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적 문안(1)(로마서 16:1-16)
Ⅰ.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그렇게 생각들 하고 있다) 친구 "뵈뵈"에 대한 추천(1, 2절). 이 여자는 재산이 좀 있어서 로마에 볼 일이 있었던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그도 로마에 초행이라서 바울은 로마 교우들에게 그녀를 부탁하고 있다. 이것은 그것은 참된 우정의 표시다. 바울의 태도는 참으로 공손하다. 참된 종교는, 그걸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사람을 무례하게 만들지 않는다. 예절과 기독교는 전적으로 일치한다.
1. 그는 그녀를 칭찬하고 있다.(1) 바울의 자매로써, "우리 자매 뵈뵈" 물론 혈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맺어진 자매다.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는 자신의 자매요 바울을 사랑하는 그의 사랑을 받는 자매이니 순결하고 정숙하며 영적인 사랑을 주고 받는 자매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남녀가 따로 없고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갈 3:28). 그리스도나 그의 사도들도 경건한(그러기에 존경할만한) 여지들을 절친한 친구로 두고 있었다.
(2) "겐그리아 교회의 일군" 직책상 종(dia,konon)이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는 직책이 아니라(이것은 여자들에게 금지되어 있었다)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직책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병든 자를 돌보며 교회 명부에 올랐던 과부라고 생각한다(딤전 5:9). 그러나 거기 나오는 인물들은 나이 많고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여기 뵈뵈는 재산이 좀 있는 여인인 것 같다. 돈이 있지만 교회의 일군되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그다. 아마 그들은 그녀의 집에서 모임을 갖기도 하며 그녀는 그들을 대접했을지도 모른다. 특별히 손님 접대를 말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교회를 섬기는 데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되고 먼 날 우리에게 유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겐그리아는 고린도에서 약 2.4km 떨어진 곳에 있은 작은 항구 도시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도 고린도처럼 교회가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아주 인접해 있어서 고린도시에서와 반대로 고린도교회가 겐그리아에서 모였기 때문에 "겐그리아 교회"라 불렀을 가능성이 짙다(행 18:12). 이것은 마치 빌립보 교인들이 그 도시 외곽 물가에서 모임을 가졌던 것과 같다(행 16:3). 마찬가지로 파리 개혁 교회도 이전에 그들이 도사 밖에서 모였던 지역 이름을 따서 "샤렌롬 교회(the church of charentom)라고 부르고 있다.
(3) "여러 사람의 보호자"이자 특별히 바울을 많이 도와 준 장본인(2절). 그녀는 궁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 주었으니 능력있는 여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온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고 도와 주었으니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했다. 바울이 특별히 자기에게 베푼 그녀의 온정에 감사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이다. 바울이 그녀를 이렇게 기록에 올리는 것은 그녀에게 큰 영광이었다. 이 편지가 읽혀지는 곳마다 그녀의 바울에 대한 온정이 기억되기 때문이다.
2. 그는 그녀를 그들이 특별히 존대함으로 보살펴 주고 온정을 베풀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1) "주 안에서…… 그를 영접하라. 그녀를 환대하고 영접하라." 바울의 이 한 마디면 어느 교회고 그녀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주 안에서 그를 영접하라. 곧 주민을 봐서 그를 영접하라. 그리스도의 종이요 친구인 그를 받아들이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그의 일이라면 모두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예절로" 받아들이라. 아니면 이것을 성도들이 그처럼 사랑과 존경 및 애정으로 영접을 받는 게 "성도들에게 합당하기에" 하는 식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친구들뿐 아니라 남들을 위한 관심도 개발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다. 관심이 있어야 선행을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2)"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그녀에게 상업적인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궁중에서 처리할 법률적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로마에 초행자요 더우기 여자이기에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으며 이 점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사업에 도움을 주고 받는 게 당연하다. 특별히 낯선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 얹혀 사는 동물이요 언제 우리가 뭘 필요로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울은 남을 많이 도와 준 바로 그 사람을 도와 주라고 얘기하고 있다. 물을 뿌리는 자는 본인도 물뿌림을 받게 마련이다.
Ⅱ. 다른 서신과는 달리 특별히 몇몇 친구들에게 보내는 안부가 적혀 있다. 모든 교회 일처리만 날마다 하기도 머리가 복잡할 터인데 바울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걸 보아 그의 마음은 사랑이 넘쳐 흐르는 가운데 각 개인의 장점을 들춰가며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문안하라"(avspa,sasqe). "그들에게 내가 기억하고 사랑하며 잘되기를 바라더라고 알려다오" 하는 식이다. 이 문안에서 몇 가지 살펴 볼 게 있다.
1. 바울이 특별히 고맙게 여기는 훌륭한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들은 본래 로마에 살고 있었는데 글라우디오의 칙령으로 거기서 추방을 당했었다(행 18:2). 고린도에서 바울은 이들과 함께 일하며 천막 만드는 일도 같이 했다. 얼마 후에 그 칙령의 위기가 지나자 그들은 로마로 돌아갔는데 이들에게 그는 안부를 전하고 있다. 그는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들은 바울의 공적인 전도집회를 성공하도록 도와 준 사람들이다. 이 일례를 들자면 그들이 아볼로를 가르친 경우다(행 18:26). 그들은 전 가족이 합심하여 충성된 사역자들을 도우며 이웃 영혼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한 본보기다. 아니 그들은 보통 이상으로 바울에게 극진했다. 그들은 바울을 아끼기 위해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고린도에 같이 있는 동안 바울은 큰 위험을 당했는데 분노한 대중의 미움을 무릅쓰고 그들은 바울을 보호해 주었다(행 18:12). 그들이 바울에게 이런 온정을 베푼 것은 오래 전 얘기지만 그는 그걸 마치 바로 어제 일처럼 다정하게 얘기하고 있다.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곧 이들 모두는 이 착한 부부가 이방 사도인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기에 신세를 지고 있다는 말이다. 바울이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로마 교우들로 하여금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하게 하려는 의도에서다. 그는 마찬가지로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5정, 새번역)에도 안부를 전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면 집에서 모이는 교회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얘기와는 달리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그들의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모임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법궤 덕분에 복을 받을 오벧에돔의 집과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교회를 하나님 예배를 지키는 신앙이 독실한 가정이라고 본다. 신앙이 한 가정을 다스릴 때 그것은 그 가정을 교회를 만든다. 아마 이 일에 있어서 이 가정의 아내인 브리스길라의 신앙이 뛰어났던 것 같다. 그래서 가끔 그의 이름이 먼저 쓰여지기도 한다. 사정을 잘 보살피는 덕있는 여인은 한 가정의 신앙을 북돋는 데 있어 큰 몫을 차지한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에 잠간 있을 때도 그들 집에서 교회를 모였다(고전 16:19). 참으로 경건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 신앙 생활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그의 장막을 옮길 때마다 그의 제단을 새로 만들었다(창 13:18).2. 에베네도 안부(5절). 그는 그에게 "나의 사랑하는"이란 말을 쓰고 있다. 사랑의 법이 마음에 있으면 온정의 법이 그 혀에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나타내고 사랑을 조장하기 위해 친근한 언어를 사용하는 게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그는 암블리아에게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나의 사랑하는"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모두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시다. 이것은 바울이 삼층천에 갔다 왔다는 증거다. 그는 사랑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었다. 그는 에베네도에 대하셔 더 말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는 "아가야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였다.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신자 중에 하나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맨 먼저 돌아온 사람이다. 곧 그는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첫 열매였으니 풍성한 추수에 대한 보장이기도 했다. 아가야의 주요 도시인 고린도에서 하나님은 믿는 사람을 많이 두셨다(행 18:10). 처음 부르실 때 포도원에 맨 먼저 나온 자들은 특별한 존경을 받을 만하다. "스데바나의 집"도 마찬가지로 "아가야의 첫 열매"로 얘기되고 있다(고전 16:15). 아마 에베도는 이 식구 중에 하나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첫 세 명"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혼자서 첫째가 아니라 아가야 지역의 "처음 깎는 양털" 중에 하나였다.
3. 마리아와 그밖에 선한 일에 근면했던 사람들. "많이 수고한 마리아. 참 사랑은 수고하는 걸 주저하지 않고 그걸 즐긴다. 사랑이 많은 곳에는 수고도 많다. 어떤 사람들은 마리아가 지금은 로마에 있지만 바울 다니는 몇몇 지역에 같이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도와 주었다고 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녀가 바울의 친구들과 동역자들에게 아끼지 않은 수고를 자기에게 준 수고로 받아들여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또 각자의 위치에서 활약하며 주 안에서 수고한 두 여인 드루배나와 드루보사(12절)에게 그리고 누구보다도 주의 일에 활약이 컸던 여인 버시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다.
4. 안드로니고와 유니아(7절). 이들을 부부로 보는 게 나은 것 같다. 특별히 두 번째 이름이 여성이기 때문에 이들이 둘 다 남자라느니 형제라하느니 하지만 그렇게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1) 그들은 바울의 "친척"이었다. 헤로디온도 마찬가지다. 신앙은 우리 친척과의 관계를 멀리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를 바로잡고 깨끗하게 하며 개선하는 것이다. 특별히 그들이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관계될 때는 더 더욱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마련이다.
(2) 그들은 그와 함께 감옥 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고난의 동무는 서로의 영혼과 애정을 보다 밀접하게 한다. 사도행전에서는 빌립보를 제외하고는 바울의 옥살이 얘기가 나오지 않다가 여기서 나오고 있다(행 16:23). 그러나 바울은 수없이 옥살이를 난 사람으로(고후 11:23) 거기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만난 것 같다. 다른 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그의 멍에를 지는 데 있어서 멍에동무(yoke-fellow)였다.
(3) 그들은 "사도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새번역). 그건 재산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식과 은사와 은혜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진실성과 독실함을 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사도들에게 평판이 좋았던 것이다.
(4)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바울도 그리스도 승천 1년 후에 믿었지만 그들은 바울을 앞서고 있었다. 바울은 누가 앞섰으면 그걸 그대로 인정하고 들어갔다.
5.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아벨레(10절). 이보다 더한 칭찬이 또 있을 수 없다. 그는 그의 신앙에 있어서 진실성과 강직함을 인정받은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의 친구들과 원수들에게 단련을 받아 정금같이 된 자였다. 그는 지식과 판단, 용기와 인내에 있어서 인정을 받은 자였으니 이런 사람은 맘 놓고 믿어도 될 사람이었다.
6. 아리스도볼로와 나깃수, 그리고 그의 가족(10, 11절). 가족 중에도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다. 그가 앎이 있는 사람은 하나도 배놓지 않고 기억하고 문안하는 꼼꼼함은 배울 만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때 아리스도볼로와 나깃수는 없었거나 최근에 죽었다고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나깃수라는 사람은 글라디오의 얘기와 함께 나오는 식구 많은 돈 많고 악한 친구라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의 가정에도 선한 종들이 있었던 것 같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얘기다(딤전 6:1, 2). 부유한 주인은 지나쳐 따돌려지고 불신 가운에 멸망하는데 불쌍한 종은 부름받고 선택받아 신실하게 되는 것이다. 옳소이다, 그게 아버지의 뜻이옵니다.
7.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13절). 그는 모범 그리스도인이었으니 그의 은사와 은혜는 그가 영원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받았다는 걸 증거해 주었다. 그는 정직하고 성결하기가 천 명 중에 하나인 셈이다.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다." 육신으로는 그의 어머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과 영적인 애정면에 있어서는 나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이것은 뵈뵈를 가리켜 그의 자매라 부르며 디모데에게 노인 성도들을 어머니로 모시라고 당부하고 있다(딤전 5:2). 이 착한 여인은 이런 저런 기회에 바울을 어머니로서 보살피고 시중들었기에 바울은 그걸 감사해 하며 어머니로 부르고 있다.
8. 나머지 사마들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가족 관계나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있어 기뻐할 수 있다는 것도 성도들의 큰 재산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서로들 위하고 아끼라고 당부한다. 어느 누구하나 소홀히하고 잊은 걸로 맘 상해하지 않기 위해서 나머지는 모두 형제와 성도라는 말로 안부를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 사회에는 조그만 모임들이 각각 있어서 서로의 사랑을 나누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한다. 바울이 인사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 베드로의 이름은 없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당시 베드로가 로마 감독이 아니었다는 의구심을 일으키게 한다. 만일에 그가 감독이었다면 그가 거기 있었을 것이요 또 바울이 이렇게 긴 편지를 쓰면서 그의 이름을 대지 않고 지나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서로 사랑하고 영접할 것을 당부하며 끝을 맺고 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서로의 사랑을 북돋아 주모든 것이요 서로를 아끼게 만든다. 그러기에 바울은 서로 키스로 인사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거룩한"이란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방탕한 키스와 반대되는 정숙한 키스요, 유다의 키스와 같이 반역적인 키스와 반대되는 진실한 키스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안부를 전함으로 끝을 내리고 있다(16절).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곧 내가 지금 함께 있는 교회와 내가 관계하고 있는 교회가 기독교 사랑의 고랑에 하나로 묶인 채 너희들에게 그들의 사랑을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것이 성도들의 교제를 유지하는 방법 중에 하나다.
사도적 문안(2)(로마서 16:17-20)
Ⅰ. 경고 그 자체가 아주 공손한 말로 시작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그는 하나님의 유업을 주장하는 자로서 명령하는 게 아니라 아끼는 마음으로 권면하고 있다. 바울의 권고야말로 얼마나 진지하고 호감이 가는 권고인가!
1. 그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위험을 직시하라고 가르친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라." 우리 주님께서도 분쟁을 일으키고 실족케 하는 자들을 내다 보시며 그걸 가져 오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말씀하셨다(마 18:7). 교회를 분쟁과 올무로 괴롭히는 자들, 이 책략을 주장하고 강요하는 자들, 분쟁하고 넘어지게 하는 엉뚱한 교리를 소개하고 퍼뜨리는 자들, 교만과 야망 따위로 무분별하게 형제들을 이간질하는 자들, 사특한 논쟁, 단조, 악평 따위로 그리스도인들의 애정을 이쪽 저쪽에서 갈라 놓는 자들, 이런 자들이 "우리가 배워 온 교훈"에 어긋나고 그것과 다른(para. th.n didach.n이란 뜻에는 이런 의미도 있다) 분쟁과 올무를 일으킨다. 우리가 성경에 가지고 있는 건전한 교리와 형태를 달리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분쟁과 올무를 불러들이는 문이다. 일단 진리가 내평개쳐지면 통일과 평화는오래가지 않는다. 이처럼 분쟁과 올무를 일삼는 자들을 "살피라"(skopei/n). 그들이 취하는 방법, 그들이 몰고 가는 목적을 관찰하라. 이런 사람들에게 빠져 있는 위험을 내다볼 줄 아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들의 계획은 악독해도 그들의 핑계는 언제나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그저 표면적인 분쟁과 올무만 볼 서이 아니라 그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원천으로 가보라. 거기에는 필경 이 분쟁과 올무를 야기시키는 장본인들이, 이 전쟁과 쟁투를 일으키는 정욕들이 자리잡고 있을 거시다. 일단 위험을 발견하면 절반은 예방된 셈이다.2. 그는 그것을 피할 것을 가르친다. "저희에게서 떠나라. 그들에게 감염되지 않도록 그들과의 불필요한 교제와 거래를 피하라. 분열을 조장하는 관심거리는 거들떠보지도 말고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진리에 파괴적인 원리나 실천은 받아들이지 말라. 이것이 경건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 그들의 말은 암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바울이 특별히 유대 교사들을 경계하라는 걸로 본다. 그들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모세 율법을 지키고 그 필요성을 강조한 자들로서 어느 곳에서고 자기 제자들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바울은 여러 서신을 통해 이들을 경계하라고 권하고 있다.
Ⅱ. 이 경고를 강조하는 이유.
1. 이 유혹자들의 악한 계략(18절). 그들이 악하면 악할수록 우리는 더 더욱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이들을 두 가지 면에서 표현하고 있다.(1) 그들이 섬기는 주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처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는다. 그들의 핑계야 어떻든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그의 뜻을 조장하지도 실천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를 주요 주인이라고 부르는 자들 가운데 그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동떨어진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자기 배만 섬긴다." 곧 그들의 육적이요 세속적인 관심을 생각할 뿐이다. 그들이 비위맞추는 것은 천한 정욕뿐이다. 교만, 야망, 시기, 탕진, 방탕, 이런 것들만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배"다(빌 3:19). 자신들의 배를 섬기고, 여기에 무슨 경건이 있겠는가, 감각적인 취향을 달래는 것만이 그들 생활의 전부요 여기에 다른 모든 목적과 계획이 종속되는 그러한 자들이 섬기는 주인이야말로 얼마나 천박한 주인이며 그리스도와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인가.
(2) 그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택하는 방법.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그들의 말은 성결과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장하며(이빨에서부터 겉모양으로 경건하기는 참 쉽다) 그들이 타락한 교리를 주입시키려 드는 자들에게 온정과 사랑을 가장하기 마련이다. 더할 수 없는 해독을 품고 있으면서 더 할 수 없이 정중한 태도다. 뱀도 이처럼 번드레한 말로 이브를 속였다. 그들은 그 마음을 속여넘겨서 그 머리를 타락케 하는 것이다. 간사하게 애정을 사면서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유혹하는 영이 날뛸 때는 우리의 마음을 열심히 지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그들의 올무에 걸려들기 쉬운 경향을 가진 우리이기에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 "너희 순종함이 널리 들리는지라. 모든 교회가 너희는 다루기 쉽고 자발적이며 유순하다고 소문이 나 있다."
(1) 그러므로 이 유혹하는 교사들은 더욱 너희를 공격하려 할 것이다. 악마와 그 추종자들은 번창하는 교회, 번창하는 영혼에 특별한 악의를 품고 있다. 보물이 가득 담긴 것으로 소문난 배 주위에는 해적들이 들끓게 마련이다. 대적자와 원수들이 노리는 건 약탈물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경계하라(요이 5절). "너희가 유순하다는 말은 거짓 교사들에게도 소문이 나 있으니 자기들의 말도 잘 듣나 보기 위해 찾아올 것이다." 신앙의 확신으로 마음이 온화해진 자들에게 덤벼들어 그들을 휘어잡는 게 유혹자들의 통상수법이다. 시온을 향해 얼굴을 들고 그리로 가는 길에 이 바위에 걸려 치명적으로 넘어진 자들의 수가 그 얼마이던가! 따라서 이 양떼들을 갑절로 보호하며 먹이고 튼튼한 터를 닦아주며 특별히 어린 양떼의 길을 상냥하게 인도하는 게 사역자들의 본분이다.
(2) 그들이 순종적이었지만 그들은 이 유혹자들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이 점을 바울은 아주 조심스레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의심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더 잘 해보라는 식의 간청이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하고 기뻐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그는 자기의 경고가 먹혀 들어가게 하기 위해 그들을 더욱 칭찬하고 있다. 우리 친구들에 대한 거룩한 열성은 그들에 대해서 갖는 거룩한 기쁨과 일치하게 마련이다. "너희들 스스로는 아주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안전한 게 아니다.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천성적으로 선량하고 자발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저 유혹자들에게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온순한 기질은 선한 통치를 받을 때는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주 위험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그는 두가지 일반적인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1]"선한 데 지혜로울 것." 곧 하나님의 진리와 길에는 능숙하고 지혜로우라는 얘기다. "영들을 시험하고 모든 일을 헤아려 보아 선한 것만 든든히 붙잡을 수 있게 지혜로우라." 좋은 진리, 좋은 임무, 좋은 사람들에게 집착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 사람도 미혹을 받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우라"(마 10:16). 무엇이 정말 진실이고 위장된 것인가를 지혜롭게 분별하고 기회를 선용하라. 우리 주위에 속이는 자들이 너무 많을 때일수록 제 길을 가기 위해 지혜자의 지혜가 더욱 필요하다(잠 14:8).
[2]"악한 데 미련할 것." 곧 "속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지혜롭되 속이는 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라는 얘기다. 그것은 어떠한 악이든 고안하지 않고 거기에 어울리지 않으며 그걸 실천할 줄 모르는 거룩한 순진함이다. 원 뜻은 "무해한"(avkerai,ouj)이다. 곧 섞이지 않고 악의가 없는 것이다.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고전 14:20). 그리스도인에게는 뱀의 지혜가 어울리지만 능글맞은 뱀의 간계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비둘기 같이 순진"해야 한다. 진리에 거슬리는 일이라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쩔쩔 매는 게 순진한 사람의 지혜다. 바울이 이처럼 로마 교회가 그 지조를 지킬 것을 간청하는 것은 그 교회가 유명하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도시로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시선이 그리로 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 잘못이 휩쓴다면 그건 아주 좋지 못한 선례가 되어 다른 교회에 악영향을 끼치고 말 것이다. 실제로 후에 저 수도에서 큰 배도가 일어났을 때 그랬다. 지도적 교회의 실수는 지도적 실수가 되고 만다. 로마 감독이 하늘에서 "큰 별"로서 떨어졌을 때(계 8:10) 그 뒤를 쫓아서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갔다"(계 12:4).
3. 마지막 날에 우리가 거둘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이것은 우리의 경계 태도와 열심을 되살리고 격려하기 위한 말씀이다. 그것은 아주 복된 약속이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20절).(1) 하나님의 명칭. 그는 그 분을 가리켜 "평강의 하나님" 모든 선의 원저자요 시혜자로 부르고 있다. 우리가 영적 싸움의 승리를 거두려 할 때 유일한 것은 하나님을 전능한 만군의 여호와로만 볼 것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으로 보는 일이다. 우리와 더불어 평화로운 하나님이요 우리를 위해 평화를 이루시고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다. 승리는 전쟁의 하나님보다는 평화의 하나님에게서 오기 쉽다. 왜냐하면 모든 싸움 가운데 우리가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평화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의 입장에서 분열과 올무를 일으켜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고 어지럽히는 모든 불순분자들을 억제하고 말살하실 것이다.
(2) 하나님에게서 그가 기대하는 축복은 사탄에 대한 승리다. 앞서 거짓 교훈과 유혹하는 영들에 대한 얘기가 있었지만 그 주모자는 사탄이며 이 사탄이 모든 영혼을 훼방놓고 파괴하려들며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순결과 거리를 멀게 하며 이곳에서의 하늘의 평화와 이후의 하늘 소유를 멀어지게 하는 장본인이다. 유혹자요 파괴자며 속이는 자인 이 사탄을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실 것이다." 그는 앞서 그들의 순진성을 경계하라는 얘기를 한 바 있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의 약점과 어리석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이 올무를 어떻게 피해 나가지? 우리 원수가 우리보다 더 끈질기지 않을까?" 하고. "아니다"하고 그는 대답한다. "두려워 말라. 네 힘과 지혜 가지고는 이길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평화의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해 주실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을 통해 넉넉히 이기고 남을 것이다."
[1]이 승리는 완전하다. "그가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 메시아가 약속한 맨 처음 약속을 두고 한 말이다(창 3:15).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박살낼 것이라는 이 약속은 성도들이 사탄을 물리치고 이기도록 힘을 주시는 일에서부터 매일 매일 성취되어 가고 있으며 선택의 은혜에 속한 모든 자들이 모든 흑암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승리하여 영광에 이를 때 완전 성취될 것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왕들을 정복하고서 이스라엘의 장군들에게 그들을 발로 짓밟으라는 명령을 내렸다(수 10:24). 마찬가지로 우리의 여호수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충성된 종들과 병사들에게 사탄의 목을 발로 밟고 영적 원수들을 깔아 뭉게며 승리하게 능력을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승리를 쟁취해 놓으셨으며 강한 자의 무장을 해제시켜 무력하게 만들어 놓으셨으니 우리의 할 일은 그 승리를 그대로 따르며 노획물을 나눠 갖는 것 뿐이다. 여기에 힘을 입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자. 우리의 싸움은 패배한 원수를 상대로 한 것인만큼 우리의 승리는 얼마 남지 않았다.
[2]이 승리는 속히 올 것이다. 그는 그걸 "속히" 해내실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오실 분이 오실 것이다. 그는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고. 사탄은 승리하고 우리는 패배한 것만 같아 보여도 평화의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셔서 이 일의 지름길을 가르시고 말 것이다. 병사들이 전쟁의 끝이 가까웠다는 걸 알면 크게 사기가 왕성해지기 마련이다. 혁혁한 승리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저들이 참 사랑과 연합으로 즐거워하는 시기로 보기도 하고 또 더러는 로마 제국의 권력층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일어난 박해로 보기도 한다. 콘스탄틴은 교회의 붉은 원수들을 짓밟아 꼼짝 못하게 하고 교회는 그의 통치 아래 들어갔었다. 이것은 현재 완전 승리의 보증으로 누리고 있는 승리와 더불어 모든 성도들이 하늘에 이르러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완전 승리에 적용하는 게 합당하다. 그러므로 잠깐 동안만 신앙과 인내를 지키라. 일단 홍해를 건너고 나서 뒤돌아보면 우리의 영적 원수들이 모래밭에 죽어 딩구는 걸 볼 것이요 그 때 우리는 승승장구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축복을 덧붙이고 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너희에게 그리스도의 선한 뜻이 계속 머물며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선한 일이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단사설의 올무를 이겨내는 최선의 방파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면 누가 우리를 대적해서 승리할 것인가?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 바울은 친구뿐 아니라 은혜에 은혜를 입은 사역자요 사도의 입장에서 이처럼 권위 있게 이들을 축복하고 있다. 이것이 24절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다.
사도적 문안(3)(로마서 16:21-24)
앞에서는 로마 교회의 여러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이제 자기와 함께 있는 몇몇 사람들의 안부를 전한다. 이것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성도들간에 우의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들에게 알려진 이름을 추천하므로 본 서신에의 친근감을 더하게 하기 위해서다.
1. 그의 특별한 친구들이자 로마 교우들에게도 알려진 몇몇 사람들. "나의 동역자 디모데." 바울은 가끔 디모데를 자기 아들이라고 불러 낮게 얘기하지만 여기서는 자기와 대등한 동역자로 얘기하고 있다. "누기오"는 안디옥 교회에서 유명한 구레네 사람 루기오인 것 같다(행 13:1). "야손"은 바울을 대접하므로 고통을 당한 데살로니가의 유명한 교인이다(행 17:5, 6). "소시바더"는 베뢰아 사람 소바더와(행 20:4)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을 가리켜 바울은 자기 친척이라고 부르는데 비단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뜻에서만이 아니라 그와 혈연이 가까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마 바울은 가문이 좋아서 가는 곳마다 친척을 많이 만났던 것 같다. 우리 친척이 성결하고 쓰임받는 걸 보는 건 큰 위로다.2. 바울의 필생(22절).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 바울이 필생을 쓰는 것은 무슨 정중한 티를 내고 싶어서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의 필체가 나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점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과하고 있다(갈 6:11). "큰 글자로(phli,koij gra,mmasi). 아마 이 더디오는 실로와 동일 인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실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세째"라는 뜻이고 더디오는 라틴어로 그 동일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더디오는 바울이 불러주는 대로 썼던가 아니면 바울이 거칠게 쓴 것을 다시 깨끗하게 옮겼을 것이다. 교회와 교회의 사역자에게 베푼 가장 하찮은 일이라도 칭찬없이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이처럼 자기 손으로 이런 편지를 쓴다는 것은 더디오에게는 큰 영광이었다.
3. 그 밖에 몇몇 이름있는 그리스도인들(23절). "나의 식주인 가이오." 이 사람이 더베의 가이오인지 (행 20:4), 마게도냐의 가이오(행 19:29)인지 아니면 고린도의 가이오(고전 1:14) 아니면 이들 중에 어느 사람을 상대로 요한이 그의 셋째 편지를 썼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어쨌든 이 사람의 호의를 바울은 매우 칭찬하고 있다. 자기의 식주일 뿐 아니라 "온 교회의" 식주였다. 기회 있는 대로 모두를 접대하고 자기 집을 교회 집회 장소로 제공했으며 특별히 낯선 사람들에게 후했던 그다. "이 성의 재무인 에라스도" 이것은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를 말한다.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 관리나 재정을 맡아 본 명망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권력자나 귀족층 중에서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은 건 아니지만 더러는 부름을 받는다. 그의 재산과 지위가 바울의 사역을 돕는 일을 막지 못했다. 그는 디모데와 함께하기도 하고(행 19:22) 똑같이 언급되기도 한다(딤후 4:20). 시청의 재무 담당관이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가 되는 건 오명이 아니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구아도도 언급되고 있으며 형제라 불러지고 있다. 아버지와 그리스도가 하나이듯이 우리 모두는 형제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묘사와 사도의 송영(로마서 16:25-27)
이제 사도는 엄숙하게 복되신 하나님께 장중한 영광을 돌리며 본 장을 끝내고 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에 모든 찬양과 영광이 그분에게서 끝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로마 교우들에게 하나님 찬양의 혼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셈이다. 자기 인생의 목적을 바로 이 편지의 목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Ⅰ. 하나님의 복음의 묘사.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능력이 영혼을 세우는 방편으로 얘기하고 있다. "나의 복음으로 너희를... 견고케 하실." 바울이 이걸 자기 복음이라고 말하는 건 그게 자기가 전파한 복음이요 또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그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로마서에서 강론한 교리를 두고 말한다고 얘기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도들의 전도와 서신을 두고 한 말이다. 그 중에도 바울이 으뜸이었지 않은가. 그들의 말을 통해(요 17:20) 말씀이 그들에게 위탁되었다. 사역자들은 사절단이요 복음은 그 임무다. 바울의 머리와 마음에는 너무도 복음이 꽉꽉 들어차 있어서 틈만 있으면 그것의 본질과 우월성을 들추지 않을 수 없다.
1.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 말씀 전파자였으며 주님께서 처음 이걸 시작하셨다(히 2: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 사업을 너무도 기뻐한 나머지 스스로 몸소 선포자가 되신 것이다. 또 그리스도는 복음의 주제다. 전체 복음의 개요와 본질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주님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영혼을 굳게 세워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손쉽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2. 이것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복음의 주제는 신비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과 구원은 그 바탕, 방법, 그 결과에 있어서 이론의 여지없이 경건의 큰 비밀이다(딤전 3:16). 이것은 복음의 존귀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로 조작된 통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경륜의 위대한 결과요 거기에는 지혜를 능가하는 헤아릴 수 없는 높낮이가 있다. 그것은 천사들도 그 밑바닥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그런 비밀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고의적으로 이 큰 구원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이 비밀의 대부분이 우리를 하늘에 데려갈 만큼 명백하게 풀어져 있다는 것이다.
(1) 이 비밀은 창세 이후로 비밀로 지켜졌다. 그것은 "영원부터 침묵 속에 감싸여져 있었다"(Cro,uoij aivwni,oij sesighmevnou). 그것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도 최근의 고안물도 아니요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목적에 따른 것이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이 비밀은 하나님에게 숨겨져 있었다(엡 3:9). 본인은 이것을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하는 식으로 번역해 본다. 구약의 모든 시기를 통해 이 비밀은 이것을 가리켜 보이는 모형과 의식 율법의 그늘, 그리고 선지자들의 흐릿한 예언으로 비교적 친밀하게 간직되어왔기에 그들은 이 모든 것의 최종 목적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고후 3:13). 이처럼 이것은 대대로 비밀로 여겨 왔으니 심지어는 흑암 중에 앉아 있어 그걸 눈치채지 못한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제자들마저도 그의 부활 승천 이전에는 이 구속의 신비에 대해 오리무중이었으며 그들의 이 구속에 대한 견해는 아주 흐리멍텅했다. 이것은 이처럼 많은 세대에 걸쳐 비밀이었다.
(2) 그러나 이제 이것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휘장은 걷히고 석양 노을은 지났으니 복음의 빛으로 생명과 영생이 들어오고 의의 태양이 이 세상에 떠오른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혼자만 독점적으로 알고 있는 체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게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밝히 드러나 보이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왜냐하면 사건 자체가 구약의 예언에 대한 최선의 주석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성취되었기에 자연히 설명되는 것이다. 선지자의 전파는 이 신비에 관한 한 자기들이 살고 있던 당시에는 어느 정도 흐릿하고 모호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성경, 곧 그들이 뒤에 기록으로 남긴 것들은 이제 명확히 그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이 비밀이 알려지게 되었다. 구약은 신약의 계시에서 빛을 빌릴 뿐 아니라 그리로 다시 빛을 돌려 준다. 신약이 구약을 설명한다면 구약은 또 신약을 설명한다. 이처럼 구약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에게"(계 10:11) 예언하고 이제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 이제 그리스도는 구약의 밭에 숨겨진 보물이었다는 게 드러나게 됐다. 모든 선지자들은 그 분을 증거해 보여주고 있다(눅 24:27).
(3) 이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쫓아" 밝히 드러났으니 곧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이 있었으며 이것이 때가 차자 처음에는 그리스도에게 위임되고 다음에는 사도들에게 위임되어지는 가운데 그렇게 된 것이다. 사도들이 복음 전도하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계명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왜 이 비밀이 그렇게 오래 비밀로 있다가 이제사 밝혀졌는가?"하고 반문하지 않도록 그는 절대 주권자시오 자기 일을 그 어느 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돌리고 있다. 영원한 하나님의 명령만으로도 복음의 사도들과 사역자들의 복음 전파를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영원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 강조되고 있다.
[1] 그는 영원 전부터 계신다. 곧 이 말은 당신께서 이 비밀을 창세 이후로 비밀로 숨기셨다가 최근에사 드러내셨지만 그러나 그는 이미 세상들이 있기 전에 영원 전부터 이것을 생각해 두셨다는 얘기다. 기록된 말씀에 있는 약속과 언약들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원본 격인 약속과 언약들의 복사에 불과하다.
[2] 그는 영원까지 계신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 계시를 영원히 계속하실 것이요 그 영원한 결과도 계속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무슨 새로운 계시가 없나 하고 혈안이 되어 동분서주할 것이 아니고 이것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4) 그것은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되었다." 이것은 계시의 범위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유대 민족에게만 하나님이 알려졌지만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땅끝까지 모든 세계 민족에게 구원의 주인공이시다. 그 목적은 간단하다. 믿어 순종케 하려는 것이다. 곧 그들이 그걸 믿고 순종하며 그걸 받아들여 그 지배를 받는 것이다. 복음이 드러나게 된 것은 논쟁거리로 삼으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순종하라는 뜻에서다. 믿어 순종케 한다는(믿음의 순종) 말은 믿음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요(행 6:7) 믿음의 은혜에 의해서 생긴 순종이다. 쉽게 말해보자. 무엇이 올바른 신앙인가? 순종을 낳는 신앙이다. 무엇이 올바른 순종인가? 신앙에서 나오는 순종이다. 복음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둘을 가져오는 것이다.
Ⅱ. 복음의 임자인 하나님께 대한 송영(27절). 이것은 그에게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고 그분이 영광스런 하나님이라는 걸 감사드리며 마땅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를 칭송하고 우리가 영원에 이를 때 천사들과 같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요 그에게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1. 이 찬양의 본질. 하나님에게 감사드리므로 우리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은총을 확고하게 붙잡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므로 우리는 그 분 자신 속에 있는 그의 속성들을 붙잡는다. 그의 두 가지 속성이 여기 얘기되고 있다.(1) 그의 능력(26절).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성도들을 붙잡아 세워 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들 속에 있는 넘어지려는 경향, 그들을 뒤집어 엎으려는 영적 원수들의 끈질김, 그들이 처하게 된 뒤숭숭한 시대, 이 모든 걸 생각하면 그들을 견고케 할 것은 바로 전능(全能)밖에 없다. 성도들을 견고케 하는 이 하나님의 능력이야말로 우리의 찬양의 본질이요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유 24). 곧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실 자"에게의 찬양은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에게 이 능력의 영광을 돌리므로 우리는 여기서 얻는 위로가 크다. 곧 우리의 의심이 무엇이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견고케 하실 능력의 임자라는 확신이 그것이다(벧전 1:5; 요 10:29).
(2) 그의 지혜(27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지혜 없는 힘이나 힘없는 지혜는 모두 헛되고 성과가 없고 오직 이 둘이 합쳐질 때만 완전하다. 그 분만이 홀로 지혜로우시다. 곧 성자를 제쳐 놓고 성부만 지혜롭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 성령, 3위 한 하나님께서만 피조물과 비교할 때 지혜롭다는 얘기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제 아무리 지혜롭다지만 야생 망아지 새끼처럼 태어나며 천사들마저도 하나님과 비교할 때 어리석다는 핀잔을 듣고 있다. 그 분만이 완전하고 틀림 없이 지혜로우시니 그 분만이 본래적으로 지혜로우시다. 그 분만이 피조물의 모든 지혜의 원천이요 근원이며 어떠한 피조물도 흉내낼 수 없는 지혜의 모든 빛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약 1:17). 그에게만 힘과 지혜가 있으니 속는 자도 속이는 자도 다 그의 것이다.
2. 이 찬양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이런 식으로 읽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직 유일한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본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광이" 하는 식으로 읽고 싶다. 모든 타락한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로 가는, 그래서 받아들여지는, 모든 영광은 주 예수의 손을 거쳐 가야만 한다. 그 분 안에서만 우리의 사람됨과 실천이 하나님께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되고 또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의를, 오직 그분의 의만을 내세워야 마땅하다. 그는 우리의 모든 기도의 중보자이자 현재와 영원에 걸쳐서 우리의 모든 찬양의 중보자이기 때문이다.