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고린도전서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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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방언보다 예언을 말하라(고린도 전서 14:1-5)

바울은 전 장에서 모든 은사보다 사랑을 더 사모했고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권면했다. 바울은 여기에서 은사 중에서 무엇을 더 사모해야 할까를 가르치고 은사를 비교할 규칙을 세운다.

Ⅰ. 사랑에 대한 권면(1절). "사랑을 따라 구하라." 그것을 추구하라. 원어 diw,kete 는 사물에 대하여 말하여질 때에 그것을 획득하려는 유일한 관심을 의미한다. 좋은 의미로 통용된다. 사랑을 얻도록 하는 권면이다. 어떠한 고뇌와 기도가 필요하더라도 이 훌륭한 마음을 얻도록 하라는 권면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과 같기도 하다. "다른 은사들은 다 놓치더라도 이 은혜만은 놓치지 마시오. 어떠한 희생이 있어도 취할 가치가 있는 모든 은혜의 원리입니다."

Ⅱ. 사랑의 원리로써 어떠한 은사를 구할까를 지도한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주로 예언하기 위하여 구하라." 그들이 사랑을 추구한다면 그리고 이와 같은 기독교의 마음을 목표로 삼으면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나 특히 예언 즉,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사모하게 된다. 은사는 은혜와 사랑 다음으로 바라고 추구해야 함을 주목하자.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을 첫째로 열심히 찾아야 한다.

Ⅲ. 이 은사를 좋아하는 이유를 밝힌다. 바울이 단지 예언과 방언을 비교하는 것은 현저한 일이다. 방언은 고린도 교인들이 주로 자랑하는 은사였다. 방언은 성경 해석보다는 더 자랑스럽고 교만을 만족시키며 사랑을 추구하기에는 더 부적당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가르치거나 유익하게 못한다. 왜냐하면

1. 방언을 말한 사람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 사이에서 말했다. 어떠한 신비한 것들이 그의 말로써 전하여지더라도 그의 동족이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2절). 다음을 주목하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덕을 세우지 못한다. 청중들이 말할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그러한 언어를 전하여지면 아무리 훌륭한 담화도 유익이 없다. 그러나 예언을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에게 유익하다. 그의 은사로 그들이 유익하게 된다. 성경의 해석은 교훈에 유익하다. 이것으로 그들이 격려를 받고 위로를 받는다(3절). 권면과 위로는 함께 다녀야 한다. 의무는 위로하는 바른 길이다. 위로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권면을 받아야 한다.

2.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교훈할 수는 있다(4절). 자기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영향을 받는다. 방언은 자기만 유익하게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하는 말은 교회를 가르쳐야 한다(4절). 이것이 예언 즉 성경의 해석이 하는 일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사랑의 목표와 유익을 가장 많이 주는 것이 최고의 은사이다. 우리들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모르는 언어로 말하는 일에 비하여 예언을 하고 설교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다.

3. 참으로 어떠한 은사도 무시되면 안 되나 가장 좋은 은사가 사모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5절). 후한 마음이 사람을 진실로 위대하게 만든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 참으로 관대한 일은 사람의 존경과 찬양을 끄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공공의 유익을 생각하는 넓고 풍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를 추천하기 위하여 방언을 말하는 사람보다 교회를 가르치기 위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더 위대하다. 자기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일까 말하기 어렵다. 다음을 주목하자. 은사를 가장 잘 이용하는 사역자가 아니고 교회의 덕을 가장 잘 세우는 사역자가 명예롭다. 자기를 목표로 세우는 사람은 좁은사람이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데 비하여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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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이 없는 방언(고린도 전서 14:6-14)

이 절에서 바울은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것을 자랑함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 나타낸다(6절).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모든 것을 방언으로 말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사도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어도 청중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면 덕을 세울 수 없다. 새로운 계시나 옛 계시의 설명이나 교훈도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는 무익하다. 알지 못하는 언어의 성경 해석은 이용되기 전에 통역이 되어야 한다.

Ⅰ. 바울은 이것을 몇 개의 은유로 설명한다.

1. 한 곡조로 연주하는 저와 거문고 이것이 춤추는 자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소리의 구별이 없으면 스텝과 행동을 어떻게 조정할까? 모르는 언어는 소리의 구별이 없는 저와 거문고와 같다. 한 소리만 나는 저와 소리의 구별이 없는 거문고가 춤추는 자를 조정할 수 없는 것같이 방언도 인간 행동에 아무 영향도 못 준다(7절).

2.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는 나팔에 비유한다. 분명치 못한 소리 a;dhlon fwnhn - 는 목표에 적당치 못한 소리, 다른 소리와 구별이 되지 않는 소리다. 진격 대신에 후퇴하는 소리를 내거나 알지 못하는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 준비를 할까. 알지 못하는 말로써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말하는 것은 전장에나 전투의 날에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하는 나팔과 같이 헛되고 뜻이 없다. 이런 경우의 군대나 모임은 불안과 진퇴양난에 처한다. 듣는 사람에게 의미가 없는 말을 하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9절). 의미가 없는 말은 의미가 없고 이런 말은 호흡을 낭비하는 것이다.

3. 바울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야만인의 횡설수설로 비유한다.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으나 뜻없는 소리는 없다. 여러 언어의 경우에도 같다. 모든 언어는 의미가 있다. 의미가 없으면 소리이나 소리가 아니다 - fw,nai a;fwnoi 뜻이 없는 언어는 언어가 아니고 말하는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언어도 횡설수설이 된다. 이 경우에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야만이 된다(11절). 의미없는 소리를 말하고 듣는다. 이것은 야만인의 행동이다. 폰투스(Pontus)에 추방을 당했을 때에 오비드(Dvid)가 이렇게 말했다. Barbarus hic ego sum, quia non intelli gor ulli - 즉 나는 여기에서 야만인이다. 교회에서 모르는 언어로 말하는 것은 횡설수설이다. 야만인의 행동이다. 청중을 교훈하지 못하고 혼란시킨다. 그러므로 완전히 헛되고 무익하다.

Ⅱ. 바울은 이렇게 입장을 수립한 후에 다음 두 절에서 적용한다.

1.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를 가장 열망하도록 충고한다(12절). "그러므로 너희가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 즉, 온당한 정열을 가지고 교회를 가르치기를 힘쓰며 기독교의 지식과 실행을 증진시키며, 인간의 영혼에 가장 유익한 은사를 간구하라.

2. 이 규칙을 당면한 문제에 적용한다. 만약 그들이 외국의 말을 한다면 퉁역하는 은사를 하나님께 구하라(13절). 여러 가지의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 전서 12장을 참조하라. 자기의 언어로 통역을 못하여도 다른 나라의 언어를 이해하거나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도 교회 교육에는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야만 덕을 세울 수 있다. 모르는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통역의 은사를 구하라. 번역이 필요한 방언보다 오히려 통역하는 은사를 구하라. 이것이 교회에 가장 유익하고 그러므로 은사 중에서 뛰어난다(12절).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써 기도 중에 하는 말을 통역하도록 기도하라." 모든 사람이 참여하여 유익을 얻도록 신앙의 행사를 수행해야 말이 전체의 뜻이다.

3. 바울은 타당한 이유로써 이 충고를 하고 있다. 만약 모르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의 영은 기도하고 그의 마음은 신령하게 참여 하지만 그러나 그의 이해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공중 기도를 하는 사람은 알 수 있는 말로 기도하며, 다른 방언이라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하면 안 된다. 가장 이해하기 쉽고 분명한 언어가 예배와 신앙 활동에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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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마음의 신앙생할(고린도 전서 14:15-20)

바울은 지금까지의 주장을 종합한다.

Ⅰ. 그들이 공중에서 어떻게 찬미하고 어떻게 기도할까를 지도한다(15절).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성령의 은사를 받았을 때에 성령의 감동(afflatus)으로 찬미하고 기도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이해하는 것으로 하라고 말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공중 예배는 이해할 수 있도록 수행해야 한다.

Ⅱ. 바울은 몇 가지 이유로써 주장을 세운다.

1. 그렇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들은 그들의 기도와 감사에 아멘 할 수 없으며 깨닫지 못하여 참여할 수도 없다(16절).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있어서 대부분은 무식한 사람이었다고 해석한 사람도 있다. 어떻게 그들이 알지못하는 방언의 기도에 아멘하겠는가. 어떻게 그들이 동의하고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까. 아멘의 뜻은 그러하다고 동의하는 것이다.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함을 허락하신다의 뜻이다. 혹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대하여 말한 것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아멘의 취지이다. 모든 사람은 마음으로 아멘하고 또한 들을 수 있도록 아멘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말에 어떻게 아멘할 수 있을까. 다음을 주목하자. 깨달을 수 없는 기도에는 공감이 없다. 공중 예배가 모르는 방언으로 수행되면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기는 기도를 잘하고 감사를 하였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유익이 없느니라(17절).

2. 바울은 자기의 본보기로 권면한다.

(1) 바울은 신령한 은사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8절). 어떤 개인보다 우수하며 전체보다도 더 많이 한다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귀중히 생각하고 자랑하는 것을 바울이 과소평가함은 시기가 아니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그들 전체보다 우월하였다. 자기가 가지지 않아서 그들의 은사를 무의미하게 말한 것이 아니다. 시기의 정신은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바울은 오히려 그들이 바울의 은사를 시기할 정도임을 먼저 말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부당한 자기평가를 책망할 때 그것이 어떤 소유물이거나 혹은 어떤 업적이거나 간에 시기와 불평에서 하지 않음을 보여야 한다. 그들이 오해한다면 충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바울은 이 주장에서 그러한 비난이나 의심을 받을 여지가 없다. 바울은 그들 전체보다 더 많은 방언을 했다.

(2)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하여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말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19절). 그는 결코 방언을 귀하게 여기고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일만 마디의 아름다운 말을 하는 것보다 유익을 줄 수 있는 다섯 마디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기를 원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참다운 목사는 자신에게 칭찬과 인기를 많이 가져오는 것보다 인간의 영혼에게 적은 유익이 되는 것을 귀중히 여긴다. 이것이 위대하고 고상한 정신이다. 이것이 목사의 인격이요, 그리스도의 종인 증거이다. 목사는 교만과 허영의 종이 아니다.

3. 바울은 이 은사를 좋아하는 것은 그들의 판단과 지각이 성숙하지 못한 암시라고 말한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20절). 아이들은 새로운 것과 이상한 것에 유혹된다. 그들은 사물의 참다운 성격과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외부의 모양에 사로 잡힌다. 너희들은 그와 같이 행하지 말며, 가치와 본질보다 떠드는 것과 외모를 더 좋아하지 말자. 보다 더 성숙한 판단을 보이고 남자답게 행하라. 다만 순진하고 공격하지 않는 마음에 있어서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 이 절 안에 두 가지의 책망이 들어 있다. 그들의 은사에 대한 교만과 서로 서로에 대한 거만함과 그리고 여기서 생기는 경쟁과 싸움에 대한 책망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기독교인은 간교와 악의가 없는, 해나 공격이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르익고 성숙한 지혜와 지식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의의 말씀에 있어서는 서툴어서는 안 되며(히 5:13) 악한 행동에 있어서는 재치가 없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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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과 예언의 사용(고린도 전서 14:21-25)

이 절에 바울은 다른 제목에서 이 주장을 추구하고 논리를 전개한다.

Ⅰ. 고린도 교인들이 사용한 방언들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자비가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온 심판의 표시였다(21절). "율법(구약)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사 28:11). 신명기 28장 46, 49절과 비교하라. 이상의 두 곳을 바울은 언급하는 것 같다. 둘 다 위협의 방법으로 전달되었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해석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와 같은 견해의 의미는 다른 방언으로 교훈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증거이다라는 것이다. 확실히 바울의 말은 이런 의미이다. "너희들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표시를 좋아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깨닫지 못하는 방언으로 교훈을 받으며 가르침으로는 유익을 얻지 못한다. 방언에 맡기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치료할 수 없는 자로 포기함을 나타낸다." 기독교인들이 방언에 빠지며 교회가 방언에 도취되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나 고린도의 설교자들은 그들의 성령의 감동을 방언으로 나타내기를 열망했다.

Ⅱ. 방언은 신자보다 불신자에게 주는 표적이다(22절). 방언은 불신자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교회에 들어오도록 하는 영적인 은사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된 사람은 자신의 말로써 유익한 교훈을 들어야 한다. 방언의 은사는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모으며 기독교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불신자들이 분명히 깨닫는데 적당하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 방언을 하는 것은 시대적으로나 장소에 있어서나 부적당하다. 다음을 주목하자. 은사가 올바르게 사용되기 위하여 은사의 목적을 아는 것이 옳다. 바울의 경우와 같이 불신자들을 믿게 하는 데는 방언의 은사가 필요하나 이미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자랑하거나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회중에게 아무 유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를 확신시키지도 못한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교훈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듣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Ⅲ. 기독교인들의 신임과 명성은 기독교인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예언을 더 낫게 여기도록 요청한다.

1.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예배하기 위하여 모였을 때에 목사나 공중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한다면 불신자들이 들어와서 그들은 모두 미쳤다고 생각하며 야만적인 광분자들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올바른 지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그러한 신앙적인 예배를 수행하며 지각과 이해를 무시한 교가 어디에 있겠는가? 교회의 목사들이 자신이나 회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고 설교하고 종교적 의식을 수행한다면 이방인들이 얼마나 조소할 것인가? 다음을 주목하자. 기독교 신앙은 근엄하고 논리적이다. 교회의 목사들에 의하여 야만적이고 무의미하게 만들어지면 안 된다. 혼미하게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과 인격을 더럽히게 된다.

2. 방언을 말하는 대신에 목회하는 사람들이 단순하게 성경을 해석하며 이해할 수 있고 적당한 언어로 설교하며 복음의 위대한 진리와 규율을 전한다면 이방인이나 무식한 사람들이 와서 깨달아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것이다(24,25절). 그의 양심이 움직이며 마음의 비밀이 나타나며 듣는 진리에 의하여 죄를 인식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회중에 한 사람이 될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소박하게 그리고 적당히 가르쳐지는 성경의 진리는 양심을 일깨우고 심금을 울린다. 불신자들이 교회의 목사들을 미친 사람들의 무리로 여기고 그들의 신앙을 광란으로 간주하는 것보다 순수한 설교와 가르침이 얼마나 더 명예로운 일이겠는가? 방언은 신자와 그들의 신앙에게 경멸을 초래하게 된다. 찬양을 받기보다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이 교회를 교화하고 교회의 명예를 유지시키고 듣는 불신자들을 회개시킬 것이다. 기독교의 모임의 신앙 행사는 신자들을 가르치고 불신자들을 회개시키고 변화시키도록 하여야 한다. 목회는 은사나 재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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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와 교회의 질서(고린도 전서 14:26-33)

이 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무질서를 책망하고 장래에 대하여 그들의 행위를 고치고 규정지으려고 노력한다.

Ⅰ. 바울은 그들의 은사를 자랑하여 회중에서 일으킨 혼란에 대하여 그들을 비난한다(26절).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즉 "너희들은 예배의 각 분야를 혼돈시킨다. 한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찬미할 때에 다른 사람은 말씀이나 계시를 가진다." 혹은 같은 은사에 있어서도 혼란을 일으킨다. 차례차례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동이 아니며 이것이 교훈이 될 수 있겠는가? 모든 종교적 행사는 이와 같은 견해를 소유하여야 한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Ⅱ. 바울은 그들의 잘못을 고치고 장래의 그들의 행위에 대한 얼마의 규칙은 세운다.

1. 이해하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바울은 명령하기를 한 모임에서 2,3명 이상은 하지 말며 그것도 차례로 하라고 한다. 이것까지도 통역하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27,28절). 방언을 자기가 통역하면 자랑하는 일이 된다. 통역하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의 덕을 세운다.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여야 하고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만 그 은사를 사용하여야 한다. 즉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방언을 하도록 해야 한다(28절). 개인적인 예배가 공중 예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2. 예언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명한다.

(1) 둘이나 세 사람만이 한 모임에서 예언을 해야 한다(20절). 계속적으로 해야 하고 동시에 하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은 예언하는 것을 검토하고 판단하여 그것이 신령한 영감인지, 그렇지 않은지 식별하고 결정해야 한다. 거짓 예언자가 있을 수도 있고 영감을 받은 것처럼 행하는 자도 있다. 참다운 예언자는 이들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누가 신령한 영감으로 성서를 해석하느냐를 알아야 한다. 참으로 영감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식별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인간의 판단을 초월한다.

(2) 어떤 사람이 예언하고 있을 동안에 다른 보조적인 예언자가 예언을 하면 예언하던 예언자는 잠잠하여야 한다. 많은 사람이 먼저 말하던 사람은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맥상 부자연스럽다. 왜 먼저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하는 사람이 같은 성령에 의하여 말하는 사람에 의하여 중단되어야 하는가? 새로운 계시를 받은 사람이 말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면 같은 성령에 의하여 말하던 사람의 말할 자유는 왜 박탈되어야 하겠는가. 성령은 자기의 뜻을 나타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감동시켰으나 그것을 나타내기도 전에 다른 사람을 감동시켜 그를 중단시키겠는가? 이것은 자연스럽지 못하게 보여진다. 문맥상에도 부당하다. "모든 사람이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31절). 이것은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하기 전에 중단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먼저 예언하던 사람이 예언을 끝낼 때까지 새로운 계시를 받은 사람은 참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사도는 빨리 첨가한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32절). 즉 예언자들이 가지는 영적 은사는 이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신령한 영감은 이방인의 사제들이 가지는 마귀와 같은 것에 사로잡히는 난폭함이나 무절제한 것이 아니다. 이방인의 사제들은 미친 사람같이 행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근엄하고 침착하며 규율이 있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감동된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나 자연의 질서를 지키고 계시를 전할 때에 단정한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본인의 분별력으로 조종된다.

Ⅲ. 바울은 이들 규칙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1. 이들 규칙은 교회의 유익과 교훈과 위로를 위함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예언자들은 질서있게 말해야 한다고 바울은 충고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교회의 교훈과 교육과 위로는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이다. 목사들은 최대한 이 목적들에 충실해야 한다.

2.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33절)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령한 영감은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혼란으로 몰아 넣어서는 안 되며 만일 영감을 받은 몇몇의 사람이 하나님의 영으로 받은 것을 동시에 말하며 차례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정중한 규칙을 파괴해서도 안 된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명예는 그리스도인의 집회에 있어서 자연의 정중함을 파괴하지 않도록 모든 일이 처리되어야 한다. 모든 일이 혼란하게 진행된다면 사려깊은 관찰자에게 경배받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주게 된다.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으로 보이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되고 불명예로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일이 처리되어야 한다.

3. 바울은 일들이 다른 교회와 같이 질서있게 행하도록 첨가한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33절) 다른 교회의 성도들은 영적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 이들 규칙을 준행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같은 규칙을 준행해야 할 이유가 된다. 영적 은사에 있어서 다른 교회보다 우수한 그들이 다른 교회보다 무질서하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비록 다른 교회가 우리의 규칙은 될 수 없어도 그들이 지키는 자연적인 정중함은 우리가 파괴할 수 없게 한다. 그들은 하나의 본보기로 제공되고 그들을 따르지 않으면 수치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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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

여자들의 침묵(고린도 전서 14:34,35)

1.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침묵을 지키도록 권면하고 교회내에서 무엇을 알기 위하여 질문하지 말며 가정에서 남편에게 문의하도록 한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자.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딤전 2:11, 12)라고 바울은 말한다. 여자들도 때때로 기도하고 예언한 암시가 있다(11:5). 그 귀절에 있어서는 단지 정죄하지는 않지만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남녀의 차별을 없애는 행위로써 그리고 남자와 동등하게 되는 행위로 그 때에는 간주되었다. 여기에서 바울은 여자들의 모든 공적인 행위를 금하는 것같다. 그들은 교회에서 공식상으로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고(34절) 기도와 예언도 허락되지 않았다. 전후 관계로 보아서 제한된 의미에 있어서 설교나 영적인 성경 해석을 금한 것 같다. 예언하는 여자가 가르칠 수 있더라도 복종의 상태에 있는 그에게 유익하지는 않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남을 지배해야 하는데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가르칠 수 없었다. "그들은 가르치지 못하며" 그러나 기도와 영감의 찬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의 교회에서는 여자들이 이런 영적 은사를 가진 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행 22:9 참고). 공적으로 행사하지 못하면 왜 이런 은사가 주어졌을까? 이 이유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이 일반적 금지는 다만 보통의 경우에만 적용된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에는 여자들이 신령한 감동을 받으면 말할 자유가 주어졌을 것이다. 보통에 있어서 여자들은 교회안에서 가르치거나 토론하거나 문의할 수가 없었다. 만약 어려움이 생기면 "집에서 그들의 남편에게 물어야 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만약 여자들이 순종함으로 바울 의무가 있다면 남자들을 가르칠 수 있는 우월한 위치를 확보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가정에서 남편에게 문의하는 것이 의무라면 문의에 대답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교회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여자들의 의무라면 가정에서 대답을 못하면 남자의 수치이다.

2. 이 명령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자들이 복종해야 함은 하나님의 법이요, 명령이다(34절). 여자들은 남자들 아래에 있고 여자의 위치를 바꾸는 어떠한 일들도 수치로 생각되었고 공석에서 말하는 것이 그런 행위이며 더우기 가르치는 일이 그런 행동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의 집회에서 말하는 것을 수치라고 결론을 내린다. 수치는 정중한 일을 하지 못한 마음의 불안한 반성이며 여자들이 자기의 위치를 버리는 것보다 더수치스러운 일이 없는 것이다. 다음 주목하자. 우리의 정신과 행위는 우리의 신분에 적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자연의 차이를 우리는 지켜야 한다. 남에게 순종하도록 되어 있는 자들은 우월하게 행동하면 안된다. 여자들은 남자에게 순종하도록 창조되었고, 그 위치를 지키고 만족해야 한다. 이 이유로 여자들은 교회에서 조용해야 하며, 선생으로 세워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남자보다 우월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14:35 없음.

 

14:36

모든 일은 적당하고 질서있게(고린도 전서 14:36-40)

이 절에서 바울은 그의 논술을 끝맺는다.

1.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과 자만에 알맞는 견책을 한다. 그들은 다른 교회와 다르게 영적 은사를 사용했다.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조정이나 규약을 쉽게 참지 못했다. 바울은 이 교만한 마음을 치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 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36절), 기독교가 고린도에서 생기었나? 기독교의 기원이 너희들에게서 시작되었느냐? 그렇지 않다면 복음이 너희에게만 주어졌나? 신령한 계시를 받은 교회가 너희뿐이며 그래서 다른 교회의 경건한 행사를 무시하고 영적 은사를 자만하며 그리스도인의 집회에 혼란을 가져 오느냐? 이 행동이 얼마나 거만한가! 너 자신들을 생각해 보라. 필요할 때에 바울은 적절한 충고를 전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영적 교만과 자만이 교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비록 바울의 책망을 견디기 힘들지라도 책망을 받고 겸손하게 되어야 한다.

2. 바울은 그들에게 말한 바울의 말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린다. 어떤 참다운 선지자나 영감을 받은 사람이 거부할 수가 없다(37절).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아니 이 규칙으로 자기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 만일 그가 내가 전한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영은 결코 스스로를 거슬리지 않는다. 주의 영이 내 안과 그들 안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같은 것을 말할 것이다. 만약 그들의 계시가 나의 것과 모순된다면 그들은 같은 성령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면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것으로 내가 그들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이 일에 대한 나의 지도가 하나님의 명령이라 말하지 않으면 그들이 신령하게 영감을 받지 못하였음을 신뢰해도 된다. 편견과 고집 때문에 그들이나 내가 성령에 의하여 말하는 것을 모른다면 모르는 대로 그냥 두어야 한다. 만약 그들의 성령 행위가 내가 가진 사도적 성격과 능력에 맞서면은 나의 권위와 영향이 끝이 나는 것이다. 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허용하는 사람들을 확신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두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다음을 주목하자. 고의적으로 빛을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의 마음의 어두움에 방치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실을 무시하는 사람도 그들의 오류에 방치하는 것이다.

3. 바울은 그의 모든 충고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1) 비록 그들이 방언의 은사를 경멸하거나 오용하면 안 되지만 그들은 예언하기를 더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 논술의 범위이다. 예언은 더 유용한 은사이기 때문에 더 사모해야 한다.

(2) 바울은 그들이 모든 일을 정중하고 질서있게 하도록 당부했다(40절). 즉 그들은 분명하게 무례하고 무질서한 일을 피해야 하는 것이다. 허영심이 나타내는 것을 기독교 교회나 예배에 들어오게 하면 안 된다. 이것들을 피해야 한다. 분명히 어린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20절). 그것은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한다(23절). 혼란을 가져오는 행위를 피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폭도로 만든다. 모든 일은 질서있게 하며 차례대로 말하고 동시에 하거나 방해해서도 안 된다. 이렇지 않으면 목회를 파괴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분명한 무례와 무질서는 기독교 교회나 예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유치하고 모순되고 조소적이며 야만적이고 소동적인 것을 취하면 안 된다. 신령한 예배는 당당하고 정중하며 안정되고 질서있게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무질서하고 부당한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에게 불명예를 돌리거나 예배가 은혜롭지 못하면 안된다.

 

14:37 없음.

 

14:38 없음.

 

14:39 없음.

 

14:4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