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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결혼에 대하여(고린도 전서 7:1-9)

사도는 충실하고 기술적인 논술자로서 그리고 교인들이 제출한 얼마의 양심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것들은 그들이 그에게 쓴 것들이다(1절). 사역자들의 입술이 지식으로 차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그들에게 문의하여야 한다. 그들이 양심의 문제를 제공하자 바울은 단안을 내려 준다. 전 장에서는 음행을 피하라 경고하고 여기에서는 결혼에 대한 지시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치료이다.

Ⅰ.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바울은 말한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여자를 아내로 취하지 않음이 좋으나) 이일에 대하여 많은 옛 성도들이 독신과 동정녀로 지냈다. 바울이 이것을 알았다면은 그의 주장을 변경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사정으로 본다면 독신이 결혼보다 이로운 점이 많이 있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절제와 정절을 지킬 수만 있다면 독신이 좋으리라. 이절은 또한 정욕을 일으키는 여자를 만지거나 보아서는 안 됨을 암시하기도 한다.

Ⅱ. 결혼과 결혼의 안락과 만족이 음행을 막는 하나님의 처방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음행이란 단어 porne.i.e,j 는 모든 종류의 불법적인 정욕을 의미한다. 이것들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의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의 남편을 두라"고 말한다. 즉 결혼하여 자기의 반려에게 제한시키는 것이다. 만약 결혼한다면 상대방에게 "바른 의무를"(3절) 행하여야 하며 서로의 마음과 사정을 생각하여 부부의 의무를 하여야 한다. 바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4절) 결혼한 상태에 있어서는 자기의 몸을 자기가 주장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주어야 한다. 아내는 그의 몸을 남편이 주관하도록 하고 남편은 그의 몸을 아내가 주관하도록 해야 한다. 일부다처제나 여러 사람과의 결혼은 간음과 함께 결혼 계약에 위배되며 상대방의 권리의 침범이다. 합의상 얼마 동안 신앙의 특별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하거나 금식과 기도할 틈을 위하여 하는 외에 상대방이 부부의 몸을 주관하는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그릇을 보존하며 불결한 정욕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부부의 안락이다. 깊은 회개의 기간에는 합법적인 쾌락으로부터 삼가해야 한다. 그러나 이 분리는 오래 계속 되어서는 안 된다. 무절제로 사탄이 시험할까 염려가 된다. 사람들은 자기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무모한 일로써 위험을 저지른다. 합법적인 즐거움을 절제하면 불법적인 쾌락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께서 불법적인 죄에 대한 해방을 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Ⅲ. 바울은 모든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라는 말에 제한을 가한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고요 명령은 아니라 예외 없이 결혼하라는 것을 명령으로 정하지는 않는다. 어떠한 사람도 결혼할 수 있다. 하나님의 어떠한 법도 그것을 막지 않는다. 반면에 어떠한 법도 반드시 결혼하도록 제약하지도 않는다. 부정한 정욕 때문에 필요하지 않다면 결혼을 피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인간에서 주어진 최대의 자유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결혼하도록 제한하지는 않는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와 같기를 원할 수는 있다"(7절). 독신으로 절제하면서 살 수만 있다면 독신에는 여러 가지의 편리한 점이 있다. 모든 사람이 우리와 같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선의의 표시이나 모든 사람이 바울과 같은 경향을 가지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한한 지혜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이다.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자연적인 신체도 다르다. 몸은 같더라도 받은 은사는 다르다. 어떠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능력으로 유혹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의 은사는 자연이나 은혜에 있어서 다르게 분배되었다. 가지각색이다. 바울은 자기와 같도록 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마 19:11).

Ⅳ. 바울은 자기의 생각을 9절과 10절에서 요약한다. "내가 혼인하지 않은 자들과 과부에게 말하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독신에는 많은 편리한 점이 있다. 바울을 이 때에 결혼하지 않았다. "만일 절제할 수 없다면 혼인하는 것이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낫다." 이것이 정욕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이다. 불같은 정욕은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에 의하여 커진다. 결혼은 많은 불편이 있을지라도 불순하고 정욕적인 욕망으로 불타는 것보다는 낫다. 결혼은 모든 일에 있어서 명예롭다. 그러나 정욕을 제어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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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아니하는 부부에 대하여(고린도 전서 7:10-16)

이 절에서 이 때에 유대인 개종자들에게 흔히 있었던 사례에 대하여 지도한다. 이방인과 결혼하여 사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모세의 율법은 이혼을 허용한다. 유대 백성이 이방 아내를 버려야 하는 유명한 예가 있다(스 10:3). 기독교로 개종한 불경건한 반려를 버려야 하느냐가 양심의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지시한다.

Ⅰ. 일반적으로 결혼은 주님의 명령으로 된 것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고로 결혼한 사람은 분리를 생각하면 안 된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10절)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11절). 바울은 말하기를 "명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주시라"고 한다. 바울이 스스로 명령하거나 자기의 권위로 행함이 아니요 그가 명하는 것은 모두 성령의 권위와 지시에 의한 것이다. 바울의 뜻은 주께서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이별을 금하셨다는 것이다(마 5:32; 19:9; 막 10:11; 눅 16:18). 다음을 주목하자. 남편과 아내는 마음대로 헤어지거나 결혼의 결속과 관계를 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가하다. 만약 어떤 여자가 자의나 남편의 행위에 의하여 헤어졌을지라도 기다리다가 화해하라고 바울은 가르친다. 부부는 싸우지 말아야 하고 혹은 속히 화합해야 한다. 서로서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은 분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짐을 벗어버릴 수가 없고 서로 지며 가볍게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Ⅱ. 바울은 일반적인 충고를 불신앙의 부부를 가진 사람에게 적용한다(12절).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즉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에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것은 바울이 주님의 권위를 받지 않고 성령의 감동없이 자기의 지혜로 말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이 문제를 반대로 결론짓고 있다(40절).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바울의 충고를 다시 주시하여 보자.

1. 충고의 내용. 만일 불신자의 남편이나 아내가 같이 살기를 원하면 헤어져서는 안 된다. 남편이 불신자의 아내를 버리거나 아내가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12,13절). 기독교의 부름이 결혼 계약을 풀 수 없고 더욱 튼튼히 매며 본래의 제도로 돌아가게 한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결혼의 결속에서 해방되기는 커녕 더 가깝게 연합된다. 만약 불신자의 부부가 믿는 상대를 버린다면 "형제나 자매가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15절). 사악한 배반자나 다른 사람에게 결혼하거나 간음죄를 범한 자에게는 매일 필요가 없다. 고린도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버림을 받은 자는 결혼을 할 수가 있다. 이런 나쁜 배반은 죽음과 같이 결혼의 계약이 취소된다. 한 사람이 악하게 떠난다면 어떻게 두 몸이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버린 사람은 결혼의 계약에 묶이어 있는 것 같으나(11절)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그러나 버림을 당한 사람은 더 자유로운 것 같다. 물론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하여 돌아오도록 하며 할 수 없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는 형편일 경우에 그렇다. 부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대방에게 구속될 수가 없겠다. 단지 불신앙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헤어질 수는 없다. 같이 생활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울의 일반적인 지도이다.

2. 충고의 이유. 왜냐하면 부부의 관계와 상태는 상대방에 의하여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혹은 되었나니"(14절) 부부의 관계와 생활이 믿는 자에게는 거룩하게 되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딛 1:15) 결혼은 신성한 제도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생활 계약이다. 만일 불신자와의 부부 생활이 믿는 자를 더럽힌다면 결혼의 목적은 깨뜨려지고 결혼의 안락도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비록 불신자에게 멍에를 지고 있지만 그들이 거룩하다면 그들의 관계와 부부 생활도 성별된 즐거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불신자와 이방인과 함께 사는 것이 하나님을 근심스럽게 하는 것은 아니다. 부부 중에 한 사람이 거룩하다면 부부의 모든 생활도 성별된다.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성별되었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성별되었다. 두 사람은 한 몸이 된다. 거룩한 아내와 한 몸인 남편도 깨끗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 반대도 역시 그렇다. "그러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즉 그들이 교회 울타리 밖에 나가면 그들은 이방인이 된다. 그들은 거룩한 씨의 소산이 아닐 것이다(사 6:13). 사도의 환상처럼 평범하고 부정한 이방인이 될 것이다(행 10:28). 이 말은 유대식 방법이다. 이방인의 부모에게서 난 자식은 거룩하지 못하다고 말하여졌다. 개종자에 의하여 태어난 자녀는 거룩한 울타리 안에서(intrs santitatem) 태어났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인은 성도라 불리어진다. 이들은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된다. 불신자와 결혼한 그리스도인에게 태어나는 자녀는 세상의 것이 아니고 교회의 것이며 평범하고 부정한 것이 아니고 거룩하다. "그러므로 믿지 아니하는 사람과 같이 살아가라. 만일 네가 거룩하면 너의 반려도 그러하다. 너의 부부 생할은 거룩하고 너의 자녀들도 역시 거룩하다." 부부가 다 믿으면 얼마나 좋으랴! 다른 한 이유는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기"(15절)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우리가 자연적 시민적 관계에서 평화롭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답니까?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도록"(롬 12:18) 부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한 몸이 된 부부는 비록 이방인이라도 평화롭게 안락하게 지내야 한다. 결혼한 사람은 상대방을 행복하게 평안하게 만들도록 노력하고 연구해야 한다. 세째의 이유는 믿는 사람은 불신자의 구원의 도구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느냐"(16절). 가장 가까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분명한 의무이다. "헤어지지 말라. 다른 의무가 있다. 부부 관계는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관계다. 일생의 계약이다. 영광스러운 사랑을 증거할 기회에 반려를 버린다는 말인가. 머물러 반려의 개종을 위하여 노력하라. 한 영혼을 구하라. 이 일이 중대한 사건이 될줄 누가 알랴. 불가능하지는 않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여 희박한 가능성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가 그의 영혼을 구원할는지 어떻게 알랴. 우리를 고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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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린도 전서 7:17-24)

여기에서 바울은 기독교에 들어온 그 상태로 계속하며 개종할 때의 신분으로 있을 것을 말한다.

Ⅰ. 일반적인 규칙을 세운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사정과 환경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섭리가 우리의 거처를 결정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길을 결정하시고 하나님은 세우시기도 헐기도 하신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그가 기독교로 개종할 때에 어떠한 사정과 환경이든 그 안에서 행하며 그것에 맞도록 처신해야 한다. 기독교의 규율은 모든 사정에 적용된다. 인간은 모든 환경에서 잘 살아갈 수 있다. 기독교인은 자기의 사정과 신앙에 맞도록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운명에 만족하며 그리스도인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모든 장소에서 항상 지켜야 할 일반적인 규칙이다.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Ⅱ. 바울은 특별한 사건들을 논한다.

1. 할례에 대하여.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아브라함의 특별한 계약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문제가 아니다. 유대인으로서 개종한 사람은 그 문제에 대하여 염려하거나 무할례자가 되기를 원하지 말아라. 이방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할례를 받기를 원하기 말아라.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였다는 "표시"를 원하지 말아라.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할례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19절). 하나님에게 용납되는 것이 할례나 무할례에 있지 않는다. 기독교는 실제적인 경건없이 외적인 의식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20절).

2. 노예와 자유의 문제.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돈으로 매매된 노예였다. 그래서 개인의 소유가 되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 부름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너무 걱정하지 말라.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과 소망에 어울리지 않는다. "혹 자유할 수 있어도 그대로 지내라"(21절). 노예보다 자유에 더 많은 편리가 있다. 자기 자신을 주관하고 시간을 내며 주인의 구속을 벗어버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자유가 더 적합한 상태이다. 그러나 인각의 외부적인 상태가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가 없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 avpeleu,qeroj -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다."비록 그가 주인의 봉사에서 높임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죄의 지배와 봉사에서는 자유하였다. 비록 그리스도의 노예는 아닐지라도 그리스도에게 전폭을 바쳐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의 행복과 위로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달려 있으며 세상의 형편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의 좋은 형편이 우리를 기독교의 의무에서 해방시키지도 않고 세상의 나쁜 사정이 우리를 기독교의 특권에서 제외시키지 못한다. 노예도 그리스도인을 값으로 산 것이니 사람의 종이 될 수 없다. 주를 섬길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고 - 이것은 사도의 뜻에 모순된다 - 사람의 종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뜻이 주인의 뜻보다 귀하게 간주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더 많은 돈을 지불하시고 그를 샀다. 하나님을 제한 없이 봉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를 최고로 섬기고 인간을 섬기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이 절이 동료 그리스도인이 노예를 사서 해방한 것으로 해석한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자유할 수 있으면 자유롭게 되어라. 그러나 다른 해석이 더 자연스럽다(6:20 참고).

Ⅲ. 바울은 충고를 종합한다. "형제들아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절). 이것은 기독교로 개종할 때의 상태를 의미한다. 자기의 신앙이나 종교를 자연적이고 시민적인 의무를 벗어버리는 구실로 삼아서는 안 된다. 자기가 처한 곳에서 조용히 안락한 지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가 외부의 환경으로 지배받지 않음을 주목하자.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좋다. 매인 자는 놓인 자와 같이 은혜를 받는다. 이런 점에 있어서 "거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중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골 3:11)의 말씀이 적용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속을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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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 생활에 대하여(고린도 전서 7:25-35)

바울은 여기에서 그의 주장을 다시 전개한다. 처녀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를 말한다.

Ⅰ. 주장의 도입.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명령이 없으되"(25절) 독신에 대하여서는 주께로 받은 분명하고 보편적인 법이없다. 그리고 사도의 권의로써 말한다.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그는 성실히 행동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그리스도의 규율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충성된 사도로서 판단한다. 비록 그리스도가 그 문제에 대하여 보편적인 법을 전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자비하심을 입어 충성된 중이 된 감동을 받은 사도를 통하여 지도하신다. 사역의 충성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이 항상 시인할 각오가 된 문제이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15:10).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받은 사람이다.

Ⅱ. 바울이 내린 결론은 현재의 고난을 고려하여 독신이 더 좋다는 것이다.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이것은 바울의 생각이다. 겸손한 표현이나 사도의 권위가 있다. 이것은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의 결정이다. 그래서 더 무게가 있다. 단지 권위로서만 말했다면 바울을 반대한 자들이 거절했을는지 모른다. 목사들은 신중한 겸허 때문에 권위를 상실하지는 않음을 명심하자. 유익을 주기 위하여 사역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혼자 지내는 것이 낳으리라." 초기의 기독신자들은 심한 박해를 박았다. 그들의 적은 매우 혹독하였고 무자비하게 신자들을 다루었다. 그들은 박해로 전전긍긍하였다. 이런 상황 하에서 독신이 독신을 벗어나는 것을 권장할 수 없다. 결혼은 더 많은 근심과 짐이 따른다(33,34절). 그래서 박해가 더 힘들고 견딜 수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이 가한가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편리도 생각해야 한다.

Ⅲ. 바울의 결론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혼을 저주하지도 불법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며"라고 말하나, 또한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라"고 첨가한다. 결혼의 관계를 유지하며 의무를 다하라고 당부한다. 핍박을 당할 때에는 어려움이 크지만 이 어려움 때문에 의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의무는 수행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믿어야 한다. 의무를 회피하면 하나님의 보호를 떠나는 일이다. 바울은 첨가해서 말한다.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일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라." 결혼 자체가 죄가 아니다. 이때의 결혼은 불편을 초래하고 환란을 더했다. 그러므로 결혼을 삼가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바울은 생각했다. 그러나 독신 생활을 강요하여 짐이 되거나 올무가 되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교부의 결의자들은 바울과 얼마나 상치되는가. 그들은 많은 사람이 결혼하는 것을 금했다. 독신의 서약으로 얽매었다. 참을수 있는가 없는가를 고려하지도 않았다.

Ⅳ.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세상의 사물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가지도록 일반적인 규칙을 세운다.

1. 부부에 의하여. "아내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즉 그리스도인들은 부부의 안락에 너무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마치 없는 것같이 해야 한다. 얼마나 빨리 떠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모든 인간 관계에 적용되어야 한다. 자녀들을 가진 자는 없는 것같이 하여야 한다. 지금 큰 안락이 되는 일도 큰 십자가가 될 수가 있다. 안락의 꽃이 얼마나 빨리 떨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2. 고난에 대하여.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즉 우리들은 우리의 고난에 낙담하거나 세상의 슬픔에 너무 빠지거나 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기쁨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슬픔의 끝은 기쁨이 와야 한다. "저녁에는 울음이 노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마침내 우리가 천국에 이르면 "모든 눈물이 우리의 눈에서 사라지리라." 천국에 대한 기대가 슬픔을 덜어 주고 눈물을 억제해야 한다.

3. 세상의 즐거움에 대하여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즉 이 세상의 안락에 너무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즐거움에도 적당함이 요청된다.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즐거움을 적당히 누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안식이 여기에 없고 이 세상에 놓아도 안 되며 만족과 위로를 그 안에서 찾아도 안 된다.

4. 세상의 매매와 고용에 대하여.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장사가 잘 되고 부가 늘어나며 땅을 사는 사람은 없는 것같이 소유해야 한다. 그것은 "없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잠 23:5). 사고 소유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너무 점령하면 안 된다고 이것들은 더 좋은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토지를 구입하고 소를 길드리는 일이 초대받은 손님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눅 14:18, 19). 이들이 중대한 일을 생각하는 것을 방해물을 제거한 사람들이 상금을 받을 것 같다.

5. 세상 관심에 대하여.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31절). 세상 물건을 사용하여도 남용하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으면 남용된다. 순종의 도움이 아니라 정욕의 도구가 되며 우리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고 우상이 될 때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여 잘못 사용된다. 우리의 마음이 너무 세상 물건에 흘리면 남용된다. 될 수 있으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Ⅴ. 두 이유로 그의 충고를 강조한다.

1. "때가 단축하여진고로"(29절). 우리는 이 세상에 잠간 머문다. 세상의 물건을 소유하고 즐기기에는 너무나 짧은 세월이다. 즉 kairo.j sunestalme.noj. 짧게 단축되어 있다. 곧 사라진다. 곧 영원에 삼키어 버린다. 그러므로 세상의 즐거움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세상의 근심과 고통으로 중압되지 말라. 곧 떠나야 한 물건에 사로잡히지 않고 소유하라.

2. "이 세상의 형적은 자나감이라"(31절). sch/ma는 습관 모양이 지나가 버림을 의미한다. 매일 모양이 변한다. 계속 유동한다. 세상은 겉모양이다. 모든 것은 나타남이요 고정이 없다. 지나가는 모양이고 속히 없어진다. 위의 충고는 얼마나 적절하고 강력한 것인가 꿈의 사라지는 형상에 집착되어 있음은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시 39:6) 인간은 희미하고 사라지는 그림자 가운데서 행한다. 그러한 장면으로 깊게 영향을 받으며 슬프게 괴로워하겠는가.

Ⅵ. 바울은 세상 근심의 시달림에 대하여 충고한다. "너희가 염려없기를 바라노라"(32절). 참으로 걱정을 하지 않음도 잘못이다. 세상 일에 대한 지혜로운 관심은 의무이다. 그러나 걱정으로 차 있고 세상 일에 너무 걱정함은 죄이다.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악이다. 하나님은 "분유함이 없이 섬김을 받아야 한다"(35절).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마음이 방황하고 움직이면 일을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은 이 일에만 집중하고 열중해야 한다. 마음이 세상의 근심으로 사로잡혀 있을 때에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외부의 일과 분열시키는 근심과 적당한 환경에서 통일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지혜이다. 이것이 바울이 권하는 교훈이다. 세상의 근심과 올무에서 벗어나 영혼을 위함이 좋은 길이다. 결혼의 문제도 이 원리로 해결된다. 그 당시로 보아 결혼하면 세상의 근심과 괴로움으로 점령되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음이 하나님을 섬기기에 더 편리하였다. 세상 근심이 적으면 적을수록 하나님을 섬길 자유가 더 많다. 그 당시의 결혼은 세상 근심을 많이 동반했다.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염려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33,34절).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남자나 여자는 주의 일을 명령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여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하느니라(32,34절). 독신 자체가 결혼보다 더 거룩하고 성화된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 근심으로 마음이 빼았기지 않으므로 믿음에 열중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결혼은 근심이 따르는 상태이다. 서로서로 기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특별한 필요가 없는 한 독신은 그대로 있기를 권한다. 이 원칙은 언제나 적용된다. 이것을 참작하여 결혼에 대해서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며 영혼을 구원하는데 편리한 환경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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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6

자녀의 결혼 문제(고린도 전서 7:36-38)

여기에서 바울은 상술한 충고에 근거하여 자녀의 결혼에 대하여 지도한다. 이 때에 유대인들은 여자가 혼기를 지나면 불명예스럽게 생각했다. 그것은 그 여자가 명망이 없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바울은 말한다.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하여 처녀로 있는 것이 수치이며 혼기가 되었고 결혼을 원하면 그렇게 하도록 하라. 배필을 정하여 주는 것이 죄가 아니다. 그러나 자기의 딸을 처녀로 두기로 결심하였으면 그리고 결혼할 필요가 없으면 자유이니 딸의 동의을 얻어 처녀로 두라. 이것도 잘하는 일이다. 딸을 시집보내도 잘하고 할 수만 있으면 딸을 처녀로 두어도 더 잘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기에 더욱 편리하기 때문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자녀들은 부모가 주관해야 한다. 스스로 결혼을 하여서는 안 된다.

2. 그러나 부모는 자녀와 상의하여야 하고 특히 배필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여야 한다. 자녀를 무조건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3.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에 무엇이 합법적인가를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먼저 무엇이 적당하며 유익한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 지금까지의 자기의 주장을 계속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에게 충고한다. 자기의 처녀는 자기의 처녀성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threi,n th.n e`amtou parqevnon 은 그의 딸을 처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녀성을 유지하는 것 같이 보인다.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해석은 아니겠지만 여러 다른 이유가 록과 휘트비(Lock and Whitby)에 의하여 보여질 수 있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이나 문명화된 이방인들 사이에는 일정한 연령을 넘어 독신으로 있는 것은 비난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바울의 일반적 의미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 정욕이나 대중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결혼하는 것도 죄가 아니다. 정욕을 이길 수 있고 신념에 굳굳히 서서 결혼할 필요가 없으면 자신의 유익과 편의와 영적 생활을 위하여 자기가 원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것이 의무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유익한 사고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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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8 없음.

 

7:39

과부의 재혼에 대하여(고린도 전서 7:39, 40)

바울의 전체의 충고가 과부에 대한 충고로 끝을 맺는다.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그와 함께 살아야 하며 그에게 매여 있다. 결혼 계약은 살아있는 동안에 유효하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다시 결혼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남편이 죽으면 "주 안에서 할 것이니라"는 계약으로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 우리의 상황과 반려가 변경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눈을 돌려야 한다. 결혼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그의 섭리로 성취될 때에 축복이 된다. 더우기 하나님의 지시를 구하고 겸손히 그의 축복을 소망하면서 해야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을 줄로 생각하노라"(40절).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적어도 결혼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방해가 적고 평화와 안정이 있으리라. 이 말을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거짓 사도들이 나에게 대하여 무슨 말을 할지라도 나는 알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내가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도다." 결혼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적당한 고려와 사정의 검토와 타당한 근거에 입각하여 행하여야 하고 또한 영적인 유익이 있도록 행해야 한다.

 

7:4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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