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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남에 대한 부드러운 책망과 자기 반성(갈라디아서 6:1-10)

사도는 전 장에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것"(13절)과 만일 우리가 빠져 들어가면 그가 권고하였던 서로 간의 사랑과 섬김을 나타내는 데 방해가 될 성품에 대하여 경고한 후(26절), 본장의 서두에서는 우리가 만일 지키면 성령의 열매를 증진될 것이고 반대로 육체의 일들은 저지되고, 또한 우리의 행동이 기독교인으로서의 우리의 고백에 보다 일치하게 될 것이고, 서로에게 더욱 유익이 되고 위로가 될 그러한 점들을 추가하여 지시한다.

Ⅰ. 우리는 본문에서 과오를 범한 자들을 상냥하게 대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1절).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성을 띠는 말로써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즉 돌발적인 유혹에 의하여 죄를 짓게 되거든이라고 말한다. 죄에는 계략에 의하여 죄를 지을 결심에 의거하여 짓는 죄가 있고 우연히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본문에서는 후자의 경우가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죄에 대하여는 관대하게 처리할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죄에 대하여는 관대하게 처리할 것을 보여 준다. 본문에 "신령한 너희"라고 한 말은 사역자들 뿐만 아니라(오직 그들만이 영적 인물들로 불리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독교인들 특별히 기독교에서 고위 직분을 맡고 있는 자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1.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 그것은 과오를 범한 자들을 바로 잡는 것이다. 우리는 책임적인 책망으로 또한 지속적이고 적절한 상담에 의하여 그들을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을 해야 한다. "바로 잡다"는 말은 "katarti,tete"로써 어긋난 뼈를 "제자리에다 맞춘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그들의 죄와 잘못을 깨닫게 함으로 또한 그들의 본분으로 돌아올 것을 설득하고 용서하시는 자비를 알게 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감싸 주고 또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신시킴으로 그들을 제자리에 돌아오도록, 즉 그들 본연의 자기가 되도록 애를 써야 할 것이다.

2. 이 일이 수행되기 위한 방법. 그것은 "온유한 심령으로"해야 한다. 형제의 실패를 보고 의기양양한 것처럼 분노와 감정으로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애통하는 자처럼 온유함으로 하라고 한다. 많은 필요한 책망들이 분노 가운데 주어짐으로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부드러움과 조용함으로 이러한 책망을 하는 것이 나타나게 될 때 그들은 깊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3. 온유함으로 책망해야 할 이유. 그것은 "너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연히 죄를 범한 사람을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아무도 그러한 경우가 자기에게 닥칠지 알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유혹을 받을 수 있고 또한 유혹에 의하여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다면 우리도 그러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책망을 받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된다.

Ⅱ. 본문은 우리에게 "짐을 서로 질 것"을 교훈해 준다(2절). 이 말씀은 앞 절과 연관된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이나 어리석음, 부족함을 대할 때 용서와 관용을 보일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비록 우리가 죄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엄격하게 하지 말 것을 가르쳐 준다. 또는 본문은 앞 절과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주어진 말이라고도 보겠다. 즉 우리 모두가 여러 가지 시험과 괴로움에 직면하기 때문에 서로 동정하고 위로하고 상대방의 어려움에 대해 피차 의견을 나누고 우리의 입장이 허용하는 대로 서로 도울 것을 종용하는 말씀이라고도 보겠다. 사도는 여기서 우리를 고무하기 위하여 이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덧붙인다. 이러한 행위는 그의 계명의 법과 일치된 행동이다 그의 계명은 곧 사랑의 법으로 우리로 하여금 서로 관용하고 용서하며 연민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긍휼을 품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와 함께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친히 담당하셨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과 같은 감정을 경험하셨다." 이것이 우리도 서로 모세의 율법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짐을 짊어지게 하는 대신에(모세의 율법을 준수할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서로의 짐을 짊어짐으로 더욱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되어야 한다. 형제들이 과오를 범하였을 때, 그들의 연약함을 같이 지고 그들을 본래대로 회복시키려는 대신에 오만을 품는다는 것이 사도가 추천하였었던 상호 겸양과 동정심에 큰 손상을 가하며, 또 스스로를 속인다는 것이 결국 우리의 형제를 정죄하게 하고 비난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그러므로 3절에서와 같은 경고를 우리에게 한다.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 무엇인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일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이런 일이 전혀 없을 수는 없더라도 그 수효가 적기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또한 사람들이 자기에게 유리한 견해를 택한다든가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현명하다고 우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든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훈계하고 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또한 사도는 생각하였다. 비록 그들 자신이 진리에는 무지하거나 또는 자기 내부에 본질적인 것이나 확고한 것이 없으면서 또 그들이 상상하고 있는 자기 만족과 우월감의 아무런 근거가 없을지라도 능히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질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이러한 자들이란 자신을 속이는 자들일 뿐 아무 것도 아님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없는 것도 있는 척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강요하는데, 이러한 행위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요, 그 결과는 비참한 것으로 나타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자신을 속임은 그들이 받기를 기대하는 하나님 또는 경건한 사람들이 존경을 받게 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유혹과 죄 속으로 더욱 빠져들어갈 것이고 그것들에 의하여 정복당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선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기 기만이 우리가 우리의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빚지고 있는 사랑과 친절을 파괴하며 또 우리 자신에게도 해가 되므로 허영과 탐닉하는 대신에 사도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일인 것이다(빌 2:3). 즉 "아무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교훈이다. 자만은 자기 기만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입은 사랑과 불일치하므로(왜냐하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기만처럼 위험스러운 속임은 없다.

Ⅲ. 우리에게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보라는 충고가 주어진다(4절). 자기의 일이란 주로 우리 자신의 행동 또는 행위를 의미하는 말이다. 바로 이 행위를 돌아보아 개선하도록 사도는 우리에게 지시한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에 비추어서 우리의 행위를 진지하고 공정하게 살펴 보고 이 행위들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가를 살펴 보고 또 하나님과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가를 살피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도는 각 사람의 의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는데 앞장서는 대신에 우리 자신의 나아갈 길을 찾고 탐구하는 것이 휠씬 바람직한 일인 것이다. 우리의 할 임무란 멀리 있다기 보다는 가까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있기 보다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이 교훈과 관련시켜서 볼 때 분명하여지는 것은 만일 기독교인들이 자기를 돌아보는 일에 게으르지 아니하면 그들은 쉽사리 잘못과 실수가 자기들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스스로는 속이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데는 엄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음을 깨닫게 하여 줄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스스로 교만에 빠지는 데서 우리를 보존하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최상의 길임을 보여 준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과 행로를 잘 알수록 연약함과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지 않게 되며 그들을 더욱 도우려고 하게 된다.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유익하고도 필요한 의무임을 설득하기 위하여 사도는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도록 제시한다.

1. 자신을 돌아보는 길은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음을"아는 길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자신의 일을 돌아보고 시련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에게 우리의 그를 향한 신실함과 공의로움을 입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위하여 증언하므로(고후 1:12) 우리의 영혼에 위로와 평안이 깃들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쁨은 다른 사람들이 줄 수 있는 기쁨 곧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좋게 생각한다든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 견해에 설득됨으로 와지는 기쁨과 만족(이러한 기쁨을 거짓 교사들이 얻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13절)보다 더 큰 기쁨과 만족의 근거가 될 것임을 말씀한다. 또는 자기를 돌아봄으로 오는 기쁨은, 자기가 남들보다 나쁘지 않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서 꼭 스스로를 좋게 평가하고 싶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데서 주어지는 기쁨과 만족보다도 더욱 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에게서 기쁨을 발견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기쁨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데서 비롯된 기쁨을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에 비추어 봄으로 또는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인정받음으로써 얻는 기쁨에 대해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자랑할 것도 없지만 우리의 내부에는 스스로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공로란 하나님 앞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양심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고 또 그에게 인정을 받았음을 우리를 위하여 증거할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훌륭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2) "우리 안에서 기쁨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들이 사용하는 잘못된 측정 기구나 또는 우리가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기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에 자신을 비추어 봄으로 "자신을 돌아보는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3) 다른 사람들에게 영광된 것을 찾는 것보다 자신에게서 영광된 것을 찾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양심에 비추어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며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에 대하여는 그렇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서 주어지는 타인의 추천이란 그렇게 길게 가지 못하는 법이다.

2. 사도가 우리에게 자기의 일을 돌아보라고 강력히 촉구할 수 있었던 다른 또 하나의 논리를 각자가 자기의 짐을 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5절). 이 말씀의 뜻은 대 심판 날에 각 사람은 가신의 지금까지의 행위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임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직고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 때에 심판이 있을 것이고 그 심판은 세상이 우리에게 갖고 있는 견해라든가,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품고 있는 근거 없는 자랑심이라든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 또는 못하다는 기준에 의해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들어난 우리의 참 상태 그리고 행해온 행위에 의하여 내려질 것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그 무서운 때를 우리가 각오해야 한다면 우리가 이제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가 장차 자신을 직고해야 한다는 것이요, 과연 우리가 심판 때에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실 상태에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이므로, 우리가 자신과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온건한 생각을 품도록 해야 한다면, 우리 자신이 져야하는 실수나 과오 때문에 서로에게 짐을 지우는 대신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애써야 할 것이요, 이 법에 의하여 우리는 서로의 짐을 도한 나누어졌는지 판단되어야만 한다.

Ⅳ.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사역자들을 부양함에 있어서 관대하고 풍성하게 대할 것이 본문에서 교훈되고 있다(6절). 그러므로 본문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우게 된다.

1. 사도는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듯이 또한 가르치도록 임명을 받은 사람들도 있음을 알아야 할 일, 또는 인정해야 할 일로써 말한다. 목양의 직분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이다. 이 직분은 모든 사람에게 다 개방된 것은 아니다. 이 직분은 오직 하나님이 그 직분을 맡을 자질을 주시고 또 그 일에 부르신 그러한 사람들에게만이 국한되어 있는 것이다. 이같이 직분 자체가 지닌 이유 때문에서도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함이 분명한 것이다(왜냐하면 만일 모든 사람들이 교사들이라고 한다면 가르침을 받을 사람은 없겠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서가 충분한 증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2. 사역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훈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그들이 전해야 할 내용은 "말씀"이다(딤후 4:2). 또한 그들이 선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행 20:27) 사역자들은 "우리의 믿음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요, 우리의 기쁨을 돕는 자이다"(고후 1:24). 신앙과 생활의 단 하나 있어야 할 법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역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연구하고 그 뜻을 깨닫고 자신의 지식을 증진 시키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법도에 근거하여 그들이 말하는 것 이상 그들이 높아질 수는 없는 것이다.

3.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치도록 임명된 사람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축복하사 내리신 좋은 것들도 가르치는 자들이 넉넉히 생활할 수 있도록 관대하고 기꺼이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사역자들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해야 한다"(딤전 4:13) 사역자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한다(딤후 2:4). 그러므로 사역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들을 심고, 한편 그들에게서 육적인 것을 거두는 것"이 합당하고 또 정당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율법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듯이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고전 9:11, 13, 14)

Ⅴ. 본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단순한 가식이나 내용 없는 고백에 의하여 속으시리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조롱하거나 자신을 속이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7절). 그러므로 본문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앞의 교훈과 관련된 말씀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말씀의 의도는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 그들의 사역자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죄됨을 저희에게 확신케 하려는데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니면 이 말씀을 전반적인 신앙의 문제에 관한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수도 있겠다. 즉 사람들이 의무는 태만히 하는 생활을 하면서 그의 의무에 대한 보상에는 참여하려고 하는 헛된 소망을 제거하기 위하여 주어진 말씀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사도는 본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일에서 핑계를 대고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을 가정하고 이 말씀을 하였다. 특별히 자신을 부정하고 신앙에 큰 부분을 떠맡고 있는 것처럼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저 외양으로 또는 내용없는 고백으로 그치는 것을 가정하고 이 말씀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길은 스스로 속이는 길이라"고 그들에게 확증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지만, 그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완전히 아시는 하나님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속으실 수 없으므로 따라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행위를 우리가 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신다. 또는 사람은 심는 대로 거두리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 행하는 상태에 따라서 심판날에 우리가 직고하게 되리라는 말씀으로도 볼 수 있겠다. 우리의 현재의 삶의 시간은 씨를 뿌리는 시간이다. 저 세상에 가면 수확이 있게 될 것이다. 농부가 씨를 뿌린 대로 추수 때 거두듯이 우리도 지금 심는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사도는 더 나아가서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와 성령을 위하여 심는 가의 두 종류의 씨뿌리는 자가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한다(8절). 그 심는 것에 따라서 후에 거두게 될 것인데, "만일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바람을 심는다면 회오리바람을 거두게 될 것이다." 육적이고 관능적인 삶을 사는 자들은 즉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헌신하는 대신에 육에 관한 생각과 염려로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썩은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거두게 되지 못할 것이다. 현재의 천박하고 짧은 만족은 있을지 몰라도 그 생의 결국은 파멸과 비참함만이 안겨질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영을 위하여 심는 자들은"즉 성령의 인도하심과 영향 아래서 거룩하고 영적인 삶, 또한 하나님에게 헌신되고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섬기는 삶을 산 사람들은 그 삶에 따라서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그들은 현재의 삶 속에서도 가장 참된 삶의 위로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요, 삶의 끝에 이르러서는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할 수 있을 것이요, 삶의 끝에 이르러서는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할 수 있을 것이요, 삶의 끝에 이르러서는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려 하는 자들은 스스로 속는 자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신앙에 있어서 위선을 행하는 것은 죄악일 뿐만 아니라,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다. 왜냐하면 우리와 관계하시는 하나님도 모든 우리의 위장을 꿰뚫어 보시며 따라서 우리의 내용 없는 고백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행실에 따라서 후에 우리를 처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Ⅵ. 본문에는 또한 "낙심하지 말라"는 교훈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9절). 우리가 주어진 의무의 일부만이라도 기피해서 안되듯이 또한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싫증을 느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의무에 대하여 대단히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의무를 다함에 있어서 태만해지기 쉽고, 피로를 느끼기가 대단히 쉽다. 특별히 사도가 본문에서 언급한 것, 즉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해 버리기 쉬운 것이다. 그는 이 낙심함에 대하여 우리를 조심스럽게 주의하고 경계하신다. 그리고 그는 낙심하지 말아야 할 바른 이유를 제시해 주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루매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로써 그는 끝까지 선행을 하는 데 신실한 사람들을 위하여 상급이 보존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확증한다. 그리고 이 상급은 적절한 때가 오면 틀림 없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설혹 이 세상에서 안 주어진다면 틀림없이 저 세상에서 주어질 것이다.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우리는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낙심치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의무를 싫어하고 그것에서 떠나면 우리는 이 상급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우리가 끝까지 선을 행하는 일에 굳게 서면 우리의 보상이 지연되는 일은 있더라도 보상은 반드시 주어질 것이요. 우리의 모든 고통과 인내를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풍족히 주어질 것이다. 끝까지 선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지혜와 유익함도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선행에 대해서만이 보상이 약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Ⅶ. 또한 본문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이 처한 곳에서 선을 행하라는 권고를 한다(10절).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라고 말씀되고 있다.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우리가 정말로 기독교인임을 입증하려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권고되고 있는 의무는 앞 절에서 말씀될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사도는 앞 절에서 선을 행함에 있어서 신실한 것과 꾸준할 것을 권하였고 본문에서는 선을 행할 대상과 선을 행하는 원칙에 대하여 권고한다.

1. 이 의무의 대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된다. 우리는 유대인들이나 유대적인 기독교인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사랑과 자선을 베푸는 대상을 너무 좁게 제한하여서는 안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상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믿음의 권속들 또는 같은 공통의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공통체의 일원이 된 사람들에게 우선권을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을 제외시켜서는 안 되지만 이들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기독교인의 사랑은 폭 넓은 사랑이어야 한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 주시나 특히 그의 종들에게는 특별한 방법으로 선을 베푸신다. 우리는 선을 행함으로 "그의 귀한 자녀로서 하나님을 좇는 자들이 되어야만 한다."

2.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대 지킬 법칙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져 있는 동안 또는 우리의 생명이 지속되고 있는 동안 선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어진 생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만일 우리가 이 문제에 있어서 바르게 행하고자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생의 주어진 시간에서 그것을 행하기를 태만히 하지 말고 이러한 유의 일은 다음에나 한다는 식으로 죽는 순간까지 그것을 연기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후에 정말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며 만일 그때 가서 선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선을 행한다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고 어떤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놓쳐 버렸다는 우리의 과거의 태만에 대하여 보상하기에도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선을 행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을 우리의 생의 본업으로 삼아야 한다.

(2)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것을 선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전에 선을 행하였다는 것으로 스스로 자족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조건이 주어질 때마다 우리의 능력이 자라는 데까지 선을 행하도록 마음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라는 지시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전 10:2)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는 의무를 주셨듯이 그는 또한 자신의 섭리에 의하여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허용하신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음을" 기억하자(마 26:11).

[2]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마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능력과 형편에 따라서 조정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이다.

[3] 우리는 사랑과 선을 베푸는 데 있어서 특별히 선을 베풀 적절한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서 우리를 안내해 줄 신적 지혜와 분별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는 어떤 사람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대상에 따라 차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6:2 없음.

 

6:3 없음.

 

6:4 없음.

 

6:5 없음.

 

6:6 없음.

 

6:7 없음.

 

6:8 없음.

 

6:9 없음.

 

6:10 없음.

 

6:11

유혹하는 교사들의 특징(갈라디아서 6:11-18)

지금까지 복음의 뼈대를 논함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말씀에 일치하는 행동을 하도록 설득하기에 진력한 사도는 본문을 통하여 서신의 결론을 지으려는 태도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전하면서 그들에 대한 그의 존경의 특별한 표시를 친필로 큰 글자로 썼다. 그리고 이로써 그가 이 서신을 다른 서신들을 쓸 때 흔히 그렇게 하였듯이 필생을 시켜서 쓰게 하고 뒤에 그의 이름만 서명한 것이 아님을 그들에게 알린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너무나 컸으므로 또한 거짓 교사들이 저희에게 심어 준 나쁜 영향에서 저들을 정상화시키려는 그의 관심이 너무도 컸으므로 그는 이들 교사들이 참 모습을 그들에게 다시 보여 주고 그와 대조적으로 자신의 성품과 행위가 어떠한가 다시 보여 주고 그와 대조적으로 자신의 성품과 행위가 어떠한가를 설명하고 또 이들 교사들과 자기를 비교함으로 그들이 그가 가르친 교훈을 떠나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보다 쉽게 인식시킬 수 있게 되기까지는 붓을 놓지 못함을 본문에서 보게 된다.

Ⅰ.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을 유혹하려고 열심히 이들 교사들의 참 본성을 몇 가지로 세분하여 지시한다.

1. 그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다"(12절). 그들은 외적 신앙에 대단히 열심히 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참된 경건에 관하여서는 약간의 또는 거의 관심이 없으면서도 의식적인 율법의 예식들은 앞장 서서 지키는 척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지키도록 강요하였다. 사도가 그들에 대하여 다음 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들이었다." 오만과 허영과 육적인 마음을 지닌 자들은 육체의 겉치레를 차리는 것밖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들의 겉치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신앙만으로 쉽게 만족해 한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을 거의 갖추지 못한 자들이 신앙을 과시하려고 가장 갈망하는 일은 흔히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고난을 두려워하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고"이방 기독교인들에게 할례받을 것을 강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율법에 대한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무사하게 잠드는 것과 그들의 세상적인 점들을 보존하기를 기꺼이 여겼고 신앙과 선할 양심이 난파되는 것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목적하였던 것은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고 그들 가운데서 자기들의 명성을 보존하는 일이었고 그들 가운데서 자기들의 명성을 보존하는 일이었고 바울과 다른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신실한 고백자들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제시한 고난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3. 그들의 또 다른 특성은 그들이 편파적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이 그들의 육적이고 이기적인 계획들을 돕는 한도를 넘어서까지 율법에 열심을 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갈라디아의 교인들이 할례를 받으므로 "저희의 육체로 그들이 영광을 취하고 또 자기들이 그들을 자기들 편으로 만들었고 유대교로 개종하게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였다. 그 증거로 그들은 갈라디아인들의 육체에 표시를 내고자 한 것이다. 이같이 그들은 신앙을 증진시키는 것처럼 하였으나 실상 신앙의 가장 큰적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편에 치우치는 것과 파당을 만드는 것 보다 신앙의 유익함을 파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Ⅱ. 한편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성품과 행실을 전하여 준다. 또는 그가 본문에서 자신의 믿음과 소망과 기쁨을 고백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별히,

1. 그는 그의 으뜸가는 영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금하셨느니라"고 본문에서 말한다(14절) (역주: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다. 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세주에 의한 구원의 교의를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돌이요 희랍인들에게서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유대적인 교사들도 비록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유대인들에게 순응하여 이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겼고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다 모세의 율법 준수를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혼합시켰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과는 매우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불쾌히 생각하거나 부끄워하거나 그것을 소유하기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확실히 그는 그 밖의 것은 아무 것도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와 나란히 어떤 대상을 세워 놓고 그의 존경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거절하였고 대단히 혐오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금하셨느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의 모든 소망의 근거였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사도로서 전하고자 결심한 도리였다. 그가 십자가를 굳게 의지함으로 어떠한 시련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시련을 감당할 뿐만 아니라 그 시련 안에서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참된 기독교인에게는 제일의 영광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여겨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십자가에 우리의 모든 기쁨과 소망이 걸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기억하자.

2. 그는 세상에 대하여는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하여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세상을 단념함으로 십자가의 능력과 효력을 경험하였다. 이것이 그가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여기는 주된 이유였다. 거짓 교사들은 세상적 성품을 지닌 인간들로서 그들의 주된 관심은 세속적인 데에 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목적으로 신앙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기질의 인물이었다. 그는 세상의 추파와 또한 노여움을 초월하였다.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처럼 무관심하였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자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를 성취하는 가장 좋은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가까이 사귀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높이 존경하면 할수록 우리는 세상을 하찮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사랑하는 구세주의 고난을 생각할수록 세상에 대한 사랑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3. 그는 그의 신앙을 이해 관계를 따라 어떤 또는 저편에 치우치지 않고 건전한 기독교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하였다(15절). 당시에 기독교 가운데는 불행스러운 분열이 있었다. 할례와 무할례가 서로 갈리워지는 명목이 되었다(2:9, 12), 왜냐하면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할례자 또는 할례를 받은 자들이라고 불리워졌기 때문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할례에 대하여 매우 열성적이다. 그들은 할례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갖은 수단을 다 써서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할례를 받게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있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결 더 열심이었다. 다른 사도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할례받는 것을 묵인하였지만 결코 이방인들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거짓 교사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것을 바울은 하찮은 것으로 여겼다. 그는 할례를 이방의 개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장래를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열성적으로 할례를 반대하였다. 그는 단순한 할례냐 무할례냐 하는 문제, 또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유대인이냐 이방인이야 그들이 할례의 사용을 지지하냐 반대하느냐 하는 문제는 할례가 신앙의 중심적 위치로 차지하지 않는한 무시해도 좋은 문제들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즉 기독교 시대에서는 하나님께 사람이 용납되는데 "할례냐 무할례가 소용이 없고 오직 새로운 피조물이냐 아니냐"에 문제가 달린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본문에서 그는 할례가 참된 신앙은 할례를 받았느냐 무할례자이냐, 하는 데 있는 것도 또는 우리가 이 교파에 속하였느냐 저 교파에 속하였느냐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느냐 하는 데 있는 문제다. 즉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느냐 또는 새로운 얼굴로 단장하였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영이 새로워졌느냐 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형성되었느냐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제일 관심을 가지시는 문제였다. 그러므로 사도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만일 우리가 본문을 다른 곳의 말씀들과 비교한다면 우리를 하나님께 가장 용납되게 하며 그러기에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본문에 보면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라"고 하였고 5장 6절에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라" 하였으며 고린도 전서 7장 19절에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들은 통하여 나타나는 것은 참된 신앙의 본질이란 주 예수를 믿는 것과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마음을 주며, 또 할 수 있게 하는 심령의 변화라고 하겠다. 이러한 내적이요, 생명이요, 실제적인 신앙이 없을 때는 외적 고백이나 특별한 명칭이 우리를 세워 줄 수 없으며 또 우리를 하나님에게 천거할 만한 힘도 없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이 참된 신앙을 자신이 경험하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증진되어지기를 바란다면 이로써 그들이 자신의 종래의 입장(할례)을 포기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에 하였던 것처럼 자신의 종래의 입장(할례)을 강조하는 일은 말았어야 옳은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의 역점을 하나님이 정하신 것, 즉 우리로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들에 두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는 사도가 그러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본을 따르는 것이 지혜롭고 현명한 처사인 것이다. 사도는 신앙의 참된 관심의 대상이 무엇이며 자기가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단순히 공허한 명칭이나 내용없는 고백이 아니라. 바르게 또 구원받을 수 있게 변화되는 것임을 보여 준 후 16절에서 이 원칙에 따라 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원한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본문에서 그가 말한 규례는 넓은 의미에서 신앙과 생활의 완전하고 흠 없는 규례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는 복음의 교훈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이 규례란 말은 그가 조금 전에 말하였던 새로운 피조물에 관한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 규례를 따라 행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빈 축복 또는 그가 그들에게 준 소망과 전망은(소망과 전망이라고 한 것은 그의 본문을 표현한 형식이 기원으로도 또한 약속으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강과 긍휼"이었다. 평강이라 함은 하나님과 또한 자신의 양심의 평강이요,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이 세상의 위로를 말한다. 긍휼이라 함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사랑과 호의로써 다른 모든 축복의 근원 또는 근거를 말하는 것이다. 이 평강과 긍휼은 그들 안에 이루어진 은혜로운 변화의 근거 위에 세워진다. 그들이 새로운 피조물로서 행동하고 삶과 소망을 복음의 규례에 의지하고, 또 다스림을 받는다면 그들을 긍휼과 평강을 확실한 것으로 신뢰할 수가 있다. 이 축복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몫이라고 그는 선언한다. 그가 이 말을 통하여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참된 이스라엘 족속인 것이다. 그들이 비록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참된 이스라엘 족속인 것이다. 그들이 비록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더라도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이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속자로서 그와 함께 똑같은 약속의 상속자가 되었고 따라서 본문에서 말씀되고 있는 평강과 긍휼을 얻을 자격을 부여받은 것이다. 유대인들과 유대적인 교사들은 이러한 축복을 할례받은 자들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만 국한시켰다. 그러나 반대로 사도의 복음의 규례대로 행하는 사람들 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행하는 사람들 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선언한다. 즉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은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할례받은 자들이 아니라 복음의 규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복음의 규례를 행하는 것이 평강과 긍휼을 얻는 참된 길인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규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즉 그들 스스로 고안한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그들에게 정하신 규례대로 행하는 사람이다.

(2) 이 규례대로 행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아직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3) 그러나 이 규례대로 살려고 신실하게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은 평강과 긍휼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을 확신해도 좋다는 사실이다. 복음의 규례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또한 다른 사람들과 평강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또한 우리는 현재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신할 수 있듯이 장차 그로부터 긍휼을 입을 것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4. 그는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위하여 박해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한다고 하였다(17절). 그리스도의 십자가 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원자에 의한 구원의 교리가 그가 주로 영광스럽게 생각한 것이었듯이 이제 그는 이 진리를 배반한다거나 이 진리가 부식되는 것을 참고 견디기 보다는 온갖 곤경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한다. 우리가 본 것처럼(12절) 거짓 교사들은 박해를 두려워하였다. 이것이 그들로 할례에 열심을 내게 한 큰 이유였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박해는 관심 밖이었다. 그는 자기가 직면한 어떠한 종류의 상해 앞에서도 동요되지 아니하였고 "그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행 20:24). 그는 벌써 그리스도를 인하여 많은 상처를 입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몸에 주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였다. 곧 그의 예수에 대한 변함없는 따름과 예수에게 받은 복음의 교훈 때문에 원수들의 박해를 받아 생긴 상흔이었다. 이로 보아 그가 복음의 진리와 중요함을 확고하게 믿었고, 또 거짓 교사들이 그에 대하여 잘못 선전하였듯이 그를 할례 예찬자라고 하기에는 전혀 그가 할례와 무관한 것이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그는 사도로서의 그의 권위에 적절한 또한 그가 그들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깊은 관심에 합당한 온화함과 분노를 띠고 그 누구도 그에 가르친 교훈이나 권위를 반박함으로 또는 그에게 행한 것과 같은 비난과 중상에 의하여 그를 괴롭힐 수 없음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것과 그가 고통당한 것으로부터 그들의 옳지 못함과 악의가 드러났고 또한 그들을 지지하거나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매우 부당한 것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사람들이 진리를 따르려면 이 진리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고난받는 것도 기꺼워할 정도에까지 이르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2) 자기들이 신앙 고백할 수도 없고 뿐만 아니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도 없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맡기려 하는 태도는 부당하다는 사실이다.

Ⅲ.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를 굳건하게 하고 정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기록하고자 작정하였던 내용을 다 기록한 후 그의 사도적 직권에 의한 축복을 함으로 본 서신을 끝맺는다(18절). 그는 그들을 그의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그는 그가 그들에게서 받았던 부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하여 그가 품고 있었던 부드러운 사랑과 위대한 겸손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는 매우 진지하고 사랑에 넘치는 기도로써 작별 인사를 대신한다. 매우 진지하고 사랑에 넘치는 기도로써 작별 인사를 대신한다. 이 인사는 로마서 16장 20, 40절, 고린도 전서 16장 23절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의 관례적인 송별 기원이다. 이 기원을 통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그 특별한 역사(役事)로 그리고 지각할 수 있는 증거로 맛본 것과, 그로부터 그들이 도중에 인도되어짐을 받고 그 증거로 맛본 것과, 그로부터 그들이 도중에 인도되어짐을 받고 그리고 그들의 임무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을 강건케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로를 걷게 하며 인생의 모든 시련과 죽음에 직면하면서도 용기와 위로를 줄 수 있는 모든 은혜를 받을 것을 기원하였다. 이러한 은혜를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부른 것은 합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만이 은혜를 구입한 유일한 분이요, 또 지정된 은혜의 분배자이시기 때문이다. 이를 갈라디아 교회들이 자신들에게는 위험스러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견해와 행위에 이끌려 갔으므로 이러한 은혜를 몰수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사도는 그들에 대한 지극한 관심으로 또한 이 은혜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았으므로 그들을 위하여 간절하게 은혜를 갈망한다. 진실로 이 은혜가 그들의 영혼에 함께 해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은혜의 영향력을 그들의 영혼에 연속적으로 경험해야 할 것이며, 그 은혜를 통하여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진실하고 올바르게 할 마음을 공급받아야 하겠고 또 그러한 능력을 공급받아야 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행복하게 된 것 이상의 것을 바랄 필요는 없다. 사도는 이들 교인들을 위하여 이 은혜를 간구하였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가 얻기 위하여 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과 우리를 그 은혜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그는 "아멘"으로 본 서신을 끝 맺는다.

 

6:12 없음.

 

6:13 없음.

 

6:1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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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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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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