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갈라디아서 0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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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굳세게 거할 것을 교훈함(갈라디아서 5:1-12)

본장의 전반부에서 사도는 유대적 경향을 띤 교사들에 대하여 주의하라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명하였다. 이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은 율법의 멍에 아래로 다시 메어 두려고 하는 자들이었다. 그는 전에 이들을 반박하는 논리를 전개하였고 그리고 복음의 정신에 입각한 교사들의 원리와 입장과 저희의 입장이 얼마나 대조적인가를 광범위하게 제시하였었다. 본문은 그가 논하였던 모든 사실을 다시 한 번 개괄적으로 언급하고 구체적 사례에 적용시킨 말씀이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율법의 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것과 이제 모세의 율법은 더 이상 효력이 없으며 기독교인들이 그것에 복종할 의무가 없음을 논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이 권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고찰하자.

1. 우리가 복음 아래서 해방을 얻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우리는 형식적 율법과 도덕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는 형식적 율법을 준수할 의무에 구속을 받지 않으며 또 엄격한 도덕법에 매이지 아니한다. 이 도덕법을 각 사람을 그들에게 행하라고 기록된 대로 계속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한다(3:10).

2. 우리가 이 자유를 얻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이다. "우리를 자유케 하신"분은 바로 그분이시다. 그의 공적을 통하여 그는 파기된 율법의 요구를 채우셨고 또 왕으로서의 그의 권위에 의하여 그는 유대인들에게 강요되었던 형식적 율법 준수에 대한 의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

3. 그러므로 이 자유 안에 "굳세게 서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즉 끊임없이 실천하고, 복음과 또 복음이 주는 자유를 따르고 남의 꾀임을 받아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것이요, 모세의 율법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설득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전반적인 경고 또는 교훈이었다. 사도는 다음 절들에서 몇 가지 논증 또는 근거를 제시함으로 이 경고를 강조한다.

Ⅰ. 할례에 대한 그들의 순복과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여 의를 얻으려는 저들의 의도는 기독교인으로서의 그들의 신앙에 명백히 모순이 되는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이 얻는 모든 유익한 것들을 포기해 버리는 행위라고 한다(2-4절).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아래의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어떠한 엄숙함으로 사도가 이 사실을 주장하고 선포하였는가 하는 점. 본문에 보면 그는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2절)라고 서두를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3절에 반복하여 "내가 너희에게 다시 증거하노니"라고 말씀한다. 이 말을 풀어 쓰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사도임의 스스로 입증하였고 그리스도에게 나의 권한과 교훈을 위임받은 나는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선포하며 또한 나의 신용과 명예를 걸고 맹세하노라." 이로써 그는 지금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대단히 중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존망이 걸릴 문제임을 보여 주고자 한다. 그는 평소에 할례에 대하여 전하는 전도자가 아니었고 따라서 그들이 할례에 복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장 중대한 문제로 취급하였다.

2. 그가 그토록 엄숙하고 확신있게 선포한 내용, 그 내용은 "그들이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단순히 할례만일 것이라든가 또는 그가 말하는 의도가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그리스도의 덕을 입지 못하리라는 뜻에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구약의 모든 성자들도 할례를 받았었고 바울 자신도 디모데가 할례받을 것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할례에 대하여 말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할례는 유대적 경향을 띤 교사들이 강요하고자 하는 그러한 식의 할례였다. 그들은 "저희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가르쳤다(행 15:1). 그러므로 그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4절에서의 의도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거기서 그는 율법에 의하여 의롭게 되기를 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저주를 표현한다. 그는 할례에 대하여서도 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할례에 순복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없고 그들에게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주어지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아무런 힘도 없고 또 그들은 은혜에서 떨어진 자"임을 선언한다. 이 모든 사실들을 통하여 갈라디아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인(義認)의 길을 버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은 하나님이 도저히 의롭다고 보실 수 없는 그러한 자리에 스스로 처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를 진 자들이 되었고, 그들에게 요구된 이러한 복종은 그들이 결코 수행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일에 실패한 자들에게는 저주가 선포되고 정죄되며 결코 그들이 자기들을 의롭게 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었다. 이같이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반역하고 그들의 소망을 율법에다 둔다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없을 것이요, 그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같이 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 기독교를 배척하였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유익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켰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받아들인 가르침에 견고히 서서 구속(拘束)의 멍에는 다시 메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빠진 자들도 구할실 수 있지만 한편 그가 아무 유익도 줄 수 없는 무리들로 있다는 사실이다.

(2) 율법에 의하여 의롭게 되기를 구하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도록 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에 그들의 소망을 세움으로써 그로부터 오는 모든 소망을 거부해 버린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그들의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고 의지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구세주가 되기를 원하시지는 않는다.

Ⅱ. 그들을 복음의 교훈과 자유에 굳게 세우기 위하여 자신과 또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다른 유대인들의 경우를 본보기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이들 신앙의 본이 될 만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렸음"을 저희에게 알려 준다. 그들은 본래 유대인들이었고 율법 아래서 양육을 받았지만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이른 후 모든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그를 믿음으로만이 주어지는 의인과 구원을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결코 율법의 행위에다 그들의 소망을 두려고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었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기독교인들이 기다려야 할 대상. 그것은 "의의 소망이다." 이 소망에 의하여 우리는 저 세상의 행복을 이해하게 된다. 세상에서의 삶은 기독교인들의 희망의 대 목적이므로 의의 소망은 또 한 기독교인들의 소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의에 근거한 저 세상에 대한 소망으로써의 의의 소망은 저희들 자신의 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 예수의 의에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의 생활이 이러한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위하여 이 의를 얻게 해 주며 또 그것에 의하여 우리가 의를 소유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 수단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인 것이다.

2. 그들이 이 행복을 얻기 위하여 소망할 수 있는 근거. 그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 한 믿음을 통해서다. 또한 그들이 이러한 행복을 얻기 위하여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믿는 길밖에 없다. 이 방법을 통해서만이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 행복을 소유할 자격을 획득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으며 또는 저 세상에서 그 행복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3. 그들이 기대하는 이 소망이 우리에게 와지는 통로,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이제 그들은 성령의 지시와 영향력 아래 행동하게 된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권유에 설득될 수 있었던 것도 또 그를 믿을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의의 소망을 바라 볼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지시 아래 이루어진 것이요, 그의 협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도가 기독교인들이 취할 길을 이같이 규정한 것은 그들이 만일 다른 방법으로 의롭게 되거나 구원받기를 기대하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과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이 받아들였던 복음의 가르침을 대단한 관심을 갖고 따라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Ⅲ. 그는 기독교 제도의 성격과 목적을 논하면서 기독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을 폐지시키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방법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설립하였음을 말한다. 그는 그들에게(6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즉 복음의 통치 아래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고 말한다. 율법이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차이가 있었고 할례받은 자와 안 받은 자의 차이가 있어서 전자는 하나님의 교회의 특권을 받을 자격을 누렸고 후자는 그 자격에서 제외되었지만 복음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어서는 사정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할례자든 무할례자이든 구별이 없게 된 것이다. 그는 한편에게는 잘해 주시고 다른 편에서는 나쁘게 대한다거나 한편은 하나님께 천거하면 다른 편은 제외한다거나 하시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유대적 경향을 띤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무화시킨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일 뿐 아니라 이러한 저들의 말에 복종하는 갈라디아 교인들도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데는 구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제시한다. 그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사랑에 의하여 그 진실됨과 순수성이 밝혀진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졌다면 할례나 무할례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할례가 없어도 그 누구도 그들의 가로막지를 못하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없이는 어떤 외적인 유리한 조건이나 고백도 우리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할 수 없음을 기억하자.

2. 참된 믿음이란 역사하는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것은 사랑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우리의 형제에 대한 사랑에 의하여 역사한다. 이같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 중에 본질이라고 하겠다.

Ⅳ. 그들을 뒷걸음질하는 데서 돌이켜 미래를 위하여 더욱 확고하게 세우기 위하여 그는 그들의 훌륭하였던 출발을 상기시키고 어디서 그들이 있었던 상태에서 이탈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7절).

1.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달음질을 잘 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이 처음 기독교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그들이 매우 모범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들은 기꺼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신앙의 생에 대하여 열심히 냈다. 그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드려졌고 또 그리스도의 제자되었음을 선언하였으며 동시에 그들의 행동도 그들의 고백이나 기독교인으로의 성품에 어긋남이 없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기독교인의 삶은 경주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상을 얻고자 하면 잘 달려야 하고 또 끝까지 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2) 우리가 이 경주를 달리는 것만으로, 즉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고 잘 달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신앙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얼마 동안은 잘하였었다. 그러다 도중에 잘못되어 길에서 이탈하거나 또는 도중에 힘이 빠져버리고 비틀거리었다. 그러므로

2. 그는 "누가 너희를 막느냐?"고 물으면서 대답하기를 재촉한다. 어찌 되어서 그들이 잘 달리던 방해한 자들이 누구인지 또 방해한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스스로 자문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그들이 그들에게 이 같은 혼란을 야기시켜 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 또 저희가 그들에게 제의한 것이 그들의 현재의 생활 속에서 의롭게 되기에 충분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라.

(1) 신앙 생활의 출발을 잘하여 한동안 잘 달리던 많은 사람들이(즉, 경기를 위하여 지정된 라인 안에서 열심히 또 재빠르게 뛰던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쳐 계속 뛰지 못하거나 또는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2) 잘 달리다가 이제는 길에서 벗어났거나 또 길 가운데서 지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그들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초신자들은 사탄이 그들의 장도(壯途)에 거치는 돌을 놓으리라는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코스에서 이탈하게 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할 것이란 점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정로에서 벗어날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발견한 때에는 언제든지 그들을 훼방하고 있는 것이 진리를 순종치 못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며 따라서 그들이 신앙 안에서 행한 모든 공을 상실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 것임을 말한다.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전하였고, 또 그들이 받아들이고 신앙 고백한 그 복음의 진리임을 확증한다. 복음 안에서만이 의인과 구원의 참된 길은 발견될 것이며, 또 복음의 유익을 그들이 얻을 수 있기 위하여서는 그들이 복음에 순종하고 굳굳하게 그것을 따르며 복음의 지시에 따라 계속 그들의 생을 지배받고 소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복음에서 이탈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가장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진리는 믿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복종해야 하며 우리가 진리의 빛 안에 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2] 진리에 바르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확고하게 계속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3] 진리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듯이 진리에 복종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 잘 달리다가 계속 견디지를 못하고 걸려 넘어지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Ⅴ.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을 복음으로부터 이끌어 내려는 해로운 설득에서 벗어나 복음에 대한 믿음과 자유 안에 굳건히 거하라고 권한다(8절). 그러므로 그는 "그 권면이 너희들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도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권면은 물론 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며 모든 의롭다함을 얻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다 율법의 행위가 결합되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권면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유대적 경향을 띤 교사들이 그들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쉽사리 넘어가고 있는 권면이었다. 그들이 이러한 권면이 그들을 부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나 또는 사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말한다. 사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권위에 의하여 그들에게 전파되었고 복음의 교제 가운데로 그들이 불리움을 받았을 것이며 또 사도는 그들을 복음에도 부른 도구로써 부름받은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권면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권면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인과 구원의 길과는 정 반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권면은 그들이 바울 자신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누가 무어라고 하더라고 그는 내내 할례를 반대하여 왔고 할례를 강요하는 설교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평화를 목적으로 하여 할례를 용인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결코 할례를 기독교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더구나 구원받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 일은 없었다. 그 권면이 그들을 부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그러한 가르침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판단해 보기를 권하고 또한 그것이 사탄과 그의 도구들에게서 나온 것임을 충분히 암시한다. 사탄과 그의 종자들은 이러한 수단을 써서 그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복음의 진보를 꺽고 결국 갈라디아 교인들로 복음을 거절한 이유를 들어 그들을 돌아서게 하며 그들이 전에 받아들였던 진리 안에 견고히 설 수 없도록 하는 데 애를 썼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기독교인들 가운데 역사하는 신앙의 다른 권면을 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부르신 구분에게서 나왔는가 하는 점과 그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권위에 근거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관심을 갖고 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2. 만약 조사를 하여 그들이 이러한 근거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이 나타나면 누가 그들의 권면을 들으라고 우리에게 강요한다고 해도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지 말고 그들을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Ⅵ. 이 주장의 파급으로 야기되는 나쁜 결과 및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나쁜 감화력, 사도는 그들이 거짓 교사들과 마음이 맞아서 그들이 강요하고 있는 교훈에 말려들고 있음에 대하여 그 불가성을 계속 논증한다. 사실 그들의 잘못은 바울이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자기들을 이러한 교훈과 행실에도 이끌고자 하는 거짓 교사들이 그들 가운데 몇 사람 되지 아니하며 그들이 이들 교사들에게 동조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들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이 할례에 응하고 유대 율법의 몇몇 의식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를 배척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 유대교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는 그가 이 서신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그들의 거짓 교사들에 대한 추종이 큰 잘못은 안 된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거짓 교사들이 몇 명 안 되므로, 따라서 그 일에 연루(連累)된 사람이 많으리라고 그가 생각할 이유는 없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가면을 베껴 버리고 그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위험이 있음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는 "적은 누룩이 온 덩이 퍼진다"(9절)고 말한다. 즉 기독교 전체가 이러한 한 가지의 잘못된 원리에 의하여 오염되어 부패될 수 있다는 것과 모든 기독교인 공동체가 이러한 가르침을 베푸는 한 사람에 의하여 오염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러한 단순한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걸려들지 말아야 할 것과 또는 만일 어느 누가 이러한 가르침에 걸려 넘어진 자가 있으면 적절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들 가운데서 이 오염을 제거해야 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교회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과오를 용납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거나 또 자신들이 이러한 과오를 퍼뜨리는 데 참여하는 자들은 교리에 위험스러운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본문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거짓 교사들이 부지런히 퍼뜨리려 하고 또 이들 교회의 몇 사람이 거기에 동조하고 있는 그 교훈은 사도가 앞에서 보인 바와 같이 기독교 자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의 수효가 비록 적을지라도 이러한 움직임이 품고 있는 치명적 영향과 인간 본성을 타락시키는 힘을 생각하여서 또 이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감염될 위험이 너무나 높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문제를 가볍게 또한 무관심하게 넘겨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저희에게 상기시킨다. 만약 이들을 제 멋대로 버려두면 오염이 더욱 퍼져 많은 사람들이 곧 오염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약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번 사례를 묵인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완전 파괴시킬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었다.

Ⅶ. 그는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그가 그들에 관하여 갖고 있는 소망을 표현한다(10절).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나는 너희가 다른 아무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고 말한다. 그는 그들에 관하여 여러 가지 염려와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이것이 그가 그들에게 분명한 입장을 자유로이 밝힌 이유였다) 하나님의 축복을 통하여 그가 쓴 내용에 관하여 그들도 같은 마음으로 동조하여 그가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거기에 거부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로 확신에 거하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본문을 통하여 그는 대단히 우려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최대 희망을 품어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그들의 믿음의 불확고성에 대한 그의 책망에 그들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보다 거짓 교사들에게 더욱 비난의 화살을 겨누었다. 이 사실은 그가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고 한 말을 통하여도 엿보게 된다. 그는 (1:7 에서 말하였 듯이) 그들은 요란케 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자들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 서서 부지런을 떨며 그들 가운데 소요를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되고 있는 특정 인물들을 지적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변절이나 꾸준치 못함보다 거짓 교사들의 이러한 결점에 대하여 비난한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죄와 과오를 책망할 때는 주모자와 선동을 당한 자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같이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면서도 그들이 돌아 올 수 있도록 더욱 잘 설득할 수 있기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에 그들이 굳건히 설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잘못을 대단히 이해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선동한 자는 그가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또한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을 선언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저희의 행위에 따라 응분의 처벌을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원수 노릇를 하고 있는 그들을 향한 응분의 분노를 발하여 "그들은 추교시킬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와 그에 의한 온갖 소망에서 그들을 제외시킨다는 말은 아니고 교회의 경고를 통하여 그들을 교회에서 쫓아 버릴 것을 바랐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복음의 순수성을 침식시키는 이들 교사들에 대한 경고가 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복음에 대한 믿음을 저해하고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평화를 동요시키는 자들은 그들이 사역자이든 혹 다른 누구든지 불문하고 기독교 공동체와 사귐을 나누는 특권을 발탁하고 마땅히 교회에서 제거해야 한다.

Ⅷ. 그들의 유대교의 경향을 띤 교사들의 말을 듣는 데서 이들 갈라디아 교인들은 돌이키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또한 이들 교사들이 그들에게 심어놓은 나쁜 영향에서부터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는 이들 교사들을 자기들의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매우 비열하고 불순한 방법을 사용한 자들로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자기들의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자기들의 목적을 쉽게 관철시키기 위하여 바울 자신을 비난하는 일까지 서슴없이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시도한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할례에 응하게 하며 또 기독교에다가 유대교를 혼합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목적을 더 잘 성취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바울 자신도 할례를 전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이 사실은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11절)이라고 한 말을 보아서도 그들이 그들 할례를 가르친 자로 선전하였음이 명백히 나타난다. 그들은 이 거짓 증거로써 갈라디아인들을 설득하여 할례를 받게 하려고 하였다. 아마도 그들이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할례받도록 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서였던 것같이 보인다(행 16:3). 그러나 그는 그 때의 경우에는 선의에 의하여 할례를 용인하였지만 그가 할례를 전하는 자였고 또 그들이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할례를 강조한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부인한다. 그는 그들의 자기에 대한 책임 전가의 부당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만일 갈라디아 교인들이 차분히 생각해 본다면 스스로 바울의 입장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1. 만일 그가 할례를 전하였다면 박해를 면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내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라고 말한다. 그가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만일 그가 그들을 할례를 전하는 자로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자들로규정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를 향하여 지금 같은 행동을 취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노리고 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만일 그가 그들의 수중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면 그는 그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기를 커녕 그들의 환영을 받았을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그들에게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그들과 동조하지 않았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되었다. 그는 이로써 자기가 비난을 받고 있는 교의를 전하기 보다는 아무리 큰 고난이라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하였다.

2. 만일 그가 유대인들에게 굴복하였다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저희에게 굴복하였다면 그들이 지금 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가르침에 반하고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바울이나 그의 사람들도 지금처럼 고난을 받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고전 1:23)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 유대인들에게는 거침돌이 되었음을 알려 준다. 그들이 할례와 모든 율법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도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극단적인 분노를 터뜨렸고 솔선하여 그리스도의 도에 대한 신앙 고백자들을 반대하고 핍박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제 만일 바울과 그와 입장을 같이 하는 자들의 할례는 아직도 보존되어야 하며 모세의 율법 준행이 구원에 필요한 조건으로 기독교 신앙에 도입되어야 한다는 저들의 견해를 따랐다면 십자가의 도에 대한 저희의 분노가 상당히 경감되었을 것이요 그들이 그 때문에 지금 받고 있는 고난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그를 할례의 교리를 전하는 자라고 나서서 중상하는 자들이 쉽사리 이러한 움직임에 편승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진리를 부패케 하고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기 보다는 안일과 다른 사람들과의 우호적 관계 또는 생명까지라도 포기하고자 하였다. 이 까닭에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기독교에 대하여 적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그를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자라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사도는 그의 적들이 그에게 덮어 씌운 부당한 비난을 규명한 동시에 그를 이렇게 부당한 방법으로 대우하는 자들을 그가 얼마나 경멸하는가 하는 점과 어떤 이유 때문에 심지어 그들이 제거되기까지 소망하였는가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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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 생활의 실천에 대한 강조(갈라디아서 5:13-26)

본장의 후반부에서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거짓 교사들의 함정을 피하는 가장 좋은 자구책으로 진지한 경건 생활을 실천할 것을 권고한다. 특별히 두 가지 사실을 그들에게 말한다.

Ⅰ. 서로 다투지 말고 살아할 것을 권고한다. 그는 그들에게(13절) "그들이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에 그들을 굳건히 서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이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 것" 즉 그들이 부패한 것에 대한 애착을 갖거나 그러한 행위에 탐닉하지 말 것과 특별히 이러한 일들을 멀리하고 가까이 하지 말며 이러한 일들로 그들 가운데 분쟁과 다툼의 근거가 되게 하지 않도록 할 것을 당부한다. 서로 애정을 간직하여 그들 가운데 다소의 견해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서로 존경과 친절을 베푸는 데 주저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마땅히 지녀야 하는 덕성인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즐기는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셨지만 그렇다고 그가 율법에 대한 책임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것은 아니다. 복음은 "경건에 관한 교훈"으로(딤전 6:3) 복음이 죄를 조금이라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하고 정복할 강한 의무에도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라 하겠다.

2. 우리가 기독교인이 자유 안에 굳게 서야 하겠지만 그 자유를 근거 삼아 기독교인이 베풀어야 할 자애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유를 동료 기독교인들이 우리와 다른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그들과 다투는 근거로 삼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오직 서로 온후하게 대하며 사랑으로 서로 섬길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득한다. 그가 이 목적을 위하여 그들에게 제시한 두 가지 생각해야 할 점들이 있다.

(1)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14절)는 사실이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핵심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첫번째 의무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두번째 의무인 것이다. 사도는 본문에서 후자의 것을 언급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상호 관계를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 말씀을 그들을 서로 사랑하도록 설득하는 근거로 사용한 것은 이것이 그들의 신앙의 신실성을 나타내 주는 좋은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으며 또 그들 가운데 존재하는 분쟁과 분열을 뿌리 뽑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요 13:15). 그리고 자제할 수 있다면, 그렇다고 기독교인들 가운데 있는 불행한 불일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저지하는 작용은 한 것이다.

(2) 서로 다루는 것은 슬프고도 위험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15절).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만일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대신에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한다. 만일 그들이 인간답게 또한 기독교인답게 행동하는 대신에 사나운 짐승들처럼 서로를 찢으려고 덤빈다면 그 결과로 아무 유익함도 없을 것이고 하나씩 멸망하게 되고 말 것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 분쟁하고 다투는 데 열심을 내지 말아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형제들간의 다툼이 계속되면 공동의 멸망밖에 낳을 것이 없음을 기억하자. 서로 먹으려고 하는 자들이 하나씩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기독교 교회는 결국 그들의 자신 손에 의하여 파괴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서로 돕고 같이 기쁨을 나누어야 할 기독교인들끼리 짐승들처럼 서로 물면서 잡아먹고자 한다면 결국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 베풀 것을 보류하시고 사랑의 성령도 그들을 버려둘 것이며 그들을 버려둘 것이며 파괴시키기를 구하는 악령이 득세할밖에 그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Ⅱ. 그들이 전적으로 죄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강조한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다른 모든 다툼을 그치고 그 대신 죄를 대항하여 싸우는 데 전념을 다한다면 교회를 위하여 큰 축복이 될 것이다. 또한 그들 서로 간의 견해 차이 때문에 서로 물고 먹으려 하는 대신에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서와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죄를 추방하기 위하여 전념을 기울인다면 교회에서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죄야말로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갖고 싸워야 할 대상이며 죄에 반대하고 죄를 정복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우리의 본분으로 죄에 반대하고 죄를 정복하는 것을 무엇보다 우리의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극을 주고 도움을 주기 위하여 사도는 다음 사실을 보여 준다.

1. 각자의 내부에는 육과 영 사이의 투쟁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17절).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육체(우리의 부패하고 육적인 부분을 이르는 말이다)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고 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모든 역사를 반대하고 영적인 모든 것에 대하여 항거한다. 반대로 "성령(우리의 내부의 다시 새로워진 부분)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고 한다. 또한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의지와 소욕을 반대한다. 이렇게 상반되는 세력의 다툼으로 "우리는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 안에 있은 은혜의 본질이 우리의 타락된 본성이 우리를 이끌어 가려고 하는 모든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처럼 또한 부패하고 육적인 본질로부터의 도전에 의하여 우리가 하기를 원하는 모든 선을 행할 수도 없게 된다. 자연인에게도 일종의 이러한 투쟁이 있다(그의 양심의 소리와 마음의 부패된 성품이 서로 투쟁한다. 그의 양심의 소리는 자신의 악성을 정복하려고 하며 또 그의 악성은 양심의 소리를 침묵을 시키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일종의 선한 본질이 형성된, 다시 새로워진 사람에게도 옛 성품과 새 성품 사이에 투쟁이 있고 잔존한 죄의 세력과 시작된 은혜 사이에 투쟁이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이 양자의 작용이 끊임없이 존재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2. 이 투쟁에서 우리가 보다 나은 편에 속하는 것 또한 우리의 악성에 반대하고 믿음에 거하며 욕망을 버리고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는 사실이다. 사도는 이것을 우리의 의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제시해 준다. 우리가 이 나은 길을 보다 효율적으로 다라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그는 한 가지 원칙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즉 그것은 지체 없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악성의 기선을 제압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곧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영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역주: 한글 개역에는 성령으로 되어있으나 K.J.V에는 영으로 되어 있음). 본문에 영이란 성령자신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강림하셔서 그가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한 자들의 심령속에 거하시며 그들이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남아서 선을 거스림으로 은혜로운 본질을 백성들의 마음에 심어 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육체에 항거하게 하신다. 따라서 본문에서 우리에게 요구된 의무는 복되신 성령의 인도와 지배 아래 스스로 거하는 일이며 우리 안에 생성된 새로운 성품의 지시에 순응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의무 우리 생활의 일생 과정을 통하여 그리고 생의 여로에서 주의 깊이 이루어진다면 비록 우리가 우리의 부패한 본성의 거스림에서 완전히 자유로와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욕망에서 비롯되는 악의 성품에 사로잡히는 데서 보호될 것을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죄의 감명에 대한 가장 좋은 해독제는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영적인 일들에 관하여 많은 담화를 나누며 영혼의 일들을 마음에 두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인 부분으로 육욕이 자리잡은 몸의 다른 부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을 말씀의 인도하심에 맡겨야 한다. 말씀을 통하여 성령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며 우리가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그의 도움과 영향에 의존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육의 욕망을 이루는 데서 그들을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는 것처럼 동시에 그들이 참된 기독교인이라는 훌륭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18절) "너희가 만일 성령은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그는 "너희가 세상에 있는 동안은 육과 영 사이의 투쟁을 각오해야만 한다. 영이 육체를 거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은 성령을 거슬려 욕당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었고 그리고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령이 너희 생의 과정 속에서 우위에 서시게 되면, 또한 만일 너희가 성령이 너희 가운데 심어 놓으신 영적 성품과 기질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원리로 삼고 하나님의 은혜를 너희 본질로 삼는다면 비록 너희가 아직 율법의 명령과 위력 아래 있기는

하지만 너희가 율법 아래 곧 율법의 명령과 위력 아래 있기는 하지만 너희가 율법 아래 곧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들의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요 성령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고 말씀한다.

3. 사도는 육체의 일들을 분류한다. 육체의 일을 우리는 경계해야한 하고 또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들을 소중히 여기어 열매를 맺어야 한다(19절 이하). 그는 이 두가지를 세목까지 자세히 분류함으로 바울은 나아가 자신이 어떠한 자이냐 하는 점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려 한다.

(1) 그는 "육체의 일"부터 시작한다. 그것들은 그 수도 많은 동시에 분명한 것이다. 그가 본문에서 말한 것들이 육체의 일들이며 부패하고 타락된 성품의 소산이라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육체의 일들의 대부분은 본질 자체로부터 비치는 빛에 의하여 또한 성서의 빛에 의하여 죄로 규정된 것들이다. 그가 분류한 세목은 대단히 다양한 것이었다. 어떤 것들은 제 7계명에 거스리는 죄들인데 그것들은 "음행, 간음, 더러운 것, 호색"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죄들을 행동에 옮겼을 경우뿐만 아니라 범죄를 실행할 동기가 될 수 있는 그런 생각, 말,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우상 숭배와 술수" 같이 제 2계명에 거스리는 죄들이다. 또 어떤 죄들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으로써 이웃에 대한 죄 또는 형제애라는 철칙에 위배되는 죄들이다. 이 죄가 동기가 되어 "분리함과 이단과 시기"가 유발되며 때로는 "살인"으로도 파급된다. 즉 우리의 동료들의 이름이나 명성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그 생명 자체까지 해치는 죄를 낳는다. 또 다른 죄들은 "술취함과 방탕"같이 자신을 거스리는 죄들이다. 그리고 그는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육체의 일들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주의할 것을 경고한다. 그리고 그들이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 볼 것을 소망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서는 전에 내가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들이 아무리 헛된 소망으로 자신을 속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육체의 일들을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 나라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죄들임이 자명하다. 영들의 세계는 육체의 탐욕에 젖어 있었던 자들에게는 결코 위로가 되지 못한다. 또한 외롭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먼저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는 한"(고전 6:11)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지도 않으며 또한 그의 앞에 오게 하시지도 않는다.

(2) 그는 성령의 열매들 또는 거듭난 성품의 열매들에 대하여 분류한다. 이것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맺기 위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들이다(22,23절). 본문에서 우리는 육체 또는 악한 성품이 인간들에게 죄를 행하게 하는 동기가 되고 자극제가 되기 때문에 죄를 "육체의 일들"이라고 칭하였었다. 마찬가지로 은혜는 뿌리가 있으므로 열매가 달리는 것처럼 오로지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은혜를 "성령의 열매"라고 하였다. 사도는 앞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해로운 일을 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서로 해를 끼치게 하는 육체의 일들에 관하여 주로 분류하였었고, 여기서는 기독교인들 자신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서로 타인을 용납하게 하는 성령의 열매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 말씀은 그가 전에 주었던 경고나 교훈(13절), 즉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에 상합하는 말씀이다. 그는 특별히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할 것을 권고한다. 또한 "희락"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친구와의 담화를 나눌 때 기쁨으로 서로 이해하는 태도를 말하며 그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또 우리의 마음에 화평을 간직할 것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나 행동이 평화로운 권고한다. 또 그는 "오래 참음"을 권고하는데 이는 분을 더디 내는 인내와 남의 가해에 대하여 너그러운 태도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자비"를 권고하는데 이는 부드러운 성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그는 우리가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상냥하고 예의있게 대한 것과 어느 누가 우리에게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너그러이 대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였다. 다음 그는 "양선"(친절과 덕행을 뜻함)을 권고한다. 이 말은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는 말이다. 다음에 그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약속하거나 고백하는데, 있어서 "신실한 것"(충성) 곧 변함없고 정의로우며 정직할 것을 권고하며, "온유"할 것을 권고한다. 즉 온유함으로 우리의 혈기와 원한을 다스림으로 쉽게 격노하지 말 것과 설사 화가 나 있을 때에도 곧 마음에 평정을 회복하기를 권고한다. 마직막으로 그는 "절제"를 권한다. 즉 먹고 마시는 것에 있어서 또한 생활의 다른 즐김에 있어서 지나치지 말고 분수를 지킬 것을 권한다. 이러한 일들을 금지하거나 또는 성령의 열매들이 발견되는 이러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처벌할 그러한 법은 없다고 사도는 말한다. 이로써 그들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것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부에 작용하는 성령의 열매들을 18절의 말씀처럼 그들이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며 따라서 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함"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육체의 일들과 성령의 열매들을 분류함으로 우리에게 피하고 반대할 것과 또 귀하게 여기고 촉진시킬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사도는(24절) 이것이야말로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진지하게 노력하고 보살펴야 할 것임을 제보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외양이나 고백으로써 뿐만 아니라 신실함과 진실됨에 있어서도 참 기독교인인 사람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라"고 말씀한다. 그들이 세례를 받음으로 이러한 책임이 그들에게 주어졌고(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로 세례를 받으므로 그의 죽음과 함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롬 6:3) 동시에 이제는 그가 우리의 죄를 인하여 죽으셨듯이 그들도 신실하게 이 일을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며 그들의 주님과 일치하여 죄에 대하여서는 죽어지내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 죄에 대하여서는 완전히 승리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자기 안에 성령도 거하실 뿐만 아니라 육체도 지니고 있다. 아직도 그들에게 적지 않은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그들의 죽을 몸에서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어 몸의 사욕을 순종치 않게 되었듯이"(롬 6:12) 이제 그들은 죄의 완전한 파괴를 구해야 하며 죄를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겨야 하셨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또 그와 연합되어 있고 또 그에게 관심이 있음을 시인한다면 육체를 그것의 타락한 열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우리의 계속적인 관심사로 여겨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죄의 종으로 복종시키는 자들을 결코 자기의 사람들로 인정하시지 않는다. 사도가 본문에서는 참된 기독교인들을 보살피고, 그 특성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언급만 하였지만 이 말에는 반면에 그가 전에 분류하였던 성령의 열매로 우리가 보일 수 있어야 할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신앙에 대한 우리의 신실성을 보여 주는 데 적지않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악을 행하는 것을 멈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을 행하는 것까지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독교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을 뿐만 아리나 의에 대하여 살 책임도 부여한다. 육체의 일들을 거절한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도 요구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참으로 속하였음을 나타내려고 한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로 여겨야 할 것이다. 본래 사도의 의도는 전자를 피하고 후자를 힘쓰는 것을 우리의 의무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우리의 특성을 유지하는데 의무가 필요한 것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 속에서(25절) 한 마디로 집약된다. 즉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는 말씀에 집약된다. 다른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오도록 고백한다면 또는 우리의 마음 속의 영이 새롭게 되었고 영적 생활의 원리로 덧입힘을 받았다고 고백한다면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므로 그것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는 말씀이다. 그는 전에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수여되는 특권이라고 말하였다(4:6). 이제 그는 말한다. "우리가 그의 자녀에게 속한 자로 고백한다면 또 그러한 특권을 획득한 자로 고백한다면 그러한 고백과 일치하는 성품과 행동을 통하여 그것을 보이도록 하지."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우리가 인도를 받고 지배를 받고 있는 그 원리에 부응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롬 8:5).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의 영에 동참한 자임을 보이고자 한다면 "육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우리는 육체의 일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진지함을 보여야만 한다.

4. 사도는 본장을 교만과 시기에 대하여 경고를 함으로 결론을 맺는다(26절). 그는 전에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훈계하였었다(13절). 그리고 이 일 대신에 "서로 물고 먹으면" 그 결과가 어떠할 것도 그들에게 상기시키셨다(15절). 이제 사도는 그들을 성령의 열매는 맺게 하고 육체의 일은 금하도록 하기 위하여 헛된 영광을 사모하는 것과 또는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 갈채를 부당하게 사랑하는 것을 하지 말도록 그들에게 경고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을 구하다 보면 틀림 없이 서로가 서로를 격동시키게 될 것이고 서로 시기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영과 시기가 기독교인들 가운데 우세하게 역사하는 이상 그들은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경멸해 버리게 될 것이고 또 그들이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이 자기들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할 것이요, 그리고 어떤 사람 때문에 자기들의 명예가 손상될 경우가 생길 때 그들을 질투하게 되고 말 것이다. 바로 허영과 시기가 모든 분쟁과 다툼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로써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서로 유지해야 할 사랑과는 일치하지 않게 생활하게 되며 따라서 그들은 기독교 신앙 자체의 명예와 이익에 대단한 손실을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이 일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은 헛된 영광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소망스러운 것이기는 커녕 우리를 죽게 하는 것이다.

(2) 인간들의 찬조와 칭찬에 대한 부적절한 맹종은 현재 기독교인들 가운데 존재하는 불행스러운 분쟁과 다툼의 큰 요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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