜를 값을 치루고 사 주셨다. 믿을 수 있는 능력과 성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2.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도 또한 가치있는 선물이다. 그것은 큰 명예이며 그리고 큰 유익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매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다. 또한 우리가 받는 박해는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확증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박해를 받는데도 큰 상이 수반된다. 고로 "사람들이 너희를 핍박할 때 너희에게 복이 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클 것이다"(마 5:11, 12)고 하셨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가 또한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딤후 2:12)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욕과 손실을 입으면 우리는 그것을 큰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 만일 우리가 순교자들과 고백자들이 보여 준 순전한 태도로 고난을 감수한다면 그것에 대하여 상급이 주어질 것이다(30절). 이 상급이 있으므로 그는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즉 내가 고난받은 것을 너희가 보고 또 나에게 이제 듣는 바와 같이 나와 같이 태도로 고난을 받으라"고 말한다. 박해 받음은 다만 고난 받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명분이 있으며 그리고 명분뿐만 아니라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순교자를 낳는다. 사람이 나쁜 이유로 고난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때 그가 고난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는 명분은 선하지만 마지 못해 억지로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 그의 고난받음은 그 가치를 상실한다.

 

1:2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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