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에베소서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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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에베소인들의 본래의 상태(에베소서 2:1-3)

본문에서는 본래 에베소인들이 처하여 있었던 비참한 상태가 일부 묘사되고 있다. 다음을 유의하라.

1. 회개하지 않은 영혼은 죄와 허물로 죽는다는 사실이다.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 죄와 허물이라 함은 모든 종류의 죄를 나타내는 말로 마음과 생활 속에서 짓는 습관적이고 실제적인 죄들을 나타내는 말로 마음과 생활 속에서 짓는 습관적이고 실제적인 죄를 의미하는 말이다. 생활의 죄가 되는 영혼의 죽음을 나타낸다. 죄가 성행하는 곳에는 모든 영적인 생활이 잠들고 만다. 죄인들은 죽은 상태에 있는 자들이다. 즉 영적 생활의 원칙이 결여되어 있고 영적 생활의 능력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에 처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그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이 죽은 자라고 불리우는 것과 같이 율법 안에서 죽은 것이다.

2. 죄의 상태는 곧 이 세상에 순종하는 상태를 말한다는 사실이다(2절). 바울은 첫절에서 죄인들의 내면적인 상태를 설명하고 본절에서는 그들의 외적인 상태를 설명하였다. 그 가운데서라는 말은 죄와 허물 가운데서라는 말이며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라는 말은 너희가 세상에 속한 인간들이 보통 행하는 것과 같이 그런 방법으로 행동하며 살아 왔다는 말씀이다.

3. 우리는 본래 죄와 사탄의 노예라는 사실이다. 죄와 허물 가운데서 살며 이 세상의 길을 좇는 자들은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라" 행하는 자들이다. 사탄과 사탄의 권세잡은 자들을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태복음 12장 24, 26절을 보라. 변절한 천사들의 군단은 하나의 우두머리 아래 한 세력으로 단결하여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다른 곳에서 "흑암의 권세들"이라고 복수로 부른 것을 여기서는 단수로 취급하였다. 공중의 사탄의 왕국이 위치한 곳이라고 해석된다. 공중에는 영들이 가득차 있고 거기서 그들이 세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사탄은 공중의 낮은 지역에서(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권세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탄은 그곳에서 쉽게 인간들을 유혹하며 그가 할 수 있는 한 세상에 대하여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자 한다. 그러나 "만물 위에 계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께서 사탄을 정복하시고 사슬에 매어 놓은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된다. 그러나 사악한 인간들은 사탄의 노예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탄을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대단한 약탈자의 뜻과 즐거워하는 바를 따라서 살며 행동한다. 그들의 삶의 길은 사탄의 암시대로 따르는 것이요, 사탄의 유혹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탄에게 예속되어 있고 그의 뜻을 따라 노예처럼 이끌려 산다. 그런 까닭에 사탄을 이 세상의 신이요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불리운다. "불순종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길을 택하고 악마를 섬기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 가운데서 사탄은 권세와 영향력을 갖고 역사한다. 성령께서 순종하는 영혼 가운데서 신으로 역사하는 것과 같이 사탄의 영은 사악한 인간들에게 악한 일로 역사하고 있다. 또 앞으로도 역사할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세상이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으로 축복을 받았을 때부터 역사하여 왔다. 바울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다"고 추가하여 말한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하는 말씀으로 그들도 마찬가지로 본래 비참하고 슬픈 상태 안에서 살아 왔으며 회개하지 않은 이방인들 만큼 악하고 죄된 상태에서 살아 왔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들은 죄된 상태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준다.

4. 우리는 본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부패한 욕정을 따라서 살아 왔다는 사실이다(3절).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라고 했는데 이는 인간들이 육체와 마음의 욕망을 따라서 살아 왔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이 하라고 권고한다(고후 7:1). 육체와 마음의 요구를 따라 행하는 것은 더 높고 숭고한 영혼의 권세 안에서 또는 그 권세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죄와 악덕도 포함된다. 우리는 자신을 타락하게 하는 모든 죄를 지으면서 살아 왔다. 육적인 마음은 인간을 사악한 욕망의 완전한 노예가 되게 한다.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것"이란(3절) 말씀은 이러한 욕망의 효력과 이러한 욕망에 스스로 굴종하는 사람들에게 이 욕망이 지닌 능력을 의미한다.

5. 우리도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도 그러하였다. 어떤 인간이나 본성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과 꼭 같다. 습관이나 모방에 의하여서 뿐만 아니라 그가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본래적인 성향과 욕망이 같기 때문에 같은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본래 불순종의 자녀들이므로 또한 본래 진노의 자녀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사악한 자들에게 진노하신다. 우리의 처한 상태와 삶의 과정은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진로를 받을 수밖에 없고 결국은 영원한 진노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죄인들이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그의 영광의 상속자가 되도록하는 은혜를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무슨 까닭인가? 바울은 죄인들의 비참한 상태를 본문에서 설명하고 우리가 영광을 바랄 수 있는 이유를 다음 절에서 추구해 나간다.

 

2:2 없음.

 

2:3 없음.

 

2:4

에베소인들 가운데 일어난 변화(1)(에베소서 2:4-10)

본문에서 바울은 회개하게 하는 은혜에 의하여 그들 가운데서 일어난 영광스러운 변화에 대하여 설명을 시작한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Ⅰ. 영광스러운 변화가 이루어지게 하며 효력있게 하시는 분과 그가 변화를 일으키시는 방법.

1. 부정적인 논증. 이에 대하여 사도는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8절)라고 말한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회심과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 재능이나 우리의 공적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다.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9절). 이러한 것은 모두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자랑은 배제된다.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자기의 능력과 재능을 자랑할 여지가 없다. 또한 마치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풍성한 은총을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행한 것처럼 자랑할 수 없다.

2. 긍정적 논증. 이 변화를 이루신 분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4절). 하나님은 이러한 위대하고 복된 변화의 주재자이시며 그분의 위대한 사랑이 이러한 변화의 샘이요, 근원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나타내시기로 결심하셨다. 사랑은 피조물로서의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려는 하나님의 성향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가 변절한 비참한 피조물임을 고려하신다. 그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나 선한 의지는 거기서 모든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향해 솟아 나오는 근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한 사랑이며 하나님의 긍휼은 풍부한 긍휼이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무진장으로 풍부하다. 그 다음 "은혜를 인하여 너희가 구원을 얻었나니"(5절)라고 하였고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고 하였다. 모든 회개한 죄인들은 구원받은 죄인임을 기억하자. 그들은 죄와 진노로부터 놓임을 받았다. 그들은 구원의 자리에 인도되고 은혜로 하나님의 자유롭고 무한한 선하심과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공적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 이 믿음을 통하여 죄인들이 복음의 크나큰 축복에 참가하게 되었다. 큰 영향력을 가진 믿음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의 큰 목적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알려졌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증언과 증거에 의하여 알려졌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증원과 증거에 의하여 확실하게 되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을 믿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주어질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을 정하셨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Ⅱ. 이러한 변화는 우리들의 본래적인 비참성에 대한 해결책이 되고 있다. 그 구체적 사례가 본문에 설명되고 있고 나머지는 아래 내용에 언급되고 있다.

1. 이로써 죽었던 우리가 살아났다. 우리는 죄의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영적 생활의 원리가 심어지게 되었다. 영혼 안에 거하는 은혜는 영혼 안에서는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죽음이 지각력을 없애고 인간의 모든 능력과 재능을 봉인해 버리는 것처럼 죄인 상태는 선한 것은 무엇이고 막아 버린다. 반면에 은혜는 모든 것을 열고 영혼을 넓혀 준다. 중생한 죄인이 살아있는 영혼이 됨을 명심하자.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서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 그는 율법을 깨닫고 살며 용서와 의롭다 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죄의 문책으로부터 자유한 존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생긴 결과이다. 우리가 살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러므로 "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리라"고 하였다.

2. 이로써 무덤에 묻혔던 우리들이 일어난다. 본문에 보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이미 일어난 일처럼 또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그 분과 우리가 연합할 때 우리도 이미 살아 난 것처럼 말씀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살리실 때 사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믿는 자들을 살리셨으며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시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하늘 나라로 올리사 그의 우편에 앉히셨을 때,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주의 백성들의 부활함과 영광받음에 우두머리가 되시고 선두주자가 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7절). 이 말씀을 또 다른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죄인들은 먼지 속에서 뒹굴 수밖에 없으나 거룩하게 된 영혼은 하늘 나라에 앉으며 부활하여 세상에서 들려 올리운다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겠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앞으로 올 세상에서 그들이 받게 될 것을 비교해 볼 때, 이 세상은 그들에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자유인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오르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도움으로 그들은 그와 함께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사람들과 사귀며 그들은 이 소망에 대한 끊임없는 기대 가운데서 살 수 있게 된다. 그들은 가장 최선의 일에서 최고의 주인에 대한 종이 될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들리어 올라가 그와 다스리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심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을 것이다.

Ⅲ. 이러한 변화를 있게 하시고 또 효력있게 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과 뜻이 무엇인가 살펴 보자.

1.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삼고자 하셔서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다"(7절)고 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앞으로 올 세대의 죄인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현재에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은 앞으로 올 세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며 이러한 변화가 자기들에게도 임할 것이라는 용기를 준다.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 가운데 이러한 일을 집어 넣으신 것은 불쌍한 죄인들이 그 일을 보고 용기를 얻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가 그러한 은혜와 친절하심을 볼 때 또한 그의 풍부한 은혜와 은혜의 차고 넘치는 풍부함을 보고 어떻게 이러한 변화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즉 그리스도에 의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모든 은총과 축복을 내려 주신다.

2. 회개한 죄인들로 선한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본분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은 자니"(10절)라고 하였다. 본문의 말씀은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영적인 유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고 말한 것은 그가 여기서 죄인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으로 말한 것 같다. 즉 새 인간으로 뿐만 아니라 성도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새로운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피조물의 창조자이시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고난받은 것을 힘입어서라는 말이다. 그의 복된 성령의 영향력과 역사하심에 의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 목적은 "선한 일을 위하여서이다"(10절). 앞에서 신적인 은혜에로의 변화에 대하여 말하면서 행위를 배제시켰던 사도는 이 말 때문에 선한 행위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기 위하여 비록 이런 변화가 행위의 공로에 힘입은 것은 없다고 하지만(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바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선한 일을 하도록 계획하시고 예비하여 두셨음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는 말씀은 우리로 선한 일에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우리를 지으셨다는 말씀이다. 은혜로 하나님께서 선한 뜻을 세우신 것은 그들로 선한 일에 힘쓰게 하려는 뜻에서이셨다. 또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라는 말은 이미 그가 전에 이 일에 대해 선포하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미리 우리를 준비해 두셨다"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아는 축복과 성령의 도움을 얻는 축복을 우리에게 내리심에 의하여, 또 우리 안에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심으로 이 일은 준비하셨다는 뜻이 되겠다. 이는 "우리도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며"(10절) 또는 하나님께서 본보기를 보이심으로 또한 우리를 거룩한 가운데 보존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이다.

 

2:5 없음.

 

2:6 없음.

 

2:7 없음.

 

2:8 없음.

 

2:9 없음.

 

2:10 없음.

 

2:11

에베소인들 가운데 일어난 변화(2)(에베소서 2:11-13)

본문에서 바울은 본래 에베소인들이 처해 있었던 비참한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는 본문에 "그러므로 생각하라"(11절)고 하였다. 이 말씀은 "너희가 전에는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고 지금은 무엇이 되었는가를 비교하라. 그리고 너희가 스스로 겸손하고 하나님께 사랑과 감사를 드리도록 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회개한 죄인들은 과거에 그들이 처하여 있던 본래적인 불행과 죄된 상태를 자주 회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사도는 또한 그들에게 "육체로 이방인이요"(11절)라고 말하였다. 이는 즉 본성의 타락 가운데서 살고 은혜의 언약에 참여하고 있다는 외적인 표시가 되는 할례를 못받은 자도 있었다는 말이다. 또 그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즉 "너희는 무할례 때문에 외적인 고백만을 즐기고 외적인 의식 외에는 더 이상 바라지 않는 외식적인 유대인들에게 비난과 책망을 받았도다"라는 말이다. 위선적인 신앙 고객자들은 외적인 우수성에 의해 자기들이 평가되기를 원하며 또 그것이 부족한 타인들을 비난하고 꾸짖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몇 가지 특징을 들어서 그들의 경우가 비참함을 표현하였다(12절).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던 그때에는 또한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던 그때에는" 다음과 같았다고 말한다.

1. "메시야에 대한 지식이 없고 구세주 안에서 또는 그분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주어지는 구원의 유익을 모르는 그리스도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의 유익을 갖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 결핍된 모든 사람들과 회개하지 아니한 모든 죄인들의 상태이다.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 대단히 비참하고 한탄할 만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이전에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2.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12절). 그들은 그리스도 교회에 속하여 있지도 못했고 그 교회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으며 교회의 회원과 더불어 특별한 유익을 나눈다는 것이 결코 적은 특권은 아니다.

3.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12절). 은혜의 언약은 비록 교회가 여러 시대를 지나는 동안 여러 가지로 첨가되고 또는 약속의 계약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 계약은 약속으로 이루어지며 특별히 메시야에 관한 위대한 약속과 구세주를 통하여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약속을 내용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방인인 에베소인들은 이러한 계약에 관하여 낯선 자들이었으며 그 계약에 관한 정보나 소문을 결코 듣지 못하였었다. 그들이 이 계약에 참여하지 못한 것처럼 모든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도 복음에 대하여는 이방인이다.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는 자들, 그러므로 언약의 중보자 안에서 아무 권리도 얻지 못한 자들은 약속의 계약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인 것이다.

4. 그들은 현세의 삶을 초월하는 소망이 없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확고한 희망이 없고 영적이며 영원한 축복에 대한 희망이 없다.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고 언약에 대하여 이방인이 되는 자는 좋은 소망을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의 계약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희망의 근거와 기초가 되는 까닭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소외된 상태에 있다. 즉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는 자였었다" 그들에게 신에 대한 지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에 대한 경건이나 신께 의존하는 지식이나 신이 주는 특별한 유익도 알지 못하고 살아 왔었다. 이 말은 그들은 "이 세상에서 무신론자였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많은 신들 앞에 경배하였지만 참된 하나님이 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바울은 에베소인들이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얻게 된 복된 변화에 대하여 언급한다(13절). 즉 "전에는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한다. 그들이 이전에는 타국에 가 있었던 탕자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 약속들과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멀리 있었다. 이 말씀은 전 절에서 묘사되었던 그들의 상태를 표현한 말씀이다. 회개치 않은 죄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며 하나님도 그들을 거리를 두고 대하신다. "그는 교만한 자를 멀리하신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말씀한다. 즉 "너희의 회개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하며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업에 가까워졌다"는 말이다. 그들은 그들의 고향인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되었고 교회 안에 받아들여지고 언약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오는 모든 다른 특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사는 백성"임을 명심하라. "구원은 사악한 자들에게서는 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 가까이서 도움이 되신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즉 그 고난과 죽으심의 공적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모든 믿음을 얻은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을 힘입어 하나님과 가까이 거하며 그리스도를 힘입으며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2:12 없음.

 

2:13 없음.

 

2:14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에베소서 2:14-22)

우리는 이제 본장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였다. 본문은 회개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위대하고 큰 적대관계에 있었던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화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모든 화해하지 않은 자들 사이에도 역시 적대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평을 이루셨고 화해를 이루셨다.

1.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서로 적대적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비방하고 미워하고 서로 비난하던 두 종류의 사람들은 화해시킴으로써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 그들은 서로 불목하게 하고 또 유대인들에게는 특권 의식을 고취한 상징적인 것은 의식적 율법이었다. 여기서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한 것은 성전 안의 담을 말한 것으로 그것은 유대인들만이 들어 갈 자유가 있는 곳과 이방인들의 회집 장소를 분리해 놓기 위하여 세워놓은 것이었다. 이같이 "그는 원수된 것을 자기의 육체로 폐하셨다"(15절).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의식적 율법이 갖는 강제력을 제거하셨다(즉 그들 사이에 거리가 생기게 하고 적의를 갖게 하는 요인을 제거하셨다). 이 율법을 본문에서는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부른 이유는 이 율법이 무리들로 외적인 형식과 의식에 참여하게 하고 신을 예배하는 외적인 요소들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제도를 규약을 제정하였기 때문이었다. 율법의 의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으로 폐하여졌다. 그것은 폐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이거나 유대인이거나를 막론하고 참여할 수 있는 믿는 자들의 교회를 세우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둘로 한 새 사람을 만드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둘로 나누인 무리들을 하나의 새로운 사회 즉 하나님의 백성의 몸을 만드시고 그 백성들이 그들의 우두머리와 함께 연합하도록 하셨다. 또한 그들을 성령으로 새로워지게 하셨으며 복음이 가르치는 새로운 예배 형식에 같이 참여하게 하셨으며 복음이 가르치는 새로운 예배 형식에 같이 참여하게 하셨으며 이전에는 여러 가지로 나뉘어 있던 두 무리 사이를 "화평케 하셨다."

2.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를 막론하고 죄인과 하나님 사이는 절대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원수됨을 제거하시고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자 오셨다(16절).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툼이 생기게 만든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해시킴으로 또 하나의 몸으로 모으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격동시키고 그에게 범죄함을 그치도록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또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원수된 것을 소멸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살해당함으로 또 희생되심으로 하나님과 가련한 죄인들 사이에 있는 원수됨을 소멸하셨다. 사도는 더 나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보에 의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얻게 될 유익에 대하여 설명한다(17절). 십자가 위에서 평화를 이루신 그리스도께서는 가까이 있는 자들이라고 불리는 유대인들에게는 한편 천히 모습을 나타내심으로, 또 이전에는 멀리 있었던 자로 불리우는 이방인들에게는 다른 한편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사도들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평안을 전하셨다." 즉 하나님과 영생에 대한 화해를 선포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진리를 전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전하시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가져옴을 기억하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전도할 것을 명하시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며(그에게 사명을 위임받아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 제자들을 배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멸시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화평의 결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18절). 즉 "저로 말미암아" 곧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그리스도의 증보되심을 힘입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공통된 화해의 아버지가 되셨다. 은혜의 보좌는 우리가 가까이 나아가도록 설립되었고, 그 보좌로 접근할 자유가 우리에게 허용되었다. 우리의 나아감은 성령에 의하여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오도록 대속하시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가까이 오고자 하는 마음과 나올 수 있는 힘을 주시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받아들이도록 은혜를 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왔음을 명심하라. 에베소인들은 그들의 회심을 통하여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이제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라"고 말한다(19절).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의 전에 이방인이었던 사실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내기 위하여서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특권으로부터 외인이 아니며" 유대인들이 자기들 이외의 주위에 있는 모든 나라 사람들을 대하는 것 같은 이방인이 아니며 다만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 즉 이 말씀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도가 되었으며 성도가 지니는 모든 특권을 받을 권리가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교회가 도시로써 비교되었음을 생각해 보자. 모든 회개한 죄인이 그 안에 자유로 거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 비유되었다. 거기서 모든 회개한 죄인들을 가족의 구성원이 되며 하나님의 종이요, 자녀가 되는 것이다. 20절에서는 교회가 건물과 비교되고 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집의 "초석"이 된다. 그 건물의 첫 번 기초는 그리스도가 되시기 때문에 그들은 이차적인 뜻에서 초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건축물을 오히려 신약의 사도들과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전해진 교훈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만나고 하나의 교회를 구성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권능으로 이 건물을 지탱하신다는 말이다. 또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21절)라고 하셨다. 즉 그 집을 구성하는 모든 신도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서로서로 기독교인의 사랑을 나눔으로 연합하여 "성전이 되어가고"(21절) 거룩한 사회를 이루어간다는 말이다. 구약의 성전 안에서 그랬듯이 교회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와 봉사를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총과 축복을 주신다. 이같이 건물은 그 성격상 그의 이름을 두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장소이며 또 그곳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권능에 대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머릿돌로써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고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보편적인 교회는 결국은 제일 으뜸가는 돌로서의 주님 안에서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니라"(22절)고 말씀되어 있는 것이다. 보편적인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리울 뿐만 아니라 개개의 교회들도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리운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모든 참된 신도들은 살아있는 성전으로 불리울 뿐만 아니라 개개의 교회들도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리운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모든 참된 신도들은 살아있는 성전이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치소임"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은 복된 성령에 역사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는 것은 그들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되는 보증이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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