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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리스도인의 사랑(에베소서 5:1,2)

위의 구절에서 우리는 상호간의 사랑 또는 그리스도인의 자비에 대한 권고를 대하게 된다. 사도는 앞 장에서 이에 관하여 설명 하였고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서 강조하였다. 따라서 본장 서두의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전 장에서 말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그것과 본문에 포함한 내용을 연결되어 주고 있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셨으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따른 자가 되며 하나님을 배우는 자가 되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경건한 사람은 그들은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바 대로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가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본을 스스로 따르고 그의 형상으로 자신들을 새롭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신 것이 실제적인 믿음에 큰 영예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같이 거룩하여야 하며 그가 자비하신 바와 같이 자비해야 하며 그가 완전하심 같이 완전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그의 선하심이야 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모든 은혜에 있어서 특별히 그의 사랑하심과 그의 용서하시는 선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는자 또는 닮으려는 자가 되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고로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도 그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의 이름을 선하심이 풍성하시며 은혜롭고 자비하신 분"이라고 선포 하였다. 또한 그는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그들의 양친에게 사랑을 받는) 어린이들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얼굴의 윤곽이나 특징에 있어서 또한 그들의 마음의 성품이나 기질에 있어서 양친을 닮듯이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말로 볼 수 있다. 또는 그들의 하늘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귀여움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그러하듯이 그를 본받으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겠다. 자녀들이 그들이 특별히 부모의 사랑을 받을 때 무엇이 선인가에 대하여 그들의 부모를 모방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지녀야 할 특성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으려는 것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신 점에 있어서 넉넉하심을 닮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으려는 자들만이 그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에 이어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2절)는 말씀이 연속된다. 이러한 하나님을 본받으려는 은혜는 우리의 전체 언행을 지배하며 영향을 준다. 그런데 하나님을 본받는 것을 곧 사랑 안에서 행하는 것을 뜻한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원칙이 된다. 또한 이 사랑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지시해 준다. 우리는 서로 우리 사랑의 신실함의 증거를 보이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2절)라고 하신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을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분이며 그에게서 우리는 가장 자유롭게 관대한 사랑의 실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위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는 모두 그 사랑에 공동 참여자요 그 사랑의 위로에 동참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의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으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사도는 의도적으로 기쁨을 주는 문제가 없겠기 ?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위대한 속죄의 희생이 되었다. 그는 자기를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 또는 그는 율법의 희생 제도에 기록된 대로 제물 또는 희생이 되시되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화목제가 되셨다. 이로써 그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다." 어떤 이들은 속죄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될 수 없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본문은 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제사를 말하는 것으로 그와는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자신을 드리셨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 희생을 받아들이시고 기뻐하시고 만족해 하셨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께 효과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본이 우리를 주장하게 하며 그것을 조심스럽게 본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5:2 없음.

 

5:3

불결에 대한 경고(에베소서 5:3-20)

위의 본문에서는 모든 종류의 불결에 대한 경고와 이에 대한 적절한 치료책과 논증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다시 몇 가지 다른 경고를 첨가하고 또 몇 가지 의무를 행할 것을 권고하셨다. 거룩한 사랑을 지속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더러운 욕망이 제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고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을 피하라"고 하였다. "간음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저지르는 일"이다. "온갖 더러운 것"이란 그 이 외에 다른 모든 추한 욕망을 포함하여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흔히 성하고 있는 일들이었다. 또한 "탐심"을 피하라고 하였다. 이 탐욕을 어떤 이들은 성결한 성경에서 두 번 다시 언급해서는 안되는 부자연한 욕망과 대한 탐욕이라고 해석하였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좀더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하여서 소유하고자 하는 과도한 욕심이나 부에 대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애착으로써 그것은 영적인 간음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이 탐욕에 의하여 하나님과 낯선자의 품에 안기게 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세속적인 욕망을 간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너희 간음하는 자들아 세상과 더불어 짝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이러한 죄는 반드시 두려워하고 혐오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리지 말라. 또 승인하지도 말며 혐오하는 마음을 없이 하여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세상을 버렸으며 하나님께 헌납된 사람들인 성도 즉 거룩한 백성들의 마땅한 바이기 때문이다"(3절). 바울은 악행이 증가되는 것을 경고하였을 뿐 아니라 그 악행을 가벼이 취급하게 되거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함을 경고하였다. 또한 "누추함"을 버리라고 하였는데(4절) 이 뜻은 모두 방탕하고 제격에 맞지 않는 몸가짐이나 행동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하겠다. 또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는 음탕하고 음란한 이야기나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어리석고 경솔함으로 가득 찬 헛된 이야기와 듣는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먼 말을 일컫는다. 또한 "희롱의 말"을 버리라고 하였다. 이는 헬라어로 euvtrapeli,a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에서 이 말을 "대화의 유희"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악의 없는 상대를 격분시키지 않는 농담은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사도가 그것까지 금지하였다고 볼 수 없다. 어떤 주석가는 바울의 이 말씀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욕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행동 또는 다른 사람을 어리석게 보이도록 만드는 행동에 대하여 경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일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나쁜 짓이다. 그러나 즐거운 대화라고 해도 그 속에 외설적이고 추잡한 내용이 담긴 대화라면 그것도 금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4장 29절에선 사도가 "더러운 말" 또는 음탕하고 육욕적인 즐거움에 관한 말을 한 것도 본문과 같은 의도로써 말한 것이라 하겠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이는 마땅치 아니하다"고 경고하였다. 이 말에는 물론 마땅치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크나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요소가 담겨 있었다. 그런 말들은 유익을 주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듣는 사람에게 해가 되고 독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이 뜻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땅치 않으며 그들의 신앙 고백과 성품에도 적당치 않을 일들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즐기는 동시에 현명해야 한다. 사도는 또한 "돌이켜 감사하라"고 덧붙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음란과 더러운 환락으로부터 멀어져야 하고 하나님의 그에 대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감사히 기억하고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대하여 찬송하고 영광 돌림으로써 마음으로부터 기뻐하고 즐거워하여야 한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우리는 모든 경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인자하심과 은총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2.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은혜와 선하심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기쁨과 활력을 주고 그는 즐겁게 한다. 하몬드(Hammond) 박사는 eu,aristi,a(감사하는 말)는 보편적인 바울이 금지하였던 것들과 반대되는 것들로써 은혜롭고 경건하고 신앙적인 말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헛되고 죄된 것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 우리의 기쁨은 그리스도인다움을 나타내 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약 인간들에게서 선하고 경건한 표현이 더욱 풍부하여진다면 악하고 마땅치 않은 말을 점차 줄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축복과 저주, 음란과 감사의 말이 한입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Ⅰ. 더러운 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바울은 다음의 몇 가지 그래야 되는 근거를 제시하고 또 그 죄에 대한 치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1. 사도가 제시한 더러운 죄를 짓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이유,

(1) 이러한 죄들은 우리로 하늘 나라에 가지 못하게 하는 죄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고 있드시"(5절)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의하여 이미 증거된 것이므로 그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본문의 "탐욕하는 자"란 말을 어떤 이는 이방인과 우상 숭배자의 확실한 증거로 여길 수 밖에 없는 악한 욕망에 스스로 탐닉해 들어가는 음란한 방탕자로 이해한다. 또 다른 이는 이 말씀을 일반적인 뜻으로 해석한다. 즉 탐욕하시는 자는 곧 우상 숭배자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은 영적인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 쾌락주의자는 자기의 배를 신으로 섬기듯이 탐욕하는 자는 돈으로 신을 삼아 그것을 사랑하며 세상적인 물질에 희망과 신뢰와 기쁨을 두는 자이다. 그러나 그 사랑과 소망과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여 보존하여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탐욕하는 자는 하나님 대신에 돈을 섬긴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되고 있다. 이 나라는 그가 또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나라이라는 말로 볼 수 있으며 또는 본래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중재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수여하신 나라를 뜻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늘 나라는 그 고귀하고 영광스러움과 충만함과 풍성함 때문에 여기서 하나의 왕국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의 성도들과 종들이 기업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는 빛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신의 욕망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물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은혜의 나라에 속할 수도 영광의 나라에 가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를 하늘 나라에서 멀어지게 하고 제외시키는 여러 가지 죄를 경계하는 데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 이러한 죄는 그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를 범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권고한다(16절). 즉 "아무도 너희에게 그러한 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허용되며 용서받을 수 있는 것처럼 혹은 너희가 그런 죄를 저질러도 면죄받을 수 있거나 형벌을 면할 수 있는 것처럼 아첨하지 못하도록 하라. 이 모든 말은 헛된 말이다"는 뜻의 말씀이다. 다니는 자는 자신과 타인들을 속이는 자들임을 명심하자. 이같이 사탄은 우리의 최초의 조상에게 "너희가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는 헛된 말로 그들을 속였다. 이러한 말들은 진실로 헛된 말들이다. 왜냐하면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을 불쌍하게도 속아 넘어가서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게 됨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겠기 때문이다. 본문의 "불순종의 아들들"이란 믿지 않고 복음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이다. 불순종에게 자신을 맡긴 모든 완고한 죄인들을 불순종하는 자들이다. 불순종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대교의 관습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죄는 어릴 적부터 존재하여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타락한 길로 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의 죄 때문에 이러한 자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때대로 이 세상에서 임하기도 하며 더욱 특별히 앞으로 올 세상에서 주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게 될 그러한 죄를 좋아해서 되겠는가?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7절)고 하신다. 즉 "그들이 저지르는 죄에 참여하지 말라. 그래야만 너희가 그들이 받을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러한 자들과 같이 죄된 방법으로 살며 그들의 죄에 대한 유혹과 간원에 응낙하거나 동의할 때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저지르는 죄를 추켜 주며 죄를 신속히 저지르도록 부추기며 우리의 힘이 자라는 한 그들의 죄를 막거나 저지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의 죄에 대한 동참자가 되는 것이다.

(3)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죄인들이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뜻은 이렇다. "그러한 길은 현재의 너희의 처지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이방인이며 회개하지 않았을 동안은 너희가 어두움이었으나 이제 너희는 크나큰 변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인들이 처해 있었던 대단한 어두움을 표현한다. 그들은 복된 성령의 은혜와 조명의 밖에서, 또는 결핍된 가운데서 교훈의 빛을 잃고 악하고 타락된 삶을 살았다. 죄의 상태의 어둠의 상태임 기억하자.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이 그러하듯이 죄인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의 영혼 안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되었다. 즉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으로 구원의 빛을 받게 되었다. "이제"라 함은 "너희가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인 지금"을 말함이다. 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였다. 히브리인들은 변증에 따르면 빛의 자녀들은 빛의 상태 안에 있는 자들이며 지식과 거룩성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이제 이러한 자들이 되었으니 너희의 언행을 너희의 처지와 특권에 적합하도록 하며 너희가 즐기는 특권과 지식에 의하여 지게 된 책임을 따라 살라"는 말이다. 또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였다(10절). 즉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 무엇인지 부지런히 찾고 시험하며 너 자신을 주의 뜻에 적합하게 함으로써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였음을 나타내도록 하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두려워하고 물어보며 그러한 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여 그런 모든 죄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해야 할 것을 명심하자.

2. 바울은 그러한 죄를 피하는 묘법을 설명하였다.

(1) 만약 우리가 육적인 욕망에 얽매이지 않으려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것이 빛의 자녀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그들이 빛을 받았으며 또한 성령에 의하여 성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 열매는 선을 행하게 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는 "착함"이며 우리가 행하는 바 안에서 "의로움"이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틀림없이 행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신앙은 선과 의이기 때문이다. 선함과 의로움 안에서 또 그것들과 더불어 진리는 존재해야만 하며 또는 마음의 성실성과 정직성 안에 또한 그것과 더불어 진리를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2) 우리는 죄와 죄인들과의 교제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11절). 죄된 행실은 어둠의 행위이다. 죄의 행위는 무지의 어두움에서 나오고 은폐할 수 있는 어두움을 찾으며, 사람들을 지옥의 어둠에 인도한다. 이러한 어둠을 찾으며, 사람들을 지옥의 어두움에 인도한다. 이러한 어둠의 행위들을 "열매없는 일"이다. 어둠의 일을 오래 계속해 보아야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죄로 인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결코 잃는 것에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행위도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철저한 파멸과 파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열매없는 일들과 사귐을 갖지 말아야 한다. 즉 우리가 스스로 죄된 일을 행하기 않을 것은 물론이며,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자들과 상관하여서도 안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공범이 되는 여러가지 길이 있다. 죄에 대한 추천, 상담 동의, 은폐 등등의 행위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에 참여하였다면 우리는 그들이 받을 징벌에도 참여할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죄인과 교제하였다면 우리는 머지 않아 그들이 저지른 행동으로 인한 가장 큰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될 것이다. 그들과 교제하는 대신에 오히려 우리는 그런 자들을 꾸짖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책망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들과 함께 참여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신중하게 그리고 우리의 위치를 지키면서 반증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로 죄에 대하여 깨닫게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적절한 때에 요령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 생활의 경건함과 신앙적인 대화에 의하여 그들의 죄를 경책할 것이다. "그들의 죄를 책망하되 그 반대되는 행실을 많이 보여 줌으로 그리하라." 경책해야 할 이유는 "이러한 일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때문이다"(12절). 이러한 행위들은 너무나 추악하고 더럽기 때문에 꾸짖는 길 이외에는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며, 더구나 그러한 사람들과 교제한다는 것은 더욱 부끄러움만 안겨 줄 뿐인 것이다. 또한 저들의 죄를 사도는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12절)이라고 말한다. 사도는 이로써 이방인들의 우상 섬김과 그들의 무서운 비밀스러운 행위에 관하여 언급한 것 같이 보인다. 이방인들의 우상 섬김은 혐오스러운 악독으로 가득차 있고 죽음의 고통을 각오하지 않고는 그 일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선한 인간은 많은 사악한 인간들이 행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들을 말하는 것도 부끄러이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러나 악한 자들의 사악함이 표면에 들어날 때는 선한 사람들은 그것을 책망하여야 한다. 그러한 책망을 하여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 있다. "모든 것은 폭로되면 빛을 받아 들어나기 때문이다"(13절)(공동 번역인용). 이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모든 어두움의 열매 없는 일들을 공개하라. 너희는 이 어두움의 일들을 책망하기 위해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어두움의 일들을 죄인 자신에게 신실한 책망자로서의 너의 입을 통하여 외쳐지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교리의 빛에 의하여 있는 그대로의 진상을 보여 주어라. 또는 너희 생활의 거룩함에 의하여, 발산되는 교훈적인 빛에 의하여, 그리고 "너희의 모범적 행실에 의하여 그들의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을 그대로 보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과 그리스도인들의 대화 가운데서 나타나는 말씀의 본은 그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와 악함을 깨닫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말씀은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13절)는 말씀으로 계속 되고 있다. 이 말씀은 이전에 어둠의 가운데서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들어내는 것이 바로 빛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빛인" 빛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로 그들의 죄를 발견하게 하고 이 세상을 비추는 빛과 같이 다른 사람들의 악함과 위험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들어서 이러한 의무를 더욱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14절). 즉 "이것을 행함으로써 너희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본을 따르게 그들을 죽음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도록 하시어 그들로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게 하시었던 것이다." 그 다음 "주께서는 이사야 60장 1절 상세히 표현된 주의 말씀과 같이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또는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주의 사역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죄인들을 부리고 계신다는 뜻이라고도 하겠다. 그는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말씀 한다. 이사야 60장 1절과 같은 말씀이 본문에서 다른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말씀들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들이 비참한 안락과 어리석음에 대하여 깨닫게 하여 준다. 또한 죄인들이 자기들의 위험에 대하여 얼마나 무감각하여 천성적으로 영적인 행동과 감정에 얼마나 부적합한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어 일어나라고 부르실 때 그 말씀의 뜻은 죄인들이 회개함으로 자기의 죄를 벗어버리고 거룩한 순종의 길로 들어서라는 말씀이며 "그리스도께서 내게 비취시리라"하신 말씀 또는 "그리스도께서 너를 밝히시고 네 위에서 빛나시리라"하신 말씀 또는 "그리스도께서 너를 밝히시고 네 위에서 빛나시리라" 하신 은혜로운 약속에 의하여 그들이 자기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여 행하고 시도하도록 용기를 주시고자 하는데 그의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비취시리라"는 말씀의 뜻을 "주께서 너를 지식과 거룩성과 위로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주의 은혜로 도우시며 너의 마음에 즐거움과 자리도 인도하시고, 주의 은혜로 도우시며 너의 마음에 즐거움과 평안으로 활력을 주시며 종내에는 영원한 영광으로 상을 주시리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죄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그들을 죄로부터 돌이켜 회개시키도록 노력할 때 이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위대한 목적인 바 이를 행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내게 비취시리라"는 말씀을 죄인들과 성도들에 대한 부르심으로 이해한다. 즉 죄인들에게는 회개하여 돌아서게 하고 성도들에게는 그 맡은 바 의무를 다하도록 격려하여 주는 말씀이라고 본다. 죄인들은 그들의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영적인 무감각 상태에서 깨어 나야 한다.

(3) 죄를 극복하는 또 다른 대책이 신중하게 경고되고 있다. "그런즉"(15절)이란 말은 즉시 뒤따라서 말하여지는 내용을 기대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만약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책망하고자 한다면 너희는 맡은 바 의무를 성실히 감당해야 하며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진실로 다른 사람을 책망할 수 있기에 합당한 사람이란 스스로 신중하고 조심성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또는 "그런즉"이란 말씀은 앞에 이미 언급하였던 것과 또 다른 여러 가지 죄에 대한 예방이나 치료책이 여기에 있다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필자는 이러한 의도가 바로 사도의 의도하였던 바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극도의 신중함과 조심성 없이는 마음과 생활에 순결함과 거룩성을 지속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곧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 하여"(15절)라는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다. 즉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우리의 맡은 바 규칙과 자주 의논하여, 거룩한 말씀(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명령을 자주 생각하기 위하여 올바른 길을 정확하고 빈틈없이 가라는 뜻이다. 또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15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며 자기의 의무에 대한 지각이나 자기의 영혼이 귀중함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며 태만하고, 게으르며, 부주의한 어리석은 자처럼 죄에 빠져 스스로를 파괴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오직 지혜있는 자 같이 하라"고 하신다. 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은 것처럼 행하라는 말이다. 신중한 행함은 참된 지혜의 결과이며 그 반대의 행동은 어리석음의 결과이다. 다음 "세월을 아끼라"(16절)로 하였다. 직역한다면 "기회를 사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상거래나 고역을 하기 위하여 부지런하게 시기 적절한 때를 관찰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는 상인들이나 장삿군들로부터 비롯된 비유이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지혜 중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은 유혹을 경계하고 아직 능력이 있는 동안 선을 행하고 죄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특별한 사명으로 자기에게 삼으려고 하며 최고의 목적을 위하여 시간을 좋은 반려자로 삼으려고 하며 최고의 목적을 위하여 시간을 쓰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들은 현재의 은혜의 때를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이용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선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재능이다. 따라서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용되어지지 않을 때 그것은 하나의 낭비이며 상실이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앞으로를 위하여 우리의 의무를 배로 열심히 수행함으로써 상실된 시간을 보충하여야 한다. 그 이유로써 본문은 "때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이 시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의 악함 때문이라는 말이거나 또는 "너희가 살고 있는 그 세월이 고난스럽고 위험스러운 시기라"는 뜻일 것이다. 오히려 후자의 뜻이 더 타당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바울이 이런 말씀을 쓴 것은 박해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인은 매 순간마다 위험에 처하여 있다고 하겠다. 세월이 악할 때 우리가 시간을 아껴야 할 더욱 큰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이 때가 얼마나 빨리 더 악해질 것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흔히 시대가 악하다고 불평하기를 잘한다. 그러나 이 악한 세월을 인식함으로 그들이 때를 아끼기 위하여 분발하게 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7절)고 말하였다. 즉 세월이 악하기 ?문에 너희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너희 영혼에 관하여 태만하지 말라. 연구하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것을 너의 의무로 삼으라"는 말이다. 우리의 의무를 모르고 우리 영혼에 태만한 것은 대단히 큰 어리석음의 증거임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주의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최선의 참된 지혜라고 할 수 있겠다.

Ⅱ. 다음으로 나오는 구절에서 바울은 몇 가지 특수한 죄에 대하여 경고하고 몇 가지의 의무를 강조하였다.

1. 그는 폭주(暴酒)의 죄에 대하여 경고한다. 그러므로 "술취하지 말라"(18절)고 하였다. 이것은 이방인들 가운데 상당히 흔한 죄였다. 특별히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의 축제 때에 특히 바카스의 제전 때 더욱 술취하였다. 그때에 이방인들은 술에 취하여 몸이 불탈 지경까지 도달하였고 이에 수반하여 모든 괴상한 욕망이 뒤따랐다. 그러므로 바울은 "술은 먹되 만취하지 말라"고 한다. avswti,a-즉 사치 또는 방탕을 나타낸다. 술취함은 생활의 정숙과 순결과는 거리가 멀고 다만 모든 종류의 방탕을 일으킬 뿐이며 인간들에게 악한 관능과 천한 범행만을 심어 줄 뿐이다. 술취함은 그것만으로 죄가 끝나는 경우는 드물고 인간으로 하여금 이외의 다른 여러 가지 죄에 빠지게 하는 죄임을 기억하자. 술취함은 하나님께 거역하는 죄이며, 영적인 생활에 대단히 큰 장애가 된다. 바울은 모든 이러한 무절제와 방종은 세월을 아끼라는 충고를 통해 그가 제시하고 자란 엄격하고 신중한 삶과 반대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였다.

2. 술로 취하는 대신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것"을 사도는 그들에게 권면한다. 술로 취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과는 같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을 앞의 죄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바울의 권고의 의미는 인간들로 성령의 풍부한 은사를 받도록 노력하게 하려는 것이요 관능적인 인간들이 자기의 술잔에서 얻기를 기대하는 그러한 크나큰 기쁨과 능력과 용기를 성령이 그들의 영혼에 가득 채우게 하시기를 바라서였다. 성령은 은사를 얻으려고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이 죄될 수는 없다. 우리는 약간의 성령을 받고 만족하여서는 안 되며 성령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경건한 행동을 하며, 그에 합당한 표현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더 나아가서,

3. "주를 찬송하라"고 권고하였다(19절). 주정뱅이는 음탕하고 타락한 노래를 부르곤 한다. 이방인들은 바카스 축제에서 그들이 술의 신이라고 부르는 바카스를 위하여 찬양을 한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기쁨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들은 집회에서 상호간의 교화를 위하여 이 찬양으로 회답하게 된다. 본문에 "시"라고 한 것은 다윗이나 또 그와 같은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도록 지어진 것을 말한다. "찬미"는 스가랴나 시므온의 찬미와 같이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도록 지어진 것을 말한다. "찬미"는 스가랴나 시므온의 찬미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찬미만에 국한된 작품들을 말한다. 또한 "신령한 노래"는 여러 가지를 다 함축하고 있는 말로써 교리적 예언적 자료들이 다 여기 들어간다.

(1) 복음은 시편과 찬미를 노래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시와 찬미는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며 그의 영광을 위하여 지정된 것이다.

(2) 기독교가 타락한 환락을 적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기독교는 그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즐거움과 환희를 누릴 것을 권하며 이러한 기쁨을 적절히 표현할 것을 권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뻐하며 환희의 찬미를 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그들은 "노래하며 마음 속에서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목소리로써 뿐만 아니라 내적인 감사함에서 노래하며 이러한 그들의 음악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듯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그 노래를 그가 받으실 것이다(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의 영광을 위하는 목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면 그 찬미가 주를 기쁘게 할 것이다.

4. "감사" 바울이 권고한 또 다른 의무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시편 등을 노래할 의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항상 노래는 못한다 할지라도 "언제나 감사하는 생활"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감사할 이유가 없게 되기를 원하지 않듯이 또한 이러한 의무를 회피하려고 해도 안 된다. 우리는 생애 동안 항상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감사해야 할 것이다. 다만 현재 즐기고 있는 영적인 축복이나 앞으로 바라는 영원한 축복에 대하여 감사할 뿐만 아니라(전자의 것을 우리가 이미 소유하였고 후자의 것은 우리가 소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위로가 안기어질 때뿐만 아니라 우리를 성화시키는 고난에 대하여서도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과 직접 관련된 것에 대하여 감사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친절과 사랑의 사실들에 대하여서도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와 찬송과 신령한 예배를 드리며, 또 이러한 우리의 봉헌이 그를 힙입어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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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된 자들과 아내된 자들의 상호 의무(에베소서 5:21-33)

위의 구절에서 바울은 서로 의무를 감당할 것을 권고함으로 그의 교훈을 시작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무의 일반적인 근거로 그는 하나의 원칙을 제시하였다(21절).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다른 사람의 위에 군림하거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절대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품성에 대한 본보기였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또 각자의 선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정하여 주신 모든 의무를 감당할 마을을 지녀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란 그를 위하여 그리고 그를 의식함으로 또는 이 행동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두러워한다는 사실을 보증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다. 상호간의 겸손과 섬김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관계에서 생기는 의무가 좀더 잘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22절부터 끝절까지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의무에 관하여 언급한다. 바울은 이 문제를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리하여 아내의 복종의 실례로서 교회를 말하고, 남편의 사랑의 예로는 그리스도를 들었다.

Ⅰ. 아내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주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이다(22절), 이러한 복종은 남편에 대한 존경과 순종의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 남편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일을 "주께 하듯 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위엄에 순종하여 이일을 행해야 한다. 또는 이 말씀은 비교적인 용법으로 이해해서 "너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겠다. 전자의 해석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동료들에게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에게 복종하고 그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후자의 해석을 통하여는 하나님께서는 그에 관한 의무를 행할 것을 요구하고 주장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에 대한 의무도 주장하고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사도는 아내들이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차지한 위치를 염두에 두고 하신 비유이다. 머리는 이성과 지혜와 지식이 담긴 곳이며 직각과 정서의 샘이 되는 곳으로 우리 몸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뛰어난 기관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남자에게 명령하고 다스릴 권리를 주셨다. 그리고 이 관계에 대한 최초의 법에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데 이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들어온 죄의 영향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여자보다 우월하다. 그러므로 남자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같이" 여자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여해 주신 우월성과 머리됨을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권위와 유사성이 있다. 또한 바울은 덧붙이기를 그가 "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교회를 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또 모든 좋은 것을 공급하시기 위하여 교회 위에서 역사한다. 꼭같은 방법으로 남편은 자기의 아내에게 위로와 보호를 주기 위하여 존재한다. 또한 그러므로 아내는 즐거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24절)는 말씀이 뒤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범사"라 함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에 일치하는 한에서의 모든 일 그리고 남편들이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마땅한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이다.

Ⅱ. 반면에 남편의 의무는 아내들을 사랑하는 것이다(25절).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남편의 아내에 대한 자기 우월성과 머리됨의 주장은 권리의 남용이 되기 때문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특권을 남편들이 누리려면 상대적으로 그들을 자신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의무는 아내를 위하여 요구되는 특별한 사랑이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예로 든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사랑이 교회의 결점과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고 순결하며 뜨겁고 끊임없는 애정으로 가득찬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 사랑의 위대성은 교회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내어 주신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복종이 아내에게 본이 된 바와 같이 여기서는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남편의 사랑의 본보기로 언급되고 있음을 명심하자. 그러한 본보기를 각자에게 제시하고 또 각자에게 요구가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불평할 이유를 없애려는데 있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아내를 위하여 요구하신 사랑은 그가 자기에 대하여 아내에게 요구한 복종에 대한 보상이 될 것이다. 또한 전술한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은 하나님께서 아내의 받은 몫으로 정하신 남편의 사랑에 대한 풍부한 보상이 될 것이다. 사도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한 후 이를 부연하여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이유까지 설명한다. 즉 그것은 교회를 이 세상에서 성화시키고 다음 세상에서 영광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26절)라고 기록되었다. 즉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의 지체들에게 거룩함이 도리를 주시고 그들을 죄의 책임과 그 감염, 또한 지배에서 구원하시고자 함이었다는 말이다. 이 일을 이룰 수 있는 도구는 정해진 성례전 특히 세례의 씻음과 복음의 전달과 받아들임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앞에 이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27절)"라고 말한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바울이 여기서 성결을 위해서 손을 씻는 유대인들의 특별한 배려를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몸의 일부라도 물에 잠기지 않을까보아 세심한 주의를 하였고 몸의 한 구석에라도 더러움이나 오점이 남아 있을까보아 주의하였다. 그러나 라이트푸트 박사와 달리 또 다른 이들은 바울의 옷이 세탁업자의 손을 거쳐서 나와 얼룩과 주름이 제거된 사실을 비하여 본문을 기록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여하간 "그가 자기 앞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란 말씀은 심판날에 그가 교회를 완전히 일치되게 하사 지식이나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한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 앞에 서게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더러움이나 오점이 남아 있지 않게 하시고 그가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보시기에 좋은 것만을 교회에 있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요 "거룩하고 흠이 없게"라 하셨는데 이는 조그마한 죄라도 거기 남아 있지 않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모든 교회를 영화롭게 하심을 교회를 성결하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재에 거룩함을 받은 자들만이 앞으로도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사도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라"(28절)고 말한다. 아내는 남편과 더불어 한 몸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육체적으로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사회적인 규약으로 한 몸이 되었다는 뜻에서). 이것이 왜 남편이 충심으로, 열렬한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해야만 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이 사실은 다음의 보충 설명으로 강조된다. 누구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는다(자기가 아무리 기형이고 불완전하더라도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29절). 오히려 "몸을 양육하고 보호한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보고 사랑하며, 부지런히 여러 가지 풍부하고 유익한 것을 공급한다. 사람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자기 몸을 돌본다.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풍성하게 양육하며, 교회를 위하여 유익한 것과 필요한 것을 아시고 공급하여 주시며, 교회의 영원한 행복과 복지를 위하여 도움이 되는 것으로 공급하여 주시듯이 자기 몸을 돌본다. 이같이 남자는 그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렇게 해 주시는 것은 "우리는 그 몸의 지체 곧 그의 살과 뼈이기 때문이다"고 바울은 말한다(30절). 바울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주의 교회를 키우시고 풍성히 하시는 이유로 든다. 다시 말하여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그 몸의 한 부분이 되는 까닭이다. 또는 본문은 "우리는 그 몸에서 나온 소속원들이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교회가 소유한 모든 은혜와 영광은 이브가 그 남편에게서 취하여진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의 몸과 살과 뼈의 지체들이라"고 여러 가지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인가? (역주: 한글 개역에는 "그 몸의 지체"라고만 되어 있다) 어떤 이가 말하듯이 성경은 복합적인 대상을 표현할 때 여러 가지를 분류하여 표현하는 것을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세상을 하늘과 땅으로 말하고 한 날을 아침과 저녁이라고 부르듯이 여기서는 사람을 몸, 육체, 뼈로 세분하여 언급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원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므로"(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하나이듯이 남편과 아내도 하나이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게" 마련이다. 이것은 이브가 아담을 돕기 위한 반려자로 아담에게 주어졌을 때 아담이 한 말을 바울이 인용한 말이다. 창세기 2장 24절을 보라. 우리는 이 말씀을 한 남자가 결혼하면 다른 친족관계는 취소된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다만 부부관계가 다른 모든 관계를 끊는 한이 있어도 그의 아내와의 관계는 유지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는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라"고 또한 말씀하였다. 즉 결혼에 의한 몸이 된다는 말이다. "이 비밀은 큰 비밀이다"(32절). 사도가 인용한 아담의 말은 결혼에 대한 말이었다. 아담과 이브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의 합일에 비추어 볼 때 역시 숨겨진 비의가 있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 사이의 결혼에 의한 결합은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결합의 유형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비록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의 결합이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하나의 자연스러운 모형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33절에서 남편과 아내의 의무에 관하여 간략히 요약함으로써 바울은 5장을 끝맺었다. "그러나(결혼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숨겨진 비의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말씀을 너희를 향한 문자적인 뜻 그대로 받아들여)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는 것같이 신실하고, 특별하며, 독특한 사랑으로 아내에게 대하라는 말로 본장을 끝맺는다. 경외란 사랑과 귀하게 여김이란 복합적인 뜻이 있다. 경외란 상대방을 기쁘게 하려는 배려와 그에 대한 두려움을 지닌 태도이다. 즉 경외하는 태도는 상태를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태도다. 아내들이 이같이 남편으로 존경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마땅히 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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