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내의 소송 사건(고린도 전서 6:1-8)
여기에서 바울은 사소한 사건으로 이방인의 재판장에게 소송을 내는 것을 책망한다. 성가시게 내는 소송을 비난한다. 전 장에서 바울은 극악한 죄를 벌하도록 지시했다. 여기에서는 교회의 충고에 의하여 분쟁을 해결하도록 지시한다. 다음을 관찰하자.
Ⅰ. 바울이 책망하는 결점을 이렇다. 그것은 소송 사건이다. 합법적으로 운영하면 법은 좋은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형제끼리 소송하는 문제를 의미한다(6절). 교회의 교인이 서로 소송하는 문제다. 가까운 이웃이 평화와 이해를 가지지 못했다. 형제애의 줄이 끊어졌다. 솔로몬의 말과 같이 "괴롭히는 형제는 튼튼한 성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형제의 다툼은 성곽의 철장과 같다(잠 18:19).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싸우면 안 된다. 왜냐하면 형제이기 때문이다. 적당히 주의하면 이 생각은 소송을 막고 싸움을 끝내며 기소를 기각할 수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건을 이방인의 재판관에게 가지고 갔다.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1절). 분쟁을 불신자 앞에 가지고 갔다(6절).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나 성도 사이에서 처리하지 않았다. 이것은 기독교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우매와 불화를 나타냈다. 그러나 그들은 지혜의 아들이며 어린양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평화의 왕 예수의 제자인 체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한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를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더럽힐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소한 일로 소송했다. 그래서 바울은 소송보다 차라리 손해를 당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7절). 이것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 자신들이나 가정에 큰 손해가 온다면 법에 의존해도 좋으나 적은 일에는 참고 손해를 당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서로 다투는 것보다 적은 손해를 당하는 것이 편하고 명예스럽다.
Ⅱ. 바울은 그들의 목전에 잘못의 극심함을 나타낸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2절).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3절). 성도가 이 세상의 작은 일을 판단할 자격이 없겠느냐? 이 세상의 작은 일을 이방인에게 가지고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수치요 성도로서의 권위를 망각하는 일이다. 성도가 세상과 천사까지도 판단할 수 있는데 작은 분쟁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세상과 천사들을 판단한다는 것은 최후의 심판날에 그리스도의 배석판사가 된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는 말은 제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말씀이 있다.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유 14,15)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살전 3:13) 성도들도 심판을 받아야 한다(마 25:31-41 참고). 그러나 그들은 먼저 용서함을 받고 재판석으로 나아가 인간과 천사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로운 판단을 증거하고 찬양한다. 그러나 고린도 사람들은 제국이 기독교화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만일 알았더라도 어떤 의미로 그리스도인 왕들이 천사들을 심판하겠는가? 또 어떤 이들은 성도들의 믿음과 생활로써 세상을 정죄하며 기적적인 능력으로 악한 천사들을 몰아낸다고 생각한다. 첫째 해석이 가장 자연스럽다. 동시에 그것은 바울의 주장을 가장 잘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죄많은 사람과 나쁜 천사들을 심판하실 때에 지고한 재판자와 함께 앉을 명예를 가진다면 너희들이 이방인 재판자 앞에서 다투는 사소한 일들을 판단할 자격이 없겠는가? 성도들이 상호의 차이점을 해결할 수 없을까? 왜 이방인들 앞에 그것을 가지고 가느냐? 너희가 그들을 심판하여야 하는데 그들의 심판을 받느냐? 이 세상 일들에 대하여 교회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자들로 재판하도록 하느냐?(어떤 이들은 4절을 이렇게 읽고 있다) 이방인 재판장이란 evxouqeuhme,,ouj는 없는 것들(1:28)을 의미한다. "너희들이 그렇게나 천하게 생각하는 그들을 너희들을 재판하도록 불러들이느냐? 이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5절) 지금 사용하는 번역대로 읽는 사람들은 냉소적인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만일 너희가 그러한 분쟁을 가진다면 너희들 중에 가장 낮은 자를 재판하도록 세우라. 너희 중에 가장 미천한 자들도 이들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 이 여러 사건을 이방인들에게 가지고 가는 것보다 너희들 중에 누구에게나 가져가라. 만약 너희들이 너희 자신들의 마음을 버리고 참다운 기독교 정신으로 받아들이면 그것들은 다툴 가치가 없고 쉽게 결정된다." "잘 참고 견디어라." 그리하면 너희 중에 가장 어리석은 자라도 싸움을 끌낼 수 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하노니"(5절) 작은 싸움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고 형제들의 판단으로 해결되지 못함이 수치임을 주목하자.
Ⅲ. 바울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잘못을 고치려고 한다.
1. 해결할 사람을 언급한다.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 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5절) 지식과 지혜를 그렇게 자랑하는 너희가 은사와 능력을 뽐내는 너희가 재판할 자가 아무도 없으며 이분쟁을 결정할 지혜를 가진 자가 없느냐? 지식과 지혜로 그렇게 유명한 너희가 형제간에 싸우고 이방 재판관에게 찾아가다니 웬 일이냐? 싸움을 말릴 현명한 사람은 하나도 없느냐?"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대책을 다 사용하기까지는 소송을 해서는 안 된다. 가능하면 사려깊은 교인들은 분쟁을 막아야 한다. 법정이 그들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 특히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2. 자기를 내세우기 보다는 차라리 손해를 당하는 것이 나올 것이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7절) 문제가 애매하거나 법에 밝은 자들에게 재판을 맡기자는 양편의 합의가 없는 한 소송은 항상 그 어느 편의 잘못이다. 바울의 주장은 차이에 대한 분쟁보다는 그 분쟁을 맡기는 일에 대한 책망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7절) 다음을 주목하자. 남을 속이고 불의로 처리하는 일은 완전히 잘못이다. 더우기 믿는 형제를 속이는 것은 더 나쁘다. 상호의 사랑이 불신자들 사이보다 신자 사이에서 더 강해야 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한다(롬 13:10).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형제를 해칠 수 있으랴.
하나님의 나라를 받지 못할 자(고린도 전서 6:9-11)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전에 탐닉한 무서운 죄를 열거한다.
Ⅰ. 이들 죄악은 고린도 교인들이 모를 리가 없고 그런 죄인들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이 명백한 진리로 나타낸다. 고린도 교인 중에 가장 어리석은 자라도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을 알아야 한다"(9절). 이들은 이 지상에서 참다운 교인으로 용납된 수도 없고 하늘의 교회의 영광스러운 형제로 용납될 수도 없다. 모든 불의가 죄이다. 모든 유행하는 죄가 고의적으로 범하고 회개하지 않는 모든 죄가 천국에로 차단되어 있다. 바울은 몇 종류의 죄를 상론한다. 제 일 계명인 우상숭배자들, 제 칠계명인 간음하는 자나 음란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들, 제 팔 계명인 도적질하는 자와 토색하는 자들, 즉 폭력으로나 사기로 이웃을 해치는 자들, 제 구 계명인 후욕하는 자, 제 십계명인 탐욕하는 자와 술취하는 자들, 이들은 나머지 모든 계명을 엄밀한 의미에서 다 범하는 자이다. 신앙이 있는 자라면 천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찌꺼기로써는 천국의 저택을 채울 수 없다. 악마의 일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삵을 받을 수 없다. 다만 사망을 받는다. "죄의 정당한 삵은 사망이다"(롬 6:23)
Ⅱ. 바울은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경고한다. "속임을 받지 말라." 위에서 언급한 진리를 아는 사람들도 그것에 주의하지 않기 쉽다. 인간은 하나님도 자기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죄 가운데서 살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악의 자녀의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천국에 가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기만이다. 영의 문제에 있어서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큰 관심사이다. 우리는 육에 심고 영생을 거둘 것을 소망할 수 없다.
Ⅲ. 바울은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상기시킨다. "너희들 중의 얼마가 그런 사람이었다(11절). 바울이 열거하는 그러한 나쁜 죄인이었다. 헬라어로는 tata 이다. 즉 "그런 것들"이며 인간이 아니고 괴물이다. 믿은 후에는 아주 선한 사람도 그 전에는 악한 사람인 것을 주목하자. Quantum mutatus ab illo - 즉 은혜가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키는가? 그것은 가장 사악한 사람을 성자로 만들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다. 너희들도 그랬으나 지금은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 "주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11절). 다음을 주목하자. 믿기 전의 인간의 악이 중생이나 하나님과의 화목에 방해물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피와 중생의 씻음이 모든 죄와 더러움을 씻어버릴 수 있다. 여기에 자연적인 순서의 도치가 있다. "너희가 거룩하여지고 너희가 의롭게 되었다" -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 성화가 의인 앞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즉 의롭게 만드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하나님의 성령 앞에 있다. 우리의 의로움은 그리스도의 공적이요,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이 둘은 함께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씻음과 하나님에게 화목하게 되는 것만이 아니고 그의 셩령에 의하여 또한 성화된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거룩하게 만들어진다.
몸의 범죄와 바른 사용(고린도 전서 6:12-20)
12절과 13절의 전반은 식물 즉 고기에 대한 논쟁인 것 같다. 그러나 음행에 대한 서론이 되겠다. 사도들의 유명한 결정을 주시하면 이 연결은 분명해진다(행 15 참고). 어떤 음식에 대한 금지는 음행의 금지와 연결되어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식물에 대해서와 같이 음행에 대해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의 법은 그것을 금하지 않았다. 음행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고 말하였다. 이 유해한 생각에 바울은 반박한다. 바울은 법으로 가한 일이 때로는 유익하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신앙과 자격과 관계와 소망을 생각하여 무엇이 가하며 뿐만 아니라 무엇이 유익한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12절). 합법적인 일에 있어서도 바울은 세상의 권력이 지배하도록 하는 생각은 없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한 그안에 확고히 서야 한다. 그러나 이 자유를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비록 모든 식물이 가하나 바울은 탐식가나 주정뱅이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바울은 음행의 죄를 찬성하도록 자유를 남용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것은 고린도의 법률이 허용하였더라도 자연법을 어기고 비기독교인이 되는 일이다. 바울은 이 자유를 이용하여 먹고 마시어 무절제하고 육욕을 채우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13절) 비록 배는 식물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져 있고 식물을 배를 채우도록 되어 있으나 그것이 이롭지 못하고 또 나를 속박한다면 나는 삼가하리라.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인가의 육체가 식물 의 공급이 불필요할 때가 온다. 고대의 학자의 어떤 이들은 이것은 배와 음식의 없어짐을 의미한다고 한다. 비록 우리의 몸이 부활하더라도 모든 지체가 그대로 부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배는 필요없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인지는 모르더라도 음식이 불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장래에 우리가 육체적인 식욕이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현 생활의 식욕의 지배를 벗어날 수가 있다. 이것이 바울의 뜻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절은 음행에 대한 반대의 주장인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이방인 앞에서는 소송 사건의 반대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가정하기를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가하나 유익한 것이 아니요 불경건한 재판장 이나 법관이나 변호인 앞에 서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적합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결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음행과의 연결이 자연스럽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13절). 음식과 배는 서로 위하나 음행과 몸은 그렇지 않다.
Ⅰ. 몸은 음란을 위한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함이다. 이것이 바울이 주장하는 죄에 대한 경고이다. 이 죄에 대하여 고린도의 이방인들은 너무나 이름이 나 있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도 지지하는 죄였다. 이것은 그들의 의향을 거슬리는 일이었다. 몸은 음란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주를 위함이고 하나님의 봉사와 명예를 위함이다. 다른 목적을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거룩함에 이르는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롬 6:19 참고). 그러므로 불결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하고 창녀의 지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15절). "주는 몸을 위함이다."즉 그리스도는 몸의 주요 몸을 소유하고 몸을 다스린다. 몸을 입고 우리와 같이 되시고 그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모든 일에 머리가 되신다(히 2:5, 8). 우리는 주민에게 속한 것을 우리의 것인 것처럼 혹은 불명예스럽게 사용하여서는 안 됨을 명심하자.
Ⅱ.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를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주는 몸의 부활과 영화를 위함이다. 14절의 말씀과 같이 명예가 우리 육체에 더하기로 되어 있으니 이 죄를 피하여야 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날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는 능력으로"(빌 3:21)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14절). 주님이 죽은 자에서 살아나심은 우리의 몸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보존하기만 한다면 모든 부족에도 불구하고 주와 함께 다시 살아날 몸을 나쁘게 사용하지 말자.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소망은 육의 정욕으로 죄를 범하는 것을 막도록 만든다.
Ⅲ. 세번째 주장은 이미 육체에 주어진 명예이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5절). 만약 영혼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면 그 사람 전체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이것은 얼마나 명예스러운 일인가? 그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의 한 부분이 된다. 우리가 어떤 명예스러운 관계에서 있는 가와 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유익하다.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서 남용한다면 얼마나 나쁜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가. 이런 생각은 혐오스럽다. 그럴 수 없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었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16,17절). 그리스도인의 명예로운 관계와 연합에 이 음란의 죄보다 더 큰 방해물은 없다. 그리스도로 연합되어 있고 성령으로 참여한다. 한 성령이 머리와 지체에 호흡하고 움직이고 있다. 그리스도에 충실한 제자들은 한 몸이다(요 17:21, 22).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결혼에 의하여 정하여진 육체의 연합이다. 한 몸이 되도록 그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어찌 한 몸이 되도록 창기와 합할 수가 있을까? 그리스도와 창기를 연합시키는 것이 사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더 큰 무례를 행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모순되고 신앙에 어긋날 수 있을까? 음란의 죄는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그와 주와 머리에 있어서 큰 상처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음행을 피하라"(18절)는 권고는 당연하다. 피하고 유혹에서 멀리 떠나며 유혹하는 물건을 멀리해야 한다. 눈과 마음을 다른 생각과 사물로 돌리어야 한다. Alia vitia pugnando, sola libido fugiendo vincitur - 즉 다른 악을 싸워서 정복할 수 있으나 이 음란의 죄는 피하여야 한다고 많은 교부들이 그렇게 말한다.
Ⅳ. 네째 주장은 이 죄는 우리의 몸에 거슬리는 죄악이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 하느니라"(18절). 밖에서 짓는 모든 죄가 몸 밖에 있다. 이 죄는 술취하는 자만큼 몸을 혹사하지도 않고 탐식가처럼 몸을 괴롭히지도 않으나 특이한 방법으로 몸을 더럽힌다. 이 죄로 그리스도인은 몸을 더럽히고 타락시키고 죄인과 한 몸으로 만든다. 구속자가 최고로 위엄있게 만든 몸에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악한 몸을 죄를 지어 더 악한 몸으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Ⅴ. 이 죄에 대한 다섯째의 주장은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계신 성령의 전"(19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연합한 자는 한 영이다. 그는 하나님께 바쳐졌고 성별되었고 그의 뜻대로 사용되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사로잡히고 점령되고 거하게 된다. 이것이 성전의 뜻이다.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며 성별되었고 바치는 곳이다. 그러한 성전인 참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바쳐졌으며 그에 의하여 그를 위하여 소유되었다. 하나님께 팔린 몸이다.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라." 우리의 몸은 하나님을 위하여 만들어주시고 매매되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그의 성전을 더럽히고 창기에게 넘겨 주겠는가? 무서운 신성 모독이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도적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게 유지해야 됨을 명심하자.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거하시기에 적합도록 보존되어야 한다.
Ⅵ. 바울은 "그의 것인 우리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의무로써 주장을 세운다. 하나님은 이 둘을 만드시고 사시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더럽혀지거나 떨어지거나 다른 곳에 갖다 주어서는 안 된다. 아니 우리의 몸은 주님이 사용할 그릇으로 보존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것인 우리의 몸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금해야 한다. 육체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금해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시었다(마 5:28). 몸과 영이 깨끗이 보존되어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영광을 받아야 한다. 그 둘이 짐승과 같은 죄로써 더럽힐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 당신의 몸을 창조자이시며 주인 그의 영광과 봉사를 위하여 사용하라.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를 지배할 수가 없다. 우리의 쾌락으로 사용할 수가 없고 그의 영광과 뜻대로 사용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를 섬겨야 한다"(행 2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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